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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조금 더 기다려주면 안 될까요?

  • 작성일 2012-08-31
  • 조회수 687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두 번째

 

엄마, 조금 더 기다려주면 안 될까요?

 

노경실

 

 

 



   1.

 

   ─ 초등학교 때는 그렇다 치더라도, 중학생 정도 되면 이미 인생 결정 난 거 아닌가?

   ─ 그렇지! 이미 중학생 때 운명이 판가름 나는 거지.

   꿈을 꾸는 걸까?

   나는 접착제에 붙어버린 듯한 눈꺼풀을 힘들게 뜨며, 말소리를 찾아 귀를 움직였다. 마치 우리집 강아지, 폴리처럼.

   그러는 사이에도 말소리는 이어졌다.

   ─ 그러니까 부모들이 미친 듯이 좋은 동네로 이사 가는 거 아니겠어. 실력 없으면 인맥이라도 쌓아야 하니까. 그래서 준범이네도 이사 간 거 아니야. 빚을 어마어마하게 지면서 말이야.

   ─ 칫! 이제 가서 뭐해? 인맥? 그런 건 유치원, 아니 요즘은 산후조리원에서부터 쌓아야 한다는데, 중2 돼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토박이들이 패밀리로 받아 줄 거 같아? 대단한 실력자나 재벌 집 자식도 아닌데!

   나는 힘들지 않게 말소리의 두 주인공을 찾았다. 우리 엄마 또래의 아주머니들이었다.

   막차인 마을버스 안에는 나와 내리는 문 바로 앞자리에 앉은 두 아주머니. 그리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한 발을 쉼 없이 흔들어대는 대학생처럼 보이는 남자가 전부였다. 물론 마을버스 기사 아저씨도 있었다.

   나는 매주 토, 일요일에는 꼬박 15시간을 피시방에서 알바를 한다. 나는 미성년자이지만 피시방 주인이 친척이라 가능한 것이다. 그냥 숙모라고 부르지만 엄마 말로는 촌수가 꽤 멀다고 했다. 숙모는 나를 알바로 쓰지 않아도 되는데 일부러 나를 위해 돈을 쓰는 것이다. 그래서 숙모는 원치 않게 거짓말까지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숙모, 그러니까 피시방 주인집 딸인데 엄마의 가게를 도와주는 식으로 말이다. 나의 알바는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부터 시작되었다. 피시방에서 집까지 30분 정도밖에 안 되지만 이상하게 버스를 타면 바로 잠에 빠져든다.

   그런데 녹초가 되어 시체처럼 쓰러져 자는 나를 깨운 것은 두 아주머니의 대화 속의 주인공처럼 나도 중학생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주머니들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 그래서 나는 그런 동네로 이사 갈 형편은 안 되니까 우리 민정이 학원 한 과목이라도 더 듣게 하려고 이 짓 하는 거 아니겠어. 내가 대학생일 땐 상상이나 한 일이겠어? 내가 식당에서 서빙을 하다니! 나도 내 전공처럼 독문학 교수나, 하다못해 독일어 번역자라도 하면서 품격 있는 인생을 살고 싶었지.

   ─ 나도 우리 태호 아빠가 시부모 아시면 집안 뒤집어진다고 식당일 그만 두라고 하지만…… 태호 아빠도 속으로는 완전 말리는 건 아니야. 내가 식당 일하니까 태호 학원을 한 과목 더 들을 수 있거든.

   순간, 나는 울컥했다. 마치 우리 엄마가 옆집 수미 엄마랑 하는 얘기 같아서였다.

   ‘우리 엄마도 동네 아줌마들이랑 자식들 얘기할 때면 저런 이야기를 하겠구나……. 잘사는 동네 엄마들이랑 이야기하는 내용이 다르겠구나…….’

   지금 엄마는 동네에 새로 생긴 대형 마트에서 일하고 있다. 이번 주는 오후 근무라 새벽 2시가 되어야 집에 올 것이다. 다행인 것은 걸어서 집에 올 수 있는 거리이고, 아빠가 늘 마중을 나간다는 점이다.

