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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여름에게

  • 작성자 아이리스
  • 작성일 2023-11-12
  • 조회수 405

짙은 갈색의 코코아를 담고 있는 새하얀 머그컵이 눈에 들어왔다.

선명한 색채 대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밝은 노란색의 카페의 창문 너머에는 날카로운 비가 두꺼운 시멘트를 뚫을 듯이 내리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여름 열기를 힘입어 내리는 비는 정말 습했다.

여름비와 나의 이 지독한 악연은 아직까지도 진행 중인가 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비가 내리는 것을 보면. 


아직까지도 너의 행동들은 내게 의문으로 남아있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것이라는 내 마지막 희망이 무색하게도, 시간은 그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시간이 내게 도움을 주었다면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네 행동들은 지금쯤 내게서 잊혔을 테니까. 

넌 내가 비로소 마음을 열게 된 지금에서야 나를 내친다.

왜 그 많은 날들 중 지금일까.

너를 믿고, 의지하고, 아직 표현하지 못한 지금. 난 끝까지 무능력하고 허무하게 우리의 관계를 마무리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너와 나를 함께 '우리'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질 것이다.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더라도 그 정도는 말로 전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슬픈 것을 넘어 괴롭기까지 하다. 

가장 괴로운 것은 이 괴로움을 네가 잊을 수 없을 정도의 환하고 아름다운 웃음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 둘만의 이별여행을 왔다.

너와 내가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시간. 그러니까 난 웃을 것이다.

행복하게. 밝게. 환하게. 네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잊히고 싶지 않다.

그래도 넌 날 잊겠지. 잊을 수밖에 없겠지. 나 같은 것은 잊어야 하는데.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엉뚱하게도 내 원망의 화살이 너를 향한다. 네가 나를 원망해야 하는데. 

역설적이게도, 나는 마지막으로라도 너를 봐서 기쁘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내리는 억센 여름비 따위가 이 시간을 망쳐서는 안 되는 이유다. 난 나의 심란한 감정을 뒤로한 채로 어색한 빗소리에 맞춰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며 리듬을 타는 너에게 내 인생에서 지어본 미소 중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여름비, 정말 아름답지 않아?" 


아니, 전혀 아름답지 않다. 습하고 덥고 삭막한 날씨다. 그런데, 오늘만은 여름비가 가장 아름다운 날씨여야만 한다. 


"후덥지근한 여름에 구슬처럼 쏟아지는 비.. 네가 생각나는.. 날씨야." 

이것도 거짓말. 거짓말이 내 혀 속에 단단히 묶여 빠져나가지 못한다.

너는 여름에 쏟아지는 비 따위가 아니다. 넌 여름날에 모든 것을 환히 비춰주는 햇살 같은 존재이다. 

하지만 난 이제 여름비를 보면 너를 생각할 것이다. 여름비를 보게 되면 노력하지 않아도, 원하지 않아도 너만이 내 머릿속을 채울 것만 같으니까. 

"난 겨울이면 항상 네가 생각나." 

또 그 말이다. 네가 항상 내게 해주던. 지겹도록 들은. 


"김채원 넌 겨울 같아" 


그래도 좋은. 그 말. 


"겨울에 내리는 눈 같은 사람" 

"언뜻 보면 조용하고 차갑지만 속은 여름보다도 훨씬 포근하고 따뜻한 사람" 


예전처럼 넌, 다름없이 넌, 속 편하게도 내게 그 말을 건넨다. 

이제 떠나면서, 나를 떠나면서, 넌 끝까지 나를 위한다. 



"....." 


정적이 흐른다.

분위기는 점점 잦아드는 빗소리에 맞춰 점점 어색해졌고 창밖은 이제 흑빛으로 물들어간다. 몇 마디 나눠보지 못한 채로, 우리의, 아니 이제는 너와 나의 시간이 끝나간다. 너는 어두워진 창밖에 짓궂게 오래도록 내리고 있는 비를 바라보며 갈 준비를 한다. 너의 목에 걸린 금빛 목걸이가 전등불빛이 반사되어 빛난다.


너와 정말 어울리는 그 목걸이가. 우리가 같이 처음 맞춘 목걸이가. 


넌 나를 생각하며 목걸이를 한 것일까. 왜 그토록 오랫동안 그 저렴한 목걸이를 간직했을까. 

반짝거리는 그 빛이 차가운 나를 비춰주는 햇살 같아서 눈앞이 뿌옇게 변한다. 


"가지 마." 


이제야 나는 너를 붙잡는다. 지금까지 놓치기만 하다가. 이제야. 염치없게. 


"가지 마.. 부탁이야.." 


"... 미안." 


내가 너무 늦었던 탓일까? 너의 답변은 아프게도 너무 단호하고 확실하다. 

