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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에게 울음을 (제2회)

  • 작성일 2014-06-01

 

 

부엉이에게 울음을 (제2회)

 

 

 

배수아

 

 


 

 

    나는 남편을 사랑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가 없는 사이 나에게 일어난 모종의 일에 대해서 털어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사실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앞으로 지속되는 미래의 시간 내내 이미 일어난 것일지도 모를 그 일에 대해서. 일어난 그대로, 혹은 일어나지 않은 그대로, 솔직하게 말이다.
    Errare humanum est(실수는 인간의 것이다)라고 누군가가 나에게 말했다. 아,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말을 한 사람은 바로 남편이었다. 내가 직장에서 사소한 실수를 - 예를 들자면 부주의한 바람에 신청서 등을 분실하는 - 저질렀을 때 그가 그렇게 말했다. 아마도 나를 위로해 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나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차라리,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니, 너는 참 도덕심이 부족하군.’ 하고 말했으면 최소한 나 자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볼 계기는 되었으리라.
    나는 무엇이었나.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언제나 문 뒤에 있는 나였다.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채로 다가가서 문을 열었고, 그리고 그곳에서 내 눈이 본 것들에 대해서 내 언어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이 내 존재의 정의다.
    남편을 집에서 마지막으로 마주친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최근에 남편은 주말에도 집에 오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잠들어 있는 시간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갈 수도 있지만, 그가 남기고 간 빨랫감이나 메모 등의 흔적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나는 낮에 직장을 다니고 밤에는 잠을 자는 식으로 살았지만, 그는 낮에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다가 밤에 움직이는 인간이었다. 나는 어두워지면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나 그는 밤에만 배고픔을 느꼈다. 나는 낮에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했으나 그는 낮의 사람들을 견딜 수 없어 했다. 그러면 우리는 처음에 어떻게 만났을까? 아니, 우리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밤이었을까 낮이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어느 불명확한 어스름의 경계, 나는 러시아어 교재를 파는 상점으로 불쑥 들어갔고, 거기에 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상점의 진열대는 거의 내 키만큼이나 높다. 테이프와 레코드, 커다란 헤드폰과 라디오와 녹음기, 두터운 비닐 커버가 씌워진 교재들이 빼곡히 들어찬 상점은 숨 막히는 인조가죽 냄새와 구두에 칠하는 염료, 그리고 여자들이 손톱에 바르는 에나멜 약품 냄새가 났다. 그것은 나에게 최초로 각인된 러시아어의 냄새였다. 그 한가운데서 그가 말했던가? ‘러시아어 테이프는 문법 해설이 영어로 된 것뿐이야.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이 아니거든. 그래도 괜찮겠니?’ 말하는 그의 얼굴은 진열대 뒤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그의 뒤편 보이지 않는 상점 안쪽에서는 누군가가 틀어 놓은 녹음기에서 신비롭고 강한 억양의 러시아어가 반복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동굴 속에서 시를 낭독하거나 기도를 올리는 듯한 억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 젓는다. 나는 상점을 나선다.

 

    나는 퇴근 후 남편의 직업실로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다. 비록 한 번도 방문한 적은 없지만 나는 그의 작업실 주소를 알고 있고 더군다나 열쇠까지도 갖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남편으로부터 직접 받았다. 일종의 비상용 열쇠인 셈이다. 비상이란 어떤 종류의 상황을 말하는 것인지 나는 짐작할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유일한 비상사태는 남편이 부주의로 열쇠를 잊어버리는 경우뿐인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남편의 작업실로 갈 일이 없었다.
