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K의 그림자

  • 작성일 2014-08-01

 

 

K의 그림자

 

 

이서수

 

 

삽화-k의-그림자

 

 

    숙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이유는 내가 아무런 수입이 없었을 때 가끔씩 용돈을 주셨던 것을 결코 잊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숙모의 외아들 K는 나보다 다섯 살 아래였는데 그가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K는 가족 모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나를 비롯한 친척들은 얼마간 궁금하긴 했으나 자세히 물어보지는 않았다. 숙모가 K로 인해 심한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아무도 몰랐다. 숙모는 돌아가신 삼촌과 달리 입이 아주 무거운 사람이었고 K의 문제는 쉽사리 털어놓을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었다. 숙모는 심리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나를 선택했다. K는 상담 치료조차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나는 완곡히 표현하려 애쓰면서 지금이라도 강제로 데리고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숙모는 K가 원하지 않는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K의 상태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몇 달 전부터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으며 그것은 좋은 징조임이 분명하다고 했다. 어떻게 면접을 통과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으나 숙모는 K의 말만 믿고 그가 착실하게 돈을 벌고 있다고 생각했다.
    K를 만나기 위해 숙모의 집을 방문한 날, 숙모는 K가 도착하기도 전에 집을 나섰다. 나는 텅 빈 집에서 K를 기다렸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할지 몰라서 점차 긴장됐지만 만나면 억지로라도 웃는 얼굴로 대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K의 얼굴은 앳된 고등학생의 얼굴이었고 이제 K는 이십대 후반이었으므로 그 사이에 그가 어떤 얼굴로 변했을지 상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K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 생각대로라면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K의 도착시간이 가까워오자 입안이 바싹 말랐다. 연거푸 물을 마셔 봐도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K가 집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숨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예상과 달리 K는 너무나 평범한 모습이었다. 머리를 박박 밀지도 않았고 허옇게 탈색하지도 않았으며 해괴한 옷을 입지도 않았고 맨발도 아니었다. 그가 도착하기 전까진 갖가지 기괴한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으나 K는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십대 후반의 남자였다.
    K는 주춤거리다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숙모로부터 내가 오기로 했다는 말을 이미 들은 모양이었다. 숙모는 내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차와 과일을 내어준 후 불안한 얼굴로 다급히 집을 나섰다. 숙모를 붙잡지는 않았다. 나는 나대로 잔뜩 긴장한 상태였고 숙모도 K의 반응이 어떨지 알 수 없어 고민하는 것 같았다. K는 내게 살짝 목례를 하더니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어 마시고는 가방을 방에 두고 거실로 나왔다. 나는 오랜만이라며 말을 건넸으나 K는 고개만 끄덕일 뿐 대답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K는 거실 카펫의 기하학적 무늬만 내려다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아주 멀쩡한데.”
    K는 웃지 않았다. 내 웃음소리만 허공에서 맴돌다가 사라졌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어 보고 싶었으나 K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깐 동안 우두커니 서 있다가 슬그머니 소파에 걸터앉았다. K의 눈치를 살폈으나 꾹 다문 입을 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언뜻 보면 아직 대학생으로 보일 정도로 동안이었으나 자세히 보면 팔자 주름과 어릴 적보다 더 불거져 나온 광대 밑의 그늘이 눈에 들어왔다. 짧게 깎은 머리는 단정해 보이는 한편 남의 말엔 절대로 흔들릴 것 같지 않은 완고함도 느껴졌다. K는 한 자리에 우뚝 서 있기만 했다. 나는 할 말을 찾아 머릿속을 뒤져 보았으나 도무지 나와 K의 접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누구나 다 하는 말을 꺼내어 보았다.
    “요즘 날씨가 참 이상해. 장마철이어야 하는데 비도 안 오고 꿉꿉하기만 하고 말이야.”
    “더워요?”
    K는 내 대답을 듣지 않고 선풍기를 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작동되고 있었던 선풍기는 어느 틈엔가 저절로 꺼져버렸다. 아마도 타이머를 맞춰 놓았던 것 같다. 선풍기는 일정한 간격으로 딱딱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어딘가 부품이 엉성하게 끼워져 있는 듯했다.
    “옛날에 우리 가게 선풍기가 이랬는데.”
    내 말에 K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으로 마주한 K의 눈빛은 정상인의 그것보다 조금 더 밝게 빛났다. 눈만 본다면 누구보다도 총명해 보였다.
    “일 다녀오는 길이니?”
    K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내 눈을 피해 선풍기 날개만 쳐다보았다.
    “무슨 일을 하는데?”
    “형은 무슨 일 하는데요?”
    “나? 나는…… 여기저기에 글 쓰지.”
    “무슨 글이요?”
    “짧은 여행기.”
    “그럼 여행을 많이 다니겠네요?”
    “그렇지 뭐…….”
