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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 「유령림」

  • 작성일 2014-10-31
  • 조회수 2,251


김안, 「유령림」





선생님은 살아남는 자는 늘 빠르다고,
나머지는 소심하기 짝이 없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죠.
가로수마다 악저(惡疽)가 부풀어오릅니다.
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보면
한때 우리가 작고 보드라운 묘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 그때는 비가 와도 아무도 젖지 않았습니다.
눈을 감아도 이 세계에는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그 시절을 알고 계시죠?
선생님의 오래된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꼭 비열한 추억의 정직함만 같습니다.
선생님, 비가 옵니다.
제 뼈보다 희고 굵은,
제 뼈보다 무겁고 뜨거운 비입니다. 투두둑,
우산살이 하나하나 부러집니다.
선생님의 그 오래된 풍경은 아직도 젖어 있나요?
선생님, 전 어린 시절 개에서 물려 죽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몽둥이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개의 정수리를 내리쳤습니다.
개보다 나은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개보다 큰 비명을 지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먹장구름 사이 드문드문 빛나는 별은 죽은 개들의 안광만 같습니다.
선생님, 저를 보세요.
온몸에 뿔을 꽂고 있습니다.
가로수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깁니다.
온몸을 비벼 악저를 파헤치면 작고 보드라운 묘혈
그 속으로 들어가 웅크립니다.
개가죽을 뒤집어쓴 채 흘러가는 세월을 봅니다.
비가 와도 젖지 않는 하얀 유령림이 됩니다.




▶ 시 · 낭송_ 김안 - 김안은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4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하고, 시집으로 『오빠생각』, 『미제레레』 등이 있다.



배달하며

방금 배달된 나쓰메 소세키 전집 8권 띠지에 “늑골 끝에서 울리는/혈액의 고동소리”라는 구절에 환해지네요. 살아 있음의 기미를 감각의 선명함으로 돌려주는 이 한 구절에서 마음이 먼저 반응하며 환해진 것이지요. 세상에는 개보다 못한 부류의 사람과 “개보다 나은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사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요. 후자의 사람보다 전자의 사람들이 더 득세를 하면, 전자의 부류가 후자의 부류를 물어뜯는 세상이라면, 그곳이 곧 지옥이겠지요. 산 것들이 악저(惡疽)로 부풀며 병증을 보이고, 삶보다는 죽음이, 웃음소리보다는 비명이 더 많은 끔찍한 세상, 평범한 사람조차 “소심하기 짝이 없는 괴물”이 되기를 강요하는 이 기괴한 세상에서 “개가죽을 뒤집어쓴 채 흘러가는 세월”을 가만히 내다봅니다. 시인은 비가 내려도 젖지 않은 “하얀 유령림”들이 여기저기 생기고, 별조차 “죽은 개의 안광”처럼 빛을 뿌린다는 우울한 소문을 전합니다.



문학집배원 장석주


▶ 출전_『오빠생각』(문학동네)

▶ 음악_ 권재욱

▶ 애니메이션_ 강성진

▶ 프로듀서_ 김태형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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