   ‘엄마와 아빠는 집까지 걸어오면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운명,

   인생,

   결정,

   판가름,

   실력,

   인맥,

   패밀리,

   빚,

   재벌 집,

   권력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공부할 때에는 수십 번을 들어야 외워지는 한심한 암기력인데, 어떻게 아줌마들의 말들이 하나하나, 또렷이 떠오르는지!

   나는 두 아줌마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버스에서 내려야 했다.

 

 

2.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휴대폰을 켰다. 엄마의 특명이다.

   ‘밤길을 걸을 때에는 휴대폰을 켜고 누구랑 통화하는 것처럼 해야 돼! 그것도 위험에서 스스로를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 중 하나거든!’

   휴대폰의 눈부신 빛줄기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 이런 빛! 이런 빛 같은 거 없을까? 내 인생에 필요할 때면 언제든 눈부시게 환하게 비추어 주는 빛 말이야! 그래서 어려운 일, 힘든 일, 슬픈 일, 괴로운 일들이 생길 때마다 알라딘의 램프처럼, 휴대폰의 빛처럼 단숨에 나를 행복하고,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빛 말이야.’

   그러나 빛은 사라졌다. 휴대폰의 불빛은 저절로 사라지고, 어둠이 내 주위를 휘감았다.

   ‘가짜 빛, 거짓 빛, 싸구려 빛!’

   나는 휴대폰에게 저주를 퍼붓듯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누나!”

   “샤론아!”

   아빠와 지훈이가 어둠 속의 나를 구출해주듯이 큰소리로 불렀다.

   “왈왈!”

   폴리의 소리는 더 컸다. 왈왈거리는 소리 속에 ‘지미 누나!’ 라는 뜻이 있음을 나는 안다.

   원래 내 이름은 지미, 윤지미인데 식구들은 나를 샤론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동네 사람도, 친구들도 모두 나를 샤론이라고 불러 준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미라는 이름보다 샤론이라는 별명 아닌 별명이 더 좋다. 이런 근사한 별명을 만들어준 사람은 아빠다. 아빠 말로는 샤론은 영어로 ‘Sharon’인데, 영어권에서는 ‘새런’이라고 발음하기도 하고, 여자 이름으로 많이 쓰인단다. 또 나라마다, 조금씩 뜻이 다른데, 아름다운 공주, 또는 성스러움, 그리고 아름다운 평원이나 백합을 말하기도 한단다.

   아빠는 내가 심하게 사춘기를 겪던 6학년 2학기 때, 이 별명을 지어주었다. 그러고 보면 아빠는 상당히 지능적인 교육자이자, 치밀한 부모이다. 나를 샤론이란 이름으로 부르고, 그 뜻을 자꾸 나의 머리와 가슴 속에 세뇌시키면서 나의 삐뚤어짐과 왜곡되어 감, 구부러짐 등을 방지했으니 말이다.

   “피곤하지? 우리 샤론?”

   다른 아빠들 같으면 ‘피곤하지, 우리 딸?’이라고 할 텐데 아빠는 이런 때에도 지미나 딸이 아닌 샤론이라고 부른다. 정말 대단한 우리 아빠다. 만약 아빠가 독일 사람이라면 게슈타포 요원이, 러시아 사람이라면 케이지비 요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괜찮아요.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요.”

   나는 진심을 말했다.

   “누나, 이거!”

   늦둥이 동생인 6살 지훈이는 나에게 식혜 한 팩을 내밀었다. 빨대는 이미 꽂혀 있었다.

   “왈왈!”

   폴리는 내 운동화에 코를 들이대며 냄새를 맡았다가, 다시 폴짝폴짝 뛰었다.

   “지훈아, 오늘도 미미 만났어?”

   나는 폴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물었다. 미미는 요즘 지훈이가 좋아하는 유치원 여자 친구이다.

