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말하다{김애란-비행운-서른}
- 작성자 송희찬
- 작성일 2024-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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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정신과 건물을 포함한 그 옆 건물까지 모두 학원으로 꽉 채워져있다. 그 곳을 갈 때마다 웃음기 없는 무표정한 학생들을 많이 본다. 특히 진료가 끝난 19시 쯤에는 돌덩이같은 가방을 등에 업고 버스에서 내리거나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친구가 막 학원에서 끝나 본인보다 더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등에 업고 가는 등의 행동을 보기도 한다. 이들을 보면 나는 학원을 다니지 않는 나와 다른 무언가가 등에 추가되어 있다고 생각이 든다.. 등에 무거운 짐이 추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솔직히 난 모르겠다. 아니 아는데 모르는 척 행동하는 것이다.
시간은 거슬러 올라가 내가 학원을 다녔던 중2 시절 우리 가족은 코로나적 어려움과 더불어 아빠 사업의 어려움으로 집이 많이 힘들어졌다. 그래서 그 때 학원 원장 선생님께 엄마께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져 수업을 이어가기 힘들 것 같아요."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가족은 당연히 그만두라고 하실줄 알았는데 원장 선생님은 나를 안았다. " 제 월급에서 까더라도 제가 가르칠게요. 공부할 마음이 있는 아이를 막으면 안되잖아요."와 같은 말을 하셨다. 그래서 기침이 시작 되기 전까지 난 그 학원을 다녔다. 원장 선생님은 가끔 책값을 받지 않으시거나 책값에서 만원을 빼서 주시거나 체험학습 때 나에게 3만원이라는 돈을 주시면서 "가죽지마. 힘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원장 선생님의 선의에 많이 감사했다. 지금도 이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마음 한 편으로 죄송하고 시험을 잘 쳐야 한다는 부담감이 많이 생겼었다. 어찌보면 내게는 집안의 어려움과 더불어 학업이라는 큰 부담이 생겼던 것 같다.
김애란의 소설집 <비행운>의 <서른>이라는 작품의 주인공 수인은 옛날에 재수생이었다. 집안 형편도 좋지 않아 서울에 있는 작은 독서실이었던 사임당 독서실에서 잠을 잤다. 다른 재수생들이었다면 재수 학원이나 일반 고시원애서 생활을 했겠지만 수인의 가족도 우리 가족처럼 힘들게 하루, 하루를 살아갔기 때문에 그녀의 등에도 짐이 있었다. 바로 부모님과 학업이라는 어느 사람에게는 무겁고 어느 사람에게는 가벼운 그런 무게가 등에 있었다. 수인은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아마 언니 눈에 제 뒤태도 비슷하게 보였겠죠? 우리 둘 다 꿈 말고도 이고 있는 것이 많으니 {290p]"이런 말이 있었다. 우리 모두의 뒤태는 수인의 말처럼 모두 비슷할 것이다. 어린이와 학생들에게는 부모와 학업이라는 짐이 있을 것이고 청년들은 생개와 친구가 있을 것이고 중년에게는 가족과 생계라는짐이 있을 것이고 노년에는 죽음과 사랑이란 짐이 있을 것이다. 이 때 수인이는 그저 열심히 사는 것으로 위 짐들을 내려 놓으려고 했다.
수인은 이런 짐들을 학원 강의, 다단계 회사 등 살인을 제외한 나머지 일들을 물, 불 가리지 않고 했다. 그러나 그 꿈은 위 책의 제목처럼 非 행운의 늪에 빠졌다. 다단계 회사에서 비 인륜적 행위들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결국 본인을 사랑해줬던 제자 혜인을 다단계 불행의 늪에 빠지게 함으로 몸에 이고 있는 짐보다 더 한 죄책감이 더 생겼다. 특히 혜미가 자살시도를하고 혼수 상태에 빠져있는 것을 들으면서 죄책감의 무게는 짐과 함께 점점 더 쌓여만 갔다. 이를 보면 서른이란 꽃같은 나이에 짐 꾼이 되어버린 수인이 안타까웠다. 또한 수인의 편지 내용 중 "너가 자라 내가 되겠지:::겨우 내가 되겠지{297p}" 라는 표현 때문을 보고 뒷 내용을 읽어서 그런지 미래 세계를 살아갈 청소년도 어린이들도 모두 본인처럼 짐을 쌓아가며 꿈을 잊고 자신을 아파하며 살아갈 것이라 위 소설이 말하는 것 같았다.
