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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포네의 인형

  • 작성일 2011-04-25
  • 조회수 436



페르세포네의 인형

 

문형진

 

 

 

 

나는 죽음의 순간을 기억한다.


긴 주삿바늘이 뽑혀 나가자 꿈이 시작되었다. 무인 수술실이었다. 윙윙거리는 기계 칼날들, 섬세하게 움직이는 긴 은빛 손가락들. 나는 수술실 구석에 서서 수술대 위에 시체처럼 놓인 내 몸을 바라보았다.

눈부신 조명이 내 이마를 비추었다. 머리카락은 남김없이 깎여나갔다. 내 얼굴은 낯설고 창백했다. 곧 내 두개골에 둥근 전동 톱날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수술을 막아야 했으나, 나는 꿈을 꾸는 중이었다.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너는 이제 죽어.”

옆을 보자 한 소녀가 내 옆에 나란히 서서 맑은 눈으로 수술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곧 이상한 광야의 풍광이 시야 가득히 펼쳐졌다. 세상은 장막에 덮인 듯 어두워졌고, 검은 강이 발밑을 빠르게 흘러갔다. 그녀는 나와 다른 장소에 선 채 나의 죽음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덕분에 나 또한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는 셈이 되었다. 나는 소녀와 함께 검은 강물 위에 서서 내 두개골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기계 팔들이 내 머리에서 조심스럽게 뇌를 꺼냈다. 처음으로 본 내 뇌는 주름진 회색 덩어리였다. 뇌는 곧 투명한 용기에 담겨 색색의 케이블에 연결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뇌 속에 있던 전기화학적 신호 형태의 기억과 정보들이 특수한 과정을 거쳐 변환되고, 디스크 위에 기록되고, 전자 그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너는 누구지?”

두 목소리가 동시에 대답했다.

“나는 샤.”

“나는 페르세포네.”

문득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 두렵고 슬픈 가운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 꿈은 뭐지? 나는 저기 있는데. 저건 내 뇌인데. 뇌를 빼앗긴 내가 어떻게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어쩌면 나는 영혼인지도 몰랐다. 이제 컴퓨터 속으로 모든 것이 옮겨지고 나면 내 몸은 폐기되고 말 것이다.

두 목소리가 동시에 말했다.

“날 도와줘.” “너는 죽는다.”

아니, 나는 벌써 죽어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소녀를 마주보았다. 모든 인간성을 벗겨내 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뿜어내는 광채 탓인지 냉막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단지 신적인 느낌, 성스러움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나와 그녀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인간이 될 수 있게 해 줘.” “나는 영원하다.”

나는 어떻게 사람이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 있는지 보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다음 순간 두 장소가 동시에 사라지고, 의식이 꺼져 버렸다.

돌이켜 보니 알겠다. 그 순간에 나는 그녀에게 선택되었던 것이다.

 

 

 

내 몸은 사라졌다.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데도 나는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몸이 없는 유령이었고 내 의식은 무수한 0과 1의 신호로 이루어져 있었다.

데카르트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20세기 말엽의 현자 키시로 유키토는 그것이 ‘얕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생각은 생각일 뿐 실재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내가 있다’는 생각이 어지러운 네트워크 속에서 전기 불꽃처럼 피어올랐다가 사라질 뿐. 생각이 아니라면 나는 어디서 내가 있다는 근거를 찾아야 할까?

확장된 인식 속에서 정보는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인간은 몸을 경계로 자신을 구분한다. 피부 안에 있는 것은 나, 피부 바깥에 있는 것은 외부 세계다. 하지만 몸이 없는 정신이라면 어떻게 경계를 정해야 하는가?

나는 내 주위의 정보를 탐색해 보았다. 그 거대한 그물 속 가까운 곳에 나의 기억과 감각 정보가 혼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름은 온, 이온. 이온이라는 한 인간의 생활, 꿈, 희망, 공포, 사랑, 아쉬움, 욕망이 차례차례 드러났다. 눈으로 바라본 풍경, 귀로 들은 소리, 내면과 외면, 맛보고 만지고 냄새 맡은 모든 것이 저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인가? 그것은 정보이지 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정보들을 인식하는 것이 나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인식한다는 사실이 나라는 고정된 실체를 증명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식은 과정이고 그 과정도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생각 끝에 나는 흩어진 최소 정보단위들을 모아 속삭이듯 하나의 짧은 문장을 만들어 보았다.

“나는 없다.”

그 한 문장이 이온이라는 이름으로 규정된 일련의 정보 덩어리 속에서 재생되어 이상한 동요를 불러 일으켰다.

나는 없다.

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죽는 것도 별로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죽은 후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생각은 하기 어려웠으리라.

사고와 탐색 활동은 점점 더 자유롭고 민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두뇌라는 생물조직에 의존하던 사고는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생각을 방해하는 육체 없이 사고하는 경험은 사실 쾌적하기까지 했다.

