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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청소년문학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
아동청소년문학 배고픈 마녀, 학교에 가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장편)] 배고픈 마녀, 학교에 가다 한아 1. 편식쟁이 마녀 “아이고, 배고파! 규칙만 아니었으면 벌써 행복한 어린이를 먹었을 텐데.” 삐쩍 마른 몸, 회색 털실 같은 뻣뻣한 머리카락, 하얗고 푸석한 얼굴, 매부리코 끝에 난 붉은 점 하나. 바로 까르르 마녀야. 까르르 마녀는 엄마 배 속에서 나올 때부터 까르르까르르 웃었대. 까르르 마녀는 아무 때나 웃음이 터져 나왔어. 까르르 마녀가 웃기 시작하면 웃음을 그치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어. 그래서 ‘슈바실라’라는 이름 대신 까르르 마녀로 불렸지. 마녀들은 까르르 마녀가 일부러 웃는다고 생각했어. 다른 마녀들을 괴롭히려고 말이야. 까르르 마녀의 웃음은 들어 주기 힘들었거든. 나는 새가 떨어진 적도 있었다지. 마녀들은 남을 배려할 줄 모른다며 까르르 마녀를 싫어했어. 마녀들은 하나둘 까르르 마녀를 따돌리기 시작했어. 까르르 마녀는 속상하고 억울했어. “그런 게 아니야. 나도 내 웃음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멈출 수가 없다니까.” 아무도 까르르 마녀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어. 까르르 마녀는 외롭고 슬펐어. 그즈음부터 까르르 마녀는 편식하기 시작했어. 구하기 어려운 음식만 고집하는 거야. 오천 년 묵은 소나무 뿌리 샐러드, 겨울을 다섯 번 보낸 두꺼비 껍질 튀김, 귀신 머리카락으로 만든 잡채 같은 거. 하지만 까르르 마녀는 어떤 음식에도 만족하지 못했어. 어느 날, 까르르 마녀는 마녀들의 역사책을 읽고 있었어. 마녀는 책을 읽다가 어린이를 먹지 말라는 규칙이 만들어진 사연을 읽게 되었어. 삼천 년 전 한 마녀가 길 잃은 어린이를 만났대. 처음에 마녀는 어린이를 잡아먹을 생각이었는데, 그 아이와 삼 일을 보낸 뒤에 마음이 바뀐 거야. 이제부터 어린이는 우리의 친구다. 친구는 우리의 음식이 아니며 우리의 실험 대상도 아니고 마법의 재료로도 쓰면 안 된다. 어린이는 마녀의 친구로 정중하게 대해야 한다. 꼬르륵 꼬르륵, 마녀 배 속에서 소리가 났어. 문득 까르르 마녀는 궁금해졌어. ‘그럼 예전에는 어린이를 먹었던 거야? 어린이는 무슨 맛일까? 만약에…… 행복한 어린이를 먹으면 내가 행복해질까? 에잇,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래도 혹시…….’ 그 뒤로 까르르 마녀는 행복한 어린이를 먹고 싶다는 생각만 했어.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 “행복한 어린이를 먹으면 나도 행복해질 것 같은데.” 까르르 마녀가 먹을 수 있는 건 물뿐이었어. 사람이라면 당연히 죽었겠지만, 까르르 마녀는 다행히 마녀잖아. 마녀는 먹지 않아도 죽지는 않아. 다만 끔찍한 배고픔에 시달릴 뿐이야. “배고파! 더 이상은 안 되겠어. 롬 자르카차!” 까르르 마녀가 휘파람을 불었어. 곧 자가용 빗자루가 휘릭 소리를 내며 나타났어. 마녀는 빗자루에 걸터앉아 빗자루를 꼭 움켜잡았지. “여기서 가장
작성일 2022-10-28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734상세보기 -
아동청소년문학 정해윤 - 똥침 한 방 어때요?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장편)] 똥침 한 방 어때요? 정해윤 1. 임비와 곰비 “쳇, 하필 헌책을 고르냐.” 검정 비닐봉지에서 누렇게 바랜 책이 나왔다. 책에서는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한 퀴퀴한 냄새가 났다. 혹시나 하고 나달거린 표지를 열어 보았지만 역시나 뻔하고 시시한 옛날이야기 책이었다. 루다는 책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전래동화인 『이야기보따리』 책은 정확히 쓰레기통에 거꾸로 박혔다. 루다는 이어폰을 끼고 바닥에 벌렁 누웠다. 더운 길을 걸은 탓인지 온몸이 푹 가라앉았다. “임비야, 세상 밖으로 나온 지 얼마 만이냐?” “하도 오래돼서 얼마 만인지도 모르겠어!” “기막히고 코 막힌 시간이었어. 그렇지 않냐?” “책장 사이에 끼어 있는 시간은 정말이지 엿 같았어. 곰비 너도 그렇지?” “꽁청장이 나쁜 놈이지.” 귓속 이어폰에서 신나는 랩이 들려왔다. 어깨를 들썩이던 루다가 벌떡 일어났다. “곰비, 임비, 꽁청장?” 루다가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뭐지?” 루다가 방 안을 휘둘러보았다. 하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나른한 여름 오후가 쫀드기처럼 늘어지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어.” “진짜 조마조마했다니까” 소리가 나는 곳은 쓰레기통이었다. 