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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그것은 늘 당신 곁에 있다 -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읽고

  • 작성자 난바다
  • 작성일 2023-12-25
  • 조회수 514

나의 할머니께서는 시인이시다그 탓에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내 주위에는 시가 함께 있었다시인은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모두 낭만적으로 바라보시며 그것들을 사랑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그 덕분인지할머니께서는 고령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여전히 낭만적이시다그러나 내가 어렸을 적그니까 산과 바다와 함께 지냈을 때에는 지금보다도 더 낭만적이셨다예를 들어바다를 좋아하는 내게 있어 바다와 관련된 시를 즉석에서 짜 선물을 해 주신다거나 편지를 쓰실 때면 집 앞 들꽃을 꺾어 한데 엮은 뒤에 내게 주신다거나. (그 덕인지 아직도 할머니의 편지를 다시 읽으면 꽃향기가 난다.) 가끔은 글자가 이미 적힌 책 위에 자신의 글자를 덧입혀 쓰시기도 하셨다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느냐 물으면 할머니께서는 그러면 책의 향기가 더욱 잘 기억이 된다고 답하셨다그러다 보니 나도 어느 순간부터 시집을 읽을 적에 그 옆에 내 글씨체로 그 시를 똑같이 쓰는 것이 습관이 되었는데 그 중내가 가장 기억에 남고 사랑하는 시집이 있다면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가 있다고 할 수 있다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 몇 가지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삶과 죽음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 사람은-

뼈를 녹아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 춘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

이 노래 끝의 공포를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

 

(나는 이것만은 알았다.

이 노래의 끝을 맛본 이들은

자기만 알고

다음 노래의 맛을 알려 주지 아니하였다.)

 

하늘 복판에 아로새기듯이

이 노래를 부른 자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같이도

이 노래를 그친 자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 위인들!

 

 

이 시는 윤동주 시인의 최초의 시로 열여덟의 나이에 쓴 글로 알려져 있다이 시의 해석을 보아하면 삶과 죽음을 면밀하게 표현하여 삶과 죽음이 다른 것이 아닌같은 것이라는 윤동주 시인의 인식이 반영된 작품이라고 한다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삶이 죽음의 서곡이라는 것을 인정하고자신의 이상을 추구한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위인이라 부를 수 있노라고 말하는 작품이라는 것이다사실난 이 작품 해석을 보았을 때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내가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에 나는 우습게도 위로를 받았었기 때문이다모두가 한 번이라도 그랬듯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고 살아가지 아니한가어떤 이들은 죽음이 두려워 도망치는 것만 생각할 수 있고 또 다른 이들은 오히려 죽음을 바라며 죽음만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다그 중 한 가지만 꼽자면 나는 후자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나는 그 당시에 자존감이 매우 낮았고 (지금도 자존감이 낮긴 하다.) 사람들의 시선을 매우 두려워했다그 탓에 몇몇 아이들에게 나는 굉장히 만만한 존재였는데 그 것 때문에 더 그런지 몰라도 그 어린 나이에 나는 죽음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곤 했다하루라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고 내가 그리워하는 바다와 함께 세상을 뜨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생각한 적도 많았다그러던 와중에 인터넷을 통해 이 시를 접하게 된 것이었다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이 글이 무엇을 표현하는지 몰랐다워낙 글이 어려운 까닭일까어렸을 적의 내가 이해하기엔 무거운 글이었다그러다 어느 정도 머리가 큰 뒤 이 시가 문득 떠올랐다그렇게 다시 읽었을 때 나는 엉엉 울었었다마치 죽음을 극복한그니까 어떻게든 살기 위해 꿋꿋이 살아온 네가 정말 대견하다고 말하는 글 같아서. ‘위인이라는 그 큰 무게의 단어를 써가며 내게 잘했다고 한 마디라도 덧붙여주는 글 같아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내가 그 때 죽지 못한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도 있었지만 삶에 대한 미련도 많이 있었다살고 싶었고 죽음이 무서웠고이왕 행복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 하나 때문에 아직 이리 살고 있다이 시가 처음 내게 작용한 것이 위로였기 때문에 그런 건지도 몰라도 나는 아직도 내가 힘들 때에 이 시를 본다아무리 글에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한 자에 대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나는 다르게 이 글을 해석하여 받아들이려고 한다윤동주 시인께서는 의도했든의도치 않았든나라는 한 사람을 살려준 셈이니까.

 

 

조개껍질

-바닷물 소리 듣고 싶어-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울 언니 바닷가에서

주어온 조개껍데기

 

여긴 여긴 북쪽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

한 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닷물 소리.

 

 