단편적인 정보들을 단서로 아버지의 정체와 내 죽음의 진상을 알게 되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버지나 나를 납치한 자들에 대한,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감정을 느낄 근거인 육체가 없었다. 과거의 경험으로 보아 내가 겪은 사건은 크나큰 감정의 자원이 될 소지가 충분했다. 불안, 슬픔, 두려움, 원망 등등이 예측 가능한 감정 후보들이었다. 그러나 마땅한 이유가 있어도 나는 그런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남은 것은 이성뿐이었다.

나는 곧 내가 친정부 이익단체 소속 연구소의 비밀 실험체들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최초로 의식 이전에 성공한 ‘정보 생명체’ 샘플 1호였다. 곧 내 의식에 접촉한 실험자들은 여러 가지 통제 조건을 입력했고, 갖은 자극을 가하고 문제를 제기하며 반응을 요구했다. 따라서 처음에는 그리 자유로운 처지가 못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실험자들은 내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생각의 속도로 정보를 다루는 나의 능력은 처음에는 그들이 개발한 인터페이스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나는 곧 독자적으로 새로운 툴을 만들어 나의 사고 경로와 활동 일부를 은폐했다. 그 뒤에는 그들의 전기와 가용 자원, 데이터베이스 등을 내키는 대로 이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정보 생명체 실험을 통해 무적의 해커를 만들어서 전쟁에 이용하려는 심산인 듯했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런저런 일들로 실험자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훨씬 더 일찍 샤와 접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우연치 않게 발견한 바로는, 샤는 분명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연구소의 비밀 실험체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샤. 여성. 17세. 나와 동갑이다. 사진과 3차원 광학 정보로 확인한 그녀의 용모는 내 기억과 완전히 일치했다. 샤가 어떻게 죽기 전의 내 꿈속에 나타났는지 알아내기 위해 나는 많은 시간과 전기를 소비했다. 그러나 그녀가 속한 실험의 목적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캐낸 정보는 오직 그녀의 신체에 대한 데이터뿐이었다. 신장, 체중, 혈액형, 영양 상태, 감염 여부, 골밀도, 혈압, 호르몬 균형 등등. 감정이 없는 내가 답답함에 가까운 유사 감정을 느낄 지경이었다.

나는 그녀에 관한 한 거의 강박적으로, 접촉 가능한 모든 데이터를 수집했다. 이유를 말하라면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종종 그녀의 데이터를 열어, 그 규칙적인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면서 기나긴 시간의 여백을 채웠다. 시간은 내 사고 속도가 빨라진 만큼 천천히 지나갔다.

 

 

 

그렇게 두 달여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 동안 나는 수십 가지 분야의 전문지식을 습득하고, 나만이 얻을 수 있는 방대한 정보를 토대로 주식 거래를 하여 상당한 현금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내 기억 용량은 한도가 없었고 어떤 글이든 쉽사리 이해할 수 있었다. 뉴스를 보면 모든 맥락과 세부사항이 즉시 파악되었다. 실험자들은 내가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지성이 되었으며 그들이 사는 현실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물론 나도 일부러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날 나는 의식의 일부를 통제실을 위한 더미dummy로 남겨둔 채, 제 2형태 인터페이스가 제공하는 수많은 가상공간 중 하나에 내 아바타를 실체화시키고 있었다. 뉴욕, 밤 아홉 시. 나는 붉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수한 마천루가 차갑고 매끄럽게 빛나고 있었다.

어느 시대의 뉴욕인지는 몰랐지만 현대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뉴욕은 현재 최대 860층에 이르는 거대한 메갈로폴리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 도시는 이미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 있었다. 도로와 통근노선, 엘리베이터가 혈관처럼 도시를 구석구석 꿰뚫고, 상점과 학교, 밀집주택, 오피스 빌딩, 술집, 레스토랑, 카지노가 24시간 불을 밝힌다. 사람들은 한 번도 진짜 하늘을 보지 못한 채로 태어나 살아가다 죽는다. 지표면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고, 지상은 단지 황막한 옥상일 뿐이다.

그런 도시에 비하면 이 과거의 도시는 아직 얼마나 아름다운지. 비가 오면 몸이 젖는다. 사람들은 땅을 걷고 하늘을 본다. 인공적인 바람이 아니라 진짜 밤바람이 몸을 쓸고 지나간다. 검은 얼음 같은 유리창이 빼곡히 박힌 표면에 서로를 비추는 빌딩들. 철조망, 노란 가로등 불빛, 길바닥의 하수구 뚜껑,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 그 모든 것이 낯설면서도 아름다웠다. 비록 가상인 것을 알고 있다 해도.

그러한 아름다움에서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경험이었다. 감정은 육체적인 것이다. 육체 없는 이가 기쁨을 느낄 수 있을 리 없다. 내게는 기쁨에 대한 갈구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이 거리에 인간의 모양을 하고, 열일곱 살 소년의 모습으로 서 있으려 하는 것일까?

주위를 둘러보며 길 한복판을 천천히 걸었다. 보도블록이 빛과 그림자로 복잡하게 얼룩져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모른 체하며 스쳐지나갔다.

