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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커피

  • 작성일 2010-12-08
  • 조회수 526


[제4회]

커피


강신주(철학자)


 

--- MENU ---


 

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 1,000원

에리카 종 1,000원

 

가스통 바쉴라르 1,200원

이하브 핫산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 오규원, 「프란츠 카프카」



홍대 근처 어느 아늑한 카페에서 어느 여제자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차가 막혀 카페에 도착한 건 약속시간보다 20분이 지난 다음이었지요.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었지만, 그녀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초조감을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초조감은커녕 그녀는 카페의 공간을 가득 채운 다미엔 라이스(Damien Rice)의 음악을 들으며 한껏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는 것 같았습니다. 짧은 순간이나마 그녀에게는 내가 불청객이 될 수도 있다는 착각마저 들었지요. 행복한 고독을 깨지 않으려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제서야 그녀는 무엇인가를 들킨 듯 조그만 동요를 숨기며 말합니다. “선생님, 오셨네요. 차가 많이 막혔지요. 천천히 오셔도 괜찮았는데.”
카페, 음악, 그리고 커피는 고독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짙은 커피 향을 떠올리게 됩니다. 역으로 커피 향을 들이키는 순간이나 커피 잔에 입을 대는 순간, 우리는 자신에게로 돌아갑니다. 앞에 누가 있어도, 이 순간 우리는 온전하게 홀로 있게 됩니다. 그래서 커피나 차는 우리에게 술과는 다른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다정한 사람들과 술을 마신다는 것은 ‘나’로 있겠다기보다는 ‘우리’로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표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커피를 함께 마신 친구와는 달리 술을 함께 마신 친구와는 어깨동무를 하고 왁자지껄 카페를 떠나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이지요.
많은 갓난아이를 돌보는 집단 보육시설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한 아이가 울면 모든 아이들은 동시에 울음을 터뜨리게 됩니다. 이런 흥미로운 사건은 무엇 때문에 가능한 것일까요? 아직 이 아이들에게는 자기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식은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다”라고 의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연히 자기의식은 “다른 사람은 내가 아니다”는 의식을 전제하지요. “제는 왜 울어. 시끄럽게.” 이렇게 반응할 수 있어야,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울었다고 해도 따라 울지 않게 됩니다. 이제 짐작이 되시지요. 술이 자기의식을 약화시킨다면, 커피는 자기의식을 강화시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의식이 강한 사람은 술을 싫어합니다. 그건 자기의식이 약화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지요.
커피나 차를 즐긴다는 것, 그건 자기의식의 투명한 상태를 원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스님들이 차를 좋아하거나, 시인들이 커피를 좋아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타자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면 자기의식은 약화됩니다. 고통이든 기쁨이든 타인의 감정에 젖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커피를 마신다는 것, 그것은 내가 나 자신으로 머물겠다는 의지입니다.


주체의 발견은, 섬과 같이, 언제나 세계 내의 그 밖의 모든 것, 즉 사물들이나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자신만의 세계의 발견이다. 이런 설명에 따른다면, 그런 발견은 위대한 고독의 경험이기도 하다.

 

 

