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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의 그림자

  • 작성일 2014-08-01

 

 

K의 그림자

 

 

이서수

 

 

삽화-k의-그림자

 

 

    숙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이유는 내가 아무런 수입이 없었을 때 가끔씩 용돈을 주셨던 것을 결코 잊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숙모의 외아들 K는 나보다 다섯 살 아래였는데 그가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K는 가족 모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나를 비롯한 친척들은 얼마간 궁금하긴 했으나 자세히 물어보지는 않았다. 숙모가 K로 인해 심한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아무도 몰랐다. 숙모는 돌아가신 삼촌과 달리 입이 아주 무거운 사람이었고 K의 문제는 쉽사리 털어놓을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었다. 숙모는 심리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나를 선택했다. K는 상담 치료조차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나는 완곡히 표현하려 애쓰면서 지금이라도 강제로 데리고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숙모는 K가 원하지 않는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K의 상태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몇 달 전부터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으며 그것은 좋은 징조임이 분명하다고 했다. 어떻게 면접을 통과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으나 숙모는 K의 말만 믿고 그가 착실하게 돈을 벌고 있다고 생각했다.
    K를 만나기 위해 숙모의 집을 방문한 날, 숙모는 K가 도착하기도 전에 집을 나섰다. 나는 텅 빈 집에서 K를 기다렸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할지 몰라서 점차 긴장됐지만 만나면 억지로라도 웃는 얼굴로 대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K의 얼굴은 앳된 고등학생의 얼굴이었고 이제 K는 이십대 후반이었으므로 그 사이에 그가 어떤 얼굴로 변했을지 상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K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 생각대로라면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K의 도착시간이 가까워오자 입안이 바싹 말랐다. 연거푸 물을 마셔 봐도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K가 집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숨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예상과 달리 K는 너무나 평범한 모습이었다. 머리를 박박 밀지도 않았고 허옇게 탈색하지도 않았으며 해괴한 옷을 입지도 않았고 맨발도 아니었다. 그가 도착하기 전까진 갖가지 기괴한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으나 K는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십대 후반의 남자였다.
    K는 주춤거리다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숙모로부터 내가 오기로 했다는 말을 이미 들은 모양이었다. 숙모는 내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차와 과일을 내어준 후 불안한 얼굴로 다급히 집을 나섰다. 숙모를 붙잡지는 않았다. 나는 나대로 잔뜩 긴장한 상태였고 숙모도 K의 반응이 어떨지 알 수 없어 고민하는 것 같았다. K는 내게 살짝 목례를 하더니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어 마시고는 가방을 방에 두고 거실로 나왔다. 나는 오랜만이라며 말을 건넸으나 K는 고개만 끄덕일 뿐 대답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K는 거실 카펫의 기하학적 무늬만 내려다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아주 멀쩡한데.”
    K는 웃지 않았다. 내 웃음소리만 허공에서 맴돌다가 사라졌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어 보고 싶었으나 K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깐 동안 우두커니 서 있다가 슬그머니 소파에 걸터앉았다. K의 눈치를 살폈으나 꾹 다문 입을 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언뜻 보면 아직 대학생으로 보일 정도로 동안이었으나 자세히 보면 팔자 주름과 어릴 적보다 더 불거져 나온 광대 밑의 그늘이 눈에 들어왔다. 짧게 깎은 머리는 단정해 보이는 한편 남의 말엔 절대로 흔들릴 것 같지 않은 완고함도 느껴졌다. K는 한 자리에 우뚝 서 있기만 했다. 나는 할 말을 찾아 머릿속을 뒤져 보았으나 도무지 나와 K의 접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누구나 다 하는 말을 꺼내어 보았다.
    “요즘 날씨가 참 이상해. 장마철이어야 하는데 비도 안 오고 꿉꿉하기만 하고 말이야.”
    “더워요?”
    K는 내 대답을 듣지 않고 선풍기를 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작동되고 있었던 선풍기는 어느 틈엔가 저절로 꺼져버렸다. 아마도 타이머를 맞춰 놓았던 것 같다. 선풍기는 일정한 간격으로 딱딱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어딘가 부품이 엉성하게 끼워져 있는 듯했다.
    “옛날에 우리 가게 선풍기가 이랬는데.”
    내 말에 K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으로 마주한 K의 눈빛은 정상인의 그것보다 조금 더 밝게 빛났다. 눈만 본다면 누구보다도 총명해 보였다.
    “일 다녀오는 길이니?”
    K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내 눈을 피해 선풍기 날개만 쳐다보았다.
    “무슨 일을 하는데?”
    “형은 무슨 일 하는데요?”
    “나? 나는…… 여기저기에 글 쓰지.”
    “무슨 글이요?”
    “짧은 여행기.”
    “그럼 여행을 많이 다니겠네요?”
    “그렇지 뭐…….”
