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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연재소설] 생텍쥐페리 가 27번지_제3회

  • 작성일 2015-08-17
  • 조회수 651


[중편연재]



생텍쥐페리 가 27번지 (제3회)



전삼혜




삽화_생텍쥐페리가27번지-3회


3. 사막 한 가운데 죄가 있었다


연은 처음 그 명령을 받았을 때 당황했다. '웨일 재단'의 사라진 아이들을 찾으라는 명령이 내려온 것도, 자신과 동행하는 수사관이 이제 16세가 된 최연소 특수 채용 수사관이라는 것도. 게다가 얼마나 기간이 걸릴지,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모르는 이 임무를 비밀로 해야 한다는 것도. 사실상의 좌천 명령은 아닐까. 연은 명령을 받으면서도 고민했다. 어쨌거나 세부 사항은 직접 웨일 재단으로 가 그 곳의 총책임자에게 들으라는 말을 전해 듣고 '웨일 재단'의 본부로 향하면서도 연은 자꾸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비아만 쳐다보았다. 비아. 열여섯 살의 나이로 수사관 채용 시험을 통과한, 소녀. 매끄러운 금발 생머리는 날개뼈 아래까지 늘어뜨려져 있고 몸 곳곳은 어릴 때부터 받았다는 수술로 패치워크에 가깝다지만 수사관 제복 겉으로 드러난 것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얼굴뿐이었다. 어딘가 아이 같지만 눈코입이 또렷하게 도드라진 침착한 인상. 비아가 웃으면 그 주변의 세계가 부드럽고 온화해지는 것 같다고 비아와 잠시라도 함께 근무했던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비아 웨일.
"웨일 재단에 도착했어요."
낭랑한 목소리로 비아가 말하자 연은 정신을 차리고 차에서 내렸다. 근거리를 모두 워프 게이트로 이동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기 때문에 도로와 도로로 연결된 곳에서는 여전히 전기 자동차가 오갔다. 비아는 익숙한 듯 입구에서부터 신분증을 제시하고, 연의 가슴에 특수 코드가 잔뜩 새겨져 있는 이름표를 달아 주었다.
"저, 비아 웨일 씨는 웨일 재단 출신이죠?"
조심스럽게 연이 묻자 비아는 또각또각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네. 그냥 비아라고 부르시면 돼요. 전 아직 성인도 아닌걸요."
성인도 아니지만 뛰어난 두뇌와 운동 실력, 그리고 웨일 재단의 내부자 출신으로 세상과 웨일 재단을 이어주는 통로로 수사관이 된 비아 웨일. 어떻게 보면 그저 마스코트에 불과할 테지만 비아의 능력은 성인과 다름없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같은 몸집의 성인보다도 뛰어났다. 채용 기준을 살짝 웃도는 작은 키와 가는 팔다리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몸은 다 기계 장치일 테니까, 우리는 로봇과 함께 근무하는 거야. 누군가 그렇게 비아냥거리기도 했지만 비아는 그런 말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듯 자신에게 맡겨진 업무를 척척 수행해냈다,
그리고 그런 비아와 함께, 연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웨일 재단의 총책임자'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웨일 재단이 만들어내는 장애 극복 기술과 약물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방송이나 현장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항상 웨일 재단의 '대리인'이었다. 대표는 몸이 좋지 않아 방송 출연을 거부하고 연구에만 전념한다고 했다. 그 비밀성이, 대표가 몸이 아프다는 비극적인 스토리가 웨일 재단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스스로가 웨일 재단의 아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아이 비아가 세상에 나와 수사관이 된 이후로는 더더욱.
"저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아주 약했어요. 제 몸의 기관은 모두 웨일 재단의 손을 거쳐 새로 만들어진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래서 저는 웨일 재단을 위해 일하고 싶어요. 웨일 재단의 기술이 한 사람을 새로 만들어내서, 그 사람이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비아 웨일은 수사관 제복을 입고 그렇게 말했다. 눈꼬리에 맺힌 눈물 한 방울이 그 연설에 설득력을 더해 주었다. 그러나 연은 그런 비아가 탐탁지 않았다. 완벽한 사람의 곁에 서는 건 언제나 부담스럽잖아? 당연해. 수사총장이 자신과 비아를 한 팀으로 엮어 주며 불안을 달래주려는 듯 시원스럽게 말해주었을 때도, 비아 웨일이 손을 내밀며 '잘 부탁합니다'라고 인사를 했을 때도 껄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완벽한 사람.


