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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
소설 김은주 - 젠틀우먼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장편)] 젠틀우먼 김은주 01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의 딸이었다. 그 아이가 지금 내 곁에 없어서 다행이다. 그녀는 자신의 두피가 뜯어지도록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그의 관심이 혹시라도 딸에게로 옮을까 봐 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끌려가는 동안 어떻게든 아픔을 덜기 위해 두 손으로 그의 오른팔을 더듬으며 허우적거렸다. 몸에 눌린 잡초들이 짓이겨지면서 싱그러운 풀 냄새가 피로 막힌 콧속으로 훅 밀려들어 왔다. 아직은 살아있다. 모든 것이 망가졌지만 그래도 아직, 죽지 않았다. 하지만 팔꿈치와 무릎, 어깻죽지와 옆구리의 통증 때문에 그의 오른팔을 잡는 걸 포기하고 싶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 감색 원피스가 둘둘 말려 허리까지 올라왔다. 허리에 묶어둔 리넨 앞치마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종아리와 허벅지에는 그에게 짓눌려 생긴 멍과 상처가 선명하다. 근육이 파열됐는지 통증이 밀려온다. 아픔보다도, 원피스가 신경 쓰인다. 이렇게 밝은 태양 아래 상처로 가득한 몸뚱이를 그대로 내놓고 있다는 사실이 수치스럽다. 그가 보기 전에 원피스를 내려 자줏빛 멍이 든 몸을 가리고 싶다. 이미 욕망을 모두 발산한 그는 다행히 드러난 몸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머리통이 타는 것 같은 화끈거리는 열기가 성한 곳 없는 몸뚱이를 감쌌다. 맹렬한 불길 속에 통째로 내던져진 것만 같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 그녀는 퍼덕거리는 것을 멈추었다. 그의 오른팔을 붙잡으려 애쓰는 것도 그만두었다. 대신 눈앞에서 팔랑거리는 흰 나비를 바라보았다. 나비는 땀으로 번질거리는 그의 다리에 붙어 날개를 펼쳤다. 나를 구해 줘. 도와줘. 내 딸에게 어서 도망치라고 말해 줘. 숨을 깊이 들이마시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코피가 흘러 입으로 들어왔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얼굴 가까이 끌어당겼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했던 남자는 이제 없다. 짐승처럼 커다란 육체를 지닌 남자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을 게임으로 여기는 것 같다. 아니면 보기 좋은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주말마다 치는 테니스 같은 것으로. 얼굴은 땀에 번들거렸지만 지친 기색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그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출 생각이 없다는 듯 희고 고른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왜 몰랐을까. 왜 의심하지 않았을까.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좌절감에 눈물이 쏟아졌다.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다. 그가 부러뜨린 이빨과 손톱으로 그를 물어뜯고 할퀴고 싶다. 피가 말라붙은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멀게 만들고 싶다. 그가 폐부 깊숙이 내지르는 비명을 듣고 싶다. 하지만 그럴 기회는 없을 것이다. 너무 늦었다. 이곳에서 그녀가 당한 일은 세상 누구도 영원히 모를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맥이 풀렸다. 그가 그녀를 향해 뜨겁고 역겨운 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구역질을 못 이기고 피와 위액을 남자의 가슴팍에 토해 냈다. 너 같은 년은 쌔고 쌨어. 그는 그 한마디만 내뱉고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작성일 2022-10-28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484상세보기 -
소설 최웅식 - 검은 우물
검은 우물 최웅식 수술이 끝나 수술실에서 나온 황 노인은 소리를 질렀다. 전신마취가 풀리지 않은 상태여서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아들인 현수가 어렴풋이 보이자 황 노인은 자신을 묶은 사람들을 고발하겠다는 말을 내뱉었다. 현수에게 이 병원에 데려와서 자기를 죽이려 했냐고 따졌다. 현수는 수술 잘되었다고,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라는 말로 황 노인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이동침대에 실린 황 노인이 6인실로 갔다. 현수 어머니는 멍하니 황 노인을 가끔 쳐다볼 뿐이다. 간호사가 병실에 들어서서 현수에게 말했다. 환자가 물을 먹고 싶다고 하면 물을 묻힌 거즈로 환자의 입술을 두드리라고, 많이 아프다고 하면 진통제를 투여하는 버튼을 눌러주라고 하고는 병실을 나갔다. 황 노인은 아이고, 라는 말을 외쳤다. 황 노인이 아파, 아파, 라는 말을 연이어서 하자 현수는 링거 줄을 잡고 링거 줄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진통제가 황 노인의 손목으로 이어진 줄을 타고 혈관으로 들어갔다. 