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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연극에세이③] 결코 오지 않을 누군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리는 일

  • 작성일 2015-05-18
  • 조회수 452


[소소한 연극에세이③]



결코 오지 않을 누군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리는 일

- 산울림 소극장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관람한 후에 -



정유정 (경기영상과학고등학교 교사)






여우가 말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오는 게 좋을 거야.
만일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4시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점점 행복해지겠지.
마침내 4시가 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안절부절못하게 될 거야.
그러면서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돼.
그런데 네가 아무 때나 온다면 언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잖아.
그래서 의식이 필요한 거라고.”

-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 『어린왕자』 중 -




에스트라공 : 그만 가자
블라디미르 : 가면 안 되지
에스트라공 : 왜?
블라디미르 :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 참 그렇지

- 사무엘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중 -



sanwulim


도심의 아스팔트 바닥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던 4월의 어느 일요일.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관람하기 위해서 혼자 홍대 산울림 소극장을 찾았다. 분주한 도심 한가운데 변화무쌍한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30년 동안 한 곳에 존재하는 소극장 산울림은 나에게는 산과 같은 존재이다. 산울림 소극장에서 공연을 보고 나오면, 등산을 한 것 같은 상쾌함과 동시에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처음 연극을 보는데 어떤 작품을 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산울림 소극장에서 하는 연극을 찾아서 보라고 말해 줄 수 있을 만큼 그곳에서 공연되는 작품까지도 신뢰하게 되는 몇 안 되는 극장이다.
산울림 소극장의 고정 레퍼토리로 거의 해마다 공연되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오랜 시간 공연된 만큼, 많은 이들에게 추억을 통한 감성의 공유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연극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의 단골 단체관람 작품이기도 하고, 문화예술에 조금의 관심이 있는 젊은 연인들이 데이트 코스로 보러 오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다른 작품의 공연장에서는 볼 수 없는 가족 단위의 관객들도 꽤 많았다. 아마도 젊은 시절 아내와 혹은 남편과 데이트하면서 보았던 아련한 추억의 감정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어서, 혹은 수업을 들으면서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해하지도 못하고 보았던 고도의 기다림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작품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멋대로 그들의 관람 이유를 붙여본다.