    작업실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버스를 타고 십여 분 거리에 있었다. 그곳은 간판이 없는 3층 건물의 지하 스튜디오였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할 때였으므로 모든 사물이 거무스름했다. 문 앞에서 나는 잠시 망설였다. 벨을 누를까 하다가 그냥 열쇠로 문을 열었다. 남편이 깨어 있는지 아닌지 확실히 몰랐고, 그가 잠들어 있다면 벨을 누르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하실 안은 예상외로 매우 널찍했고, 어디선가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이 있는 듯했다. 전등을 켜지 않았는데도 완전히 깜깜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거실 반대편 끝 벽에 설치된 작은 주방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늘 속에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다. 처음에 나는 그가 남편이라고 생각했으나 곧 남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남편보다는 훨씬 젊고, 대학원생인 듯 보이는 낯선 남자였다. 여자처럼 갸름하고 창백한 얼굴에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그다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나에게 누구냐고 물었고 나는 예고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것에 대해서 사과했다.
    그는 남편과 작업실을 나눠 쓰는 번역가라고 했다. 나는 지금까지 남편이 다른 사람들과 작업실을 공동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여긴 모두 세 명의 번역가들이 작업하거든요.” 하고 젊은 남자가 설명했다. “방도 세 개라서 서로 방해받을 일도 거의 없고 조용하게 일할 수 있어요. 집세도 나누어 내니 저렴하구요. 러시아 번역가의 방은 저쪽이랍니다.” 하고 그는 하나의 문을 가리켰다. 그리고 조금 주저하더니 덧붙여 말했다. “그런데 지금 방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사실 꽤 오랫동안 보이지 않아서, 집에 갔거나 아니면 여행을 떠났나 생각하던 참이었거든요. 원래 그런 말을 잘 안 하는 사람이라서요. 하지만 뭐 어쩌면 금방 들어올지도 모르죠. 어쨌든 안에서 한번 기다려 보세요.” 그리고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잠시 남편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아주 가볍게 노크를 해보았지만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았으므로 나는 문손잡이를 돌려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매우 어두웠기 때문에 나는 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켰다.
    믿을 수 없이 많은 책들이 나타났다.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책들의 산더미, 책들의 요새이자 성벽이었다. 책들의 나라이고 왕국이었다. 책은 책장이 아니라 바닥에 그냥 쌓여 있었는데, 천장까지 닿는 세 겹 네 겹의 벽을 이루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오직 책뿐이었다.
    나는 등 뒤에서 문을 닫고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문에 기대 서 있었다.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것은 오래전 어린 시절의 다락방 안으로 들어서는 느낌과 같았다. 냄새마저도 그때와 같았다. 모든 것이 사라졌지만 내 다락방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다락방은 낡아서 무너져 내린 것도 아니고, 도시정비 사업단의 불도저 이빨에 허물어진 것도 아니며, 폭격을 맞아 불에 타버리지도 않았고, 홍수에 휩쓸려간 것도 아니었다. 다락방은 그냥 거기에 그대로 있었을 뿐이다. 단지 내가 그곳을 떠나왔을 뿐. 내가 그곳으로부터 사라졌고, 내가 낡아서 그곳으로부터 무너져 내렸다. 내가 폭격을 맞았고, 내가 불에 타버렸고, 그리고 물에 휩쓸려 간 것도 나였다.
    내 손이 책들에 닿았다. 손끝이 책의 표면을 스쳤다. 나는 책들의 벽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릴 것을 두려워하며 손을 떨어뜨렸다.
    나는 무한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때 처음으로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 어쩌면 나는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위대한 작가나 대단한 작품을 써서 이름이 알려지는 그런 작가가 아니라, 오랫동안 자신의 회귀를 기다려 온 다락방을 가졌기 때문에 결국 그곳에서 홀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작가.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드높이, 천장까지 닿도록 쌓인 책 더미의 성벽과 흘러내리는 형체로 무너진 책 더미의 폐허 사이로 좁은 침대와 탁자와 의자 하나가 모습을 감추듯이 숨어 있었지만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탁자 위에 누군가가 몸을 구부리고 엎드려 있는 듯이 보였지만 그건 가득 쌓아 놓은 책 더미가 탁자 위로 반쯤 무너지면서 만든 형체에 불과했다. 탁자 아래에 누군가 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는 듯이 보였지만 그 역시 불규칙한 형태로 마구 쌓여 있는 책 더미였다.
    사각거리는 글자들의 숨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를 듣고 있는 나는, 나는 어쩌면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 그 어떤 지적인 훈련이나 재능도 없이, 그 어떤 준비나 지식도 없이, 오직 부엉이의 울음을, 오직 밤의 징후를, 해독할 수 없는 다락방의 문자로 옮겨 쓰는, 개연성 없는 문장들 사이로, 서툴게 말 더듬는,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작가.