   “응! 며칠 있다가 결혼하자고 말할 거야. 며칠 있으면 만난 지 백일 되는 날이거든.”

   지훈이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야! 윤지훈! 그럼 너랑 나랑은 만난 지 며칠 째야?”

   나는 일부러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랑은 결혼안 할 거니까 그런 거 몰라도 돼.”

   지훈이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하하하, 집에서 텔레비전을 일절 못 보게 해도 친구들 만나면 세상 온갖 돌아가는 일을 다 알게 되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구나. 샤론아, 지훈이랑 벌써 세대차이 느끼니?”

   아빠가 허탈하게 웃으며 물었다.

   “느끼기는 한데요, 문제는 지훈이가 나보다 세상을 더 잘 아는 것 같아서 화가 나네요.”

   “그런데 샤론아, 너 꼭 미대 가야 하겠니?”

   순간, 나는 발을 멈췄다.

   “아빠, 그 얘긴 다 끝난 거잖아요?”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다시피 했다. 그 뿐 아니라 반쯤 마신 식해 팩을 주먹으로 콱 움켜쥐는 바람에 식혜가 분수처럼 쏟아져 흘렀다.

   “샤론아…….”

   “누나…….”

   아빠와 지훈이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눈치 빠른 폴리도 더 이상 촐랑대지 않았다.

   “아빠, 내가 왜 남들 다 쉬고, 즐기고, 놀러다니는 토요일이랑 일요일마다 피시방에서 내 청춘을 썩히겠어요? 이상한 사람들도 많이 오는데요. 내 꿈은 내가 이루어 갈 거라고 말했잖아요. 그래서 엄마 아빠가 처음엔 반대했지만 허락해서 다니는 거 아니에요? 토, 일요일마다 친척 딸로 둔갑해서요……. 그런데 왜 또 그런 말을 해요? 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왜 방해를 해요? 엄마가 또 변심해서 뭐라고 해요? 나보고 주제를 알라고 해요?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나요? 나보고 현실을 알고 정신 차리라고 해요?”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 세 식구를 차례대로 훑어보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라도 ‘얘야, 이 밤중에 왜 그러니? 뭐가 서럽고 억울해서 그러니?’ 라고 물어주길 바랐다. 그러면 나는 마을버스 안에서 들었던 아줌마들의 말처럼 하소연하고 싶었다.

   ‘내 운명, 내 인생은 벌써 판가름 난 건가요? 그런데 어떻게 결정된 거지요?’

   눈물이 줄줄 흘렀다.

   오른손은 식혜 물로 젖었고, 내 얼굴은 눈물로 젖었다. 그렇다고 내 인생을 화려하고 멋지게 그려 나갈 캔버스마저 젖어들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 그 캔버스에는 그림을 그리기 힘드니까.

   나는 왼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지훈이가 울먹이자 아빠는 지훈이를 등에 업었다. 폴리가 그 뒤를 졸졸 따라왔다.

   “가자, 샤론아. 걸어가면서 얘기하자.”

   그러면서 아빠는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닌 반대편 길로 향했다.

   “샤론아, 한 바퀴 휘 돌고 가자. 괜찮지?”

   나는 대답 대신 아빠 곁으로 다가갔다. 아빠 등에 얼굴을 묻은 지훈이는 자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아빠 허리 아직 안 나았잖아요? 그냥 집에 가요.”

   나는 정말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두 달 뒤에는 회사 나갈 수 있어. 봐라. 지훈이를 업고도 아무렇지 않잖아.”

   아빠는 허리를 곧추 세우며 말했다. 그러나 곧 얼굴을 찡그리며 허리를 굽혔다. 아직은 굽히는 게 더 편한 듯 했다.

   “알았어요. 그래도 조심해요.”

   나는 일부러 웃음을 지었다.

