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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연극에세이①] 셰익스피어의 사랑, 그 다양한 감정들

  • 작성일 2015-02-15
  • 조회수 1,396


[소소한 연극에세이①]



셰익스피어의 사랑, 그 다양한 감정들

- 소년, 소녀의 사랑 『로미오와 줄리엣』, 청춘의 사랑 『한여름 밤의 꿈』 -



정유정 (경기영상과학고 교사)






“사랑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거야.
그래서 날개 달린 큐피드를 장님으로 그려 놨지.
게다가 사랑 신의 마음은 판단력도 전혀 없어,
날개 있고 눈 없으니 무턱대고 서두르지.
그러니까 사랑을 어린애라 하잖아,
선택할 때 그 애는 너무 자주 속으니까. ”

- (『한여름 밤의 꿈』 1막 234-239행) -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묻는 질문에는 주저하게 되지만, 싫어하는 계절을 물어오면 주저 없이 ‘겨울’이라고 답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추운 것을 무척 싫어하니까. 아무리 꽁꽁 싸매고 나가도 덜덜 떨리는 몸,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를 견뎌내는 것은 고통스럽다. 때로는 그 추위에 너무 서럽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겨울 방학’은 무척 좋아한다. 꽤 오랜 시간을 여유롭게 공연도 보고, 책도 읽고, 다가올 봄, 여름, 가을을 지낼 것을 상상하며 행복해할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봄’이 되면 새로운 사랑이 다가올 것 같고, 그와의 사랑은 ‘여름’에 무르익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져도 괜찮은 나날이니까.


치열한 첫 연애를 하다가 느닷없이 이별을 마주했을 때 기억을 지우는 마법의 약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사랑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직전의 이별로 느꼈던 고통과 연애의 기억은 아주 흐릿해졌다. 나의 사랑은 너무 가벼운 것 아닐까라고 고민하던 때, 우연히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다시 읽게 되었다. 사춘기 시절에 읽었을 때는 첫눈에 반한 사람을 운명의 사랑이라 칭하고, 가족을 죽인 원수임에도 용서하며, 자신들을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뒤로하고, 죽음으로 둘만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던 주인공들의 모습만 보였었다.
한 번의 이별을 경험하고, 또 다른 사랑을 겪으며 읽게 된 작품에서 비로소 ‘로잘린’이란 배역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았던 여인. 전 세계인이 알고 있는 사랑 이야기에서 남자 주인공에게 처음으로 실연의 상처를 주었던 인물이었지만, 결국 그에게 새롭게 등장한 사랑 때문에 그 누군가의 기억에도 오래 남을 수 없었던 사람. 처음으로 로미오에게 사랑의 열병을 앓게 만들고, 자신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슬픔 때문에 당장이라도 삶을 포기할 것 같은 상실감이 무엇인지 알려 주었던 로잘린.
하지만 그녀를 보기 위해서 찾았던 파티장에서 로미오는 진짜,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버릴 줄리엣을 만나게 된다. 한 번의 실연으로 얻은 시련이 그에게 운명적 사랑을 가져다준 것이다. 만약, 로잘린이 로미오의 짝사랑을 받아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캐플릿과 몬테규 두 가문은 계속 원수지간으로 남았을 것이고, 로미오와 로잘린은 결혼 후 치열한 일상을 살아냈을 것이며, 후대의 누군가가 두 집안의 반대를 물리치고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았을까.


셰익스피어는 18살에 무려 8살 연상의 부인 앤 해서웨이와 결혼한다. 당시의 결혼관습을 지키지 않을 정도로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는데, 결혼 5개월 만에 큰딸이 태어났다. 사랑 앞에서 거침없이 돌진하는 극중 인물은 결국, 작가의 삶 속에 녹아 있었던 것이다. 부인이 지난해 인기를 끌었던 『인터스텔라』라의 앤 해세웨이처럼 매력적인 여성이었을까 싶어서 몇 권의 책을 뒤적여 보아도 부인이 아름답다거나 매력적이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악처였을 것이라는 문장은 몇 줄 보이기도 한다. 이런 추측은 아마도 셰익스피어가 죽을 때 남긴 유언장 속 아내에게는 ‘두 번째로 좋은 침대 및 그 부속품’을 주라는 구절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에는 남편이 죽으면 재신의 3분의 1은 아내에게 돌아갔다고 하니까, 자신의 죽음 앞에 슬퍼할 아내에게 진짜로 주고 싶었던 마지막 유산은 ‘웃음’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비극적인 작품에서도 깨알같이 희극적 상황을 담아냈던 극작가의 내공은 결국 삶의 태도에서 나온 것이었나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내가 악처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어느 정도는 가능해 보인다. 셰익스피어가 큰딸을 낳고 쌍둥이 남매를 낳은 몇 년 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가족들을 고향에 남겨두고 런던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그가 런던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 2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부인 입장에서는 남편이 경제적인 부분을 풍족하게 책임져 주었다고 해도 그 기다림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리고 홀로 타지에 있으면서 분명, 감정적으로라도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되었을 남편을 생각하면, ‘질투심’에 자연스럽게 악처의 모습을 보이게 되지 않았을까.