    나는 말끝을 흐렸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가본 곳이 적었다. 앞으로 계속하게 될지도 미지수였다. 이제는 기억도 까마득한 십여 년 전에 무명 잡지에 투고한 글이 당선되어 친척들 사이에선 작가 대접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 잡지가 폐간되자 더 이상 글을 발표할 곳이 없었다. 다른 곳에 투고해 봤지만 매번 낙선했다. 그러한 사실은 숨긴 채,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학원 강사 일에 본격적으로 나섰으나 그 일마저 일 년 전에 그만두었다. 그때 벌어 놓은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지금껏 연명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지방에서 강사 일을 시작한 친구는 이제 자기 명의로 된 학원 건물을 갖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 치열했고 매번 경쟁에서 도태되는 많은 사람들 중에 내 이름도 꼭 끼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촌동생을 상담하고 조언을 해줄 정도의 여유는 갖기 힘들었으나 숙모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말했듯, 친척들 사이에서 작가 대접을 받긴 했으나 주머니는 텅 비어 있던 때에 내게 여러 번 용돈을 찔러 준 분이었다. 그리고 K의 증세는 선뜻 이해가 되지도 않을뿐더러 정말로 K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믿을 수도 없었다. 숙모는 돌아가신 삼촌 때문인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나 생전에 들은 말들을 떠올릴 수는 있었다.
    삼촌의 취미는 UFO 사진 찍기였다. 단 한 장일지라도 존재의 증거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진을 남기는 게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는 친척 모임의 술자리에서 종종 놀림감이 되곤 했는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건 낚시하고 같아. 넓은 하늘에 카메라라는 낚싯대를 던져 놓고 생각에 잠겨 있다 보면 수면에 작은 파문이 일듯 하늘에 작은 흔들림이 포착되지. 그것을 적시에 잡아다가 끌어내야 하는 게 우리의 공통점이야. 물고기보다 훨씬 더 잡기 어렵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야.”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갑갑하고 척박한 이 세상에 외계 생명체가 등장하는 것만큼이나 흥미로운 일이 어디 있겠어.” 그때, 어린 K는 삼촌을 싫어했다. 삼촌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인상을 찌푸렸고 다른 말을 꺼내어 화제를 돌리려 했다. 정말로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크게 대든 적도 있었다. K는 어릴 때부터 이성과 논리만 앞세운 얄미운 소리를 곧잘 했다. 그런 K와 삼촌은 부자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성격이 달랐고, 삼촌이 K를 품었던 반면에 K는 삼촌을 배척했다. 둘이 언제 화해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삼촌이 돌아가시던 마지막 순간에 K가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때 나는 연이은 낙선에 방황했고 나를 제외한 다른 누구에게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할 말 있으면 어서 해요.”
    K는 나를 잔소리 많은 어른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선 무슨 얘기를 꺼내더라도 반감만 살 게 분명했다. 다짜고짜 상담부터 받자고 할 수도 없었다. 숙모가 내 대학 성적표를 봤다면 이런 자리를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내 역할을 떠올려 심리학 전공자답게 행동해야 했다. 아마도 그들은 직접적으로 상대의 폐부를 찌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K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삼촌 얘기를 꺼낸 건 결코 우회전술이 아니었다. 후회가 밀려왔지만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숙모의 예상이 맞았다. K는 그토록 싫어하던 아버지 때문에 이런 상황까지 온 것 같았다.
    “그때 나는 개인적인 일로 좀 방황했어. 그래서 삼촌의 임종이 어땠는지 기억이 잘 안 나. 너는 그 자리에 있었지?”
    K는 대답 대신 나를 노려보았다. 더욱 적대적으로 변한 눈길이었다.
    “그래서요?”
    나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말을 골랐다. 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그 자리에는 숙모와 K, 그리고 우리 부모님과 큰 아버지 세 분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 순간에 대해 훗날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귓밥이라고. 마지막 순간에 한 명씩 그에게 다가가 귓가에 대고 잘 가시라고, 우리 꼭 다시 만나자고 인사를 나눌 때 어머니는 자신의 차례가 되어 삼촌의 귀에 대고 작별인사를 하려다가 커다란 귓밥을 보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귓밥 때문에 작별인사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고 당장이라도 그것을 끌어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것이 귓구멍을 꽉 막아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이 작별인사를 하는 내내 안절부절 못하면서 서 있다가 마침내 밖으로 뛰어나가 면봉을 구해 왔는데, 병실에 들어섰을 땐 삼촌의 숨이 멎어 있었다.
    “너를 혼내려는 것도 아니고 닦달하려는 것도 아니야. 그저 네가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래. 우리 어릴 적에는 친하게 지냈었잖아. 네가 대학에 들어간 뒤로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아서 그렇지.”
    나는 한 번도 K가 나타나길 기다리지 않았고 그를 많이 궁금해 하지도 않았으면서 마치 그가 우리의 우정을 배반한 것처럼 굴었다. K는 고개를 들어 거실 창을 쳐다보다가 한결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형,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요?”