다섯 블록쯤 걷다가 문득 멈췄다. 낯선 감각이었다. 한 정신이 내게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반발 장벽을 형성했다. 프로그램 상으로는 일반적인 방화벽이지만 내 감각으로는 틀림없는 반발 장벽이었다. 나는 일종의 경계심을 품은 채 상대의 2차 시도를 기다렸다. 0.8초 후, 나의 허약한 방벽은 상대의 손짓 하나로 허물어졌다. 나는 허공에 나타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샤였다.

“어떻게……?”

그녀는 마치 날개와 같은 빛무리를 뿌리며 무게가 없는 것처럼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본래 이 공간에 있던 가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와 같은 존재는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았다.

“어떻게 여기 들어온 거지?”

샤는 마침내 뉴욕의 길거리 한가운데 발을 디뎠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네게 도움을 청하려고 왔어.”

목소리는 하나뿐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반복 재생했던 마지막 꿈을 상기했다. 그때는 그녀의 몸에 두 존재가 함께 깃들어 있는 듯했으나, 지금 여기 있는 것은 한 명뿐이었다. 내가 물었다.

“내가 왜 널 도와야 하는데?”

“날 도와주면 넌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어. 너도 나가고 싶지? 현실로.”

“나가고 싶냐고?”

나는 주저했다. 나에게는 욕망이 없었다. 그러자 그녀가 한 발 다가왔다.

“네 이름이 뭐지?”

“이온.”

“이온. 내 손을 잡아.”

샤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프로그램이 명령어에 반응하듯 반사적으로 그 손을 마주잡았다. 그 순간,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온 어떤 광채, 분위기, 감정이 내 의식이 침입해 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손은 뻣뻣이 굳어 있는 나를 막무가내로 인간화시키고 있었다. 붙잡힌 손을 뺄 수가 없었다. 지금껏 메말라 있던 감정의 물이 마음속 우물의 바닥을 적시더니 빠르게 채워져 올라오기 시작했다.

감정이 가득 차는 순간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제까지 막혀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이 갑자기 뚫린 기분이었다. 정보, 경로, 데이터, 채널 같은 건 전부 잊어버렸다. 어떻게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까? 마음이 산산조각날 것 같은 두려움, 차가운 불안, 찢어지는 슬픔이 번갈아 내 온몸을 관통했다. 샤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네 마음을 알아.”

그 한마디 말이 천둥처럼 마음 깊은 곳을 흔들었다. 나는 샤에게 손을 잡힌 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

목이 멘 것을 삼키며 나는 간신히 말했다. 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만나서…… 얘기를 하고 싶어. 왜 나를 죽게 내버려뒀는지 알고 싶어.”

마치 정보 생명체가 되기 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문득 이 가짜 몸에 대한 혐오감과 함께 몸을 갖고 싶다는 강렬한 갈망이 솟아올랐다. 나는 살아 있고 싶었다. 진짜 몸을 가지고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내 손을 놓는 순간, 그 모든 느낌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는 눈물 젖은 얼굴로 바보처럼 그녀 앞에 우뚝 서 있었다. 다시 감정이 없는 정보 생명체가 된 것이다.

나는 내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방금 전까지 울고 있었다는 게 거짓말 같았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녀는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네 영혼을 불러온 거야. 난 샤먼이거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날 도와준다면 더 설명해 줄 수 있는데?”

나는 무려 1초 동안 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도우면 되지?”

샤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결여되어 있던 모든 인간성이 다시 그녀의 얼굴에 깃드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약속대로 24시간 후 샤는 다시 내가 있는 가상공간 속으로 찾아왔다. 이것도 그녀가 가진 능력의 일종으로, 실제 몸이 잠들어 있는 동안 생령生靈이 되어 밖을 돌아다닐 수 있다고 했다. 옛 괴담 같은 이야기였다. 샤는 자신도 가상공간까지 드나들 수 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고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내가 속한 실험의 이름은 인공샤먼 육성개발계획이야. 샤먼이 뭔지 알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에 신과 소통하거나 병자를 치유하는 역할을 했던 사람 말이지?”

“맞아. 이 실험을 계획한 사람은 그 샤먼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유전자 조작으로? 그게 가능해?”

“가능하니까 내가 여기 있잖아.”

샤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첫 번째 성공작이야. 실험자들은 얘기해 주지 않았지만, 실험이 실패하는 바람에 발광하거나 죽은 아이들도 있다고 알고 있어.”

“……열여덟 명이 죽었군. 다섯 명이 치료실에 갇혔고, 한 명은 극심한 성장부진, 나머지 네 명은 정신분열증이야.”

내가 말했다. 샤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했다.

“어떻게 알아?”

“해킹.”

“그럼 나에 대해서도 이미 전부 알고 있겠네?”

“그건 아냐. 별도로 블록 설정돼서 내가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 좀 있는데, 특히 실험 내용이나 실험체 개인 정보 같은 건 빼내기 힘들어. 알 수 있는 건 월경 주기나 스리사이즈 같은 것밖에…… 왜 때려.”

샤는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

“너 그거 빼내면 난 다신 안 올 거야.”

“알았어.”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실험자들은 샤먼을 왜 만들려고 하는 거지? 요즘 시대에 주술 치료를 할 일은 없잖아.”

