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현피

  • 작성일 2012-07-18
  • 조회수 683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첫 번째

 

현피*

(*‘현실’과 ‘PK(Player Kill, 상대를 죽인다는 게임 용어)’의 앞 글자를 딴 합성어.)

 

정미

 

 

 

 





   1.

 

   주먹이 코에 달린 전사가 어디 있느냐고?

   본 적 없으면 아는 체 마. 여기 행복주택 404호에 분명히 있으니까. 낡고 오래된 우리의 집, 아니 내 행성. 아니 내 세상에 말이야.

   어느 날 갑자기! 학교를 바래다주는 엄마에게 차 속에서 말했지.

   “내가 자살해버리길 바라요? 살길 원해요?”

   엄마는 벌벌벌 떨면서 살아있기를 애원하다, 협박하다가 결국엔 포기했지. 그때부터 난 학교라는 행성에서 끙끙 찔찔거리지 않아도 됐어.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TV 채널을 눌러대다가, 내가 원하는 대로 작동하는 컴퓨터를 시시각각 부리곤 했지. 통신망을 돌아다니며 익명의 친구와의 채팅이, 채팅보다 게임이 나를 편안케 해. 그것도 시들해지면 다른 행성들을 탐색하느라 책도 뒤적이면서. 흠, 행복이라는 내 행성의 이름에 걸맞게 살게 된 거야. 불과 몇 개월밖에 안 되었지만.

   바깥세상? 그까짓 것!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한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의 궁극적인 목표가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걸 추구하면서 얼마나 행복하게 살다가 죽느냐’라며(?) 크크. 그렇다면 난 벌써 그 경지에 있지 않은가. 바깥세상에서 아등바등 경쟁하며 먹는 밥이나, 내 행성에서 먹는 눈칫밥이 차이 나야 얼마나 나겠는가. 어차피 바깥세상은 내가 아프든, 굶든, 죽든…… 지금처럼, 주먹이 코에 달린 전사가 침입해 내 행성을 짓밟든 아무 상관없이 쌩쌩 잘 돌아갈 게 아니냐 말이야!

   살다 보면 별별 일을 다 겪게 된다고 엄마가 말했지. 그런 날에는 불안해서 그릇을 깨뜨리게 된다고. 그러면서 나랑 눈 한번 맞추지 않고, 뭔가에 쫓기듯 바깥세상으로 떠나더라고. 가만 생각해 보니 깊은 밤에 엄마가 서럽게 서럽게 울었던 것도 같아. 그래서였을까. 왠지 불안해지면서 엄마가 말한 그런 날이 내게 처음으로 다가오는구나 싶었어.

   내가 주먹코전사라고 명하고. 한 행성인이 불법 사채업자라고 말한 그가 나타난 그날, 아빠는 아침부터 혼자 술을 마셔댔어. ‘끄억끄억’ 울면서. 그럴수록 난 자꾸 어른이 우는 게 우스꽝스럽게 여겨졌지. 덩치라도 작으면 똥 씹는 기분이 덜 들었을 텐데. 갑자기 십년은 더 늙어 보이는 아빠. 그 어떤 말로도 아빠의 눈물을 그치게 할 수 없을 것 같았지.

   “인생 헛살았어야. 낚시에 빠져 산 것 말고는 성실히 살았는데…… 너도 못난 아비가 밉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간다냐? 빈털터리 돼버렸어, 내가……”

   신세 한탄을 들으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그래 넌 무능력자였어, 엄마한테만 다 맡겨놓고 한량처럼 돌아쳤잖아, 그래놓고 이제 와서 뭔 후회야? 대책 없는 징징거림이 성가셔서 막 짜증만 솟구치는 거야. 그때부터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낯모르는 행성인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어. 아, 죽을 맛이었지. 귀찮아서!

   “어떡해! 내 금쪽같은 돈! 내 돈! 다른 집 것은 다 두고라도 우리 돈은 내놓아야 혀! 세상에 내가 미쳤지. 이자 몇 푼에 눈멀어 이렇게 되다니…… 오냐, 남의 돈 무서운 줄 모르고 겁대가리 없이 가게 확장하더니!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콩밥 먹고 싶지 않으면 빨리 내놔. 이 집 나한테 안 넘기면 고소할 거야! 고소!”

   기름기 잘잘 흐르는 행성인이 돼지 멱따는 소리로 악쓰며 바닥을 쳐댔지.

   “고소하든지 죽이든지 맘대로들 하세요……. 나도 살고 싶지 않으니까.”

   행성인들에게 멱살 잡혀 끌려 다니던 아빠가 캑캑거리다가 겨우 찍소리를 냈어. 그 말에 한 행성인이 아빠 향해 스트레이트 펀치를 무자비하게 날리고, 바닥으로 나자빠지자 발로 짓밟는 거야. 뭐야, 진짜. 왜 내 행성에서 영화 찍고 지랄이야, 짱나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던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땅속으로 푹 꺼져버리고 싶었어. 아, 근데, 게임에서처럼 분신술이 안 통하잖아……. 그래도 아빤데 그냥 모른 척할 수만은 없었지. 낚싯대를 휘둘러 닥치는 대로 패버려? 맘속으로만 수백 번도 더 행성인들을 마구 작살내고 있을 때였지. 그 순간에 짜잔! 우락부락한 얼굴에 코가 주먹만 한 전사가 바람처럼 나타나 흥분한 행성인들로부터 멱살잡이 당하는 아빠를 구해주더라고.

