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누구나 하지만 아무도] 상상력이 만드는 역사

  • 작성일 2013-10-15
  • 조회수 533

[누구나 하지만 아무도]




상상력이 만드는 역사

-대체역사소설



좌백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지만 상상하는 건 자유가 아닌가. 많이는 말고 조금만 바꿔서 그 후에 역사가 어떻게 달라질지 상상하는 건 재미있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들을 해본 일이 있지 않은가.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지 않고 중국으로 그냥 진군해서 승리했다면?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기 전에 한국 광복군이 국내에 진공해서 전과를 거두었다면?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지만 상상하는 건 자유가 아닌가. 많이는 말고 조금만 바꿔서 그 후에 역사가 어떻게 달라질지 상상하는 건 재미있지 않겠는가. 역사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의 영향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견고한 피라미드 같아서 그 중 한두 사람, 한두 사건이 달라진다고 크게 변화할 것 같지 않지만 때로는 아주 중요한 때에, 아주 우연한 일로 지금과 같이 고정되어 버린 것 같을 때도 적잖이 있다. 바로 그때 여기를 이렇게 조금만 움직여준다면, 이걸 저렇게 조금만 바꾸어버린다면 그 후엔 어떻게 될까? 바로 이런 궁금증에서 대체역사소설이 나왔다. 역사의 한 순간을 다른 것으로 대체, 즉 바꿈으로써 역사 자체가 바뀌는 것을 상상해 쓰는 소설들이다.
이 계통의 소설 중 최초의 작품은 미국의 워드 무어가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아니라 남군이 승리했다면?’이라는 가정을 토대로 1953년에 쓴 『희년을 선포하라』로 알려져 있지만, 가장 유명한 작품은 미국의 SF작가인 필립 K. 딕(1928~1982)이 1962년에 쓴 『높은 성의 사내』다. 그는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 등의 작품을 썼으며 이중 다수가 영화로 만들어져 유명하다. SF작가로 분류되지만 초능력과 로봇, 우주여행, 외계인과 같은 기존의 SF소재를 이용하면서도 그 이면에서는 가상현실, 음모론, 거대기업, 전체주의 환경오염으로 상징되는 암울한 미래상과 그 속에서 인간이 겪는 정체성의 불안과 혼란을 그린 작가다.

01『높은 성의 사내』는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패했다면?’이라는 가정을 토대로 음울한 가상의 1960년대를 그려 보이는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역사의 변곡점은 연합군의 패배이다. 그 후에 세계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2차 세계대전은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이라는 동맹국과 독일, 일본, 이탈리아라는 추축국이 벌인 전쟁이다. 무수히 많은 나라들이 이 전쟁에 휘말려 들어가 피를 흘렸지만 전쟁의 중심은 동맹국과 추축국이다. 실제의 역사에서는 미, 영, 중, 소라는 4대강국이 연합한 동맹국이 이겼지만 이 작품 속에서는 독, 일, 이의 추축국이 승리하고, 이후의 세계를 나누어 지배한다.
특히 미국은 뉴욕을 중심으로 한 동부를 나치 독일이,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한 서부를 일본이 지배하며 미국민은 노예로 부려지게 된다. 유럽에서 자행된 나치독일의 학살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미국으로 피신한 유태인들은 신분을 숨기고 살아야 한다. 이런 세계에서 평범한 사람들에 불과한 주인공들은 지배자와 피지배계층이라는 관계 속에서 자행되는 차별을 견디며 꾸역꾸역 살아가야 한다. 그런 그들에게 유일하게 위안이 되어 주는 것은 ‘높은 성의 사내’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활동하는 한 작가의 소설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설은 추축국이 승리한 세계라는 가상을 다시 뒤집어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이 전쟁에서 승리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의 세계다. 가상의 가상, 역의 역이 현실이고 참이 된 것이다. 이 소설에 푹 빠진 피지배계층인 주인공들은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또 어느 것이 가상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구분을 못 하게 된다.