- 『청춘기의 심리학(Psychologie des Jugendalters)』



독일철학자 슈프랑거(Eduard Spranger, 1882–1963)의 이야기처럼 주체란 자기의식, 즉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야”라는 의식을 가졌을 때에만 발생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이 순간 우리는 고독한 섬처럼 존재한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다른 사물이나 다른 인간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분한다는 것이지요. 슈프랑거가 “주체의 발견은 위대한 고독의 경험”이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래서 주체는 속으로나 겉으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의 생각은 전혀 달라.” 이처럼 독백(monologue)이 가능하다는 것, 그것이 주체가 가지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혼자라는 뜻의 ‘모노’와 이야기를 뜻하는 ‘로그’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단어가 ‘모놀로그’입니다. 그러니까 주체는 혼자 이야기할 수 있는 모놀로그의 존재라는 겁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체의 탄생이 ‘나’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의 이면이라는 점입니다. 당연하지요. 모놀로그가 가능하기 위해서 ‘나’라는 단어는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에게 나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바보같이.” 그렇다면 아이는 어떻게 ‘나’라는 말을 배웠을까요? 아이는 말을 지시(reference)에 의해 획득합니다. 사과를 가리키며 엄마는 ‘사과’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어느 순간 아이는 사과를 ‘사과’라고 말하게 될 겁니다. 이런 식으로 주변의 사물들에 대해 말을 하나하나 배우게 됩니다. 그렇지만 ‘나’라는 단어는 ‘사과’와 같은 말처럼 지시를 통해서 배울 수 없는 말입니다. 엄마가 자신을 가리키며 ‘나’라는 말을 가르친다고 해보세요. 아이는 엄마를 ‘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엄마가 아이를 가리키며 ‘나’라는 말을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아이는 엄마를 가리키며 ‘나’라고 할 테니까 말이지요.
‘나’라는 말을 배우기 위해서 어떤 비약이 필요합니다. “사과도 아니고, 자동차도 아니고, TV도 아니고, 엄마도 아니고, 아빠도 아니야.” 이런 식으로 엄마는 하나하나 외부 사물을 지시하면서 그것들은 모두 ‘나’가 아니라고 가르칠 겁니다. 원칙적으로 아이를 제외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면서 그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이가 언제 자신을 ‘나’라고 부를 수는 있겠습니까? 당연한 일이지요. 세계의 모든 사물과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아이는 자신을 ‘나’라고 부르게 됩니다. 놀라운 비약이 일어난 셈이지요. 이렇게 해서 ‘나’라는 말을 쓰는 순간, 아이는 이제 주체로 비약한 겁니다. “엄마는 저것이 좋다고 했지만 그건 엄마 생각일 뿐이야. 나는 이것이 더 좋았어.” 마침내 독백이 가능하게 된 셈이지요. 
커피 한 잔을 통해서 우리는 세계와 분리되어 하나의 섬이 됩니다. 투명한 자기의식, 그러니까 나라고 말하면서 이루어지는 독백이 가능하게 된 셈이지요. 오직 이렇게 분리되었을 때에만 우리는 세계의 모든 사물과 사람을, 그리고 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 In-der-Welt-sein)로서의 나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숲 안에 들어가 있으면, 우리는 숲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할 수 없는 법이니까요. 어느 정도 숲과 거리를 두었을 때에만 우리는 숲의 전모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럴 때 우리는 숲의 전경을 묘사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숲에 대한 묘사는 내가 숲과 떨어져 있어야만, 다른 말로 내가 투명한 자기의식 상태에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겁니다. 그러니까 숲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는 나와 숲과의 간격을 전제하면서 동시에 나와 숲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현상학자 슈트라서(Stephan Strasser, 1905-1991)는 이야기했던 겁니다.


언어는 자아와 ‘당신’ 사이에 매개로 들어선다. 언어는 간격을 만들어 내지만 또 이 간격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반면 아주 어린 시절의 느낌은 어떤 간격도 없는 직접성으로 특징지어진다. (…) 이야기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을 엄격하고 정당한 의미로 ‘자신의 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 커다란 전체에 통합한다.


 

 

- 『대화적 현상학의 이념(The Idea of Phenomenology)』


어린 시절의 우리는 숲 속에 들어가 길을 잃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숲 속 나무와 풀들이 전해주는 화려함과 다양함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 살펴볼 겨를도 별로 없습니다. 반면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묘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숲 밖으로 나와 숲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간격을 확보한 사람과 같습니다. 숲 밖으로 나왔지만 완전히 단절하지 않고 그것을 응시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간격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고 말했을 때 슈트라서가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 혹은 글쓰기는 ‘간격 두기’와 ‘다리 놓기’라는 두 가지 상반된 운동이 하나로 결합될 때에만 가능한 겁니다. 분리와 화해의 경험이라고 할까요. 뭐 이런 이중적 경험이 글쓰기의 경험입니다. 작가를 포함한 모든 인문학자들의 글은 이런 경험을 결과물입니다. 당연히 그들의 글을 읽을 때, 우리는 그들을 통해 친숙한 세계와 자신으로부터 분리되는 경험, 그리고 새롭게 연결되는 경험을 하게 되지요.
책을 읽는다는 것, 그리고 커피를 마신다는 것, 그것은 동일한 경험입니다. 세계의 사물과 사람들로부터 간격을 두어 투명한 자기의식을 확보하겠다는 의지가 실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규원(吳圭原, 1941-2007) 시인도 탁월한 작가나 인문학의 작품을 커피와 같은 것으로 노래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의 시에서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 1821-1867)나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와 같은 작가가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년 출생)나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와 같은 철학자보다 값싸다는 시인의 지적이 눈에 띱니다. 시인의 농담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표면적으로 철학자가 작가보다는 세상으로부터 더 커다란 간격을 두고 있다는 인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심층적으로는 작가보다는 철학자를 높이 평가하는 세상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자괴감을 표출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팍팍한 세상에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세상에 밀착해도 삶을 영위하기 버거운데, 세상에 간극을 두는 시인에게 풍족한 삶은 기대할 수 없는 사치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시를 배우겠다는 제자”가 미친놈으로 보였던 겁니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급류처럼 우리를 휘감아가는 세상에 일정 정도 거리를 두지 않는다면, 나는 나로서 자리를 잡을 수가 없고 당연히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숙고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미친 시인이 즐겁게 미친 제자와 카프카라는 미친 작가를 이야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한 잔의 커피와 카프카의 한 구절을 음미할 때, 그들은 이제 무엇인가를 쓸 수 있는 간극을 만들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 미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일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커피의 향과 맛에 취해 있을 때 우리도 무엇인가를 읽거나 쓰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곤 하기 때문이지요.


Photograph by 드래드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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