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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싶다, 수박

  • 작성일 2012-05-22
  • 조회수 1,833

 

청소년 테마소설

자아정체성_네번째

 

 

먹고 싶다, 수박

 

장주식

 

  

 



  그건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약 두 시간에 걸쳐 일어난 그 일은 마치 한바탕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다. 체육시간에 여유 시간이 너무 많았던 게 문제였다. 줄넘기 평가를 하는 날이었다.

  “적당한 데서 연습하고들 있어. 부르면 잽싸게 오고.”

  노란 선글라스를 낀 체육쌤의 말이었다. 아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는 세영, 지원, 은비, 인정, 영주와 함께 뭉쳐서 갔다. 우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육인방이다. 콩 한 개도 여섯 쪽으로 나눠서 먹을 수 있다고 서로 믿는 사이다. 한 번도 그래 본 적은 없지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자리 잡은 곳이 조회대 위였다. 그곳은 시멘트로 깔끔하게 처리되어 있어서 맨 땅에서 줄을 넘는 것보다 나았다. 하지만 줄넘기는 뒷전이었다. 넘는 둥 마는 둥, 별 영양가 없는 수다로 시간을 보냈다. 체육쌤이 본다면

  “어휴, 저것들!”

  하고 속을 박박 긁겠지만. 인정이는 아예 줄넘기를 저만치 집어던지고, 바닥에 퍼질러 앉았고, 단비와 영주는 줄넘기 한 개로 서로 몸을 묶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세영이가 외쳤다.

  “어머, 어머! 애들아, 저것 좀 봐”

  눈들이 한꺼번에 세영이 가리키는 곳으로 쏠렸다.

  “보여? 애들아, 보이지? 수박 말이야.”

  진짜로 있었다. 수박이었다. 조회대 옆, 비탈진 잔디 밭, 늙은 겹벚꽃 나무 아래, 수박이 있었다. 단 한 개. 수박 포기도 딱 하나였다. 오리발처럼 갈라진 길쭉한 초록 이파리들은 그닥 싱싱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수박은, 생각보다 컸다!

  “와, 크다! 인정이 머리보다 크겠다.”

  지원이가 인정이 머리를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녹색 덩어리에 선명하게 죽죽 그어진 짙푸른 선들. 수박은 튼튼해 보였다. 손가락으로 퉁기면, 퉁! 하고 소리를 낼 것 같다. 나는 수박을 손가락으로 퉁겨 보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솟아나자, 참기 어려웠다.

  “아, 저거 우리 따먹으면 안 될까? 수박이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 왜 그동안 못 봤을까?”

  내가 이상한 흥분에 휩싸여 마구 말을 쏟아내고 있을 때, 벌처럼 윙 하고 수박에게로 날아간 인간이 있었다. 지원이었다.

  “먹고 싶으면 따지 뭐.”

  아아, 그 아무도 말릴 새가 없었다. 마치 오랜 세월 수박 농사를 지어온 농부라도 되는 양, 아주 능숙한 솜씨로 지원이는 수박을 뚝 따서, 가슴에 안고 환하게 웃었다.

  “야, 너!”

  거의 비명에 가까운 짧은 소리가 모두의 입에서 터져 나오고, 순간 정적. 입을 벌린 채 아이들은 얼음이 되었다. 지원이 표정이 가장 볼만했다. 수박을 가슴에 안고 우는 듯 웃는 듯 두려운 듯 오묘한 표정. 일단 일을 저질러놓고 보는 지원이다웠다.

  “왜에에~~”

  지원이는 친구들을 올려다보며 애절한 가락으로 호소하듯 내뱉었다. 지원이의 호소에 누구도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갑자기 근심에 휩싸인 지원이가 일부러 울음 섞인 소리를 내면서 다시 애원쪼로 말했다.

  “수박 먹고 싶지 않아? 니들.”

  “먹고 싶긴 하지…….”

  인정이가 대답했다. 나도 먹고 싶다고 말을 보태려는데, 은비가 먼저 말했다.

  “난 안 먹을래. 그, 리, 고.”

  글자를 끊어서 또박 또박 발음한 뒤, 은비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덧붙였다.

  “나는 빠지겠어. 이 사건은 나와 무관한 거야. 난 결코 이 상황을 인정할 수 없어.”