연은 비아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는 가장 높은 층까지 올라갔다. 온갖 보안 장치를 '비아 웨일'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신분증 하나로 통과하는 비아를 보며 연은 어떤 경탄과 공포 비슷한 것을 느꼈다. 호리호리하게 가는 뒷모습으로 소독약 냄새 가득한 복도를 자기 집처럼 가로질러 가는 비아의 등.
비아는 문을 열며 집에 돌아왔다는 듯이 인사했다.
"엄마, 저 왔어요."
침대가 아닌 안락의자였다. 거대한 몸이 의자에 파묻히듯이, 의자를 집어삼킬 듯이 꽉 들어차 있었다. 온 몸에 연결된 관에서 쉬지 않고 쉬익쉬익 소리가 났다. 심전도와 맥박, 혈압을 체크하는 기계 소리가 박자를 맞춰 삐빅거리며 울렸다. 수많은 호스와 기계를 넘어간 비아는 친밀함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손짓으로 거대한 여자의 손을 잡았다.
"엄마, 비아예요. 그리고 이쪽은 우리 재단을 도와주실 수사관, 연 씨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제 1지구 수사관 연입니다."
연은 반사적으로 자기소개를 하면서도 '엄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거대한 살덩어리.
부은 것일까, 혹은 살이 찐 것일까. 안락의자 밖으로 늘어뜨려진 두 다리는 퉁퉁했고 곧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다. 두 겹으로 진 턱도, 편안해 보이는 헐렁한 옷 안에 감추어진 가슴의 윤곽도, 엉덩이도, 목도, 거대했다. 얼굴마저 크지 않았다면 더욱 기묘했을 광경이었다. 저 사람이 걸을 때는 어떻게 걸을까. 저 관을 끌고, 저 굵은 종아리와 허벅지로 걷는다면 출렁거리는 살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날까. 걸을 수 있을까? 연을 바라보던 '엄마'가 입을 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마더 웨일이라고 해요."


