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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김효숙 - 헤어짐을 짓지 않기로헤어짐을 짓지 않기로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 『소년이 온다』1) 김효숙 1. 의사(儗似)증언자가 흑역사를 말하는 방식 : 『작별하지 않는다』 획일화한 이성을 강고한 정신으로 등극시킨 헤겔주의 역사관을 숭앙하는 체제에서는 불순분자를 양산한다. 한강은 『작별하지 않는다』(이하 『작별』, 2021) · 『소년이 온다』(이하 『소년』, 2014)에 여전히 말해야 할 지난 시대의 흑역사를 담았다. 여기서 시간은, 제거와 절멸의 기획에 성공을 거두려 한 때로 돌려져 있다. 단선적으로 시대를 평정하려 하고, 거짓된 평화로 획일화를 달성하려 한 이성의 시대가 그때다. 이성 정치 역사관의 주체는 기억을 단절시켜 그것을 과거로 되돌리는 일을 엄폐한다. 생존자조차 말의 죽음을 내면화해야 하는 시대의 폭압 주체는 불순분자 생산에 능력을 투입한다. 그러나 기억마저 봉인되는 형국에도 불순분자 절멸의 기획은 결코 일방 종료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자는 기어이 행불자의 암흑 시간으로 들어간다. 폭압 주체가 그간 기억을 조작하고 은폐하면서 거짓 평화를 연장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한강은 두 편의 작품에서 어느 날 홀연 사라져 비어버린 이들의 자리를 찾아 나간다. 지난 시대와 소통하려는 자는 『소년』에서 형상화한 증언 방식처럼 직접 발로 뛰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인터뷰·취재를 하거나, 논문 쓰기·연극 공연으로 진실을 발설하거나, 소설 쓰기로 접근한다. 그렇다 해서 문학이 증언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한강은 『소년』에 이어 『작별』에서도 문학의 자리에서 소통의 계기를 열어나가는 방법을 고안한다. 수직적 시간의 지층에서 작가가 캐내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말하려 했을 이들의 목소리다. 증언이 불가능한 것을 발설하려 할 때만 당사자는 증언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런 차원에서 모든 증언은 결국에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일이다.2) 그것을 말하는 문학은 다음 문장에서처럼 꿈 언어로 되살아난다. 그 꿈을 꾼 것은 2014년 여름, 내가 그 도시의 학살에 대한 책을 낸 지 두 달 가까이 지났을 때였다(11쪽). 악몽 장면으로 시작하는 『작별』에서 작중 작가(경하)는 한강의 전작인 『소년』과 자의식이 연결되어 있다. 두 작품의 화술 주체가 작가임을 알리면서, 무의식의 잔존물인 악몽에 “그 도시의 학살”과 연관된 군인의 얼굴, 예비군복, 저격수 같은 실제들이 조각 장면으로 등장한다. 그 도시의 학살 사태가 현대사에서의 5월을 환기하는 동시에 『소년』의 문학적 실행을 지칭한다면, 근현대사의 4월은 『작별』에서 작중 작가가 수행할 과업을 함축한다. 근과거의 5월을 재현했던 작가에게 잦은 악몽의 형태로 개입하는, 4월에 대한 언표 불능의 부채감이 그것이다. 불가능한 말하기로서의 증언은 말하기의 유보로 증언의 불능을 그간에 증명해온 셈이다. 그래서이겠지만 한강은 이 소설에서 저러한 부채감이 말할 필요를 촉발하고, 산 자의 생명 기능 때문에 악몽을 꾸고, 그러한 현몽으로 역사의 시간에 잇
작성일 2022-09-16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황유지 - 비주류 생존기― 여성의 호명과 자리들비주류 생존기 ― 여성의 호명과 자리들 황유지 들어가며 : 너의 이름은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에게 ‘거리 두기’를 요청한다. 침방울이 튀지 않을 거리 감각은 생존법인 동시에 프리즘으로 작용하며 그간의 일상을 한 발짝 떨어져 보게 한다. 이 상처적 기회는 반드시 그래야만 했던 많은 것들이 실은 편의주의와 관습의 산물임을 적나라하게 들추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변할 수 없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의 경계는 해체되고 있다. 경계는, 비자발적 기회를 빌려 기성의 공고함을 흔들고 억압된 것들의 틈입을 허락하며 제 몸을 지워나간다. 욕망들의 이유 있는 항변이 저마다 기입될 때 우리 사회는 재배치의 가능성을 향해 열리기도 한다. 재난 이후의 삶은 지속되는 현실을 직시함으로써만이 가능하다. 숱한 이름들은 남성의 것으로, 여성에게 지워진 경계는 그들을 정확한 이름 없이 비주류로 포괄하곤 했다. 가령, 남성 이미지가 우세한 ‘청년’은 절반이 다른 절반을 지우는 방식으로 전체를 대표해왔다. 많은 이름들이 남성을 과잉 대표하고 그럼으로써 다시 그 단어에 남성성을 각인하는 식의 패러다임을 만들어온 것이다. 해서 우리는 뒤늦게 ‘여류’라든가 ‘여성’과 같은 수식언을 덧대는 식으로 불완전한 단어를 수습해야 했다. 우리는 부쩍 많아진 여성 서사들을 통해 다양한 여성의 모습과 마주한다. 숱한 여성 주인공의 등장은 사회 구성 주체로서 여성의 정체성 찾기에 대한 요청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찾기’가 함축하듯, 서사 속 주인공들이 우리 삶에서도 반드시 주인공은 아니라서, 그들의 ‘자리’는 아직 제대로 없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제출되는 여성의 호명과 그 자리들은 계급화되고 위계화된 형태로 우리 사회에 숨어 있던 여성의 일과 삶을 가시화하며 그들의 ‘자리 없음’을 표명한다. 