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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달리는 열차(제22회 한국청소년문학상 공모전 동상 수상작)

  • 작성자 아기호랑이
  • 작성일 2023-12-10
  • 조회수 398

네가 이 편지를 받았을 때 나는 이미 죽어있을 거야. 난 죽음을 달리는 열차에 올랐거든. 


이 열차는 멈추는 법이 없어. 철도가 끊어지더라도 계속해서 바퀴가 굴러갈 거야. 그 끝이 어딘지 모르는 것은 당연해. 목적지가 없거든. 내가 뽑은 열차 티켓에도 목적지가 빈칸으로 남아있어. 나는 그 자리에 DEATH라고 당당히 적어둘 거야. 


그래, 맞아.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열차에 타지 않았어. 출발점은 있는데 도착점이 없어. 철도는 계속해서 연장되겠지. 시간은 무한대로 흐를 것이고 내가 죽은 후로도 세상은 영원할 테지. 그 사이에 놓인 삶은 아무것도 아니야. 나의 삶 이전에도, 나의 죽음 이후로도 무한한 시간이 존재해.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주의 시계 속에서 내가 차지하는 비중은 미세한 점 하나에 지나지 않지. 삶은 동시에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의 일부가 돼. 


세상의 목적지는 없겠지만, 나의 여정이 계속될 수는 없어. 나도 언젠가는 죽겠지. 그때가 내 인생의 종착지가 결정되는 순간이야. 나는 삶의 마지막을 함부로 결정하지 않을 테야. 꼭 여기에서 멈춰야 할까. 한 걸음 더 나아가도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만, 그 순간이 모인 결과에는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굳이 이를 마다하고 삶을 일찌감치 놓아버릴 이유는 없지. 시간은 영원하고, 열차는 달리고, 철도에는 끝이 없는데, 모든 것이 나아가고 있는데. 멈출 필요는 없잖아. 


가만 생각해 보면 나는 지금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아. 나는 창밖을 보면서 멀리 떠났다고 생각했어. 근데, 그거 알아? 내가 아직도 기차의 마지막 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방법을 알려줄까. 나를 둘러싼 세상을 통째로 밀어버리면 돼. 


이제 가만히 앉아있는 것에 질렸어.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것이 전부였던 과거에서 탈피하고 움직임을 보여야 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졌어. 끝없이 펼쳐진 여정이 마치 자유를 상징하는 것 같았거든. 


지금까지의 기억은 없었던 거야. 새로운 공간에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이때까지 경험해 왔던 것들이 미래의 삶에는 영향을 끼칠 수 없도록. 남은 평생을 걸어도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능한 멀리. 


*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너 때문이기도 해. 너한테서 멀어지고 싶었어. 정확히 말하자면 너에게서 비롯된 고민을 그만두고 싶었어. 너무 멀리 와버려서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갈 수 없는, 아무리 고민이 많아져도 기억조차 나지 않을 그곳. 그런 장소를 찾아 나서면 괜찮을 거로 생각했어. 내가 한평생 도달하지 못할 상상 속의 좌표를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목적지가 주어져 있다면 시작과 끝이 명백하겠지. 그런데 결말이 밝혀지지 않은 세상에서는 최후의 운명을 정해두지 않아.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시작이 중요해. 결과는 발단과 이후의 과정이 결정해. 여정을 거꾸로 따라가다 보면 비로소 처음의 순간을 향할 거야. 이 순간을 분명한 점으로 나타낼 방법은 없어. 어느 순간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에 따라 서서히 발현되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일부로 스며드는 거야. 


의도치 않게 시작된 이 여정을 멈추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환상에 가까운 소망이라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아무런 진전이 없잖아. 다급한 마음에 확답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어. 그러다가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게 되리라고 말해줄게. 


네가 여전히 나를 쫓아오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아직도 쫓기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음은 분명해. 나의 앞에는 개척해야 할 미래가, 뒤로는 지나왔던 과거가 나열되어 있어. 전진하는 과정에서는 어느 길로 향할 것인지 선택해야 해. 이때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어야 하지만 자꾸만 외부의 압력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느낌을 받아. 달리기에 급급한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렸어. 


나는 아무리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마라톤 트랙 위에 서 있어. 잠시라도 가만히 멈춰 서면 금세 잡힐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차마 고개를 돌려 과거를 마주하기가 두려워. 지금까지 나아간 미래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를 돌아보고 경로를 정비하는 시간이 필요해. 하지만 그 순간이 나에게는 긴 시간이고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야. 나는 언제나 뒤를 보는 것을 꺼리고 마냥 걸음을 옮겼어. 과거의 기억 때문인가 봐. 