 

    그날, 아버지가 나를 차에 태웠을 때 나는 우리가 어디로 갈지 이미 알고 있었어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죠. 또 시커먼 밤하늘 아래 오랫동안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돌아올 게 뻔했으니까. 아버지는 졸음이 쏟아지는지 운전하는 내내 내게 말을 걸었어요. 나는 평소처럼 짧은 대답만 반복하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죠. 그날은 쌀쌀한 가을날이었고 뒷좌석에는 커피가 든 보온병이 놓여 있었어요. 아버지가 내게 그 보온병을 집어달라고 했는데 나는 못 들은 척했어요. 이럴 거면서 왜 따라가겠다고 했는지 나도 알 수가 없었죠. 결국 아버지가 갓길에 차를 세우더니 보온병을 집어 와서 커피를 따라 마셨어요. 거의 다 마셨을 때쯤 아버지가 내게 말했어요.
    “내가 왜 그렇게 유에프오에 집착하는지 너는 모르지?”
    알 리가 없었죠. 듣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또 아무 대답도 안 했죠. 아버지는 내 눈치를 살피다가 말했어요.
    “그건 너 때문이야, 이 녀석아.”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일부러 반응을 보이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내 대답은 기대도 안 했다는 듯 혼자서 말을 이어갔어요.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안 나겠지만, 네가 새로 산 공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트럭에 부딪힌 거지. 네 엄마와 나는 네가 팔이 부러져서 깁스를 했다고 했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팔이 부러진 건 사고가 나기 전이었고 너는 깁스를 한 상태에서 트럭 아래에 깔렸지. 손이나 다리, 뭐 이런 데가 아니라 머리였어, 머리.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했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네 머리를 본 사람들마다 오열을 했어. 의사는 우리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너는 내내 혼수상태였어. 네 이모, 숙모, 큰어머니들이 몰려와서 다 같이 손잡고 기도를 했지. 하지만 희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네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어.
    그때 나는 울부짖는 친척들을 피해 대학병원 구내를 쏘다니다가 어느 진료실 대기 의자에 앉아 있었어. 그런데 옆자리에 멀뚱히 앉아 있던 노인이 내게 이상한 말을 하더구나. 젊었을 적에 죽을병에 걸린 적이 있는데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던 건 외계인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노망 난 노인이 지껄이는 말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더구나. 자세히 물었지. 그 외계인을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노인은 자신의 고향을 알려주며 그곳에 가면 극장이 딱 하나 있는데 그 극장 뒤의 공터에서 만났다고 했어.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그곳까지 왜 갔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럴 정신이 없었지.
    나는 그 길로 차를 타고 노인의 고향으로 내려갔어. 두 시간이 넘게 걸렸지. 도중에 되돌아갈까 숱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그러지 않았어. 그대로 돌아가면 두 번 다시 너를 볼 수 없을 것 같았거든. 하지만 노인이 알려준 극장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어. 얼마 안 되는 마을 사람들에게 수소문해 봤지만 극장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 그때서야 노인의 말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외계인뿐만 아니라 극장까지도 망상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결국 포기하고 올라오려다가 어느 오래된 상회에 들러서 담배 한 갑을 사면서 기대 없이 물었는데, 글쎄 그 나이 든 주인이 극장을 알고 있다고 하지 뭐냐. 지금은 사라졌지만 어린 시절에 드나들었다고.
    나는 그가 알려준 곳으로 차를 몰고 갔다.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있는 특색 없는 공터였어. 건물이 있었던 흔적 같은 것은 전혀 없었지. 하지만 근처를 걷다 보니 조그만 창고가 있었고 깨진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니 겹겹이 쌓여 있는 의자와 비스듬히 세워 놓은 그림 간판이 보였어. 그런데 그게 좀 이상했다. 그 그림 간판이 말이야. 마치 어제 그린 것처럼 새 것인 데다가, 놀라지 마라, 그 영화가 뭐였는지 아니?”
    어느새 아버지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죠.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었어요.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그건 말이다. 너도 잘 아는 영화야. 바로 <이티>였어. 이티를 태운 자전거를 타고 달을 지나 날아가는 포스터. 기억하지? 바로 그 장면이 그려져 있는 간판이었어.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이냐.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 극장이 없어진 건 한참 전인데 바로 전날 그린 것 같은 그림 간판이 있고 말이야. 게다가 <이티>라니. 그 영화 역시 오래전에 개봉한 영화 아니냐. 나는 어리둥절해서 한참 동안 창고 근처를 서성였어. 그러고 있는 동안 그 노인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구나. 노인의 나이나 극장의 폐쇄 시기로 미루어 보아 그가 그곳에서 이티를 봤을 리는 없지만, 그가 그곳에서 외계인을 만났다고 한 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던 거지.
    고민 끝에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 노인이야말로 신이 내게 보낸 메시지라고. 나는 잠금 장치도 걸려 있지 않은 창고 안으로 들어가서 그림 간판을 질질 끌고 밖으로 나왔지. 그리고 바닥에 그걸 내려놓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빌었다. 제발 너를 살려달라고. 해질 무렵까지 그러고 있다가 다시 간판을 안으로 들여놓고 서울로 올라왔다. 도착하자마자 네가 기적적으로 호전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내 기분이 어땠겠니? 응?
    그 뒤로 그 노인은 한 번도 보지 못했어. 다시 그 창고로 가봤지만 창고 자체도 이미 다 사라진 후였지. 사람들은 <이티> 간판을 묻고 다니는 나를 미친 사람 보듯 했고. 그날부터 나는 결심했단다. 너를 살려준 외계인에게 꼭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겠다고. 더불어 말이다. 앞으로 우리 가족에게 어떤 시련이 닥칠지 알 수 없지 않겠니. 내가 아플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런 때에 한 번 더 부탁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아직 가족을 떠날 때가 아니니 나를 좀 살려달라고 말이야.”
    아버지는 그때 이미 자신의 앞날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런 말을 했어요. 아버지가 입원했을 때 나는 자연스레 그 말이 떠올랐죠. 하지만 아버지한테 묻지는 못했어요. 그곳이 어딘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을 수가 없었어요. 한 번도 그 얘기를 믿은 적이 없었으니까. 늘 아버지에게 적대적이었으니까. 형도 들어서 알겠지만 그날,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하마터면 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도 못 나눌 뻔했죠. 왜 그랬냐고요? 아버지가 미워서 그랬냐고요? 친척들은 그렇게 수군댔죠. 그렇게 사이가 나쁘더니 임종도 겨우 지켰다고.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인사한 사람이 나였어요. 정신없이 뛰어오는 바람에 숨이 차서 숨을 고르느라 그 소중한 시간을 또 낭비했죠. 내가 아버지 귀에 대고 했던 마지막 말이 뭔지 알아요? 미안해요. 못 찾았어요, 이거였어요. 미안해요. 못 찾았어요.
    아버지가 희미하게 미소 짓는 걸 봤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착각이라고 했어요. 아버지는 내가 도착했을 때 이미 반쯤 저 세상으로 건너가 있었다고. 어머니는 그때 내게 악의적이었어요. 아버지의 병세가 빨리 악화된 것도 내가 밖으로만 쏘다니고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죠. 믿기지 않죠? 형은 우리 엄마를 좋아하니까. 하지만 엄마는 그때 사랑하는 남자를 잃은 여자일 뿐이었어요. 내 엄마이기 전에 말이에요. 엄마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외계인에 집착하는지 몰랐어요. 내가 나중에 그 얘기를 해주니까 펑펑 울었죠. 아버지가 너무 순진한 사람이라면서.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믿을 수가 있냐면서. 결국 어머니한테 말하지 못했어요. 어머니 역시 예전의 나처럼 외계인 같은 것은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해서 나를 살렸다는 것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니까. 어머니는 사람이 벼랑 끝에 몰리면 머리가 잠시 어떻게 되는 수도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더 말 못 했죠. 내가 왜 그렇게 밖으로 나돌았는지. 내가 그 시간에 아버지의 카메라를 들고 어디를 쏘다녔는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아버지한테 한 번도 묻지 못했을까. 내가 당신의 소망을 계승했다고 왜 말하지 못했을까. 아버지는 분명히 기뻐했을 텐데. 외계인을 만나면 아직 가족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전해 달라고 했을 텐데.