황 노인은 상체를 좌우로 뒤척거렸고 천장을 주시하기도 했다. 사람들과 눈을 맞추지 못했다. 또다시 자신을 죽이려 했다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옆 침대에 있는 다른 환자의 보호자가 현수에게 다가와 수술하다가 무슨 문제가 생긴 거 아니냐고 물었다.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자신의 남편이 잘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현수는 6인실인데,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고, 수술은 잘되었다고, 좀 기다리면 조용해질 거라고 응수했다. 황 노인은 불타는 집에 있었다. 천장을 장악한 불길이 나무로 된 기둥을 타고 사방으로 번졌다. 황 노인은 아이였다. 아이는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기둥에 옮겨붙으며 집을 활활 태우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불은 뱀의 날름거리는 혀처럼 아이 앞으로 다가왔다가 멀어져 갔다. 아이는 저 불이 자신을 덮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가만히 서 있었다. 밭을 태우는 불이 아이의 머리에 떠올랐다. 어른들이 해묵은 풀을 모아 한곳에서 태우면 풀 냄새가 났다. 아이는 멍하니 사방에서 몰려오는 불을 쳐다보기만 했다. 문득 이 집을 누가, 왜 태우려고 하는 것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는 어른을 찾았으나, 연기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숨을 쉬기가 불편해서 콜록거렸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두 손이 나타나 아이를 안았다. 아이는 그 두 손이 누구의 손인지 알 수 없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을 안은 사람이 남자라고 생각했다. 사내의 두 발이 움직이자 아이가 출렁거렸다. 연기를 헤치며 뛰는 달음박질은 재빨랐다. 아이를 두 팔로 감싼 사내가 불타는 집에서 빠져나와 바닷가 쪽으로 달렸다. 아이의 집을 뒤로하고 바다 냄새가 나는 곳으로 뛰었다. 사내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커졌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내의 등 때문에 아이는 덜렁거렸지만 사내는 그때마다 아이를 부둥켜안았다. “느영 나영⋯. ” 아이를 감싼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아이는 자신을 구한 그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어른들이
작성일 2023-08-1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307상세보기 -
소설 문소윤 - 숲그림자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단편)] 숲그림자 문소윤 낡은 차의 덜컹거림에 잠에서 깨어 거슴츠레 눈을 떴다. 우거진 숲의 초록빛이 쏟아지듯 시야에 들어왔다. 이선은 눈을 깜박여 보았다. 숲이 맞았다. 이틀간 마주한 건 어둠, 혹은 광활한 황무지뿐이었기에 오랜만에 보는 빽빽한 나무 군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선은 옆자리의 일선을 돌아보며 창문을 조금만 내렸다. 아직 햇볕에 달구어지지 않은 공기가 차 안으로 밀려들었다. 찬 공기를 깊이 들이마신 후 이선은 이틀 만에 윤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윤식이 백미러로 쳐다보자 이선은 창문 밖, 숲을 가리켰다. 윤식은 갓길로 차를 옮겨 세웠다. 이선은 먼저 차에서 내렸다. 왕복 이 차선 도로 앞뒤로 다른 차는 찾아볼 수 없었다. 미국에서 이선의 가족은 자주 옮겨 다니며 살았다. 최소한의 짐을 싣고 오랜 시간 이동하다 보면 문득,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길과 붉은 흙, 메마른 풍경 속으로 자기 가족만 내동댕이쳐진 기분이 들었다. 지금이 그랬다. 이렇게 말하면 아버지는 정색할 것이다. 지겹게 들어온 말을 되풀이하겠지. 그게 무슨 말이냐. 왜 우리 가족뿐이야. 플로리다에 사는 큰아버지도 있고, 텍사스로 이사 간 제이슨 가족도 있다. 그리고 한국에는 어머니 친척들과 무엇보다도 네 조부모 선산이 있잖니. 우리에겐 뿌리가 있다. 잊지 마라. 뿌리가 있는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선은 입을 꾹 다물고 숲을 향해 걸었다. 몇 걸음 후 뒤를 돌아보자 윤식이 차 문을 잠그고 뒤따라오는 게 보였다. 형 일선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조수석의 어머니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떨구고 잠들어 있었다. 이선의 시선을 알아차린 윤식이 입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데 괜찮겠지.” 두 사람은 숲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숲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기는 서늘해졌다. 이선은 나무들이 뿜어내는 청량한 공기와 축축한 이끼, 고여 있는 물비린내가 뒤섞인 숲의 냄새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고개를 들자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그 틈새로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어둠을 가르며 사선으로 내리꽂히는 햇빛을 바라보다가 이선은 고개를 돌렸다. 