*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둘러싼 각자의 원 안에서 살아가고 있어. 어떤 이들은 그것을 삶 자체로 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개인의 영향력이라고도 해. 그 원들은 모두 달라. 크기도 색깔도 질감도 온도도. 시간이 더해질 때마다 조금씩 바뀌기도 해. 


많은 이들이 다채로운 색을 빛내기 위해 노력해. 그들이 형성하는 관계는 언제나 아름다운 그러데이션으로 영롱하게 채워져. 접점 안으로 새로운 색이 스며들어. 그들은 질감과 온도의 사잇값을 가진 특별한 분위기의 공간을 구축해. 그 공간이 마음에 들 때면 더욱 확장할 수 있지. 정성 들여 가꾼 공유지에서는 우정 가득한 만남이 이루어져. 


그런 의미에서 나의 투박한 동그라미는 고요함이 가득했어. 나의 원은 항상 홀로 허공을 떠다녔어.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비행을 즐겼지. 모두가 교집합을 형성하고 있을 때, 나는 관심을 두고 들여다보지 않았어. 무덤덤한 감정에 변함없는 풍경. 참으로 단순한 그림이 조촐하게 걸려있어. 


나의 세계에 누군가가 발을 들인 것은 네가 처음이었어. 근데 네가 온통 검게 물들어 있을 줄은 몰랐지. 검은색은 다른 색의 빛깔을 앗아가. 다른 고유의 색과 융합되는 것이 아니라 그 위를 어둠으로 덮어버리지. 원래의 색은 자취를 감추고 세상이 온통 검정의 향연으로 채워져. 


너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어. 나의 영역에 침투해서는 자신의 색을 주입하고 본래의 색을 돌려주지 않는 존재. 검정이 세상을 채워가는 동안 너는 누군가의 정신을 지배할 힘을 갖췄어. 나도 먹물을 뒤집은 채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아. 밤이 찾아오면 제대로 된 형체도 보이지 않아. 


나는 오히려 밤의 존재를 감사하게 여겨. 그 범위 내에서는 자유롭거든. 너를 비롯한 누구도 나를 볼 수 없어. 사람들의 첨예한 시선에서 벗어나는 거야. 낮이 되면 온몸을 뒤덮은 시커먼 자국을 지워야만 했거든. 너는 그게 얼마나 비참한 짓인지 몰라. 매일 아침 비누칠을 하더라도 집에 돌아오면 이미 타르 같은 끈적한 검정에 갇혀있어. 살아보겠다고 숨을 쉬면 세상에서 가장 점성이 강한 액체가 목구멍 안으로 밀려 들어오지. 죽을 것만 같아. 


*


허파 안쪽까지 채워진 격정의 덩어리들을 뱉어내. 고요함으로 뒤덮인 밤에는 죽어가는 심장 소리마저 살겠다는 몸부림으로 보여. 세정액을 들이부어도 지워지지 않는 악독한 찌꺼기가 기도에 박혀. 낮이 밝으면 커가는 걱정의 공기가 숨통을 조이는 시선으로 뜨겁게 달궈져. 억눌러진 입으로는 고함을 지를 수 없는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시선을 거둬. 


짙은 그림자를 떼어내기 위해 기차에 오른 나는, 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를 바랄 뿐이야. 마음껏 숨 쉴 수 있는 어디론가 향해. 설령 의미 없는 경주라 하더라도 고개를 들고 힘껏 달려. 너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한눈에 볼 수 있을 거야. 나의 발걸음이 닿아 버려진 거리에는 지워지지 않는 새카만 흔적이 남거든.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는 오직 나뿐이었어. 달릴 때보다 달리고 난 후가 더 힘든 법.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뜨거운 숨을 고르는 이때 난 살아있음을 느껴. 눈서리처럼 차가운 겨울의 공기가 숨결에 닿아 입김을 피워내는데. 언 듯이 굳어버린 목에 새벽의 수증기가 맺히고 이슬이 떨어져. 김 서린 안경에 기운 빠진 몽롱한 얼굴. 어지러운 환각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 마스크를 내리고 심호흡해. 다시 한번 찬 공기를 머금고 후끈한 숨을 내뱉어. 그럼에도 나아지지 않는 심정으로 목구멍이 꽉 막힌 듯했지. 


안경에 맺혀있던 숨결의 잔상이 사그라들고 렌즈 너머의 세상이 보이기 시작해. 눈이 내리는 겨울이야. 분명 작년 이맘때면 여름이었는데. 무성한 초록은 어디로 가고 창백한 무채색이 표면을 뒤덮었을까. 한여름에 심장이 어는 한기를 경험해. 그 사이의 봄가을은 사라진 지 오래. 극과 극의 계절만이 반복될 뿐 평화는 멀리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어. 날카로운 시선 사이에서 얼어붙은 작은 몸뚱이는 언제나 그 자리를 지켰어. 