“처음에는 미래 예지나 클레어보이언스(투시 능력) 쪽을 이용하려고 했대. 그런데 실험 과정에서 내 능력이 밝혀지면서 방향이 좀 바뀌었지.”

“어떤 능력인데?”

“강신술降神術이나 엑토플라즘(영매의 몸에서 흘러나온다고 전해지는 물질. 초상현상의 매개체로 알려져 있음) 같은 거.”

“강신? 그럼 작두도 탈 수 있어?”

샤는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문화권이 다른 것 같은데…… 아무튼 나한테 온 신을 보여줄게. 잠깐 기다려 봐.”

샤는 눈을 감았다.

곧 그녀의 귀와 코에서 이상한 연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기체와 액체의 중간 성질을 띤 것 같았다. 연기는 천천히 형태를 만들어 갔다. 연기 하부의 색깔이 거무스름하게 변하면서 검은 드레스 자락으로 바뀌었다. 위쪽에는 소녀의 얼굴이, 정확히는 샤와 똑같은 얼굴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곧 샤와 같은, 하지만 온통 새까만 옷을 입은 데다 발은 맨발인 또 한 명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표정은 샤와는 전혀 달랐다. 기민하고 영활한 눈초리,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은 입매, 꼿꼿하고 당당한 자세.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쌍둥이 자매를 보는 듯했다. 그녀가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죽음의 왕 하데스의 아내, 저승 여왕 페르세포네다. 다시 만나서 반갑구나.”

“안녕하세요.”

나는 얼떨결에 마주 인사를 했다. 페르세포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이었다. 무녀라면 죽은 사람의 영혼과 소통하거나 동자신, 산신령 등을 모신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의외의 존재가 튀어나왔다. 어쨌든 그녀 역시 프로그램된 존재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나는 스틱스 강에서 네 영혼을 보았다.”

페르세포네가 말했다.

“죽어서 몸은 잃어버렸으되 의식이 현세에 남아 있어 강을 건너지 못한 채 머물러 있더구나. 영혼의 말을 들어보니 너는 나의 무녀를 도울 수 있고, 나 역시 그를 도울 수 있기에 손을 잡아 잠시 그를 데려왔다. 어제 무녀의 손을 잡았을 때 네가 느낀 것은 영혼에서 나온 갈망이다.”

“영혼이라는 게 무슨 말이죠? 감정은 뇌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요?”

여신은 고개를 삐딱이 기울였다.

“그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일 뿐이야. 네가 보는 세상과 무녀가 보는 세상은 다르다. 진실이 무엇이든 중요한 건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지.”

나는 잠시 생각했다.

“나는 내가 가진 능력으로 샤가 자유를 얻도록 도와줄 수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나를 도울 수 있다는 거죠?”

“그건 무녀가 알고 있어. 나는 가 봐야겠다. 하데스가 부르는군.”

갑자기 페르세포네의 형태가 무너지더니 그대로 스르르 녹아버렸다.

샤가 말했다.

“정말이야? 내가 연구소 밖으로 나가게 해줄 수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해. 하지만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

샤는 기쁜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았다.

“고마워. 꼭 보답할게.”

“근데 나는 여기서 어떻게 나가게 해 줄 건데?”

“그건 걱정 마.”

그녀는 가상 도시의 불빛 속에서 미소를 띠었다.

“난 샤먼이야. 방법을 알아.”

 

 

 

“아버지는 반체제 인사였어.”

내가 말했다.

“반체제 인사가 뭐야?”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야.”

나와 샤는 스핑크스의 앞발 안쪽 그늘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아직 햇살이 뜨거운 시간이기 때문이다. 메마른 노란색을 띤 모래는 낮 동안 잔뜩 달아올라 있었으나 그늘 속은 서늘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또 다른 가상공간이었다. 나는 오른손으로 무릎 옆의 모래를 파헤치다가 검은 전갈 한 마리를 잡아 올렸다. 화가 난 놈이 나를 침으로 쏘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그저 말수 적고 얌전한 교수님인 줄만 알았지. 알고 보니 상당히 과격한 저널에 사설을 쓰는 데다, 반전 집회에도 관여돼 있었어.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는데…… 긴 얘기를 짧게 줄이면 친정부 이익단체들이 아버지를 눈엣가시로 생각한 거지. 하지만 나름 이름이 알려진 교수에게 섣불리 손을 댈 수는 없고. 그래서 나를 납치해서 협박하기로 했던 거야.”

“근데…… 왜 죽은 거야?”

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난 납치당해서 한 달 정도 갇혀 있었어. 밥이 맛없었던 게 기억나. 방에는 창문도 없고, 뭘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었어. 내가 무슨 일을 당한 건지, 뭣 때문에 갇힌 건지 알 수가 없어서 굉장히 두렵고 불안했어.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하게 졸리다 싶더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수술대에 묶여 있더라구. 그렇게 죽은 거야.”

“널 처음 본 게 그때였지.”

나는 그녀의 말에 시익 웃었다.