   “아, 첫째도 침착, 둘째도 침착하잖께요. 이러면 우리가 고발당합니다. 가택 침입 난동죄로!”

   무슨 구호 같은 말 몇 마디로 행성인들을 딱 장악해버리는 그는 정말이지 게임 속에 나오는 영웅이었어! 낮게 뇌까리는 그의 말은 이상한 힘이 실려 있어서 사람들을 움찔하게 하였거든. 물론 뒤늦게 불시착한 행성인 하나가 눈치코치 없이 악을 바락바락 쓰기도 하고, 몇 명의 행성인들이 더 몰려와 소란피우기도 했지만, 새벽녘이 되어서는 다 돌아들 갔지. 아니, 주먹코전사의 위력에 풀이 죽어 분해돼버렸다고 해야 하나. 행성인들이 다 사라지자 이빨을 드러낸 개처럼 주먹코전사는 아빠에게 주먹을 갖다 대며 으르렁거렸지. 엄마 연락처를 대라는 거였어. 짜고 치는 고스톱인줄 다 안다면서! 그럼, 엄마 아빠가 계획적으로 판을 뒤집었다는 뜻? 그건 잘 모르겠고. 그렇게 한참을 아빠의 가슴을 쥐어틀다가 둘러메고 온 이불을 소파 앞에 차악 펼쳐 눕더라고.

   아빠는 ‘케에캑’ 기침을 해대며 토해댔지. 얼굴이 눈물콧물로 엉망이었대도 난 닦아주지 않았어. 주먹코전사보다 덩치도 좋으면서 맨바닥에 새우처럼 오그라드는 모습이 정말 한심하였기 때문이야. 글고, 난장판이 된 행성보다는 채팅과 게임으로 세월을 죽이지 못한 하루가 더 안타깝더라고. 그래서 지칠 대로 지쳤는데도 컴퓨터 앞에 앉았어. 게임을 시작했지. 이제야 살 것 같아, 게임을 계속하니까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흘러가…… 나의 행성에서는 내가 잠드는 때가 밤일뿐이지.

 

 

2.

 

   “아그야! 야이, 아새끼야! 일어나 봐. 니 애비마저 토껴부렀다. 나가 한숨 껌뻑한 새에 사라져버렸다 안카나! 갈만한 곳을 다 뒤졌는데 찾을 수 없어야. 설마 널 두고 네 애비마저 도망이야 쳤겠냐싶어서 기냥 들어와 부렀지만서두! 나가, 나가 이런 실수를 다 허다니……”

   주먹코전사가 노기로 입술을 바르르 떨면서 나를 잡아 흔들었어. 게임하다가 나도 모르게 쓰러져 잠들었던 모양이야. 침대에 기어들어간 기억이 없는데 침대에 누워있더라고. 오후 네 시가 되어서야 깨어난 거였지.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갔어. 거실 한구석에서 새우잠 자던 아빠가 보이지 않았지.

   “헐, 어제 일이 전부 꿈인 줄 알았는데…….”

   “니미, 올해 재수 옴 붙었나. 썅! 내두 꿈이었으면 싶다카이.”

   주먹코전사가 담배연기를 확 뿜었어. 그러고는 화투장 내리치면서 쌍욕을 연신 해댔지. 물론 혼자. 그는 우리 행성에 들어와 앉은 자리, 거실 소파 앞바닥에 둥지를 틀었지. 이렇게 얘기하면 꽤나 예의가 있는 전사 같지? 하지만 그는 직업상 남의 물건을 눈곱만큼이라도 손 안대고, 전부를 가져가는, 돈 받는 데 고수라고 했어. 하지만 나 또한 말하자면, 게임 레벨 올리는 데서는 한 끗발 날리는 용사 아닌가. 아무리 어느 날부터 집에만 죽치고 있다 해도 저런 전사 하나쯤은 누워서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지. 동네에 소문나지 않게 일을 처리하려면, 보기 싫은 사람도 참아야하고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한다는 것. 즉, 내 행성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 주먹코전사의 비위를 맞추기로 한 거야. 온라인 게임 대신, 오프라인 게임을 하기로!

   “저어, 아저씨, 아저씨도 식사하실래요?”

   “밥 말고 라면, 거·……머시냐! 화끈하게 매운 라면. 신나, 신나, 그 신…… 뭔 라면 있잖냐? 속 좀 확 풀리게! 뭐, 괜히 살림에 손댔다간 큰일나니께. 걸로 걸로 부탁헌다잉!”

   주먹코전사는 신나, 신나,를 일부러 이빨을 내리찍으면서 동시에 으득 이를 간듯 발음했어. 라면, 솔직히 내 손으로 한 번도 끓여본 적이 없었지. 언제나 엄마가 내게 필요한 모든 걸 다 해결해 주었으니까.

   “저, 전사, 아니, 아저씨, 라면 다 끓었는데요.”

   “오키토끼! 오키토끼!”

