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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_책

  • 작성일 2011-06-08
  • 조회수 356

 

[제10회]

 

 

 

강신주

 

 

 

 



 

 

 

너무 많은 구름의 문장들을

 

나는 건너왔다

 

책장을 펼치면

 

나는 소리없는 번개처럼

 

흘러가버린다

 

지금 막 열리고 있는

 

행간 밖으로

 

쓰여지는 순간 나는 완성되고

 

온전히 허물어졌다

 

 


당신은 너무 많은 구름의 문장들을

 

건너왔다 나를 펼칠 때마다

 

당신은 시간처럼 넉넉한 여백이 되었다

 

 


고요하게 타오르는 순간의 페이지들

 

잿빛 구름을 뚫고

 

버려진 왕국의 미래가 펼쳐진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불길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폭풍처럼

 

다가오는 당신의 문장들을 가로지른다

 

내가 책장을 덮는 순간

 

당신은 이미 흘러가버린 침묵

 

 


하늘과 바다가 입맞춤하는

 

그 아득한 지평에서

 

당신은 처음 나를 건너왔다

 

읽혀지는 순간 나는 완성되고 온전히

 

허물어졌다

 

 


한 권의 책이 미래처럼 놓여 있다

 

너무 많은 구름의 문장들을 나는 건너왔고

 

당신이 나를 건너가는 동안

 

미래는 이미 흘러가버린 문장들

 

 

 


침묵은 침묵 속에서 지속된다



- 주원익, 「미래의 책」 -

 

 

 

내게는 기묘한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마무리한 원고를 출판사에 보낸 뒤, 집필실 근처의 대형서점을 찾아가는 겁니다. 책을 쓰면서 나도 모르게 고독했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책을 생각하기만 하면 나는 파울 첼란(Paul Celan, 1920-1970)이란 시인의 말, “나의 시는 유리병편지(flaschenpost)와 같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무엇인가 말할 것이 있어서 책을 쓰지만, 도대체 나의 말은 독자들의 귀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런 고민을 할 때는 애정과 열정을 쏟아 부은 내 책이 독자들의 관심을 받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는 중일 겁니다. 파울 첼란의 말처럼 책을 쓴다는 것, 그것은 망망대해에 유리병을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 유리병 안에는 자신의 속내를 깨알같이 적은 종이가 정성스레 들어가 있습니다. 서점에 들어가자마자 수많은 책들이 서가에 꽂혀 있거나 판매대에 놓여 있는 것을 봅니다. 순간 그것들은 모두 유리병편지처럼 보입니다.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절절함이 담겨져 있는 것일까요.

유리병 안에 곱게 접은 쪽지에는 저자의 삶과 그의 독서 경험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유리병편지와 관련된 한 가지 역설이 있습니다. 쪽지를 다 읽기 전에 우리는 자신이 쓸데없는 일을 하는지, 아니면 너무나 소망스러운 일을 하는지 미리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리병에서 쪽지를 꺼내 읽었을 때, 우리는 괜히 유리병에서 편지를 꺼내 읽었다고 짜증낼 수도 있습니다. 너무나 보잘것없고 초라한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괜히 시간 낭비를 한 것 같아 화도 나기도 합니다. 반면 우리는 이 유리병편지를 지금까지 방치했던 것을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쪽지를 읽고 난 뒤 우리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동쪽으로 계속 가던 종이배가 갑자기 강한 바람을 만나 남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는 것과 같은 극적인 경험일 겁니다. 놀라운 일 아닌가요. 유리병편지, 혹은 책 안에 적힌 글귀들이 강력한 폭풍을 불러일으켜 우리 자신을 휘청거리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말라무드(Bernard Malamud, 1914-1986)라는 작가는 『수리공(The Fixer)』이라는 소설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는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가 보낸 유리병편지, 즉 『에티카(Ethica in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를 읽었던 사람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얼마 후 몇 쪽을 읽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마치 돌풍이 등을 밀고 있기라도 하듯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말씀드리지만, 제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을 접하게 되자마자 우리는 마치 요술쟁이의 빗자루를 타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이전과 동일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 『수리공(The Fixer)』-

 

『에티카』는 그에게 있어 돌풍이자 요술쟁이 빗자루와 같았습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이 그 자신이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느끼고 고민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너무나 부러운 경험 아닌가요. 어떤 책을 읽고서 “나는 이제 더 이상 이전과 동일한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했던 경험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다른 사람은 습관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삶만을 살아가지만, 이제 그는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겁니다.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삶을 두 번 새롭게 살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행운은 아니지요. 『수리공』에 등장하는 이 인물 이외에도 우리 이웃들 중 어떤 책을 읽고 돌풍에 휘둘리는 듯한 경험을 했던 사람이 한 명 있나 봅니다. 그가 바로 젊은 시인 주원익(朱元翼, 1980년 출생)입니다.

무슨 책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시인은 자신이 읽고 있던 책을 통해 “잿빛 구름을 뚫고, 버려진 왕국의 미래가 펼쳐지는”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원익 시인의 시에서 ‘당신’이 책을 쓴 저자라면 ‘나’는 주원익 시인과 같은 독자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시인은 자신의 강렬한 독서 경험을 “당신은 너무 많은 구름의 문장들을 건너왔으며,” “나는 보이지 않는 폭풍처럼 다가오는 당신의 문장들을 가로지르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멋진 표현 아닌가요. 시인은 지금까지 너무나 힘겨운 독서 경험을 했나 봅니다. 책을 읽으면 자신의 삶이나 세계가 더 명료하게 보여야만 합니다. 아니면 읽을 필요가 없지요. 그렇지만 그의 말대로 시인이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은 명료함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오히려 불명료함과 혼돈만을 가져다주었나 봅니다. 말 그대로 그는 불행하게도 “너무나 많은 구름의 문장들”만을 책에서 읽었던 겁니다.

