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 작성자 백산화
- 작성일 2024-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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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 소설이 필연적으로 해주의 이야기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치였다. 지금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애써 왔지만, 내 모든 소설의 주인공은 해주였다.
작년 여름에 한 잡지사로부터 인터뷰 제의를 받았다. 문화예술을 전문으로 다루는 잡지였고 매달 한 명의 작가를 골라 심층 취재를 하는 식이었다. 이번 취재 대상은 나였다. ‘문학계의 떠오르는 신예’ 같은 제목으로 나갈 기사였다. 분위기는 좋았고 인터뷰도 매끄러웠다. 사실 소설가에게 들어오는 질문이란 어쩌면 뻔한 것이어서,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순조롭게 답할 수 있었다.
“잠깐만요!”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나려는데 기자가 나를 불러세웠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소설가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으신가요?”
지금까지 수십 번 답해왔던 질문이었다. 그날만큼은 달랐다. 카페의 유리창 너머로 붉은빛이 쏟아졌다. 해가 지고 있었다. 기자의 얼굴이 물감을 칠한 듯 주홍색으로 타올랐다.
“제가 바라는 건… 소설을 그만 쓰게 되는 것뿐입니다.”
바로 그 순간이 내가 해주를 기억해낸 순간이었다.
어느 여름, 쓰레기통 속에서 종이 뭉치를 발견한 날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나는 지역에서 유명했다. 어렸을 때부터 붙은 ‘문예 신동’이라는 딱지는 자라면서 나를 내내 따라다녔다. 8살 때 전국 대회에서 우승해 공중파를 탄 뒤로 나는 도 대회, 시 대회, 전국 대회로 활동 범위를 넓히며 모든 글짓기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동 나이대에서 나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교내 문예 대회에서 2등상을 받았을 때 느꼈던 굴욕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더 치욕스러웠던 부분은 1등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당히 1등을 차지한 주인공의 인적 사항은 종이 위에 휘갈겨 쓴 ‘HJ’가 전부였다. 학교에서는 방송으로 그를 찾았지만 문제의 ‘HJ’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떠밀리듯 주어진 금상을 받아들고 방송실을 나오며 이게 일종의 악질적인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교실 쓰레기통 속에서 문제의 소설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종이 위엔 ‘이해주’라고 적혀 있었고 본능적으로 그 소설이 수상작임을 알았다. ‘HJ’는 이해주였다.
해주는 언제나 아웃사이더였다. 해주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애가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할 부류임을 알았다. 멍든 뺨과 낡은 옷, 사나운 성격은 장벽처럼 사람들을 가로막았다. 해주는 반의 누구와도 친하지 않았다. 불행을 마치 갑옷처럼 걸치고 다니는 여자애를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그 소설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주말 동안 해주의 소설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뭔가에 홀린 듯이 A4 여덟 장짜리 그 소설을 읽고 또 읽었다. 그 당시에 내가 느꼈던 감정을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소설이 무슨 내용이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소설을 읽고 나서 알 수 없는 수치심에 잠겨 엉엉 울었던 순간만은 명확하다. 해주의 소설에는 내게 없고 내 친구들에게도 없고 내가 읽어온 많은 소설가에게도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무언가’에 대해선 당시엔 몰랐다. 해주와 내가 다르다는 것. 정말로 다르다는 것. 그 하나를 뼈저리게 느꼈을 뿐이었다.
월요일이 되자마자 방과후 청소 업무에 지원했다. 해주와 친해지기 위해서였다. 청소는 성가신 작업이었다. 여섯 명이 할 일을 두 명이 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반 애들이 해주를 골탕 먹이려 일을 몰아줬다. 주 5일을 남아야 했지만 해주와 단둘이 있을 기회를 얻어 좋았다.
청소가 끝날 때쯤 집에 같이 가겠냐고 내가 물었다. 해주가 대걸레를 청소도구함에 집어넣다 말고 나를 돌아봤다.
“담임이야?”
“뭐?”
“담임이 나를 챙겨주라고 했냐고. 너는 회장이잖아.”
이런 일은 수백 번 겪어본 것처럼 해주는 지긋지긋해 보였다. 난 대걸레를 든 채로 잠시 굳었다. 예상에 없던 시나리오였다.
“담임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거라면, 안 그래도 돼.”