 

    그건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슬픈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나자 상황에 맞지 않게, 돌아가신 삼촌의 익살스러운 표정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는 내 머리통을 콕콕 찌르다가 내가 돌아보면 두 눈을 모으고 혀를 쭉 빼는 바보스러운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런 유치한 장난을 지치지도 않고, 내가 아이에서 어른이 될 때까지 계속했다. 나는 사춘기 시절을 제외하고는 매번 웃어 주었으나 속으로는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게 갑자기 미안해졌다. 웃어 주는 게 뭐가 힘들다고.
    K가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던 이유가 외계인 때문이라는 건 좀 놀라웠지만 그런 사연이 있었다면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얘기를 다 듣고 나서도 K가 어쩌다 이런 상태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삼촌의 소망을 계승하는 것과 K가 망상 속에 빠져 사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교차점도 없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 물으려고 입을 열었는데 K가 한 손을 들더니 내 말을 제지했다.
    “아직 다 안 끝났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나는 계속 외계인을 찾아다녔어요. 만나더라도 아버지의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는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어요. 아버지가 남긴 수만 장의 사진 파일을 한 장씩 꼼꼼하게 살피면서 확실한 증거 같은 것을 찾으려고 노력했죠. 하지만 미미한 흔적들뿐이었어요. 어느 것도 명확한 증거가 될 수 없었죠. 피사체는 심하게 흔들려 있었고 그걸 감싸고 있는 작은 불빛도 빗방울로 얼룩진 차창에 맺힌 먼 곳의 불빛처럼 불안정해 보였죠. 윤곽선이 뭉개지듯 번져서 금세 사라져버릴 것 같았어요. 결국 아버지가 남긴 사진들은 단 한 장도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아버지가 남긴 관찰일지를 들춰보면서 아버지가 갔던 장소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어요. 다녀온 후에는 빨간색으로 줄을 긋고 날짜를 적어 두었죠. 그렇게 일지에 적혀 있는 장소를 일일이 다 찾아가 봤지만 헛걸음만 하고 돌아오는 일이 다반사였어요. 그러다 그 사람을 만났죠.
    그도 아버지처럼 십 년 넘게 유에프오를 쫓아다니는 사람이었어요. 그도 관찰일지를 쓰고 있었죠. 아버지가 쓴 것을 보여주었더니 아주 좋아했어요. 나를 금세 믿었죠. 그러더니 대뜸 자기만 알고 있는 비밀 한 가지를 알려주겠다고 했어요. 그는 외계인은 물론이거니와 논리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온갖 것들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죠. 그는 그즈음 유에프오를 쫓아다니는 것에 흥미를 잃어 가고 있었고 대체할 새로운 것을 찾고 있었어요. 그 가설은 오래전부터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했던 것인데 그는 그런 영화들에서 정보를 얻었노라고 솔직하게 털어놨어요. 미국에서 제작된 그 영화들은 대부분 사실을 바탕으로 한 누군가의 체험을 다룬 것이라고. 그 경험담이 퍼지고 퍼져서 영화로까지 제작된 것이라고. 그러니까 그의 말은, 우리는 이미 외계인을 만났으며 만나고도 그 사람이 외계인인 줄 모른다는 거였죠. 처음에는 그저 농담으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점점 진지해졌어요. 자신이 외계인이거나 내가 외계인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결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옆에 외계인이 앉아 있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모른 채로 창공만 응시하다가 돌아가는 것이라고. 바로 곁에 있는 사람에게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비행 훈련만 연거푸 찍어대고 있다고. 나는 웃었지만 그는 웃지 않았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내게 증거를 제시해 보라고 했죠. 내가 인간이라는 증거. 외계인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증거. 나는 곰곰이 생각할 것도 없이 내 피는 붉다고 했죠. 그는 코웃음을 쳤어요. 외계인의 피가 초록인 건 영화에나 나오는 이야기 아니냐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영화에서 정보를 얻었다고 하던 사람이 갑자기 태도를 싹 바꿨어요. 짜증이 나긴 했지만 유일한 말동무인 그가 자리를 뜰까 봐 계속 생각해 봤죠. 내가 인간이라는 증거가 뭘까. 나는 어릴 적 친구들과 부모님에 대해서 얘기했어요. 그들이 내가 인간으로 살아온 증거가 될 거라고 생각했죠. 그는 잠자코 내 말을 들어주긴 했지만 그게 사실인 것을 자기가 어떻게 알겠냐고 했어요. 결국 아무것도 증거가 될 수 없었죠. 이번에는 내가 물었어요. 당신이 인간이라는 증거를 말해 보라고. 그랬더니 그는 웃으면서 자기가 언제 인간이라고 말한 적이 있냐고 되묻더군요. 자기가 바로 외계인일 수도 있다고. 지금 당장 자기를 찍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인간의 피부와 똑같은 가면을 벗을 테니 곧바로 사진을 찍으라고. 그러더니 머리 가죽을 위로 끌어올리려 했어요. 나는 웃었어요. 그도 웃었고. 그러더니 갑자기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더군요. 자기가 인간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는데 그건 바로,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 열일곱 시간 동안 심심해 죽을 뻔했던 것이라고. 내가 나타나서 이렇게 대화를 나누게 되니 이제야 좀 살 것 같다고. 그는 갑자기 가족들이 보고 싶다며 울상을 지었어요. 