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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찌

  • 작성자 으리
  • 작성일 2019-12-24
  • 조회수 325

4학년 여름방학식날 현네 옆집에 민영이네 가족이 이사 왔다. 현은 인사차 민영이네 집에 가 초인종을 눌렀다. 민영 엄마는 현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럼 민영이 같은 학교에 다니겠구나. 민영 엄마는 떡을 식탁에 내려놓고 현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민영이가 이전 학교에서 왕따였거든. 민영이랑 친하게 지내 줄 수 있겠니?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에게도 친구가 없었다. 그간 혼자서 바다를 표류하는 듯 했는데 민영은 하나뿐인 섬처럼 보였다. 민영 엄마는 싱긋 웃고 현을 민영 쪽으로 살짝 밀어주었다. 현은 민영에게 인사를 건네고 머뭇거리며 소파 반대쪽 자리에 앉았다. 민영은 현이 앉은 쪽을 흘끔거리다 게임 컨트롤러를 권했다. 탁구 게임이었다. 민영은 현에게 여러 기술을 알려주었고 현은 맞장구를 쳐줬다. 하지만 게임 얘기는 금세 시들해졌고 두 사람은 다른 얘깃거리를 찾았다. 민영이 현의 팔찌에 대해 물었다. 현은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고 대답했다. 민영은 그 뒤로도 팔찌를 몇 번 쳐다봤다. 가질래? 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이 돌아갈 때 민영은 현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이후 현은 놀러가기 전에 전화를 걸었다. 민영이 언제 시간이 비는지 알게 된 이후에는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 즈음 두 사람은 매우 가까워져 있었다. 하지만 개학 후 상황이 바뀌었다.

민영은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지만 현은 여전히 혼자였다. 쉬는 시간 종이 치자마자 민영은 창가 맨 뒷자리 쪽으로 갔다. 먼저 떠들던 세 명 사이로 민영이 끼어들었다. 현은 따라가 무리 근처에서 서성였다. 괜히 사물함 위 화분을 들었다 놓거나 바닥에 쓰레기를 주웠다. 민영은 현을 등진 채 수다에 빠져있었다. 현은 머뭇거리며 민영에게 다가갔다. 민영에게 현장학습 모둠에 넣어달라고 말해야했다. 그렇지 못하면 저번 학기 때처럼 현이 낙오해도 모르는 모둠에 들어갈지도 몰랐다.

별안간 민영을 마주보고 떠들던 친구의 표정이 굳었다. 민영은 왜 그래? 하며 뒤로 돌았다. 친구 세 명이 슬금슬금 움직여 현과 민영 사이를 가로막았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옆에 앉은 현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부탁을 말했다. 민영은 어딘가에 끼인 것처럼 느껴졌다. 모둠원은 최대 다섯 명이었다. 민영은 저 셋을 현만큼 가까운 사이로 여겼다. 현이 민영이 낀 우정 팔찌를 보고 있었다. 민영은 한숨을 쉬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 이후 현은 본격적으로 민영을 따라다녔다. 민영이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면 불쑥 끼어들거나 민영이 있다는 이유로 초대받지 않은 생일파티에 오는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민영이 있는 곳에 현도 있었기에 민영 주위에는 친구들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민영은 현 때문에 학교가 새롭지 않았다. 건물만 새로울 뿐 이전 학교에 있을 때와 같은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다. 민영은 존재하지만 아이들로부터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민영은 초조해졌다. 민영은 다가오는 현을 밀어내지 않았지만 자기가 먼저 다가가지도 않았다. 피구 수행평가 때까지 그 상태가 이어졌다.

칠판에 A팀,B팀이라 적혀있었다. A팀의 이름들 중에 이현, 그 밑에 최민영이 있었다. 민영은 자기 이름을 지우고 B팀에 다시 적었다. 민영은 체육부장에게 왜 묻지도 않고 이현과 같은 팀으로 편성했냐며 따졌다. 부장은 내가 아니라 이현이 했다고 대답했다. 어 저깄네. 민영 왼쪽에 현이 있었다. 현은 눈만 굴려서 칠판과 민영의 팔찌를 번갈아 쳐다봤다. 민영은 팔찌를 빼려고 했다. 팔찌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현이 다가오자 민영은 현을 밀쳤다. 민영은 자기 책상으로 뛰어가 커터칼로 팔찌를 끊었다. 현은 망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민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속이 울렁거리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민영은 팔찌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교실을 나갔다. 하지만 생각만큼 홀가분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전했다. 민영은 수업 시작종이 울릴 때까지도 복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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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형

    안녕하세요, 으리 님. 반갑습니다. 이 소설은 현과 민영 사이의 우정과 그 균열을 짤막하게 담아내는 소설이군요. 경제적이고 담백한 문장, 건조한 서술이 인상적이었고 서술 또한 안정감이 있었습니다. 감정이 절제된 채로 표현되고 있음에도 현과 민영 사이의 긴장감이 잘 느껴지게끔 서술되어 있어요. 잘 쓰셨습니다. 마지막, 커터칼로 우정 팔찌를 끊는 부분 또한 독특했어요. 일상적인 정황에서 친구 공동체 사이에 으레 겪을 수 있는 불화를 능숙하게 담아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치거나 단점이 많지 않은 글이라 꽁트가 아닌 으리 님의 단편소설을 보고 싶어요. 처음에는 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듯하다가도 중간에 민영의 시점으로 소설이 바뀌는데, 두 인물 모두의 감정과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소설을 끌어갈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또한 들었습니다. 재밌게 읽었어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 2020-01-14 18:09:41
    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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