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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특!기자단]관습에 익숙해져 변화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지 말라

  • 작성일 2014-09-24
  • 조회수 558


[문학특!기자단]



관습에 익숙해져 변화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지 말라

- 이화여대 이인화 교수와의 만남




○ 덕업일치한 ‘성덕’


김선정 (문학특!기자단 2기)




한국에서도 두터워진 지 오래인 오타쿠 층. 관련 신조어들도 파생됐다. 이러한 신조어는 ‘오타쿠’들의 본거지라고 여겨지는 게임과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걸쳐 사용된다. 어떤 사람이 좋아하는 분야와 ‘-덕’을 접미어로 붙이기만 하면 된다. ‘오타쿠’를 한국어로 줄인 ‘오덕’에 착안한 것이다. 록음악에 심취한 사람을 일컫는 ‘락덕’, 책을 좋아하는 ‘책덕’ 등. ‘오덕후’ 혹은 ‘덕후’라는 조어도 같은 맥락이다. 이렇듯 ‘덕후’라는 단어는 일상에 널리 쓰인다.
누구라도 덕후라 불릴 수 있는 시대지만, 아직도 ‘오타쿠’에 대한 인식이 좋지만은 않다. 본인이 ‘오타쿠’임을 주위 사람들에게 숨기는 ‘숨덕’도 적지 않다. 반대로 ‘성덕’도 있다. 말 그대로 ‘성공한 덕후’다. 이들은 사회적 지위를 갖추었고, 자신이 ‘덕후’임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덕질(오타쿠 문화생활)’이 성공의 지름길일 때도 있다. ‘‘오타쿠’는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실제로 오타쿠는 일본어로 집, 즉 댁(宅)에서 유래했다)’는 사회적 통념을 깨는 사례다.
성덕 중에서도 으뜸이 있으니, ‘덕질’과 직업이 일치하는 ‘덕업일치(德業一致)’한 성덕이다. 기자가 이인화 작가(본명 류철균)를 만나기 전, 사전 조사를 하며 느낀 그의 인상이다. 말로만 들어온 ‘덕업일치’한 ‘성덕’을 직접 만날 기회였다.
본래 이인화 작가는 ‘겜덕’보다는 문학청년이었다. 그는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으며, 이상문학상 등 내로라하는 문학상을 받았다. 1993년 발표한 장편소설 『영원한 제국』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후 영화화되기도 했다. 박사학위를 받기도 전인 1995년에는 이례적으로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전임강사로 초빙되어 부임했다.
디지털 게임에 몰두하기 시작한 건 2003년, 디지털 스토리텔링 학회(DIGIS)를 창립한 때다. 「리니지2」와 「길드워」에서 세계 정상급 게이머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같은 대학교 디지털미디어학부 교수로 이직해, 현재 학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 외에도 영화·게임 시나리오 집필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작가의 이력을 읽다 보면 궁금할 만하다. 게임과 연구, 집필을 함께하는 시간관리 능력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 작가는 “좋아하는 일이라면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본인을 돌아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부모가 시간 낭비라고 자녀가 ‘덕질’하는 걸 가로막는 경우도 있어요. 그럴수록 ‘덕질’을 하고 싶단 생각으로 더 많은 시간이 낭비됩니다. ‘덕질’을 바닥까지 느껴야만 끝낼 수 있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작가는 자녀의 ‘덕질’이 인간적이라 생각해 적극적으로 지원했다는 이야기도 풀어놓았다.
취재 전 작가를 주로 조사한 탓에 작가가 몸담고 있는 학부에 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인터뷰를 통해 무척 매력적인 학부임을 알게 되었는데, ‘덕업일치’에 최적인 학부이기 때문이다. 이화여자대학교 디지털미디어학부는 공학(프로그래밍)·디자인·인문학(기획)으로 이루어진 융합학부이다. 창립 후 접합점을 찾기 위해 노력한 지 올해 12년째. 이제는 취업률도 안정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대학 알리미로 검색해보니 ‘취깡(신조어 취업깡패의 줄임말로 취업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학과에 붙는 별명이다)’ 수준이었다.
“우리 학부 학생들은 다 ‘오타쿠’”라는 작가의 모습에서 학부에 대한 자부심을 볼 수 있었다. 역시 성덕 배출 학부다. 학생들은 같은 대학 출신이 대다수이고, 학부 시절 전공은 무척 다양하다. 인문학은 대부분 언론홍보·영상·문학·철학 출신이지만, 문예창작과도 물론 있다.
디지털미디어학부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조언도 자문했다. “트랜스 미디어(trans media, 미디어 간 경계를 넘어 서로 융합하는 현상)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진화한 현시대, 게임이야말로 미디어와 문학의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관습에 익숙해져 변화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지 말라는 조언도 들을 수 있었다.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자기암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과 현실 사이의 격차를 파악하는 균형적인 시각도 필요하다. 가르치는 내용 자체가 매번 변하는 트렌드와 연관되기 때문에 들을 수 있는 조언일 것이다.
이인화 작가를 실제로 만날 기회가 있다. 입학처와 학부사무실과의 전화 문의 결과, 디지털미디어학부에 대해 알 수 있는 대학원 페어가 10월 초 UCC에서 예정되어 있다.




