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

닭장 같은 아파트 무더기 속 너의 집 24층 꼭대기는 네 집이 아닌가 나를 올려다보는 네 두 눈은 새까만 바둑돌 내게 오는 길이 네겐 비탈진 오르막인 듯 주저하는 발걸음 위 샛노란 햇살이 비추는데 네 두 눈에는 길 잃은 개미 한 마리만 나는 네 반길 곳 못 되는구나 흘러가는 강물은 네 돌아갈 곳 비추는데 차디찬 강바람에 구석구석 찔려서는 네가 안긴 나의 품 네 몸 녹이지 못하니 나는 네 쉴 곳이 못 되는구나 학교를 마치고 학원을 끝내고 돌덩이를 내려놓고 내게 와서는 또, '집 가고 싶다.' 나는 네 집이 못 되는구나 빼곡했던 하루는 또 지나는데 너를 뉘일 그늘 없고 덥힐 햇살 없고 간질이는 바람 없으니 아, 너는 집이 없구나

• 채현126
• 2024-05-13

오래전 보았던 꽃의 수줍음까지 썼고 스스로 뫼비우스의 띠 위에 올랐다 어느 날의 폭우에 쌓아둔 장마를 털고부끄러움을 비추는 태양에 눈물을 보냈다내일의 날을 알지 못해도 계절을 믿었고 먼 날의 나를 보지 못해도 세월을 믿었다 그렇게 쌓아 올린 나의 반듯한 무더기가 바람에 무너지고 말에 부서지고 눈에 길을 잃는다 왜 나의 피라미드는 황량한 사막에 빈 껍데기가 되었는가

• 채현126
• 2024-04-11

세상이 너무 빨라서 정해진 끝까지 정신없이 내달리다가 느닷없이 막다른 길을 만나면 그림자를 그늘 삼아 느긋하게 눈 좀 붙여라 세월이 네 마음을 바꿔 길을 터놓을 때까지 고게 강산을 바꾸는 세월에 못 이겨 스러질 때까지

• 채현126
• 2024-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