 

    남편이 탁자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워드프로세서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방의 불빛은 조금 전보다 훨씬 더 흐릿해진 것 같았다. 이런 흐릿한 불빛 아래서 그는 어떻게 일을 할 수 있을까? 내 눈꺼풀은 무거웠다. 나는 침대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남편의 기척에 깨어났으리라. 아주 갑작스럽고 아주 짧은 잠이었다. 불편하게 구부린 자세로 누워 있었으므로 무릎과 어깨가 뻣뻣했다. 남편이 덮어 준 듯한 담요가 내 몸 위에 있었지만 뼈마디를 파고드는 기이한 한기를 느꼈다. 남편은 내가 잠이 깬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글쓰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한동안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워드프로세서 위로 구부정하게 몸을 구부린 남편은 내 기억 속의 모습보다 훨씬 더 늙어 보였다. 한동안 보지 못하는 사이 남편은 무서우리만큼 여위어서 뺨이 동굴처럼 움푹 파였고 머리도 거의 백발로 바뀌어 나는 충격을 받았다.
    “여행을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어요. 다른 방의 번역가가 그러더군요.”
    나는 누운 채로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남편은 의자를 돌려 비스듬히 나를 마주 보았다. “여행이라니,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 난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건 당신도 잘 알잖아.”
    “하지만 그 이태리어 번역가가 그러던걸요. 수염을 기른 젊은 남자.”
    “그는 이태리어 번역가가 아냐. 히브리어 번역가지.”
    “아, 그렇군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내가 여기 온 건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자 맞은편 책 더미와 책 더미 사이로 드러난 좁다란 벽에, 한 여인이 마치 어두운 틈새에 몸을 숨기듯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조금 전 내가 침대에 누울 때 분명 그곳에는 책 더미뿐이었기 때문이다. 남편도 그녀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러나 남편은 앉은 자세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시선으로 나를 빤히 지켜볼 뿐이었다. 책 더미 사이의 그 여인은 놀랍게도 나와 아주 닮았다. 그녀는 나와 같은 머리 모양을 가졌으며 나와 같은 흰색 원피스를 입었다.
    잠시 뒤 나는 그것이 흐릿하고 탁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임을 알아차렸다.
    오래되어 거무스름해진 낡은 거울 앞에 남편은 책 더미를 쌓아 놓았고, 무슨 이유에선지 내가 잠든 사이 책 더미의 일부가 소리 없이 쓰러지면서 거울이 드러났던 것이다.
    내가 일어서서 거울로 다가가자 거울 속의 그녀도 일어서서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나와 같은 모습이었으나 거울 속의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몹시 어둡고 그늘졌으며, 내가 알고 있는 나보다 훨씬 더 불분명하고 흐릿했다. 나는 그녀를 계속 응시하면서 남편을 향해 불쑥 말했다.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요. 나 작가가 되고 싶어요.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이 꿈처럼 떠올랐어요. 단순한 기분만은 아닌 것 같아요.”
    나는 남편이 웃음을 터트릴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적어도 조금은 웃을 거라고. 왜냐하면 그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이미 더 이상 다락방의 아이가 아니었으므로. 그의 눈에 비친 나는 글을 쓰지도 읽지도 않는, 철저하게 비문자적인 사람이었으므로.
    하지만 남편은 웃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독특한 꿈을 꾼 모양이군. 작가가 되고 싶게 만드는 꿈이라니. 그건 밤의 꿈인가, 아니면 낮의 꿈인가?”
    “자면서 꿈을 꾼 것이 아니라, 문득 꿈처럼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구요.”
    “당신이 작가가 되고 싶다고?”
    “……. 네 그래요.”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작가가 쉽게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 그렇진 않겠죠.”
    “혹시 당신 그 사이 나 모르게 뭔가 글이라도 쓰고 있었던가? 설마 책을 읽지도 않는 당신이, 잡지나 추리소설조차 읽지 않는 당신이 정말로 글을 써봤다는 말인가? 아주 믿기 힘들군.”
    “그런 건 없지만……. 아, 사실은 어떤 문장 하나가 떠올라서, 그걸 쓰긴 했지만, 당신이 집에 가져다 놓은 타자기에다……. 하지만 그것뿐이에요. 그건 글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오늘 여기 들어와서 책들을 보니, 오랜 의문이 풀리기라도 하듯이 갑자기 생각이 났어요.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하나의 문장?” 남편은 되물었다. “달랑 하나의 문장을 썼단 말이지? 그리고 여기 내가 더 이상 작업 공간을 넓힐 여력이 없어서 마구 쌓아 놓은 책 더미를 보니 작가가 되고 싶어졌다는 거야? 당신, 그건 좀 경솔한 결정처럼 들려……. 게다가 당신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글이나 책과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그럴 수가 있지? 당신은 책을 읽기 싫어하고, 심지어 일기나 편지도 쓰기 싫어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글쎄 그건 나도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신기해서 이렇게 불쑥 말하고 싶어진 거예요.”
    “뭐 지금부터라도 시작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말이야, 난 오래전에 출판사를 경영한 적이 있어…….”
    “네, 알고 있어요. 당신이 말해 주었잖아요.”
    “그때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여럿 알게 되었거든.”
    “그랬군요.”
    “그중에는 이미 청소년기부터 작가가 되려는 꿈을 안고 준비를 해온 사람들도 많았어. 엄청난 독서량은 물론이고 몇 년 동안이나 문장력 수업을 쌓고 글쓰기 강좌도 들으러 다니는 사람들 말이야. 그런데도 자신만의 글, 완성된 작품을 써내기에는 다들 아직 멀었다고 말을 하더라고.”
    “아…….”
    “내 말은, 당신도 물론 그런 꿈을 가질 수는 있지만, 작가란 결코 기분이나 즉흥으로 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미리 알고 있으면 좋겠다는 그런 뜻이야.”
    “물론 그렇겠죠.”
    “그래서, 지금 당장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시작하겠다고 생각해 둔 계획은 있는지?”
    “아직은 아무것도 구체적인 건 없어요. 그냥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전부인걸요.”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느끼거나 아니면 적어도 노력해 볼 의지를 갖고 있다면야…….”