  은비는 말을 하는 중에도 걸음을 옮겨, 마침내 조회대에서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머뭇거리던 영주도 은비를 따라갔다. 수박을 가장 먼저 발견했던 세영이는 은비를 보다가 지원이를 보다가 허둥대며 “어떡해, 어떡해.”를 연발하더니 엉뚱하게도 줄넘기를 들고 줄을 넘기 시작했다.

  멀리서 시끌시끌 아이들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가장 괴로운 사람은 당연히 지원이었다. 수박을 안은 채 엉거주춤 선 지원이. 나는 지원이를 구출하는 게 가장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눈에 띄는 대로, 지원이의 신발주머니를 들고 달려갔다.

  “얼른 넣어!”

  신발주머니의 주둥이를 벌리고 내가 말했다. 지원이는 수박을 딸 때처럼, 재빠른 동작으로 수박을 집어넣었다. 팔을 두어 번 흔들어 보던 지원이는

  “휴─ 살았다.”

  숨을 폭 내 쉬곤 멀리서 다가오는 아이들을 힐끔 바라보았다. 신발주머니 깊이가 얕아서 수박등이 손등만큼 내 보인다.

  “야, 보인다. 수박이 너무 커.”

  수박이 큰 것이 결코 탓 될 일도 아니건만, 지원이는 수박이 큰 탓을 하면서 사방을 휘휘 둘러보다가 조회대 난간에 걸려 있던 체육복 점퍼를 벗겨서 신발주머니를 감쌌다.

  “야, 그거 내 껀데.”

  세영이가 외쳤지만, 지원이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졸지에 내가 수박을 끌어안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야 체육복을 가슴에 안고 있는 것처럼만 보이겠지만.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체육시간은 끝이 나버렸다. 나와 지원이, 세영이와 인정이는 잘 감춘 수박을 끌어안고 교실로 들어갔다. 다른 아이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나를 가운데에 두고, 세 아이들이 보호하면서 걸었다. 우리 넷의 눈빛 교환은 은밀했다. 다른 사람들 몰래 우리만의 비밀을 공유한다는 건 꽤 짜릿한 맛이 있었다. 더구나 뭔가 조금은 찜찜한 일, 곧 결코 선한 일이 아니며 들통이 난다면 비난을 받을 것이 분명한 비밀. 공범자로서 서로를 지켜줘야 한다는 희한한 사명감까지 생기는 그것. 누가 심어 가꾼 수박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공공의 장소에 심겨져 있었으므로 누구든 발견한 사람이 먹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이건 남의 것을 훔치는 게 아니다, 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었지만 마음이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수박은 너무나 잘 가꿔져 있었기 때문이다. 수박 줄기 주변은 잡초를 제거하면서 흙을 돋워 놓는 등, 사람의 손길이 확연했다. 당연히 수박이 저절로 나서 자랐다면 그렇게 상품가치가 있을 정도로 되진 못했을 것이다. 정성을 들여서 가꾼 사람이 있는 게 분명했다. 마음이 걸리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서로 입 밖에 내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다른 세 친구도 그렇게 생각할게 틀림없었다. 눈빛만 봐도 안다.

  교실에 들어가서도 우린 한 덩어리로 뭉쳐서 앉았다. 사태의 해결을 위해 의견을 나눠야 했다. 수박이 든 신발주머니는 책상 밑에 넣었다. 그리고 우리 넷은 머리를 가까이 모았다. 나는 책상 하나 건너에 앉은 은비를 보았다. 은비는 평온한 얼굴로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은비 옆에 앉은 영주와는 눈이 마주쳤다. 영주는 자주 자주 우리 쪽을 보고 있었던 거다. 영주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은비의 평온한 옆얼굴을 보면서 두 개의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부러움과 서운함. 은비와 나는 중학교에 들어와 2년 연속 같은 반이 되었다. 9개 반 중에서 같은 반이 될 확률은 높지 않았다. 보통 서너 명에 그친다. 더구나 지난해의 절친이 다시 같은 반이 될 확률은 정말 낮았다. 은비와 난 일학년 때 베프였다. 물론 지금은 더더더 베프다. 그런 은비가 지금 저렇게 무심하게 나를 돌아보지 조차 않고 있다. 절친이란, 무슨 일이든 같이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그런 생각에 서운했다. 그러나 부러움이 더 컸다. ‘그건 옳지 않아.’ 라고 서슬 푸르게 손을 딱 떼버리는 그 결단성. 부러움을 넘어서 그런 결단성을 가진 은비가 절친이라는 것이 은근히 자랑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허전함은 어쩔 수 없었다. 은비가 빠진 채 수박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지원이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듣고 있어? 왜 대답을 안 해?”