접견은 길지 않았다. 긴 이야기를 하면 숨이 차니까 오늘은 인사 정도만 해요. 그렇게 말하고 마더 웨일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볼이 늘어지고 두툼한 입술이 길게 양쪽으로 올라가는 친절한 미소였다. 비아는 마더 웨일의 손을 잡고 어리광부리는 아이처럼 이것저것을 늘어놓았다. 연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어떤 사건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중간중간 '그치, 엄마?' '엄마는 어떻게 생각해?'라는 질문을 던질 때마다 마더 웨일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호스가 연결된 손을 들어 올려 비아의 손등을 매만졌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모녀의 모습이었다.
연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프로젝터가 설치된 방으로 들어갔다. 비아가 프로젝터를 조작해 아이들의 사진을 띄웠다. 증명사진이었다. 나이는 열두어 살, 혹은 열세네 살 정도. 사진 속의 아이들은 굳은 표정으로 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몇 명에게선 뚜렷한 장애의 흔적이 보였다. 카메라를 향했지만 초점이 맞지 않는 눈. 입술과 인중이 연결되듯 갈라진 모습. 혹은 목에 꽂혀 있는 가느다란 관. 비아는 아이들의 이름을 띄운 다음 연의 옆자리에 앉았다. 격의 없는 행동이었다. 사진 속의 아이들은 모두 성이 같았다. 웨일. 웨일. 웨일.
"이 아이들을 찾아주셨으면 해요."
비아의 말에 연은 눈을 깜박였다. 평범한 실종 사건인가? 그렇다고 보기엔 아이들의 특징과 똑같은 성이 마음에 걸렸다.
"이 애들은……."
"웨일 재단의 아이들입니다. 외부엔 공개되지 않은 정보이지만, 웨일 재단에서는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어릴 때 입양해서 재단 내의 교육기관에서 교육시킨 다음 수술을 통해 장애를 치료합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나가서 성장하게 되죠."
"그렇지만 저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요. 웨일 재단에서 공식적으로 홍보한 사항에도 없었고요."
비아가 슬프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속삭였다.
"웨일 재단에서 시술을 받은 아이들은 완전히 새로운 이름과 성을 부여받게 돼요. 신분도 웨일 재단에서 다시 만들죠. 장애가 있던 때의 기억은 완전히 털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라는 취지에서요."
연의 눈길이 비아를 향했다. 그렇다면 당신은요? 묻는 연의 눈빛에 비아가 웃으며 답했다.
"저는 제 의지로 '웨일'이라는 성을 선택했어요. 엄마의 옆에 남고 싶었거든요."
엄마.
거대한 마더 웨일.
연은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머니에서 작은 태블릿을 꺼냈다. 그러자 비아가 손을 뻗어 연의 태블릿을 거두어들였다. 친절해 보이지만 단호한 동작이었다.
"어떤 정보도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안 됩니다. 웨일 재단에서 지급한 단말기에는 아이들의 정보가 전부 입력되어 있어요. 밖으로 나가면 단말기를 드릴 테니, 지금은 메모하지 마세요."
연은 다시 태블릿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비아의 눈을 보았다.
"실종 사건은 어떻게 된 거죠? 이 아이들은 한 번에 실종된 건가요? 아니면 차례차례?"
그 물음에 비아가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듯 허공을 보다가, 곧 머리가 아픈 듯 고개를 숙였다. 연이 도우려 손을 뻗자 비아는 금세 고개를 들고 다시 연을 보았다.
"잠깐 두통이 와서요……. 실종 사건은 2년 전에 일어났어요. 외부에서 재단의 교육시설을 공격해서 재단이 혼란에 빠진 사이, 몇 아이들이 재단을 빠져나갔어요. 외부에서는 아무도 자신들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도 모르는 채……. 단순한 호기심이었죠. 금방 아이들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재단은 노력했지만, 결국 아무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 일을 왜 지금에 와서. 2년이나 지난 후에야.
비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얼마 전에 단서를 찾았어요. 아이들은 소규모로 집단을 만들어 살고 있었고, 집단끼리 서로 연락을 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냈습니다. 그래서 이제 본격적으로 아이들을 구하려고 하는 거예요."
비아의 눈에는 어떤 결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 애들을 찾아야 해요. 그래서 웨일 재단으로 돌아가게 해야 합니다. 이 애들은 너무 어리고, 약해요. 게다가 모두 장애가 있어요. 호기심에 뛰쳐나갔지만 지금쯤은 후회하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웨일 재단의 교육시설은 외부에 노출될 수 없게 철저히 보호되고 있어서 아마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었을 거예요."
비아의 눈이 연을 주시했다.
"찾아내야 해요."
연은 그 눈빛에 압도될 것 같았다. 간신히 주먹을 주며 자신을 추슬렀다.
"어머니의 곁으로 아이들을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꼭 연이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실종된 아이들을 전담으로 찾는 수사관으로 왜 나를 택한 걸까. 그 이유를 물었을 때 비아는 '당신이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인성 검사 데이터를 보니 동정심이 높게 나타나 있었어요. 우리는 아이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데 당신이 최적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에게는 데이터가 있고 능력이 있지만 아이들은 다수예요. 비아의 단호한 목소리는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무슨 약이나 호르몬을 접하는 것처럼.
"아이들이 웨일 재단을 그리워하고 있다면 다수여도 상관없지 않나요?"
"모험을 지나치게 좋아해서 안정을 거부하는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허클베리 핀의 모험 같은 거, 어릴 때 보셨잖아요?"
그랬지. 허클베리 핀은 주정뱅이 아버지를 피해 모험을 즐기며 산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버릇없고 예절을 모르며 지저분한 아이. 그러나 그 아이는…….
행복하지 않은가.
연 역시 어릴 때는 허클베리 핀처럼 미시시피 강을 따라 흘러 내려가며 모험을 즐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단 우리가 아이들 중 한 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지점은 여기입니다."
비아가 지도 위의 한 점을 포인터로 가리켰다. 슬럼가. 낮에는 그럭저럭 다닐 만하지만 밤이 되면 어른들도 다니기 꺼려하는 곳이다. 저곳에 아이가 있다고?
"이곳에 있다고 생각되는 아이는 카롤링거 웨일이에요. 카롤링거 웨일은 태내 약물중독이라서 끊임없이 진통제를 맞아야 합니다. 뒷골목에서 구할 수 있는 싸구려 진통제는 그 애의 몸을 갉아먹고 있을 거예요. 가엾게도."
비아의 표정에는 진심으로 그 애를 동정하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 아이들은 모두 비아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저 표정은 동생이나 오빠를 걱정하는 소녀의 표정이라기보다는 어머니의 표정이었다. 직접 낳고 기른,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던 사람에 대해 지을 수 있는 표정. 아니. 그것보다는. 자신이 기르던 개나 고양이에게나 지을 법한……. 잠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연은 고개를 흔들었다.
"몇 다리를 거치긴 했지만 정기적으로 카롤링거에게 진통제를 공급하던 사람을 찾았어요. 사흘 후에 그 곳으로 갈 겁니다. 그때까지는 일단 웨일 재단에서 드린 자료를 읽고 계시면 될 거예요."
연이 고개를 들었다.
"왜 당장 가지 않죠?"
"그건."
비아가 무어라 설명하기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하라고 하셨으니까요."