마누라와 대판 싸우고 집을 뛰쳐나왔는데 어떤 얼굴을 하고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죠. 딸내미가 끔찍하게 아끼는 텔레비전을 부수어버렸으니 이제 딸내미가 자기하고는 말도 섞지 않으려고 할 거라며. 나도 갑자기 아버지가 떠올라서 우울해 하고 있는데 그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말했어요. 이건 정말로 일급 기밀이라서 말해 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외계인과 인간을 구별할 수 있는 아주 확실한 방법 한 가지가 있다고요.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냐고 물었더니 구글로 웹서핑을 하다가 미국의 어느 리커 스토어 사이트에 접속하게 되었는데 거기 게시판에서 그 글을 찾았다고 했어요. 출처가 좀 이상했지만 무슨 말인지 궁금해서 들어 보기로 했죠. 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어요. 우리는 그때쯤 완벽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바람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죠. 마침내 그가 말했어요. 인간의 그림자는 검은색이지만 외계인의 그림자는 무지개색이라고.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웃었어요. 침까지 뿜으면서 웃었죠. 그는 몹시 마음이 상한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어요. 나는 억지로 웃음을 참고 도대체 그런 말을 왜 믿는 거냐고 물었죠.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어요. 온라인 세계에 떠도는 그런 말들이 아니라면 우리가 어디서 외계인과 인간의 구별법을 알아내겠냐고.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긴 했어요. 그런 종류의 말들은 오프라인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죠.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선 누구도 대화를 나누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는 내일 아침에 해가 뜨고 서로의 그림자를 볼 수 있을 때까지 함께 있자고 했어요. 나를 붙잡아 두려는 속셈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흔쾌히 그러자고 했죠. 나 역시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우리는 대화 도중 밤하늘에 나타나는 미세한 발광체를 찍고 또 찍었죠. 정체가 무엇인지는 나중에 판단하고 일단 찍어 두는 게 중요했어요. 눈앞에서 사라지기 전에.
    밤새 그는 자신이 걸어온 인생길을 길고 지루하게 털어놨어요. 매 시기마다 일어났던 문제가 비슷비슷했죠. 모두 돈 때문에 시작된 문제였고 그때도 돈에 쫓기고 있었어요. 그는 곧 카메라를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여유가 없다면서. 카메라를 팔면 자신이 그동안 모아 온 자료를 바탕으로 책을 한 권 쓸 거라고 했죠. 출판되면 사인을 해서 내게 보내주겠다고 했어요. 아마 내가 깜짝 놀라게 될 거라고 했죠. 사실 자기는 이미 확실한 증거 사진을 갖고 있지만 함구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책에서 최초로 밝혀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들어올 인세를 계산해 보더니 그 돈으로도 빚을 다 갚기는 힘들 거라고 했어요. 그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니 일단 책을 먼저 쓸 것이고, 틈틈이 처가에서 재배하는 농작물을 떼어다가 트럭에 싣고 방방곡곡 떠돌며 살 거라고.
    마침내 해가 떠올랐을 때 그는 잠들어 있었어요. 나는 밤새 찍은 수천 장의 사진을 몇 시간 동안 자세히 들여다보았는데 단 한 장도 확실한 형체가 잡힌 것은 없었어요. 정오가 다 되도록 그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 먼저 짐을 챙겼어요. 배가 고팠고 라면이라도 먹을 수 있는 상회를 발견하려면 한참을 걸어야 했으니까. 그는 차가 있었지만 뒷좌석과 조수석 모두 짐이 꽉꽉 들어차 있어서 내가 탈 자리는 없어 보였어요. 작별 인사를 하려고 그를 흔들어 깨웠더니 겨우겨우 일어나더군요. 우리가 밤새 나눈 대화가 얼마나 깊은 것이었든지 간에 그는 나를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했어요.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죠.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된 것을 보고 한참 동안 혼잣말로 욕설을 내뱉었어요. 되는 일이 없다고 했죠. 자기 같은 건 차라리 길바닥에서 죽어버리는 게 가족들한테 도움이 될 거라고 했어요. 마누라가 자기 이름으로 생명보험을 들어 둔 걸 알지만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라며. 그간의 세월이 모두 헛것이었다며 내게도 빨리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했죠. 이 길이 아니고 다른 길을 가라고 했어요. “팔려면 다른 걸 파. 여기는 아무것도 없어.” 그는 절망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더니 몸을 돌렸어요. 그때 갑자기 그의 어깨가 빳빳하게 굳었죠. 그는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어요.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내 뒤를 가리켰죠. 내가 돌아보려고 하자 소리를 내질렀어요. “안 돼! 움직이지 마.” 그가 카메라를 들고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연거푸 셔터를 눌러댔어요. 내가 돌아보려고 할 때마다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고 했죠. 참지 못하고 돌아봤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하늘을 올려다봐도 주위를 살펴봐도 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죠. 그가 내 어깨를 부여잡더니 말했어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표정으로. “놀라지 말고 들어. 너는, 외계인이야.”