   아빠는 전기 회사에 다닌다. 그런데 지난 여름, 태풍 때에 쓰러진 전신주를 수리하느라 높이 올라가 작업하다가 허리를 다쳤다. 벌써 일 년이 넘도록 일을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대형마트의 계산원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미대에 갈 거라는 말을 했으니…….

   어쩌면 우리 집안의 평화가 깨진 것은 아빠의 사고가 아니라 나의 희망을 말한 그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3.

 

   작년, 아빠가 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지 세 달이 거의 다 되고 사 개월째로 넘어가는 즈음이었다.

   나는 버릇처럼 수업이 끝나면 학원에 가기 전에 아빠가 누워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처음에는 큰 병원에 있다가, 세 달이 지나자, 집에서 가까운 병원으로 옮겼다. 다행히 대전에 사는 외할머니가 올라와서 나와 지훈이를 돌보아주었다.

   나는 처음에 아빠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이렇게 기도했었다.

   ‘하나님, 우리 아빠 살려주세요. 정 안 되면 식물인간이라도 좋으니 살려만 주세요. 그냥, 존재만이라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아빠라는 존재요!’

   그런데 나의 기도가 백 퍼센트, 아니 오백 퍼센트 응답받은 것 같았다. 왜냐하면 아빠는 그냥 ‘존재’가 아닌, 식물인간도 아닌 ‘실체’로 회복된 것이다. 물론 당장 회사에 나가지 못 하고, 재활기간이 길게 되었지만!

   “아빠!”

   그 날도 나는 아빠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 손님들이 사온 맛있는 과일이랑 과자를 같이 먹을 수 있는 기쁨에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갔다.

   “샤론아, 너도 여기 한번 나가봐라.”

   어느새 환자복이 어울려 보이기까지 한 아빠는 나에게 신문을 보여주었다.

   〈전국 청소년 지구 환경 그림그리기 축전〉

   “아빠. 나는 한 번도 그림 대회 나간 적 없어요. 그림은 아무나 그리나요?”

   나는 말 그대로 콧방귀를 뀌며, 신문을 내려놓았다.

   “샤론아. 상품이 태블릿 피씨야. 최우수랑 대상은 태블릿 피씨를 준대.”

   “태블릿 피씨요?”

   마침내 나는 단지 너무도 갖고 깊은 물건 때문에 그림그리기 대회에 나갔다. 화가가 꿈이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어릴 때에는 꿈이 백 개쯤은 있었다. 그런데 꿈이 무얼까? 우리나라에서는 꿈이 직업인 듯하다. Dream = Job. 왜냐하면……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묻는다.

   ─ 네 꿈이 뭐니?

   그럼 아이들은 대답한다.

   ─ 의사가 꿈이에요.

   ─ 연예인이 꿈이에요.

   왜 우리들은 ‘꿈’을 물으면 ‘직업’을 말하는 것일까?

   그런데 나도 그렇다.

   유치원 때는 공주가 되고 싶다고 했단다. 엄마의 증언이다.

   초등학생이 되고부터는 나도 아주 본격적인 직업을 말했다. 선생님, 요리사, 연예인, 패션 디자이너 등등 셀 수 없이 많았고, 거의 날마다 꿈이 바뀔 정도였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어서는 내가 현실을 조금 알게 되었는지 완전히 직업을 생각하고 말했다. 그래서 선생님, 교수, 공무원으로 좁혀졌다. 그리고 막연히 판타지 세상을 동경하듯 마음속에 패션 디자이너를 가끔씩 그려 보기도 했었다.

   절대 화가를 꿈꾸거나, 직업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는 오직 태블릿 피씨가 갖고 싶어 그림 대회에 나갔는데, 무슨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최우수상을 받은 게 아니라 장려상을 받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림 대회를 통해 나는 스스로 깨달은 게 몇 가지 있었다.

   그림 그릴 때 너무 마음이 행복하다는 것, 그리고 제대로 배우면 잘 그릴 것 같은 자신감. 하지만 이제까지 그런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화가가 되자!’