사냥감에게 다가가기 위한 준비처럼. 모든 것은 계획대로, 꼼꼼하게 진행되었다. 첫째로 카롤링거가 약을 구하려고 이용하던 루트를 끊어버렸다. 카롤링거의 몸에 나쁜 약을 투약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비아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사흘 후, 슬럼가 뒷골목의 허름한 집에 비아와 연이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긴 머리를 어깨 아래까지 늘어뜨린 소년이 단정히 의자에 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비아는 천천히 걸어가 그 소년의 뺨을 올려붙였다.
"멍청한 녀석."
폭력적인 손짓과 언어와는 다르게 다정한 말투였다. 뺨을 맞은 소년은 비아를 올려다보며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안녕, 나의 자매님?"
"그래. 카롤링거. 너의 자매지. 비아 웨일이라고 해. 만나서 반갑다."
비아가 내민 손을 거칠게 쳐내며 소년은 깔깔 웃었다.
"아, 비아 웨일? 내가 아는 내 자매님의 이름은 그게 아닌데. 사람 잘못 보셨나봐."
손을 쳐낸 후 곧바로 휘청하는 몸을 어떻게든 바로잡으려 팔걸이를 잡고 버티던 소년이 저주하듯 내뱉었다.
"에이쥬어 웨일."
"그 이름이기도 했지. 하지만 지금은 비아 웨일이니까, 비아라고 불러 줄래?"
"아하. 그래. 비아라는 이름은 어떻게 쓰는데?"
빈정거리는 소년의 말투에 비아는 잠시 움찔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이름의 철자를 불렀다.
"V-I-A."
"역시 모르는 이름이야. 그런 이름은 웨일 재단에 없어."
"너도 재단에 머물렀다면 나와 비슷한 이름을 받게 되었을 거야."
수수께끼 같은 대화가 오간 후 비아가 주머니에서 앰플 하나를 꺼냈다.
"침대도 정돈되어 있고, 집안도 깨끗하네. 우리가 올 걸 알고 있었어? 손님맞이 준비라도 한 것 같잖아. 카롤링거."
"알았지. 내게 약을 주던 사람이 사라졌는걸. 그런 식으로 나를 찾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뿐이니까. 퍼킹 마더 웨일. 우리들의 고귀하신 어머니 말야."
비아가 상처받은 눈으로 카롤링거를 보았다.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마. 넌 어머니를 실제로 본 적도 없잖아."
"그래서."
카롤링거가 비아의 손에 든 앰플을 빼앗아 발로 밟았다. 앰플 안에 든 노란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고, 유리조각이 바닥에 남았다.
"어머니가 지금 우리의 ‘재회’를 보고 계시니? 비아 웨일."
비아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고 뒤에 서 있던 연을 돌아보았다.
"아까 맡긴 수갑이랑, 주사기 있죠? 그거 주세요. 아무래도 이 아이는 허클베리 핀 노릇이 마음에 든 모양이니 강제로라도 데려가야죠."
연이 머뭇거리며 주머니에서 주사기를 꺼내려고 하자 카롤링거가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반항할 거면 집 청소를 하고 너를 기다리지 않지. 순순히 따라갈 거야. 다만 다른 사람의 정보를 캐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마."
"아. 그거라면 걱정 안 해. 일단 좀 일어날래? 밖에 차가 기다리고 있어."
비아는 명랑하게 말하며 카롤링거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카롤링거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것을 연이 도왔다. 카롤링거의 집 불을 끄고 문을 열며 비아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미 다 알고 왔어. 재회는 다 같이 해야지."