“맞아. ……사정을 알게 된 건 정보 생명체가 된 다음이야. 아버진 협박을 받으면서도 신념을 꺾지 않았던 모양이야. 결국 나를 납치한 자들은 나를 이 연구소에 실험체로 넘겨 버렸고, 실험이 끝난 뒤에 내 시체를 잘 포장해서 아버지한테 보냈지.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는 몰라. 아버진 계속 글을 쓰고 있고, 오히려 전보다 더 과격한 태도로 활동하고 있어.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로.”

“분명 굉장히 슬퍼하셨을 거야.”

“그럴까?”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모래 섞인 바람이 불었다.

“아무튼 나도 너와 마찬가지로 최초로 실험에 성공한 케이스야. 아마 날 납치한 사람들은 내 의식이 여기 있다는 걸 모를 거야. 어차피 실험체는 십중팔구 죽거나 미치니까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생각했겠지.”

샤는 깜짝 놀라 나를 보았다.

“그게 정말이야?”

“뭐가?”

“대부분 죽거나 미친다구?”

“그래. 연구원들은 실험체의 안전에 별로 개의치 않아. 네가 탈출하려는 이유도 그런 거 아니었어?”

“난 몰랐어. 다른 실험체랑 얘기해본 적은 한 번도 없고, 연구원들은 내게 잘해주는 것 같았는데.”

“부모님은?”

“없어. 난 배양기에서 태어났어.”

“그 뒤로 계속 연구소 안에서 산 거야?”

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답답하거나 외로운 줄 몰랐어. 페르세포네가 있었으니까. 그리스 신화 알아?” “알아. 페르세포네는 제우스와 데메테르의 딸이고 하데스와 결혼해서 1년에 여덟 달은 이승, 네 달은 저승에서 살지.”

“응. 난 잠이 들면 페르세포네와 함께 다른 세상을 여행할 때가 많았어. 올림포스 궁전에 있는 열두 개의 황금 의자도 보고, 아직도 간을 쪼이고 있는 프로메테우스와 인사를 나눴지. 스틱스 강물을 마시는 망자들을 구경하거나, 아폴론의 리라 연주를 들으며 울기도 했어. 아, 한 번은 제우스가 페르세포네 몰래 날 꼬드기려다 아내한테 뺨을 맞은 적도 있어.”

샤는 키득거렸다. 그녀와 무사히 탈출하게 된다면 세상에는 종교가 하나 더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럼 넌 연구소에서 나갈 수 없어도 별로 상관없을 것 같은데.”

“아냐. 이제 실험은 지긋지긋해.”

샤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연구원들은 신의 힘을 전쟁에 이용하려고 해. 하지만 페르세포네는 남의 명령은 절대 듣지 않거든. 잘 안 되니까 이제는 엑토플라즘을 끝도 없이 뽑아내는데 얼마나 힘든지 몰라.”

“전에 본 그 연기가 엑토플라즘이야?”

“응. 한 번에 만들 수 있는 양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데, 그 이상 만들면 몸에 무리가 가거든.”

문득 샤가 얼굴을 들며 물었다.

“탈출 준비는 잘 되고 있어?”

나는 미소 지었다.

“여기 와 있는 건 내 의식의 50% 정도야. 나머지는 지금도 탈출 루트를 짜고 프로그램 만드느라 정신이 없지.”

“좋았어.”

그녀는 생긋 웃었다.

“다른 곳으로 갈까? 이제 사막은 볼 만큼 본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의식을 움직였다. 주위 풍경이 먼지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샤는 밤마다 여신과 동행한 덕에 이런 방식의 여행에 익숙한 듯했다.

“동유럽은 어때?”

“난 아시아를 보고 싶어.”

“좋아.”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고, 다음 순간 우리는 새로운 장소에 있었다.

 

 

 

준비는 끝났다.

나는 감시 카메라 중 하나를 통해 잠들어 있는 샤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현실 세계에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비로소 내가 가상공간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고, 현실은 저 바깥에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정말 나갈 수 있을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샤는 자기한테 맡기면 된다고 큰소리를 탕탕 쳤다.

곧 실험실 통로들과 로비를 비추는 카메라 영상들 중 하나에 샤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건 생령이다. 그녀는 실험실 지하 복도를 배회하고 있었다. 이것이 내 계획의 첫 단계, 즉 유령 소동이었다.

샤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웠다. 되도록 무서운 모습을 하는 게 좋겠다는 내 말을 그녀는 자기 식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살짝 비튼 고개에 멍한 표정, 입가에 흐르는 선혈. 거기다 고전적인 흰 원피스 잠옷을 입었고, 참으로 옛 괴담에 충실하게도 다리가 없었다. 하지만 곧 그 모습의 효과가 증명되었다. 야근을 하다가 졸린 눈으로 화장실에 가던 여자 연구원이 샤의 생령을 보고 찢어지는 비명을 올렸기 때문이다.

“꺄아아아아악!”

