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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별자리 그리기

  • 작성일 2010-08-16
  • 조회수 789

내 별자리 그리기

김애란


살면서 한 번도 궁금하지 않던 것이, 어느 날 문득, 못 견디게 궁금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무턱대고 부모님께 전화를 건다.

- 아빠.
- 어, 딸?
- 궁금한 게 있어.
- 뭐?
-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뭐 하는 사람이었어?
- 목수였어. 대목수. 네가 다닌 중학교도 네 증조할아버지가 지은 거야.
- 어. 정말?
- 그럼.
 

아버지의 대답은 짧고 간결하다. 당연하다. 아버지가 늘 알고 있던 사실을, 내가 처음 물어본 것뿐이니까.
 

- 그럼 할아버지의 첫째 형은?
- 목수.
- 근데 왜 할아버지는 농사지었어?
- 식구들이 다 목수면 집안에 한 명은 농사일 하는 사람이 있어야 했으니까.
- 그럼 할머니의 아버지는?
- 염전했지.


나의 물음 중에는 아버지가 대답할 수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아버지가 아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다. 친가는 말이 많은 집안이 아니다. 교양이 많은 집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내 자취방에 왔을 때, 제일 먼저 둘러보는 것이 한쪽 벽면을 다 차지한 책장이란 것을 안다. 어머니가 먹을거리를 챙겨주느라 냉장고에 머리를 박고 있는 사이, 아버지는 남몰래 좋아하되 어려워하는 여자를 대하듯 책장 주위를 기웃댄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얼굴에서, 아버지가 평생 안고 살았을 ‘배움’에 대한 미련과 갈망, 결핍과 주눅을 발견한다. 그러곤 짠한 마음을 숨기려 꺼낸다는 말이 고작 이런 것이다.
 

- 아빠. 혹시 보고 싶은 게 있으면…… 가져가도 돼.

 

어쨌든 나는 요즘 부쩍 궁금한 게 많고. 그때마다 고향집에 전화를 건다. 가장 최근의 통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아빠. 6.25 때 할아버지는 어디 계셨어?
 

자다가 갑자기 ‘왜 우리는 어릴 때 한 번도 어른들로부터 전쟁 얘기를 못 들어봤을까?’라는 의문이 들어서였다. 학교에서 줄기차게 ‘역사’라는 것을 배웠는데, 정작 그 시절, ‘내 가족과 조상들이 어디에 있었을까’란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도 없단 사실에 나는 조금 놀랐다. 그리고 그런 일은 그 뒤로도 숱하게 일어났다.


비슷한 대화는 어머니와도 종종 이어진다.
 

- 엄마.
- 또 이제 일어났냐?
- 궁금한 게 있어.
- 뭔데?
- 외할머니의 아버지는 뭐 하는 사람이었어?
- 왜 소설에 쓰려고?
- 아니. 그냥. 궁금해서.
- 뭐라더라. 어부였다던가? 잘 모르겠는데?
 

어머니도 외할머니에게 그런 걸 물어본 경험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곤 새삼 자기도 그게 궁금해지는 모양이었다.
 

- 외할아버지의 아버지는?
- 어, 그게 그러니까……
- 혹시 외할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직업도 알아?

 

대화는 그런 식으로 이어진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아님 할아버지의 형이나 외할머니의 언니들에 관한 이야기로. 그리고 나는 내가 나의 가족력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걸 깨닫는다. 내가 가족이랄까 친척이랄까 그런 것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내가 친가랄까 외가랄까 하는 것에 어떤 편견을 갖고 있는지 하곤 별 상관없이 말이다.

 

부모님은 ‘소설가’씩이나 된 자식이 자신들에게 뭔가 물어온다는 사실이 기쁜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그런 것들이 알고 싶어진 이유는 내가 작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건 어느 날 내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란 걸, 새삼, 진지하게 깨달은 뒤부터다. 시원(始原)이 궁금해지는 걸 보니 나도 나이를 먹는 모양이지만. 이 글이 애초 부탁받은 주제와 크게 멀어지진 않을 거라 믿는다. 