하지만 네가 푹 숙인 고개를 올리자 너의 뺨에 흐르고 있는 투명한 무언가가 언뜻 지나쳐간다. 너는 그렇게 날 떠난다. 


왜 나를 두고 떠났을까. 보고 싶은 내 여름..



내가 너를 처음 본 날 느낀 것은 많지 않았다. 처음 인상도, 마지막 인상도 그저 반 친구로 남을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너는 내게 그런 사람이었다. 싫다거나 꺼려지는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딱히 먼저 다가가서 얘기해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사교성 좋은 반친구들 중 한 명으로 느껴졌을 뿐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믿고 싶어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난 처음부터 너를 신경 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처음 마주친 네 모습이 아직까지도 기억나니까. 

나는 너를 보며 나와는 다른 성향을 가진, 각자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또는 그렇다고 믿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나는 친구들 사이에 둘러싸인 너의 첫 모습을 기억할 리 없을 것이다. 

네 웃음, 네 목소리, 네 옷차림까지 기억나는 것을 보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너를 의식했을 수도 있다. 


그맘때쯤, 아니 오랜 전부터 그때까지도 나는 나만의 세계에 빠져 살았다. 바쁘셨던 두 분의 부모님과 다소 조용하고 소극적이었던 내 성격으로 인해 나는 사교성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아니, 솔직히 많이 떨어졌다. 

나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다. 다른 이에게 관심이 없는 것은 물론, 대화조차 섞으려 하지 않았다. 한 학년이 다 지나가도록 반 친구들의 이름을, 선생님들의 성함을 모르는 경우가 다분했고, 굳이 알려는 노력을 하지도 않았다. 

나에겐 매일매일 정해진 루틴이 있었고, 익숙한 것들만 고집했으며, 새로운 것은 무엇이든 거부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나를 도와주려고 했던 것은 네가 처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기억에 남는 말 하나가 있다. 


‘채원이는 정해진 틀 안에서만 생활하려는 것 같아. 틀에서 벗어나는 생각들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해주셨던 말이다. 안타깝게도, 어리고 미성숙했던 나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5학년으로 올라간 나는 처음 너를 만나게 되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너는 내가 학기 초부터 알고 있던 몇 안 되는 친구들 중 한 명이었다. 

굳이 강조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너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 정도는 기억해 주면 좋겠다. 네가 내가 너를 몰랐던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무래도 신경 쓰였으니까. 


너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고 자부하면서도 무의식 중에 넌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동안은, 괜히 자존심을 세우고 무관심한 척했지만, 이게 내 진심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너와 친해지고 싶었다고 한다면, 그건 내 진심이 아닐 것이다. 

이제야 말하지만, 나는 너를 질타하기도 했다. 

수많은 친구들 사이에 둘러싸여 그 누구보다 행복한 미소를 짓던 너를 보며 난 너의 결점을 찾으려 애쓴 적도 있다.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니, 그때의 내 모습이 너무 창피해 스스로 난 네게 무관심했었다고 속였던 것이다. 

그건 바보 같았다. 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에서 정말 후회되는 몇 안 되는 순간이다. 

네가 노력으로 이뤄낸 것들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부러워했던 것이었다. 


넌 모두에게 다가가주었다.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서 왜 남에게 바라는 것만 많은지 스스로를 자책하던 때였다. 

정말 고마웠다. 내게 손 내밀어준 네가. 

아무리 외로워도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이 두려울 수도 있다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고마웠다. 너의 그런 모습이.

그리고 넌 내게 말을 걸던 그 누구와도 달랐다.

 

나는 답답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남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느린 답변과 알아듣기 힘든 조용한 톤은 항상 누군가에게 답답함을 이끌어내기 쉬웠다. 

그런데 너는 내 느린 말들과 답변에도 차분하게 기다려주었다. 심지어 재촉조차 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내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내질렀다. 


내가 답답하지 않냐고.

그때 들었던 말을 절대 잊을 수가 없다. 


‘네 답이 느린 건 그만큼 내 질문들을 깊게 생각해 준다는 거잖아? 난 고마운데, 내 말에 정성스럽게 답해줘서.’ 


누군가가 나에게 답변을 재촉할 때면, 내가 스스로 궁지에 몰려 불안할 때면, 항상 너의 말을 되새겼다. 

나는 남들보다 깊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이건 내가 남들보다 더 많이 고민하고 노력한다는 증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기에 난 너를 지울 수 없다. 내 생활의 너무 많은 부분에 네가 스며들었기에. 


너는 성숙했다.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네가 학창 시절 나에게 했던 말들은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지금까지도 내게 도움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 말들은 내 가치관, 생활모습, 성격 까지도 변화시켰다. 