루다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다짜고짜 쓰레기통을 들어 뒤집었다. 방바닥으로 코를 팠던 휴지랑 아이스크림 껍질이 우수수 쏟아졌다. “임비야, 이번엔 꼭 성공할 수 있겠지?” “실수란 있을 수 없지.” 그사이에도 랩은 계속되고 있었다. 쓰레기를 휘젓던 루다의 손이 딱 멈췄다. 랩은 고물 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루다가 고물 책을 집어 들어 휘리릭 책장을 넘겼다. 그러다 책 중간쯤에서 손이 딱 멈췄다. “도깨비잖아?” 루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책 가운데 홀로그램이 무수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곳에서 도깨비들이 어깨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은 주거니 받거니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안녕, 루다야?” “반갑다. 이루다.” 도깨비가 루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더니 밤톨이 튀듯 책 속에서 톡 하고 튀어나왔다. 도깨비는 머리에 도도록한 뿔이 나 있고, 커다란 초록 잎사귀를 들고 있었다. 강원도 어디 두메산골에만 자생한다는 도깨비부채였다. 너울대는 잎맥마다 부챗살이 날카로웠다. “헐, 진짜 도, 도깨비야?” 루다가 책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무래도 더위를 먹은 게 틀림없었다. 대낮에 헛것이 보이다니. 루다가 양 볼을 꼬집었다. 혹시나 하고 눈도 비벼 봤지만 역시나 도깨비였다. 도깨비가 루다 눈앞에 딱 버티고 서 있었다. “많이 놀랐구나?” “놀랄 만도 하지!” &ldqu
작성일 2022-10-07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676상세보기 -
아동청소년문학 양지영 - 빨강이의 신기한 여행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장편)] 빨강이의 신기한 여행 양지영 차례 1. 여기가 어디지? 2. 넌 하늘을 나는 비행접시야 3. 나는 왜 일회용이야? 4.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5. 나를 꺼내 줘 6. 너희 집에 데려다줄게 1. 여기가 어디지? “흐, 비 오나 봐.” 잠을 자고 난 아침이었어요. 어디서 흙을 파내는 소리가 들렸어요. 누군가가 온 게 틀림없어요. 나는 축축한 흙더미 사이로 주위를 살폈어요. 나를 깨운 건 공원에 산책하러 온 검둥이 개였어요. 검둥이는 볼일을 다 보고는 꼬리를 흔들며 지나갔어요. “에이, 뭐야? 다 젖었잖아.” 더운 기운이 흙에서 확 올라왔어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깜짝 놀랐어요. 뭔가가 달라져 보였거든요. 내게 그늘이 되어 주던 은행나무 키가 훌쩍 자라 있어요. 하늘에 닿을 만큼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은행나무 앞에 벤치도 생겼어요. 공원 주변으로는 예전에는 없었던 높은 건물이 솟아 있어요. “우와. 여긴 어디지?” 모든 게 어리둥절했지요. 아, 참 내 이름은 빨강이에요. 나는 일회용 플라스틱 접시이고요. 일회용이지만 몸이 아주 단단해요. 다행히 어느 곳도 다치지 않고 둥근 모양 그대로예요. 앞에는 큰 물웅덩이가 있었는데 어느새 연못이 되었네요. 잉어가 꼬리를 흔들며 헤엄치고 있어요. 잠들기 전까지는 은행 열매에서 구린내가 진동할 즈음이었어요. 몸 위로 은행잎이 비처럼 쏟아졌던 것 같아요. 나는 은행나무 할머니에게 말했어요. “할머니, 빨강이에요.” “빨강이 이제 일어났구나.” “네, 자고 일어나니 주위가 이상해졌어요. 제가 얼마나 잤는데요?” 은행나무는 나무 마디를 세더니 이렇게 대답했어요. “아마도 10년은 지난 것 같어.” 그 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와, 10년을 잤다고요? 그럼 내 친구들은요?” “친구라면 네가 일전에 말했던 종이컵이랑 나무젓가락 말이야?” “네, 분명히 쓰레기통에 있는 거 봤는데?” “어휴! 그동안 남아 있는 얘들이 어디 있겠어? 안 썩는 네가 이상할 뿐이지, 걔들은 벌써 자연의 집으로 돌아갔단다. 내가 300년을 살고 있지만 너 같은 아이는 첨 본다. 나이를 먹어도 늙지 않으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구나.” 은행나무 할머니는 내가 그대로인 게 이상한가 봐요. 할머니는 공원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예요. 터줏대감으로 지내서 모르는 일이 없었지요. 나는 다시 물었어요 “자연의 집이라고요? 그런 집이 어디 있다고요?” “세상 만물은 다 자연에서 나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단다. 흙 속에서 자길래 너도 그렇게 없어지려나 했단다. 흙이 자연의 집이란다.” “그럼, 흙 속에서 꼭 없어져야 해요? 그런데 전 왜 이래요? 할머니는 오래 살아서 아실 거 아니에요?&