   주먹코전사의 말을, 나는 처음에 게임의 용어로 알아들었어.

   도대체 그 말의 어원을 알 수 없는 오키토끼의 뜻은 오토바이 키, 토낄 토깽이,란 뜻이래. 주먹 세계에서 손을 털고서부터 불법 사채 바닥에서 오토바이 타고 날아다닌다는 전사는, 나처럼 허여멀건 우리 아빠 같은 인간이 가장 재수 없대. 나사가 빠져도 몇 개는 빠졌을 거라나? 사내구실도 못할 기생오라비 같은 게, 뭐 한 대 후려칠 거리도 못 돼서 주먹이 마악 운대. 난 아빠 같은 인간이 아닌데. 비록 사이버에서지만, 게임에 들어갔다 하면 그 세상을 순식간에 장악해버리는데……. 그런 용사를 몰라보는 주먹코전사가 밥이 넘어가지 않을 만큼 재수 없었지. 단지 빚쟁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행성에 무단 침입해 공격을 해대는 난폭한 주먹코전사. 빨리 무찔러, 내 행성에서 추방해 버려야 할 텐데!

   주먹코전사가 옆구리에 차고 있던 가죽 가방에서 종이뭉치를 꺼냈어. 종이를 몇 장 넘기더니 한 장을 끄집어냈지. 그걸 읽으면서 오른손으론 화장지로 입술에 묻은 라면국물을 쓱쓱 닦아.

   “아새끼야, 요게 뭔 서륜 줄이나 아나?”

   입술에 붙은 화장지를 떼려는지 전사가 누런 이빨로 아랫입술을 깨물어. 큰 주먹코가 힘을 뺀 주먹처럼 퍼졌지.

   “아, 아뇨, 전 아무것도 몰라요.”

   “지랄헌다. 그니까, 니 집이 이 꼴로 쫄딱 망해부렀제. 이거이 바로 차용증서라는 거시다. 이거 땜에 니 엄마아빠가 빼도 박도 못 한다는 말이시. 근데, 이 404호가 니 에미 앞으로 돼있어부러야. 그렇다혀도 돈 못 받아낼 나가 아니지만 말이제. 아암. 아, 고건 고렇코, 아무리 아새끼라도 그렇지. 아새끼가 니 하나면 집안이 뭔 꼴로 돌아가는지는 알었어야지? 엉?……. 하긴, 고런 정신이었면 멀쩡히 댕기던 핵굘 안 가고 집구석지에만 처백혀있지도 않겄지. 니도 어느 날 갑재기 몸에서 나사가 빠져버린 기야. 아니가? 공부도 핼만큼 했다믄서 와 핵교는 안 댕기고 자빠져부린겨? 와?…….”

   전사가 이빨로 윗입술을 긁어내리면서 나를 쳐다봐. 이빨로 긁어모은 라면국물은 어떤 맛일까. 불현듯 구역질이 확 느껴져 눈길을 내리깔았어.

   ‘저 종잇장만 찢어버리면, 내 행성을 되찾을 수 있는 거잖아.’

   번개처럼 떠오른 묘책을 들킬까봐 나는 아무런 말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지. 할 말도 없었지만.

   “하기사, 내 코가 넉잔데, 남의 아새끼 걱정할 처지가 아니제. 니 에미 어딨는지나 대라잉. 왕자님 대하듯 갈켜온 아새끼한테 연락처 안 냄기고 떠날 니 에미가 아니니께. 존말할 때 빨리 불어잉. 글구, 신고헌다고 아가리 벌려 설쳐대면 알제?…….”

   가래가 낀 듯한 목소리로 나를 협박했어. 아귀처럼 달려든 전사에게 이미 팔 하나가 잡혀 있었고, 주먹은 가슴을 치고 있었지. 나를 노려보는 눈빛에 소름이 확 끼치더라고. 그때 떠오른 생각이 뭔지 알아? 어쩐 일인지 난 엄마가 우리를 떠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였지. 그래서 지금껏 엄마를 기다리지 않았던 모양이야. 씨팔, 찔끔, 눈물이 났어. 생활력 없어서 엄마한테 빌빌거렸던……. 아빠를 기다리고 있는 내가 한심스러웠지. 망할, 이 성가심으로부터, 아니, 공포에서 해방되고픈 생각으로.

   그런데 오갈 데 없어서 금방 돌아올 줄 알았던 아빠한테서도 아직 아무 연락이 없어. 아빠 휴대폰에 몇 번 연락해 봤지만 먹통이야.

   ‘별일 없을 거야. 이보다 더 나빠질 순 없어.’

   나 스스로 위로해 보았지만 이따금 불길한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 하루, 이틀, 사흘…… 하루하루가 너무 길어서 몇 년이 흐른 것 같아. 엄마 아빠가 외출한 행성에서 나 혼자 놀던 하루와는 정말 다른 시간이야. 술 안 마셨을 때의 주먹코전사는 요령껏 나를 구워삶았고, 술 취하면 난폭한 요구로 사람을 못살게 했지. 누군가 초인종을 눌러대도 인기척을 할 수 없었어. 주먹을 내 면상까지 들이대며 부르르 떨던 전사가, 컴퓨터하는 내게 로또 복권을 맞춰보게 했어. 컴퓨터 검색은 내 전공이잖아.