카롤링거를 차에 태우고 비아는 연과 함께 뒷골목으로 돌아갔다. 구불구불한 골목을 몇 번 돌자 헌옷 수거함처럼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비아는 손에 든 태블릿으로 이것저것 두드려 보더니 삐빅, 소리를 듣고 다시 뒤로 돌았다.
"저건 뭐죠?"
연이 묻자 비아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워프게이트죠. 우리 애들, 참 머리도 좋죠? 어느새 워프게이트까지 찾아냈담."
"그래서 당신은 지금 뭘 한 건가요?"
조금은 날이 서 있는 연의 목소리에 비아가 평온하게 대답했다.
"또 다른 길 잃은 아이를 발견했죠."


비아와 연은 다른 워프게이트를 통해 어디론가 이동했다. 이동하자마자 비아는 또 단말기를 꺼내 워프게이트의 보안 장치를 해제시켰다. 모든 장치를 해제시킨 후 비아는 사막의 밤을 바라보았다.
"길 잃은 사막의 아이라."
"이런 곳에 애들이 있다고요?"
"아마도요. 동화 생각나지 않아요?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 이야기가 있었는데. 잘 기억은 안 나지만요."
비아는 단말기의 프로그램을 조작해 사방으로 몇 걸음 걷다가 가장 가까지 있는 비행기로 다가갔다. 연은 그제야 이 사막이 거대한 무덤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질서정연하게 비행기가 서 있는 무덤. 비행기는 더 이상 유용한 교통수단이 아니다. 비아와 자신은 방금 옷을 입고도 통과할 수 있는 특수한 워프게이트를 이용했다. 그래야 아이들을 만날 때 필요한 '도구'를 가져갈 수 있으니까. 비아는 걸으면서 휘파람을 불다가 입을 다물었다. 두통이 다시 온 듯, 비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어쨌거나 이곳에 있을 애는, 아마도."
문을 열자 안에서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비아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 자, 착하지. 데리러 왔어."
그리고 신음소리를 내던 사람이 덮고 있던 담요를 걷어 올렸다.


