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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_립스틱

  • 작성일 2011-04-12
  • 조회수 255

[제8회]

 

립스틱

 

강신주(철학자)

 

 

 

 

 

피부로 속엣 것들을 포장하고 있지만, 얼굴에서 유일하게 껍질 없이 자기의 속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입술이다. 알몸을 누드라고 하지만 피부라는 옷을 입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우리 몸에서 진짜 누드는 입술과 유두, 항문 그리고 성기의 까진 부분밖에 없다. 속내가 겉으로 드러나 있는 솔직함. 입술과 입술을 마주 대는 것이 즐거운 이유는 더는 숨길 게 없는 솔직함과 솔직함이 맞닿는 지극함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네 속으로 아니면 네가 내 속으로 하염없이 들어가고 싶듯이 서로의 깊은 속이 부딪치는 뜨거운 유쾌함에서 온다.

 

입술이 문이라면 입맞춤은 통로다.

 

(…)

 

너의 입술은 말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말의 툭 튀어나온 시뻘건 근육 덩어리들이 염치없이 네 입술을 들락거리며, 꽃이나 나무처럼이 아니라 인간처럼 살게 해주겠다는 걸 화대로 너에게 간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너는 안다. 인간의 입술은 그 자신에 대해 말해볼 기회가 없다. 입술을 조금이라도 벌리면 재갈처럼 말이 들어와 박히고 그 다음부터는 말에 강간당하며 말이 말하는 대로 바보처럼 유린당할 수밖에 없다.

입술은 말할 수 없음을 가리키기 위해 있다.

너의 입술은 입맞춤을 위해 있다. 꽃의 달콤한 입술에 나비가 조심스럽게 내려앉듯이, 나무의 초록 입술에 미풍이 휘감기듯이, 너의 꼭 다문 혹은 벌어진 입술은 그 색깔로, 그 촉촉함으로, 그 말없음으로, 너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 채호기, 「너의 입술」


 

 

‘이제 그만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면.’ 가끔 어느 여인과 만났을 때,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눈동자를 더 깊게 만들고 있는 보라색 아이라이너, 관능적인 느낌을 주는 짙은 와인빛 블러셔, 그리고 입술에 깊이를 모를 신비감을 더해주는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립스틱. 이 모든 것이 주는 에로틱한 분위기, 혹은 종교적인 느낌에 가까운 아우라를 그녀는 망치고 있는 겁니다. 깊지 않은 사유, 적절하지 않은 개념 사용, 나아가 대중문화에 깊이 젖어 있는 천박함. 그렇게 뇌쇄적인 몽환적인 입술에서 결코 나올 수 없는 그녀의 말들. 귀를 막고 싶기도 합니다. ‘이제 그만 말하고, 그냥 가만히 있어주세요. 제 행복을 산산이 부수고 있다는 걸 당신은 아시나요.’

「너의 입술」이란 시에서 채호기 시인은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입술을 조금이라도 벌리면 재갈처럼 말이 들어와 박히고 그 다음부터는 말에 강간당하며 말이 말하는 대로 바보처럼 유린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제 심정을 이보다 명확하게 묘사하는 구절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녀는 알기라도 한 걸까요? 지금 자신의 말이 자신의 매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물론 말을 철학적으로 심오하게 잘한다고 해서, 그녀가 자신의 몽환적 아름다움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말도 필요 없는 것, 그것이 매력과 유혹의 핵심일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채호기 시인도 말했던 것 같습니다. “입술은 말할 수 없음을 가리키기 위해 있다./ 너의 입술은 입맞춤을 위해 있다”고 말이지요.