너와 나의 대화는 점점 평범한 친구 사이로 발전해 나갔다. 그리고 나에게 이것은 너무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었다.

감사하다. 감사. 고마움. 네가 정말 좋아하는 단어였다. 처음에는 의아했다. 너는 ‘고맙다’라는 표현을 이상하게도 참 많이 좋아했다. 그리고 넌 ‘미안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너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때면, 넌 항상 나에게 부탁했다. 


미안해 말고 고맙다고 해달라고. 


넌 고맙다는 말이 더 듣고 싶다고 그랬다. 미안해 한마디보다 고마워 한마디가 더 힘이 난다고, 더 기쁘다고 그랬다. 


지금에서야 그 말이 이해된다. 넌 성숙하고 난 어렸다. 이제야 네가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런데 난 아직도 어린가 보다. 아직까지도, 너에 대한 미안함을 지울 수 없다. 


너에게 고맙지만, 미안한 감정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나 책 좀 추천해 줘.’ 


네가 내게 했던 말이다. 넌 이 말을 기억할까? 

네가 나한테 처음 했던 말인데. 

처음에는 웃겼다.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첫마디가 ‘안녕’도 아니고 ‘뭐 해’도 아닌, 책을 추천해 달라는 말이었기에. 

자연스러운 대화를 원했던 것일까?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넌 책에 정말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저 대화는 네가 나한테 말을 붙이기 위해 생각해 냈던 말이었던 걸까? 

그런데 넌 그걸 알까? 사실은 나도 별로 책에 관심이 없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당황스러울까? 


네가 아는 내 모습은 책을 사랑하고, 글 쓰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만 한별아, 그건 다 널 만나고 생긴 모습들인걸?


“... 어..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그때의 난 너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내가 읽은 책들 중 문학성이 높아 보이는 책들을 찾으려고 노력했었다. 너무 급하게 서두르던 바람에 나는 결국 모두가 아는 정말 유명한 책을 말하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때 너의 반응은 예상치 못했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너의 반응은 정말 인상적인 추천이라도 받은 듯했다. 

꼭 읽어보겠다며 두 손을 주먹 쥔 채 말하는 너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아른거린다. 

처음 그 말을 듣고서 우습게도 난 네가 책을 읽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었던 적이 없어서 추천해 달라고 했을까?’ 하는 눈치없는 고민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너와 친해진 뒤로 알아본 너는 도서관을 좋아했고, 그 누구보다, 현재의 나보다도 책을 사랑하는 아이였다. 

내 앞에서 한동안 책을 좋아하지 않는 척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알 수밖에 없었다. 

넌 책을 읽을 때 편해 보였다. 

네가 책을 읽는 순간은 너의 밝고 예쁜 웃음이 가장 예쁘던 때였다. 


그래서 난 내가 쓴 첫 책을 네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었다. 네가 내가 쓴 책을 읽고 행복한 웃음을 짓기를 바랐다. 


우습게도 그 순간은 오지 않았지만. 



매사에 열심히 반응해 주는 모습은 내가 너에 대해 기억하는 수많은 장점들 중 하나이다.

넌 그날 이후에도 매일 어김없이 나를 찾아왔다. 

어느 날은 좋아하는 영화를 묻고, 어느 날은 좋아하는 색깔을 묻고, 어느 날은 좋아하는 과목을 물었다. 매일매일 너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물었다. 처음에는 네가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 질문들이 나를 위해주는지 몰랐고, 눈치 없었다. 

그래도 그런 네가 좋았던 것 같다. 나는 너의 질문들을 기다렸다. 네가 다음날 무엇을 물어볼지 매일밤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그전까지 난 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을 손에 꼽았다. 그런데 너의 그 질문들에 대답을 하기 위해 난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 너에게 추천했던 책과, 내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영화는 사실 그냥 누구나 읽고 보았을 법한 아주 흔하고 유명했다. 그때는 남들과 어우러지고 싶었고, 그렇다 보니 모두가 알만한 것들 위주로 말했었다. 보통 아이들처럼 평범한 것들을 좋아하는 모습을 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때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남들이 좋아할 것 같은 것을 위주로 대답했다. 


하지만 너의 질문들이 늘어갈수록 난 진정한 답변을 했다. 그리고 나에 대해 생각해 보고, 내가 스스로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네가 좋아하는 색깔을 물었을 때 내가 노란색이라고 답했던 것은 내 진정한 답변이었다. 

항상 따뜻한 느낌을 주는 노란색은 언제나 내가 애정했던 색깔이었다. 그리고 지금 노란색은 네가 생각나는 색이기도 하다.


네가 나에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물어본 지 2주쯤 되던 날, 나도 너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네가 기억할까? 난 너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이제 네가 궁금하다고. 