하늘이 잿빛 구름들로 켜켜이 덮여 있다면 우리는 대낮이라고 해도 지상의 사물들을 명료하게 볼 수는 없는 법입니다. 너무나 암담하고 불쾌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제 주원익 시인은 이런 탁한 구름들을 한꺼번에 날려 보낼 폭풍과도 같은 책을 만나게 된 겁니다. 어떤 책을 읽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책을 읽기 전 시인이 노래한 시와 그 책을 읽은 뒤 시인의 시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책을 읽으면서 시인은 “완성되고 온전히 허물어졌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자아가 만들어져서 나를 차지하지 않는다면, 과거의 자아는 허물어질 수 없을 겁니다. 과거의 자아가 어두운 구름에 의해 불투명한 삶을 살았다면, 이제 새로운 자아는 삶과 세계에 대한 명료한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독서가 무엇인지를 직감하게 됩니다. 독서를 통해 우리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나로 생성될 수 있습니다.

생성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는 창조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유(有)에서 유(有)가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유에서 유를 만든다는 말에 고개가 갸우뚱거리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그렇다면 현대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로부터 도움을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알려진 대로 그는 생성을 가장 깊게 사유했던 생성의 철학자였으니까 말입니다.

 

 

나는 사물들을 풀어내고 잘라내야 하는 선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점을 좋아하지 않는다. 점을 찍는다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어리석어 보인다. 선이 두 개의 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점이 여러 선의 교차점에 있는 것이다.



- 『대담(Pourparlers)』-

 

기하학에 익숙한 사람들은 점이 모여야 선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선은 두 개의 점 사이를 잇는 것”이라고 쉽게 믿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들뢰즈는 다르게 생각해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해 선이 교차해서 점이 된다고 말이지요. 점만 그럴까요. 사실 선도 평면이 교차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나아가 평면도 사실 입체와 입체가 교차했을 때에만 만들어지는 법입니다. 여기서 점을 하나의 인간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어떤 사람을 보면 우리는 그가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아버지라는 선과 어머니라는 선이 교차해서 탄생한 겁니다. 만약 교차하지 않았다면, 즉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는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탄생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의 생각, 행동, 습관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선의 교차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을 겁니다. 다른 형제와 살았다면, 다른 곳에서 살았다면, 다른 학교에 다녔다면, 다른 친구를 만났다면, 다른 선생님을 만났다면, 혹은 다른 책을 잃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우리 앞에 서 있었을 겁니다. “점은 여러 선의 교차점에 있다”고 말했을 때, 들뢰즈가 의도했던 것도 바로 이 점입니다. 흥미로운 일이지요.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수많은 마주침을 통해 만들어지는 존재라는 사실이 말입니다. 사실 지금도 이런 마주침은 우리 주변에 도처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긴밀하게 만난다면, 그 사람이나 우리 자신에게는 새로운 교차점들이 생기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지만 우리는 과거와는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될 겁니다.

잊지 마세요. 교차하기 전에 모든 선들은 이미 존재했던 겁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모두 유(有)였던 겁니다. 결국 교차해서 새롭게 생기는 점들은 모두 유(有)로부터 만들어진 유(有)인 셈입니다. 비록 새롭게 점이 생겼기 때문에, 없던 것이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일종의 착시효과였던 셈입니다. 이제 왜 생성을 유(有)에서 유(有)가 생기는 것이라고 정의했는지 분명해지지 않았나요. 동일한 시대와 동일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마주쳤을 때, 새로운 교차점이 생기기는 무척 어려운 법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일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을 마주쳤을 때보다 전혀 다른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마주쳤을 때, 더 강력한 생성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주 오랫동안 외국에 있었던 친구를 만나면, 우리는 그가 과거에 알던 모습과는 너무 달라졌다는 사실을 곧 느끼게 되나 봅니다. 항상 생성이 여행과도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래서 들뢰즈도 생성의 주체를 유목민, 즉 노마드(Nomad)라고 정의했던 겁니다.

이제 『수리공』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우리 주원익 시인이 경험했던 강렬한 독서, 다시 말해 자신이 완전히 새롭게 생성되는 경이로움이 이해가 되시나요. 이제 서점에 들어갈 때 조심하세요. 혹은 한 권의 책장을 넘길 때 각오를 단단히 하세요. 물론 모든 책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시인이 말했던 것처럼 “한 권의 책은 미래처럼 놓여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독서를 통해서 우리가 반드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독서는 교재를 공부하듯이 불변하는 자아라는 창고에 지식을 채워 넣는 탐욕스러운 행동이 아닙니다. 오히려 독서는 기존의 자아를 벗어던지려는 겸손하지만 절절한 소망을 담고 있어야만 합니다. 어쩌면 유리병편지에 자신의 속내를 담는 진지한 모든 저자들이 원했던 것도 바로 이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가 이 편지를 읽게 될 것인가? 누구라도 읽고서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탄생할 수만 있다면.” 오늘도 저 멀리 대양으로 유리병편지를 힘껏 던지며, 그는 이렇게 빌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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