해주는 냉정하게 말하곤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이 짐을 챙겼다. 나는 잠시 굳어있다가 황급히 해주를 뒤따랐다. 해주가 교실을 나서기 전에 내가 말했다.
“네가 쓴 소설을 읽었어.”
해주가 멈춰 섰다. 난 그 애가 화를 낼 줄 알았다. 하지만 해주는 나를 돌아보더니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어땠어?”
“…뭐?”
“내가 쓴 소설, 어땠냐고.”
잠시 당황해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해주는 내가 당황하는 사이 나를 지나쳐갔다. 간신히 따라붙어 말을 걸었다.
“나도 소설을 써.”
“그렇구나.”
해주는 흥미를 잃은 표정이었다. 몇 번 더 말을 붙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갈림길에서 “집이 어디야?”라고 물었을 때 해주는 저만치 앞서나가고 있었다.
나는 계속 방과후에 청소를 도맡아 했다. 해주는 쉽지 않은 상대였다. 무시는 일상이었고 말을 걸 때마다 조롱하고 빈정거렸다. 그 애는 몇 겹이나 되는 벽을 세우고 사람들을 밀어냈다. 그러나 인내심은 나의 유일한 장점이었고, 벽을 허무는 일은 나의 특기였다.
“나한테 뭘 기대하는 거야? 난 시체나 다름없어.”
한 번은 해주가 내게 물었다. 청소가 막 끝난 시점이었고 우리 둘 다 지친 채였다. 해주는 청소도구함에 한 발을 올리고 어떻게 보면 삐딱한 자세로 나를 봤다.
본능적으로 이것이 신호임을 알았다. 벽이 허물어질 것이라는 신호.
“너는 천재야.”
천천히 말을 골랐다. 해주가 집요하게 나를 바라봤다. 그 눈, 살벌한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내가 말했다.
“네 소설은 황홀하고, 네 고통은 아름다워.”
해주는 그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나를 노려보다가 떠났을 뿐이었다. 그날만큼은 나도 해주를 잡지 않았다.
그 뒤로도 난 해주의 친구가 되진 못했다. 그렇지만 해주의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해주가 나를 위해 소설을 써준다거나 그런 식은 아니었고 버리는 김에 나에게 버리는 식이었다. 그 애는 이따금 뭔가에 빙의된 것처럼 소설을 썼다. 자해하듯, 몇 날 밤을 새워 소설을 완성한 다음엔 내게 던져줬다. 폐기나 다름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만족했다.
해주의 소설엔 항상 칼이 나왔다. 알몸으로 길거리를 활보하는 여자가 나왔고, 틈만 나면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가 나왔다. 남자는 여자를 때리고, 여자는 아이를 때리고, 아이는 칼로 남자를 죽인다. 여자는 칼을 들고 소리친다. “내 머리카락이 어디 갔지?” 머리카락이 아니라 립스틱일 때도 있었고 때로는 칼이었다. 새로운 장면, 새로운 인물이 나오기도 했지만 대체로 똑같은 레파토리였다. 그런데 눈을 뗄 수 없었다. 필력이랄까 문체랄까 글을 구성하는 어떤 요소가 나를 단단히 휘어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해주는 천재였다.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진흙 속의 진주, 발굴되지 않은 다이아몬드라고나 할까. 해주의 재능은 숨겨도 드러나는 종류였다. 얼마 되지 않는 재능을 간신히 포장해놓은 나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해주에겐 '진짜' 고통이 있었다. 해주의 재능은 해주의 고통이었다. 그즈음 나는 소설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했다.
어느 날 학교에 갔는데 여자애들이 둥근 띠를 이룬 채 모여 있었다.
“선경아.”
무리의 중심이 되는 여자애가 나를 불렀다. 노란 탈색모가 인상적인 여자애였다. 우리는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대화하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특별한 일’이 벌어졌음을 눈치챘다. 무리의 가운데에 해주가 있었다.
“얘 가방에서 이게 나왔어.”
잃어버린 줄 알았던 내 립스틱이 여자애의 손에 들려 있었다.
“선경아, 이거 너 꺼 맞지?”
여자애가 모든 것을 확신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확신. 여자애는 사건의 인과를 다 정해놓은 얼굴이었다. 그런 확신을 나는 어머니에게서 자주 보았다. 내가 언제까지고 ‘착한 딸’로 살아갈 거란 믿음. 자신이 정해놓은 인생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주할 것이란 믿음. 내가 당신을 배반하지 않으리란 믿음.