두 팔을 뻗으면 닿을 듯한 나무와 나무 사이에 빛과 어둠이 공존했다. 빛이 들지 않는 나무를 향해 발을 내디뎠을 때, 누군가 빠르고 가볍게 이선 앞을 스쳐 지나갔다. 헉. 이선은 소리를 토해 냈다. 칠흑 같은 검은색은 아니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맸다. 길고 마른 몸은 입체적이진 않아도 납작하지도 않았다. 이선이 입을 벌린 채 어리둥절한 사이, 까만 존재는 부드럽고 우아한 몸놀림으로, 땅 위에 살짝 떠 허공을 걷는듯한 걸음걸이로 사라져 버렸다. 이선은 뒤따라오는 윤식에게 소리쳤다. “아버지, 봤어요?” 윤식이 다가왔다. 이선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곳엔 빽빽한 숲의 어둠이 그늘져 있을 뿐이었다. 윤식은 말했다. “그만 돌아가자. 우리의 새집에서
작성일 2023-03-3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206상세보기 -
소설 바르트를 읽는 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중단편)] 바르트를 읽는 밤 백영 가을 학기 리플릿에서는 두 개의 강좌가 눈에 띄었습니다. 하나는 건축가가 영화에 대해 강의하는 것으로, 영화에 대한 공부, 건축에 대한 공부라는 차원을 넘어 삶에 대해 좀 더 깊이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원한다고 강사는 밝혔습니다. 또 하나의 강좌는 저녁에 하는 수업이었습니다. 첫날의 강의는, 들어가면서: 사랑, 죽음, 슬픔이었고 애도와 멜랑콜리, 또 하나의 슬픔, 슬픔과 육체, 슬픔과 사진, 슬픔과 음악, 슬픔과 도덕, 슬픔과 글쓰기… 식으로 매주 차 강의의 제목에 슬픔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이 특이했습니다. 처음에 나는 낮 두 시에서 네 시까지 수업하는 영화 관련 강좌를 신청할 생각이었어요. 정작 등록한 건 저녁 강좌였습니다. 개강을 이틀 앞두고 실무자가 전체 문자를 보냈더군요. 번역 출판된 책을 교재로 쓸 예정이었으나 출판사 사정으로 아직 번역서가 출고되지 못한 상황에 대한 안내였습니다. 메일 주소를 알려 주면 번역된 텍스트 파일을 보내 주겠으며, 그걸 프린트해서 수업 시간에 가져오면 된다고 했습니다. 하루 전날, 수신 메일함에 도착한 첨부파일을 프린터로 출력해 보니 스물여덟 쪽 분량이었습니다. 오늘, 누구 만나니? 그날 어머니가 물었을 때, 선배, 이렇게 말하고 집에서는 나왔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선배를 만나러 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선배는 두 달째 연락이 끊긴 상태고 내가 보내는 문자들을 읽지도 않았어요. 작업을 시작하면 동굴에 들어간 것처럼 다시 밖으로 나오기까지 꽤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전철을 탔는데 환승역에서 반대 방향으로 탄 겁니다. 두 정거장이나 더 간 다음에 거꾸로 간다는 것을 알아채고 황급히 내렸습니다. 반대쪽 열차를 타서 두 정거장을 다시 되돌아간 후에 이번에는 제 방향으로 갈아타고 세 정거장을 더 갔지요. 정신을 어디 두고 다니니? 어머니로부터 그런 잔소리를 종종 들었던 때입니다. 결국 첫 수업부터 지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날은 10월의 두 번째 금요일이었습니다. 강의실에는 열대여섯 명의 수강자들이 나보다 앞서 도착해서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눈에 띄는 빈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를 잡아 앉았을 때 저만치에서 칠판을 등지고 앉은 강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당신의 첫인상은 누구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저 이는 틀림없는 내향성이군. 조용하고 착해 보이는 작은 얼굴과 구부정한 등과 왜소한 어깨. 그 어깨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가 내게 그렇게 전달되고 있었어요. 이윽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당신은 입을 열었습니다. 당신은 그 수업이 자신이 기획한 저서의 집필을 위한 예비 강의 같은 것이라고 먼저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강의계획서에 올라간 순서대로 강의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에 나의 눈길을 끌었던 목차들은 다 무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그게 무슨 말인 줄 알겠더군요. 당신은 미리 정한 주제대로 강의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작성일 2022-09-16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2048상세보기 -
소설 박숲 - 두 겹의 노래