작성일 2023-03-24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486상세보기 -
아동청소년문학 최인정 - 파란만장 개, 살구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단편)] 파란만장 개, 살구 최인정 “뭘 봐?” 녀석이 턱을 건방지게 치켜들고 이죽거렸다. 나는 못 들은 척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어이, 대답 안 해?” 녀석이 둔한 몸을 일으켜 슬슬 다가오는 듯했다. 단단히 텃세를 부려 볼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안 들리는 척 나는 대꾸 없이 그대로 꼼짝하지 않았다. 갑자기 녀석이 사납게 내 몸 위로 올라탔다. 그러고는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새파란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심심하셔? 그래서 시비야? 낮잠이나 자라고!” 벌떡 몸을 일으켜 녀석을 내동댕이쳤다. 뚱보 녀석이 날 얕잡아 보게 놔둘 순 없다. “어쭈, 신고식 한번 제대로 해 볼까?” 녀석은 금방이라도 무슨 짓을 할 것처럼 등을 곧추세웠다. 그 순간, 현관문 여는 소리가 나더니 산만 한 덩치의 오락 씨가 들어왔다. “옹주야! 아빠 왔다.” 기세등등하던 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낭창하게 오락 씨에게로 달려갔다. 어울리지 않게 토끼처럼 깡충거리는 꼴이 어이없었다. 그동안 길에서 봐 온 고양이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아빠 보고 싶었쪄? 배고프징? 얼른 맘마 줄게.” 오락 씨도 참 웃긴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혀 짧은 소리라니. 녀석은 밥 소리에 흥분해서 혀를 날름거렸다. 새파란 두 눈이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 빛났다. “어이, 방랑자! 너도 밥 먹어.” 나를 보고 오락 씨가 그릇을 툭툭 치며 말했다. 배가 고프긴 했지만, 선뜻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고양이 사료를 얻어먹는 게 달갑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본체만체 녀석은 맛나게 쩝쩝 사료를 먹어 댔다. 저렇게 먹어 대니 뚱보가 됐지 싶었다. 어제저녁, 근처 길모퉁이에서 비에 흠뻑 젖은 채 오락 씨와 마주쳤다. 오락 씨는 처음 본 나를 망설임 없이 끌어안았다.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꼬질꼬질한 나를 품에 안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에고, 찬비를 쫄딱 다 맞고! 감기 들겠네.” 오랜만에 사람 품에 안겨 본 나는 그 포근함에 울컥했다. 그런데 집으로 들어선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바로 저 옹주라는 고양이 때문이었다. 옹주 녀석도 나를 안고 들어오는 오락 씨를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자기 영역 안에 들어온 나를 향해 못마땅한 기색을 온몸으로 뿜어냈다. 오락 씨는 몽글몽글 샴푸 거품을 내어 냄새나는 내 털을 깨끗이 씻겨 주었다. 얼마만의 목욕인지, 개운함이 오히려 낯설었다. 예전에 쓰던 샴푸만큼 좋지는 않았지만, 향이 꽤 괜찮았다. 오락 씨가 드라이어로 털을 말려 주자 나는 어느새 복슬복슬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뭉치고 눌린 털이 다시 살아나니 어깨가 저절로 쫙 펴졌다. “방랑자, 어쩌다 길을 잃고 떠돌고 있었냐? 너, 집이 싫어 가출한 거지? 아니면 못생겼다고 버림받았냐?” 가출이라니! 못생기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오락 씨가 어이없었다. 알고
작성일 2023-04-07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380상세보기 -
아동청소년문학 최인정 - 치노 엄마와 나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단편)] 치노 엄마와 나 최인정 “으아아아악!” 발바닥에 와닿는 기분 나쁜 축축함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되풀이되는 이 끔찍한 상황이 정말 싫다. 그러나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얘가 왜 자꾸 실수를 하나 모르겠네. 환경이 바뀌어서 그런가.” 치노 엄마는 치노의 오줌을 닦으며 그렇게 중얼대는 게 전부였다. “동생이니 네가 이해해야지. 응?” “얘가 왜 내 동생이야?” 아빠의 넉살에 나는 반사적으로 발끈했다. “너는 열두 살, 치노는 세 살! 그러니까 동생이지. 