   “아, 일등허게만 해줘불면 나가 이롬코롬 험하게, 드럽게 살지 않겠구먼요. 거시기 좀 잘못 놀려 요케 된 것 용서해 주시거요. 아, 우리 아새끼들 생각혀서, 대박! 아니, 제발 이등이라도 허게 해주세유! 하늘님, 조상님, 아버님, 행님…….”

   간절히, 무릎까지 꿇은 전사는 진짜 웃기는 짬뽕이야. 저토록 웃긴 코미디가 있나싶어서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어. 한데도 로또복권은 한 장 빼곤 모두 꽝이었지. 본전치기한 로또로 다시 사면 대박날 수 있다나? 대대~박!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주먹코전사는 김이 빠져버렸는지, 그걸 나한테 던져주고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 아마도 내가 로또를 바꾸러 바깥으로 못 나가는 인간이라는 걸 알아서겠지. 마트에 갈 때도 날 감시하거나 시키지 않았으니까.

   로또 복권은 나의 행성을 되찾을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이었지. 물론 한 방에 당첨되어야 가능한 일이지만, 물 위의 지푸라기 같은 희망도 내겐 너무 절실해. 전사가 돌려 달랠까봐 얼른 바짓주머니에 넣었어. 당첨된 로또인 것처럼 막 가슴이 뛰더라고, 어디서 바꿀지도 저절로 떠올랐어. 버스 정류장 건너편에 있는 곳, 제법 높은 상금까지 당첨된 곳이라는 광고가 붙어 있었지. 주먹코전사의 생각처럼 로또를 바꾸러 바깥세상으로 나가지도 못할 거면서, 그럴 거면서, 흑흑……. 그런데 그곳을 떠올리자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여자애가 떠오르는 거야. 로또 판매점 옆의 분식점에서 엄마를 돕던 웃기도 잘 웃던 여자애가. 내게 휴대폰이 없는 게 처음으로 난감했지. 집전화로? 하긴 여자애 전화번호도 모르잖아. 하지만 내가 누구야? 네이트온에서 그 여자애를 찾기 시작했어.

   ‘그래, 그 애라면 날 도와줄 거야. 날 좋아하는 눈치였으니까. 불현듯 걔가 떠오른 것도 우연이 아니야. 분명 로또에 당첨될 운명인 거야! 그 애의 밝고 경쾌한 웃음소리……. 걔 생각하니까, 조금 기운이 나! 좋아, 넹~ 좋아요. 하느님! 로또에 꼭 당첨되게 해 주세요. 일등이 어려우면 이등이라도. 아니, 사정이 급하니까, 삼등도 괜찮아요. 하지만 사, 사등은 안 돼요. 상금이 너무 짜더라고요. 당첨되는 게 어마어마한 확률이라고 해도 전지전능한 하느님한테는 아주 쉬운 일이잖아요. 그쵸? 그쵸? 그러니 제발 당첨되게만 해주세요. 하느님, 착한 사람 되려 노력하고, 바깥세상, 바깥세상에도……. 나가……. 보도록 해볼게요. 하느님한테는 관심 없는 일이겠지만, 저 진짜 힘든 미끼를 던지는 거예요. 미끼? 아, 계약 조건요. 그니까, 당첨! 꼭이요. 꼭…… 제발요, 하느님. 그런데 걔는 왜 이렇게 네이트온에 안 나타나? 당장 접속 좀 하게 해줘요. 그럼 다른 부탁은 안 할게요. 아냐, 안 돼! 이런 바보탱이……. 그러면 내 행성을 되찾을 수 없게 되잖아. 그건 아니고요……. 제가 잘할게요, 학교 중단한 벌도 나중에 꼬옥 받을게요. 맘씨 좋은 하느님, 먼저는 로또에 꼭 당첨되게 해주고, 또 걔도 접속하게 해 주삼! 꼭이요, 꼭……. 아, 제발 좀 나타나라, 빨리, 빨리…… 띠딩!

 

   걔: 와우! 방가, 방가. 진짜 너얌?

   나: ^^ ……오키…… 근데 왜 이제야 접속?

   걔: 야아, 학교 갔다 왔지. ㅠㅠ 아, 왕 부러버. 학교서 썩지 않아도 되공.

   나: 학교 간 시간이라는 걸 깜깜…….ㅋㅋ

   걔: 쫌 뻘쭘하지만, 늘 궁금……못 참아 그러는데, 갑자기 학굔 왜 관둔 거얌?

   나: 왜 관뒀지? 왜 관뒀을까? 어느 날 갑자기 왜 그만둔 걸까? ㅎㅎ……

        (아는 사람과의 채팅은 피곤한 일이다)

   걔: 짱나면 말 안 해도……. 맞아! 지루했을 거얌. 공부하고 학교가고 학교가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고……나도 빙빙 돌거덩. 엄마랑 먹고사는 거 급해서 그런 생각 집치고 있지만, 아, 헤드 빙빙빙. 그니깐 닌 계속 돌아가는 쳇바퀴가 무료해서 뛰어내린 거! 얌?