    “오 당신, 너무 멀리 나가지 말아요. 난 정말로 진지한 작가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에요. 아니 내 말은, 물론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진지하지만, 그건 위대하고 훌륭한 작가, 위대하고 훌륭한 문학 작품을 쓰는 그런 작가가 되고 싶다는 욕심은 물론 아니란 거예요. 대단한 작품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타고난 천재적인 작가들…… 교과서에 나오는 그런 명망 있는 작가들 말이에요. 난 그런 걸 꿈꾼 건 아니에요. 그냥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 것이고, 그게 전부예요. 그리고 아직은 아무런 계획도 없어요. 그리고 아마 난 작가가 될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사실 작가가 되지 못한다 해도 마음이 크게 아프지도 않겠죠. 난 아무런 준비도 노력도 하지 않았으니까.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당신 말대로 이렇게 마음이 내킨다고 즉흥적으로 작가가 되는 거라면, 누가 몇 년씩이나 수업을 쌓고 있겠어요. 글을 쓰는 일이 그렇게 쉬운 거라면요.” 나는 거울 속 여인을 바라보면서, 마치 그녀를 설득시키듯이, 그렇게 남편에게 말했다.
    “그런데 당신이 꿈 얘기를 꺼내니 말인데.” 한동안 말없이 있던 남편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난 어제 이상한 꿈을 꾸었어.”
    “무슨 꿈?” 나는 거울 앞에서 몸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꿈속에서 나는 깊숙한 타일 욕조에 색색의 알록달록한 금붕어들을 기르고 있었지. 다섯 마리 커다란 금붕어였어. 욕조에는 금붕어들뿐이고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어. 그런데 나는 또 하나의 욕조를 갖고 있었거든. 처음 것보다 더 큰 그 욕조에는 아주 커다란 사기 화분이 여러 개 물에 잠겨 있었어. 물속에서 기르는 나무, 그게 정확히 무슨 나무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나무들이 심어진 화분이었어. 특이한 점은 화분의 흙이 오래되어 석탄처럼 아주 시커맸다는 거야. 문득 금붕어 욕조에 이 화분을 넣어 놓으면 금붕어들은 화초 사이를 헤엄칠 수 있어서 좋고 바라보는 나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잎이 많이 달린 가장 커다란 화분을 번쩍 들어서 금붕어들이 노는 욕조에 넣었지. 그런데 화분이 물속에 잠기자 놀랍게도 화분의 검은 흙 속에서 죽은 물고기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하는 거야. 살점은 하나도 없이 시커멓게 뼈와 대가리만 남은 물고기들인데, 가만히 보니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었어! 게다가 한두 마리가 아니라 계속해서 튀어 올라오는 거야. 시커먼 좀비 물고기들은 화려하고 통통한 금붕어들을 쫓아다니면서 앙상한 대가리에 달린 커다란 이빨로 금붕어들을 집어 삼켰어. 난 공포를 느꼈어. 내 금붕어들이 하나씩 잡아먹히는 것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어서 더욱 무서웠어. 공포는 꿈에서 깨어난 다음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더군. 소름끼치게 음침하고 불길한 꿈이었으니까. 그래서 당신이 이렇게 찾아와 할 말이 있다고 했을 때, 이런 건 사실 우리 관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니까, 솔직히 난 속으로 이유 없는 불안을 느꼈어. 그런데 이제는 안심이야. 당신이 작가가 되고 싶어서 그 말을 나에게 하고 싶었던 거라니 말이야. 심지어 기쁘기까지 해…….”
    “당신은 내가 아는 유일한 글 쓰는 사람이잖아요……. 작가는 아니지만 번역을 하니까. 게다가 내가 아는 유일한 책 읽는 사람이기도 해요. 그리고” 나는 잠시 망설인 후에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당신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정말로 작가가 되든 되지 않든, 어쨌든 그런 당신이 자랑스러워.” 남편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름과 근육을 가볍게 씰룩이는 것이 전부인, 아주 희미한 미소였다.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충고란, 이제부터 책을 많이 읽으라는 거야. 당신은 아직 깨닫지 못하겠지만, 사실 이 세상은 곧 글이야. 글이야말로 우리 삶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해……. 글이 없는 삶은 내용이 없는 사건에 지나지 않지……. 당장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책을 읽는 자들은 누구나 이것을 알고 있어. 그러니 읽도록 해.”
    “당신이 자랑스러워하니 나도 좋아요. 그런데…….” 나는 거울에서 몸을 돌리고 남편을 바라보았다. “내가 계속해서 이렇게 거울을 보면서 말하고 있는데, 당신은 나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에게 다가오는 법도 없네요.”
    “그건 무슨…….” 남편은 조금 당황하는 듯했다. “방이 이렇게 좁은데, 손만 뻗으면 우리는 서로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데, 그건 무슨 소리야? 우리는 굳이 그럴 필요조차 없이 이미 가까이 있는 셈인데,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군…….”
    “의미는 없어요. 그냥, 어쩌면 당신이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에요.”
    “바보 같은 소리야.” 남편은 소리 내어 조금 웃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 그렇지 않다면 왜 결혼했겠어?”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그렇지 않다면 당신 말대로 결혼했을 이유가 없죠.”
    우리는 그 상태로 잠시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이리 가까이 다가와.” 남편이 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 팔은 나에게까지 닿지 못하고 허공에 그대로 멈추었다.
    내가 그에게 다가갔다.
    우리는 겹쳐진 채로 가만히 있었다.
    남편의 몸은 속이 텅 빈 허수아비같이 마르고 가벼웠다.
    “미안해.” 남편이 말했다. “미안해. 당신을 오래 혼자 둔 것. 방세를 전부 혼자서 감당하게 한 것.”
    “알고 있어요. 요즘 일이 잘 안 풀린다는 것. 그래서 마음의 여유까지도 없다는 것.” 나는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조금만 지나면 나아질 거야. 조금만 지나면 은행 빚도 전부 갚을 수 있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아무래도 좋지 않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
    “당신 머리가 백발이 되었군요. 게다가 너무 많이 말랐어요.”
    “나이 많고 가난한 남편이어서, 항상 당신에게 미안해.”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우리 둘이 노력하면 앞날은 더 나아질 거예요. 반드시 그렇게 될 거예요.”