어느새 해주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그 애의 얼굴에도 확신이 있었다. 내가 자기를 배반할 거라는, 결국 혼자가 되고 말 거란 확신이.
해주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내가 말했다.
“아니, 그건 해주 꺼야.”
“일부러 감싸줄 필요 없어. 해주가 기초생활수급자라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거든.”
여자애 재차 나를 재촉했다. 해주는 나를 보고 있었다. 고통과 쾌락이 뒤섞인 눈을 똑바로 보며 내가 말했다.
“내가 생일 선물로 사준 립스틱이야.”
그날 오후, 교실을 청소하는 내내 해주는 나를 무시했다.
“얘기 좀 해.”
청소를 마치고 재빨리 떠나려는 해주를 내가 잡아챘다.
“이거 놔.”
“얘기 좀 하자니까.”
“이거 놓으라고!”
해주가 내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네가 립스틱 몇 개를 가져가든 나는 신경 안 써.”
“너는 위선자고, 너 자신밖에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야.”
해주가 숨을 헐떡이며 나를 노려봤다. 떠나려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하지만 나는 해주를 붙잡을 수 있는 단 한 가지 말을 알고 있었다.
“좋아해.”
해주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해주야, 사랑해. 나랑 사귀자.”
나의 승리였다.
그리고 우린 사귀었다. 교제했다. 하지만 그런 걸 ‘교제’라고 부를 수 있나? 어쨌든 우리는 사귀었고 무언가 어긋나긴 했지만 나는 해주의 소설을 계속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 립스틱 따위는 몇 개를 잃어버리든 상관없었다.
해주의 도벽은 간헐적으로 발현됐다. 그 애 스스로도 조절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립스틱, 섀도우, 볼펜 따위를 훔쳤고 가끔은 돈을 훔쳤다. 나는 통장에서 돈을 빼 지갑에 넣어두었다. 비싼 겉옷이나 신발 따위를 포장해 사물함에 넣어두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해주는 경멸하는 톤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는 너 자신 말고는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야.”
하지만 해주가 립스틱을 바른 날이면 이따금 우리는 키스했으므로 해주가 정말로 내 행동을 싫어했는지는 모르겠다.
이따금 집에서 해주의 소설을 몰래 따라 썼다. 살인자, 정신병자, 사회부적응자가 나오는 소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해주와 같은 느낌을 내진 못했다. 해주처럼 아이가 아버지를 죽이는 소설도 써봤다. 하지만 썩 유쾌하지 않았고 죄책감만 들 뿐이었다.
삼학년이 되자 우리는 다른 반이 되었다. 해주의 형편은 점점 안 좋아졌다. 학교를 나오지 않는 날도 많아졌다. 반 애들의 괴롭힘은 점점 심해졌다. 가끔은 걸레 빤 물을 뒤집어쓴 해주와 마주치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해주는 나를 피했다. 해주가 나를 피하지 않은 적이 한 번 있었다. 화장실이었고 쭈그려 앉은 그 애의 머리칼을 따라 물이 뚝뚝 떨어졌다. 해주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내게 물었다.
“나를 사랑하니?”
평소였다면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날엔 사소한 실수를 했다. 석양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해주의 물에 젖은 갈색 머리가 붉은빛을 받아 타올랐다. 정적이 흘렀다. 해주는 작게 웃었다. 그 뒤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주가 지나서야 해주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해주는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담임에게서 집 주소를 알아내 찾아갔다. 해주의 집은 너무 낡아서 사람이 사는 집보단 폐가에 가까워 보였다. 초인종을 누르자 철컥 소리가 나면서 문이 조금 열렸다. 문틈 사이로 해주의 얼굴이 보였다. 집안은 아주 깜깜했다. 문득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오랜만이야, 선경아.”
해주의 목소리는 구정물처럼 탁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해주가 한 발짝 걸어 나왔다. 해주는 지금까지 봐왔던 어떤 순간보다 상태가 나빴다. 머리칼은 잔뜩 엉키고 입술을 터진 채였다. 뭉텅이로 잘려 나간 머리칼에선 상대방의 악의마저 느껴졌다. 보랏빛으로 멍든 뺨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해주야, 너 뺨이…”
“채선경, 왜 왔어?”