그렇지, 치노야?” 아빠는 오줌싸개 치노를 끌어안으며 날 약 올린다. 그런 아빠의 모습이 어이없다. 아니, 배신감까지 든다. 아빠는 원래 털 달린 동물을 질색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번도 동물을 키워 본 적이 없고, 아빠랑 함께 동물원에 가 본 적도 없다. 일곱 살 때 유치원 견학으로 동물원에 꼭 한 번 가 본 게 다였다. 그런데 아빠가 이토록 치노를 애지중지 싸고도는 모습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처음엔 치노 엄마가 함께 살던 강아지를 데려온다는 사실이 눈곱만큼 좋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치노 때문에 이렇게 찬밥이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똥오줌으로 날 이렇게 기겁하게 만들 줄 정말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그래서 치노의 구불구불한 갈색 털과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유혹해도 난 끄떡 않는다. 여태껏 한 번도 치노를 안아 보지 않았다. 앞으로도 절대로 안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치노에게 딱 하나 고마운 게 있긴 했다. 억지로 함께 살게 된 아빠의 아내를 부를 만한 호칭이 애매했는데 다행히 치노가 있어 난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치노 엄마’라고 부르게 됐다. “우리 치노, 엄마가 맘마 줄게.” “우리 치노, 응가 했어요?”라며 치노를 어르고 달래는 모습에 그만큼 딱 들어맞는 호칭은 없으니 말이다. 카푸치노를 좋아하는 치노 엄마 때문에 ‘치노’라는 이름을 갖게 된 녀석. 그런 치노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나는 가끔 휴지를 슬그머니 가져다주곤 했다. 언젠가 휴지를 뜯어먹고 있는 치노 모습에 기겁하는 치노 엄마를 보고 이거다 싶었다. 휴지는 치노가 제일 좋아하는 불량 식품인 동시에 치노 엄마가 아주 질색하는 것! 그러니 나는 치노를 위해, 동시에 치노 엄마를 위해 치노 앞에 휴지를 슬쩍 갖다줄 수밖에. 치노 엄마는 요즘 들어 부쩍 구석방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많았다. 뭘 하는지 긴 시간 숨죽인 채 있다가 나오곤 했다. 책을 읽는 건가? 책은 거실 소파나 안방에서 읽어도 될 텐데……. 어떤 날은 지친 표정으로, 어떤 날은 조금 들뜬 표정으로 방에서 나왔다. 도대체 뭐지? 수상한 냄새가 스멀스멀 솟아났다. 치노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 나는 살그머니 구석방으로 들어갔다. 마치 탐정이 된 듯 매서운 눈초리로 방
작성일 2023-04-07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372상세보기 -
아동청소년문학 강벼리 - 「비밀상자」외 6편
비밀상자 강벼리 상자 속에 작은 기차를 넣었습니다 나는 작은 기차를 탔습니다 기차는 기억을 찾아 달렸습니다 비밀고개를 지나갈 때였습니다 연필 한 자루가 뚝 떨어졌습니다 오래전에 훔친 친구 연필이었습니다 부러져 있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돌아옵니다. 덜커덕 흔들리는 소리에 상자 하나가 뚝 떨어졌습니다 훔친 마음을 넣었습니다 나는 상자 속에서 훌쩍 뛰어내렸습니다 기차가 부러진 친구 연필처럼 멈추었습니다 인형의 집 여기가 너희 집이니? 금이 간 대리석 식탁과 축축한 캐노피 침대와 조잡한 장식의 상앗빛 화장대··· 네가 사는 곳이 우리 집보다 더 차가워서 좋아 우리 집은 밥상과 책상을 함께 써 침대는 행복한 꿈속에서나 만나지 거울 달린 작은 화장대가 갖고 싶어 나도 이제 식탁 위에 앉아 밥을 먹고 싶어 엄마 아빠가 없더라도 말이야 나도 이제 침대 위에서 잠들고 싶어 나쁜 꿈을 꾸더라도 말이야 나도 이제 화장대에 앉아 거울을 보고 싶어 네가 되는 연습을 계속 할 거야 웃지 않아도 울지 않아도 되잖아 여기에 슬그머니 내가 살아도 아무도 모를 거야 우리 집에 너를, 매일 밤 초대하고 싶어 빨간 구두를 신으면 거짓말 잘하는 인아가 빨간 구두를 신고 학교에 왔습니다 반짝반짝 빨갛게 빛났습니다 체육 시간에 인아는 운동화로 갈아 신었습니다 아무도 몰래 빨간 구두를 신어봤습니다 얼굴이 금세 빨간 구두처럼 새빨개졌습니다 인아가 보기 전에 얼른 제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머뭇머뭇 빨간 구두를 내려다봤습니다 낡은 운동화보다 빨간 구두를 계속 신고 싶습니다 갑자기 빨간 구두를 신은 발이 춤을 춥니다 두 다리가 나무줄기처럼 타오릅니다 숨기고 싶은 낡은 속옷도 빨간빛에 풍덩 빠진 것처럼 불타오릅니다 나는 거짓말쟁이 빨간 구두가 되었습니다 작은 컵 난 수영장을 갖고 다녀 작은 컵이지만 뜨거운 여름날, 파란색 물방울을 또르륵 따르면 작은 수영장이 돼 출렁출렁 넘치기 전에 얼른 다이빙을 해 봐! 