   나: ……?……, ……?……

   걔: 다른 뜻 없공. 울 엄마 말쌈이, 일본처럼 쓰나미나 그런 거 뭐냐, 고난 겪을수록 사 람들은 더 살려고 발버둥……동물도, 식물도. 엄마처럼 악착같이! 복지국 스위스가 자살 많은 이유 알잔?……. 이딴 얘기, 미앙.

   나: 그럴까? 그랬을까? 그런 것도 같넹. 뭐, 멍 때리지만.

   걔: 근데……진짜야? 집에 난리 났다는 소문?…… 또 미앙.

   나: 그런가방. 전사가 나타난 걸 보면……. (아는 사람과의 채팅은 진짜 피곤하다)

   걔: 전사? 여유ㅋㅋ 너네 엄마 너라면 @@였잖아. 곧 연락할 거양.

   나: 집 전화 엄마한테 돌려놨거덩……. 고객님 전화도 꺼져있뎅.

   걔: 야이, 그 상황에 전화하겠냐? 니가 컴퓨터광이니깐두루……메일로 연락하겠징.

   나: 짜앙, 니 머리. 확인 사살 노~ㅎ

   걔: 깔깔깔. 근데, 날 찾은 건 무삼일?

   나: …………

   걔: 지금 씹는 거얌얌? 나두 바쁘단 말씀. 분식점 도와줘야뎅.

   나: …………

   걔: 화장실 갔삼?……갔삼?……

 

   여자애의 웃는 모습이 떠올라서, 나는 계속 걔와 접속하고 싶었어. 그런데 더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지. 전사가 만취하자 다시 섬뜩한 행악질을 시작했기 때문이었어. 나사? 맞아. 아빠에게, 나에게 나사가 빠졌다고 했지만. 주먹코전사야말로 술 취하면 나사가 다 망가져버린 것 같았지.

 

 

3.

 

   “일루 와, 아새끼야!”

   매번 이렇게 시작했어. 후다닥. 벌건 눈으로 베란다의 빨랫줄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려. 몇 병의 술을 벌컥벌컥 마셔치운 주먹코전사가 엄마 원피스를 걷어오라고 명령한 거지. 며칠째 빨랫줄에 널려있던, 자잘한 연분홍 꽃무늬가 예쁜 원피스. 오늘은 이 야들야들한 원피스를 가지고 뭘 하려는 걸까? 만취했을 때마다 나를 세워놓고 황당한 요구를 했거든.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원투 잽을 날리는, 저 주먹! 저 눈빛! 몸이 저절로 움찔해지지. 내 행성 앞을 지나가는 이들도 상상 못할 거야. 벽 하나를 두고 이리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는 사실. 바깥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그렇지. 저녁때가 되면 가족끼리 김치에 밥을 먹으며, 텔레비전 보면서 그날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행복하리라고……. 비록 자기는 그렇게 못 살더라도 다른 이들은 그렇게들 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지. 간혹 튀어나온 타인의 불행에 혀를 차면서 자신의 행복을 안도하면서.

   “야이, 아새끼야, 뭔 생각에 글케 멍해! 니도 니 에미 생각허제? 그려, 그래서 허는 말인데. 그 원피스를 입어. 그러고, 나랑 포끄 땐스를 추는 거제. 빨랑 입고 즐겁게 땐스를 추잖께. 차차차도 괘않고, 투, 쓰리, 포, 앤, 완……”

   주먹코전사가 비척걸음으로 다가와 오자 나는 얼른 원피스를 입었어. 한 대라도 맞으면 내 손해잖아. 전사가 술 냄새를 풍기며 나에게 엉겨 붙었어. 내 손을 잡고 몸을 밀었다 당겼다 해.

   “슬로우 슬로우 뀍뀍. 니 에미처럼 야들야들은 안 혀도, 흠흠 에미 향기나니까 좋아 부러. 치마를 입었으면 니 에미처럼 춰야제, 뭐혀? 투, 쓰리, 포, 앤, 완…… 슬로우 슬로우 뀍뀍. 와 이리 뻣뻣헌 겨, 엉?”

   빨리 몸을 움직여야지. 노래. 노래를 들어야 잘 되는데. 아이돌 가수들을 상상이라도 해볼까. 신나는 댄스곡을 생각해도, 몸매 쭉빵인 걸그룹을 떠올려도 춤이 춰지지 않아. 망할, 몸만 부르르 떨려. 지금 혹시 길고 긴 악몽을 꾸는 중 아닐까. 숨이 막혀 전사를 확 밀쳐버리고만 싶었지.

   “이, 아새끼 좀 봐. 이것도 못 혀? 고럼, 나가 룰라라 추게 해주지. 치마를 더 나풀나풀허게 찢어 불면 되제. 마를린몰러의 치맛자락처럼잉.”

   이 상놈의 자슥아 그래, 찢자, 가닥가닥 찢어 불자, 내뱉으며. 드드득 나이프를 빼들었어. 경박하게 침 흘리며 한손으론 원피스자락을 잡아당기고서, 원피스 꽃무늬에 칼날을 찔러 넣었어. 툭, 툭, 툭…… 행성이 빠르게 게임 속 세상으로 바뀌고 있어. 내 행성의 유일한 말벗이자 적, 주먹코전사도 점점 나와 싸워야하는 괴물로 변신 중이야. 얼굴이 헐크처럼 되어 부릅뜬 눈알이 곧 튀어나올 것 같아.

