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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의 「대치」를 배달하며

  • 작성일 2023-09-07
  • 조회수 1,383

대치


마당 그네에 앉아 다리를 흔든다


다리를 흔들 때마다 그네가 간지럽고 간지러움처럼

구름부터 비가 오기 시작한다


먼 산에서 시작한 비가 가까운 산으로 온다

천변으로 온다 멀리서 가까이로 비가 다가온다

담 너머까지 도착한다


그네 앞까지 오면 얼른 뛰어가야지

손을 머리에 얹고 찰박거리며 도망가야지


하지만 비는 담 너머에서부터 더 다가오지 않는다


이상한 비야


힘껏 구르면 발끝이 젖을 것도 같지만

비의 세계에 닿을 것도 같지만

비와 나는 마주보고만 있다


김영미, 『투명이 우리를 가려준다는 믿음』, 아침달, 2023


시인 이수명
김영미┃「대치」 배달하며

   나는 마당 그네에 앉아 있다. 그네에 앉아 다리를 흔들면 비가 오기 시작한다. 나의 그네 놀이는 비를 부르는 신호가 된다. 그래서 “먼 산에서 시작한 비가 가까운 산으로 온다”. 조금씩 내가 있는 곳까지 다가온다. 하지만 비랑 같이 있고 싶은 것도 아니다. 비가 아주 가까이 오면, “그네 앞까지 오면 얼른 뛰어가”고 웬일인지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한다. 비를 부르면서 비로부터 도망가려는 것은 무슨 마음일까.

   이런 알 수 없는 마음을 알고 있는지 비는 담 너머에서 멈추고 더 다가오지 않는다. 그네를 힘껏 구르면 비에 닿을 텐데 나도 멈추고 있다. “비와 나는 마주보고만 있다”. 마주 보면서 다가가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존재들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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