동그란 수영장을 개복숭처럼 떠다니거나 물개 박수 헤엄치며 일곱 바퀴 돌다 보면 물방울이 조금씩 줄어들어 두 발이 바닥에 닿으면 개구리처럼 팔짝 뛰어야 해 안 그러면, 넌 작은 컵이 되는 거야 다람쥐 동생의 꿈 앞니가 뾰족한 내 동생은 도토리가 좋은가 봐 저녁 반찬 도토리묵만 오물오물 파먹고 있어 젓가락질도 잘 못 하면서 물컹물컹한 도토리묵이 뭐가 맛있다고··· 말랑말랑한 푸딩은 달달하기라도 하지 나는 떫은 도토리 맛을 목구멍에 쑤셔 넣었어 푸딩은 이 썩는다고 많이 못 먹지만 도토리묵을 잔뜩 먹으면 엄마가 찾아올지 모른다고··· 동생은 동그랗게 눈을 뜨며 처음 속마음을 말하는 거야 언젠가 상수리나무 위에 쪼르르 올라가게 되면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도토리를 따놓고 기다릴 거래 숲속에서 처음 본 동생 모습이 떠올랐어 얼마나 울고 다녔는지 퉁퉁 부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작성일 2023-08-09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338상세보기 -
아동청소년문학 이병승 - 쓸데없는 짓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중단편)] 쓸데없는 짓 이병승 어느 봄날이었다. 나와 김지현, 진구 이렇게 셋은 학교 앞 놀이터에 모여 햇볕을 쬐고 있었다. 우린 셋 다 학원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늘 시간이 많이 남았다. 우리 아빠는 가난한 시인인데 지금까지 학원을 보내 준 적이 한 번도 없다. 공부는 혼자서, 재미를 느끼며 해야 한다는 것이 아빠가 내세우는 그럴듯한 이유지만 실은 가난해서 학원비를 줄 돈이 없기 때문이다. 아빠가 몇 날 며칠 밤을 새워 가며 쓴 시가 잡지에 실리면 쥐꼬리만 한 원고료를 받는다. 돈을 주면 그래도 나은 편이다. 아예 원고료를 안 주는 곳도 있다. 가끔 김치나 쌀을 원고료로 받기도 하는데 그럴 때 아빠는 이제 김치 걱정은 덜었다며 히죽히죽 웃는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나는 학원에 다니지 않는다. 김지현이 학원에 다니지 않는 이유는 엄마가 작은 도서관 관장님이기 때문이다. 김지현 엄마는 책만 많이 읽으면 시험을 못 봐도 야단치지 않는다. 책을 많이 읽으면 공부는 언젠가 저절로 잘하게 된다고 믿는다. 김지현은 가끔 숙제하기가 귀찮으면 책을 본다. 그러면 숙제를 안 해도 뭐라 안 한다. 책을 진짜로 읽었는지 확인도 안 하니까 책 보는 시늉만 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김지현은 진짜로 책을 좋아해서 열심히 읽는 편이다. 김지현 엄마는 아이들은 좀 놀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이들을 공부로 괴롭히면 안 된다는 말도 한다. 그런 말을 하는 김지현 엄마가 좀 멋져 보인다. 아무튼 김지현도 그런 이유로 학원을 안 다닌다. 진구는 사실 ‘최강 수학 학원’에 다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부모님이 꼬박꼬박 학원비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구는 학원에 가는 날보다 빼먹는 날이 훨씬 더 많다. 부모님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진구는 그보다 더한 난리로 버틴다. 공부는 체질이 아니라고 우긴다. 진구는 나중에 유명한 래퍼가 될 거라고 한다. 평소에도 수첩을 갖고 다니면서 랩 가사를 쓴다. 가사의 내용은 대충 비슷하다. 맞춤법도 틀리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가사만 쓴다. 대부분은 아무리 읽어 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가사가 훨씬 더 많다. 오후 3시쯤이 되면 우리는 학교 근처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고 유치하게 놀이기구를 타거나 하진 않았다. 우린 등나무 벤치 그늘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꽃잎이 바람에 날리고 구름이 흘러가고 바닥엔 개미들이 기어 다녔다. “셋이라는 건 참 좋지 않아?” 나는 풀어진 운동화 끈을 다시 묶으며 말했다. “왜?” “3인조를 만들 수 있잖아.” “삼총사겠지.” 평소에 책을 많이 읽는 김지현이 안경알 속의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하긴, 3인조는 좀 그랬다. 어쩐지 3인조라는 말 뒤에는 강도나 조폭 같은 말이 붙어야 어울릴 것 같았다. 우리는 같은 유치원을 다녔고 초등학교에 올라와서도 몇 번이나 같은 반에서 만났다.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린 친했
작성일 2022-09-09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314상세보기 -