02한국에서는 복거일(1946~ )이 『높은 성의 사내』와 유사한 발상으로 1987년, ‘만약 지금도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이라는 가정을 토대로 1980년대의 한국을 그린 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경성, 쇼우와 62년』을 발표했다.


03경성은 서울의 옛 이름이고, 쇼우와는 서기 몇 년이라는 표현 대신 일본에서 사용하는 연호였다. 『비명을 찾아서』의 부제인 ‘경성, 쇼우와 62년’은 그러니까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1987년 서울’이 된다.
작가의 상상은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저격을 시도하지만 이토 히로부미가 상처만 입었을 뿐 죽지는 않았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이토 히로부미의 생존은 이후 일본제국주의의 방향에 영향을 미쳐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고, 안정적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마침내 일본과 한 나라로 동화시키기에 이르는 역사적 진행을 결정한다.
따라서 1945년의 해방도 없고, 당연히 대한민국 건국도 없으며, 한국인, 한민족이라는 자각도 없다. 조선에 사는 사람들은 단지 ‘내지인’이라고 불리는 1등시민인 일본인과, ‘조선인’이라고 불리는 2등시민으로 차별을 받는 것을 불만스러워할 뿐 그 차별의 이유도, 그래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대책도 없이 살 뿐이다.
주인공 기노시다 히데오는 장교로 군생활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는 틈틈이 시를 써서 발표하는 초보 시인이며 평범한 중산층의 소시민이다. 그런 그가 몇 가지 우연한 일을 통해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을 갖게 되는데, 그 주요 계기는 책이다. 특히 조선의 옛 서적들이다. 이를 통해 그는 감추어진 조선의 역사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게 되고 민족의 언어인 조선어를 사용해 시를 쓰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런 한편으로 그는 2등시민인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식민지 조선에서 더욱 가혹한 일본제국주의의 파시즘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게 되고, 이것은 마침내 저항으로 이어진다.
특히 『비명을 찾아서』는 1987년 당시의 신문기사며 방송 등의 내용을 그대로 사용해 소설 속의 조선이 아닌 현실의 한국이 얼마나 일본시대의 잔재와 일본문화, 그리고 일본경제에 지배당하고 있는지, 그리고 당시 한국을 지배하던 전두환 정권이 얼마나 파시즘적 통치를 하고 있는지를 비판하고 있다는 평가 또한 받고 있다.
역사를 뒤집어서 현실을 다시 보게 하는 작업을 복거일은 이 소설 『비명을 찾아서』를 통해 시도한 것이다.

04『젊은 날의 초상』, 『필론의 돼지』, 『사람의 아들』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이문열(1948~ )도 2012년 어린이를 위한 소설로 『25년 전쟁사』를 썼는데, 대체역사소설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이문열은 ‘한국 광복군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해 전쟁을 벌였다면?’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이후 미국과 소련의 지원도 없이 25년 간에 걸쳐서 국토를 수복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실제 역사에서는 미국과 소련의 힘에 의해 해방되면서 우리나라가 이후 남북으로 분단되고 6.25전쟁을 거쳐 현재까지 남북이 대치하는 고통을 겪게 되지만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는 가정에 기반한 소설인 것이다.


05미국의 킴 스탠리 로빈슨(1952~ )의 소설 『쌀과 소금의 시대』(2002년)도 대체역사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중세 유럽을 덮친 흑사병으로 인구의 99%가 사망하고 세계의 패권이 중국과 이슬람의 손에 쥐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가정에 근거한 이 소설은 유럽과 기독교가 없는 세계를 7세기에 걸쳐 그려나가고 있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라 몇 차례고 죽었다가 다시 환생하는 세 사람의 주인공 K, B, I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작가는 이들 세 사람의 삶을 통해 세계와 세계사를 다시 그려보는 작업을 함으로써 부의 축적과 불평등의 기원, 페미니즘 등의 문제를 근본부터 다시 살펴보려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대체역사소설은 상상력, 그 중에서도 SF적 상상력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SF의 하위 장르로 분류된다. 이는 엄밀히 따져서 대체역사소설은 아니지만 과거의 어떤 사건에 개입해 역사를 바꾼다는 아이디어, 혹은 모티브가 SF에서부터 탄생했으며, 여러 차례 반복해 시도되었기 때문이다.