본격적인 사랑의 시작을 다루고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과 비슷한 시기에 창작된 『한여름 밤의 꿈』은 사랑의 과정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감정인 ‘질투’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 준다. 숲 속 요정들과 자연 정령의 왕인 오베론은 부인 티타니아가 시종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그는 복수를 결심하고, 공기의 정령 퍽에게 눈에 한 방울 떨어뜨리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처음 보는 것을 사랑하게 되는 ‘마법의 꽃’을 주고 자신의 아내에게 뿌리게 한다.
그렇지만 퍽의 실수로 허미아와 사랑의 도피를 하는 라이샌더, 그리고 허미아와 결혼하기 위해서 그들의 뒤를 쫓는 드미트리우스의 눈에 ‘마법의 꽃’을 바르게 된다. 자신이 짝사랑하는 드미트리우스를 따라서 숲으로 온 헬레나를 눈을 뜨고 처음 보게 된 두 남자는 허미아를 사랑했던 과거를 다 잊고, 헬레나를 사랑하게 되면서 네 명의 청춘들의 사랑에는 큰 혼란이 찾아온다.
요정들의 왕도 사랑하는 이를 통해서 생기는 ‘질투’의 감정에 휘둘리는데 평범한 사람들의 질투심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공기의 정령에게 ‘마법의 꽃’을 바를 수 있는 역할을 부여했듯이, 사랑은 공기만큼 중요하다. 하지만 그 사랑이 잘못된 방향을 향할 때에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무시무시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 누군가를 무작정 사랑하는 것보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것 아닐까.


셰익스피어가 비슷한 시기에 ‘사랑’을 소재로 쓴 두 작품을 동시기에 읽으면 그가 말하고자 했던 사랑에 대해 훨씬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사랑을 했던 사람, 사랑을 하는 사람, 앞으로 사랑을 할 사람들이라면 이 두 작품은 필독하길 권한다. 그 어떤 연애관련 서적보다 당신들의 사랑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해주며, 지금, 당신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들에 대해서도 상세히 읽을 수 있을 것이며, 사랑하는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줄 테니까. 뭐, 읽었는데도 모르겠으면 연극 공연으로 찾아보길 바라고, 그도 안 된다면 몇 차례에 걸쳐서 각 시대의 유명한 감독들에 의해서 영화화된 작품들이니 찾아보는 수고를 아끼지 말고, 그래도 부족한 것 같으면 몇 명의 친구들과 모여서 직접 공연으로 제작해 보는 기회를 마련해서 희곡의 문장들을 발화해 보면 어떨까.
아, 문득 깜빡 잊고 싶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올리비아 핫세가 연기해서 절세가인 이미지인 줄리엣 역을 처음 맡은 건 변성기 이전의 소년 배우들이었다는 사실.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여자는 무대에 오를 수 없었기에 여배우가 없었다. 여배우가 등장한 것은 17세기 후반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성들을 연기했던 배우들이 당대의 미소년들이었기를 바랄 뿐이다.



Ps.
셰익스피어는 극단 활동의 마지막까지 극작과 배우 활동을 겸했다고 하는데 그의 훤칠한 외모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배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배우가 너무 하고 싶어 꾸준히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 희곡을 썼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각자 해석하기 나름이니 인터넷에서 그의 모습을 한 번쯤 검색한 후 판단해 보기 바란다.




정유정 (경기영상과학고 교사)


성균관대 연기예술학과 졸업.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석사 수료. 고양시 연극협회 소속으로 연극연출 활동하며, 경기영상과학고등학교 촬영조명학과에서 연극영화 교사로 재직 중.




《글틴 웹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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