  지원이, 인정이, 세영이가 모두 나를 보고 있었다.

  “으응, 뭐?”

  “기집애. 고새 딴 생각을 하고 있냐? 화장실 가서 먹는 게 어떠냐고, 수박을.”

  지원이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화장실에? …….”

  나는 잠깐 대답을 머뭇거렸다. 뭔가 불현듯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가꾼 수박을 딴 일차적인 잘못을 조금이나마 보상하려면 수박의 처리문제는 공명정대해야 될 것 같았다. 우리끼리 숨어서 먹는 것은 잘못에 또 하나의 잘못을 더 얹는 게 아닐까. 나는 말했다.

  “아냐. 다 같이 먹자.”

  “뭐?”

  지원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영이 인정이도 마찬가지였다.

  “담임쌤 오시면 말해서, 애들 다 같이 먹자고.”

  모든 수업이 끝났으므로, 담임이 종례를 하기 위해 곧 교실에 올 것이었다.

  “미쳤어? 벌점 먹을 거야.”

  “발바닥을 맞을지도 모르고.”

  “다른 애들한테 욕먹을 걸.”

  셋이서 한마디씩 지껄였다. 나는 조용조용 차분하게 내 생각을 주장했다.

  “담쌤이 말이야. 허헛 자식들, 왜 그랬어? 뭐 어쩌겠냐? 이왕 따 온 수박이니 나눠 먹자. 허헛. 하고 말 하실 거 같애. 그럼 얼마나 좋아. 우리 지금 이 찝찝한 기분도 다 없어지고, 친구들하고 다 같이 수박 한쪽 씩 먹고 말이야. 아, 수박이 한 개 밖에 안 되니까 모자라면 우린 안 먹어도 되고. 난 이 방법이 가장 좋을 것 같아. 어때?”

  “첩첩.”

  세영이가 침을 입 속에서 모아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담쌤이 그렇게 안 나올 거 같은데. 평소에 하던 태도를 볼작시면 말이지. 무조건 벌점 먹는다에 난 한 표!”

  “난 발바닥 맞는다에 한 표! 넌 우리학교 3대 악당을 너무 물렁하게 본단 말이야.”

  그렇다. 우리 담임은 60여명에 이르는 교사들 중에 3대 악당으로 꼽힌다. 3대 악당 중에서도 첫 손가락이 틀림없을 거였다. 도교육청에서 학생인권조례를 만들고 절대, 결코, 교실에서 체벌이 있어선 안 된다고 지시가 내렸건만, 담임은 콧방귀였다. 두 팔을 머리위로 쭉 뻗어서 의자를 들고 서 있기 5분은 기본이고, 툭하면 발바닥을 회초리로 때렸다.

  ─너희가 학생인권이 있다면 나는 교사인권이 있다. 이게 나의 교권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장치야.

  담임은 주장이 분명했다. 그런 면에선 은비가 담임을 닮은 게 분명했다.

  “너는 발바닥을 맞아 본 적이 없지? 공부를 잘하니까.”

  발바닥을 자주 맞는 인정이가 말했다. 정말 그렇다. 나는 발바닥을 맞아 본 적이 없다. 의자 들기는 단체 벌이므로 무조건 들어야 하지만, 발바닥 맞는 건 개인 징벌이었다.

  인정이와 세영이의 극구반대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지원이도 말없이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말없는 지원이의 그 행동이 더욱 견고한 반대 표시로 느껴졌다. 난 답답했다. 왜 애들은 뉘우칠 줄을 모를까. 나도 이쯤에서 손을 떼버릴까. 나는 다시 은비를 바라보았다. 초연하고 편안한 모습. 지원이의 우발적인 행동에 은비는 재빠른 판단으로 결단을 하였다. 하지만 난 어떤가. 우유부단한 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그 알량한 우정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잘못된 일에 동참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 나도 사실 수박을 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지원이가 뚝 따버렸을 때, 야아~하고 외쳤지만 속으로 슬며시 쾌감도 있었던 걸 희미하게 기억한다. 그런데 이제 와서 손을 떼겠다고?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아이들을 설득해 보았다.