솔직히, 널 처음 본 날부터 난 너에게 물어볼 것들이 많았다. 단지 너와 대화를 하면, 내가 궁금했던 것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날부터 나도 너에게 질문을 하나씩 했다. 그리곤 나도 너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넌 솔직했다. 나와 달리, 나의 질문에 대부분 진실을 말해주었다. 

그런데 그런 너도 내게 다른 대답을 했던 적이 있다. 


넌 네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 [걸리버 여행기]라고 했다. 넌 나중에 정말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남들은 하지 못할 경험을 하고 싶다고 그랬다. 

그런 순수한 너의 꿈을 나는 정말로 온 마음을 다해 응원했다. 


그렇지만, 네가 좋아하는 책은 [오만과 편견]이었다.

네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저 제목이 보일 때 너의 시선, 그 책을 한 달에 한번 꼴로 읽던 너의 모습. 

한번 읽은 책은 내용을 알아 지루하다고 그랬던 네가, 그 책을 그렇게 여러 번 읽고 애정했던 이유를 그때는 좀처럼 짐작하지 못했다. 

지금 다시 본다면… 그 책 대신 내가 직접 너를 위로해 줄 수 있을 텐데. 홀로 편견에 둘러싸여 힘듦을 표현하지 못했을 네 모습이 계속 아른거린다. 


네가 좋아하는 색깔은 파란색이었다. 추위도 많이 타면서도 그토록 겨울을 좋아했던 너는 색깔까지도 겨울을 담은 파란색을 좋아했다. 


너의 취미는 그림이었다. 미술을 한 번도 배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너의 그림실력은 내가 본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그리고 넌 항상 조그마한 종이에 무언가를 열심히 그렸었다. 


너의 꿈은 디자이너였다. 그 뛰어난 그림실력으로 여러 옷들을 그리고 있는 네 모습은 즐거움과 꿈으로 가득 찬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때의 너는 그 어떠한 디자이너보다도 더욱더 멋있었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다. 


너는 내게 네가 처음 만들 옷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했다. 너의 첫 작품을 나를 위해 만들어주고 싶다고 했다. 집에 온 나는 너의 그 말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그때 난 처음으로 ‘기쁨의 눈물’을 깨닫게 되었다. 그 새로운 감정은, 나를 가득 채워주었다. 그 기분을 지금도 느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다.

너에게 비추어진 나의 첫인상에 대해 짚고 넘어가고 싶다. 우리가 막 친해지고 넌 내가 질문했다. “처음에 내가 말 걸었을 때 말이야, 솔직히 나 안 좋아했지?” 


예상 못한 질문에 나는 쑥스러운 듯 웃어넘겼지만, 지금까지도 그때 나의 반응이 마음에 걸린다. 너의 질문에 대한 긍정의 대답처럼 보이는 터였다. 

그런데 정말,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난 너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내 인생이 마감되는 순간까지도 너를 좋아했고, 좋아하고, 좋아할 것이다. 

한 번도 그런 네가 싫었던 적은 없었고, 우리가 말다툼을 했을 때도 단 한순간이라도 널 미워한 적이 없다. 내가 너를 질투하던 때 마저도 네가 미웠던 적은 결코 없다.

내 차가웠던 태도는, 어리석은 나의 어리석은 방어기제였을 뿐이다. 

내 행동에 네가 상처 입었을까? 조그마한 상처라도, 내가 너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사과하고 싶다. 

네가 상처 입는 것도 싫고, 그 행위자가 나라는 것은 더 싫다. 


나는 너에게 좋은 기억으로만 남고 싶다. 네가 나한테 그런 존재인 것처럼.


내 시간은 너에 맞춰져 흘러갔었다. 너와 있는 순간이 가장 기다려졌고, 네가 없으면 정말 외로워지기도 했다. 내 인생에서 누군가와 이렇게까지 가까웠던 적은 없었다. 네가 유일했고, 솔직히 지금까지도 너만큼 내가 의지했던 사람은 없다. 



그리고 네가 보여준 따뜻함이 날 바꾸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면 조금 더 빨리 시원하게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을 전부 안에 가두는 대신 조금씩 흘러 보내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표현하는 것도 한층 더 수월해졌고, 무언가를 말할 때면 누군가는 날 응원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너의 그림에 대한 열정과 디자이너란 꿈에 대한 노력 또한 내가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림에 열중하는 너의 모습을 볼 때면 나도 내가 읽고 있던 책에 열중하게 되었다. 열중하다 보니 점차 책들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졌다. 그전까지 책을 읽을 때는 내용만 대충대충 훑었을 뿐이었지만, 이젠 작가의 말, 작가소개, 목차까지 책에 흥미를 갖고 읽기 시작했다. 갑자기 읽었던 책이 다시 읽고 싶어지는 그런 날이 찾아오기도 했다. 