 

    K가 나를 쳐다보았을 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K의 말을 집중해 듣고 있던 나는 불시에 농락당한 사람처럼 한동안 머리가 멍했다. 정적 속에 선풍기 날개가 돌아가는 소리만 흐르고 있었다. K는 그의 말을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이성을 되찾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그가 네 그림자 사진을 찍었다는 거지?”
    K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진 지금 있어?”
    “아니요. 그 사람이 자기 책에 싣는다고 했어요. 출판되면 가장 먼저 보내주겠다고 했고.”
    “그럼 너는 아직 그 사진을 못 본 거야?”
    “못 봤어요. 그 사람은 서둘러 차를 타고 떠났으니까.”
    “그래도 너는 너의 그림자를 볼 수 있잖아.”
    K는 침묵했다. 그의 침묵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봤지만 무지개색은 아니었어요. 그냥 평범했어요.”
    “그래도 너는 그 말을 믿는다는 거지?”
    “믿어요.”
    K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수습해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K가 얼마나 굳게 그걸 믿고 있는지 알 것 같았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K는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딱 한 번 만났던 사람의 말만 믿고. 게다가 그는 외계인에 미쳐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K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K는 선풍기 날개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점점 느려지더니 이윽고 작동을 멈추었다. K가 버튼을 눌렀다 끄길 반복했으나 날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선풍기 앞으로 다가가 철제 망을 벗겨내고 날개를 분해해 모터 앞쪽에 낀 먼지 덩어리를 털어냈다. K는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다가 걸레를 가져왔다. 나는 한참 동안 선풍기 날개와 회전 장치 부근을 걸레로 닦아낸 뒤 다시 조립하고 버튼을 눌렀다. 날개는 아주 천천히 돌기 시작하다가 이윽고 제 속도를 찾았다. K가 조그맣게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나는 나의 외계인 사촌과 마주 앉아 저녁을 먹었다. 우리 사이엔 처음의 서먹함이 사라져 있었다. 내가 자신의 말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는 것을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나는 조심스레 아르바이트에 대해 물었다. 면접에서 K는 자신이 외계인인 것을 숨기지 않았다. 누굴 만나든 그 말부터 먼저 한다는 숙모의 말은 사실이었다. 편의점 사장은 나와 비슷한 나이인데 야간 근무자를 두면 적자를 면치 못해 본인이 직접 야간 근무를 선다고 했다. 외진 곳인 데다가 한 블록 거리에 24시간 마트가 하나 더 있어서 밤에는 카운터에 엎드려 자는 일이 더 많다는 그는 K의 말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늘 지쳐 있기에 자기 직원이 외계인이든 지구인이든 일만 잘한다면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다.
    K는 나를 역까지 배웅해 주었다. 나는 K의 삶이 걱정되었지만 한편으론 그가 나보다 더 순조롭게 삶을 꾸려 나가고 있다는 인상도 받았다. K는 대부분의 월급을 저축했고 그 돈으로 숙모에게 무언가를 해줄 생각이었다. K는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그토록 찾아다녔던 게 나였어요.” 가로등 불빛에 길게 늘어난 우리의 그림자는 똑같이 흑색이었다.
    “이런 꿈을 꿨어요. 아버지가 자전거 바구니에 나를 태우고 달을 지나 날아가는 꿈. 그 아름다운 광경과 달리 나는 내내 두려웠어요. 저 아래 건물 안 어딘가에 숨어서 우리를 쏘아 맞추려고 하는 사람들이 보였거든요. 형,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K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멀어져 가는 K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장웹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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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사과 박솔뫼 어느 날 아침 애리는 자신이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시간을 보내왔음을 알았다. 일을 하러 가는 길이었고 이곳에 이사와 이 열차를 탄 것은 1년 7개월째였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이일 때 모든 것이 멈춰 서 있고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던 때부터 탈 것에 올라타 멀어지는 집과 나무들을 보아 왔다고 느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텐데 왜 그제야 그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진 것일까. 어딘가로 향하는 감각과 함께 창 너머 공터와 집들과 골목들을 실제로 걷는 일은 왜인지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느껴지고 언제까지나 좌석에 앉아 멀어지는 사람과 집들과 빨래와 커튼을 보고 있을 것 같다. 애리는 사원 숙소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 그만두고 나와 집을 구해 살다 사회복지와 개호 관련 자격증을 따고 이후에는 자격증과 상관없는 일을 몇 년을 하였다. 