나에게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20대까지는 주저 없이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말했었다. 기다림이라는 감정은 여우가 말했듯 나에게는 행복이라는 감정과 맞닿아 있었을 뿐이지 그 이외의 감정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기다림이라는 단어 자체는 나에겐 아주 긍정적인 이미지들의 묶음인 꿈이자, 희망이자, 도전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짝사랑하던 선배와 우연을 가장하여 필연적으로 마주치기 위해서 그가 다니는 동선을 체크한 후 친구들과 함께 시간 맞춰 그 장소들을 배회하면서 무척 오랜 시간을 선배만을 생각하며 기다렸던 적이 있다. 가끔은 책을 읽기도 했고, 음악을 듣기도 하고, 친구의 연애상담을 해 주기도 하고, 배고픔을 달래려고 빵을 먹으면서 기다림의 시간을 채웠던 것 같다. 10번 정도의 시도 중에 3번 정도는 우연히 마주쳐서 눈인사를 주고받았고, 그날은 세상의 전부를 가진 듯 기분이 좋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내 생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그래서 그 시절 나에겐 세상의 전부였던 그를 몇 분 뒤면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은 나에게는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떨림이고, 흥분이었다. 그가 대학에 진학하고, 더 이상은 같은 장소에서 그를 기다리는 행위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선배처럼 자신이 원하던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 예전보다 좀 더 공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배우라는 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기다림에 충실했다. 아마도 그때의 나에게는 기다림의 대상들이 비교적 명확했고, 나의 의지로 그 대상들에 대한 기다림을 만남 혹은 이별의 이분법으로 쉽게 규정지을 수 있다고 확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다림은 행복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30대가 된 지금의 나에게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듣고 생각나는 작품을 말하라면 주저하지 않고, 「고도를 기다리며」를 말할 것이다. 작품 안에서 고도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숙명처럼 고도를 계속 기다린다. 그리고 작품의 마지막까지 그 기다림의 대상은 오지 않는다. 아마 작품이 더 길어진다고 해도 고도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기다림이 결코 누군가가 올 것이라는 전제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행복감만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에게는 기다림 자체가 목적이 된다. 무엇을 기다리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가 중심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기다림의 대상이 오지 않아서 처연함을 느끼기도 하고, 생의 마지막을 꿈꿔 보기도 한다. 기다림이라는 숙명적 제도 안에서 지루함과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즐거운 놀이의 시간으로 만들 것인지가 그들에게 주어진 몫이다.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을 당연히 알고 있으면서도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견뎌야 할 때, 우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 행동해야 한다.
공연을 본 사람들은 ‘고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연구자들은 각각의 견해를 내세우면서 ‘고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증명하려 애써왔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초연 때 연출자 알랭 슈나이더가 베케트에게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결국, 고도에 대한 정의는 공연을 본 관객들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누구에게나 고도는 있고, 그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각자 주어진 숙명을 갖고 행동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1969년 부조리극이라는 새로운 작품에 대한 임영웅 연출의 호기심과 도전에서 만들어진 「고도를 기다리며」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극단 산울림의 고정 레퍼토리로 아일랜드, 프랑스, 폴란드, 일본 등에서 초청공연을 갖고 거의 해마다 국내외에서 공연될 것이라고는 작품의 연습 초기에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극단 등록(60년대만 해도 등록된 극단만이 공연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도 되어 있지 않아서 극단 신협의 이름을 빌려서 작품을 올리기로 하고, 한국일보 소극장과 명동예술극장에서 며칠씩 공연을 하기로 예정되어있었으나 기존의 연극과 상당히 다른 작품을 분석하면서 형상화하는 과정은 10시간, 12시간의 고된 연습의 연속임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작품에 대한 성공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장기 공연은 사실, 기대하는 것조차 사치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무모한 도전에 대한 기다림은 연습 도중에 작가 사뮈엘 베케트가 노벨 문학상을 타는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보상받는다. 공연 티켓은 연일 매진되고, 생각보다 많은 관객들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연극의 등장에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고, 이는 기존의 연극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런 계기가 있었지만, 「고도를 기다리며」가 바로 레퍼토리로 정착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85년 상설무대 산울림 소극장을 개관하고 나서야 비로소 매년 안정적으로 무대에 올려질 수 있었다. 임영웅 연출은 자신의 연출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이 작품을 만드는 데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공연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그 자리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그는 60년 연출 인생의 4분의 3을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가 작가가 의도한 원작 그대로 무대 위에 형상화되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연습하고, 매년 새로운 관객들과 매년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궁금증을 가지고 찾아오는 관객들에게 검증 받는 것으로 보냈다. 또한, 재능과 연기력을 겸비한 좋은 배우들도 많이 배출해 냈다. 상설극장을 갖고 극단을 운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요즘 같은 시대에 극단 산울림과 임영웅 연출은 그 존재만으로도 한국 연극계에 큰 힘이 된다.


Ps. 젊은 시절에 본 연극을 몇 십 년이 지난 오늘에 동일한 배우와 연출을 통해서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자 행운이다. 극단 산울림처럼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많은 극단들이 상설극장을 모두 소유하게 되는 날을 꿈꿔본다. 이 꿈이 이루어지는 날,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추억을 꺼내어 보고,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들과 추억의 시간들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숙명적인 기다림의 시간들도 결코 외롭거나 지루하지 않을 텐데…….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괜찮은 극단들의 공연을 한 번씩만 더 찾아준다면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정유정 (경기영상과학고 교사)


성균관대 연기예술학과 졸업.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석사 수료. 고양시 연극협회 소속으로 연극연출 활동하며, 경기영상과학고등학교 촬영조명학과에서 연극영화 교사로 재직 중.




《글틴 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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