너에 의해, 난 내 취미를 찾게 되었다. 


책을 읽으며 난 점점 내 글을 써보고 싶어졌다. 내가 직접 책에 감정들을 담아낸다면 얼마나 멋있을까 생각했다. 그때부터 난 너와 나의 이야기를 책에 담아내고 싶어 했다. 나중에 내가 커서 어른이 되었을 때 이 날들을 회상하며 책을 쓴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들이 될까 생각했다. 내 첫 소설은 그때 그림을 그리던 네 옆에서 쓴 소녀의 여행에 대한 책이다.

우리는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워졌지만, 그럼에도 우리 둘 중 누구도 서로에게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즐겁고 희망찬 이야기만을 하면서 서로를 북돋아주곤 하였다. 아마, 내가 훨씬 더 도움을 받았을 테지만. 


그래서 네가 나에게 처음으로 마음의 문을 열어준 그날은 더욱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잊을 수 없었겠지만. 


그날 또한 지독한 여름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세게 불던 여름날이었다.


그날도 같이 걸어가던 우리는 똑같이 내 집 앞에서 헤어진다. 하지만 나는 그날 이질적인 무언가가 느껴졌다. 비슷한 대화와 말들을 주고받았지만, 다른 느낌이 들어 난 좀처럼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어쩌면 그냥,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느꼈던 단순한 짧은 감정일 수도 있다. 이유 모르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 집 현관 앞에 나를 묶어놓는다. 계속 주변을 서성이다 보니 억센 비에 양쪽 어깨가 심하게 젖는다. 그제야 난 집을 들어간다. 집에 들어갔지만 난 여전히 밖에 있고 싶어졌다. 여름비를 그토록 싫어하면서도 나는 오늘만큼은 이 진득한 빗방울들이 날 적셨으면 한다. 그 오묘한 기분에 결국 집을 나서고자 하고, 난 다시 밖을 향해 간다. 이번에는 우산 없이. 어떤 바람이 불었던 걸까, 비 맞는걸 극도로 싫어하는데도 비를 맞고 싶은 날이다. 


이렇게도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면 단순히 늦은 사춘기로 인해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 이 비를 맞지 않는다면 평생을 후회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가고 여러 사람들이 날 지나쳐간다. 그런데 저 멀리서 익숙한 듯한 형태가 보인다. 


‘유한별..?’ 


너와 내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집에 들어간 줄만 알았던 네가 너와 어울리는 연두색 우산을 들고 나타난다. 널까 눈을 비비고 다시 보려 하니 날 시원하게 적시던 빗줄기가 멈추는 것이 느껴진다. 내 위에 씌워진 연두색 우산을 올려다보며 너를 마주한다. 


왜 다시 나왔는지 질문하려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내 꼴을 보면 그건 네가 나에게 할 질문 같아서 질문할 맘을 접는다. 네가 나에게 그 질문을 한다면, 난 답할 말이 없으니까.


왜 비를 맞고 있는지, 왜 다시 나왔는지, 뭘 하고 있었던 건지 물어볼까 봐 급하게 그럴싸한 답들을 생각해 내던 중 너는 질문 대신 근처 벤치로 가자고 말했다. 그러면서 입꼬리를 올려 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당시에는 설렜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입꼬리는 떨리고 있었던 것 같다. 


" 있잖아, 나 집 가기 싫어서 안 들어가는 거다..?" 나는 반응할 말을 잃고 어정쩡하게 앉아있기만 했다. 위로해주고 싶었었던가? 부끄럽게도 아니었다. 그냥 단지 나에 대해 알기 전에 자신을 먼저 알려주는 그런 사람이 처음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속 깊은 곳에서 너의 고민은 별거 아니라고 단정 짓고 비웃으면서도 너를 알려주려는 것에 대해서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런데 네가 꺼낸 너의 이야기는 내가 헤아릴 수 없는 또 상처였다. "우리 부모님, 사이 되게 안 좋으시다? 이혼 준비하고 계셔" 그러고 짓는 쓴웃음에 나는 '내 부모님은 존재하지도 않으실걸?'이라는 말을 뒤로 삼키며 침묵했다. 


그 시절 나는 나의 장애물들만을 성급하게 극대화시켰고, 다른 이에게 닥친 장애물들은 애써 외면했었다. 나의 새까만 속을 숨기려 침묵했던 것일 뿐이었지만 너는 내가 너를 이해했다고 생각했는지 너의 얘기를 계속해주었다. 아니다, 너는 나의 속을 이미 알면서도 말했던 것 같다. 너의 까만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을 때 나는 몇 초도 지나지 못해 고개를 숙이고 말았고, 다시 너를 응시했을 때 너의 눈동자는 전과 달리 여과 없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넌 "아.. 별거 아닌가?"라고 말하며 웃음소리를 흘렸고 그 소리는 내 심장에 깊게 박히는듯했다. 그제야 나의 무반응의 무례함을 깨닫고 급히 전혀 아니라고 말했었다.