아동청소년문학 박그루 - 토리숲의 보물창고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장편)] 토리숲의 보물창고 박그루 1. 숲속의 꼬마, 카쥬 토리숲의 아침이 밝았어. 얼기설기 얽힌 나뭇가지 사이로 내린 햇살에 카쥬가 눈을 떴지. 카쥬는 온몸에 갈색 털이 난 킨카주야. 얼굴은 너구리같이 동그랗고 눈동자는 흑진주처럼 까맣지. 카쥬가 몸을 길게 뻗치며 기지개를 켰어. “으하암! 캣은 일어났을까?” 카쥬는 바나나 나무를 쪼르르 타고 올랐지. 몸통만큼이나 긴 꼬리를 가볍게 휘두르면서 말이야. 졸졸 흐르는 개울을 폴짝 건넌 카쥬는 곧장 바위 언덕으로 향했어. 바위 언덕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로 가득해. 돌 바위 언덕 중간쯤에 호리병 모양의 동굴이 있고, 그곳에 미어캣 가족들이 모여 살고 있어. 동굴 앞 큰 바위 위에 미어캣 히만이 망을 보고 있었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서 사방을 살피던 히만이 외쳤어. “카쥬?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냐?” “안녕하세요, 히만 아저씨. 캣은 일어났어요?” “글쎄. 한번 들어가 보렴.” 카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굴 속으로 폴짝 뛰어 들어갔어. 히만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어. “쯧쯧, 매일 몰려다니기나 하고…….” 캣은 새끼 미어캣들 사이에서 쿨쿨 자고 있어. 기분 좋은 꿈을 꾸는지 입까지 헤벌린 채 말이야. “캣! 캣!” “으응. 누구야?” 캣이 인상을 찌푸린 채 눈을 떴어. “이힛!” 카쥬가 캣의 코앞까지 얼굴을 쑥 들이밀었고 캣은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질렀어. “으악!” “헤헷. 늦잠꾸러기에게 딱 맞는 선물이지?” “너, 깜짝 놀랐잖아!” 캣이 앞발을 휘두르며 벌떡 일어났어. 고요하던 동굴이 시끌벅적해졌고 새끼 미어캣들도 깨어 버렸어. 카쥬는 작은 귀를 쫑긋거리며 밖으로 후다닥 달아났지. 캣도 그 뒤를 바짝 쫓았어. “아침부터 무슨 난리들이냐?” 히만이 나무랐지만 카쥬와 캣에게는 들리지 않았어. 둘은 쫓고 쫓기며 신나게 바위 언덕을 누볐지. 짱짱 숲의 아침이 활기차게 열렸어. 카쥬에게는 엄마 아빠가 없어. 카쥬가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 떠났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가끔 외롭기는 했지만 카쥬는 괜찮다고 생각했어. ‘처음부터 없었던 건 아니니까. 그냥 지금 없을 뿐인 거지.’ 하지만 주위 몇몇 동물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나 봐. “어쩜, 새끼를 버리고 그렇게 가 버렸데?” “그러니까 말이야. 킨카주들은 원래 자식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 토끼들도, 새들도 수군수군했어. “카쥬는 너무 천방지축이야. 혼자 커서 그런가?” 어른 킨카주들은 걱정하듯 말했어. 모두들 서로의 생각만 얘기하느라 정작 카쥬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했지. 카쥬는 커 갈수록 쑥덕대는 소리가 듣기 싫어졌어. 또래 친구들이 바라
작성일 2022-10-2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275상세보기 -
아동청소년문학 김다혜 - 토롱토롱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단편)] 토롱토롱 김다혜 하얀 입김이 눈 앞을 가린다. 길 위에 곤두선 살얼음이 버석거린다. 몸을 웅크려도 덜덜 부딪치는 이를 어쩔 수 없다. 싫어도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토롱토롱. 걸음을 멈추고 귓가에 맴도는 소리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시 토롱토롱. 반가운 마음이 솟구쳤다. 나는 멈추었던 다리를 다시 움직였다. 실은 토롱토롱 소리에 교신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시선을 멍하게 두고 정신을 코끝으로 집중시키면, 태양계 끝자락을 뒤로하고 외우주로 나아가는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의 모습이 보인다. 지구의 메시지가 담긴 골든 레코드를 장착한 보이저 1호는 오늘도 초속 17km로 별과 별 사이를 가로지른다. “보이저 1호, 전방에 부딪힐 만한 건 없어?” 토롱토롱. “깨끗하다고? 좋아. 분광기에는 이상 없지?” 토롱토롱. 홀로 우주를 탐험하는 보이저 1호가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을지 안 봐도 뻔했다. 쌍둥이 탐사선 보이저 2호와는 이미 오래전에 헤어졌고, 더 이상 2호와 교신이 어려워진 1호가 같은 주파수를 지닌 생명체를 찾다 158AU나 떨어진 내게 닿은 것이 틀림없었다. 살얼음을 피해 걷다 보니 어느새 아파트단지에 들어섰다. 동 출입문 앞에는 점퍼 주머니에 손을 꽂고 어깨를 움츠리고 서 있는 노르쉬 형이 보였다. “이제 와?” 