    나는 말끝을 흐렸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가본 곳이 적었다. 앞으로 계속하게 될지도 미지수였다. 이제는 기억도 까마득한 십여 년 전에 무명 잡지에 투고한 글이 당선되어 친척들 사이에선 작가 대접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 잡지가 폐간되자 더 이상 글을 발표할 곳이 없었다. 다른 곳에 투고해 봤지만 매번 낙선했다. 그러한 사실은 숨긴 채,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학원 강사 일에 본격적으로 나섰으나 그 일마저 일 년 전에 그만두었다. 그때 벌어 놓은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지금껏 연명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지방에서 강사 일을 시작한 친구는 이제 자기 명의로 된 학원 건물을 갖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 치열했고 매번 경쟁에서 도태되는 많은 사람들 중에 내 이름도 꼭 끼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촌동생을 상담하고 조언을 해줄 정도의 여유는 갖기 힘들었으나 숙모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말했듯, 친척들 사이에서 작가 대접을 받긴 했으나 주머니는 텅 비어 있던 때에 내게 여러 번 용돈을 찔러 준 분이었다. 그리고 K의 증세는 선뜻 이해가 되지도 않을뿐더러 정말로 K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믿을 수도 없었다. 숙모는 돌아가신 삼촌 때문인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나 생전에 들은 말들을 떠올릴 수는 있었다.
    삼촌의 취미는 UFO 사진 찍기였다. 단 한 장일지라도 존재의 증거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진을 남기는 게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는 친척 모임의 술자리에서 종종 놀림감이 되곤 했는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건 낚시하고 같아. 넓은 하늘에 카메라라는 낚싯대를 던져 놓고 생각에 잠겨 있다 보면 수면에 작은 파문이 일듯 하늘에 작은 흔들림이 포착되지. 그것을 적시에 잡아다가 끌어내야 하는 게 우리의 공통점이야. 물고기보다 훨씬 더 잡기 어렵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야.”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갑갑하고 척박한 이 세상에 외계 생명체가 등장하는 것만큼이나 흥미로운 일이 어디 있겠어.” 그때, 어린 K는 삼촌을 싫어했다. 삼촌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인상을 찌푸렸고 다른 말을 꺼내어 화제를 돌리려 했다. 정말로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크게 대든 적도 있었다. K는 어릴 때부터 이성과 논리만 앞세운 얄미운 소리를 곧잘 했다. 그런 K와 삼촌은 부자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성격이 달랐고, 삼촌이 K를 품었던 반면에 K는 삼촌을 배척했다. 둘이 언제 화해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삼촌이 돌아가시던 마지막 순간에 K가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때 나는 연이은 낙선에 방황했고 나를 제외한 다른 누구에게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할 말 있으면 어서 해요.”
    K는 나를 잔소리 많은 어른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선 무슨 얘기를 꺼내더라도 반감만 살 게 분명했다. 다짜고짜 상담부터 받자고 할 수도 없었다. 숙모가 내 대학 성적표를 봤다면 이런 자리를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내 역할을 떠올려 심리학 전공자답게 행동해야 했다. 아마도 그들은 직접적으로 상대의 폐부를 찌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K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삼촌 얘기를 꺼낸 건 결코 우회전술이 아니었다. 후회가 밀려왔지만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숙모의 예상이 맞았다. K는 그토록 싫어하던 아버지 때문에 이런 상황까지 온 것 같았다.
    “그때 나는 개인적인 일로 좀 방황했어. 그래서 삼촌의 임종이 어땠는지 기억이 잘 안 나. 너는 그 자리에 있었지?”
    K는 대답 대신 나를 노려보았다. 더욱 적대적으로 변한 눈길이었다.
    “그래서요?”
    나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말을 골랐다. 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그 자리에는 숙모와 K, 그리고 우리 부모님과 큰 아버지 세 분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 순간에 대해 훗날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귓밥이라고. 마지막 순간에 한 명씩 그에게 다가가 귓가에 대고 잘 가시라고, 우리 꼭 다시 만나자고 인사를 나눌 때 어머니는 자신의 차례가 되어 삼촌의 귀에 대고 작별인사를 하려다가 커다란 귓밥을 보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귓밥 때문에 작별인사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고 당장이라도 그것을 끌어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것이 귓구멍을 꽉 막아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이 작별인사를 하는 내내 안절부절 못하면서 서 있다가 마침내 밖으로 뛰어나가 면봉을 구해 왔는데, 병실에 들어섰을 땐 삼촌의 숨이 멎어 있었다.
    “너를 혼내려는 것도 아니고 닦달하려는 것도 아니야. 그저 네가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래. 우리 어릴 적에는 친하게 지냈었잖아. 네가 대학에 들어간 뒤로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아서 그렇지.”
    나는 한 번도 K가 나타나길 기다리지 않았고 그를 많이 궁금해 하지도 않았으면서 마치 그가 우리의 우정을 배반한 것처럼 굴었다. K는 고개를 들어 거실 창을 쳐다보다가 한결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형,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요?”