지난 세대의 억압적 형상들과 권력의 지형도, 성차별적 인습의 내밀화 등이 응집된 사회적 맥락으로서 여성의 자리는 이제 호출되기 시작한다. “명명은 해방의 첫 단계”라는 말을 빌려 말하자면, 이름을 만들고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사회적 확인이라는 인식 범주로의 진입은 시작되고 인식은 공론화의 가능성을 얻는다. 그것은 은폐된 것들을 드러낼 기회를 갖는 일이다.1) 우리는 지금까지 여성들을 어떻게 불러왔던가? 이들을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일은 주변부로 비켜나 있던 여성과 여성의 일, 그 자리에 대한 사유와 재배치 작업의 시작일 수 있다. 국가사회의 위기는 여성을 때로 ‘아내’로, 때로 ‘노동자’로, 때로 ‘아줌마’로 호출하며 그들의 노동력을 사용해왔다. 산업화 시기에 단순 노동, 서비스 노동을 담당하며 ‘여공’이나 ‘식모’로 불리던 여성 청년2) 노동자들은 실질적으로 가족 부양의 책임자였지만 어디까지나 ‘장차 큰일을
작성일 2022-09-09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하혁진 - 포스트–메모리, 빚 없는 세대의 빛 : 박솔뫼, 최은영, 이미상의 소설을 중심으로포스트–메모리, 빚 없는 세대의 빛 : 박솔뫼, 최은영, 이미상의 소설을 중심으로 하혁진 ‘포스트-메모리(post-memory)’와 트라우마라는 유산 “내 부모님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다”(21쪽)라는 진솔한 고백으로 시작하는 엘리자베스 로즈너의 논픽션 『생존자 카페 : 트라우마의 유산, 그리고 기억의 미로』(서정아 옮김, 글항아리, 2021)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2세’가 일생 동안 겪고 느끼게 되는 기억과 트라우마의 면면이 페이지마다 빼곡하고 핍진하게 적혀 있다. 로즈너는 유년 시절의 기억이 “흩어진 퍼즐 조각처럼 뒤죽박죽”이라고 말하며, 그중에서도 특히 “부모님의 전쟁 경험담을 처음으로 들은 시점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부모님이 겪은 사건들이 “내가 태어난 순간, 아니 어쩌면 태어나기도 전부터 내 몸 구석구석 파편처럼 박혀 있는 기분”이라고 술회하는 로즈너의 고백은, 홀로코스트 생존자 2세들이 공유하고 있는 ‘유전성 트라우마’라는 “유별한 정서”(22쪽)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해 볼 지점들을 남긴다. 그들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평생 동안 슬픔, 불안, 분노를 비롯한 수많은 감정들을 느끼게 된다. “우리에게 속한 듯 속하지 않은 경험의 망령들이 주위를 맴돌고”(23쪽) 있다고 느끼는 그들은, 경험하지 않은 일을 잊지 못하는 모순을 평생에 걸쳐 체험하게 된다. 홀로코스트와 같이 끔찍한 사건을 경험한 세대의 트라우마가 다음 세대에 간접적인 방식으로 전승되는 현상은 다양한 국가, 집단, 사건에 걸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다. 로즈너 역시 “베트남 난민의 자손들에게서, 캄보디아 킬링필드 생존자의 자녀에게서,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의 수용소에서 격리되었거나 원자폭탄 공격을 받고도 살아남은 일본인의 자손들에게서”(23쪽) 그러한 교차점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이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현실 속에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사건의 전말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고 했을 때, 후세대가 그 사건을 기억할 방법과 방식은 무엇이냐는 점이다. 요컨대 ‘포스트-메모리(Post-memory)’ 세대의 기억은 당사자 세대가 죽어가고 그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사라져 가는 “시간의 가장자리”(28쪽)에 놓여 있다. 그들은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나의 부모가 했거나 하지 않은 어떤 일”(42쪽)로 인해 기억의 의무를 지게 된다. ‘포스트-메모리(Post-memory)’는 미국의 비교문학자 마리안느 허쉬가 창시한 개념으로, 허쉬는 1990년대 초에 발표한 논문에서 미국의 만
작성일 2024-11-01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황유지 - 당신을 위한 서바이벌 키트 ― 윤고은론당신을 위한 서바이벌 키트 ― 윤고은론1) 황유지 1. 사는 게 모험 한 사회의 거대 서사를 함께 체험하고 그로 인한 공통감각을 형성한 청년 집단을 ‘세대’로 정의한다면, 한국 근현대사에서 세대는 굵직하게, 전쟁 세대와 민주화 세대 그리고 그 민주화의 주축이던 386 집권 이후 세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그 후로는 문화 향유의 습속에 따라 X 세대, 세기의 변화에 따라 밀레니얼, 그로부터 뉴노멀에 대한 새로운 감각세포를 지닌 최근의 세대를 아우르는 MZ 세대가 있다. MZ라는 세대 용어가 고안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곤두박질치는 사회적 조건은 88만 원, N포 등의 세대를 생산해냈는데, 1997년의 경험은 이 세대들의 중심축에 있다. 주지하듯, 국가부도 이후 사회 체제는 전면 개편되었다. 