두 겹의 노래 박숲 CCTV 화면 속 여자는 유리코가 틀림없었다. 문득 생의 끝에서 맞닥뜨릴 그녀의 기억들이 궁금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유리코의 미소가 너무도 무구(無垢)해 보여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차를 마주한 채 멍하니 서 있는 유리코. 차체에 몸이 튕겨 나가는 순간까지 그녀의 눈동자는 다른 세계를 경유하듯 풀어헤쳐져 있었다. 내 눈에는 꼭 그렇게 보였다. 색과 소리가 사라진 CCTV 속 사고 장면은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마치 시공을 벗어난 다른 차원에서 벌어진 사고처럼 아득하고 멀었다. * 오늘도 그녀, 유리코는 보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자주 출입문을 돌아보았다. 조 군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부직포 구멍에 마 끈을 끼워 넣었다. 내리다 만 창문 블라인드 아래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조 군의 머리에 햇살이 닿아 머리카락이 은회색 빛을 냈다. 조 군에게 다가가 손에 들고 있는 부직포 주머니와 흰색 마 끈을 슬그머니 잡아 뺐다. 유리코 양은 왜 안 왔어요? 조 군은 발음이 잘 안 되는지 입술을 비틀며 대답했다. 몰라. 어머나, 여자 친구가 왜 안 나오는지 몰라요? 난 몰라. 치매 과정이 급격히 진행된 조 군에게 제대로 된 답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이 주째 유리코는 나오지 않았다. 육 개월 동안 한 번도 활동에 빠진 적 없던 그녀다. 혹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상담 활동 초기만 해도 조 군은, 내 여자 친구 예쁘지? 자랑스럽게 소개했었다. 그녀는 새침하고도 도도한 표정을 지었고, 활동 시간마다 두 사람은 티격태격 말싸움을 했다. 대개 조 군의 일방적 애정 공세 때문이었다. 조 군은 입술에 힘을 주며 내 손에 들린 부직포를 쳐다보았다. 나는 부직포 구멍을 연결한 끈이 뒤엉킨 부분부터 모조리 빼냈다. 다른 노인들은 주머니 구멍에 마 끈을 끼우는 것에 집중했다. 좌석을 둘러보며 질문을 유도했다. 다들 떡국은 드셨어요? 어린아이들처럼 천진한 표정을 지으며 노인들은 제각각 다른 대답을 했다. 그럼, 먹었지. 당연히 설에 떡국을 먹어야지. 선생님은 먹었어? 노란 햇살이 긴 탁자 위로 구부정하게 드러누웠다. 드뷔시의 〈아마 빛 머리의 소녀〉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이었다. 상담 작업실을 일 층에서 이 층으로 옮긴 뒤부터 음악을 틀기 시작했다. 노인들은 음악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노인들과 달리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음악이 흘러나오면 작업을 하다가도 잠깐씩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뭐 하세요? 물으면 도도한 표정으로, 이거 내가 제일 좋아했던 곡이야, 쉿, 이 부분은 너무 애절하지? 하며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감춰 둔 기억의 한 조각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스치듯 보았던 그녀의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자 작고 여린 새 한 마리가 가슴 한복판을 통과하며 지나갔다. 문득 그녀, 유리코 얼굴에 내 할머니 미소가 겹쳤다. 요양원에 위탁한 뒤 돌아설 때 짓던 할머니의 미소. 그 미소는
작성일 2023-05-26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2 댓글수 0 조회수 1985상세보기 -
소설 장진영 - 임하는 마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중단편)] 임하는 마음 장진영 엄마에게 반말을 썼는지 존댓말을 썼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반말을 해서 혼났다는 건 기억이 났는데 그래서 내가 고쳤는지 못 고쳤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었고 내 신발이 엄마와 홍석주 오빠의 신발들 틈에 놓이게 되었다. 엄마가 엄마 신발과 홍석주 오빠 신발 사이의 내 신발을 물끄러미 보았다. 내 신발은 예전에 박경란 언니가 신던 신발이었다. 술 장식이 달린 자두색 가죽 단화였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어쩐지 흉측하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여서 그걸 얻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하거나 몸을 밀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지만 누군가 간절히 원했다면 아마 나는 기쁜 마음으로 포기했을 것이다. 나보다 먼저 그 신발을 신었던 김민지 언니는 쌤통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김민지 언니가 억울해하지 않았으면 해서 속상한 척했으나 내심으로는 행복하였다. 속상한 척은 김민지 언니를 안심하게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박경란 언니를 속상하게 하지도 않았다. 박경란 언니를 속상하게 할까 봐 걱정되지도 않았다. 그 신발은 박경란 언니가 내게 직접 물려준 신발은 아니었지만 물려줄 사람을 고른다면 내게 물려주었으리라는 걸 박경란 언니도 나도 알았다. “다녀왔어.” 반말을 해 보았다. 엄마는 혼내지 않았고 반말이나 존댓말에 대해서도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전에 반말을 했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내가 집에게 한 말인 줄로 엄마가 받아들였을 수도 있었다. “다녀왔어요.” 집 안을 둘러보았다. 예전에는 방이 몇 개 있었다고 기억되는데 이제는 방이 하나였고 열어 보니 화장실이었다. 동그란 문고리에 구리색 물방울 문양이 소용돌이치듯 둘려 있었다. 