06폴 앤더슨(1926~2001)이 쓴 『타임패트롤』이 그 대표적인 작품인데, 타임머신으로 시간을 여행하며 고의적으로 시간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역사를 바꾸려는 범죄자들에 대항해 시간 관리의 임무를 수행하는 타임패트롤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작품 속에서 타임패트롤은 그 하나하나가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사건들을 역사에 기록된 그대로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만약 이들이 실패해서 역사가 바뀌면, 그리고 그 바뀐 역사를 기록하면 그것이 바로 대체역사소설이 되는 것이다.
한편 요즘 한국에서는 또 하나의 경향을 대체역사소설이라 부르고 있다. 즉, 주인공 개인, 혹은 단체가 어떤 이유로건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이동하여-이를 타임 슬립(time slip)이라 부른다-역사를 바꾼다는 내용의 소설들이다.

07한국에서 가장 먼저 이런 이야기를 시도한 것은 윤민혁이 2002년에 쓴 『한제국건국사』인데,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시리아에 파견되던 도중 원인을 알 수 없는 이변으로 시간을 거슬러 흥선 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1866년의 조선으로 가는 것에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이후 조선 말의 역사에 깊숙이 개입하여 당시의 열강이었던 미국, 프랑스 등을 물리치고 역사의 흐름을 바꾼다는 내용으로 전개되고 있다. 작가는 구한말 열강들의 침략 속에 속수무책이었던 분한 과거를 고쳐 쓰고 싶은 염원을 담아냈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로 『제국의 역사』, 『제국의 계보』, 『불멸의 제국』, 『대한제국 연대기』 등 유사한 내용의 작품들이 대체역사소설이라는 장르를 표방해 출간되고 있다. 이 작품들은 역사의 특정 시점에서 변화가 시작되어-변곡점이라고 부른다-그 영향으로 이후의 역사가 바뀌는 전통적 의미의 대체역사소설과 달리 작가가 투입한 주인공들에 의해 능동적으로 역사를 바꾸는 장르의 소설들이다.

08이러한 소설들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전통적으로 SF의 하위 장르인 타임 슬립 소설로 분류되어 왔는데, 그 최초의 작품은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1835~1910)이 1889년 쓴 『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를 꼽는다.
19세기의 미국인이 전설에 등장하는 아서 왕의 궁전으로 타임 슬립해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을 현대 과학의 힘으로 놀라게 한 다음, 그 까마득한 과거 세계에 19세기적인 공화국을 건설하려 한다는 내용이다. 불행히도(혹은 다행히도) 이 시도는 처참하게 실패하고 말지만 현대인이 과거로 가서 당시 사회와 역사를 바꾸려 한다는 모티브는 한국 대체역사소설의 전형과 흡사하다.


09이 장르는 이미 소개한 복거일도 『역사 속의 나그네』라는 소설에서 시도한 바 있으며, 원래는 전통적인 의미의 대체역사소설이었던 『비명을 찾아서』가 영화화될 때 각색을 통해 현대인이 일제시대로 타임 슬립해 겪게 되는 일을 그린 영화『2009 로스트 메모리즈』가 되기도 했다.
원래 대체역사소설은 역사의 한 부분을 비틀어 가상의 역사를 그리되, 그것을 통해 현재를 다시 보게 하려는 의도로 시도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현재 유행하는 대체역사소설 장르는 이미 진행된 역사에 대한 불만과 한을 타임 슬립이라는 SF적 도구를 사용해 마음에 드는 쪽으로 고쳐서 다시 만드는 대리만족의 장으로 오, 남용되고 있다는 우려를 하게 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원하는 대로 역사를 바꿀 때는 속이 시원하기도 하고 좋겠지만 결국 도움이 되는 것은 없는 ‘정신승리’의 한 형태가 아닐까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글틴 웹진》