세대는 카를 만하임으로부터 출발하면서도 “변동의 주체라기보다는 사회변화에 따라 구성되는 주체 위치들의 집합”2)으로 존재하기도 하는 것이어서, 어떤 세대들은 명칭만 달리하며 쌓여간다. 말하자면 많은 밀레니얼들은 88만 원 세대이자 N포 세대이기도 하다. 3포는 4포를 낳고 4포는 숫자를 거듭하더니 ‘N’이란 자연수의 대명사로 그 누적을 표시한다. 이제 사회적 통과의례를 수행하지 못한 청년기는 지연된다. 우리가 한 시대를 ‘IMF 시기’ 혹은 ‘IMF 시대’로 회자하는 것은 국제기구로 대변되는 체제가 어떻게 한 국가 집단의 특정 시절을 지배하는지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IMF는 한국 사회에 파국적 자본주의의 시작을 알리며 국가나 체제의 운명이 개인의 운명과 결별함을 목도케 하였다. 어떤 시기든 ‘세대’란 위기의식의 산물이어서 이를 지칭하는 수식어는 해당 세대의 그림자이며 상처이기도 한 것이다. 젊은 작가들이 저마다의 기지로 포스트모던을 이야기하거나 혹은 실패할 때 그리고 우리의 많은 이야기들이 SF를 향해 건너갈 때도 여전히 그것은 청년들의 문제를 담고 있다. 박민규나 김애란, 황정은 또 장강명, 조남주 같은 작가들이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문학이 시간의 궤적에 따라 한 땀씩 순차적으로 수놓일 필요도 없지만, 어느 쪽에서도 아직 어떤 세대들은 충분히 말해지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세대의 지칭어는 자못 통계적이고 명명에는 추상화의 힘이 있어 마치 사회가 비정규직을 소모하고 새로운 인력으로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과 같이, 청년은 그다음 세대의 청년으로 대체되는 방식으로 대량 생산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청년 세대가 사회와 역사 속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지 규정하는 일이 세대론의 핵심 문제”3)라고 할 때, 윤고은의 글들은 거대 서사라는 공통의 체험 뒤에 압사당하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의 이야기는 그런 시절의 허리에 IMF라는 둔중한 몽둥이를 맞은 한 세대의 생존 서사이다. 이는 살아남기를 넘어선, 우리 사회의 맥락이자 증거로 제출되며 더욱 세계와 결별하는 청년들의
작성일 2022-09-09 댓글수 1상세보기 -
비평 김효숙 - 진위를 전복하는 평행우주의 사건들진위를 전복하는 평행우주의 사건들 ―손보미의 소설1) 김효숙 2000년대 우리 문단에는 문화 현상을 서사의 바탕으로 삼는 작가들이 등장했다. 1980년대생으로, 문화 소비 시대의 주체들을 초점화하면서 이전의 주요 경향과 일군으로 묶이지 않으려 했다. 이들의 창안물을 탈(脫)구조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벗어난다는 뜻의 ‘탈’은 기존의 ‘있음’을 전제해야 하고, 있음의 이유인 경향성도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1980년대에 태어나 20대 후반에 등단한 작가에게는 이전의 경향으로부터 벗어났다는 ‘탈’ 개념이 아닌, 2000년대 사회문화 현상을 안고 돌출한 독자적인 성향으로 파악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 이들 작품에는 탈리얼리즘이나 탈서사성 등을 의식하지 않는 창안물이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당위성이 실려 있다. 1980년생 손보미가 등단작 「담요」(2009)를 시작으로 2010년대까지 약 10년간 발표한 작품들이 여기에 걸맞다. 손보미는 그 모든 선형의 역사성을 리얼리즘 문학으로 체화할 만한 사회적 조건 아래 청소년기를 보내지도 글을 쓰지도 않은 세대다. 버려야 할 것, 빠져나와야 할 것, 청산해야 할 것들은 1990년대 우리 사회의 대중들에게 ‘매몰되어선 안 될’ 구습이었다. 되돌아가선 안 될 시대라는 인식에는 진보거나 퇴보인 양대의 흐름만이 존재했다. 이러한 정황에 후퇴 또는 전진이라는 개념 없이 당대의 사회문화 현상을 담아낸 작품들이, 그것도 아주 낯선 모습으로 2000년대 후반에 우리에게 도착했다. 경향을 놓고 작품을 운위하거나 판별할 수 없고, 오직 작가의 개성과 독특한 상상으로 개체성을 확보한 작품들이다. 손보미가 등단한 2009년의 문단 상황을 보면 200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특히 시 장르에서 온라인 게임과 접속한 상상력이 우세했다. 분열하는 아바타는 살아남아 무한 증식하고, 합체물들은 영원한 삶에 도취하며, 고독한 전사는 한 점 먼지 같은 우주의 고아가 되거나 패망하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이렇게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가상 공간은 그 무렵 대중에게 온라인 기반의 초연결 환경에서 현실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청소년은 물론 기성세대의 여가에까지 틈입한 온라인 게임은 대중의 놀이 공간을 급격하게 가상 세계로 전환케 했다. 뿐만 아니라 대중 가수의 장내 공연은 물론 야외 콘서트까지, 즉 당대의 대중문화를 일상 속에서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여겨지는 이러한 변화에는 이데올로기의 패망, 유일한 진리로 등극한 세계자본의 유동성, 온라인 네트워크의 글로벌 환경 등이 당대 일상의 뚜렷한 양태라는 점이 내재한다. 따라서 2000년대 현상을 문화 코드로 압축할 때 이전 시대의 이념이나 양식들로부터의 해방은 혈투 없이도 가능한, 인간이 가장 바라는 자유로운 삶의 양식과 연결된다. 손보미는, 등단작은 물론 그 후 10년간 발표한 작품에서도 2010년대 현상을 자기식 어법으로 형상화한다. 최근에 발간한 『작은 동네』에서는 역사 상상력으로 회귀하는데, 선형