황홀을 의미하는 엑스타시스(ekstasis)라는 말이 있습니다. ‘밖으로’라는 의미의 ‘ek(=ex)’와 ‘상태’를 의미하는 ‘stasis’라는 두 가지 어근으로 구성된 말입니다. 여인의 에로틱한 매력은 우리를 황홀하게 만듭니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을 잊고 밖으로 나가는 상태, 즉 그녀의 매력에 몰입되어 자신을 잊는 경험을 하도록 만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녀가 사용한 아이라이너, 볼터치, 그리고 립스틱은 이런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황홀감을 위해 마련했던 제단이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입에서 세속적인 말이나 아니면 지적인 이야기가 튀어나옵니다. 그것은 우리를 엑스타시스의 상태가 아니라, 정상적인 마음 상태로 되돌려 놓게 됩니다. 이것은 그녀가 왜 자신의 얼굴에 제단을 만들었는지도 모르면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황홀의 상태에서 우리는 말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을 매료시킨 대상 속에서 하염없이 빠져들며 몇 차례나 죽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지요. 사실 어느 매력적인 여인이 제 앞에 있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예상치 못한 황홀감과 달뜬 행복감을 줍니다. 물론 그녀가 아름다운 화장으로 저만을 유혹하려고 한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 저는 말을 잊고 그녀에게 몰입하는 황홀함을 느끼니까 말이지요. 이것은 저만의 경험이 아니라 19세기 파리, 현대시인의 아버지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 1821-1867)도 느꼈던 것이기도 합니다.

 

 

눈썹의 윤곽을 뚜렷이 그리는 인위적인 검정색과 뺨의 상부를 강조하는 빨간색에 관해서는, 그것의 사용이 같은 원칙, 즉 자연을 넘어서려는 욕구에서 생겨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정반대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빨간색과 검정색은 삶, 즉 초자연적이고 의미심장한 삶을 표현한다. 눈썹의 이 검은 윤곽은 눈길을 더 심오하고 더 특이하게 만들고, 눈에는 무한을 향해 열려 있는 듯한 창문의 보다 뚜렷한 외관을 부여한다. 반면에 빨간색은 광대뼈를 붉게 물들이고 아울러 눈동자의 빛남도 증대시키고, 여성의 아름다운 얼굴에 창부의 신비스러운 열정을 덧붙여놓는다.

─ 『화장에 대한 찬사(Eloge de Maquillage)』


 

보들레르에게 지울 수 없는 황홀의 흔적을 남겨놓은 여인의 모습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아이라이너로 눈썹 주변에 그려진 검은색, 그리고 블러셔로 볼 주변을 장식한 빨간색이 그것입니다. 검은색이 여인의 눈길을 심오하게 만든다면, 빨간색은 창부의 신비스런 열정을 부가했기 때문이지요. 섬세한 그가 자신을 매혹시켰던 여인의 화장을 숙고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우선 그는 화장이 “자연을 넘어서려는 욕구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자연이란 여인에게는 맨얼굴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화장은 분명 맨얼굴이 아닌 인공적인 얼굴, 혹은 페르소나를 만들려는 여인의 의지는 반영하는 것이지요. 자연에서 문화로의 이행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니까 보들레르는 자연을 넘어서려는 욕구라고 이야기했던 겁니다.

그렇지만 보들레르는 화장의 진정한 목적은 문화가 아니라 자연을 지향하는 데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겉으로는 자연에서 문화로의 이행처럼 보이지만, 사실 화장은 문화에서 자연으로의 이행을 숨기고 있다는 겁니다. 그가 화장의 “결과는 정반대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정반대의 욕구라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에게서 가장 자연스러운 본능, 즉 이성을 매혹시키려는 본능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보들레르는 말했던 겁니다.

 

마법적이고 초자연적인 것같이 보이려고 애쓰면서, 그녀는 놀라게 하고 매혹시켜야 한다. 숭배의 대상인 그녀는 열렬히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금빛으로 물들여야 한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기술로부터 본능을 극복하는 방법들을 빌려와야만 한다. 마음을 보다 잘 사로잡기 위해 그리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만약 성공이 확실하고 효과가 늘 매혹적이라면, 그녀로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술책과 속임수라도 개의치 않는다.