추천 콘텐츠

아무 문제 없음

아무 문제 없음 고비읍 오른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입을 틀어막고 참아 보려는 듯하지만, 결국은 끕끕 새어 나오는 소리. 내 바로 왼편에 앉은 아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기 바빴다. 사방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 건 무대 위의 한 남자애가 울기 시작하고서부터였다. “부족한 저에게 이렇게 많은 사랑을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그 사랑 다 돌려드릴 수 있도록 더 노력할게요. 저를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 그 애는 울먹이느라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누군가가 크게 그 애의 이름을 연호하자 팬들이 한목소리로 그 애의 이름을 외쳤다. “연홍아, 울지 마!” “연홍아, 사랑해! 더 많이 사랑할게!” “최연홍! 행복하자!” 반짝거리는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눈부신 조명을 받는 무대 위의 남자애를, 이미 많이 행복해 보이는 그 애를 팬들은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나는 커다란 공연장 안을 둘러보았다. 2만 명이 앉아 있는 이 공연장 어딘가에 송리윤도 있었다. 다른 팬들처럼 송리윤도 그 애를 보고 울었을까. 더 사랑해 주겠다고 외쳤을까. 따로 연락도 한 적 없고, 밥 한 번 같이 먹은 적 없지만 그 애는 송리윤에게 사랑받았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대가 없이. 세븐플래닛은 마지막 무대라면서 팬들에게 함께 부르자고 했다. 팬들은 노래 가사 전체를 다 알고 있는지 막힘없이 따라 불렀다. 3시간쯤 콘서트가 진행되는 동안 세븐플래닛이 불렀던 노래 대부분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노래들이었다. 애초에 나는 세븐플래닛에 관심이 없었다. 멤버가 몇 명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관심도 없는 세븐플래닛 콘서트 티켓을 산 건 오로지 송리윤 때문이었다. “여러분, 오늘 즐거웠나요?” “네!” “행복했나요?” “네!” “저희도 너무너무 즐겁고 행복했어요.” 멤버들은 돌아가면서 엔딩 멘트를 던졌다. 아까는 우느라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던 최연홍이 이번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븐플래닛과 가디언이 함께한 지 벌써 5년이 됐어요. 이만하면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평생 서로 사랑하고 아껴 줘요. 알았죠?” 팬들은 큰 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어딘가에서 송리윤도 같이 외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뭐야? 할 말 있어?” 송리윤이 근처에서 쭈뼛대는 내게 물었다. “저기…….” “쉬는 시간 다 끝나 간다. 아까운 시간 잡아먹지 말고 빨리 좀 말해 줄래?” “나도 갔었어, 어제. 세븐플래닛 콘서트 말이야.” 혹시나 반가워해 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송리윤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송리윤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여느 때처럼