작성일 2022-09-16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고광식 - 시와 비평의 관계에 대한 질문-2020년대 시의 좌표계
시와 비평의 관계에 대한 질문 –2020년대 시의 좌표계 고광식 1. 2020년대 시와 비평의 관계 2020년대 한국 시와 비평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하나는 ‘2000년 이후 자폐증적인 표정을 짓는 전위시를 2020년대도 이론적 근거로 확장해 갈 것인가?’라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다양성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젊은 시인들의 과도한 실험 정신에 본질적 의문의 칼을 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시의 본질적 속성은 새로운 물결을 타는 데 있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시란 창작이기 때문에 발상 단계부터 전통의 기시감을 뜯어낼 필요가 있다. 전통적 서정시는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 때 그 위에 교훈과 의미를 얻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현대 시는 무교훈적 이미지를 만든다. 현대 시를 교훈과 의미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젊은 시인들은 전통과 단절해야 했다. 이제 시인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을 들여다본다. 시 쓰기는 우리가 모르는 우주의 영역에 발을 딛는 것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전위시를 쓰는 시인들은 선과 색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추상화를 닮으려 노력한다. 이러한 자의식에서 출발한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시 쓰기는 2010년대를 넘어 2020년대까지 시단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2020년대의 시는 더욱더 실험적이다. 시인들은 전통적 서정시의 문법보다는 새로운 서정시의 문법을 만들어내는 데 여념이 없다. 시는 2010년대보다 더 길어지고 실험의 영역은 넓어졌다. 심지어 전통적 서정시가 강세였던 신춘문예에서도 2020년부터 새로운 문법으로 창작된 시들이 자주 당선된다. 시의 경향이 분화되고 파편화되는데 비평은 본질적 분석을 하지 않는 추세이다. 당혹스러운 작품에 대해선 이론의 틀에 맞추어 재단한다. 시는 창조적 예술 작품이다. 진리와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시는 인문학의 맨 앞에 서서 독자와 교류한다. 시인은 매혹적인 감각을 재현함으로써 한층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위적인 시로 인해 시와 독자와의 교류가 끊긴 지 오래다. 2000년 이후 미래파라 불리는 시가 그렇다. 이런 전위성은 더욱더 진화를 거듭해가고 있다. 비평가들은 한국 시단에 쌓아지는 작품들을 독해하기에 바쁘다. 지금 여기의 비평가들은 “일급의 비평은 다루고 있는 작품만큼이나 영감에 따라 창조된 독특한 개성의 소산일 수 있다.”1)는 사실을 망각한 채 전위시에 대해 이론으로 대응한다. 비평은 해당 작품에 대한 해석에 머물러선 안 된다. 비평가는 심미안을 가지고 견자의 눈으로 비평 자체가 개성적인 창작이게 만들어야 한다. 단순하게 작품을 해석하고 미학적 판단에만 머문다면 비평은 쇠퇴할 것이다. 시인은 시적 토피아 위에서 새로운 현상을 찾는 존재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절대적 새로움을 추구하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온갖 기시감 넘치는 정보들로 가득 차 있다. 결국 이것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lsqu
작성일 2023-11-08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고광식 - 원초적 공간을 걷는 감각적 주체-안희연의 시
원초적 공간을 걷는 감각적 주체 –안희연의 시* 고광식 1. 감각이 붙잡는 것들 2020년대의 젊은 시인들은 시적 화자를 통해 세계와의 갈등을 더욱더 강하게 일으키고 있다. 세상과의 불화는 커졌고, 파편화의 양상은 다양해졌다. 해체적 사유는 낯선 길을 만들며 끊임없이 지속된다. 이처럼 새로운 문법의 시들은 시의 영역을 넓히는 데 열중이다. 이는 레비나스가 지적한 것처럼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에 대한 권태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들 또한 이러한 권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다. 전통적 서정성에 대한 권태는 탈서정으로 가는 기제를 만든다. 새로운 서정이란 새로운 환경과 특별한 형식을 요구한다. 낯선 발화 지점을 찾아가려면 낯선 접점이 필요하다. 시인들은 전통적 서정시를 연소시켜 버리며 대체적 개념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발화의 순간은 이제 새로운 문법으로 수렴된다. 