   “간단혀, 찢자. 니 애미를 그래부렀어야했는디, 그래부렀으면 일이 요 모양 요 꼴? 하, 환장허겄네. 환장하겠어. 이 원피스가 니 에미인기라 좍, 쫘악……. 찢어 발겨불자. 니 에미를!”

   “이 새끼야! 엄말 그렇게 하지 마! 우리 엄마를 그러면 가만 안 둘 거야!”

   “어쭈, 이 새끼야? 생쑈하고 자빠졌네. 그래, 가만 안 두면 우짤 건데, 아새끼야!”

   감히 엄마를 칼질해버리겠다는 말에 분노가 폭발했나 봐. 그때 처음으로 주먹코전사를 직접 처치해버리겠다는 생각을 했지. 그건 강한 충동이었고 나를 성가시게 하는 상황에 대한 저주에서 비롯된 것이었어! 계속 강도가 세지는 펀치와 폭언, 비열한 호의와 요구! 창밖은 어두워. 아니 먼 곳에서부터 어둠이 밀려오는 게 느껴져. 겁이 나, 그런데도 어쩐 일인지 피를 보고 싶어. 아니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아. 결국 내가 미쳤나봐.

   “죽여 버릴 거야! 다아! 죽여 버릴 꺼야!”

   “고래? 나두 그만 팍 죽고 싶으니깐, 죽여봐라. 아새끼야! 자, 칼 여깄다. 칼을 줘도 못 받고 와 바르르 떠는데? 무섭제잉, 엉? 빨리 받으란께!”

   주먹코전사가, 아니 주먹코괴물이 비틀비틀 다가와. 다가와서는 내 손목을 확 잡더니 칼을 줘주는 거야. 바르르 떨고 있는 내 손에 억지로. 그렇게 나를 사나운 용사로 변신시켜주었어. 지금부터 진짜 전투야.

   “저, 저리 가! 가까이 오면, 가, 가만 안 둘 거예욧!”

   “하고, 하고 무서버라! 내 칼보다 니가 무서버서, 시키는 대로 다 헌다, 혀!”

   주먹코전사가 쓰러지듯 소파 앞자리에 주저앉았어. 두 팔을 세워 상체를 받치고는 척, 고개를 뒤로 꺾어 제치고 소리쳐.

   “아새끼야, 뭐하고 자빠졌냐? 자, 찔러봐라이! 목을 백번 대줘도 못 찌른다 니는! 칼을 내 목에 대기만 해도 나가 쇳물에 손가락을 지진다, 벌벌 떨고 있는 빙신 자슥아, 찔러 봐! 니도 니 애비랑 똑같은……”

   아빠랑 똑같아? 얼굴에 피가 확 몰리는 것 같았어. 그 순간, 칼자루를 콱 움켜쥐었지. 나도 모르게 다가가 주먹코전사의 목을 향해 칼날을 겨누었어.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죽어! 죽어!”

   급작스럽게 내지른 고함에 목이 콱, 막히고 온몸이 떨렸지. 그래도 손에 온힘을 그러모았어. 하지만, 하지만……. 목에다 칼을 댈 수는 없었어. 게임에서처럼 피가 막막 쏟아질까봐. 아니, 하도 떨려서. 점점 손이 아래로 쳐졌지. 엄마가 사내는 칼을 꺼냈으면 무라도 잘라야 한댔는데……. 맞아, 최고의 결투는 피를 안 보면서도 목적을 달성하는 거야! 한 손으로는 칼을 움켜잡고 다른 손으로 그의 가죽가방 위에 있는 차용증서를 집으려고 이를 악물었어. 내 행성을 되찾게 할 이것! 종잇장을 집었어. 그 순간 전사의 상체를 받치고 있던 한쪽 팔이 휘청 꺾였어. 두렵고 무서워져, 칼을 쥔 손이 떨려, 아니 첨부터 떨었지. 덜덜덜…… 갑자기 전사가 기묘한 트림을 하면서 다리를 쫙 모아. 깜짝이야, 간 떨어질 뻔했네. 벌떡 일어나 내 방으로 잽싸게 달리다가 뒤돌아봤지. 뜻밖의 웃음소리가 뒤통수를 후려갈겨서!

   “으하하하, 아새끼야! 기껏 고걸 훔쳐야! 나가 우습워서 돌아가시겠다잉. 좁아터진 핵교도 배짱 없어 못 댕긴 아새끼가 고걸로 뭘 핼려고? 그래도 멋져분다. 용기가 가상혀서 멋져부러! 고걸 가지고 현관문만 열어도 나가 내 대장으로 모셔 분다. 모셔 불어! 으하하하……”

   꽝당! 내 방문을 잠갔어. 칼과 차용증서를 책상 위에 던지고는 의자에 주저앉았지. 열이 나면서 몸과 정신이 어둠 속으로 한없이 꺼지는 같아. 죽는 게 이런 느낌 아닐까……. 주먹코전사가 문 열라고 행패부리지 않으니까, 왠지 더 힘이 빠져. 게임이 이러면 재미없는 거잖아. 그래, 아주 대놓고 비웃은 거였어. 내가 바깥세상에 못 나가는 인간이라고. 전사의 생각처럼 밖으로 못 나갈 거면서, 그럴 거잖아……. 엄마 원피스를 벗었어. 먼저 소매를 접고, 찢어진 치맛자락을 곱게 모으는데, 엄마냄새가 나. 울컥. 엄마 옷에 엎드렸어. 엄마, 엄마……

   티딩! 티딩! 티딩! 뭔 소리? 으으읍, 팔목이 저려. 나도 모르게 잠들어 꽤 잤나봐. 밤 아홉 시가 다된 걸 보니. 식은땀을 흘려서인지 견딜 수 없는 한기가 몰려드는 느낌이야.