*


내가 어째서 너의 눈에 띄었을까. 우연히 겹친 동선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어떤 심경의 변화일지도 모르지. 분명한 건 좋은 감정이 아니었다는 거야. 


그날도 마찬가지였어. 네가 누군가의 시선을 피해 나에게 접근할 수 있었던 곳이었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표적이 되어 찢겨나가. 곳곳에 구멍 뚫린 나의 절망은 아물지 않아. 한 번 심어진 절망의 무게는 점차 늘어나. 족쇄가 되어 심해로 가라앉아. 허파에 물이 차오르는 고통을 느껴야 하는 나의 처지에 낙담했어. 시간이 흐르면 저항할 힘을 잃게 돼. 발버둥 치던 팔다리가 늘어지고 입가에는 공기 방울이 부스러져. 기운이 빠지는 게 체력 탓인지, 의지의 결핍 때문인지 모르겠어. 단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서 그런 것 같아. 


너는 때가 되면 나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어. 막혀있던 기도가 풀리며 한껏 공기를 들이켜. 물에 젖어 무거워진 몸은 아래를 향해 있어. 바다가 제 고향인 듯, 먹먹한 귓가에 맴도는 적막함을 그리워해. 살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이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랐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삶이 반복되거든. 끝없는 구속의 향연이 이어져. 그 굴레에 갇혀버린 생명 중에서 활기를 띠는 존재는 없어. 주검과도 같은 상태의 미약한 살덩이가 수없이 담금질 되어 바닷물에 절여지고 있어. 연거푸 몰아치는 파도에 치일 뿐이야. 


계속해서 파도가 덮쳤어. 심해가 고요의 산물이라면 수면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 요동쳐. 그 사이 어딘가에서 고통받지 않으려면 운명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야 해. 물살을 거스르며 파도를 넘어 봐. 아무리 발버둥을 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 일말의 전진 후 파도에 맞아 밀려나게 돼. 때로는 중심을 잃기도 해. 어떻게 해도 항상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거야. 달라지는 건 없고 폭풍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때 내가 파도에 운명을 맡겼다면 어떻게 됐을까.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저편으로 밀려났겠지. 아마 까마득한 망망대해가 펼쳐졌을 거야. 정확한 좌표도 모르는 지점에서 쓸쓸히 시들었을지도 몰라.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망연자실하며 천천히 가라앉게 되었겠지. 만일 살겠다는 의지와 희망이 아른거린다고 하더라도 소용없어. 평생 수영해도 바다가 전부인 위치에 남겨질 거야. 애초부터 불가능한 지점에. 일말의 가능성마저 무참히 잠식되고 허탈한 웃음이 덩그러니 남아.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기에 폭풍에 휩쓸리지 않고 그 자리에 버티고 설 수 있었어. 그 감내가 없었다면 이곳에 남아있지 못했을 거야.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으려는 의지,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정신. 온갖 괴로움에 몸부림치면서도 물러서지 않을 용기가 필요해. 무너지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나를 살렸어. 


잠시 비바람이 잠잠해진 그곳은 태풍의 눈과도 같았어. 가장 극심한 고통이 몰려올 때면 이미 익숙해진 감각이 타격에 무뎌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정신 상태는 더 이상 무너질 일도, 고쳐질 일도 없어. 몽롱한 어둠 속에서 고요가 찾아와.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아. 심장은 굳어가는 데 육체는 하늘을 날아. 이때 의식을 놓으면 안 돼. 저기를 봐. 폭풍우가 몰려오잖아! 


*


죽을힘을 다해 뛰어. 눈 쌓인 얼음장을 맨발로 디뎌. 얼어붙은 발걸음이 힘겹기만 해. 다리가 무거워진 것 같다가도 흔적 없이 사라진 감각에 겁에 질려. 전방으로 고정된 시선이 좌우로 휘청이며 배경이 일그러져. 뒤를 돌아볼 수 없어.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쉴 틈 없이 앞으로 나아가. 비틀거리는 마음에 쓰러질 것 같아. 


한참이 지나도 녹아내리지 않는 고통을 짓누르는 과정이야.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파인 발자국 안으로 채워 넣어. 조금씩 덜어질 것 같았던 감정은 지워지지 않고 내가 간 길에 고스란히 남아있어. 감정은 더하고 뺄 수 있는 개념이 아닌가 봐. 가지고 있는 감정이 그대로 묻어나 굳어지고 있어. 감정은 눈 속에 녹아들어 조금씩 희석되지만 내가 지니고 있는 감정의 덩어리는 가벼워지지 않을까. 