안희연에게 시 쓰기란 원초적 공간을 만드는 작업이다. 시인은 자신이 확보한 공간에서 낯선 주체가 되어 감각적 발화자로 등장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감성의 분할’에서 “어떤 공통적인 것의 존재 그리고 그 안에 각각의 몫들과 자리들을 규정하는 경계 설정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감각적 확실성의 체계를 나는 감성의 분할이라고 부른다.”고 갈파한 적이 있다. 이러한 확실성의 체계를 인식한 시인들은 세계와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시인이 바라보는 주체는 파편화되어 공간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안희연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 분할된 자기 몫을 원초적 공간에서 찾는다. 오로지 감각적 주체가 되는 것만이 사물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길이라 믿는다. 따라서 문학에 대한 욕구로 초현실적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배타적 몫을 챙기는 데 열중한다. 안희연에게 시 쓰기는 현상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일이다. 시인은 현실에서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을 원초적 열정으로 재현한다.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었다 거기 한 사람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한 페이지도 포기할 수 없어서 밤마다 책장을 펼쳐 버려진 행성으로 갔다 나에게 두 개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처음엔 몰래 훔쳐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 너는 정말 슬픈 사람이구나 언덕을 함께 오르는 마음으로 그러다 불탄 나무 아래서 깜빡 낮잠을 자고 물웅덩이에 갇힌 사람과 대화도 나누고 시름시름 눈물을 떨구는 가을 새들의 울음소리를 이해하게 되고 ―「역광의 세계」 부분 역광의 세계는 금지된 것들로 가득하다. 흑과 백의 분명한 대비 때문에 버려져야 할 것들이 많다. 시적 화자는 어둠 속에 버려진 것들을 떠올린다. 누군가는 검은색으로 칠해진 누추로 시달린다. 희망의 초월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역광의 세계에 있을 때이다. 그렇기에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 수 있다. 버려진 것에 생생한 숨결을
작성일 2023-11-08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하혁진 - ‘모르는 여성’에서 ‘아는 여성’으로 : 강화길론‘모르는 여성’에서 ‘아는 여성’으로 : 강화길론 하혁진 소설로 충분하다 2020년 여름, 강화길의 두 번째 소설집이 우리 곁에 도착했다. 화이트 호스(White Horse), 백마(白馬)를 타고. 자신이 공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소설 속 그녀들은 더 이상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지 않는다. 때마침 동명의 노래인 Taylor Swift의 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I`m not princess, this ain`t fairy tale. (···…) Now it`s too late for you and your white horse to come around.” 강화길은 표제작인 「화이트 호스」에서 스위프트의 가사를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나는 공주가 아니고, 이건 동화도 아니란다. 나는 너의 화이트 호스가 필요 없단다.” 이렇듯 변화를 경험한 그녀들은 왕자 대신 백마 위에 올라타 고삐를 쥐고 속도와 방향을 직접 ‘선택’한다. 요컨대 그녀들은 선택이라는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행위 주체라는 지위를 회복한다. 누군가를 기다리지도, 무엇인가를 기대하지도 않으면서 그녀들은 동화 바깥의 현실을 ‘살아간다’. 두 번째 소설집에서 수록된 소설만큼이나 눈여겨볼 만한 것은 작가의 말이다. 강화길은 마지막 두 문장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다시는 작가의 말을 이렇게 길게 쓰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내게는 소설로 충분하다.”(작가의 말 297쪽). 이 의미심장한 선언 뒤에 감춰진 진의는 무엇일까. 두 페이지 앞으로 가 보자. “당시 나는 이름을 걸고 일을 하는 것에, 그러니까 나를 향한 일부 비평에 대해 상당한 피로와 염증을 느꼈다. 신인 작가 입장에서 꽤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글도 있었고, 그간 내가 여성으로서 받아 온 어떤 평판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글도 있었다,”(작가의 말 293쪽). 이쯤 되면 ‘소설로 충분하다.’는 비장한 선언 뒤에는 모른 척 지나치기 어려운, 혹은 모른 채 지나쳐서는 안 되는, 숨겨진 내막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도대체 어떤 평판들이 그녀로 하여금 ‘작가’로서의 ‘나’와 ‘여성’으로서의 ‘나’가 겹치는 경험을 하게 한 것일까. 다른 인터뷰도 함께 살펴보자. 실제로 이 소설을 쓸 때 이런저런 비평에 시달릴 때라서 여러 가지 감정이 혼재된 상태였어요. 평가를 받는 일에 계속 시달리는 게 부당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비평적 언어와 내가 가진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제가 쓴 소설을 보호하고 싶기도 했고요. 개인적인 경험에서 쓰기 시작한 소설이지만 쓰는 과정에 깨달은 건, 저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어요. 여성 작가들이 여성 문제를