  “애들아, 그렇게 하자. 담쌤이 벌점 멕이면 먹고, 발바닥 때리면 맞자. 그게 속 편할 거 같애. 응?”

  나는 애절하게 호소하는 눈빛을 세 친구에게 보냈다. 반응은 싸늘했다.

  “난 못해!”

  인정이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고, 지원인 되려 나를 설득했다.

  “너 왜 그래? 넌 발바닥 안 맞아 봐서 모르는 거야. 마이 아파, 흑흑. 걍 우리끼리 먹어도 될 걸, 왜 일을 크게 만들어? 응? 화장실 가서 먹자, 응? 다정아.”

  지원이가 내 이름 다정이를 정말 다정하게 부르면서 말했다. 난 마음이 흔들렸다. 우유부단한 내 본색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우리 넷이 수박처리에 대하여 합의를 보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을 때, 담임이 불쑥 교실에 나타났다. 아이들이 제각각 떠들던 말소리를 낮추며 제 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담임은 실내를 한 바퀴 빙 둘러 본 다음, 천천히 말했다.

  “오늘은 별일 있었니?”

  “아뇨. 없었어요.”

  아이들이 늘 하던 습관처럼 합창을 했다. 담임은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각자 위치로.”

  담임은 교실을 나갔다. 담임은 바람처럼 교실을 다녀간 것이다. 나는 수박 얘기를 할 틈을 결코 잡을 수 없었다. 아니 담임이 별일 있었니? 하고 물었을 때가 수박 이야기를 할 틈이었지만 나는 그런 용기가 없었다. 담임이 별일 있었니? 하고 물었을 때, 인정이 지원이 세영이가 한꺼번에 나를 쳐다봤었다. 그때 만약, 내가 수박을 땄어요! 하고 말했다면? 그건 친구들을 배반하는 행위일까. 친구들을 악에서 구하는 행위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담임은 사라졌다. 담임이 긴 복도를 걸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 온 지원이가 말했다.

  “화장실가자. 수박 먹으러.”

  지원이의 목소리는 당당했다. 이제 나의 제안은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걸 지원이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거다. 그러니 남은 방법은 화장실행뿐이었으니. 그때 은비가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말했다.

  “다정아, 나 먼저 가 있을 게. 이따 보자.”

  은비가 먼저 가 있을 곳은 음악실이다. 대회가 얼마 남지 않아 방과 후에 합창 연습을 한 시간씩 한다. 은비와 나는 똑같이 알토파트다. 은비는 수박이 숨겨져 있는 내 책상 밑을 슬쩍 한 번 보고 돌아서서 교실을 나갔다. 하나로 묶인 긴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걸어가는 은비의 뒷모습이 무척 가벼워 보인다.

  은비가 나간 뒤 돌발사태가 벌어졌다. 갑자기 세영이가 수박을 덮은 자기 체육복을 들어 올린 것이다. 아직 교실엔 아이들이 여럿 남아 있는데도 말이다. 수박이 담긴 지원이의 신발주머니는 책상 밑에 있었으므로 물론 아이들에게 들키진 않았다.

  “애들아, 미안. 나 깜빡했어. 얼른 가봐야 해. 늦으면 엄마한테 죽는당. 우리 가족 오늘 외할머니네 가걸랑. 생신이라서. 정말 미안, 미안. 나 갈게.”

  말을 하면서 교실을 나가던 세영이. 그래서 ‘나 갈게’ 라는 말은, 복도에서 들려왔다. 엄청 바쁘고 급하다는 것이 그대로 행동에서 묻어났다. 세영이를 아무도 잡지 못했다. 아니 잡을 생각도 못했다는 게 맞는 말이다. 남은 인정이와 지원이, 나는 서로 멀뚱히 얼굴을 쳐다보았다. 세영이 다음은 인정이었다. 인정이가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말했다.

  “저기, 있잖아. 나도 사실, 얼른 가야 되거든. 수박을 먹고 싶기는 하지만…… 나, 그냥 갈게. 미안해. 나~~간다.”

  인정이도 가방을 둘러메고 교실을 나갔다. 지원이와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아니, 갑자기 우린 벙어리가 된 것이다. 지원이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나도 가야 되는 건가? 수박을 딴 사람은 지원이니까, 지원이 보고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면 그만 아닌가. 세영이도 인정이도 대놓고 그런 말은 없었지만, ‘미안해.’ 라는 말이 ‘지원이 니 책임이야.’ 라는 말과 동의어로 쓴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도 ‘지원아, 미안하다.’ 하고 가버리면 그만 아닌가.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릿속에 줄지어 일어나는 통에 말을 못하고 내가 우물거리고 있을 때, 지원이가 먼저 말했다.