만져 보니까 그 부분만 약간 도톰했다. 바깥쪽 문고리에는 열쇠 구멍이 안쪽에는 똑딱이 단추가 위치해 있었다. 물방울 문양과 똑같은 구리색이었다. 오줌을 싸고 나왔더니 방 천장에 노끈이 매달린 게 보였고 색색깔의 빨래를 널어 놔서 아름답게 느껴졌다. 건조 중인 수건에는 결혼식이든 야유회든 부활절이든 경사스러운 일을 기념하기 위한 글귀가 인쇄되어 있었다. ‘축’이라는 글자가 공통으로 들어갔다. 잠들기 전에 누워서 읽는다면 박수 치며 축하하는 꿈을 꿀 것 같았다. 싱크대의 타일 벽에는 프라이팬과 뒤집개와 국자가 매달려 있었다. 행거에는 엄마의 옷과 홍석주 오빠의 옷이 매달려 있었다. 모든 것이 다 매달려 있어서 이상해 보였다. 그래도 신발은 바닥에 놓여 있었다. 내 신발이 엄마의 신발과 홍석주 오빠의 신발 사이에 놓여 있었다. 지금은 중학생이 된 박경란 언니가 어린이 시절에 신었던 자두색 신발이었다. 그런 모든 것들을 한눈에 볼 수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나는 귀퉁이에 어깨를 대고 서서 엄마가 타일 벽에 매달려 있던 프라이팬을 가스버너에 올려놓는 모습을 보았다. 냉동실 문이 열렸고 불투명한 하얀 비닐봉지가 나왔다. 엄마가 꽝꽝 언 무언가를 수돗물에 씻더니 서로 엉겨 붙은 것
작성일 2022-09-09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842상세보기 -
소설 임아라 - 관능하는 시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중단편)] 관능하는 시간 임아라 두세 시간이면 돼. 팀장의 말을 고대로 남편에게 전하다가 의주는 저도 모르게 피식했다. 헛웃음을 감지한 남편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의주는 이따 보자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두세 시간이면 된다니. 경솔한 말이었다. 두 시간이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면 세 시간이지 두세 시간은 뭔가. 팀장은 부탁이라고 했지만 의주에겐 엄연한 명령이었다. 별것 아니라고 눙치기엔 한 시간 차이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게다가 세 시간으로도 어림없다는 걸 팀장은 알고 있었다. 오후 7시 30분부터 시작하는 좌담회만 두 시간이었다. 앞서 현장에 도착해 차질이 없는지 점검하고, 끝나면 조사원과 뱐뱐한 의견을 주고받아야 했다. 에이전시에 일임했다고 결과물에 대한 책임도 전가되진 않으니까. 의주는 틈나는 대로 자료를 읽었다. 남편에게 기다리지 말고 자라는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말았다. 여섯 시가 되자마자 팀장이 출발하자며 의주를 채근했다. 엘리베이터에서는 친히 모셔다주겠다고 생색내더니, 차 안에서는 이러다가 늦겠다며 툴툴거렸다. 의주는 내비게이션을 흘깃했다. 목적지가 머지않았으므로, 팀장은 사생활을 염려하는 중이었다. 팀장의 무심한 태도에 의주는 기가 찼다. 누가 데려다 달랬나, 분한 사람이 누군데. 팀장이 프로젝트 예산을 따냈을 때 의주는 마땅히 들떠 있었다. 그간 갖다 바친 제안서가 몇 권인데 입 닦지는 않겠지 방심했다. 팀장은 의주를 열외 시킨 연유를 배려로 포장했다. 신혼을 즐기라는 둥 야근을 피하라는 둥 하더니 울부짖는 아이를 두고 출근하는 심정을 토로했다. 그날을 되새긴 의주는 욕지기를 삼켰다. 아무래도 점심으로 급히 먹은 햄버거가 얹힌 것 같았다. 의주는 통사정하던 팀장의 창백한 안색을 떠올렸다. 굼틀대는 멀건 눈썹이 화급함을 아뢰고 있었다. 팀장은 반나절을 매달렸다. 대리가 예비군 훈련하는 오늘, 하필 베이비시터가 펑크를 냈고, 서방은 늘 그렇듯이 쓸모가 없으며, 이런 때일수록 같은 여자끼리 도와야 한다는 거였다. 의주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어째서 같은 여자 레퍼토리일까 의아했다. 팀장은 영민한 상사였다. 좀처럼 주머니를 열지 않는 대표에게서 대형 전결을 끌어냈고, 그로 인한 타 부서의 질시에 의연하게 처세했다. 야무지지만 속을 내보이지 않는 직속 부하의 실적을 경계했고, 그로 인한 위기를 기회인 것처럼 떠넘겼다. 그런 팀장이 빈번히 같은 여자, 같은 여자 하는 게 거슬렸다. 의주가 아는 한 같은 여자 같은 소리는 무지한 인간의 입버릇이었다. 이러한 의주의 벽견은 어머니로부터 기인했다. 의주의 어머니는 여자로 태어나서, 라고 서두를 떼곤 했다. 여자로 태어나서 대통령이 되다니 대단해, 여자로 태어나서 살찌면 못쓴다, 여자로 태어나서 송편도 못 빚냐, 하는 식이었다. 예사로운 어머니의 어투가 의주의 뇌리에 꽂힌 건 열네 살 무렵이었다. 의주는 학원에서 고득점을 받은 작문을 자랑했다. 아버지와 오빠의 칭찬에 고취된 의주는 여성주의 선구자인 작가를 추천했다. 온 가족이 책을 구경하던
작성일 2022-09-30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813상세보기 -
소설 이화리 - 명란(明卵)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단편)] 명란(明卵) 이화리 여섯 번째 집이다. 지난번 그 집을 나올 때처럼 바람이 분다. 대상이 또 남성이라서 거절하고 싶었다. 센터장에게 눈치가 보여 혀끝에 매달린 말을 아래위 입술에 고루 발라 버렸다. 근무시간과 보수의 조건이 좋았다. 또 부딪쳐 보자. 다섯 번째 집에서는 세 번의 곤욕을 치렀다. 첫인사 차 들렸을 때, 정장을 입은 치마 속으로 환자의 손이 쑥 들어왔다. 방바닥에 누운 환자는 여든아홉 살인 거구에 깊은 주름마다 검은 정욕이 번들거렸다. 며칠 후 밥을 먹이는데 젖가슴을 잡았고, 손을 떼어 내려는 순간 가슴을 아프게 비틀기까지 했다. 마지막 날에는 기저귀를 빼고 닦는 동안 내 손을 끌어다 성기 위에 올렸다. 손은 크고, 손 매듭은 억셌다. 참을 만큼 참았다. 마감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센터로 오는 내내 되돌아가 환자의 손목을 부러뜨리고 싶었다. 