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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 「회색 눈사람」

  • 작성일 2014-10-31
  • 조회수 2,286



“오로지 글쓰기만이 두 번째 삶이라는 기회를 준다.”

- 나탈리 골드버그,『인생을 쓰는 법』 중에서 -



최윤, 「회색 눈사람」






아침이 되었을 때 나는 외로움의 감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나는 시간을 빠르게 흘려보내기 위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오랫동안 방치해두었던 방안 청소를 했고 휘파람을 불면서 눈과 연탄재가 범벅이 된 회색의 비탈길을 하릴없이 두어 번 오르내렸다. 미약한 햇살마저 판자벽을 슬쩍 벗어나 있었고, 그런 응달에서 볼이 튼 어린 아이들은 재와 흙으로 범벅이 된 회색 눈으로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들이 몸통을 만들고 둥근 얼굴을 얹고 그 위에 돌조각으로 눈을 만들어 붙이고 입을 만드는 것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나는 거의 마지막 손질 단계에 있는 우리의 인쇄 책자를 생각했다. 주초에는 그 책에도 눈이 붙여지고 코가 붙여질 것이다. 이상한 흥분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그리워하고 있었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아무 일이나 그리운 것이 아니라, 비록 외곽에서의 잡일이기는 하지만 몇 달 전부터 내가 하기 시작한 바로 그 일을. 바로 그 인쇄소에서, 다른 사람 아닌 바로 그들과 일하는 것을. 아이들이 눈사람을 다 끝내고 쉰 목소리로 만족의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내 목을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벗어, 멋진 나무젓가락 콧수염을 단 회색의 눈사람의 목에 감아주었다. 조개탄을 아껴써야 했던 어느 저녁, 안이 오버 주머니에서 꺼내 목에 둘러주었던 목도리였다. 다시 한번 터지는 아이들의 환호성을 뒤로하고 나는 단숨에 언덕을 뛰어올랐다.




▶ 작가_ 최윤...... 소설가.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남. 1988년 《문학과사회》에 중편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로 작품 활동 시작. 지은 책으로『너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마네킹』『숲 속의 빈터』『오릭맨스티』등이 있음.


▶ 낭송_ 박성연 - 배우. 연극 「목란언니」, 「아가멤논」, 「그을린 사랑」,「천하제일 남가이」 등에 출연



배달하며

누구에게든 “아, 그때…… 하고 가볍게 일축해버릴 수 없는 과거의 시기가” 있겠지요. 아무리 짧은 시기여도 생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치는 그런 시기. 이 담담한 회상체의 소설은 정치적으로 엄혹했던 70년대, 인쇄소에 취직하게 된 강하원이라는 가난한 여대생의 이야깁니다.
회색 눈사람. 그것에 둘러준 목도리. 이 은유의 힘은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 단편 문학의 백미를 꼽을 때 빼놓을 수 없는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이 식지 않도록 연탄을 부지런히 갈며 저는 오랫동안 이런 우리 문학을 읽었습니다. 작가의 꿈을 갖게 된 건 그 무렵부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문학집배원 조경란


▶ 출전_『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문학과지성사)

▶ 음악_ Stock music-nostalsia 중에서

▶ 애니메이션_ 강성진

▶ 프로듀서_ 양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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