  • 관리자
  • 2022-10-01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백온유, 『페퍼민트』(창비, 2022) 김젬마 재난이 남긴 것들 백온유의 『페퍼민트』는 준비 없는 재난 앞에 닥친 기약 없는 기다림과 불투명해진 미래를 견디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은 ‘프록시모 바이러스’ 후유증으로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돌보는 ‘시안’과, 슈퍼 전파자라는 낙인으로 두려움과 불안함을 안고 사는 ‘해원’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안과 해원은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지만, 바이러스가 삶에 침투하자 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식물인간이 된 엄마의 세계가 멈추고 자신의 미래까지 멈춰버린 시안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느라 정작 자신의 세계여야 할 학교와는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그저 자신의 하루를 견디고 버티며 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희망이나 미래를 품을 수 없는 고단한 삶 속에 놓여 있는 시안의 일상은 위태롭고 무력할 뿐이다. 엄마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보다 엄마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진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엄마를 누구보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돌보지만 결국 모든 정성과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들에 지쳐 있다. 한편 슈퍼 전파자라는 무차별 공격으로 인한 불안함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지원’으로 개명하고, 이사와 전학을 선택한 해원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마치 바이러스가 자신의 삶에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살아간다. 가족만큼이나 끈끈했던 두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들의 공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이 공백은 두 사람의 잃어버린 시간과 멀어진 마음의 거리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시안과 해원은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시안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해원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그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감정의 화살을 해원에게 돌린다. 해원은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아는 시안의 등장이 당혹스럽기만 하고 지난 시간을 들추는 것 같아 불편하다. 희망 없는 현실을 견디고 있는 시안과 과거로부터 도망쳐 평범한 삶을 꿈꾸는 해원, 이 두 사람은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고여 있는 삶 재난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엄마와 이별을 한 시안은 식물을 돌보듯 엄마를 간병한다. 엄마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엄마가 썩지 않도록 기저귀를 자주 갈아 주는 것뿐이지만, 시안은 엄마의 미각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엄마가 좋아하던 페퍼민트 차를 매일 우려 입에 적셔 준다. 시안은 매일 같이 차를 우리며 어린 시절을 회상할 뿐 아니라, 절망과 무력함으로 점철된 일상에 작은 희망을 품으며 나름의 의식을 행하고 있다. 엄마는 고여 있는 것 같다가도 우리 삶으로 자꾸 흘러넘친다. 우리는 이렇게 축축해지고 한번 젖으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을 제때 받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필 것이다. 우리는 썩을 것이다.(98쪽) 시안이 오랜 간병 경험으로 얻은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

  • 관리자
  • 2022-10-01
K-할머니의 이름은

[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K-할머니의 이름은 유은실, 『순례 주택』(비룡소, 2021) 김젬마 불편한 것들에 대하여 동화나 청소년소설에서 노년 여성 캐릭터는 대개 죽음이라는 소재와 연관되거나 주인공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고 성장을 돕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주로 돌봄 노동과 모성의 주체로 호명되다 보니 자신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불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는 호칭들에 매우 민감한 이가 있으니, 바로 『순례 주택』의 건물주 순례 씨다. 75세인 순례 씨는 어머니, 할머니, 사부인, 동거녀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과 가족 단위로 엮이는 호칭들을 불편해한다. 이러한 호칭들은 순례 씨의 다채로운 삶과 이력들을 괄호 칠 뿐 아니라 순례 씨의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무례함을 담고 있다. 순례 씨는 사별한 남자친구의 손녀인 수림을 손녀가 아닌 최측근으로 호칭 정리하며 할머니와 손녀라는 전형적인 관계 방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순하고 예의바르다’의 순례(順禮)에서 남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순례(巡禮)로 개명할 만큼 자신의 이름에 대한 애착과 소명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가족으로 소환될 뿐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경험이 없는 ‘K-할머니’의 이름은 자신을 옭아매는 규범적인 호칭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재정의 된다. 순례 씨는 호칭뿐만 아니라 물질과 돈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덜어내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이산화탄소를 마구 배출하는 인간들과 쓰고 남는 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인생 최대의 고민인 그는 푸짐하고 손 큰 할머니의 밥상이 아닌 노동력을 최소한으로 하는 간단하고 소박한 밥상을 차린다. 순례 씨는 정직하게 땀 흘려서 노동하는 삶을 추구하며 세상과 물질에 욕심 없는 다소 초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자기만의 경계가 매우 뚜렷한 인물이다. “월세 밀리는 건 참아도, 분리배출 제대로 안 하는 건 못 참”(80쪽)을 만큼 그는 순례 주택의 생활 수칙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고 단호하다. 이렇게 순례 주택 입주민들은 공용 생활 수칙과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며 사는 것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53쪽)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유은실의 『순례 주택』은 고정된 공간과 다양한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기본적으로 순례 주택이라는 공동체의 복작거리는 삶을 그린다. 이는 사건이 인물과 장소의 활용도가 높고 이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시트콤의 형식과 비슷하다. 『순례 주택』은 등장인물의 이름, 나이, 직업, 특징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이

  • 관리자
  • 2022-09-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