"아니, 아니, 전혀 아니야. 그리고 남이 느끼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잖아? 네가 힘들면 힘든 거고 너의 감정인데 왜 남의 판단을 신경 쓰는 거야.. 남들이 뭘 안다고. 다른 이가 네가 복 받았다고 여기더라도 네가 아니면 그건 아닌 게 되는 거지."


그때의 나는 길게 말할수록 문장이 어수선해지곤 했었는데 너에게 했던 말만큼은 하고 싶은 말을 확실하게 전했었던 것 같다.

아마 그 이유는 그 말은 내가 누군가에게 꼭 듣고 싶었던 말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항상 내 베일에 숨이 막힐 정도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베일을 풀어주려고 하면 오히여 베일을 엮고 여며 풀어지지 않도록 했다. 내가 보이는 것이 극도로 두려웠었던 것 같다. 그런 나에게 스스로 자신의 베일을 벗고 일어나는 너는 인상 깊게 다가왔다.


"있지, 영원한 건 없는 것 같아. 영원한 건 존재하기는 한다고 그러잖아, 특히 사람 간의 정과 사랑 그리고 추상적인 것들 다 영원하다고 읽고 듣고 했는데 그거 요새는 다 틀렸다는 생각이 들어.

돈이나 물질적인 것들이랑 마찬가지로 사랑도 언젠가는 식지 않을까? 난 내 가정은 항상 화목할 줄 알았어. 가족 간의 사랑은 조건 없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근데 그냥 이제는 사랑이 무엇인지부터가 헷갈려.

내가 아프면 새벽에도 뛰어다니시던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나보고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 아빠와 함께 가라고 하셔. 이러면 진짜, 숨이 턱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거든?

그리고 아빠는 새벽에 출퇴근하시고 나와 대화조차 하지 않으셔. 전에 부모님이 싸우시는걸 엿들었는데 아빠가 말하셨던 게, 서로에 대해 궁금하지 않은 것을 사랑이라 할 수 있겠냐고, 그리고 자신은 궁금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알기 싫은 것이라 하셨어.

그 말이 그림이 되어 내 머릿속에 전시되어 있는 것만 같아." 


".... 혹시 내가 이런 얘기하는 게 가벼워 보여?

그렇다면, 난 항상 가벼워. 그러니까 무거운 누군가가 필요해. 내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어. 난 그런 사람은 당연히 내 얘기를 먼저 물어봐주는 사람일 줄 알았거든, 아니더라고.

아무것도 묻지 않은 네가 왜인지 나에게 모든 걸 털어놓게 만들었어."


나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는데도 너는 너의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은 것 같은 가벼운 표정이었다. 빗소리와 함께 불어오는 바람에 살짝 젖은 네 머리카락이 흔들렸고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있던 너는 마치 후광이 비치는듯했다. 너에게로 닿고 싶었고, 나도 솔직해지고 싶었다. 용기를 내자, 결심했다.

 ".. 나.. 난..." 

아.. 내 목소리는 심각하게 갈라졌고 난 10분 동안 메마른 침만 삼키며 결국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짜증 난다거나 지친 기색 없이 나를 바라보는 너를 보며 나는 부러움과 질투를 느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집으로 달려가고 말았다.


고백을 하나 하자면, 그때의 이기적인 나는 그 이후로 너를 청춘영화의 여주인공으로 자주 대입시키곤 했다. 넌 예쁘고, 친절하고, 사연 있는 누구나 좋아할법한 그런 여주였다. 


너의 아픔을 부러움으로 치부하던 그때의 나만큼 혐오스러운 나는 없었다. 



"나 유학가. 내일 아침에." 

"뭐?"

들고 있던 필통을 그대로 떨궜던지라 반 모두의 이목은 내게로 쏠렸다. 내 손목을 잡고 날 교실 밖으로 끌어낸 너는 유학을 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좋은 기회야. 유학 갔다 오면 내 꿈도 이루기 쉽고. 정말 가고 싶어. 잘된 일이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너의 빛나는 화가라는 꿈을. 난 너를 절대 막을 수 없었다. 너의 꿈을 내가 그렇게 잘 아는데. 친구로서 꿈과 미래를 응원해 주는 것이 당연한 건데. 게다가 너의 미술을 향한 재능과 열망을 아는 내가 어떻게 감히 널 잡으려 할 수 있을까. 그때의 철없고 어리던 나는 그때의 너의 흔들리던 동공과 눈에 맺힌 이슬방울이 아니었다면 난 네가 정말로 기뻐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나의 반응이 너에게 어떤 생각을 들게 했을까. 