해주가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표정 없는 얼굴이었지만 어느 때보다 사나웠다. 이유 모를 불길함을 느끼며 내가 말했다.
“다른 이유는 없어. 널 보러 온 거야.”
“거짓말하지 마, 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해주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이상하게도 위협적이었다. 나는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야. 그때는 잠깐…”
“내가 아니라 내가 쓴 소설을 사랑하는 거겠지.”
해주가 일갈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내가 말했다.
“너는 천재야.”
해주가 하, 하, 하- 날카롭고 산발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도망갈 틈도 없었다. 해주가 내게 달려들었다. 멱살이 잡혔다. 턱 밑에 차갑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닿았다. 칼이었다.
“내가 소설을 사랑한다고 생각해? 대답해봐, 내가 정말로 소설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냔 말이야.”
해주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소리쳤다. 나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 애가 그만큼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평소에도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두려워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만큼은 달랐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잘 들어, 넌 완전히 틀려먹었어.”
해주가 칼을 내던지고 내 목을 졸랐다. 무시무시한 악력이었다. 해주의 핏발선 눈이 나를 노려봤다.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무거운 돌이 나를 짓누르는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정신을 잃으려는 때 해주가 내 목을 놓으며 말했다.
“내가 바라는 건 하나야. 소설을 그만 쓰는 것뿐이라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원이었다. 경찰들이 몇 명 왔다 갔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했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았던 건 아니고 일종의 회피였다.
퇴원하니 모든 일이 끝나 있었다. 해주가 어떻게 됐는지는 나도 몰랐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날 이후 해주를 다시 볼 수 없었다. 그 애가 자퇴했다거나, 감옥에 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해주가 죽었다고 말하는 애들도 있었다. 소문을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 역시 해주를 찾진 못했다. 해주는 어디에도 없었다.
난 소설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해주가 경멸했던 바로 그 방식으로. 음침하고 저열하게. 그러고 있으면 어디에선가 해주가 나타나서, ‘이 바보야, 그딴 걸 소설이라고 쓰고 있는 거야?’하고 나를 조롱해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정신 나갈 정도로 황홀한 소설을 세상에 내보이고 내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내리꽂으며 ‘넌 글러 먹었어, 멍청아.’라고 말해줄 것 같았다. 매일 그런 상상에 시달렸다. 그것은 황홀하고 더러운 꿈이었다. 당시에 나는 완전히 몰입해있었다. 얼마나 몰입했는지 현실의 삶을 거의 살지 못할 정도였다.
“성공한 소설가는 정신이상자거나 천재다. 선경이 너는 어느 쪽 같아?”
몇 년 뒤에 진학한 예대에서 어떤 선배가 물었다. 기억나는 건 선배의 빨간색 볼캡과 그 사이로 튀어나온 더벅머리가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것뿐. 그땐 내가 선배와 칠 년의 연애를 하게 될 줄 몰랐다. 선배와 헤어진 지금도 이따금 선배를 떠올린다. 첫날의 후줄근한 옷차림이나, 유약한 인상에 어울리지 않는 살벌한 눈과, 내게 고통을 줬던 단단한 손아귀까지.
꿈은 어느 순간 나를 떠났다. 대부분의 어른이 그렇듯 자라면서 유소년기의 꿈을 잊어버렸다. 해주가 나를 완전히 떠난 것이다. 그리고 난 소설가가 되었다.
*
해주가, 그리고 해주의 소설이 나를 어떻게 바꿔놨는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해주는 내 안에 너무 깊숙이 파고들어서 지금의 나는 해주와 나를 잘 구별할 수 없다. 처음부터 내가 해주처럼 소설을 쓰지는 않았다. 등단 초기엔 서정 소설을 썼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서 제법 따뜻하고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그러나 거짓된 소설이라는 생각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피와 죽음이 나오는 소설을 쓰고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엔 칼을 든 여자와 주먹을 휘두르는 남자의 세계로 회귀했다. 그곳이 내 원점이었다.
