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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포레스트

  • 작성일 2019-05-01
  • 조회수 939

[글틴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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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화




2019년 2월 14일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제일 끝부분에 갔다.
그동안 강화도에 있는 통일전망대도 가봤지만 사실 이번에 간 비무장지대가 가장 북과 가까운 곳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왜 글틴 캠프에 참가하게 됐는지 말하자면 끝도 없다. 일단 아버지가 국어국문학과 박사시고, 큰형과 누나한테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글을 쓰라고 하셨다. 한창 인터넷 공간 에서 활동할 때 글틴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글틴 캠프에 가게 됐다는데 사실 정확한 건 나도 모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작은형도 글 쓰는 걸 좋아하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글틴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근데 나만 문학에 관심이 없어서 글을 안 썼다. 아버지한테 평을 받으려고 몇몇 글을 가져가 보기도 했지만 내가 재미가 없어서 잘 안 쓰게 됐다.
그러던 중 몇 년 만에 글틴 캠프를 연다 해서 얼떨결에 문장 이벤트 한다고 가입했던 나한테 부모님이 가라고 권하셔서 어쩔 수 없이 갔다. 싫어서 간 건 아니지만 좀 귀찮았던 것 같다.
도착해서 자기소개 및 좋아하는 작가 등등을 말하라고 했는데 식은땀이 났다. 좋아하는 작가는커녕 한 달에 책 세 권도 안 읽고, 읽어도 수준 낮은 소설만 보는데 무슨 좋아하는 작가. 어떻게든 뭔가 짜내야 했다. 그래서 가장 최근에 읽은 소설 하나를 생각해 내고 옛날에 읽은 소설 하나를 생각해 냈다. 자신의 꿈을 적어 보라는 코너가 있었는데 옆에 형이나 누나가 적은 것을 보니 너무 낭만적인데(예를 들면 백두산에 가서 시 낭독, 무라카미 작가와 악수, 세계일주 등) 나는 형사였다.
'지루하지 않은 심야 낭독회' 프로그램을 시작했는데 너무 지루했다. 몇 번이나 졸고 옆에 누나 눈치 보여서 그나마 쏟아지는 잠을 참고 있었는데 하필 책 나눠주기에 내가 당첨됐다. 평소에 원하는 태블릿pc같은 건 절대 당첨 안 되는데 이번엔 무슨 운이 따랐는지 속으로 제발 안 되라 빌고 있는데 내 이름이 불렸다. 받으러 가는데 시인님이 "받기 싫어하는 게 다 보이는데?" 이래서 너무 놀랐다. 금방 아니라고 답은 했지만 정곡을 찔려서 찝찝했다.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던 '지루하지 않은 시 낭독회'가 끝나고 대충 씻고 잤다. 다른 형들이 내가 받은 시집을 부러워했는데 사인만 없었으면 그냥 줬을 것이다.
다음날 일어나서 맛대가리 없는 캠프 그리브스의 밥을 먹고 강당으로 갔다. 비무장지대에 있는 캠프 그리브스의 밥은 정말 맛이 없었다. '음식'을 만드는 게 아니라 식품을 만드는 것 같았다.
눈이 와서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이 다 취소됐다. 제3땅굴이나 전망대 같은 곳에 못 가고 도라산역에 갔다. 물론 하나도 재미없었다. 열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념품 상점에 진열된 북한 술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설명만 해대서 그런지 졸리기만 했다. 그다음은 평화공원이었나 뭐였나, 그런 곳에 갔는데 스탬프를 다 찍으면 선물을 준다 해서 폐가 터지도록 뛰어다녔는데 10분의 6 찍고 탈진해서 버스로 돌아왔다. 나중에 보니 선물이라 봤자 달랑 머그컵 하나였다. 스탬프 다 찍어도 안 받을 물건.
하지만 여기까지는 아주 좋은 편이었다. 두 번째 날은 오후가 압권이었다. 숙소에 돌아와서 맛대가리 없는 점심을 먹고 하릴없이 누워서 폰이나 보고 있는데 합평 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소설, 수필 합병으로 해서 먼저 수필부터 하게 되었다. 바로 글을 써보라고 해서 죽는 줄 알았다. 수필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나한테 수필에 관련된 전문적인 말을 하는 수필 담당 선생님은 먼 나라 사람 같았다. 남한테 내가 쓴 글을 보여주는 건 창피한 일이다. 특히 자기가 겪은 일을 적은 글을 보여주는 건 더 그렇다. 근데 직접 읽어서 들려줘야 했다. 소설 합평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소설 합평 방에 들어가자마자 무거운 공기가 방을 가득 채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시 합평해 주신 선생님께는 죄송하지만 첫인상부터 너무 무섭고 지독해 보이는 분이셨고, 진짜였다.
무려 거의 두 시간을 그 선생님과 함께했다. 하필 내가 쓴 소설이 마지막에 평을 받았는데 정신 약한 사람이라면 울었을 것이다.
"서화 씨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이게 뭐인 것 같아요?" "왜 그런 것 같아요?" "주인공이 무슨 일을 하나요? 정확히?" "왜 그런데요?" "왜?" "비문이 너무 많네요." "자신이 쓴 소설을 자신이 이해하고 있나요?" "본인 소설을 짧게 설명해 보세요." "이렇게 길게 쓸 필요가 없어요." "개연성이 진짜 중요한 거죠." "서화 씨 본인도 소설을 쓰면서 헷갈려했네요."
나와 다른 형, 누나들 모두 다 지옥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특히 나한테는 계속해서 입말과 글말의 차이를 알려주시면서 적절히 써야 한다고 했다. 옆에 있는 형 같은 경우에는 기본에 충실하라며 뼈를 때렸다. 소설 합평작을 안 보낸 사람한테는 소설을 읽어 봤냐고 두세 번 물어보면서 계속 내가 쓴 소설이나 다른 형이 쓴 소설에 대해 뭔가를 말해 보라고 했다. 그렇게 겨우 다른 합평 팀 시간이 다 끝나고 저녁을 먹을 때 우리 합평이 끝났다. 저녁을 먹을까 하다가 맛이 없을 게 분명해서 나중에 야식도 주겠다, 그냥 걸렀다.
그 다음 프로그램은 낭만적 야외 시 낭독을 해야 했는데 눈이 와서 급 프로그램을 바꿨다. 아마 이 날 아침부터 눈이 내려서 급하게 준비했던 것 같다. 설마 눈이 올 줄 알았겠나. 캠프 그리브스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퀴즈를 풀고, 다 마친 팀한테는 각자 선물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한참을 뛰고 강당으로 돌아와서 야식을 먹었다. 밥은 몰라도 간식은 정말 많이 줬다. 과자부터 시작해서 이 날 밤에는 치킨까지 줬다. 다 식어서 맛은 별로 없었지만.
글틴 캠프를 끝낸 걸 기념하며 각자한테 수료장을 줬다. 다음날은 파주출판단지에 가서 달랑 한 곳 들렀다 점심을 먹고 서울역에서 해산했다.