방황하듯 걸음을 옮기다 보면 시작도, 끝도 없는 지점에 있게 돼. 저 뒤로는 이때까지 내디뎠던 과거의 발자취들이, 저 앞으로는 나아가야 할 눈밭이 장황하게 드러나. 눈 속으로 파고드는 발자국의 개수만큼 과거의 흔적이 메꿔져. 계속해서 진전하지만, 변화 없이 이어지는 풍경에 지쳐가고는 해. 


목적지도 없이 거대한 백지를 거닐다 보면 회의감이 들어. 두서없이 걷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침울한 세상에서는 달라지는 것 하나 없는데. 실상을 외면하기에는 돌아설 수 없는데. 오직 나만이 애쓰고 있는 세상에서 이룰 수 없는 것들을 봐. 속내의 응어리를 억누르고 고함치며 달려도 나아지지 않아. 


방향감각이 무뎌질 때쯤이면 눈 앞을 가리는 안개가 가득 들어차 있어. 오직 나의 감각에 의존해야 하는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가끔은 나의 존재마저 불확실해지는 것 같아. 이 순간이 두려운 것은 나 자신조차 믿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의구심이 늘어. 어렵게 한 걸음 나아갔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어. 계속해서 같은 고민을 해야 해. 그러다 보면 하루에 몇 걸음 가지도 못해. 


지나온 길을 보면 지금까지 행해왔던 고민이 다 부질없는 것 같아. 주저하며 선택했던 방향에는 큰 의미가 없었거든. 위에서 보면 삐뚤빼뚤한 점선이 맥없이 이어질 뿐이야. 그럴 바에는 한달음에 달려왔어도 괜찮았는데. 이제야 알겠어. 앞이 보이지 않을 때의 목표는 그 순간을 벗어나는 거야. 좀 더 멀어져서 보면 해답이 나와. 어긋난 방향을 바로잡으면 돼. 


*


충혈되어 반쯤 잠겨있는 눈에 쓰러져 가는 철골 구조물이 아른거렸어. 처음에는 그게 뭔지도 몰랐어. 다만 내가 어디론가 왔다는 사실에 안도했어. 매번 똑같았던 풍경에서 벗어나 변화가 싹트기 시작했으니 말이야. 


낡은 구조물은 지붕 대신 측면의 앙상한 뼈대가 안으로 굽어 의자를 감싸는 형상 있었는데, 펑펑 내리는 눈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나 봐. 하나밖에 없는 의자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 녹슬어 있었어. 나는 이 허름한 정류장을 여정의 이정표로 삼기로 했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어. 


내가 의자에 앉았을 때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아늑함이 느껴졌어.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 나와 같은 처지의 누군가가 의자에 기대어 열차를 기다렸을 거야. 버려진 정류장에는 열차가 서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만히 앉아있는 모습을 그렸어.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은 이유는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테니까. 한겨울의 비바람을 맞은 사물들은 얼었지만, 사람들의 온기는 이를 녹이는 역할을 해. 세월이 훌쩍 지났더라도 어렴풋이 남아있는 흔적을 공유하고 싶었어.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어. 시야를 가리는 녹슨 철골마저 하늘의 일부분인 것 같아. 시선을 가로막는 것들을 피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볼 수 없어. 장애물은 넘으라고 있는 거야. 앞으로 먼 길을 가야 해. 눈 사이로 드러난 선로의 양 끝에 올라 달리는 열차처럼. 세상에 놓인 많은 수평선을 건너야 하겠지. 


*


멀리서 들려오는 경적에 눈을 떴어. 언덕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희뿌연 연기가 보여. 굴뚝 위로 솟아오른 연기가 하늘을 뒤덮겠지만 바람에 산산이 흩날려. 이제 앞이 보이지 않는 여정은 없어. 열차에 오르면 새롭게 살아갈 원동력을 얻게 되지. 빠르게 달려가면 돼.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열차가 허름한 정류장에 자리를 잡았어. 나는 어디론가 가고 싶어 했을 누군가의 영혼과 함께 기차에 올랐어. 그들과 하소연을 주고받을 참이었지. 다시 한번 바람이 불자 냉혹한 추위와 함께 그들의 윤곽이 말끔히 사라졌어. 난 냉기가 서린 열차에 홀로 남아 고요와 무언의 대화를 나눴어. 