 

몇 달 전 <글틴>에서 ‘후회할꺼야’라는 꼭지의 청탁을 받고, 한동안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사회적으로 청소년들이 뭔가 마음껏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용기 내 그걸 해보라고 말하기 미안했다. 더군다나 내가 헤아릴 수 없는 각각의 형편과 사정들이 이 친구들을 더 울적하게 한다면 어떡하나 걱정됐다. 하지만 이런 걸 권해보는 건 괜찮겠다 싶었다. 나이와 성별, 계급이나 성적, 외모와 상관없이. 같이 이야기를 나눌 최소한의 사람만 있다면 가능한 일……. 말하자면 ‘가족 지도 만들기’ 같은 것 말이다. 시작은 단순하게. '아버지, 아버지의 할아버지는 뭐하는 사람이었어요?'라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하면 수월하지 않을까. 물론 다른 물음이어도 상관없다. 혹 부모님이 안 계시다면 이모나 삼촌, 또는 부모처럼 여기는 어른에게 물을 수도 있겠다. 정색하지 않고 뜨문뜨문. 연필로 가계도를 그리며 ‘이 사람은 그때 어디 있었나’ 상상해보기. 외따로 떨어진 행성들 사이에 선을 연결해 나만의 유전자 별자리를 그려보는 것. 일단 우주의 중심은 ‘나’로 정하고. 그러다 점점 여러 갈래로 퍼지는 뜻밖의 질문들과 마주하게 되는 경험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그걸 통해 반드시 가계의 자부심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가 어디로부터 흘러와 여기까지 왔는지 가늠해 볼 수는 있을 거라고.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많은 우연과 사연들이 있었는지 헤아려볼 수 있을 거라고. 그건 정말 특별한 일이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그리하여 얼마 전, 내가 아버지와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 아빠.
- 왜?
- 아빠는 어릴 때 뭐가 되고 싶었어?
- 선생님.
- 할아버지는 아빠가 뭐가 되길 바랐는데?
- 목수.
- 근데 왜 이발 배웠어?
- 동네에 아는 형이 있었거든.
- 아빠.
- 응?
- 젊었을 때, 계속 남에 가게서 일하다 잠깐 회사 다닌 적 있다고 했잖아?
- 응.
- 그렇게 몇 년간 기술 익히고 일 잘하다가 갑자기 왜 회사로 갔어?
- ……지겨워서.
 

마지막 말을 하기 전, 아버지는 잠시 머뭇댔다. 하지만 ‘지겨워서’라는 짧은 문장은 그 후로도 내 가슴에 오래도록 남았다. 나는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는 걸 처음 들었다. 묻지 않았다면 아마 영영 몰랐을 거다.

 

나는 종종 부모님 체신을 세워드리기 위해, 인터넷 검색만으로 충분히 정답을 알 수 있는 질문들을 던지곤 한다. 특히 요리. ‘엄마, 미역국 끓일 때 고기 먼저 볶아? 미역 먼저 볶아?’와 같은 사소한 물음들을 말이다. 하지만 어떤 질문들은 정말, 그분들만이 대답할 수 있고, 그분들밖에 대답할 수 없는 것의 형태로 끝끝내 남아 있곤 한다. 때론 지금 묻지 않으면 영원히 알 수 없게 되는 것들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음…… 그러니까 내 바람은 이거다. 내가 서른 넘어 이제야 묻게 된 것들을, 청소년 여러분들은 조금만 더 일찍 궁금해해줬으면 좋겠다는 것. 그리고 물어봐달라는 것.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말이다.
 

그리고 최근에 쓰다 지운 소설 속 문장 하나.
 

- 아버지가 죽자, 아버지께 묻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
 

그 문장 안에 비단 아버지뿐 아니라 내 죽음 역시 어려 있었다는 얘긴, 나중에 하기로 하고. 여러분들은 일단 빛나시기를. 당신들이 때때로 작고 끔찍한 괴물이 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충분히 빛나시기를. 그러다 이따금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별들도 살피시기를. 당신들이 이은 점선을 좇는 마음으로, 이토록 먼 곳에서, 조그맣게, 기뻐하며, 청한다. 


필자 소개


김애란(소설가)

1980년 인천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졸업

단편「노크하지 않는 집」으로 제1회 대산대학문학상 소설부문 수상 후 2003년 계간『창작과비평』봄호에 발표
2005년 대산창작기금 수상, 제38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작품집으로 『달려라 아비』(창비,2005), 『침이 고인다』(문학과지성사, 2007)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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