   이것은 확실히 큰 변화였다. 그전까지는 꿈이 무어냐라는 질문에 직업을 말했다면, 이제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해 말하게 된 것이다.

   나 스스로 그림, 화가에 대해 꿈을 발견하고 그 길로 가겠다고 했을 때에는 단지 직업의 개념이 아니었다. 나는 화가로서의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화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화가로서의 삶을 마음껏 누리며 살고 싶은 것!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직업의 개념으로 선생님이나 교수, 공무원이라고 꿈을 말했을 때에는 어른들은 모두 나를 칭찬해 주었다.

   ─ 그래, 그거 꽤 안정적인 직업이지. 혜택도 많이 받을 거야. 네가 자식을 낳으면 등록금도 혜택받을 걸.

   ─ 정년이 보장되잖아. 여자로서 결혼하기도 좋지.

   ─ 잘 생각했다. 너의 부모님의 노후에도 좋은 거야.

   그런데 화가가 된다고 하자, 부모님은 물론 모두가 반대했다.

   ─ 그걸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은 한둘인데, 그걸 직업으로 삼는다고? 까딱하다가는 결혼도 못 해.

   ─ 화가? 그거 있는 집 애들이나 하는 일이지. 당장 뒷바라지하느라 네 부모님 등골 빠진다. 아서라. 그냥 그림 감상하는 걸로 만족해.

   ─ 화가? 그거 좋지. 그런데 너의 집 형편으로 어떻게 너를 뒷바라지해주니? 더구나 외국 유학은 필순데! 예술 분야는 어떤 분야든 그 분야의 1퍼센트 정도 사람들만 먹고 살 수 있는 거야.

   이상한 일이다.

   왜 먹고 사는 문제로 내가 나의 꿈을 펼쳐보기도 전에 막아 버리는지!

   가장 심하게 반대한 사람은 엄마였고, 지금도 엄마가 선봉에 서 있다. 엄마는 지금도 내 꿈을 바꾸려고 애쓴다.

   ‘샤론아! 분명히 말하지만 난 도화지 한 장, 물감 하나 사 줄 수 없어! 말 그대로 화가는 그냥 꿈을 생각해. 이제 중학생 정도 되면 공부에 신경 쓰면서 네 진로를 생각해야지. 꿈이 아니라 진로를 생각하란 말이야. 네가 연예인병에 안 걸린 건 너무 고마운데, 그래도 화가는 아니야. 샤론아, 화가?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돈이 있어야 해. 더구나 지금 네가 우리 집 상황 뻔히 보면서 그런 말이 나오니? 아빠는 병원에 누워 있고, 나는 마트에서 일하는데! 더구나 동생은 초등학생도 아니잖아. 샤론이, 너, 너무 이기주의자 아니니? 정 네가 화가가 되고 싶으면 우리 형편 좀 나아진 다음에 다시 생각하면 안 되겠니?’

   물론 그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항변했다.

   ‘화가가 되고 싶어요!’

   ‘돈 못 벌면 꿈을 못 이룬 거예요?’

   ‘내 인생이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살면 안 돼요?’

   그럼 엄마는 늘 같은 말로 나를 입 다물게 했다.

   ‘그만 좀 해라. 엄마는 꿈같은 거 없었는 줄 알아? 그래도 너랑 지훈이를 위해 포기한 거야. 그럼 너도 가족을 위해 적당히 포기할 줄 알아야지!’

   하지만 일차 승리자는 내가 되었다.

   ‘내가 졌다, 졌어. 화가가 되든 말든 마음대로 해! 하지만 엄마는 한 푼 못 대 주니까 네가 벌어서 네가 해. 그리고 성적이 일점이라도 떨어지면 너는 그날로 화가는 끝이야!’

   엄마는 나에게 서약서까지 쓰게 했다.

   그리고 나는 나 스스로 화가의 길을 가기 위해 친척 가게에서 알바를 하게 된 것이다.

   엄마의 마음을 알기는 하지만 어떡하라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데.