  “저, 다정아. 나도…… 가야 되는데. 어떡하지? 이 수박. 나 신발주머니 가져가야 되는데.”

  정말 뜻밖의 말이었다. 지원이의 말을 나는 얼른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 무슨 말이야? 너도 간다고? 수박은 어떡하고.”

  “나도 집에 가야 되거든. 빨리. 니가 좀 해결 할 수 없을까? 이 수박.”

  “나 혼자?”

  “응. 다정아, 난 널 믿어, 헤헤. 넌 훌륭한 친구잖아. 공부도 잘하구.”

  지원이가 방글방글 웃는다. 나는 갑자기 이상하게 전개된 사태가 황당했지만, 지원이의 방실거리는 웃음은 너무 예뻤다. 마법에 홀리듯 나는 지원이의 웃음에 매료되었다. 다른 이의 영혼을 몸에 실은 무당이 그 영혼이 시키는 대로 말을 하듯 내 입에선 이런 말을 나왔다.

  “그래, 알았어. 내가 처리할게.”

  나는 말을 하는 내 입의 움직임을 느낄 수 없었다. 내 입에서 나와 내 귀에 들리는 목소리도 결코 내 것이 아니었다. 처음 듣는 듯한 낯선 목소리였다. 그러나 분명 그 말은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내 가방에 넣어.”

  나는 내 가방에 있던 책을 꺼내, 책상 서랍 속에 넣고, 가방 주둥이를 쫙 벌렸다. 지원인 신발주머니의 수박을 잽싸게 옮겼다. 나는 재빨리 가방의 지퍼를 닫았다. 지원이가 해맑게 웃으며 내 어깨를 톡톡 쳤다.

  “정말 정말 훌륭한 친구야, 다정이는.”

  “걱정마. 잘 됐지 뭐. 내가 집에 가져가서 먹을게.”

  나는 술술 말했다. 집에 가져가서 먹을게, 라는 말을 하면서 나는 내 목소리를 되찾았다. 그건 분명 내 목소리였다. 아주 익숙했다. 나는 귀에 익은 내 목소리를 되찾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집에 가져가서 엄마랑 아빠랑 먹으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썩 유쾌해졌다. 지원이와 나는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가면서 지원이는 내 가방을 두 손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오동통통 수~박, 아 머꼬 시포.”

  혀짤배기 소리까지 해가면서 지원이는 자꾸만 만져댔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면서 작은 소리로 주의를 줬다.

  “그만 만져. 누가 본단 말이야.”

  “헤에, 보긴 누가 봐. 봐도 누가 알어. 이렇게 쏘옥 들어가 있는데, 가방 속에 말이야. 아, 맛있겠당.”

  지원이는 옆에서 걷다가 아예 내 뒤로 돌아가서 가방을 만지면서 걸어왔다. 나는 걸음을 딱 멈췄다. 계단을 다 내려와서, 음악실이 있는 별관으로 가는 길과 교문 쪽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는 화단 앞에 섰을 때였다. 이리 저리 다니는 아이들이 꽤 많은 곳이다.

  “진짜 그만해. 들킨다구.”

  “들키긴 뭘.”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 같으면 내가 한 두어 번 주의를 주면, 곧 하던 행위를 멈추는 게 보통인데 오늘 지원인 뜻밖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수박에 집착하는 모습이었다.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이 컸는데, 그것이 잘 해결된 것에 대한 감정이 넘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다.

  “고마워서 그래?”

  “뭐라고?”

  지원인 내 말을 못 알아들었다. 나는 나만의 생각을 불쑥 말했으므로, 지원에게는 뜬금없기는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수정했다.

  “내가 수박 문제를 해결하니까, 고맙냐고.”

  “으응, 그렇지 뭐. 그래, 고맙다고 해야 되나? 너는 수박이 생겼는데, 나한테 안 고맙나? 이거 말이야.”

  지원인 또 가방을 건드렸다. 아주 수박의 선을 따라 두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둘이 그러고 섰을 때, 같은 반 친구인 민아가 다가왔다.