그러다 역시나 숙소를 제공하는 지금의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회사는 큰 항구가 있는 대도시와 인접한 소도시에 있었고 숙소는 회사 직원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곳이었기 때문에 회사와는 아주 가깝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예전 회사는 숙소에서 회사까지 걸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 회사에 가기 위해서는 숙소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역으로 가서 다시 20분가량 열차를 타야 했다. 숙소 앞에서 버스를 타는 방법도 있었고 버스를 타는 것이 여러모로 더 편했지만 버스는 늘 같은 회사 사람들로 붐볐고 앉아 가기가 힘들어서 애리는 보통 열차를 탔다.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자 곧이어 오랜 시간 기숙사에서 공동 부엌에서 공용 생활공간에서 얼굴만 익숙한 사람들과 살아왔다는 사실이 마치 연결된 문제처럼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둘은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 마음을 먹자면 살 곳을 구해서 혼자 사는 것이 가능했던 것도 같지만 애리는 왜인지 그럴 마음을 쉽게 먹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공동 숙소에서 사는 것이 부끄럽거나 괴롭지는 않고 돈을 아낄 수 있고 여러모로 편리한 점도 많았지만 혼자 살 집을 찾아 오래 쓸 가구를 사는 일에 겁을 먹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창은 여전히 흔들리고 창밖으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가 보인다. 공터 구석에서는 무언가 야채 같은 것을 심는 것도 같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없는 공터. 도시 어느 한구석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는 드물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은 누군가의 넓은 방과 책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가도 애리는 동시에 이것저것 모든 것을 한 번에 버리고 어딘가로 금세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것이 실제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지금 생활은 지금 생활대로 좋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텅 빈 방 (떠올려 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것을 원하는 마음은 원하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곳에 확실하게 붙여 두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텅 빈 방의 모습이

  • 관리자
  • 2025-07-01
알고 싶습니다

알고 싶습니다 최재영 가끔 인생이 내게 애벌레가 파먹는 중인 사과를 베어 물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토요일 저녁 아홉 시 뉴스에선 오늘도 전 세계 기아들이 굶고 있고 남미 쿠데타 정부의 진압 몽둥이에 시민들이 맞고 있으며 전장의 포탄은 군인과 민간인들을 죽인다. 그러나 우리 집 안방엔 세 살 연상 아내와 세 살짜리 딸이 곤히 잠들어 있다. 비록 내일이면 공룡 박사 딸은 파키케팔로사우루스 흉내 내며 내 턱에 박치기를 날릴 것이고 아내는 원시인 사냥꾼처럼 괴성을 지르며 딸을 쫓을 것이지만··· 서른여섯 살의 나는 대한민국 성남시의 아파트에, 지금 여기에, 우리 세 가족과 잘 있고, 그것참, 다행이다. 내가 베어 문 사과 반쪽에 벌레가 없어서. 뉴스에 어느 북한군이 등장한 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장이었다. 한 북한군이 부상 때문에 낙오했는지 홀로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다. 러시아 것인지 우크라이나 것인지 모를 드론이 공중에서 그를 촬영하고 있었다. 곧 드론은 부드럽게 수직 하강하며 그에게 다가갔고 그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쓰으윽- 줌인 됐다. 뉴스 진행자와 패널들이 호들갑 떨었다. “너무나 리얼합니다!” 무슨 아는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오바하네. 나는 그들의 반응에 코웃음 치며 손에 든 캔맥주를 쓰으윽- 들이키려다, 멈칫했다. 아는 사람 같았다. 낯이 익었다. * 약 15년 전 여름, 나는 백령도에 주둔한 해병대 6여단 영창에 15일간 구금되어 있었다. 죄명은 후임 폭행이었다. 막 상병이 됐을 때 생긴 일이었다. 영창의 개인 감방에 들어서자 정말이지 감옥처럼 생겨서(정말 감옥이긴 했지만) 울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커덩 자물쇠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스물한 살에 인생이 망해 버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감방 철창 너머론 건물의 입구와 헌병 하나가 근무하며 감시하는 공간이 보였다. 그 공간을 기준으로 네 개의 감방들이 반원을 그리며 각각 1호 창, 2호 창, 3호 창, 5호 창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다(4호 창은 없었다, 해병대에선 숫자 4를 쓰지 않으니까). 나는 3호 창에 수감됐다. 감방 안에 앉아 있으면 보이는 건 꾹 닫힌 건물 문, 그리고 중앙의 그 헌병밖에 없었다. 양옆의 다른 감방들은 시야에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1호 창과 5호 창에도 수감자가 한 명씩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단 2호 창만은 비어 있다고 했는데 폭행 사건이 일상적이라 항상 미어터지던 백령도 해병대의 영창에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중에 듣기론 당시 북쪽 상황이 심상치 않아 각 부대들의 징계 절차가 보류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감방 안은 어두컴컴하고 축축했다. 폭은 누워서 다리를 뻗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화장실은 따로 없었다. 안쪽으로 세 걸음 가면 구석에 수도꼭지를 비롯해 쪼그려 앉아 일을 보는 일명 고무신 변기가 있었다. 무릎 정도 높이의 아담한 담만이 가림막을 해 주었다. 큰 것이든 작은