대신 바람이 세차게 불어 주었다. 센터장은 ‘육체’와 ‘인체’의 구분을 못 하는 내 탓이라 한다. ‘성기’가 아니라 소변만 나오는 ‘생식기’라는 말은 맞다. 발기가 없었다는 나의 대답에 동료들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한 마디씩 던지는 충고나 위로도 텃세로 의심된다. 그들의 다양한 체험담은 필수의 간접 지식이라지만 초보자 여럿에게 써먹던 야유로 보였다. 모욕을 당하고 나와서 수모까지 감당하지 않으려면 나는 극복해야 한다. 코로나로 다른 쪽의 일자리는 꿈도 못 꾼다. 이젠 나이 때문에도 안 된다. 바람에 날린 머리칼이 무더기로 뺨에 감긴다. 내 머리칼은 유난히 굵은 건강 모발이다. 하필이면 첫날인데, 첫인상이 좋아야 하는데, 산발로 들어가는 건 아닌 것 같다. 왼손으로 잡은 머리칼을 놓는 순간 바람은 머리칼 따귀를 세차게 때리고 만다. 따끔하다. 더 이상 이 집 저 집 다니지 말고 정신 차리라는 내 머릿속의 수화 같은 건지 모른다. 가방을 뒤적여 보지만 고무줄이 없다. 차를 지하에 주차하고 올라갔으면 괜찮을 일이다. 나에게 어두컴컴한 지하는 공포다. 습한 지하 방에 살아 본 트라우마 때문이다. 요즘 생기는 아파트는 아예 지상 주차장이 없어서 건너편 자그만 우체국 귀퉁이에 주차를 했다. 이런 소소한 버릇도 이제 고쳐야 한다. 센터장이 회의 때면 자주 그랬다. “우리 식구들 중 어떤 사람은 천당에 갖다 놔도 불평불만을 할”, 맞다. 다들 무던하고, 허허실실 성격이 좋은데 분명 나를 지칭하는 걸 안다. 나도 이번에는 이를 앙다물고 극복하리라. 장애물 경기에 일정한 크기와 부피와 모양만 있는 건 아니다. 센터장이나 동료들이 생각하는 만큼 나는 아둔하지 않다. 언젠가 그들을 능가해야 한다. 시간과 노력이 성공적인 나를 만들 것이다. 지겹지만 소중한 생활비가 되는 이 일을 한 지 일 년을 넘기고 있다. 나는 지은 지 22년 된 낡은 아파트에 산다. 새로 지은 고급 아파트의 공동 현관에서부터 나는 루저가 된다. 전화를 했더니 문이 열린다. 엘리베이터 앞에
작성일 2023-03-17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679상세보기 -
소설 정영선 - 무연고 시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단편)] 무연고 시간 정영선 장군이 기차로 압록을 건너 선양 톈진을 지나 하노이에 갈 거라는 뉴스를 듣는 순간 땀이 나고 입안이 말랐다. 가는 데만 3박 4일 60시간이라고 했다. 기차가 평양에서 하노이를 가는 게 아니라 내 몸속에서 출발해서 몸속 어딘가로 가는 것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는 라오스 폰사완의 명캄학교로 봉사 활동을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성적 우수자는 숙박비만 내는 조건이었는데, 그 정도면 라오스 5박 6일 경비로 껌값이라고 했지만 신청했던 걸 취소했다. 물론 숙박비가 부담스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몸이 아프다든가 알바를 해야 한다든가, 많은 핑계를 생각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장군 때문이라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장군하고 관계없는 일이었으니. 은주 언니가 안 가서 가기 싫다는 말은 더 할 수 없었다. 그냥 가기 싫다고만 했다. 교감 선생님이 불렀다. 우리를 아들과 딸이라 부르는 사람이었는데 우리들 중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머리는 벗어지고 배가 좀 나왔다. 아침마다 운동장을 뛰고 체육관에서 헬스를 하는데도 그랬다. 늘 먹고 늘 운동을 하고.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산다. 헬스장에서 만났을 때 했던 말이었다. 봄방학이라 한두 선생님만 노트북에 코를 박고 있을 뿐 교무실은 고요했는데, 교감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의자에서 일어나 왜 취소했는지 취소한 이유가 뭔지 연거푸 물었다. 돌아오기 전날이 동명이 생일이라는 말을 준비해 왔지만 하고 싶지 않았다. 한 번 더 대답을 다그친 교감 선생님이 책상을 돌아 나와 내 귀에 대고 말했다. 무연고 성적 우수 학생에게 후원금이 들어왔다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무연고, 가족도 없이 혼자 남한으로 넘어온 사람. 다섯 살 동생이 쉼터에 있었지만, 나는 진짜 무연고이고 싶었다. 4,500킬로 가는 데 60시간 걸린다는데, 그냥 비행기 타고 가지, 꼭 티를 내네. 진석이 소리를 죽여 웃었다. 석식을 먹고 식당 앞 벤치에서 바람을 쐬고 있을 때였다. 공부도 안 하면서 방학 특강을 신청해 놓고 학교에서 뒹굴고 있는, 싫지 않은 아이였다. 장군은 광저우 쪽으로 가네. 나는 쿤밍 쪽으로 왔는데 거기서 라오스로. 누나도 라오스로 갔지? 응. 나는 짧게 대답했다. 아, 진짜 힘들었어. 버스에서 먹고 자고 똥 싸고. 죽는 줄 알았다니까. 사 일쯤 그랬나…. 누나는 며칠 동안 탔어? 나도 그 정도. 입가에 묻은 케첩이 거슬려 진석의 얼굴을 보고 있기가 싫었다. 진석이 허벅지를 바짝 붙였다. 단단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싫지는 않았는데, 조금 떨어져 앉았다. 경애하는 장군님도 기차에서 자고 먹고 똥 싸고…. 진석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웃었다. 이 간나가, 그 말이 내 몸 어느 구석에 박혀 있다 몸을 뚫고 나왔는지, 진석도 눈에 티가 들어간 것처럼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비행기는 밤 7시 30분에 출발했다. 라오스의 비엔티안까지는 6시간 걸린다고 들었다. 비행기에 타서 검은 창을 내다보며, 하늘을