 

   걔: 야……아직도 먹통? 머하셔?

   걔: 답답 배고프면 라면 먹으러 와랑. 끓여줄게. 공짜는 없고, 문 닫는 거 돕는 조건. 공원연못에서 웬 남자가 자살했다고 울 엄마 거길 갔삼. 쯧쯧 혀 차며, 운동 삼아서.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몸뚱이랭. 열 뻗지만 울 엄마 쿠엽지?

   걔: 가게 문 닫고 엄마 찾으러 갈거얌. 바람 쐴 생각 있음 나와랑? 오버. 빈말……깔깔깔

 

   누구? 웬 남자가 자살했다고? 설마 아빠는 아니겠지. 배짱 없어 자살도 못할 인간이야. 그런데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 아빠랑 너무도 닮은 내 모습을 본 거지. 계속 무시해 온,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아빠. 왠지 불안해. 그렇다면 나아질 게 하나도 없어, 이대로 있으면……. 가서 확인이라도 해봐야겠지.

   컴퓨터 화면을 멍청히 바라본 채 바깥소리에 귀를 기울였어. 주먹코전사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 후유 다행이야. 의자에서 일어나자 아찔 어지러워. 내 행성이 흔들리는 것 같아. 아니, 행성이 아니라 내가 통째로 흔들리는 것이었지. 내 속의 뭔가가 뒤집어진 듯 강한데, 모든 게 꿈인 것 같은데……. 칼과 차용증서가 있는 걸 보니 아까 일이 떠올랐어. 얼른 종잇장만 주워들었지. 그리고는 거실로 나와 주먹코전사를 바라봤어. 저어 전사, 괴물 아저씨가 소파 앞자리에서 새우처럼 등을 구부리고 그르렁그르렁 코를 골아.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든 거야. 인제는 흔들어 깨워보지 않아도 알 수 있어, 코고는 소리만으로도.

   전사를 노려보면서 그 곁에 한참을 서 있었지. 가슴에 바위를 올려놓은 듯 숨도 쉴 수가 없어. 후우, 후우, 한숨을 토해냈어. 종잇장 하나가 내 행성을 이토록 짓밟고, 빼앗아 갈 수 있다니……. 차용증을 보자 순간 내 행성을 되찾았다는 성취의 쾌감이 밀려든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그래도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워. 차용증서라는 종잇장을 든 두 손이 바르르 떨려. 침을 꼴깍 삼켰어. 이딴 거 아무것도 아닌, 종잇조각을 쫙쫙 찢어 씹어 삼켜버려도 시원찮을 것 같아. 하지만 그냥 주먹코전사에게 던져버렸지. 왜냐,

   바깥세상이나 내 행성이나 똑같잖아 이젠! 어디에 있든 뭔 상관있나.

   하지만, 두려워.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것도, 더는 예전의 행성이 아닌 내 행성에 죽치고 있는 것도……. 그러므로 더 나가봐야겠지. 걔 엄마가 그랬다잖아, 산다는 건 움직이는 거라고! 근데, 내 신발이 어디 있지? 신발장 안에 있나봐. 찾기가 귀찮아, 아빠의 운동화에 발을 집어넣었어. 조금 큰 듯하지만 걸을 만해. 문득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지, 로또 복권이 손끝에 잡혀서 끌리듯 만지작거려. 이러는 내가 유치해, 하지만 어쩌라고……. 별수 없잖아.

   딸깍. 열쇠를 풀고 조금, 아주 조금 문을 열었어. 작은 틈 사이로 들어오는 공기가 차갑고도 눅눅하게 느껴져. 현관문을 조금 더 열다가 가만히 내 행성을 뒤돌아봤어.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더니 눈물이 줄줄 새어 나와. 자꾸만, 자꾸만.