작업복을 입지 않은 형의 모습은 언제 봐도 낯설었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형은 아빠 공장에서 일했었다. 공장에는 형 말고도 다른 외국인 아저씨들이 많이 있었다. 노르쉬 형은 그중에서도 한국말을 유독 잘해 우리 가족과 가장 가깝게 지냈다. “찬영아. 사장님 어디 있어? 집에 안 계시던데.” “몰라. 아빠가 찾아오지 말랬잖아.” “사장님 꼭 만나야 하는데 연락을 안 받으셔. 오늘도 돈 못 받으면 나 내일부터 길에서 자야 해.” 형은 정말로 지친 듯 보였다. 바깥에 오래 있었는지 까맣고 기다란 속눈썹에는 작은 얼음들이 맺혀 있었다. “나도 어디 있는지 몰라. 정 그러면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아빠 보면 나 마주쳤다는 말은 하지 말고. 안 그러면 아빠 화낸단 말이야. 저번에도…….” 나는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노르쉬 형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핸드폰 있지? 사장님한테 전화해 보자, 지금.” “형이랑 같이 있는 거 들키면 큰일 나는데…….” “괜찮아. 내가 사장님한테 말할게.” 나는 하는 수 없이 노르쉬 형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형은 아빠에게 전화를 걸더니 먼 곳을 바라보며 한참이나 통화 대기음을 들었다. 나는 마치 잘못한 사람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머리 위로 노르쉬 형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분을 삭이는 듯한 콧김 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토롱토롱. 내 마음을 위로하듯
작성일 2023-03-3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243상세보기 -
아동청소년문학 정광덕 - 「화장실 화분」 외 6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시] 화장실 화분 정광덕 오늘 학교에 갔더니 화장실 세면대 한쪽에 화분이 놓여 있더라. 매일매일 보면서 칭찬해 주라는 메모와 함께. 칭찬을 해 주는 건 좋은데, 화분은 어떨지 몰라? 교실 창가도 아니고 냄새나는 화장실이라니. 선생님께 말씀드려야 할까. 화분의 입장도 좀 생각해 달라고? 어르신 유치원에 처음 가던 날 외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외할머니는 우리랑 함께 산다. 외할머니가 어르신 유치원에 처음 가던 날, 외할머니를 태우고 아파트를 빠져나가는 차를 보며 엄마가 눈물을 훔쳤다. ―엄마 왜 울어? ―글쎄, 그냥 눈물이 나네. ―내가 처음 유치원에 갔을 때도 그랬어? ―그랬지. 오늘이 꼭 그날 같네. 나는 엄마를 꼭 안아 주었다. 엄마가 외할머니를 안아 주듯 그렇게. 때깔 고운 돼지 먹이만 찾는다고 뭐라 하지 마세요. 저도 다 생각이 있겠죠. 이런 속담 모르세요?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잖아요. 만화책이 어때서? 학교에서 모둠별 토론을 했어. 우리 모둠 주제는 ‘독서 시간에 만화책 읽어도 좋은가?’였는데 준호가 만화책은 안 된다고 했어. 글밥이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나. 점점 반대편으로 의견이 모이자 평소에 조용하던 민우가 나섰어. 독서 시간에 만화책을 읽는 게 어때서? 학습에 도움이 되는 학습만화도 있고 책 읽기 싫어하는 친구들에겐 디딤돌 역할도 할 수 있잖아! 얼굴까지 빨개지면서 열을 올렸어. 민우가 이렇게 말 잘하는 아이였나? 다들 깜짝 놀랐지. 알고 봤더니, 민우 아빠가 웹툰 작가래.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였어. 민우가 열 올릴 만했지, 뭐. 삼일절 새싹이 몰려나와 초록 깃발 흔드는 건 그날의 외침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 빼앗긴 봄을 찾으려 흔들던 태극기 물결. 반가운 손님 나비는 반가운 손님인가 봐. 왔다 하면, 눌 러 주 세 요 버튼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드르륵― 자동으로 꽃문이 열려. 꽃이 먼저 알고 문 앞에서 활짝― 열어 주나 봐! 목련꽃이 피면 마을 회관 앞마당에 목련꽃이 피었습니다. 작년 봄에도 재작년 봄에도 그랬던 것처럼 목련나무는 이른 봄이면 잎보다 먼저 꽃봉오리를 만들고 처음 하는 일인 양 조심스럽게 여섯 장의 꽃잎을 살살 풀어 놓습니다. 목련꽃이 피면, 마을 회관 앞을 무심히 지나가던 사람들도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예쁘다!” “예쁘다!” 하면서 눈길을 줍니다. 처음 보는 것처럼 새삼스럽게. 작가소개 / 정광덕 2012년 《아동문예문학상》 동시 당선으로 등단. 동시집 『맑은 날』을 펴냈으며, 2021년 올해의 좋은 동시집으로 선정.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작성일 2022-10-28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209상세보기 -