젊음에 기쁨이 순간에 살아지는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점점 늘것이다. "괄호 속에 갇힌 물음표처럼 시들어갔을 언니의 스물 다섯, 스물 여섯:::서른 하나"[292p}"이 말처럼 젊음과 행복을 즐기지 못해 꿈들이 저물어가는 순간들이 매 순간 찾아올 것이다. 지금의 나도 그렇고 학원가의 아이들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어른들까지 모든 행복이 힘들어질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든 최근 몇년간 자살률이 올라가고 최근에는 10대가 정신과 입원 비율이 제일 높다는 뉴스까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을 비난하고 공격한다. 그러나 우린 이제 그러면 안된다. 그들의 상황을 보고 그들의 짐을 덜어줘야 할 시간이 된 것 같다. 위 소설 수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아닐까? 더이상 자신과 혜미같은 피해자가 이 사회에서 발생하면 안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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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밖 청소년으로 살아가는 것은 또래와의 만남이 적어지는 일이었다. 10대 시절 학교라는 공간은 배움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친구를 만나는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공간에서는 매일 만남이 생기고 1년에 가끔 새로운 인연이 생긴다. 이런 학교라는 공간이 제외된 10대를 산다는 것은 친구와의 만남이 적어지고 친구와의 이별을 경험하는 것이다. 나 역시 학교를 나와서 많은 친구와 작별 해야했다. 그래서 지난 몇 달간 이별이라는 우울 속에서 살아갔다. 이 우울은 단순 헤어짐의 아쉬움이 아닌 또 다른 인연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과 외로움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감정은 여러 인연과의 작별과 재회를 통해 하나씩 사그라들었다. 학교를 나온 후 제일 기억에 남는 재회는 이라는 내 수필에서 등장하는 S와 K와의 만남이다. S와 나는 중학교 동창이면서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그래서 다시 만날 때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해 11월부터 S는 고등 2학년 내신과 수능을 대비하기 위해 나와의 만남을 멈췄다. 또한 고등학교 같은 반이었던 K도 그해 12월 초까지 시험기간이라 나와의 만남과 소통을 줄였다. 그러나 이 둘은 나와 우연을 배경으로 다시 만났다. K는 내가 우연히 보낸 카톡으로 다시 만났고 S는 25년 구정에 할머니댁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났다. 나는 이로 인연을 통한 만남과 이별의 우연성과 연결됨의 힘을 느꼈다. 이런 힘을 믿으면서 찰리 맥커시의 동화 원작인 애니메이션 을 시청했다. 위 애니메이션은 제 95회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25년도에 되어서야 위 작품을 시청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단편 애니에 큰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살아감과 사라짐에 대한 주제로 시와 소설을 쓰기 위해 여러 자료를 찾던 중 이 작품을 보게 되었다. 의 시작은 설원에 홀로 있는 소년과 두더지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소년은 길을 잃었고 두더지는 배가 고팠다. 배고픈 그의 눈에는 나무가 케이크로 보였다. 두더지는 실망했지만, 소년은 그를 다독이며 나무 위에 올라가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의 주제는 꿈으로 소년은 "친절한 사람"이라 답을 했다. 그러나 두더지는 의문을 가지지 않고 그의 말에 "친절함을 이기는 것은 없지"라고 답했다. 그리고 이후 배고픈 여우가 나타나 나무 위에 있는 그들을 먹으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포기한 여우는 다른 곳에 가던 중 덫에 잡혀 움직이지 못했다. 