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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 시인의 목소리로 듣는 「봬요」

  • 작성일 2024-07-11

   봬요

숙희



   내일 봬요 그래요 내일 봬요를 처리하지 못해 그냥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내일 뵈요 라고 썼다가 그건 또 영 내키지가 않아 그럼 내일 뵐게요 라고 적어보니 다소 건방진 듯해서 이내 그때 뵙겠습니다 라고 고치자 너무 거리를 두는 것 같고 내일 봐요에 느낌표를 붙였다가 떼었다가 두 개를 붙였다가 떼었다가 갈팡질팡하는데 가벼운 인사를 가벼운 사람으로 당신이 나를 오해할까 잠시 망설이다 숨을 고르고 다시 봬요로 돌아온다 그런데 봬요를 못 알아보고 세상에 이렇게 한글을 이상하게 조합하는 사람도 있네 라고 하면 어쩌지 아니면 봬요는 청유형 존대어라 어색한 걸 모르냐고 되물을까 봐 아무래도 이건 안 되겠다 싶어져 내일 봅시다 라고 따따따 찍어보니 참나 이건 정말로 더 아니다 싶어 결국 내일이 기다려져요 라고 보내버리고는 손목에 힘이 풀려 폰을 툭 떨어뜨렸다


   『오로라 콜』(아침달, 2024)

시인 김언
숙희 시인의 「봬요」를 배달하며

   카톡 하나 보내는 것이 웬만한 글 한 편 쓰는 것보다 더 힘들 때가 있습니다. 문자 하나 메일 한 통 쓰는 것이 작품 하나 완성하는 것보다 더 힘들 때도 있습니다. “내일 봬요”라는 간단한 문구 하나를 두고서도 수십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 사람. 그는 필시 언어에 예민한 사람입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예민한 만큼 상대방도 예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상대를 피곤하게 하지 않으면 자신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피곤은 작품을 완성할 때도 따라붙지만, 별것 아닌 문자 하나 카톡 하나 보낼 때도 따라붙기 마련입니다.

   마지막에 가서 “내일이 기다려져요”라며 다소 맥 빠지는 문자를 보낸 사람이 정말로 예민하게 감각을 세운 곳은 아마 ‘당신’일 겁니다. 저 문자를 받고서 어떻게 답문을 보내올지 궁금한 ‘당신’일 겁니다. 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화자의 마음에는 이미 문자 하나조차 예사로 보낼 수 없는 당신이라는 존재가 그득히 들어차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사귀는 사이는 아닌, 아직은 ‘썸 타는’ 관계처럼 보이는 저 두 사람이 더 가까워지면, ‘봬요’니 ‘뵈요’니 따위 가리지 않고 편하게 문자를 주고받는 날이 오겠지요. 언어에 예민한 화자가 사람 관계에서만큼은 덜 피곤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쉽나요? 말이나 사람이나 알면 알수록 더 어렵다는 것을 매번 느끼면서 오늘도 문자를 보냅니다. 끙끙대면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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