일순간 비아의 표정에는 동요가 일었다. 계획이 일순간에 어그러진 듯한 표정에 연이 물었다.
"이 애가 아닌가요?"
"아니오. 이 애도 웨일이에요."
담요 아래 누워 있던 건 여자아이였다. 몸에 헐렁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열이 심한지 온 몸이 후끈했다. 비아는 여자애를 업어들고 한숨을 쉬었다.
"불쌍하게도. 이런 데서 죽어가고 있었다니."
"뭔가 잘못된 건가요?"
연이 날카롭게 물었다. 연의 직감은 방금 보인 비아의 표정에서 실패를 감지했다. 비아는 아니라고 했지만, 이 애는 비아가 찾던 사람이 아니었다. 비아는 여자아이의 옷을 걷어 올렸다.
"아닙니다. 보이세요? 가슴에 삽관 자국이 있어요. 이 애도 웨일이에요."
비아의 발걸음을 연이 한 걸음 앞질러 막아섰다.
"그래서 그 애의 이름이 뭐죠?"
비아가 차갑게 대답했다.
"이름이 무슨 상관이죠? 이 애의 성은 웨일이에요. 아니, 웨일이 아니면 어때요? 얘는 지금 아파요. 당장 치료가 필요하다고요."
맞는 말이었다. 한 걸음 물러난 연의 어깨를 비아가 가볍게 밀치며 문 밖으로 나섰다.
"여기 워프게이트는 나갈 때는 알몸으로만 통과할 수 있겠네요. 옷을 벗겨야겠어요. 일단 이 애를 웨일 재단의 병원으로 보내고, 우리는 근처의 다른 워프게이트를 찾아봐요. 총하고 제복을 두고 가는 건 안 되잖아요?"
총이 있었나? 연에게는 총이 없었다. 그렇다면 비아만 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누군가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협박할 때를 위해서?
모든 게 이상하다.
짧은 통화 후 신음하는 여자애를 워프게이트 안으로 밀어 넣고 비아는 워프게이트의 시스템을 조작했다.
"뭐 하는 거예요?"
신뢰가 무너지고 있었다. 연이 묻자 비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기념 사인이라고 해 둘까요?"
비아는 워프게이트의 스크린에 두 단어를 쓰고 돌아섰다.
"이제 나가요. 우리가 돌아갈 워프게이트는 좀 많이 걸어야 하는 곳에 있어요."
연은 비아를 따라가기 전, 워프게이트 스크린에 뜬 단어를 보았다.
『HOMECOMING DAY』
비아 웨일, 저게 기념 서명인가요?
메시지가 아니라?
서명은 수신자가 없고, 메시지는 수신자가 있죠.
당신은 뭘 하려는 거죠?
우리는 아이들을 '구하고' 있는 건가요?
연은 혼란스러움으로 가득 찬 발걸음을 옮겼다.