아동청소년문학 신재섭 - 「그냥」외 7편
그냥 신재섭 글자 냥이 날 찾아왔어 백 번쯤 돌려보냈는데 다시 왔어 공책에 백 개의 냥이 생겼어 냥 냥 냥 냥냥냥냥 냥냥냥냥냥냥 냥 냥냥냥 냥 냥냥 고양이 아닌데 고양이를 닮았어 나를 불러 서로서로 냐응냐응 냥냥 밥 먹었냥? 아프냥? 우냥? 자꾸 물어 귀가 시끄러워 냥이를 구겨서 구석에 던져 버렸어 냥이들이 숨을 들이쉬나 봐 구겨진 입 찌그러진 수염을 펴나 봐 꼬리를 세우나 봐 냥이들이 점점 부풀어 올랐어 고르릉 고르릉 거려 냥이가 내 곁에 와 주었어 밤 늦도록 냥이와 함께했어 비가 내리면 빗방울은 땅에 떨어지자마자 눕는다 납작 누워 흐른다 흘러가며 뭉친다 저도 모르게 뭉치며 간다 빗방울은 누워서 자란다 민들레꽃 강화도 내가면 내가초등학교 2학년 아이 셋이 그을린 얼굴로 나타났다 책방 문 열어젖히고 어른들 틈에 민들레처럼 앉았다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또박또박 시를 읽었다 고려산 동네책방에 연태 지훈 단호 민들레꽃이 피었다 내가 꽃 반지꽃 장수꽃 씨름꽃 오랑캐꽃 모두 제비꽃 이름이야 틈새꽃 개미사탕꽃 옹기종기꽃 내가 지은 제비꽃 이름이야 내가 꽃이면 밤방귀꽃 빙그레꽃 달팽이자리꽃 나를 닮은 내 꽃 내가 꽃 별명으로 말하기 배춧잎이 운동장에서 울어요 배춧잎이 강아지에게 딸기우유를 줬는데 양파링에게 대신 먹으라고 했대요 양파링은 자기가 좋아하는 수영장에게 주었고요 수영장은 양파링이 별로라며 마침 지나가는 배춧잎에게 줬대요 딸기우유가 강아지에게 가다가 수영장에 양파링이 빠져 뱅글뱅글 돌아 배춧잎 손에 돌아간 거예요 운동장에서 배춧잎이 흐엉흐엉 울어요 새의 눈 아빠가 새를 그리기 시작했다 깃털이 촘촘해지자 새는 점점 또렷해졌다 다 그리면 나에게 날려 보내고 날려 보내고 보내고··· 어느 날 새의 눈이 반짝였다 날아온 새들이 내 책상에 둥지를 틀었다 아빠와 눈을 맞추었다 아빠를 바싹 끌어당기었다 울면 자두빙수 마음에 안 들면 울어 울면 네 별명 울보 울보가 싫으니? 또 울면 돼 그럼 넌 징징이 또 또 울면 울음왕자가 될 거야 울음왕자가 싫은 거니? 울어 울어 무엇이든 마음에 안 들거든 눈물이 쏟아져 강물처럼 흐르면 배를 띄워서 노를 젓는 거야 먼바다까지 가 보는 거지 그 사이 눈물이 다 빠져나와 종이인형 될지 모르지만 그럼 어때 바람에 마음껏 나부끼면 되지 넌 웃을 때가 정말 멋지지만 말이야 나랑 자두빙수 만들래? 서서히 눈에 고인 물은 마르고 입에 침이 고일 거야
작성일 2023-04-28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162상세보기 -
아동청소년문학 유희윤 - 「여왕벌을 에워싼 벌 떼」 외 6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시] 여왕벌을 에워싼 벌 떼 유희윤 노란 꽃 울타리 넘나들며 꿀벌들이 수를 놓았다. 여름 내내 땀방울로 수를 놓아 마침내 완성했다. 둥그런 수틀 가득 촘촘 빽빽 실팍진 해바라기씨앗들 『여왕벌을 에워싼 벌 떼』 작품 이름은 어느 시인이 지었다. 때에 따라 먹는 배가 될까? 타는 배가 될까? 가슴 밑에 배가 될까? (ㅂ)이 (ㅐ)를 만나면 의논부터 하지. 먹는 배도 좋다. 타는 배도 좋다. 가슴 밑에 배는 무엇보다 중요해. 의논 끝에 결론을 내리지. 우리 때에 따라 변신하자. 누구를 만나게 될까? (ㅇ)은 두근두근 가슴이 뛴대. (고)를 만나면 공 (코)를 만나면 콩 (바)를 만나면 방이 되고 (조)를 만나면 종 (가)를 만나면 강이 되어 여행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어. 탁구 티나 탕수육 내가 좋아하는 운동은 탁구 내가 좋아하는 가수는 티나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탕수육 어라, 나처럼 서로들 좋아하나? 셋 다 (ㅌ) 으로 시작하네. 우리말 쥐뿔! 우리말은 없는 뿔도 만든다. 쥐방울! 쓸데없는 방울도 예쁘게 만든다. 쥐방울만한 녀석! 거짓말도 귀엽게 하고 쥐똥나무! 쥐방울덩굴! 쥐오줌풀! 나무 이름이나 풀이름도 재미지게 짓는다. 똥 밟은 운동화 -어유, 잘 보고 다니지이. - 다 닳았는데 이참에 버려야지 뭐. - 당신 발 대신 똥 밟은 신발인데 버려도 어떻게 그냥 버려. 아줌마가 아저씨 운동화 들고 마당 수돗가로 갑니다. 양 한 마리 포근포근 양 한 마리 쏘옥〜 바늘귀를 빠져나와 뜨개질을 하네. 포근포근 아기장갑 포근포근 아기모자 포근포근 아기목도리 아함~ 졸려 뜨개질 끝내고 아기 품에 잠이 드네. 작가소개 / 유희윤 2003년《부산일보》신춘문예 동시「사다리」당선했다. 동시집『참 엄마도 참』, 『맛있는 말』, 『난 방귀벌레, 난 좀벌레』, 『잎이 하나 더 있는 아이』, 『도마뱀 사냥 나가신다』, 『바위굴 속에서 쿨쿨』등을 지었으며 방정환문학상, 비룡소 1회 동시문학상 등을 받았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작성일 2022-10-28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161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