주위를 살펴 인기척을 느끼려 해도 나의 허망한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어. 주인을 놓친 의자들이 무의미한 질서를 갖춰 장황하게 이어졌어. 의자의 존재는 어디에서나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어. 지나치게 한적한 복도가 하나의 길이 되어 이어졌어. 그 길이 나를 어디론가 인도하는 것 같았지. 이끌린 듯 걸음을 옮겼어. 구두 소리조차 울리지 않는 분위기에 일관된 마찰음만이 들려왔어. 


맨 앞칸에서 멈추어 선 나는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어. 기관실 너머를 기웃거리다 손을 말아 쥐고 노크했어. 똑똑. 누구 계세요?


그렇게 한참 기다리는 동안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 문고리를 수평에서 수직으로 돌렸어. 그냥 열리더라. 힘없이 처지는 문고리가 수년간 아무도 탑승하지 않았을 열차의 상태를 보여주었지. 


도대체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열차가 운행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같이 피폐해진 이들을 실어 나르는 목적은 아닐 테고, 차라리  너 같은 아이들을 멀리 보내버렸으면 좋겠는데. 어쩌면 이 열차도 용도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것일 수도 있어. 그들에게 방황이란 기껏해야 정해진 노선을 하염없이 도는 것뿐이겠지만. 


철도라는 외길에 의지해야 하는 운명은 열차를 하염없이 달리게 해. 열차는 앞으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방향은 정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야. 갈림길을 앞에 두고도 주어진 길에 따라 돌아서야 하지. 처음에는 편하다고 느껴졌던 것들이 얼마나 단편적인 삶을 만드는지 알게 됐어. 힘겹기만 느껴졌던 고민이 얼마나 필요한 것이었는지. 


무작정 눈에 보이는 길을 따라가려 하는 마음이 있어. 정답이 주어진 듯해. 별다른 고민 없이 나아가던 성의 없는 걸음을 멈춰야겠다고 느낄 때가 왔어. 


그렇게 앞을 주시하다 보면 주변을 둘러보지 않게 돼.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해도 보지 못할 운명이 되고 말아. 달리는 기차 속에서 사람들은 보통 창밖을 바라보지. 목적지를 응시하지 않고, 그 과정을 누려. 


자신의 앞에 놓인 길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어. 그 방법은 길을 보지 않는 거야. 시선을 흙바닥에 두면 아무것도 볼 수 없어. 인생이 펼쳐질 들판을 마음껏 가로질러. 때로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두려움에 떨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결국 햇살에 녹아 들판을 무성하게 가꿀 거야. 


달리면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것만 같잖아. 사실은 그게 아냐. 두터웠던 감정의 퇴적층이 떨어져 나와, 발밑의 디딤돌이 되는 거야. 단단하게 쌓인 감정을 디뎌. 든든한 버팀목이 될 거야. 다시금 어둠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나를 밝히는 빛이 될 거야. 


*


너의 정신은 아직도 타르 속에 파묻혀 있겠지. 다른 이들의 들판을 시커멓게 물들이고 있잖아. 그때 넌 참 행복해하는 것 같아. 검은 잡초더미가 사방을 잠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지금은 잡초가 나를 덮었지만 결국 너에게로 향하는 날이 올 거야. 온 세상의 빛이 차단되는 날에는 돌이킬 수 없는 암흑이 찾아올 거야. 


너의 온몸이 불순한 물질로 차오른 것도 모르고 점점 더 깊은 어둠으로 가라앉고 있어. 도리어 빠져나올 수 없는 어둠에 갇혀 헤엄치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아. 타르가 무한히 채워진 수영장에서 의미 없는 잠수를 지속하고 있지. 숨이 막혀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타르로 배를 채우는 데 급급해. 


주위를 둘러싼 어둠은 죽음과 가까이했다는 사실을 감춰. 너는 위험한 순간을 곁에 두고 있어. 수영장 더 깊숙한 곳으로 빨려 들어가면서도 네가 오래 숨을 참을 수 있었던 이유는 왜곡된 시간의 축을 사용했기 때문이야. 너의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점성이 강한 액체 사이에서 죽은 듯이 천천히 흘러. 그 강력한 힘의 원천은 다른 이의 삶을 빼앗는 데서 나오지. 


너의 존재로 인한 누군가의 괴로움은 젖은 이불에 스며들어 무색의 영혼을 잠재우고 있어. 암실에 잠겨있는 흐느낌은 아무에게도 꺼낼 수 없는 작은 울림이 되어. 질척한 공기를 떠다니는 이슬에 담겨. 하염없이 걸음을 옮기는 발등에 떨어져. 