이제부터는 진짜 후기다. 나는 글틴 캠프에 참가할 시기에 식당 알바를 하고 있었다. 하루에 두 시간 정도 일하지만 아줌마들이 와서 갑질을 하고, 빨리 내오라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름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글틴 캠프에 참가한 덕에 짜증나는 손님들한테서 사흘간 벗어났다.
글틴 캠프의 프로그램은 재미가 없었다. 눈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문학을 모르는 나한테는 너무 지루했고, 다른 형, 누나들이 감상에 젖어 있을 때 나는 게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와 재밌게 놀아 준 형, 누나들이 없었다면 정말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원래 모든 캠프는 다른 애들과 놀아야 재밌는 법이다. 덕분에 프로그램에 상관없이 잘 놀았다. 대부분 고3이나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친해지기 힘들 줄 알았는데 먼저 말을 걸어 줘서 고마웠다.
하지만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할지 조금은 알게 됐다. 좀 무섭긴 했지만 그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은 많은 도움이 됐다. 숙소가 조금 특이했다. 자는 곳이 군대에서 사용하는 숙소처럼 생겨서 거기 일하시는 선생님은 항상 그곳에 오는 학생들한테 "미리 군대 체험하는 것"이라 하시는 듯했다.
추가로 글틴 캠프에 5천 원의 참가비를 냈지만 나중에 문화상품권으로 돌려받았다. 5천 원이 넘는 숙식을 제공받고, 버스를 탔다. 마지막 날 파주출판단지에서는 책도 한 권씩 사주셨다. 프로그램은 지루했을지 몰라도 그런 면에서는 정말 감사했다. 다음에도 글틴 캠프를 한다면 반드시 갈 생각이다.
















작가소개 / 한서화

2004년 경북 포항 출생. 2018년 중학교 졸업. 경기 부천 거주.


《문장웹진 2019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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