    언제인가, 남편과 이와 똑같은 대화를 나눈 것이 기억났다. 아마도 결혼을 결정한 직후였을까? 아니면 신혼여행을 다녀온 다음이었을까? 그때도 남편은 말했다. 미안해. 방세를 혼자 내게 해서 미안해. 은행 빚을 해결하지 못해서 미안해. 미안해. 하지만 나는 혼자서 일할 공간이 필요한 사람이야. 나는 낮의 인간들이 견딜 수 없어……. 나는 북적거리는 인간들의 육체적인 부대낌이 견딜 수 없어.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견딜 수 없어.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밤이 필요해……. 그때도 나는 같은 말로 그를 위로했다. 어떤 상황이라도 당신을 사랑해요. 그렇지 않다면 왜 당신과 결혼했겠어요. 방세는 중요하지 않아요. 은행 빚도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 둘이 함께 노력하면 앞날은 얼마든지 나아질 수 있어요. 당신이 나이 들어도, 당신의 머리가 백발이 되어도, 당신의 몸이 허수아비처럼 변해도, 당신이 밤이라도 혹은 낮이라도, 나는 상관없이 당신을 사랑해요.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해요. 그렇지 않다면 왜 당신과 결혼했겠어요.
    “정말로 작가가 되든 되지 않든, 어쨌든 당신이 자랑스러워.” 남편은 내 가슴에 머리를 묻고 말했다. “당신이 읽어 보면 좋을 책들을 골라서 보내 줄게. 책도 안 읽고 무작정 글부터 쓸 수는 없을 테니 말이야.”
    “그건 아직 모르겠어요. 하지만 읽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은, 난 솔직히 몰랐어요…….”
    “당신은 아무것도 몰랐잖아. 글에 대해서는. 쓰는 것이든 읽는 것이든…….”
    “맞아요. 난 아무것도 몰라요. 하지만 당신에게 하지 않은 말이 있는데……. 난 오래전에…… 난 오래전에 다락방에서 자랐어요. 거긴 책이 아주 많았답니다. 책들이 성을 이루고 담을 이루고 겹겹이 폐허를 이루었어요. 그래요, 지금 생각하니, 그곳은 마치 책들의 무덤 같았어요. 허공에 지어진 고분 말이에요. 차갑게 식은 불꽃 속에서 흐릿한 주작이 날개를 펴고 있는 곳…… 난 거기서 홀로 자랐어요. 당신에게는 아직 말한 적이 없지만. 당신 듣고 있어요?”
    남편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냥 내 가슴에 꼼짝없이 얼굴을 묻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에게 언젠가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 시간에 대해서. 그러면 아마 당신은 내가 지금 왜 이러는지, 조금은 이해할지도 모르죠.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 일에 대해서 말이에요.” 나는 말없는 남편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사실 그건 일어나지 않은 일이에요…….”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어떻게 말한다는 거지?”
    남편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서, 일어나지 않은 일을 말하려 하니, 자꾸만 다른 일들이 불쑥불쑥 떠올라요. 일어나지 않았던 다른 일들 말이에요. 예를 들자면, 오래전부터 당신에게 말하려던 것이었는데, 예를 들자면 모노 호수에서의 일…… 모노 호수에서 당신이 그토록 오래 보이지 않았을 때, 나는 당신이 정말로 나를 완전히 떠나버린 줄 알았어요…….”
    남편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잠든 듯이 내 가슴에서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린 후 소방차와 앰뷸런스가 사이렌을 울리며 오고, 구조대원이 보트를 타고 호수 한가운데로 들어갈 때……. 나는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알아차렸어요. 아, 누군가가 물에 빠졌구나. 그때 나는, 발밑의 땅이 푹 꺼지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심지어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어요. 나는 돌이 되어버렸어요. 석회석처럼 흘러내리며 굳어버렸어요. 그때 나를 장악해 버린 오직 한 가지 인식은, 이것이 꿈이기만 하다면, 이것이 꿈일 수만 있다면 나는 뭐든지 다 할 텐데, 그것이었어요. 당신 알고 있나요? 그 순간 나는 내가 믿지 않는 신에게 내가 갖지 않은 영혼을 당장 내어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약속도 했어요.”
    “당신이 믿지 않으면, 신은 없는 거야. 영혼도 마찬가지고.” 나는 남편이 고개를 들지 않고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큼 아득히 먼 곳에서 울려오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러니 그런 약속은 그만 잊어버리도록 해.”
    “정말 다행이에요.”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정말 다행이에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당신이 읽어 보면 좋을 책들을 골라서 보내 줄게. 그리고 그런 약속은 그만 잊어버리도록 해.”
    “그런데, 오늘 사실은, 일어나지 않은 어떤 일을 당신에게 말하려고 온 거예요. 그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떤 의미로는 실제로 일어난 일만큼 중요하게 느껴져요. 그래서 당신에게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 듣고 있어요?”
    나는 남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푹 꺼진 남편의 눈꺼풀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의 입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먼 동굴에서 울리는 남편의 말소리를 들었다.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 그러니 그런 약속은…….
    넌 도덕심이 없어. 그러니 결혼을 한다 해도 오래가지 못할 거야. 나는 너를 믿지 않아. 그러니 네가 결혼한다는 말도 사실은 믿지 않아. 지난번 결혼과 마찬가지로 이번 결혼도 역시 가짜가 분명해. 넌 이기적이고 거짓말쟁이야. 도덕심이 없으니 죄의식도 없을걸. 그러니 넌 네가 하고 싶은 일만 골라서 하겠지. 그게 점잖은 결혼은 절대 아닐 테고 말이야.
    하고 어머니는 내 두 번째 결혼을 앞두고 말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 뺨을 때렸는데 그건 그녀가 내 계모여서는 분명 아니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내가 죽은 남동생의 사진에 침을 뱉었기 때문에 화가 나서 그랬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내가 남편의 몸을 거칠게 밀쳐냈을 뿐이다. 남편의 상체는 썩은 짚단으로 만든 허수아비처럼 흔들거리며 의자 등받이로 가서 부딪혔다. 천장의 불빛은 조금 전보다 더욱 흐릿해져서, 방 안의 사물은 전부 거무스름하게 변했다. 모든 것이 오래되어 혼탁한 검은 거울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남편의 얼굴조차 정확히 보이지가 않았다. 그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내가 밀쳐낸 그대로 힘없이 흔들거릴 뿐이었다. 그의 입술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지만, 나는 남편의 목소리를 들었다. 당신이 읽어 보면 좋을 책들을 골라서 보내 줄게. 방세를 혼자 내게 해서 미안해. 당신이 자랑스러워. 당신은 분명 좋은 작가가 될 거야…….
    오, 당신의 시커멓게 뼈와 대가리만 남은 물고기들.
    남편이 얼굴을 묻고 있던 내 원피스 가슴 부분에는 기묘하게 거무스름한 얼룩이 남았다. 고개를 숙여 코를 가까이 대어보자 악취가 났다. 악취는 책으로 가득 찬 방 안 전체에 빠른 속도로 퍼졌다.
    나는 남편을 향해 침을 뱉었다. 하지만 남편은 내 뺨을 때리지 않았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신이 읽어 보면 좋을 책들을 골라서 보내 줄게.
    나는 내가 한 행위에 몸서리쳤다. 얼음처럼 차가운 내 몸에서 뜨거운 땀이 흘렀다. 나는 달아나듯이 그곳을 나왔다.