"빌어먹을!"
자신의 집, 생텍쥐페리 가 27번지로 돌아온 안나가 스크린에 주먹질을 했다. 스크린은 안나의 주먹을 맞고도 견고했다. 젠장할. 의수로 때릴까? 아니야. 때리는 건 아무런 해결도 되지 않아. 안나의 눈은 비아가 남긴 메시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홈커밍 데이'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날.
망할, 망할. 좀 더 조심했어야 돼. 에바를 들이고 나서 마음이 풀어져 있었어. 그렇다고 해도 대체 어떻게? 시스템 접속 시간을 봤을 때, 놈들은 카롤링거에게 먼저 손을 댔고 그 다음에 여기로 왔어. 그건 내가 아니라 카롤링거를 쫓고 있었다는 거야? 아니면 우리 모두를 쫓고 있었는데 카롤링거를 가장 먼저 노렸다는 거야?
허겁지겁 돌아왔을 때, 에바는 없었다. 젖혀진 담요와 바닥에 남은 흐린 발자국. 이 물 젖은 발자국에서 나는 냄새는 카롤링거가 사는 곳의 냄새. 신발을 신고 들어왔어. 특수 워프게이트를 통해 이곳으로 왔다는 거야. 웨일 재단, 나 대신 에바를 잡아간 거야? 에바에게 뭘 하려고 하는 거야?
'치료하겠지.'
그 한 문장이, 누군가 말하기라도 한 듯 안나의 뇌에 또렷하게 박혔다.
'아파하는 아이를 치료하겠지.'
그 치료가 어떤 방식인지는 몰라도, 치료하겠지. 카롤링거의 방 안 서랍에는 안나가 부탁한 약이 곱게 포장되어 있었다. 아마도 돌고 도는 배달수단을 이용해 안나에게 보내려고 했겠지. 무인 보관함이야 근처에 흔하니까. 그렇지만 카롤링거는 약을 부치지 않았다. 게다가 워프게이트의 패스워드도 바꿔놓았다. 경고하는 말로.


도망가.
도망가, 안나.


"카롤링거."
안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에바."
웨일 재단으로 갔겠지. 죽이지는 않았을 거야. 다만 치료하겠지. 치료해서 우리를 다시는 만날 수 없게 하겠지.
카롤링거는 도망가라고 말했어. 그리고 웨일 재단은 나에게 돌아오라고 말하고 있지. 젠장할. 친절하게 여기 워프 카드까지 끼워놓았군. 안나의 손이 바닥에서 카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수신자 안나 웨일. 목적지 웨일 재단. 그리고 발신자가, 비아 웨일.
비아 웨일.
비아.
너의 이니셜은 뭐지?
그 이니셜은 무슨 뜻이지?
모든 것을 알려면 적진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무장은 필요 없어. 어차피 나는 에바도 지키지 못했고 카롤링거도 지키지 못했는데. 무장을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그러나 워프 카드 아래 덧붙여진 메시지를 보고 안나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또박또박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이 지도에 있는 워프게이트를 이용해. 알몸으로 엄마를 만나고 싶지는 않지?’ 그리고 안나는 그 글씨체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에이쥬어 웨일, 재단을 떠나기를 거부한 아이. 살아 있었구나. 그리고 재단에서 너의 이름을 바꿔놓았어. 어쩌면 기억도, 성격도, 모두 다 바꾸었겠지. 또 어디가 바뀌었을까? 미련한 나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어.
그래, 만나러 가지.
위대하신 나의 어머니와 어머니가 키운 착한 딸을.
기다려.


다른 곳의 워프게이트를 타고, 다시 차를 타고 웨일 재단으로 도착했을 때 연은 꼭대기 층이 아닌 다른 층으로 안내받았다. 병상은 여러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지만 그 중에 두 병상에만 사람이 누워 있었다. 아까 보았던 긴 머리의 남자아이. 그리고 열이 심하던 여자아이.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보조호흡기를 통해 숨을 쉬고 있었다. 정신을 잃은 것인지 잠든 것인지 두 눈은 감겨 있었다. 무표정했다. 석고로 뜬 마스크처럼. 삐, 삐, 삐. 뇌파와 혈압을 재는 기계가 울렸고 비아 웨일은 여자아이가 있는 침대로 걸어갔다. 침대에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에바 웨일.
“에바.”
비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연은 비아의 등에 대고 물었다.
“어떻게 아이의 이름을 알아냈죠?”
“웨일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비아가 건조하게 말하며 이름표를 손으로 쓸었다.
“이 애도 그때 실종된 건가요?”
연의 질문에 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웨일 재단의 문 앞에서 비아는 연에게 말했다. 연은 특수 코드가 새겨진 이름표를 반납하고도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그 대신 비아의 눈을 들여다봤다. 맑고 짙은 청록색의 눈동자. 거짓을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눈을. 비아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담담하고 무표정하게 비아는 연의 눈을 마주했다.
“다음이 언제인가요?”
“그건 모르겠어요. 어머니가 말씀하셔야겠죠.”
비아가 뒤로 돌았다. 당신과는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는 몸짓 언어. 연은 비아를 붙잡아 강제로 얼굴을 돌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낮게 말했다.
“어머니를 사랑하시는 모양이에요.”
그 말에 비아가 다시 몸을 돌렸다. 연과 마주한 채, 비아가 말했다.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 나는 어머니를 사랑해요.”