그녀는 그 자리에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다. 곧 그 소리를 듣고 다른 연구원과 경비원들이 달려왔다. 샤는 조금 당황했지만, 곧 영체의 자유로움을 충분히 활용해 사라졌다가 등 뒤에 나타나거나 목을 길게 늘이고, 눈앞에 피투성이 얼굴을 들이미는 등 종횡무진 활약을 펼쳤다. 실신하는 사람, 바지에 실례하는 사람 등이 속출했다. 어느 나이든 수석 연구원이 심장 발작을 일으킴으로써 소동은 극에 달했다. 누군가가 샤의 전담 실험실을 호출하려는 것을 알아채고 나는 즉시 추상적인 손을 뻗어 그 회선을 틀어막았다. 거친 방식이라 금방 들통이 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음은 내 차례다. 나는 폴터가이스트(유령에 의해 일어난다고 여겨지는 물리적인 초상현상)를 흉내 내어 전등을 몇 번 껐다 켜고, 그 다음엔 비상 방화 셔터를 차례로 내려 무슨 일인지 보려고 나온 사람들을 그 자리에 가둬 버렸다. 동시에 경비원들이 사용하는 통신 회선을 차단하고, 감시 카메라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혼란에 빠진 사람들은 이것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유령 소동의 일부로 생각할 것이다. 인간은 원인과 결과가 뚜렷한 것을 선호하고, 설령 그것이 합리적이지 않더라도 일단 받아들이고 싶어한다. 그러지 않으면 급격한 스트레스 상황에 빨리 대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준비한 프로그램과 바이러스들을 30초 안에 전부 써버린 나는 다시 샤가 잠든 방으로 주의를 돌렸다. 생령이 돌아온 듯 그녀의 몸이 움찔했다. 곧 샤는 반짝 눈을 뜨더니 태연히 담요를 밀어놓고 침대에서 나왔다.

“아, 재밌었다. 이온, 보고 있지? 이제 페르세포네가 가상공간으로 들어가서 널 끄집어낼 거야. 현실에서 봐!”

나는 어느새 네트워크 공간에 들어온 페르세포네를 감지했다. 제 2형태 인터페이스로 전환하자 내 앞에 거대한 여신의 형체가 나타났다.

나는 말을 잃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얼굴만 해도 내 키를 뛰어넘고, 가슴 아래로는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컸다. 샤의 얼굴을 한 여신은 어느 때보다도 힘과 열기로 충만해 있었다. 당당하고 여유로운 웃음을 띤 그녀에게서 뜨거운 지옥의 향기가 풍겼다. 불과 유황과 어둠의 냄새다.

“소년이여, 인간 세계로 돌아갈 준비가 되었는가?”

페르세포네가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투덜거렸다.

“저기, 시간이 없거든요. 빨리 좀 부탁할게요.”

여신은 소리 높여 웃었다.

“좋구나. 두려움을 모르는 아이야, 내가 너를 다시 삶으로 데려가겠다!”

다음 순간 나는, 그리고 내 것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의 덩어리는 뒷덜미를 붙잡혀 휙 들어올려졌다.

그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나라는 것이 없음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이상하게도 의식은 확고해지고 생각은 맑아지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더 선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마치 땅을 강하게 밟으려 하면 할수록 몸이 가벼워지는 것처럼. 나는 존재와 비존재의 중간 지점이라고 할 만한 곳에 있었다. 나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상한 얘기다. 0 아니면 1이라는 전기 신호가 모여 이루어진 인격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고 나는 옮겨졌다.

 

 

 

숨을 헉, 들이쉬었다. 그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내쉬었다. 눈을 깜박거려 보았다. 하나같이 낯선 동작들이다.

“이온, 왜 그래? 괜찮아?”

샤가 보인다. 육안으로 뭔가를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나는 시험 삼아 입과 혀를 움직여본 다음 첫마디를 내뱉었다.

“사람 몸은 불편하군.”

말하는데 안면근육이 이상하게 움직였다. 내 얼굴이 웃고 있었다. 하는 김에 큰 소리로 웃어보았다. 생명을 다시 얻은 게 너무나 기뻤다.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기뻤다.

“페르세포네, 얘 좀 어떻게 된 것 같아.”

“감격하고 있는 거야.”

현신한 여신이 짤막하게 말했다. 이것은 샤가 특별히 공을 들여 엑토플라즘으로 만들어낸 신체였다. 내 의식은 페르세포네의 손에 의해 이 몸의 정수리로 들어왔고, 나의 정기精氣라고 할 만한 것이 가슴과 아랫배로 흘러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몸속에서 골격과 두뇌, 척수, 신경, 장기, 혈관이 형성되고 조정되는 것까지 느껴졌다. 따스한 에너지가 몸속에서 넘실거렸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감격도 좋지만 이제 여기서 나가야 해. 이온, 길 알지?”

나는 정신을 차렸다. 습관적으로 사고의 가지를 뻗어 정보를 찾으려다 멈칫했다. 이제 나는 가상공간에 있지 않은 것이다. 생각의 속도도 평소보다 너무 느렸다. 너무도 굼뜨게 흘러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는 듯하던 시간이 지금은 쏜살처럼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서둘러 기억을 더듬었다.