   그게 꿈을 이루어 가는 것 아닌가?

   그래서 오늘도 나는 열심히 일하고 왔는데 난데없이 아빠는 꿈을 바꿀 수 없냐고 물은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식혜가 다 흘러나올 만큼 팩을 움켜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수밖에! 어린 동생이 있는데도 눈물을 줄줄 흘릴 수밖에! 아직도 몸이 아파 회사에 나가지 못하는 아빠의 마음을 박박 아프게 할 수밖에! 저기 삼백 미터도 안 되는 곳에 있는 대형마트에서 엄마가 일하고 있는데도 내 꿈을 포기할 수 없다고 울 수밖에!

 

 

4.

 

   “윤지미!”

   벼락 소리 같은 고함에 나는 머리를 번쩍 들었다.

   ‘내가 숙제를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었나?’

   ‘지금 여기가 학교야, 집이야?’

   ‘꿈속인가? 현실인가?’

   ‘지금 비가 오나?’

   ‘윤샤론이 아닌 윤지미라고 부르는 걸 보면 선생님인가?’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힘들게 눈을 떴다.

   “헉!”

   나는 내 앞에 드리워진 시커먼 물체에 숨이 멎는 듯했다.

   ‘이게 뭐지? 귀신? 유령?’

   “윤지미!”

   아까보다는 조금 소리가 낮아진, 그러나 벼락은 벼락이었다.

   그리고 검은 물체는 분명히 사람이었다.

   “윤지미! 이걸 성적이라고 받았냐? 중학교 성적이 네 남은 인생 등급을 결정짓는 거 몰라서 이딴 식으로 공부하는 거야?”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상황 정리가 되었다.

   ‘지금 나는 집에 있다. 숙제하다 잠이 들었다가 깬 것이다. 지금 내 앞에 보이는 검은 물체는 엄마구나. 그리고 이 주 전에 본 시험 결과가 엄마의 이메일로 통보된 거구나. 이번 내 성적은 떨어졌고, 엄마는 그걸 핑계로 나의 주말 알바를 금지시키겠지. 그리고 화가라는 내 꿈도 싹둑 잘라버리겠지. 서약서를 썼으니 나는 복종해야겠지. 어쩌면 이번에 내 성적이 떨어진 게 엄마에게는 나를 잡을 절호의 기회가 된 거고!’

   나는 그대로 책상 위에 두 팔을 엇갈려 펴고 얼굴을 묻어 버렸다.

   “아니, 얘가? 안 일어나?”

   엄마는 억세게 나의 상체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나는 두 눈을 꽉 감은 채, 마치 순교자처럼 똑바로 앉아 조용히 있었다.

   “이거 어떡할래? 어떻게 책임질래? 평균이 3점이나 떨어졌어. 그것도 제일 중요한 수학이랑 영어 때문에! 남들은 토요일이랑 일요일에 다른 날의 몇 배로 공부를 하는데, 너는 피시방에서 돈이나 받고, 재떨이랑 컵라면 심부름이나 한 결과가 이거야?”

   엄마는 프린트한 성적표 종이를 내 얼굴 앞에 대고 흔들었다. 종이 모서리가 얼굴에 스칠 때마다 눈물이 나올 만큼 따끔거렸다. 차라리 엉엉 울 수 있도록 엄마가 나를 때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네 손으로 쓴 서약서 잊지 않았지? 성적이 일점이라도 내려가면, 화가고 뭐고 다 잊고 공부에만 전념한다는 거! 그리고 알바도 당장 그만한다는 거!”

   나는 억울하고 수치스런 생각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 평균 점수가 3점 떨어진 것 때문에 내 꿈을 그만 접으라고?

   ─ 그럼 이 세상에 박사 정도 되는 사람들만 작가 되고, 화가 되며, 피아니스트가 되는 거야?

   ─ 수학이 뭐고, 영어가 뭔데 내 꿈을 가로막아? 그것들이 뭔데? 맞아! 그것들이 뭔데!