네가 쳐놓은 장막에 들어선 어둠이 깨어나지 않는 밤을 만들어. 일말의 빛도 없는 세상에 살면서 왜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건데. 점차 넓혀지는 어둠에 길 잃은 사람들이 많아. 이제 좀 그만해 줄래. 


어둠은 빛을 싫어해. 길을 찾고 싶다면 불을 밝혀. 폭풍우에 꺼져있던 심지에 불을 붙여. 가라앉은 심해의 출구를 향해 다가가. 산책하다 놓친 햇살을 다시 봐. 얼룩진 모습을 감추려고 소굴로 기어들어 가지 마. 언젠가 무엇을 느끼고 깨달았으면 좋겠어. 그런 말 한마디면 돼. 


나도 잘한 건 없어. 암흑에 수긍하는 삶을 살았으니까. 이제 나는 빛을 머금을 거야. 어디론가 향한다는 것의 의미는 더 밝은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내포하고 있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구원을 기다리면 안 돼.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소굴에서 빠져나와 밤의 산책을 시작해야 해. 해를 피해 숨어드는 그림자가 되지 마. 


머금고 있던 타르를 모두 게워 내. 온몸을 휘감고 있던 검은 조각이 떨어져 나가. 마지막까지 붙어 있으려는 어둠의 발악을 떨쳐내. 철로 사이로 까만 선이 그어져. 이때까지의 방향을 알려주는 화살표. 새로운 여정의 시작점이 될 이정표. 선을 긋고 나면 선명하게 드러나.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이 선을 보고 있을 너에게 물어. 나는 널 피해 여기까지 왔는데, 어째서 넌 아직도 어둠 속에 머물러있는 거야? 


나는 이제 열차의 마지막 칸에서 벗어날 거야. 창밖을 보며 내가 살아가게 될 세상을 먼저 살필 거야. 열차는 더 이상 정해진 길을 향해 달리지 않아. 새로운 희망이 조종간을 잡았어. 세상을 다시 한번 밀어내. 내가 원하는 곳으로 노선을 틀어 삶을 움직일 거야. 빛을 향해 나아갈 테야. 


*


열차의 속도가 서서히 줄어. 잠시 휴식이 필요할 때가 있어. 어느 외딴 역에 살포시 내려. 


차가운 공기 속에 스며든 따스한 햇볕이 나를 미소 짓게 해. 내가 마주했던 시간 중 빛이 사라졌던 적은 없었어. 어둠이 걷히기를 기도하며 항상 빛나고 있어. 하루하루 잠들었던 시간 속에 숨어들어 스며들 날을 찾고 있는데. 밝아오는 새벽에서 비로소 아침을 맞이할 희망을 손에 넣었어. 


언제나 아침이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지 말길. 결국에는 다시 밤이 찾아오게 되어있어. 그럼에도 길을 잃지 말고 걸어가기를. 언젠가 아침은 올 거야. 


설산이 녹은 자리에 잔잔한 온천이 데워져 있어. 초록 호수에 몸을 담그면 온갖 걱정거리가 사라지는데, 나는 왜 이 무거운 짐을 평생 안고 갈 생각을 했을까. 아무리 차가워도 빛이 있는 공간에는 따스함이 남고, 때로는 뜨거워진 마음에 만년설이 녹는데. 잠시 웃음에 취해서 고통 따위 잊어버리고 싶은데. 


한동안 열차는 멈춰있을 거야. 이제 난 어둠에서 멀어졌거든. 어쩌면 다른 어둠에 빠진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달려갈지도. 암실에서 빛을 발견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해. 입꼬리를 조금만 올리고 발걸음을 옮겨봐. 


여전히 죽음은 가까워지고 있지만, 잠시 생각을 접어두도록 해. 앞에 펼쳐질 길이 마냥 어둡지만은 않을 거야. 폭풍이 몰아치는 날에는 다시 여행을 떠나게 되겠지. 새로운 정류장을 발견할 날을 그리면서 미소 짓고. 빛을 향한 여정을 재개할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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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흙과 비