 

    스물아홉, 두 번째 이혼을 며칠 앞두고 이사 준비를 하던 나는 흐트러진 집 안 소파에 앉아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는 중이다. 그리고 오후가 저물어 가는 내내 1950년 발간 잡지 《서울의 장미》를 계속해서 읽는다. 거기에 실린,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어느 작가 지망생의 투고를 읽는다

 

    무서운 소문이 단숨에 도시를 휩쓴다. 그것은 네이팜탄보다도, 심지어 전쟁 자체보다도 더욱 무서운 소문이다. 그날, 나는 유탄에 맞아 상처 입은 발을 이끌고 항구로 향한다. 반드시 가야 한다고 김 선생이 나를 설득한다. 이제 곧 이 도시는 지옥불의 화형에 처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피리 부는 난쟁이, 키 작은 황인종을 모두 박멸할 것이다. 나는 김 선생과 함께 길을 나섰으나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얼어붙은 웅덩이에 발이 미끄러지면서 길바닥에 쓰러진다. 김 선생이 힘겹게 나를 일으킨다. 공포와 고통으로 나는 소리 없이 운다. 그러나 김 선생은 나를 지체하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여기 있으면 모두 죽습니다.” 그는 말한다. 항구로 가는 길목은 처참하게 비쩍 마르고 누추한 인간 군상들로 가득하다. 그들이 만들어낸 더러운 파도가 공포와 분노로 들끓고 부글거리면서 항구로 몰려가는 중이다. 눈길이 닿는 곳 어디에나 인간과 가축의 똥과 진흙이 버려진 인간의 잔해들과 뒤엉켜 있다. 까마귀들이 새까맣게 모여든 쓰레기 더미 위에는 숯덩이처럼 타버린 아이가 놓여 있다. 아이는 사지를 오므린 채 동그랗게 웅크린 자세다. 우리는 한순간 물끄러미 그것을 본다. 전쟁 중에 죽음은 흔한 현상이다.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뭉뚝하게 타버린 손발을 꼬물거리고 있는 것을 확인한 순간, 우리는 눈길을 외면해 버린다. 우리는 손을 잡고 계속해서 간다. 우리는 발을 질질 끌면서 간다. 폭격을 맞은 노동자들의 숙소는 무너졌고 산비탈 흙집들은 오물과 함께 흘러내렸다. 남루한 도시의 모든 폐허가 한겨울 추위에 한꺼번에 덩어리진 채 얼어붙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얼어붙었다.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들은 짐승처럼 벌레처럼 등을 구부리고 폐허 사이에서 석탄이나 땔감 부스러기를 주우러 다닌다. 폭탄은 모든 것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남아 있는 것은 불에 탄 찌꺼기뿐이다. 얼어붙지 않은 웅덩이에는 악취 나는 물이 고여 있다. 살이 찢겨 나갈 듯한 한겨울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물에 스며든 악취가 땀구멍과 목구멍을 조인다. 불도저의 톱날이 아직 남아 있는 집들을 무너뜨리며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공산주의자들을 찾아내는 중이다. 섬뜩한 광풍이 휘몰아치는 부둣가에는 천이나 수건으로 얼굴을 감싼 누더기 차림의 피난민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거대한 배들이 항구 저편에 떠 있다. 기름이 둥둥 뜬 바다는 음험하게 짙은 회색빛이다. 그러나 이제 저 바다만이 구원이다. 패닉이 닥친 것은 오늘 새벽이다. 지금 도시 전체는 죽음의 공포로 제정신이 아니다. 정신이 나가버린 사람들이 발광을 하면서 부둣가로 모여든다. 정복당한 도시는 발가벗겨진 여인과 같아서 아무 곳이든 가서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서기만 하면 비밀을 차지하게 된다고 한 정복자는 말했다. 반면에 정복자들이 퇴각하는 도시는 막 육신의 부패가 시작된 죽은 여인과도 같다. 아무도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으며 나체에 무방비로 다리까지 벌리고 있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비밀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해안가 도로에 늘어선 기다란 공장 건물들은 오래전에 약탈당했거나 파괴되었고, 먹을 것이라곤 썩은 생선 대가리 하나도 구경할 수 없다. 역겨운 기름과 화약 냄새가 도시 전체에 떠돈다. 당장은 폭격이 없지만, 조만간에 포탄은 다시 떨어질 것이다. 불을 내뿜는 화기들이 이 항구 도시의 마지막 똥 무더기까지 모조리 난도질할 것이다. 화상을 입고 피투성이로 터져버리지 않은 인간의 살갗은 남아 있지 않으리라. 지금 살아남은 아이들은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정체모를 공포에 찢어져라 운다. 하지만 그들이 언제까지 살아남아 있을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강풍이 우리의 낡은 옷자락을 펄럭이고 우리는 비틀거린다. 우리는 사람들 틈에 섞여 이리저리 휩쓸리면서 기다린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멀리서 포성이 들릴 때마다 사람들의 낯빛이 먼저 새까맣게 죽는다. 마치 사람들의 몸 안에서 심장이 먼저 타들어가는 것처럼. 육지는 사방이 중공군이 포위한 지옥의 전쟁터가 되었으므로, 차가운 이빨을 드러낸 바다가 유일한 길이다. 나는 스카프로 얼굴을 최대한 감싸지만 한겨울의 바닷가 북풍을 막기란 불가능하다. 허기와 피곤도 우리를 괴롭힌다. 나는 눈이 감기고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다. 사랑에 빠진 우리는 기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 했으나 어느 날 갑자기 국경 검문이 엄격해지는 바람에 이 황량한 항구 도시에서 발이 묶였다. 나는 러시아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게 되었고 서울에서 나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친 김 선생은 이 도시의 학교에서 교사 자리를 얻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울로도 블라디보스토크로도 가지 않았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피난민 통제선 앞까지 도달했는지 알지 못한다. 어느덧 우리의 눈앞에는 납빛으로 일렁이는 바다가 놓이고, 고무보트들 위로 나무판자 다리가 걸쳐진다. 사람들이 보트 위로 올라가고 있다. 미친 듯한 이 바람! 나는 쓰러질 것만 같다. 갑자기 “저 여자! 저 여자! 저 여자는 소련군의 통역이었어! 공산주의자!” 하고 내 등 뒤에서 크게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고발하는 목소리, 적의와 증오를 품은 목소리다. 