조개껍질은 윤동주의 최초의 동시라고 알려진 작품이다사실 윤동주의 대표작을 보자고 하자면 별 헤는 밤이나 자화상을 떠올리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떠오른다나 역시 내 유년 시절의 기억들은 바다와 많은 관련성이 있는 터라 바다에 대한 향수나 그리움이 가득 있는 편이라 그런지이 작품을 보면서 내가 사랑하는 바다가 많이 떠올랐다하도 내가 바다를 좋아하는 것을 아는 내 친구들은 바다에 갔다 오기만 하면 조개껍데기를 주고 와 내게 주곤 했다윤동주 시인도 아마 그런 감정이지 않을까자신의 고향을 그리워하고 자신의 가족을 그리워하는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을 법한 보편적인 감정 말이다사실 나는 윤동주 시인과는 다른 환경에 있기 때문에 윤동주 시인이 이 시를 썼을 때의 감정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산에서 꽃을 한데 엮었을 적에 내 손에 꽃 향이 가득 맴돌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그리고 그것이 서울에 있을 때면 더욱 강하게 맴돌아 나의 어렸을 적을 그리워하게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그렇기 때문일까나는 이 시를 볼 때마다 고향의 바다를 떠올리고는 한다이 시를 보고 있자면 파도 소리를 듣기 위해 소라 고동을 찾아 귀에 무턱대고 갖다 댔던 나의 유년 시절이 떠오른다언니가 모래성을 쌓으면 장난꾸러기마냥 다 무너트려서 언니에게 혼났던 것도 아빠를 꼭 껴안은 채 자전거를 타며 푸른 바다를 보았던 그 익숙한 도로 길도나의 그리움 덩어리들이다이 콘크리트 숲 사이에서 이 시는 내게 푸른색 물결을 선사해 주었고 난 그 물결을 따라 덧없이 빠져들었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가슴속에 하나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어머니,

 

어머님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비둘기강아지토끼노새노루프랑시스 잠라이너 마리아 릴케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별 헤는 밤은 윤동주 시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작품으로 윤동주 시인의 반성과 희망 등 독립에 대한 열망이 잘 보이는 작품이다나는 이 작품을 매우 어렸을 적부터 잘 알고 있었다나의 증조 할아버지께서는 독립 운동가이셨고 그 덕에 할아버지에게서 독립과 관련된 많은 일화들을 들려주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증조 할아버지께서 이 시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다는 것이다그 덕에 내가 맨 처음으로 시를 배웠을 때에도 이 시를 통해 시가 가지고 있는 느낌과 시인의 감성을 배웠다내가 즐겨 보던 유명 예능 프로에서도 이 시를 가지고 노래를 창작하고 그 흔히들 초등학생이면 무조건 한다는 한컴타자연습에도 이 시가 수록되어 있는 터라 이걸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다만 윤동주 시인은 워낙 아름다운 작품을 많이 남겼던 터라 이것을 제외하고도 앞서 말했듯이 조개껍질삶과 죽음뿐만 아니라 바람이 불어」 등 다양한 시가 내게 각인되어 있었기에 엄청나게 특별하게 느껴지는 시는 아니었다그러나 최근 학교에서 문학 작품을 배우면서 이 시를 배우게 되면서 다시금 이 시를 감상하게 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 시간동안 이 시가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지를 알 수가 있었다먼저 이 시를 보자면 윤동주 시인의 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직접 독립에 대하여 투쟁하지 않고 글을 쓰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반성뿐만 아니라 고향에 남겨져 있는 어머니자신과 함께 지냈던 친우흔히 볼 수 있는 동물그리고 시인 등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특히 내가 눈 여겨 보았던 부분은 별을 통해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과 연결 지어 풀어나가는 구절과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버렸다고 담담히 서술하는 부분이었다나 역시 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별을 통하여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전한다는 발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별을 통해 사랑하는 것들을 떠올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서 윤동주 시인이 바라고 또 사랑하는 것들에 대하여 잘 알 수 있었다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버렸다는 부분에서는 문학 선생님이 말하시길 시만 쓰고 있는 자신에 대하여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표현했다고 하셨지만 난 윤동주 시인이 행했던 창씨개명이 먼저 떠올랐다굳이 이름이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물론 이름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잘 알고 있다누구보다 를 잘 표현한 글자이고 어머니가 나에게 선사한 것이니까그러나 그것 외에도 다른 것을 통해 충분히 윤동주 시인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잘 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윤동주 시인이 사랑했던 것은 창씨개명한 일본식 이름이 아닌 자신의 어머니가 선사한 이름이었을 테고그는 글을 사랑했던 것이지 다른 것 (글을 배우기 위해 창씨개명을 해야 했던 일)을 사랑한 건 아니었을 테니문득 영화 동주가 떠올라 더욱 몰입하며 이 글을 읽을 수 있었다총이 아닌 연필로 독립을 위해 맞서 싸운 사람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그 누구보다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윤동주 시인그의 시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었다.

 

사실이 글이 감상과 비평에 맞는 글인지는 모르겠다수필 같기도아니면 그저 나의 혼잣말이 담긴 글 같기도 하다그러나 모두가 윤동주 시인하면 별 헤는 밤만 떠오르는 사실이 많이 안타까워 무턱대고 쓴 글인 것은 확실하다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보면 그의 작품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지 모두가 알 수 있을 텐데내가 이 글을 올려 조금이라도 윤동주 시인의 시를 알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글을 갑작스레 쓰게 된 것이지만 쓰면 쓸수록 이 시가 묻힐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정말 위대한 작품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결국 세상 밖에 나오게 되길 마련이니나는 윤동주 시인의 다른 시들이 언젠가 더욱 화제가 될 것이라 믿는다.

 

여담으로 지난 번할머니 댁에 갔을 때 할머니께 시집 하나를 선물 받았다그 시집에는 짭짤한 소금 향이 났고 그 책을 펼쳤을 때에 나는 윤동주 시인의 시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내게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은 총 두 개나 되었지만 나는 그 두 개 다 내 침대맡에 두며 나는 울고 싶을 때나 화날 때그리고 반성이 필요할 때면 보곤 한다모두가 자신의 그리움을 향수하고 싶을 때그리고 윤동주 시인의 다른 훌륭한 시를 보고 싶을 때이 시집을 사길 추천한다그러면 당신 곁에도 하늘과 바람과 별과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있고 그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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