비가 조금 내리고 국화 핀 향기가 나고, 무덤 앞에서 무너져버린 너를 봤어. 네가 나의 품에 안기던 날, 우리가 피워낸 한 송이의 꽃을 기억하니. 너는 무서운 속도로 추락했고 나는 그런 너를 먹었어. 우리의 아름다운 꽃은 그렇게 잔인한 세상에서 태어난 거야. 초록이 자라나는 봄이 되었고, 구름 위에서 숲을 내려다본 너는 내가 보이지 않았을 거야. 네가 얼마나 용기 있는 결정을 내렸는지 알아. 나무들 사이에서 피어난 우리의 꽃은 네게 너무나도 멀었어. 이따금 나는 너에게 꽃을 잘 보살피겠노라 말했어. 그러면 넌 언제나 투명한 웃음을 보내주었지. 그래, 고운 정 미운 정 다 들었다는 거 알아. 네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때, 너만을 기다리는 꽃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시간이 지날수록 몸 한구석에 깊게 파인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어. 괜히 서러운 울음을 참았어. 너는 언젠가 내가 너를 가두고 있었다고 털어놓았지. 내가 너를, 먹었다고. 그 후 내게 상처였던 시간은 너에게 감옥이었겠지. 나는 너를 품고 놓아줄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아. 내가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던 날, 너도 함께 울었어. 비가 조금 내리고 국화 진 향기가 나고, 무덤 앞에서 무너져버린 너를 봤어. 나는 몰랐고 너는 알았어. 우리의 꽃이 죽어버린 날을. 너의 부재는 나의 부정이었고, 나의 무지는 너의 무게였어. 그럼에도 나는 국화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었어. 네가 고개를 저으며 마른 눈물을 삼킬 때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어. 죽음의 생명이 죽었다고. 우리는 영원히 살아갈 수 있었기에 죽음의 존재를 너무 쉽게 부정했는지도 몰라. 다만 신은, 우리에게 영원을 그냥 주지 않았어. 그만큼 생명은 소중했고, 죽음 또한 이치였어. 그럼에도 첫 꽃을 떠나보내야 했던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에 벅찼었나 봐. 네가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던 날, 나는 마른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어. 나는 네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어. 우리의 예술가가 떠났어. 항상 흰 모자를 쓰고 다니던 그에게 조금 더 많은 모자를 씌워주고 싶었어. 우리는 한 해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다며 뿌듯해했어. 나는 그 역시 행복한 줄로만 알았지. 그가 유언을 남길 수 있게 되던 날, 우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목소리를 들었어. 모자가 너무 많아. 그것은 사실이었어. 그에게 씌워준 모자의 개수만큼 우리는 생명을 책임져야 할 거야. 언젠가 내가 바람에 날리고 네가 사선으로 내릴 때,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자.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눈동자를 감아보자. 우리의 눈물이 곧 생명의 탄생을 의미할 테니까. 무덤 속에는 어린 예술가의 모자 하나가 남았어. 나는 그것을 보지 못했지만, 알고 있었어. 모자에는 작은 씨앗이 하나 들어 있었어. 모자를 껴안고 겨울을 보냈어. 비가 조금 내리고 국화 핀 향기가 나더니—.

  • 아기호랑이
  • 2024-04-27
#5. 원래 그랬던 것처럼

1나는 언제나처럼 턱을 괸다. 딱 쓰러지지 않을 만큼만. 힘을 주고 버틴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한다. 제각각 틀어진 각도의 부조화는 사회적인 불만이 있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다만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단지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뿐이다. 남들이 모두 정자세로 앉아있을 때 홀로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기는 것이다. 나의 뒤통수에 눈이 달려있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에도 심각한 척 연기한다. 의미 없는 상상을 15분쯤 지속하면, 누군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주위를 서성인다. ‘뭐 하시는 건가요?’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오랫동안 뜸을 들이고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원초적인 의문이다. 내가 답한다. ‘보면 모르나요? 일하고 있잖습니까. 한 번도 보신적 없으신 것 같은데, 소설가는 원래 이렇게 일합니다. 방금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말하느라 잊었습니다. 그러니 남 일에 상관 말고 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좀 바쁩니다만….’머릿속이 이런 상상으로 채워지면서 미소가 번진다. 때로 대중들이 작가의 웃는 모습을 떠올릴 때면, 대단한 영감이 찾아왔거나 권위 있는 상을 받는 모습을 그리곤 하는데, 그렇지 않다. 사실 시시한 농담 따위에 즐거워하는 중이다. 그러나 웃음이 영원할 수는 없는 법이다. 미소가 흐려지면 그때의 감정은 기억으로만 남는다. 그럴 때면 다시 턱을 괴고 생각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그러면서도 오래 간직하고 싶은 기분이 있다고. 딱 쓰러지지 않을 만큼만. 2원래 그랬던 것처럼 책장을 넘기다 보면 읽지 않은 책을 감상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곁눈질이 찾아낸 좋은 문장들이 처음부터 자신의 것인 양 기억하게 된다. 읽지 않고도, 쓰지 않고도 자기 것이 된다. 자신만의 분위기에 젖어 든다. 그러는 사이에 물먹은 종이가 찢겨나간다. 더 이상 나의 문장은 작가의 문장이 되지 않았다. 고통의 정도에 관한 질문에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이 고통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최소한의 의식만을 남겨둔다. 나머지는 모두 무의식에 맡긴다. 정해지지 않은 전개가, 예측하지 않은 결말이, 기대하지 않은 수상에 더 만족하니까. 너무 많은 고민으로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글들은 버린다. 더 이상 실패한 과거와 성공한 미래는 없다. 글을 쓰는 순간의 현재가 있을 뿐이다. 그렇게 탄생하는 것들을 마주하면 그곳에 내가 있다.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내가 있다. 자아 아래에 숨은 원초아가 만년설이 녹은 민둥산처럼 드러난다. 내가 바람은 모르는 것에 관해 쓰는 것.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한 글을 쓰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대부분, 혹은 작가 자신도 몰랐던 이야기가 쓰는 과정에서 발현된다. 나는 아직 몰래 숨어서 창작을 지켜보고 있는 최초의 목격자에게 가서 묻는다. “당신은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까?”“그렇습니다.”“당신은 이 이야기를 접해본 적 있습니까?”이제부터 소설가는 긴장해야 한다. 무의식에 인식이 섞였는지 알아보기 위해. 개인의 경험은 너무나 적다. 간접적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읽지도, 쓰지도 않았지만,