나는 모른 척해 보려 하지만 누군가 내 겉옷의 뒷자락을 난폭하게 끌어당긴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뒷걸음친다. 꾸역꾸역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어느새 김 선생을 놓치고 만다. “어디 있어요! 내 손을 놓치면 안 돼요!” 김 선생이 다급하게 외치지만 그의 목소리는 터져 나오는 그악스러운 소용돌이에 묻혀버리고 만다. “저 여자는 소련군 통역이었다고요! 저 여자를 쫓아내야 해요!” 하고 조금 전의 그 목소리가 피난민 통제선을 지키고 있는 미군에게 소리친다. 미군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의심을 담은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코뮤니스트!” 하고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말라빠진 더러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면서 고발한다. 그러자 긴장한 미군이 당장이라도 총부리를 나에게 겨눌 태세다. 공포에 질린 나는 꼼짝할 수가 없다. 김 선생은 인파에 떠밀려 빠르게 멀어지고 있지만 그를 쫓아갈 수가 없다. 계속해서 나를 부르는 김 선생의 목소리도 순식간에 아득해지며 나는 한꺼번에 밀려오는 공포와 충격으로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나는 무력하게 두 손을 들어 텅 빈 손바닥을 미군에게 내보인다. 누덕누덕 기운 초라한 보퉁이의 물결이 꾸역꾸역 내가 있는 자리로 끊임없이 밀려들고 있으므로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수조차 없다. 김 선생의 모습은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비켜, 비켜!” 하고 내 정체를 눈치 챈 사람들이 기세 좋게 소리치며 위협한다. 그들은 나를 물에 빠뜨려 죽일 듯이 거칠게 밀쳐낸다. 굶주림에 지친 그들의 어디서 저런 엄청난 힘이 솟아났을까 알 수가 없다. 나는 비틀비틀 밀려난다. 나는 보트에 올라탈 수가 없다. 나는 더 이상 김 선생의 손을 찾을 수가 없다. 나는 언젠가 이런 순간이 닥쳐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나무토막처럼 무감각하다. 심지어 추위와 배고픔조차도 느끼지 못한다. 나는 희망을 버린다. 나는 땅바닥에 내팽개쳐진다. 이제 우리가 다 떠나고 나면 미국이 너희들을 모두 쓸어버릴 거야. 너희들을 모두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일 거야! 그때가 되면 너희는 불 속에서 저절로 만세를 부르겠지! 이것이 해방이라고! 누가 내 귀에 이렇게 낄낄거리고 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야! 난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했을 뿐이야! 당신들은 나를 다른 누군가와 혼동하나 본데, 나는 소련군의 명령에 따라 통역을 한 것이 전부야!” 나는 이렇게 소리쳐 보지만 내 목소리는 보트에 올라타려는 군중의 소름끼치는 아우성과 채찍처럼 사나운 바람소리에 묻혀버린다. 그들은 한 명의 공산주의자를 배에서 몰아낸 덕분에 여분의 자리가 더 생긴 것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거무스름한 붉은 구름이 도시의 하늘 전체에 무겁게 퍼져 있다. 둔중한 폭음이 귀를 찢으며 연속적으로 들려온다. 곳곳에서 시설과 기물을 폭파하고 있다. 굉음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뭉클거리며 솟아오른다. 나는 차가운 바닥에 손바닥을 짚고 있지만 차가움조차 느끼지 못한다. 어쩌면 나는 죽을 것이다. 나는 배에 올라타는 김 선생의 모습이라도 마지막으로 확인해 보려 한다. 그때 내 눈에, 바다 위 보트에서 불안정한 자세로 서서 나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는 김 선생의 모습이 들어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람들이 김 선생의 멱살을 잡고 밀어내는 광경이 보인다. 그들은 뒤늦게 또 한 명의 러시아어 통역자를 발견한 것에 의기양양하다. 코뮤니스트! 그들이 바다 위에서 합창한다. 그들은 김 선생을 발로 찬다. 김 선생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짙은 회색빛 물속으로 빠져버리고 만다. 코뮤니스트! 하고 외치는 말에 보트를 지휘하는 미군도 폭도들을 제지하지 않는다. 너울거리는 파도에 가려 물보라는 심하게 일지 않는다. 물이 강철 혓바닥처럼 내 사랑을 삼킨다. 그 순간 내 가슴 속에서 거대한 고무 폭탄이 터지며 심장이 파열한다. 나는 산 채로 활활 불에 탄다. 우리는 화형에 처해질 것이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는다. 눈물은 나지 않는다. 우리는 산 채로 불에 탄다. 우리는 굶주린 사람들의 손에 찢긴다. 우리는 혹한의 북방 얼음바다에 가라앉는다. 시간이 정지한다. 나는 더 이상 비통하지도 두렵지도 않다. 김 선생을 밀어버린 보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 넘실거리며 거대한 배를 향해서 다가간다. 보트가 배에 가 닿자 사람들은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부른다. 그들은 생명을 얻는다. 그들은 지옥불의 화염을 피한다. 그들의 살아남은 입은 이야기를 계속하고 그들의 살아남은 손은 이야기를 기록한다. 마지막 보트까지 떠나고 나자, 부둣가에 남겨진 사람들의 눈물과 비탄이 저주의 강을 이룬다. “아악! 끝내 너희는 떠나버리는구나! 너희가 가고 나면 이제 미국의 원자폭탄이 날아오겠구나! 원자폭탄이 날아오겠구나! 우리를 다 산 채로 불태워 죽이겠구나! 왜 너희는 이 나라에 와서 우리에게 이런 지옥을 안기고 떠나는가?” 비통한 절규가 하늘을 찢는다. 공포로 미쳐버린 여인이 가슴에 안고 있던 아기를 땅바닥에 팽개친다. 가까운 곳에서 엄청난 굉음이 귀를 찢는다. 가장 규모가 큰 정유 탱크가 폭파된 것이다. 시커먼 연기가 뭉클뭉클 솟고 불꽃과 파편이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희미하고 흐릿한 한겨울의 태양이 검은 연기의 장막 뒤로 사라진다. 빛 없는 세상은 낡고 어둡고 거무스름하다. 너희 살아남을 자들이여, 원한다면 모조리 태워버려라, 이 무의미한 밤의 나라를. 이곳에서의 체류는 그토록 불행하지만, 나는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밤의 부엉이처럼 나는 조용히 구석에 웅크릴 뿐이다. 그리고 철수가 완료된 후 중공군의 도시 진입에 맞추어 미국이 투하할 예정이라는 고요한 검은 새, 원자폭탄을 기다린다.