   이런 생각에 휩싸이자, 더 참을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한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외쳤다.

   “엄마! 조금만 기다려주면 안 되나요? 그럼 내가 수학이랑 영어를 완전히 꼼짝 못할 정도로 멋진 화가가 될 게요!”

   짝!

   나의 호소에 되돌아 온 것은 내 등을 갈라놓을 듯이 세차게 내려친 엄마의 손바닥이었다. 한 마디로 ‘매’였다. 그것은 엄마의 분노이자, 나에 대한 실망, 그리고 엄마가 늘 말하는 엄마의 인생에 대한 분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삶 역시 엄마가 선택한 것 아닌가? 그런데 왜 나에게 화풀이, 분풀이를 하는 걸까?

   그래서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내가 꿈꾸는 길을 이루어 가면서 나의 인생을 펼칠 것이다. 그것이 직업이든, 밥벌이든, 예술이든. 그래야 내 자식에게―우리 엄마가 지금 나에게 하듯―분풀이를 하지 않겠지!

   엄마, 미안해. 그러나 할 수 없어.

   나는 엄마 딸 이전에, 윤지미이거든요!

   나는 착한 딸 윤사론이 아닌 내 길을 내가 가는 윤지미이거든요!

   그러니까 조금 더 기다려주면 안되나요?

 

 

 

작가소개


노경실(소설가)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습니다. 한국일보 신춘문예(소설), 중앙일보 신춘문예(중편소년소설)로 등단하여 이 시대 우리 어린이들과 청소년의 마음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하는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 국립도서관 소리책나눔터 부이사장을 맡고 있다. 작품으로는 『사춘기 맞장 뜨기』 등 청소년 에세이와 『상계동 아이들』, 『복실이네 가족사진』, 『철수는 철수다』, 『청소년 북유럽 신화(전5권)』, 『열네 살이 어때서?』, 『열일곱, 울지 마!』등 많은 장편 동화와 청소년 소설을 냈고, 『그림 자매 시리즈(전8권)』, 『애니의 노래』 등 번역 작업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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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5회 나는 광대다 장정희 땡~ 산조 가락이 자진모리의 클라이맥스 지점을 향해 막 솟구쳐 오르던 순간이었다. 힘차게 튀어 올랐던 태섭의 손가락이 땡, 소리와 함께 대금 위에서 조용히 잦아들었다. 숨죽일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 적막은 짧았지만 숨결은 뜨거웠다. 태섭은 입술에 대고 있던 대금을 내려놓고 심사관들을 향해 앉은 채로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방석 옆에 놓여 있던 정악대금을 함께 챙겨든 후 뒷걸음질 치듯 천천히 수험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열자 진행요원이 문틈에 귀를 대고 있다가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다음 순번의 수험생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들어갔다. 태섭은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창백한 얼굴들을 힐끗거리며 복도로 나왔다. 복도는 바닥에 주저앉아 삑삑삑 불어대고 있는 대기자들의 연주 소리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자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태섭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듯 바람이 달려들었다. 태섭은 곧바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목 언저리가 뻐근했다. 대금 연주자들에게 목 디스크는 숙명이라지 않는가. 태섭이 고개를 좌우로 젖히자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태섭은 담배를 힘껏 빨아들였다. 비로소 딱딱하게 굳어있던 입술의 감각이 살아남을 느꼈다. 태섭은 습관처럼 입술의 아랫부분을 문질렀다. 취구가 닿는 아랫입술 언저리는 피딱지가 떨어질 날이 없어 거무스름하게 변색되어 버렸다. 누구든 그 부위에 거무죽죽한 흔적을 갖고 있다면 그는 대금 연주자일 것이다. 태섭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끝났어! 해가 기울면서 날은 더욱 쌀쌀해졌지만 아직 눈이 내릴 기색은 없었다. 이제 겨울은 곧 시작될 것이다. 수시 모집은 대학 입시의 첫머리일 뿐 영광과 회한의 경계를 가를 때까지 입시생들의 겨울은 계속될 것이다. 태섭은 가방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전원을 켜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자와 콜이 쏟아졌다. ‘물론 시험은 잘 봤겠지? 네가 떨어지면 붙을 놈 누가 있냐?’ ‘빨랑 내려오기나 해. 얼굴 잊어버리겠다.’ ‘오늘 수시 봤던 놈들까지 다 올 거야.’ ‘끝나면 곧장 전화해. 안 하면 죽어!’ 태섭은 휴대폰을 그대로 가방에 던져 넣고는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걷기조차 힘이 들었다.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동안, 남녀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태섭의 곁을 스쳐갔다. 이곳은 2년 전 캠퍼스 투어로 와 본 이후 두 번째다. 캠퍼스 투어는 태섭의 열망에 더욱 불을 지펴 놓았다. 와 봐야 새로울 것도 없다는 듯 나른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대학생들이 부러웠다. 목표물을 손안에 얻은 사람만의 여유랄까. 나도 저들처럼 심상한 표정으로 이 캠퍼스를 활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연이어 두 번이나 전화가 왔다. 엄마다. 일이 손에 잡히지