  • 관리자
  • 2025-07-01
프레살레

프레살레 반수연 홍은 미로처럼 이어진 길을 솜씨 좋게 빠져나갔다. 홍을 놓칠세라 일행들은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공항은 번잡했다. 챙이 넓은 홍의 검은색 모자는 인파 사이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했다. 모자가 사라질 때마다 짧은 불안이 스쳤다. 우리 중 누구도 파리에 처음 오는 이는 없었다. 정아는 작년 패션 위크에도 왔다고 했다. 하지만 출구로 빠져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홍을 만난 순간, 홍이 웰컴 투 패리스, 라며 환하게 웃던 순간,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라며 농담과 카리스마가 뒤섞인 환영 인사를 건네는 순간, 홍은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깃발이 되었다. 몇 개의 건물과 긴 복도를 통과해 홍이 예약해 둔 렌터카 사무실에 도착했다. 미리 맡겨 두었다는 홍의 짐이 사무실 모퉁이에 쌓여 있었다. 각지고 거대한 두 개의 캐리어, 명품 마크가 선명한 가죽 배낭과 보스턴백, 두 개의 쇼핑백도 포개져 있었다. 캐리어 계의 에르메스라는 바로 그 리모와 아닌가요? 색깔 너무 이쁘다. 이삿짐을 떠올리게 하는 홍의 짐에 약간의 충격을 받은 나와는 달리 정아는 레몬색 캐리어에 먼저 관심을 보였다. 자기야, 그건 좀 그렇지 않아요? 에르메스야 버킨 말고는 뭐가 있나. 홍과 정아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며칠 전 정아가 단톡방에 올린 메시지를 떠올렸다. 유럽 항공은 수하물 분실이 잦으니 위탁 수하물 없이 기내용 캐리어와 작은 손가방으로 짐을 제한해요! 정아는 해당 항공사의 기내 반입 수하물 규정을 캡처해서 올리며 당부했다. 같은 옷을 이틀 연달아 입거나, 옷과 콘셉트가 맞지 않는 신발이나 가방을 견디지 못하는 예민한 패션 감각의 소유자인 정아가 분실이 두려워 그런 제안을 한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정아는 홍의 짐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아가 홍을 위해 우리 짐을 단속했다는 사실보다 진실의 내막을 뒤틀었다는 것이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독일제 7인용 SUV 차량의 마지막 3열을 접어 트렁크의 공간을 넓혔다. 홍의 캐리어를 먼저 싣고 그사이에 네 개의 기내용 캐리어를 테트리스 하듯 넣었다 뺐다 씨름하느라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어찌어찌 짐을 욱여넣고 나니 트렁크는 룸미러로 후방이 보이지 않을 만큼 꽉 찼다. 배낭이나 손가방은 발아래에 두거나 안고 타면 될 거라고 홍이 운전석으로 올라타며 말했다. 나는 노트북과 파우치와 책이 담긴 배낭을 가슴에 안고 뒷좌석에 올라 안전띠를 당겨 맸다. 짐과 사람이 뒤엉켜 숨 쉴 공간마저 충분치 않게 느껴졌다. 답답함이 불안으로 바뀌며 숨이 가빠 왔다. 다른 일행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프로작을 한 알 꺼내 입에 물고 창을 조금 열었다. 약기운이 신경을 눌러 주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파리는 오전 열한 시, 한국은 오후 여섯 시였다. 지금쯤이면 윤수는 일어났을 것이다. 냉장고 제일 위 칸에 김치찌개 있어. 냉동실에 육개장도 얼려 두었어.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나는 신발을 신다 말고 식탁에 앉아 짧

  • 관리자
  • 202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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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어차피 우리도 다른 행성에서 보면 외계인이니까요. ㅎ

    • 2014-08-25 15:32:40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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