  • 아기호랑이
  • 2024-03-23
#4. 기록되지 않은 순간의 당신에게

우리는 여행으로써 서로의 삶에 존재하는 공백의 시간에 징검다리를 놓고 있었어. 냇가에 놓인 돌을 딛고 서 있는 순간에도 함께할 수 없는 미래를 당연시하면서, 매번 언제 도래할지 모를 다음을 기약했지. 각자의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안부를 전하지 못한 날들이 이어졌지만, 달력을 넘기면서 피곤한 하루를 정리하는 것이 일상이었어. 사실 달력을 보지 않은 날이 더 많았던 것 같아. 그럼에도 나의 책상 한편에는 여전히 인화된 사진들이 나열되어 있어. 빛바랜 사진들의 추억이 느슨한 줄의 작은 나무집게에 걸려 흔들리고 있어. 그 앞에 서 있다 보면, 사실은 사진보다 사진이 걸려있지 않은 빈 곳에 더 많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우리가 만나지 못했을 동안 너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네가 언급했던 과거의 조각을 이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어. 만일 우리가 좀 더 자주 만났다면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빈 곳의 사진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 우리가 만났지만, 아무런 사진도 남겨두지 않았던 때를 말이야. *너는 모든 순간에 대해 기록했어. 그것이 작가의 숙명이라 말했지. 그러나 너는 그 이상의 것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어. 나는 단지 네가 시, 소설, 에세이가 아닌 사진에 좀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고 추측할 뿐이야. 우리가 갔던 유명한 이탈리아 식당은 생각나니? 난 그곳에서 고급 레스토랑일수록 한 접시에 담기는 스파게티의 양이 적다는 이론에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어. 너는 올리브오일 파스타가 너무 맛있어 보인다며 각도를 바꾸며 셔터를 눌러댔지. 식기 전에 빨리 먹으라고 말해도 사진을 보정하느라 바빠 보였어. 언젠가 너는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나를 찍어서 보여준 적이 있었지. 그 사진에서 나는 좀 달라 보였어. 카메라의 렌즈에 초점을 맞추고 찍어서 선명하게 나온, 그 어떤 사진에서도 본 적 없는 표정이 반쯤 드러나 있었어. 아무것도 보정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미소 말이야. *그런 네가 어느 날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은 채 나타난 거야. 사건의 근원은 더 많은 사진을 찍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되었어. 저장공간 확보를 위해 눌렀던 버튼이 여타 앱의 사진을 지우고 있었다는 거야. 나는 백업한 사진이 남아있지 않느냐고 물었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너는 사진의 원본, 아니 보정본을 볼 수 없어서 우울해진 거였어. 너는 선뜻 사진을 찍기가 두렵다고 했지. 나는 그날, 네가 카메라 앱을 켜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어. 또한 네가 밝게 웃는 모습도 보지 못했지. 촬영으로 갖추어진 그 완벽한 웃음을 말이야. 우리는 그날 좀 더 가까워졌어. 내 판단이 너와 일치한다면 너 역시 어떤 변화를 느꼈을 거야. 사람의 외형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을 감각하는 시간이었어. 이 순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해. 나는 이 글을 통해 그때의 감각을 너에게 알려줄 수 없어. 우리가 카메라에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 순간, 과장된 단어의 허례

  • 아기호랑이
  • 2024-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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