이대로 있으면 꼼짝 못 하고 죽을 여우였지만 두더지가 그를 도움으로 여우는 살 수 있었다. 두더지는 친절을 시행한 자였다. 그래서 그는 속박에서 벗어난 여우의 굶주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또한 소년과 집을 찾다 물에 빠져 죽을 위기에 놓였을 때 여우의 도움을 받아 살 수 있었다. 이는 친절에 대한 가치를 이야기 했다. 뒤 내용을 더 이야기하면 소년과 두더지 그리고 여우는 집을 찾으러 가던 중 숲속에서 말을 만나고 신나게 집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던 중 그들이 너무 흥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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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31
나는 문장을 쓰는 사람이다. 문장을 매일 쓰면서 "나는 무엇이고,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하곤 한다. 이 고민은 올해 10월 말부터 11월 말에 정점을 찍었다. 글을 필사하기도 하고 글을 읽고 새로운 생각을 하면서 이 생각의 답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 결과 나는 '천성'을 표현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 결론은 최종적 답이 되지 않았다. 이는 또 다른 생각을 부르는 질문이 되었다. 그 질문은 "천성은 무엇일까? 내가 쓰고 있는 글은 나의 천성을 잘 담고 있는가?"였다. 우선 천성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봤다. 천성이란 본래 타고난 성격이나 성품을 말한다. 이 점에서 현재 내 모습을 돌아봤다. 나의 천성은 겁이 많고 소심하다는 것이 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내 모습을 보면 적극적이고 활발하고 밝은 사람이라 말한다. 이 점으로 볼 때 나는 천성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 문장 역시 천성을 온전히 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나 자체도 천성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면서 글을 여러 번 퇴고하기 때문이다. 그럼 내가 써야 하는 문장과 나는 무엇인지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이를 다룬 시 중 최근작이라 볼 수 있는 24년도 매일신문 신춘 문예 당선작인 강지수의 을 다시 꺼내봤다. 처음에 을 읽을 때는 별생각 없이 읽었다. 선천치라는 소재도 그렇고 "대자로 뻗었을 때 혹은 동명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6행 中)"나 "내가 어딘가에 남길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자국이거든요(18행 中)"와 같은 시적 문장들도 내게는 어렵게 다가왔다. 그러나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다시 꺼낸 순간 위 시가 가진 힘을 느끼게 되었다. 이 시가 가진 힘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천성이다. 여기서 말하는 천성 역시 자신이 가졌던 고유한 성격이나 성품을 말한다. 에서는 몇천 분 일의 확률인 선천치 경험으로 천성을 말하고 있다. 우선 이를 알기 위해 선천치의 개념을 알아봐야 한다. 선천치란 태아 때부터 자라서 출생할 때 이미 나와 있는 치아를 의미한다. 이는 화자에게 엄연한 천성이다. 그렇다면 "천성은 좋은 것인가?"라고 묻게 된다. 그러나 시의 초반부에는 천성은 좋지 않게 묘사되고 있다. 예를 들어 "최초의 관심과 수치의 흔적이 앞니에 누렇게 기록되었지요."(5행 中라던지 "왜 어떤 흔적은 흉터로서 역할 하지 못하고 삭아버리든지( 7행 中)"라는 구절이 있다. 이 두 구절에서 천성은 화자에게 수치적인 것뿐 아니라 천성이 사라졌을 때 상처까지 준 존재가 되어있다. 그러나 시는 후반부에 여러 도약을 통해 앞의 생각을 뒤집고 있다. 특히 "무 이파리가 시들해서 죽은 줄 알고 뽑아보면/ 막상 썩지는 않은 경우가 많답니다/ 싱싱하지 않을 뿐/살아는 있어요/ 매운 향을 뿜으며( 12~16행 中)"라는 구절과 "가끔 손등을 깨물어요 그러면 삐죽 튀어나온 앞니 두 개가 찍힙니다 나는 그것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어요/ 내가 어딘가에 남길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자국이거든요 벌겋게 부풀어 오르는 피부까지도(17행 中)"라는