“아직 시간이 있어. 따라와!”

나와 샤, 페르세포네는 방문을 열고 나와 연구실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미리 샤의 출입증에 관리자 권한을 부여해둔 덕분에 방화 셔터는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다. 내 계획대로라면 우리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연구실을 빠져나갈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30초 뒤, 우리는 경비원 한 명과 마주쳤다.

5분 뒤에는 한 무리의 무장 경비원들이 우리 뒤를 쫓고 있었다. 샤가 나를 다그쳤다.

“이온!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모르는 경비 시스템이 있었나 봐.”

“이제 어떡하면 되는데?”

페르세포네가 달리면서도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라. 죽는다면 내가 저승에서도 편의를 봐줄 테니까.”

“난 죽기 싫어!”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이제 가능한 데까지 도망치는 수밖에 없어.”

우리는 힘껏 뛰었다. 뒤를 돌아보면 흰 실험실 가운을 걸친 샤와 검은 옷자락을 휘날리는 페르세포네의 어깨 너머로 흉흉한 총구들이 언뜻언뜻 보이다 사라졌다. 등 뒤에서 날아온 작은 주사기들이 우리를 빗나가 부딪치며 건조한 소리를 냈다. 주사기 안에는 마취약이 가득 들어있을 것이다. 한 대라도 맞으면 곧바로 정신을 잃고 말 것이다.

“무녀! 내 병사들을 부르겠다.”

페르세포네가 소리쳤다. 곧 달리는 샤의 귓속에서 엑토플라즘이 뿜어져 나와 우리 뒤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통로를 가득 메운 일곱 명의 저승 병사로 변했다. 그들의 몸은 칠흑 같은 검은색이었고, 신장은 2미터가 넘었다.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괴, 괴물이다!”

“사이킥 해저드 경보를 발령하라고 해!”

“정말 괴물이군.”

내가 중얼거렸다. 저런 걸 불러낼 수 있다면 그 힘을 병기로 쓰고 싶어하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추적이 이어지지 않는 걸 보니 병사들이 경비원 부대를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로비에 도착하자 바리케이드 뒤에 늘어선 지원 병력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연구실에 상주하는 경비원이 아니라 정부군이다. 마취총이 아니라 정부군 표준 소총을 들고 있다. 아까 소환한 병사들 때문에 결국 사살 명령이 내려진 듯했다. 비상 회선은 제대로 막은 줄 알았는데. 모든 게 계산 밖이었다.

“샤. 계획은 실패한 것 같아.”

내가 말했다. 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군인 한 명이 마이크를 들고 진부한 대사를 읊었다.

“너희는 완전히 포위됐다. 순순히 투항하라.”

나는 샤를 보았고, 샤는 페르세포네를 보았다. 여신이 빙그레 웃었다.

“우매한지고. 이럴 때 신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언제 빌리려 하느냐?”

“어?”

“여기서 나간 뒤에 또 볼 수 있을 게다. 내가 틈을 만들면 달려라. 공물로는 초콜릿 같은 걸 준비해 두면 좋겠구나.”

여신은 제 할 말만 하더니 휙 몸을 돌려 바리케이드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곧장 그 너머에서 총격이 쏟아졌다. 그러나 총탄은 그녀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쏴 보아라, 미천한 것들. 감히 죽은 자들의 여왕에게 대적하려 하느냐!”

여신이 날아올랐다. 갑자기 옆에 있던 샤의 몸이 뒤로 휙 꺾였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의 몸을 받쳐 주었고, 그 눈, 귀, 코, 입에서 막대한 양의 짙은 연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경악했다. 샤는 컥, 컥,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엑토플라즘을 뿜어냈다. 자신이 연기를 내보낸다기보다는 연기가 억지로 빨려나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마침내 엑토플라즘이 다 빠져나가자, 샤의 얼굴에 코피가 흥건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반쯤 실신해 있었다.

나는 황망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토록 엄청난 엑토플라즘으로 무엇이 만들어졌을지 돌아보니, 페르세포네는 이미 거대한 검은 동물의 목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 동물의 목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머리가 세 개에 덩치는 전차를 뺨치는 무시무시한 모습의 개였다. 길고 거친 검은색 털이 전신에서 불타오르고, 여섯 개의 눈알은 벌겋게 빛났으며, 길고 미끈한 꼬리에는 뱀의 머리가 달려 있었다. 지독한 연기와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저건 지옥 파수견 케르베로스…… 저걸 현실 세계에…….”

샤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괴물은 바리케이드를 박살내고 들어가서는, 유리로 만들어진 로비 정문을 한쪽 머리로 들이받아 부숴 버렸다. 군인들은 당황한 듯 물러서면서 일제히 총을 난사했다. 그러나 케르베로스는 간지럽다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그들을 물어 올려 사방으로 내던졌다. 저승 여왕의 웃음소리와 적들의 비명소리가 로비를 가득 채웠다.

“물러나라! 괴물이다, 물러나!”

마침내 병력이 주춤주춤 퇴각하기 시작했다. 케르베로스와 페르세포네는 때를 놓치지 않고 이리저리 날뛰며 그들을 위협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이 틈을 타서 도망쳐야 해.”