작성일 2024-11-05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기억하기를 통한 애도와 지극한 사랑의 실천
기억하기를 통한 애도와 지극한 사랑의 실천 선주원 1) 기억하기를 통한 슬픔과 애도 우리의 삶에서 슬픔에 관한 이야기는 쉽게 주고받을 수 없는 것이다. 슬픔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그것을 듣는 사람 모두 슬픔이라는 고통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드러내서도 안 되는 문화 속에 살아왔기 때문이다. 슬픔에 젖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일부러 괜찮은 척, 센 척하면서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슬픔은 우리가 원치 않아도 언제나 우리를 적시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삶의 곳곳에서 배어난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에서 기원하는 슬픔은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동반하면서, 우리를 홀로 섬에 있게 한다. 홀로 섬에 남겨진 상황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못지않은 또 다른 고통, 즉 외로움에 치 떠는 고통을 동반한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서툴고 어색한 채 어떻게 주어진 시간들을 채워야 할지 막막해할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과 혼자 있어야 하는 외로움과 소외감에 생겨나는 막막한 시간들 속에서도 살아가야 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누군가의 부재와 홀로 남겨진 데서 오는 슬픔의 고통은 어떻게 해소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슬픔을 이야기하고 슬픔의 실체를 깨달아 애도하는 것이다. 그러한 애도를 통해 슬픔의 과거를 기억하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말을 걸면서 그저 순정하게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와 홀로 남겨짐에서 생겨나는 슬픔의 고통을 말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홀로 미쳐가거나 자폐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우리의 애도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저 슬픔에 젖거나 세상과의 단절을 도모하면서 과거의 시간에 대한 집착을 드러낼 뿐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은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망각이 작용하지 못한 채 과도한 기억을 낳는다. 과도한 기억은 혼자만의 섬에서 세상과의 단절을 부추긴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와 홀로 남겨진 상황에서 슬픔의 고통을 함께해줄 사람이 없을 때, 세상과의 단절을 통해 과거의 시간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는 양상은 최진영의 『구의 증명』에서 여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최진영의 『구의 증명』은 사랑하던 연인 ‘구’가 죽은 뒤 홀로 남겨진 ‘담’이 겪게 되는 상실의 고통과 과거에 대한 기억의 과잉, 그리고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애도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이 소설은 돈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물건으로 값이 매겨지는 삶을 살아갔던 ‘구’의 고통, ‘구’의 죽음 뒤에 작용하는 ‘담’의 기억을 통해 세상에 존재했었던 ‘구’를 증명하는 문제를 표상하고 있다. 아울러 너무나도 사랑한 존재였던 ‘구’의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 ‘구’를 먹는 ‘담’의 식인 행위를 통해 결코 잊혀서는 안 되는 그들의 아픈 사랑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이 소설은 남자 인물 &l