  “너희들 뭐해? 다정이 가방에 뭐 있어? 먹는 거지?”

  “아…… 아니.”

  내가 약간 말을 더듬었다. 얼굴에 조금 당황스러워 하는 빛도 나타났으리라. 민아가 그걸 놓칠 리가 없다.

  “이거, 수상한데. 뭐야? 과자야? 같이 먹자야. 친구 좋은 게 뭐니. 우린 같은 반에다, 합창도 같이 하잖아. 이게 보통 인연이야? 맛있는 건 같이 먹어야지. 가방 속에 꽁꽁 숨겨두고 혼자 먹을 거야? 그럼 배탈 나. 안 그래? 지원아?”

  어휴, 기집애. 뭐 이런 수다쟁이가 다 있나. 그 짧은 순간에 많이도 주워 섬겼다. 민아가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의견을 묻자 지원인 피식 웃었다.

  “그, 그래. 같이 먹어야지.”

  “맞지? 지원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보자, 뭔가. 되게 궁금해.”

  민아는 물을 차고 날아오르는 제비보다도 빠른 속도로 내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나는 눈을 뜬 채로 코를 베인다는 게 꼭 이런 심정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엥? 이게 뭐야? 이거 진짜야, 모조품이야?”

  “진짜야.”

  나는 얼른 가방을 벗어서 가슴에 안으며 지퍼를 닫았다. 민아가 가방을 뺏으러 대들며 물었다.

  “그거 어디서 난 거야? 혹시, 조회대 옆에서 딴 거?”

  가슴이 콕 찔렸다. 지원이도 똑 같은 느낌이었나 보다. 입을 삐죽하며 나에게 두 손을 벌려 보였다. 말없이 선 지원이와 나를 번갈아 보며 민아가 말했다.

  “맞구나. 헐, 대박! 야, 뭔 짓을 한 거니? 니들 클났다. 그거 교장쌤 수박이야.”

  “뭐?”

  두 사람 잎에서 놀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마 이때 지원이와 내 눈의 크기는 황소 눈만 했을 것이다.

  “몰랐어? 교장쌤이 지극정성으로 가꾼다고 소문이 짜하잖아. 그거 모르는 애들 없는데, 이상하네. 니들은 그걸 알고도 딴 거? 교장쌤한테 뭐, 저항할 거 있삼?”

  교장샘의 얼굴이 절로 떠오른다. 평소에도 눈 꼬리가 위로 살짝 들려 있고, 눈 꼬리를 따라서인지는 몰라도 입 꼬리도 들려 있는 세모꼴 얼굴. 교장샘의 별명은 늙은 여우였다. 눈빛 하나만으로도 전교생을 침묵시킬 수 있는, 그 카리스마. 지원이는 금세 울상이 되었다.

  “어, 어떡하지?”

  “뭘 어떡해. 빨리 돌려 놔야지.”

  민아가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감은 잡았으나, 나는 확인하기 위하여 다시 물었다.

  “돌려놓다니?”

  “수박을 있던데 갖다놓으라고.”

  “딴 거를? 그건 양심을 속이는 일이잖아.”

  “허허 참. 지금 양심 따지게 생겼니? 교장쌤이 알면 너 감당할 수 있어?”

  “…….”

  나는 선뜻 대답을 못했다. 지원이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다정아. 민아 말대로 하자. 얼른 수박 갖다 놓자. 갖다 놓고 집에 가게. 응?”

  지원인 벌레 씹은 얼굴이 되어 있다. 조금 전 교실에서 나와 건물 계단을 내려올 때 즐거워하던 얼굴과는 전혀 딴판이다. 나는 망설여졌다. 이건 작은 잘못에 대한 징벌을 피하기 위하여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력 접착제가 땅과 내 발바닥을 붙여 놓은 느낌이 들었다. 지원이와 민아가 나를 잡아 당겼지만 내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지원아, 이건 아닌 거 같아.”

  “뭐가, 아냐. 빨리, 갖다 놓고 가자. 에이, 짜증난다, 정말. 망할 수박.”

  지원이 말이 거칠어졌다. 얼굴도 많이 일그러졌다.

  “너 가기 싫으면 내가 할게. 가방 이리 줘. 어차피 내가 땄으니까, 내 꺼잖아.”