─ 『화장에 대한 찬사』


 

 

마법적이고 초자연적으로 만드는 것, 보들레르에게 있어 이것이야말로 화장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얼굴을 마법적이고 초자연적으로 만드는 이유는 이성을 놀라게 하고 매혹시키려는 데 있습니다. 이성을 놀라게 한다는 것이 그의 정신과 감각을 일깨운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매혹시킨다는 것은 그렇게 일깨운 이성의 정신과 감각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직 자신에게만 쏟도록 만든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성스러운 제단에 모인 신도들이 그곳에 모신 신에 대해 열렬히 몰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점에서 화장은 여러모로 종교적 행위와 그 희열을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성한 예식에 따라 제단을 만들기는 하지만, 이런 경직됨이 목적이 아니지요. 제단을 설치한 최종 목적은 신과의 합일을 꿈꾸는 격렬한 황홀경을 경험하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보들레르는 아이라이너나 블러셔로 만들어가는 화장의 세계에서 종교적인 것을 보았습니다. 화장이란 타인을 유혹하여 황홀의 세계를 만들려는 의식이기 때문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우리 시인 채호기도 여인의 입술에서 그런 종교적 황홀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시인은 보들레르와는 다른 길을 걷습니다. 보들레르가 화장이란 매개를 거쳐서 일종의 관능성에 도달한다면, 채호기는 화장이란 매개 없이 관능성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채호기의 시는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지독히도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색채를 띠는지도 모릅니다. 시인은 입술이 “우리 얼굴에서 유일하게 껍질 없이 자기의 속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입술을 “속내가 겉으로 드러나 있는 솔직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마침내 채호기 시인은 키스와 관련된 해부학적 형이상학에 도달하게 됩니다. “입술과 입술을 마주 대는 것이 즐거운 이유는 더는 숨길 게 없는 솔직함과 솔직함이 맞닿는 지극함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솔직함과 솔직함이 맞닿기 때문에 우리는 키스를 즐기는 것일까요? 역으로 질문해볼까요? 타인의 속내와 맞닿기 위해서 우리는 키스를 해야만 할까요? 바로 여기서 채호기 시인의 관념성과 사변성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돌아보세요. 우리는 과연 어느 때 타인에게 키스하려는 욕망을 확인하게 되는지. 빨갛게 매혹적으로 빛나는 입술이나 자줏빛 립스틱으로 촉촉해진 입술을 볼 때일 겁니다. 상대방의 입술이 터서 거칠어져 있거나 사막처럼 건조해져 있을 때, 여러분은 그 입술에 키스하려는 욕망이 생기지 않을 겁니다. 물론 채호기 시인이라면 상대방과 솔직함으로 만나기 위해 키스를 할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화려한 립스틱으로 마법적이고 신비스럽게 치장한 입술은, 그렇지 않은 입술보다 훨씬 더 강하게 키스의 욕망을 부르는 법입니다. 벌거벗은 나신보다 옷을 입은 이성이 더 매혹적일 수 있지요.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1897-1962)의 에로티즘이 생각나지 않으신가요. 『에로티즘의 역사(L'histoire d'érotisme)』에서 그는 “성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 금기는 대체로 대상의 성적 가치를 강조한다”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옷은 직접적 성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나신이었을 때보다 더 큰 성적 매력을 여인에게 부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보잘 것 없는 옷은 성적 가치를 강조하기는커녕 성적 욕망을 싸늘하게 식혀버릴 겁니다.

립스틱도 이와 마찬가지 아닐까요? 지금도 어느 카페에서 어느 여인이 겨울을 보면서 정성스럽게 립스틱을 바르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셈입니다. 모든 화장이 그렇지만 립스틱도 가장 강력한 최음제도 될 수도 있고, 가장 강력한 항최음제도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인에게 있어 립스틱을 바른다는 것은 하나의 모험이자 비약일 수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일까요? 여인의 입술에 대한 채호기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저들은 저희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예수의 말이 떠오르게 됩니다. 분명 채호기 시인도 매혹적인 립스틱을 바른 여인에게서 키스에 대한 더 강한 욕망을 느꼈을 겁니다. 그렇지만 “솔직함과 솔직함이 맞닿는” 경험을 한 뒤, 시인은 키스를 유도했던 립스틱의 마력을 망각하게 됩니다. 시인의 시가 관능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지독히도 사변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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