작성일 2023-03-3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554상세보기 -
소설 박동현 - 재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중단편)] 재회 박동현 소호야. 오랜만이네. 나 도현이야. 중학교 삼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네가 여름방학 직전에 학교를 그만뒀으니까 사실은 몇 달도 안 된 사이긴 하지. 기억 못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널 기억해. 네가 티브이나 유튜브에서 자꾸 나타났거든. 못 본 척 지나갈 수가 없더라. 네 무대 영상도 봤고 예능에 나와 출연진들을 웃기는 모습도 봤어. 또 네가 팬들에게 하는 애교도 보았지. 새 종이처럼 구김 없는 네 표정은 정말이지 신비롭더라. 그런 얼굴을 할 수 있는 애였다니. 드물게 찾아오는 남성 팬까지 한껏 안아주는 네 몸짓이 내겐 특히 놀랍더라고. 그래도 혹시, 정말로 내가 기억나지 않을까? 이렇게 묻는 건, 우리가 서너 달 정도만 아는 사이였다곤 해도 따로 시간을 내서 만났기 때문이야. 이중원이나 김상진, 최준학 같은 이름들은 기억해? 너 항상 걔네랑 몰려다녔잖아. 그리고 나는 너희의 셔틀이었잖아. 그렇잖아? 거기다 너희가 부르는 밤마다 나와서 대신 담배를 사야 했지. 너희가 지켜보는 앞에서 편의점이나 슈퍼를 들락거리고, 가능하면 훔치기도 했었어. 너희가 시켜서, 내가 그랬잖아. 아직도 기억나지 않을 수 있을 거야. 그럴 거 같아서 내가 만든 영상이 있어. 비공개로 올려서 우리밖에 못 보니까 걱정 마. 아이디와 비번 아래에 적을게. 그걸 전부 본 뒤에 나를 찾아왔으면 좋겠어. 동영상에 댓글을 달 수 있으니까 그걸로 연락하면 될 거야. 기다릴게. 소호는 책상에 내려둔 편지 봉투를 다시 살폈다. 곳곳에 붙은 스티커들이 알록달록했다. 소속사 주소와 우편번호를 쓴 글씨체가 삐뚤빼뚤함에도 어떤 정성이 느껴져 가장 먼저 뜯어본 팬레터였다. 그 안에 이런 내용이 있을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편지에 적힌 유튜브 계정으로 로그인을 하자, 비공개 설정된 따위의 제목을 가진 영상들이 소호를 맞이했다. 가장 먼저 눌러본 에는 소호가 카카오톡으로 보낸 메시지와 페이스북에서 친구들과 나눴던 상스러운 대화를 캡처한 이미지, 속옷만 입은 도현이 거울 앞에 선 자신을 찍은 사진이 슬라이드 쇼로 넘어가고 있었다. 사진 속 도현의 몸에는 검붉은 멍이 얼룩처럼 번져 있었다. 설명을 덧붙이는 자막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날은 제가 담배를 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맞았습니다. 소호가 뺨을 때리는 바람에 안경테가 부러졌는데 그때 왼쪽 뺨에 이렇게 상처가 난 것입니다. 는 도현에게 욕설을 퍼붓는 소호의 음성이 담긴 영상이었다. 소호와의 통화를 녹음한 것이라는 자막이 화면 하단에 표시되었다. 정확한 날짜와 시간까지 함께. 어떤 시간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소호는 배신감을 느꼈는데 그건 자기 자신을 향한 감정이었다. 무슨 자신감으로 저럴 수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이미 깔끔히 정돈된 자신에게서는 아무 답도 얻을 수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기억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대신 소호가 떠올린 것은 데뷔 후 질식할 것 같던 2년여간의 무명시절이었다. 길거리캐스팅을 받았다는 자신감으로 학
작성일 2022-10-07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522상세보기 -
소설 지혜 - 구목丘木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단편)] 구목丘木 지혜 그 여자가 찾아온 건 이사하고 두 계절이 지났을 때였어요. 어느 날 오후 깜빡 잠들었다 일어났을 때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어요. 텅 빈 뱃속에서 허기가 몰려왔어요. 그즈음 배가 자주 아프곤 했는데 신랑은 배 속에 회충이 있는 게 아니냐며 약을 챙겨 먹으라는 게 아니겠어요? 어린애도 아니고 회충이라니. 농담이 아니라 살집이 늘어난 나를 은근히 비난하는 것 같아서 남편이 아니라 남의 편이라는 말이 맞다 싶더라니까요. 진심은 때론 그럴듯한 가짜 속에 묻히는 법이잖아요. 냉동실을 뒤져 육수와 만두를 꺼냈어요. 불꽃 소리와 함께 가스레인지가 켜지는 모습을 보자 무리를 해서라도 인덕션을 설치할 걸 후회가 밀려왔어요. 가스가 몸에 나쁘잖아요. 가뜩이나 조심해야 할 것투성이인데 집안에서도 매 끼니마다 위험을 마주해야 한다니…. 왜 살림은 매번 바꿔도 눈에 차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였을 거예요.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난데없는 허기가 파도처럼 밀려왔어요. 부유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집에 먹을 게 끊긴 적은 없었거든요. 저는 또래보다 키도 몸집도 컸는데 쉬지 않고 먹어 대는 습관이 있었어요. 자꾸 입에 뭘 넣고 싶더라니까요. 집에는 제철 과일이며 말린 과육, 생과자와 술빵 같은 주전부리들이 마를 날이 없었어요. 엄마는 내가 외할머니를 닮아 키가 크려 한다고 했지만 저는 제가 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다니, 이상한 일이잖아요? 꼭 위장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그러던 어느 날, 마당에 쌓인 흙을 본 거예요. 아무도 없는 집에서 마당은 온통 나만의 차지였어요. 