 

    완전히 어두워졌다. 밤이 되었다.
    나는 식은 커피를 버리고 다시 새 커피를 끓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주말이 지나간다.
    나는 새로운 셋집으로 이사한다.
    다음 주 월요일, 나는 직장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 앉아 있다. 일주일의 휴가가 끝났기 때문이다. 도중에 올라탄 사람이 비어 있는 내 옆자리에 와 앉으면서 휴가는 어땠느냐고 인사를 건넨다. 그는 나와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동료이며, 휴가 중에 내 일을 대리로 맡아서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인사를 마친 뒤 즉각 미해결된 일 이야기를 꺼낸다.
    “아무리 찾아봐도 혼인신고를 한 서류가 없으니, 달리 방법이 없는 일 아닌가요?” 그는 아직도 조금 심통이 나 있는 듯하다. “그런 상황에서 무조건 결혼증명서를 만들라고 하면, 나더러 어쩌라는 것인지.”
    “내가 한 번 더 잘 찾아볼게요. 그러면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내가 서류함과 캐비닛을 온통 샅샅이 뒤져 봤는데 분명히 없었다구요.” 그는 항변한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났는데……. 혹시 작년에 구청이 이사를 할 때, 그때 분실된 거 아닐까요? 그럼 큰일인데.”
    “설마 그럴 리가요. 그리고 이제 내가 왔으니 알아서 해결할게요. 원래 내 일이기도 하니까요.” 나는 상냥하게 대꾸한다.
    “난 이 일이 정말 싫어요.” 그는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인 듯 늘 하던 대로 익숙한 불평을 쏟아 놓는다. 내가 부탁한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것이기도 한 자신의 직업에 관해서다. “나뿐 아니라 나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이 내 일을 싫어해요. 그래서 그들은 마침내 나라는 인간마저도 싫어하게 되는 듯해요.”
    “설마 그럴 리가 있나요.” 나는 건성으로 위로한다.
    “정말이라니까요. 나는 예전부터 국가 혐오자였어요.”
    “국가를 혐오하건 그렇지 않건, 어쨌든 일은 필요하잖아요. 일은 일일 뿐, 특별히 좋아할 필요도, 그렇다고 혐오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대학 시절 내내 아나키스트였고 게다가 제도권 결혼 반대자인 내가, 서른도 안 된 나이로 하필이면 호적에 혼인 기록이나 정리하면서 살고 있다니…….” 그는 한숨을 쉰다.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 구청이라면 지긋지긋해요.”
    나는 그의 투덜거림에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는다. 나는 무릎 위에 놓인 오래된 잡지를 다시 읽기 시작한다.
    이곳에서의 체류는 여전히 그토록 불행하지만……. 나는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밤은 부엉이에게 울음을 주고……. 나는 울지 않는다.
    소나기 내린 뒤, 하늘이 파랗게 맑은 한여름 아침이다. 나는 읽는다는 행위에 매료된다. 나는 낡은 종이와 활자 냄새를 깊이 들이마신다. 나는 잃어버린 어떤 내용을 되찾은 듯하다. 내 언어가 말할 수 없는 그 내용에 나는 매료된다. 그것이 나를 만든다. 내 표정을 만든다.
    버스가 강을 건너갈 무렵, 옆자리의 동료가 갑자기 내 팔을 잡으며 묻는다. “저것 봐요, 저게 뭐죠?”
    흰 구름이 점점이 흩어진 높고 새파란 여름 하늘을 배경으로 비행기가 한 대 고요히 지나가고 있다.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듯한 비행기는 불안정한 기류 때문인지 잠시 비틀거린다. 그리고 마치 아름다운 여인이 특별한 장소에서 손수건을 떨어뜨리듯이, 그렇게 검은 물체 하나를 강물 북쪽 도심 위로 떨어뜨린다. 물체는 허공에 비스듬하게 누운 모양으로 낙하한다. 마치 죽은 새의 비행처럼 검고 고요하다. 그 어떤 저항도 소리도 없다.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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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에게 울음을 (제1회) 배수아 두 번째 이혼을 결정했을 때 나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그리고 그즈음 막연하게 작가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두 사건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내가 정말로 작가가 될 수 있으리라고는 물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작가가 되고 싶은 소망 따위와도 거리가 멀었다. 배우가 되면 어떤 기분일까, 만약 외국에서 살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충동적이고 진지하지 않은 호기심에 가까웠다. 마치 누군가, 배우와도 외국과도 관련이 없이, 그렇게 즉흥적으로 타자기에 쳐 넣었을 뿐,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임의의 글자와도 같은 것. 구체적인 사건이 아니라서 더욱 매료시키는 것. 글이나 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며 심지어 단 한 번도 글을 써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 그것에 대해서 묻는다면, 단지 나는, 다락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 전부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의 다락방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었는데, 그 대부분은 더 이상 아무도 읽지 않는 낡고 오래된 책이었다.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책들의 산더미, 책들의 요새이자 성벽이었다. 책들의 나라이고 왕국이었다. 책은 책장이 아니라 바닥에 그냥 쌓여 있었는데, 천장까지 닿는 세 겹 네 겹의 벽을 이루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오직 책뿐이었다. 나는 내가 책들의 바다에서 태어나 홀로 표류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락방의 먼지에서 홀로 자라난 아이였다. 내가 오직 다락방에서 생애 초반기의 대부분을 홀로 보낸 이유 중 하나는 그 안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으면서 더 이상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는 책들을 홀로 들춰 보는 재미를 알았기 때문이다. 위의 문장들에서 가장 의미심장하며 결정적인 어휘는 다락방이나 표류나 먼지가 아니라 다. 나는 벽과 벽 사이의 좁은 공간, 졸음과 잠 사이의 불명확한 시간, 현기증과 침울함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기찻길에 항상 마음이 끌렸다. 그것은 모두 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다락방의 책들은 동화를 제외하면 대부분 글자가 세로로 인쇄되어 있었지만 나에게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제목이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설사 책 무더기의 가장 아래에 있더라도 어떻게든 빼내버린다. 잘못하면 책들의 산은 와르르 무너진다. 그러면 그 뒤편에 쌓여 있는 책 더미의 폐허가 새로이 드러나고, 거기서 우연히 흥미로운 제목을 발견한다. 혹은 우연히 펼쳐진 페이지에서 흥미로운 삽화를 발견한다. 나는 처음의 책을 잊은 채 뒤편 책 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두 번째 책의 성벽이 와르르 무너진다. 무너진 책들 사이에서 내가 읽지 못하는 한문과 로마 알파벳으로 적힌 제목이 나타난다. 나는 호기심에 차서 책장을 넘기다가 신기한 삽화가 들어 있는 페이지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한 남자가 나체로 서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치켜들고 있다. 남자는 사람의 흔적이 없는 호숫가에 서 있으며, 호수

  • 배수아
  • 201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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