- 송희찬
- 2024-12-26
지난 6월 나는 가뜩이나 좋지 않던 몸이 더 나빠졌다. 기침이 지속적으로 평소보다 더 심하게 나왔다. 이런 이유로 6월부터 9월 초까지 학교를 나가지 못 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9월 10일 나는 자퇴서류를 쓰게 됬다. 마음도 많이 복잡하고 힘들었다. 그래서 그럴까? 평소에 잘 써졌던 글이 써지지 않고 쓰더라도 감정을 토하고 우울함만 풍기는 그런 시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고민을 많이 하고 시집을 많이 읽었다. 읽은 시집은 위로를 받은 사람들이 많은 박준 시인의 시집, 허수경 시인의 시집, 나태주 시인의 시집 등이 있다. 박준 시인은 ,허수경 시인의 ,나태주였다. 짧게 위 시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허수경, 박준의 시들은 하나같이 화려하면서 담백하고 울림있다. 나태주의 시는 투박하지만 그 속의 울림이 강했다. 그러나 위 시집 3편 모두 나의 마음을 달래지는 못했다 .그렇게 좋은 시집만 건지고 정작 마음을 위로해주는 시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글틴 자유 게시판에 마음에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시집을 추천해달라는 글을 올리게 되었다. 그래서 추천받은 시집이 나희덕의 였다. 그러나 시집 한 귄으로 부족하여 평소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던 글티너에게 개인적으로 물어봤다. 그의 답에는 여러 시인이 있었다. 그 중 눈에 제일 많이 갔던 시인이 신용목 시인과 차도하 시인이었다. 신용목 시인은 근간들을 추천을 했고 차도하 시인은 그녀의 유일한 시집인 을 추천해줬다. 이 둘의 작품을 도서관에서 찾는데 차도하 시인의 시집은 도서관에 없기에 패스했다. 그렇지만 다행히 신용목의 시집은 집 근처 도서관에 신간인 가 있어서 읽게 되었다. 위 시집은 읽고나서 후회를 많이 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위 시집을 읽고 인생 시집을 찾았다고 기뻐했다. 그 이유는 신용목이 학교를 졸업하거나 포기한 사람들을 공감의 방식으로 위로했기 때문이다. 특히 서시인 와 제목에 쓰인 가 내 맘 깊은 곳까지 울렸기 때문이다. 위 시들중 제일 먼저 이야기 하고픈 시는 다. 다음은 위 시에 한 구절이다. 나는 이미 수업에 늦은 사람 학교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나를 세 명의 사라진 사람으로 만들고 있을 것이다 라는 제목을 볼 때 새학년 새학기 친구들의 만남과 설렘을 그린 시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시에 내용은 상반대였다. 특히 위 구절은 자퇴를 한 내 모습까지 투영되어 많은 공감을 이루어 냈다. 특히 '이미 수업에 늦은 사람'은 아무리 늦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도 늦게 되있고 수업을 듣지 못하는 느낌을 줘서 나로 하여금 자퇴생을 연상시켰다. 그러면서 뒤를 읽는데 '세 명의 사라진 사람으로 만들고 있을 것이다' 위 구절은 나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든 자퇴도 교실 입장에서 보면 교실 내에서는 사라진 사람이라 칭한다는 것을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어 현실성 있게 느껴졌다. 위 때문일까? 나는 많은 공감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뒤를 이어서 나의 마음에. 욺튼 시는 1부의 였다. 위 시는 10페이지 이상의 분량을 가진 장시다. 그래서 처음 읽을 때 집중력이 흐려졌다. 그러나 신용목은
- 송희찬
- 2024-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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