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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진실을 알 수 없는 곳- 시 평론

  • 작성자 금안백
  • 작성일 2024-02-18
  • 조회수 547

 창작과 비평 202(2023년 겨울호)에 실린 황인찬 시인의 시 <어깨에 기대어 잠든 이의 머리를 밀어내지 못함>을 감상했다.

 시는 수학여행의 밤을 비춘다아이들은 잠들지 않고 누운 채로 각자가 들었던 자신들이 누워있는 이 숙소에 대한 소문들을 얘기한다다만 그 얘기들에는 근거가 없다사위가 어두워 서로 얼굴을 볼 수 없음에도 그들은 진실한 얘기 대신 근거 없는 소문만 입에 올리고 있다이러한 상황을 시에서는 아무도 고백을 하지는 않고 말들만 떠도는 수학여행의 밤이라고 묘사한다이다음 아이들은 학교에 관한 소문을 얘기한다그 말들이 모두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어두운 곳에서 작게 속삭인다면그것이 고백의 형식을 갖춘다면 그것은 더욱 진실처럼 들리고.”. 끝으로 시는 앞 문장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아이가 실수인 척 손가락을 옆에 누운 아이의 손가락과 맞대는 장면을 비춘다.

 이 시에서 수학여행의 밤을 맞은 숙소는 인터넷 세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만나는 이들끼리는 서로 얼굴을 알 수 없다그러니 더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실제로 인터넷은 그런 장점이 완벽하게 발휘되고 있지 않다.

 인터넷은 익명성이 보장된다고 생각해 거짓되고 터무니없는 소문을 말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그래서 인터넷에는 사실이 불분명한 말이 많이도 돌아다닌다근거 없는 소문도 그렇다그걸 이 시는 표현하고 있다.

 마약 투약 의혹을 받던 故 이선균 배우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판결이 내려지기도 전에 그를 범죄자로 낙인찍고 그에게 숱한 비난을 퍼부었던 인터넷 여론을 기억하고 있다같은 의혹을 받았던 지드래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그쪽도 판결이 나기 전임에도 이미 인터넷에서는 그를 마약범인 양 비난했다그리고 승리와 관련된 근거 없는 소문까지 만들기도 했다.

 “아무도 고백을 하지는 않고 말들만 떠도는 수학여행의 밤이라는 부분은 어떤 사건에 대해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여론과 그럼에도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 반대 여론과 비교적 중립적인 여론을 비판하고 있는 느낌이다여론이 어떤 누군가를 비난하고 할지언정 모든 사람이 같은 자세인 건 아닌데도 어떤 사건이 보도된 뉴스의 댓글을 살펴보면 여론은 굉장히 일관된 것처럼 보인다이를 <정의감 중독 사회>라는 책에서는 소수의 목소리가 더 크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내 희망이자 생각에는 다수의 사람은 비교적 중립에 가까운 의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그리고 반대되는 의견의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작다마이크를 잡기 주저하는 탓이리라내 생각인데 반대 의견과 중립에 가까운 다수가 마이크를 잡기 주저하는 까닭은 이미 목소리를 크게 외치고 있는 소수가 두렵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그리고 다수 중 일부가 더 크게 들리는 소수의 의견에 동조했기 때문에 비교적 중립적인 의견의 힘이 약해지는 현상도 그 까닭 중 하나일 것이다.

 “어두운 곳에서 작게 속삭인다면그것이 고백의 형식을 갖춘다면 그것은 더욱 진실처럼 들리고.”부분은 인터넷에 올라오는 말들은 그 사실 여부를 알기 힘들다는 의미이다실제로 인터넷에서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버릇이 들어있지 않다면 속아 넘어가기 쉬운 거짓된 게시물들이 많다.

 마지막 부분은 인터넷에서 벗어나 진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의미로 시인의 생각이 반영됐다시의 주제를 깔끔하게 정리해 주는 부분이다.

 전체적으로 주제가 일관적으로 시에 잘 드러나 있다그리고 말하려는 바를 사실주의적인 묘사를 사용해 과도하지 않고 적절하게 표현했다그러나 제목에 관해서는 평하기가 애매하다. 이 시의 제목은 배경이 수학여행이란 점에서 봤을 때 버스에서 일어난 일을 얘기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저 제목은 아마 마지막에 등장하는 아이의 불편함에도 어깨에 머리를 기댄 옆 사람을 깨우지 못할 정도로 용기 없는 성격을 표현하면서 자신의 이치에 맞지 않음에도 의견을 내기를 주저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의미라고 생각된다하지만 이미 아무도 고백을 하지 않고 말들만 떠도는 수학여행의 밤이라는 부분에서 그들을 비판하고 있는 느낌을 주는데 굳이 작품을 대표하거나 작품의 내용을 보여줘야 하는 제목의 본분을 포기하면서까지 저 제목을 사용했어야 했나 싶다. (이 시의 제목이 작품을 대표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그러나 시인이 의견 내기를 주저하는 자들을 보다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싶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저런 제목이 필자한테는 나름 신선하게 다가오기에 혹평을 주기에도 애매하다그럼에도 필자는 작품을 좀 더 잘 대표해 주는 제목을 사용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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