“잠깐만…… 다리에 힘이 없어. 못 걷겠어.”

나는 두말없이 샤를 들쳐 업고는 뛰기 시작했다. 새로운 신체 덕인지 무겁지도 숨이 차지도 않았다. 난장판이 된 연구소 로비에서 추적자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괴물을 탄 여신은 물러나는 적을 뒤쫓아 간 것 같았다.

나는 정신없이 달렸다.

정문을 나와 보니 눈부신 아침녘 햇살이 내 눈을 두드렸다.

나는 샤를 업은 채 재채기를 했다. 재채기. 낯선 습관이다.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몇 시간 후, 무인 택시를 잡아탄 우리는 시가지에 들어왔다. 지칠 대로 지친 샤는 코피 자국이 가득한 얼굴로 택시 안에서 꾸벅꾸벅 졸더니, 화장실에서 세수를 한 후에야 조금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패스트푸드점 구석에 앉아서 한참 동안 음식을 입에 넣다 말고, 샤가 눈을 들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나는 피로한 얼굴로나마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 영혼이 바라는 일을 해야지. 난 기록상 죽은 걸로 돼 있으니 위장 신분을 만들어 뒀어. 발급기에서 신분증을 받고 나서 아버지에게 돌아갈 거야. 아, 네 신분도 같이 만들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샤는 새액 웃었다.

“고마워.”

나도 마주 웃었다.

“넌 어때? 계획이 있어?”

그렇게 물으면서 이상하게도 미미한 기대감이 가슴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샤는 감자튀김을 꿀꺽 삼키고 콜라를 마신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는…… 앞으로 샤먼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 될 작정이야.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행복하게 살려고 해. 엑토플라즘 따윈 다시 만들고 싶지 않거든.”

나는 깜짝 놀랐다.

“샤먼이 아니게 된다는 게 무슨 말이야? 넌 유전자 단계에서 이미 무녀로 만들어져 있는 거 아니었어? 게다가 페르세포네는 어쩌고.”

“페르세포네는 여기에 있어.”

샤는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페르세포네뿐 아니라 올림포스의 모든 신들이 내 안에 있지. 신들의 세계는 인간 세계와 떨어져 있지 않으니까.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일 뿐이야. 가끔 초콜릿만 먹여주면 꿈속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페르세포네는 이미 내게 약속했어.”

“하지만…… 어떻게 보통 인간이 될 생각인데?”

“한 가지 방법이 있어. 네가 나를 속화俗化시키고, 샤먼의 힘을 잃은 인간 여자로 만들어줄 수 있는 방법이.”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렸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내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녀는 테이블 너머로 몸을 내밀어, 내 귀에 대고 몇 마디를 속삭였다. 그 순간 일어난 나의 신체적 반응은 실로 흥미진진했다. 가상공간 안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감정과 욕망의 홍수가 온몸을 채우며 소용돌이쳤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시 자리에 앉은 그녀의 얼굴도 조금 빨개져 있었다.

“알겠어? 어차피 엑토플라즘 신체는 만든 사람 곁에 있지 않으면 불안정해진다고 했어. 넌 내가 만든 골렘(유대 전설에 전해지는 인조인간. 진흙으로 만든 인형에 시술자가 생명을 불어넣어 부린다고 전해진다) 같은 존재니까. 내가 널 책임지듯이 너는 날 책임지는 거야.”

나는 말을 잃고 그녀를 마주보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 매혹적인 눈, 발그레한 뺨과 장난기 있는 미소.

내가 침묵하자 샤는 눈썹을 찌푸렸다.

“왜? 싫어?”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좋아.”

“그럼 약속한 거야. 다 먹었으면 가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머리는 갑작스럽게 구체화되기 시작하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계획으로 현기증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너무나 낙관적이고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포장지 조각과 컵과 빨대가 놓인 내 접시를 들고 가게의 출구 쪽으로 걸어갈 때, 나는 내가 되찾은 이 인간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뼛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주었듯이, 나 또한 그녀를 인간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두근거렸다. 이 새로운 감각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렇지. 이를테면, ‘행복’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끝〉

 

 

 


작가소개 / 문형진(작가)

1985년생.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영미문학을 전공했고, 2009년 4월 장편소설 『인드라의 그물』을 출간했다. 현재 서울 모처에서 번역을 공부하며 프리랜서로 밥 벌어먹을 궁리를 하고 있다.

  

 

- 작품 후기 -

 


사실 이 글은 장편이 될 예정이었는데 분량이 대폭 줄어서 단편이 되었네요. 본래는 신화, 샤머니즘, 오컬트, 분석심리학, 사이버펑크 등등을 결합하여 본격 SF 대작을 탄생시키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었습니다만 어째 나온 것은 이런 소품이군요. 글쓰기 전에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소설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사실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제가 청소년일 때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일부러 쉽게 쓰거나 폭력적이고 성적인 부분을 배제한 글을 보면 조금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아무튼 재미있게 읽으시고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더 좋은 글로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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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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