작성일 2023-09-15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 혼란과 상실된 과거 애도하기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 혼란과 상실된 과거 애도하기 선주원 1) 이름의 혼재에 의한 정체성의 혼란 정체성은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를 토대로 형성된다. 정체성은 항상 자신이 아닌 것, 즉 다란 사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나’와 다른 사람의 차이 안에서, 차이를 통해서만 상상되고 구성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윤성희의 『상냥한 사람』에 표상된 작중인물 형민의 정체성은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형민은 삼십팔 년 전에 아역 배우로서 ‘형구네 고물상’이라는 드라마에서 진구 역을 소화했었는데, 그는 실로 오랜만에 「그 시절, 그 사람들」이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어린 날을 회상하면서 당시의 심정을 대담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한 이 소설은 박형민이 ‘형구네 고물상’에 진구로 출연했을 당시에 함께 출연했던 여러 인물들을 화면으로 만나면서 진구로 살았던 당시를 회상하는 이야기와 형민으로 살아왔던 과거의 이야기 등을 현재의 시점에서 평가하는 서술 방식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형민은 자신의 원래의 이름이 아닌 드라마 속에서의 이름으로 불리며 살았던 시절에 대한 반추를 통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음을 드러낸다. 형민이 진구로 불리게 된 데서 경험하는 정체성의 혼란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진구로 살던 일년 팔개월 동안 사람들은 그를 기특한 아이라고 불렀다. (중략) 착한 아이도 아니고, 훌륭한 아이도 아니고, 기특한 아이라니. 기특, 이라고 발음해보면 독특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윤성희, 2019:8) 진구로 살던 일 년 팔 개월 동안 형민은 진구로 불리면서 기특한 아이라는 칭찬을 받고 살았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도 가족들을 돌보는 기특한 아이로 이미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미지화됨으로써 형민은 원래의 자신이 가졌던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자신이 진구인지 형민인지 헷갈리며 살아야 했다. 그러한 헷갈림을 극복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시간의 경과 속에 형민은 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자기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정립할 수 있었다. 출연을 결심했을 때만 해도 할 말이 많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진구는 사진 속에 갇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사실만이 떠올랐다. 그 자라지 않는 아이를 끌어안고 십대 시절을 통과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그는 사회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민아, 그 시절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말자. 그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윤성희, 2019:9) 형민이 아닌 진구로 불림으로써 동일성으로서의 정체성[자체 정체성]이 흔들리면서 형민은 자신이 진구로 사진 속에 갇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가 되었던 경험을 갖고 있다. 자라지 않는 진구를 끌어안고 십 대 시절을 통과하기 위해 형민은 많은 애를 써
작성일 2023-09-15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선우은실 - 내가,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말했다 -최근 소설 속 삼인칭 서술 양상과 ‘당사자성’의 확대 가능성을 논하며내가,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말했다 -최근 소설 속 삼인칭 서술 양상과 ‘당사자성’의 확대 가능성을 논하며 선우은실 intro. 시점(point of view)의 문제 ‘내가 그렇게 말했다’와 ‘그가 그렇게 말했다’는 어떻게 다른가. 하나는 일인칭 서술, 하나는 삼인칭 서술이다. 두 문장이 하나의 상황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고 할 때, 이 두 문장이 지니는 차이는 단지 그뿐일까? 전하려는 상황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으니, 주어가 달라졌을 뿐일까? 나는 이 글에서 두 문장에 의해 이야기된 것이 ‘다른 것’임을 주장하려고 한다. 두 문장에서 갈음된 것은 ‘주어’에 불과해 보이지만 이는 단순히 ‘누구’가 아니라 ‘시점(point of view)‘의 차이에 따른 태도의 변화를 내포한다. 해당 발언을 하는 발화자의 관점에 의해 사건이 판단되고 해석되어 전달된다는 사실은 인물의 교체가 아니라, ‘시점’의 측면에서 볼 때 인물 간 가치관의 차이 이상을 함의한다. 