그곳에는 제가 원하는 모든 게 다 있었어요. 봉오리 진 무궁화, 축축한 진흙, 개미굴을 숨긴 나무뿌리, 작은 웅덩이와 무성한 이끼들. 세상의 습하고 어두운 모든 것들. 그래서인지 지금도 아파트보다 단독주택이 더 좋아요. 이 집처럼요. 집은 영혼이 쉬는 곳이라는데 그러려면 마당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파헤칠 흙 하나 없는 집에서 어떻게 사람이 편히 쉴 수 있겠어요? 비록 마당 아래 뭐가 묻혔는지 알 수 없을지라도 말이에요. 공사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 곳곳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잔재들이 남아 있었고 마당 또한 마찬가지였어요. 정원을 꾸미다 남은 커다란 판석은 부러진 빗자루와 금이 간 독 사이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어요. 한동안 인부들이 들락거리더니 집안은 엄마의 취향대로 완벽하게 바뀌어 있었어요.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판석 가장자리에 난 푸르스름한 이끼가 소보로빵에 올려진 부스러기 같아 군침이 돌던 건 생각나요. 그 아래 숨겨져 있을 살찐 개미들도. 개미들. 나의 새까만 친구들. 당신에게도 그런 친구들이 있었겠죠? 지금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요? 이끼는 네모난 판석과 둥그스름한 장독대를 지나 흙이 쌓인 바닥으로 이어졌어요. 꼭 푸른 그림자 같았어요. 어쩌면 개미들이 지나다니는 길일지도 모르는. 나는 어느새 판석 앞으로 다가가 이끼 위
작성일 2023-04-07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497상세보기 -
소설 이서안 - 룹(LOOP)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중단편)] 룹(LOOP) 이서안 당근 마켓에 그것이 올라왔을 때 두 눈이 섬광으로 치켜떠졌다. 몇 달 동안 머리를 감을 때마다 대여섯 줄기씩 빠져나가던 긴 머리카락이 이제 더 이상 빠져나가지 않을 것 같아 심장은 설레발로 콩닥거렸다. 혹여 누가 잽싸게 낚아챌까 봐 나는 엄지로 핸드폰을 초스피드로 작동시켰다. 약속 장소로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들뜬 마음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여러 번 실패를 맛보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 이게 나를 구원해 줄 마지막 카드인지 몰라. 역사 공원 2호선 2번 출구는 전에 와 본 적이 있어 찾는 게 어렵지 않았다. 출구 오른쪽 빌딩과 학교 뒷문 사이 좁은 길목에는 벚꽃들이 난분분했다. 눈이 부신 이 봄날에 나는 사라지는, 닳아지는, 잊혀지는 그 뭔가를 찾으러 판매자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그늘진 나무 벤치에 키 작은 소년이 배낭을 메고 앉아 있었다. 볼 헤어 커트 머리에 빨간 야구점퍼 차림이었다. 나는 2번 출구 바깥을 한 번 휘둘러보고 다시 가로수를 접한 학교 담벽을 쳐다보았다. 학교 운동장에는 축구하는 학생들의 함성이 둘러싼 전나무들 사이로 호기롭게 퍼져 나왔다. 도로 맞은편에는 하얀 벚꽃 나무들이 길을 따라 풍성하게 이어졌고, 일상은 늘 그렇듯 천연덕스럽게 하루를 펼쳐 보였다. 약속 장소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그 소년에게 시선이 아예 가지 않았을 거다. 하나 아무도 없었고, 그 소년뿐이었다. 기껏해야 초등 4학년 정도의 남자아이였다. 원래 약속 시간 보다 5분 정도 일찍 도착해서 다시 주변을 바쁘게 훑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가슴 높이쯤 들고 나는 뚜벅뚜벅 다가갔다. “혹 당근이신가요?” 그러자 그 꼬마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대뜸 눈빛으로 먼저 알은체를 하며 “영화 입장권 당근이시죠?” “네, 맞아요.” 내가 그다음 말을 못 건네자 아이는 바삐 둘러맨 배낭을 벤치 위에 놓고는 배낭의 지퍼를 쓱 열었다. 녹슨 부분이 대부분인 철제 박스가 안에서 비죽 고개를 내밀었다. 겉으로 봐도 제법 묵직해 보였다. 소년은 뚜껑을 열어 입장권의 상태를 보여 주었는데 노란 고무줄로 여러 다발이 칭칭 감겨 오랜 시간을 머금고 저장돼 이제 막 빛을 쬐는 것 같았다. 딱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냄새가 공원의 꽃 냄새에 섞여 훅 끼쳐 왔다. “3만 원이라고 했죠?” 소년은 대답 대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는 지갑을 열어 3만 원을 건넸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아이는 돈을 받자마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잰걸음으로 횡단보도가 있는 도로를 향해 걸어갔다. 걸어가는 아이를 세워 두고 묻고 싶은 궁금증은 따로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입장권을 모았니?’ 하고 서둘러 묻고 싶었으나 혹여 의도하지 않은 대답이 들려올까 봐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꽃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 아이가 앉은 벤치에 앉아 녹슨 철제 박스를 천천히 열어 보았다. 고무
작성일 2022-10-14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392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