 

 

작가소개


정미(소설가)


경기도 안양에서 자랐으며,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고려대학교 인문정보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습니다. 2005년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개미는 시동을 끄지 않는다」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추천 콘텐츠

나는 광대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5회 나는 광대다 장정희 땡~ 산조 가락이 자진모리의 클라이맥스 지점을 향해 막 솟구쳐 오르던 순간이었다. 힘차게 튀어 올랐던 태섭의 손가락이 땡, 소리와 함께 대금 위에서 조용히 잦아들었다. 숨죽일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 적막은 짧았지만 숨결은 뜨거웠다. 태섭은 입술에 대고 있던 대금을 내려놓고 심사관들을 향해 앉은 채로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방석 옆에 놓여 있던 정악대금을 함께 챙겨든 후 뒷걸음질 치듯 천천히 수험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열자 진행요원이 문틈에 귀를 대고 있다가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다음 순번의 수험생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들어갔다. 태섭은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창백한 얼굴들을 힐끗거리며 복도로 나왔다. 복도는 바닥에 주저앉아 삑삑삑 불어대고 있는 대기자들의 연주 소리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자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태섭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듯 바람이 달려들었다. 태섭은 곧바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목 언저리가 뻐근했다. 대금 연주자들에게 목 디스크는 숙명이라지 않는가. 태섭이 고개를 좌우로 젖히자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태섭은 담배를 힘껏 빨아들였다. 비로소 딱딱하게 굳어있던 입술의 감각이 살아남을 느꼈다. 태섭은 습관처럼 입술의 아랫부분을 문질렀다. 취구가 닿는 아랫입술 언저리는 피딱지가 떨어질 날이 없어 거무스름하게 변색되어 버렸다. 누구든 그 부위에 거무죽죽한 흔적을 갖고 있다면 그는 대금 연주자일 것이다. 태섭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끝났어! 해가 기울면서 날은 더욱 쌀쌀해졌지만 아직 눈이 내릴 기색은 없었다. 이제 겨울은 곧 시작될 것이다. 수시 모집은 대학 입시의 첫머리일 뿐 영광과 회한의 경계를 가를 때까지 입시생들의 겨울은 계속될 것이다. 태섭은 가방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전원을 켜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자와 콜이 쏟아졌다. ‘물론 시험은 잘 봤겠지? 네가 떨어지면 붙을 놈 누가 있냐?’ ‘빨랑 내려오기나 해. 얼굴 잊어버리겠다.’ ‘오늘 수시 봤던 놈들까지 다 올 거야.’ ‘끝나면 곧장 전화해. 안 하면 죽어!’ 태섭은 휴대폰을 그대로 가방에 던져 넣고는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걷기조차 힘이 들었다.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동안, 남녀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태섭의 곁을 스쳐갔다. 이곳은 2년 전 캠퍼스 투어로 와 본 이후 두 번째다. 캠퍼스 투어는 태섭의 열망에 더욱 불을 지펴 놓았다. 와 봐야 새로울 것도 없다는 듯 나른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대학생들이 부러웠다. 목표물을 손안에 얻은 사람만의 여유랄까. 나도 저들처럼 심상한 표정으로 이 캠퍼스를 활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연이어 두 번이나 전화가 왔다. 엄마다. 일이 손에 잡히지

  • 웹관리자
  • 2012-10-27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_ 제4회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이성아 소녀는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물방울이 맺힌 소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고, 고양이도 막 목욕을 마친 듯 털이 보송보송했다. 보송보송한 털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해 나도 모르게 쓰다듬을 뻔했다. 소녀는 나와 또래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사람들처럼 어색했다. 아파트 하수구 관이 막혔는데, 지금은 밤중이라 공사를 할 수 없으니 아침에 공사할 때까지 물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지구 반대편의 언어라도 되는 듯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소녀는 나보다는 고양이와 더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영물이야. 공연히 곁을 주면 나중에 해꼬지나 당한다니까.” 아줌마가 내게 하던 말이다. 고양이는 소녀의 품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고양이에게조차 수모를 당한 듯 명치끝이 짜르르 아려왔다. 나에게도 고양이가 있었다. 높은 담을 사뿐히 뛰어올라 얼음사니처럼 우아하게 걸어 다니던 고양이에게 나는 다미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두었다가 다미에게 주면 아줌마는 소리를 꽥 질렀다. “고양이 밥 주지 말란께. 야가 뭔 똥고집이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이.” 식당 알바는 힘들었다. 처음엔 청소하고 설거지나 하면 된다고 하더니 술손님들이 많으면 서빙에서부터 고기 잘라 주는 일까지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취한 남자들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거나 손이며 엉덩이를 쓰다듬으려고 할 땐 온 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고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다.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아줌마의 목청이었다. 내 평생 목소리가 그렇게 큰 사람은 처음이었다. 고작 17년밖에 안 산 내가 평생이란 말을 쓰긴 좀 그렇지만, 아마 평생을 곱절로 살아도 그렇게 목청이 큰 사람은 만날 것 같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러댔다. 간혹 뭔가 날아가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깨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양은냄비나 플라스틱 바가지, 물통이나 양푼, 철판 뒤집개나 슬리퍼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살얼음판 위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일했다. 수돗물을 세게 틀면 안 되고, 설거지할 때 개수대 밖으로 물이 튀면 미끄러지므로 안 되고, 식탁은 젖은 행주로 닦은 다음 반드시 마른 행주로 닦아야 하고, 기름 묻은 그릇은 오래 두면 안 되고, 안 되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걸을 때 엉덩이를 흔들어도, 무표정해도, 큰 소리로 웃어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렀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화낼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많이 나온 전기세와 갑자기 오른 임대료, 갑자기 쏟아지는 비, 햇빛이 들이치는 창, 똥 마려운 것처럼 끙끙거리는 개새끼, 시끄러운 오토바이소리, 그리고 뭘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생선 구잇집 아줌마. 소정은 아줌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 웹관리자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