특정 문제의식을 어떠한 캐릭터의 해석을 경유해 말할 것인가(‘나는~’) 혹은 보다 객관적 진술이 가능한 서술자를 설정하여 어떤 전망 내지는 태도를 강조할 것인가(‘그는~’)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물과 서술자의 말과 태도가 곧 작가의 그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말하게끔 하는 서술자를 통해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기로 결정했는가 하는 점은 독자로 하여금 작품에 현실을 되비췄을 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이때 ‘필요한 것’이란 ‘결핍된 것’과 교집합을 이룬다. 이때 ‘(결핍된) 필요한 것’이란 그저 비어 있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어 있으나 다른 마땅한 것으로 채워져야 할 비어 있음이다. 그것은 시간이 걸리거나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등의 이유로 현실에서 즉각적으로 채워질(해결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식의 개선이나 해결이 필요하기는 하며, 그렇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자체만으로 의미 있다는 데 방점이 찍힌다. 즉 현실의 결핍은 완전하게 해소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결핍된 것을 이러한 식으로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시킨다는 점이 중요하다. 만약 현실에서 처리될 수 없는 어떤 공백이 서사의 ‘시점’을 통해 제안될 수 있다면, 서사가 지닌 현실에 대한 허구성 내지는 환상성은 바로 이 공백에 대한 하나의 안(案)을 제안하고 보여 주고 실천한다는 점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최근 서사에 대한 여러 비평적 제안들, 가령 페미니즘 서사나 퀴어 서사에 대한 독해 또는 돌봄의 정치, 포스트 휴머니즘적
작성일 2024-08-06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박다솜 - 막다른 골목, 미래를 소설하는 두 가지 방식막다른 골목, 미래를 소설하는 두 가지 방식 박다솜 1. 막다른 골목에서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시대다. 만 19세에서 23세의 청년들 중 절반에 해당하는 50.4%가 결혼과 출산을 포기했다는 내용의 한 연구1)는 이 문장이 비유나 과장일 수 없음을 묵직하게 일깨운다. 물론 결혼제도와 출산 밖에서도 삶은 얼마든지 충만해질 수 있지만, 연애·결혼·출산·내집마련·취업창업 등 총 10가지의 항목에 따라 청년들을 ‘미래계획형’, ‘결혼출산포기형’, ‘N포형’으로 분류한 앞의 연구에서 우울·불안은 ‘N포형’이 가장 높고 행복감은 ‘미래계획형’, ‘결혼출산포기형’, ‘N포형’ 순으로 높다고 분석한 것을 보면, 결혼과 출산을 포함해 여러 항목에서 미래를 꿈꿀 수 없을수록 덜 행복하고 더 우울·불안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발맞춰 최근의 문학 작품들 역시 암울한 미래인식을 속속 보고하고 있다. 변혜지의 첫 시집 제목이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문학과지성사, 2023)인 것이나, 특유의 유머로 저성장 시대의 우울을 부조해내는 고선경의 『샤워젤과 소다수』(문학동네, 2023), 코로나와 생태 위기 같은 현재의 문제에서 시작해 미래를 가늠해보는 강혜빈의 『미래는 허밍을 한다』(문학과지성사, 2023) 등 최근의 시집들에서는 현재를 막다른 골목으로 인식하고 꿈꿀 수 없는 미래를 애써 더듬어보려는 시도들이 거듭 발견된다. 비관적인 현재와 막막한 미래를 토로하는 청년들의 목소리는 물론 소설로도 형상화되고 있는데, 공현진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2)에 대한 세밀한 독서는 지금-여기의 우리가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라고 생각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밝혀줄 것만 같다. 2. 부패한 공동체와 ‘알잘딱깔센’의 폭력 – 공현진,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인터넷에 떠도는 출처가 불분명한 글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눈치가 빨라서 외항사 승무원들이 한국행 노선을 선호한다고 한다. 비행기 안에서 배식이 시작되면 일제히 테이블을 펴두고, 앞뒤로 들려오는 대화를 엿들어 내가 먹을 메뉴도 미리 정해두고, 저 앞쪽에서 승무원들이 식사를 치우기 시작하면 자신의 식사도 서둘러 마무리하고, 음료를 주문할 때도 승무원이 덜 귀찮도록 일행들과 함께 한 번에 요청한다는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우리는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행동한다. 바쁜 식당에서는 메뉴를 통일하고 사람이 많은 점심시간에는 눈치껏 얼른 먹고 일어난다. 그게 서로서로 효율적이니까. 모든 일은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빨리빨리 착착 진행되어야 하니까. 한국인의 급한 성미를 드러내는 표현 ‘빨
작성일 2024-07-30 댓글수 0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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