  지원이가 가방을 잡고 뺏으러 들었다. 나는 가방을 강하게 잡았다. 그러나 지원이 보다는 내가 힘에 있어서 한 수 위다. 지원이는 힘이 약해 맘대로 되지 않자, 발을 구르며 식식거렸다. 눈에선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너 정말 왜 그래? 너만 양심적이야? 나는 도둑이구?”

  지원인 말을 하다보니까, 더욱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우리가 친한 친구라는 것도 잊어버린 게 틀림없었다. 나에게 이런 말을 쏟아 놓고 뛰어 가버렸다.

  “그래, 잘난 니가 알아서 해. 난 갈 거야.”

  정말, 진짜, 욱하기 대장, 지원이답다. 나는 달아나는 지원이 뒷모습을 보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누가 보더라도 지원이는 저렇게 가버려선 안 되는 거였다. 어째서 이런 비현실적인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원이와 내가 아웅다웅하는 걸,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던 민아도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더니 돌아서서 별관 음악실로 가버렸다. 마침내, 나는 우두커니 혼자 서 있게 되었다. 갑자기 가방이 너무나 무거웠다. 마치 가방 안에 바윗덩어리라도 들은 것 같았다. 가방을 들고 서 있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도대체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나는 지퍼를 조금 열어서 수박을 내려다보았다. 수박은 가방 안에서 싱싱했다. 날은 더워 땀이 흐른다. 녹색 바탕에 검푸른 줄이 죽죽 그어진 그 수박을 바라보고 있자니, 입 속에 침이 고인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반을 뚝 갈라 랩을 씌워 냉장고에 넣어 뒀다가 먹거나, 고무함지에 얼음덩이와 함께 통째로 넣어 뒀다가 큼직하게 쩍쩍 갈라 먹었으면. 혹시 또 아나. 요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엄마, 아빠에게 이 수박이 한 번 웃음을 줄지도 모른다. 저녁에 수박파티를 벌이면서, ‘그게 학교 화단에 있었어? 웃긴다, 얘.’ 라는 엄마 말에, 유쾌한 한때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수박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나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밉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민의 늪에 푹 빠진 내 어깨를 건드리는 손이 있었다. 은비였다.

  “여기 있을 거라고 해서……. 민아가.”

  “…….”

  나는 하마터면 눈물을 찔끔거릴 뻔했다.

  “그거 어쩌려고?”

  은비가 손가락으로 내 가방을 가리켰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박을 가리킨 것이지만.

  “글쎄, 어, 어쩌지?”

  “있던 데 갖다 둬. 끌어안고 끙끙대지 말고.”

  역시 은비는 울트라 쿨녀다. 아니, 명쾌하다고 해야 하나.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런 내 망설임을 은비는 두고 보지 않는다.

  “합창쌤 아까 오셨어. 빨리 가야 돼.”

  은비가 내 손을 잡아끌었을 때, 내 발은 아주 쉽게 움직였다. 조회대 옆으로 가서, 수박을 제자리에 놓았다. 내가 가방에서 수박을 꺼낼 때, 은비가 옷을 좍 펴서 가려주었다. 은비와 손을 잡고 음악실로 걸어가는 발걸음은 날아가는 것 같았다. 등에 맨 가방이 날개로 변한 것인지도 몰랐다.

  은비가 내 손을 잡았을 때, 나는 모든 걸 다 잊어버렸다. 꼭지가 떨어진 수박을 마치 처음부터 따지 않았던 것처럼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인 일인지도. 줄기에서 분리되어 물을 공급받지 못해 배배 뒤틀려 마르다가 썩어갈 수박의 아픔 따위도. 그런 것들은 나의 양심을 건드리지 않았다. 다만 은비의 손이 따뜻했을 뿐이었다.

 

 

 

작가소개


장주식(소설가)


서울교육대학교와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을 졸업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도 쓰며 산다. 서울살이 20년을 정리하고 여주로 내려온 뒤, 몇몇 사람들과 함께 고전을 읽는 재미를 붙였다. ‘논어 읽기’는 그 가운데 하나다. 지금까지 세상에 펴낸 책으로는 동화 『그리운 매화향기』, 『토끼 청설모 까치』, 『바랑골 왕코와 백석이』, 그림책 『강아지똥 할아버지』, 소설 『순간들』, 옛이야기 『오줌에 잠긴 산』, 『토끼전』, 교육 산문집 『하호아이들은 왜 학교가 좋을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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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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