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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희 <뫼비우스의 띠>- 연작의 첫 단추

  • 작성자 금안백
  • 작성일 2024-02-04
  • 조회수 443

이성과 힘에서 펴낸 소설가 조세희의 연작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고 이 감상문을 작성합니다필자는 일명 난장이 연작 중 제일 처음 발간되고 소설집에서도 가장 처음 부분에 수록된 단편소설 <뫼비우스의 띠>와 그 앞의 작가의 말까지만을 읽고 이 글을 작성함도 밝힙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수난이대>나 <운수 좋은 날그리고 <소나기>와 같이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단편소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그래서 필자도 그 이름만큼은 알고 있은 지 오래였다그리고 얼마 전 좋은 기회가 찾아와 <난장이가 쏘아있는 공>이 수록된 동명의 연작 소설집을 읽을 수 있었다.

 연작을 읽기 전 작가의 말과 이 소설집에 대해 얕게나마 알고 있던 정보들로 미루어 짐작해 봤을 때 나는 이 연작이 박정희 정부 당시의 사회적 불평등을 주제로 한 사회 참여적 문학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채 연작의 첫 단추인 <뫼비우스의 띠>를 감상했다.

 

 <뫼비우스의 띠>의 시작은 한 고등학교 졸업반의 마지막 수학 수업으로 시작한다수학 담당 선생은 학생들에게 신뢰받는 이다그는 마지막 수업으로 입시가 아닌 좀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첫 번째 이야기는 굴뚝 청소를 하는 두 아이 이야기다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하러 동시에 굴뚝으로 들어갔다그리고 두 아이가 나왔을 때 둘 중 한 아이만이 먼지로 얼굴이 까마귀가 됐다다른 한 아이는 깨끗하다그럼 둘 중 어느 아이가 얼굴을 씻겠는가작중에서나 이 이야기의 인용처에서도 문제의 진정한 답은 하나로 나온다정답은 문제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다두 아이 모두 같은 굴뚝에서 동시에 청소했는데 어떻게 한 아이만이 얼굴이 새카매져 나올 수 있겠는가수학 교사는 이 이야기를 하고 곧바로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했다뫼비우스의 띠를 주제로 한 이야기였다뫼비우스의 띠는 겉과 속을 구분할 수 없다그러니 겉과 속안과 밖이 없다.

 작품은 곧바로 다른 장면을 비춘다재개발 현장이다이 이야기의 등장인물인 꼽추와 앉은뱅이의 집은 무너졌다그들은 한 사내에게 입주권을 팔았지 달리 살 곳도 없어 원래 살던 집에서 계속 머물고 있었다그런데 그 집이 무너졌다그들은 자신들의 입주권을 사들인 사내가 그것으로 자신들이 판 가격의 배가 되는 이익을 얻은 것을 알게 된다그리고 함께 그 사내를 불태워 죽이고 그의 재산을 강탈한다앉은뱅이는 꼽추에게 강탈한 돈으로 강냉이 장사를 하자고 권한다그러나 꼽추는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앉은뱅이에게서 등 돌린다.

 다시 작품은 수학 수업을 비춘다선생은 말한다학생들에게 자신은 사물을 옳게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을 가르치려 노력했다고.

 

 이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아마 선과 악은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다언더도그마에 빠지지 말자내지 네가 선이라 믿고 있는 무언가는 절대적으로 봤을 때 완벽한 선은 아닐 것이다.’ 같은 것이지 않을까 싶다그러나 나는 작품을 읽기 전에 박정희 정부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었고또 이 단편이 난장이 연작의 첫 단추라는 걸 고려해서 조금은 다른 감상도 함께 나왔다.

 일단 박정희 정부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 설명을 좀 하고 시작하겠다물론 아주 조심스럽게 말이다박정희 정부는 1963년부터 1979년까지 집권한 정부로 우리나라의 인프라 개선과 더불어 경제 부흥을 가져오는 등 많은 공이 있었지만 인권 탄압이나 노동착취결정적으로 10월 유신을 기점으로 독재 체제를 확립하는 등 많은 과가 있기도 해 평가에 있어 명과 암이 뚜렷한 정부이다.

 작가의 말에서 조세희는 자신이 70년대를 살아가던 때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건 악이 내놓고 선을 가장하는 것이라 했다처음엔 여기서 그가 말하고 있는 악은 박정희 정부를 의미하는 거겠거니 생각했다그러나 <뫼비우스의 띠>를 읽고 다시 작가의 말을 되돌아봤을 때 이 문구가 너무 의문스러웠다이분법적인 세계관(혹은 정의관)을 부정하고 사물을 옳게 봐야 한다고 주장했으면서 왜 작가 자신이 선과 악을 말하고 있을까 싶었다그리고 고심 끝에 저 문구에서 말하는 악은 박정희 정부가 아니라고 결론을 지었다저 문구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박정희 정부는 악인데 선인 척한다가 아니라 박정희 정부는 그릇된 짓을 저지르면서 그것이 옳은 일인 척 가장한다이었다.

 나는 이 이후로 <뫼비우스의 띠>를 다시 감상했다이분법적 세계관을 비판하고옳은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일반적인 감상이 또다시 나왔지만그 동시에 다른 느낌을 받았다이 단편에서는 작가가 연작을 시작하면서 한 가지를 확실시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세상을 이분법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듯이 박정희 정부 또한 선과 악 중 하나로 평가할 순 없다뭐 그렇게 말하고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래서 내가  생각하기를 조세희는 이 연작은 박정희 정부를 마냥 비판하고 악으로 보는 정치적 작품이 아니라는 걸 이 <뫼비우스의 띠>라는 단편으로 전제해 놓은 것 같다.

 문학은 절대로 사적이거나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당해서는 안 된다혹여 독자가 난장이 연작을 정치적으로 받아들일 걸 염려하고 작가가 이런 전제를 한 게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이런 내 견해가 남이 보기엔 허무맹랑할지도 모르겠다그러나 이 견해가 내가 앞으로 난장이 연작을 감상하는 데에 딱히 해로울 것 같지는 않다그리고 만약에 내가 이 연작을 읽으면서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이 나오게 된다면 나는 작품 읽기를 멈추고 적당히 책을 처분할 것이다앞서 말했지만 문학은 절대로 정치적인 목적을 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 참여적인 문학을 얘기하는 건 아니다만약 정치적인 목적을 이 연작이 담았다면 나는 실망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내 바람대로 그런 그릇된 내용이 이 소설집 내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결국 내 견해가 어느 정도 맞는 말이겠다.

 그리고 내가 이 <뫼비우스의 띠>를 감히 평가하자면 연작의 첫 단추로써도 개별적인 단편으로서도 좋은 문학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미숙한 글을 읽어주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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