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죽어버려서
- 작성자 식빵연필
- 작성일 2024-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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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중한 벚꽃이 이내 죽어버렸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쓴 시의 한 구절이다. 국어 선생님께서 이 시를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벚꽃이 죽어버렸다가 아니라 시들었다고 표현해야지."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에서 일말의 저항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꽃에게는 시들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러나 죽어버렸다고 표현한 것은 고의적인 꾸밈이었다. 그 시에서 벚꽃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여서 내 뜻이 잘 해석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인간의 죽음에 대한 표현을 벚꽃을 향해 치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 의도가 너무나도 쉽게 부정당해버린 것 같아서 속으로 씩씩대며 줄을 긋다 그만 표현을 지워버렸다.
여정의 끝을 의미하는 두 단어 '죽다와 시들다' 꽃에게 있어 무엇이 더 감각적인가를 두고 보아도 시들다가 좀 더 풍성한 이미지를 준다. 시들다라는 말은 소리 없이 서서히 그러나 우아하게 푸름에서 붉음으로 가다 끝내 어둠으로 장식되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가진다. 그러나 죽다라는 말은 조금 다르다. 육체로서 살아있음을 경험하고 동족과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누군가는 외롭게 또 누군가는 행복하게...그리고 결말은 백골과 썩은 살덩이라는 다소 씁쓸한 잔해를 남긴다. 물론 이렇게 표현한 탓에 죽다라는 말이 시들다라는 말보다 감각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진행형으로 바꾼다면 좀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들고있다는 푸름에서 붉음으로 죽다는 활력에서 침묵으로, 전자는 감각적이지만 후자는 추상적이다. 그리고 죽다의 추상을 시들다는 함께 가져간다. 죽다의 장점은 꽃의 끝맺음과 동물의 마무리를 모두 포용할 수 있다는 것 진달래가 죽었다던가 지구가 죽어간다던가 어느 사물에 써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는 것. 죽다는 시들다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꽃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시들다라는 표현을 쓰기로했다. 꽃에게 있어서 죽다는 섬세한 의미를 담아내지 못한다. 꽃을 이용해 글을 쓸 때 항상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너에게 집중하고 싶어' 다소 오글거리는 발상이지만 한 문장 한 문장 함축하고 싶은 의미가 많기 때문이다.
좋은 글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이해 되기 쉽게 쓰는 것, 둘째는 풍부한 표현을 쓰는 것, 셋째는 문장을 짧게 짧게 쓰는 것, 작가가 이것을 어기고 위험부담을 감수할 때는 그만한 가치의 의도가 담겨있어야 한다는 것 시를 잘 쓰기 어려운 이유다. 내 의도를 드러내려 힘쓰다보면 이해 되기는 쉽지만 그만큼 표현상의 결점도 쉽게 남는다. 표현을 풍부하게 하려 힘쓰다보면 의도는 감춰지고 지나치게 추상적인 느낌이 강해져 이해가 어려워진다. 좋은 글을 쓰는 것은 첫번째와 두번째 사이의 중용을 지키는 것인데 이 중용이라는 것이 참 애매한 부분이라 시를 씀에 있어 많은 고민을 하게된다. 그러나 나는 5년 전 기억 속에서 그 답을 찾아 낸 듯하다. 중용이란 작가에게만 중용이면 된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죽어버렸다고 표현했다가 함축적인 감각을 잃어버렸으며 시들다라는 표현을 생각해보면서는 되려 풍부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해석은 독자의 몫이고 작가는 말없이 웃으며 해석을 지켜보면 된다. 문학이 학문일 수 있는 까닭은 실마리가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아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의미가 너무 직관적으로 와닿는다면 그것만큼 매력없는 문학도 없을 것 같다. 그러니 강박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롭게 글을 써도 되지 않나 나만의 세계를 아름답게 그려도 되지 않나 이제는 확실한 신념이 살아난다. 그냥 꽃이 죽어버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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