내가 해주를 잊은 것이 일종의 방어기제였음을 이제는 인정한다. 나는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도벽마저 닮아버린 지금,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도벽이 발현된 것은 몇 달 전이었다. 도벽이 왜, 무슨 이유로 발현됐는지는 나도 몰랐다. 나는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물건을 훔치기 시작했다. 돈이 부족하거나 생활이 궁핍해서는 아니었다. 오직 충동이 나를 이끌었다. 선배가 내게 손을 대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선배는 내 도벽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연인이라기보다는 공생관계였다. 선배는 내가 글을 쓰도록 만드는 사람이었다. 내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선배의 물건을 훔치고, 선배는 나를 때렸다. 선배는 내게서 쾌락을 얻고, 나는 선배에게서 고통을 얻었다.
“너는 너 자신조차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야.”
그렇게 말한 선배도 한때는 소설을 썼던 사람이었다. ‘한때는’이라는 게 문제지만. 선배는 성공한 소설가도 아니면서 정신병자였다. 그러나 나에게 선배를 힐난할 자격은 없다. 누구보다 선배를 닮은 사람은 나였으므로.
선배에게 이별을 고한 날 해주에게 연락이 닿았다. 지하철역에서 만난 해주는 단정한 검은색 원피스 차림이었다. 잘 손질된 단발머리에 진주 목걸이를 찬 그녀를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상상해왔던 해주는, 내 꿈속의 해주는 그런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해주가 감옥에 들어가거나 삶을 비관해 자살하는 상상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평범한 회사원이 된 이해주라니. 해주의 손끝에서 반짝이는 연분홍색 매니큐어가 부조화를 일으켰다.
부조화는 우리가 칵테일 바에 들어가 독한 술을 몇 잔이나 마실 때까지 이어졌다. 그때까지도 눈앞의 여자가 이해주임을 실감하지 못했다. 술이 계속 들어갔고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과거의 일을 일절 꺼내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해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는 성공했잖아.”
여러 번 들어온 말이었다. 하지만 해주에게선 아니었다. 해주에게서까지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술잔을 기울이며 고개를 저었다.
“해주야, 난 정말로… 시체나 다름없어.”
해주가 날 바라봤다. 위스키가 들어간 칵테일을 연거푸 들이켰다. 그만둬야 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술기운이 돌았고 말이 새듯이 나갔다.
“내가 바라는 건…”
“소설을 그만 쓰는 것뿐이야?”
문득 해주가 모든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변명하기 위해 웅얼거렸다.
“해주야, 나는…”
“고통만이 소설은 아니란 걸 이제는 이해했어.”
해주가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립스틱 번진 입술이 보였다. 술 냄새가 났다. 난 해주가 내게 키스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주는 그런 내 예상을 비웃듯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겨냈다.
“이제 우린 어른이잖아.”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해주의 눈이었다. 살벌하지만 에로틱한 눈이었다. 번진 레드 립스틱과 충혈된 눈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나는 집에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어딘가 거짓된, 그러나 진실한 무언가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해주를 처음 만났던 날부터 시작했다. 손목에 멍이 든 채로 교실을 청소하던 이해주. 정신 나간 소설을 쓰던 이해주. 핏발 선 눈으로 내 목을 조르던 이해주. 내 꿈속의 이해주. 다시 만난 이해주. 기억과는 너무 달랐던 이해주.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내가 필요하지 않은 이해주. 나를 두고 떠난… 혼자 어른이 된 이해주.
그날, 우리는 관계하지 않았다. 옷을 벗었던 것까진 기억한다. 해주는 멍이 든 내 몸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술기운에 잠이 들었고 일어났을 때 해주는 없었다. 해주를 찾아 헤매는 ‘나’만이 존재했다. 호텔을 뛰쳐나가 어두운 거리를 헤매던 나. 몰려오는 숙취에 구토하던 나. 손에 들린 해주의 립스틱을 보며 흐느끼던 나. 길바닥에 주저앉은 채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던 나….
그로부터 한 달 뒤에 소설을 완성했다. 소설엔 글을 쓰는 어린아이가 나왔고, 칼을 든 여자가 나왔으며 술에 찌든 남자가 나왔다. 백치 같은 여자애가 나왔고 시체나 다름없는 고등학생이 나왔으며 서로 사랑하지 않는 연인이 나왔다. 립스틱을 훔치는 여자애가, 자해하듯이 글을 쓰는 소설가가, 그러니까 방황하는 내가 나왔다. 내 인생의 마지막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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