다른 애들과 연락할 방법을 알아둬야 했어. 아닌가? 그래봤자 소용없을 일인가? 안나는 자신의 숨소리만 들리는 비행기 내부에 앉아 생각했다. 살아 있는 아이들이 있다고 카롤링거가 그랬지. 아덴도 살아 있을까? 들켰을까? 아니야. 아덴이라면 피했을 거야. 아덴은 영리하니까. 우리 중에 제일 영리했잖아. 순순히 잡혀갔을 리가 없어. 아덴이라면. 아덴이라면.
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으드득, 단단한 이에 여린 입술이 씹혀 피가 흘러내렸다.
안나는 믿고 싶지 않은 추측을, 그러나 가장 타당한 추측을 소리 내어 말했다.
“차라리 죽었겠지.”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었을 거야. 누구에게 들려주듯이, 누군가 들으라는 듯이 안나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다. 차라리, 차라리, 차라리…
그렇지만 나는 재단으로 가야겠지. 돌아가는 게 되나? 카롤링거를 구하려고? 에바를 구하려고? 아니야. 구하는 게 아니야. 나는 그 애들을 구할 수 없어. 하지만 내가 가지 않는다면.
않는다면……. 그 애들은 행복해질까?
행복해질 수도 있을 거야. 과거를 모두 잊은 채. 내가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웨일 재단은 그 애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야.
“싫어!”
안나가 소리치자 비행기 안에 안나의 고함소리가 울렸다. 벽에 튄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다시 돌아왔다. 싫어. 싫어. 싫어!
안나는 지금 이 순간, 2년 전 재단에 남겠다고 말한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술을 받고, 원하지 않는 수술까지 덤으로 받고 돌아오겠다고, 이 재단에 남겠다고 말한 아이들이었다.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내던진 그 애들을 비겁자라고 생각했다. 겁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나약함과 비겁함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거라고, 안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나를 잊지 마.”
안나는 조용하게 흐느꼈다.
“이미 늦었을지도 몰라. 이미 기억을 지워 버렸을지도 몰라. 그래도, 그래도, 내가 갈게. 찾아갈게. 어떻게든 만날게. 나를 잊지 마. 나를 잊지 마. 잊지 마.”
내가 아덴을 잊지 않았듯이, 카롤링거 네가 나를 잊을 것이 두려워서 만날 때마다 똑같은 과거 이야기를 반복했듯이, 에바 네가 ‘오늘 밤에 대답할게’라고 했을 때 내가 추궁하지 않았듯이. 나를 잊지 마.
어머니. 나는 당신의 피조물이지만 동시에 나야. 그 애들에게서 나의 기억을 빼앗지 마. 내가 기억하는 그 애들을 사라지게 하지 마.
그래서는 안 돼. 당신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어.
모든 아이들은 엄마에게서 독립하고 어른이 되는 게 정상이야. 그게 미래고, 시간이 흘러가는 법칙이야.
(계속)




작가소개 / 전삼혜(소설가)

1987년 서울에서 태어나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제8회 대산대학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작품으로 장편소설 『날짜변경선』과 『내일의 무게』(공저) 『어쩌다 보니 왕따』(공저) 『조용한 식탁』(공저)이 있다.



《글틴 웹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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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2-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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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2-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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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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