  • 웹관리자
  • 2012-10-27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_ 제4회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이성아 소녀는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물방울이 맺힌 소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고, 고양이도 막 목욕을 마친 듯 털이 보송보송했다. 보송보송한 털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해 나도 모르게 쓰다듬을 뻔했다. 소녀는 나와 또래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사람들처럼 어색했다. 아파트 하수구 관이 막혔는데, 지금은 밤중이라 공사를 할 수 없으니 아침에 공사할 때까지 물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지구 반대편의 언어라도 되는 듯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소녀는 나보다는 고양이와 더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영물이야. 공연히 곁을 주면 나중에 해꼬지나 당한다니까.” 아줌마가 내게 하던 말이다. 고양이는 소녀의 품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고양이에게조차 수모를 당한 듯 명치끝이 짜르르 아려왔다. 나에게도 고양이가 있었다. 높은 담을 사뿐히 뛰어올라 얼음사니처럼 우아하게 걸어 다니던 고양이에게 나는 다미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두었다가 다미에게 주면 아줌마는 소리를 꽥 질렀다. “고양이 밥 주지 말란께. 야가 뭔 똥고집이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이.” 식당 알바는 힘들었다. 처음엔 청소하고 설거지나 하면 된다고 하더니 술손님들이 많으면 서빙에서부터 고기 잘라 주는 일까지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취한 남자들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거나 손이며 엉덩이를 쓰다듬으려고 할 땐 온 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고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다.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아줌마의 목청이었다. 내 평생 목소리가 그렇게 큰 사람은 처음이었다. 고작 17년밖에 안 산 내가 평생이란 말을 쓰긴 좀 그렇지만, 아마 평생을 곱절로 살아도 그렇게 목청이 큰 사람은 만날 것 같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러댔다. 간혹 뭔가 날아가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깨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양은냄비나 플라스틱 바가지, 물통이나 양푼, 철판 뒤집개나 슬리퍼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살얼음판 위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일했다. 수돗물을 세게 틀면 안 되고, 설거지할 때 개수대 밖으로 물이 튀면 미끄러지므로 안 되고, 식탁은 젖은 행주로 닦은 다음 반드시 마른 행주로 닦아야 하고, 기름 묻은 그릇은 오래 두면 안 되고, 안 되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걸을 때 엉덩이를 흔들어도, 무표정해도, 큰 소리로 웃어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렀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화낼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많이 나온 전기세와 갑자기 오른 임대료, 갑자기 쏟아지는 비, 햇빛이 들이치는 창, 똥 마려운 것처럼 끙끙거리는 개새끼, 시끄러운 오토바이소리, 그리고 뭘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생선 구잇집 아줌마. 소정은 아줌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 웹관리자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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