"좋은 기회야. 잘 다녀와" 


정말 마음에 1도 없는 말이었는데. 


"나.. 정말 가?" 


"응. 축하해." 


그때 내가 널 잡고 울었더라면, 가지 말라고 애원했다면 넌 남았을까.

그날 밤은 놀라울 정도로 고요했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심지어 길거리에는 그 흔한 차 한 대마저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적막을 깬 것은 난데없이 내게 걸려온 너의 전화였다. 


"잠깐 나올래?" 


"... 응" 


그날 만난 우리는 한동안 우리를 둘러싼 배경처럼 고요하게 하늘을 바라봤지. 한참뒤에 말을 꺼낸 너는 날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오 년 뒤에 여기 같은 곳에서 봐" 


"그래"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느라 급히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나의 손목을 넌 잡고 끌었다. 난 네 가슴팍으로 부딪혔고 넌 강하게 날 끌어안았어. 그때의 나는 네가 나의 심장박동을 느꼈을까 초조해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네가 가기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매일을 함께했다. 네가 나와 평생 함께 있을 수 없단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네게서 멀어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난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정말 겁쟁이였다. 난 너와 전처럼 지내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여겼다. 그 당시 내 좁고 비굴한 마음속에는 배려라는 소중한 능력이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너의 수없는 두드림은 이런 나마저 항복하게 하였다. 너의 그 온기, 따스함에 익숙해져 버린 나는 너의 온기 없이는 도저히 생활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너와 함께한 그 한 달의 시간은 나에게는 살아온 날들 중 가장 행복했던 날들이었다고 감히 장담할 수 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본 나만의 위한, 나를 향한 웃음, 우정, 사랑, 행복이었다. 


넌 내게 수많은 첫 경험을 시켜주었다.

수업을 째고 놀러 나가기도 하고, 학교의 옥상에 올라가 점심을 먹기도 했다. 길거리에서 밤을 지새우며 떠들기도 했고, 우정 팔찌부터 커플 키링, 반지, 머리끈까지 우리 둘만의 물건들을 갖기도 했다. 물질적뿐만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으로까지 네게 받기만 했던 나는, 어리석게도 내 기쁨만 생각하느라 너의 감정과 심리를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이 있었다. 대단하고 큰 일을 하거나 엄청난 곳에 간 것도 아닌데 왜 그날의 기억이 내게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세세하게 기억되는지 의아했던 날이다.

평소처럼 주변의 도서관에 가 공부를 하고,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던 어느날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내가 너에게 나를 처음 보여준 날이기도 했다. 나는 글쓰기를 전부터 아주 좋아했다. 하지만 내 폐쇄적인 성격 탓인지, 내가 쓴 글은 나만이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전하려 하던 의미는 다르게 전달되고, 해석되었다. 문학의 관점은 여러 개다. 문학은 여러 방면에서 독자의 상황에 따라 각자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내 의미를 전하고 싶었다. 내가 내 감정을 담아낸 이 종이 쪼가리가, 아무리 종이 쪼가리일지라도, 제 본래의 가치대로 해석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내가 인터넷에 올렸던 나를 담아낸 어린 소녀에 대해 쓴 글은, 인터넷 속 그 누구에게도 내 의도대로 해석되지 못했다. 


넌 내 글을 읽고서 섣불리 감상을 말하지 않았다. 내 글이 너의 마음에 들었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너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묻지 않았다. 잠시 후, 너는 말없이 나를 꼭 껴안아주었다. 그 말 많고, 발랄하고, 시끄러운 네가 이토록 오래 침묵했던 것은 이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그날의 만남은 흐지부지 어색하게 헤어진 만남이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긴 하지만, 너는 일주일 뒤에 그 어린 소녀에게서 내가 계속 느껴져 읽는 것이 힘들었다고 했다. 고마웠다. 어느 누군가가 내 작품을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는 것이, 그리고 그게 너라서 더욱더. 


우리는 하루하루를 서로의 곁에서 보냈다. 난 그 한 달 동안 하루도 네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너와 함께하지 않은 모든 시간은 가치가 없어져 버릴 정도로 넌 나에게 의미 있었다. 


그리고 네가 떠난 그날, 내 마음도 너와 그 비행기 속으로 함께 떠났다.


네가 떠나고서야 생각했다. 너는 나에게서 상처만 받다 떠나가지 않았을까. 내 이기심, 피해의식, 열등감이 너를 괴롭게 하지는 않았을까. 너를 대하는 내 행동, 태도가 원망스러웠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너와의 마지막 날은, 유감스럽게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왜일까, 하루종일 울었기 때문일까? 그날만큼은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슬펐다. 삶의 목적에 대해서까지 고민할 정도였다. 그래도 너와 연락이 가능하다 생각해 위안을 얻었다. 