○ 모티프로 만든 나만의 창작물, 스토리 헬퍼


박지영(문학특!기자단 2기)


사람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오감을 갖고 있다. 감각 기관만큼 다양한 직업을 지닌 엘리트가 있다.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스토리 헬퍼,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 교수, 게임애니메이션 센터 참여교수를 겸하는 이인화 (본명 류철균) 작가가 그렇다. 글틴기자 김선정, 박지영은 이화여자대학교(이하 이대) SK 텔레콤 미디어관에서 한 시간 정도 그를 만났다.
기자는 약속 장소와 다소 거리가 있는 후문 방향으로 도착했기에 아름다운 이대의 건물을 두루 둘러볼 수 있었다. 청춘을 뽐내는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녹음이 만발한 교정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여학생들에게 길을 물어 도착한 교수실의 한쪽 벽면 전부를 채운 책꽂이에는 각종 인문학 도서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이인화 작가의 신작인 <스토리텔링 진화론>도 있었다. 글틴 기자단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시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포털 사이트에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보면 단 몇 줄만으로 요약이 된다”며 웃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웠던 분야는 ‘스토리 헬퍼’였다.
스토리 헬퍼는 이화여자대학교 디지털미디어 학부에서 100여 명의 학생들과 진행한 프로젝트이며, 자신이 생각하는 주인공과 장르, 주제 등에 관한 문항에 답을 하면 그와 연관 영화를 찾아주는 프로그램이다. 비슷한 맥락의 영화들의 시나리오를 선별한 후 새로운 장면을 구상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스토리 헬퍼는 아이디와 비밀번호만 입력하는 간단한 회원 가입을 통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총 1400여 편의 영화와 200개의 모티프를 바탕으로 구축된 이 프로그램은 게임 개발 회사 엔씨소프트의 후원을 받는다.
스토리 헬퍼에는 모티프와 트리트먼트 샘플 두 가지의 모드가 있다. 사용자는 모티프 모드에서 등장인물을 구상하는 질문에 답하여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인물의 신체능력(장애ㆍ병약ㆍ보통ㆍ건강ㆍ우월)이나 종족(인간ㆍ외계인ㆍ영혼ㆍ동물ㆍ좀비ㆍ뱀파이어ㆍ늑대인간과 같은 비인간)을 묻는 문항도 있다. 상세보기 결과를 통해 인물 간의 갈등 양상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모티프를 조금씩 변경해 구상할 수 있다.
또 다른 모드는 트리트먼트 샘플 모드이다. 이야기의 전개나 주인공의 특성을 질문하며 좀 더 세부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가령 주인공의 목적을 가로막는 방해물이나, 적대자의 최후나 파워를 묻는 문항 등으로 구성돼 있다. 21가지 문항에 전부 답하면 플롯 유사도를 측정해, 매칭율과 영화의 제목과 모티프, 에피소드와 장면을 알려준다.
이 두 모드를 통해 자신이 구상한 등장인물을 바탕으로 장면을 재배열한다면,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 수 있다.
‘굉장한 프로그램’이라는 글틴 기자단의 감탄에, 그는 모든 영화가 전체적인 흐름은 그대로일 뿐 스토리만 조금씩 달라진다고 답했다. 이화여대를 희망하는 기자에게 그의 신작 <스토리텔링 진화론>의 페이지에 합격을 기원한다는 사인을 해주며 만남을 마쳤다.



《글틴 웹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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