리고 그 위안은, 그로부터 2달 뒤 너의 이메일로 인해 무너져버렸다. 넌 내 연락처를 적어놓은 예쁘게 코팅한 종이를 찍어 보내며, 연락할 수 없는 너의 상황과, 오 년 뒤에 꼭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장문의 작별인사를 하였다. 너의 상황은 누가 봐도 힘들어 보이고 지쳐 보이던 상황이었는데, 그때의, 아직까지도 미성숙한 나는 너와 연락하지 못한다는 내 감정만을 생각할 줄 아는 어린애였다. 마음도, 몸도 어렸다.


지금까지 날들의 우울함이 무색할 만큼, 나는 잘 지냈다. 처음에는 너에 대한 그리움에 잠도 못 이루기도 했지만, 네가 내 성격을 바꿔준 덕분에 나는 새로운 친구도 사귀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친해진 소라는, 너하고도 아주 친했었다. 우리는 네 얘기를 하며 친해지기도 했고, 비슷한 관심사와 작가라는 꿈을 통해 아주 가까워졌다. 너와 함께한 것들을 소라와 함께할 때면, 때때로 네 생각이 났다. “넌 잘 지내고 있을까? 아마 그렇겠지. 넌 어디서든 빛나니까.” 내가 때때로 생각하던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난 어느새 대학생이 되었고,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대학생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여럿과 함께 어울리고, 대화하고, 섞인다는 것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즐거운 일이었다. 대학생의 나는 그렇게 행복하게 생활했다. 양심 없게도. 네가 가르쳐 준 모든 것을 이용해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나 혼자. 누렸던 것이었다. 


이맘때 즈음 나는 사랑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대가 없이, 이유 없이 나에게 항상 잘해주던 내 첫 남자친구는 내게 이성 간의 사랑을 느끼고, 배우게 해 주었다. 행복했다. 더할 나위 없이. 


그렇다고 내가 널 잊은 것은 아니었다. 난 단 한순간도 너에 대해 잊은 적이 없으니까. 난 너의 붉은빛도는 갈색 머리카락을 10미터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으니까. 대학생 생활을 하면서 재밌는 일이 있을 때면 난 항상 네가 여기 있길 바랐다. 네가 얼마나 즐거워하고 기뻐했을지 상상도 해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렇게 흘러간 나머지 3년. 


너와 만나기로 약속한 그날이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너와 약속한 날이 일주일쯤 남았을 때, 나는 무척 떨렸었다. 매사에 급해지고, 외모, 말투, 행동 등 내 모든 모습을 확인해 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네게 내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엄청 잘 보이고 싶었달까? 




당일날 나는 세 시간 일찍 나와 너를 기다렸다. 세 시간 동안 나는 너를 그리기만 했다. 내 부족한 그림 실력으로 네 얼굴을 종이에 그리기도 하고, 너의 특징들을 노트에 적어가며 너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렇게 세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너는 오지 않았다. 


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가끔 지나가는 아이들이 보이면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주기도 하고, 주변의 추억의 장소들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그렇게 주변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보니, 어느새 밤 11시가 되어 아주 어두워졌다. 그럼에도 난 떠날 수 없었다. 혹시라도 네가 올까 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너를 기다렸다. 그리고 지금 당장 너를 보지 않으면 영원히 다시 마주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내가 가장 그리던 너를 만나기 위해서는 여름밤의 추위 따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넌 다음날이 돼도 오지 않았다. 그 후부터 매일매일 나는 5년 전의 바로 그 약속 장소로 갔다. 그 일이 내게 일상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애석하게도, 약속장소로 가는 일이 내게 일상이 되기도 전에, 나는 그 일을 그만두었다. 


왜 나를 떠났어? 나와의 추억들은 네게 어떤 의미였던 것일까. 가장 아름다웠던 네가 나를 떠났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다. 보고 싶어.. 


내가 그 누구를 만나고, 그 어떤 친구를 사귀더라도 바뀌지 않을 사실이 있다. 


넌 영원히 내 첫 친구이자, 내게 사랑을 가르쳐준 사람이다. 


내가 사랑한 내 첫사랑 내 가족, 유한별. 


너는 내 가족이었고, 가족일 것이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 모든 것을 해주고 싶은 사람이 바로 가족 아닐까? 내게 그런 사람은 인생에서 단 한 명, 너뿐이었다. 


잘 지내니. 보고 싶다. 


한별아, 시간은 나를 도왔던 거였어. 여태껏 그리고 평생 동안 가장 소중한 너를 내가 잊지 않도록 해주었잖아. 



-내가 사랑하는 나의 가족, 유한별에게-


아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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