 

    그날, 아버지가 나를 차에 태웠을 때 나는 우리가 어디로 갈지 이미 알고 있었어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죠. 또 시커먼 밤하늘 아래 오랫동안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돌아올 게 뻔했으니까. 아버지는 졸음이 쏟아지는지 운전하는 내내 내게 말을 걸었어요. 나는 평소처럼 짧은 대답만 반복하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죠. 그날은 쌀쌀한 가을날이었고 뒷좌석에는 커피가 든 보온병이 놓여 있었어요. 아버지가 내게 그 보온병을 집어달라고 했는데 나는 못 들은 척했어요. 이럴 거면서 왜 따라가겠다고 했는지 나도 알 수가 없었죠. 결국 아버지가 갓길에 차를 세우더니 보온병을 집어 와서 커피를 따라 마셨어요. 거의 다 마셨을 때쯤 아버지가 내게 말했어요.
    “내가 왜 그렇게 유에프오에 집착하는지 너는 모르지?”
    알 리가 없었죠. 듣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또 아무 대답도 안 했죠. 아버지는 내 눈치를 살피다가 말했어요.
    “그건 너 때문이야, 이 녀석아.”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일부러 반응을 보이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내 대답은 기대도 안 했다는 듯 혼자서 말을 이어갔어요.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안 나겠지만, 네가 새로 산 공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트럭에 부딪힌 거지. 네 엄마와 나는 네가 팔이 부러져서 깁스를 했다고 했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팔이 부러진 건 사고가 나기 전이었고 너는 깁스를 한 상태에서 트럭 아래에 깔렸지. 손이나 다리, 뭐 이런 데가 아니라 머리였어, 머리.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했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네 머리를 본 사람들마다 오열을 했어. 의사는 우리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너는 내내 혼수상태였어. 네 이모, 숙모, 큰어머니들이 몰려와서 다 같이 손잡고 기도를 했지. 하지만 희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네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어.
    그때 나는 울부짖는 친척들을 피해 대학병원 구내를 쏘다니다가 어느 진료실 대기 의자에 앉아 있었어. 그런데 옆자리에 멀뚱히 앉아 있던 노인이 내게 이상한 말을 하더구나. 젊었을 적에 죽을병에 걸린 적이 있는데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던 건 외계인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노망 난 노인이 지껄이는 말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더구나. 자세히 물었지. 그 외계인을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노인은 자신의 고향을 알려주며 그곳에 가면 극장이 딱 하나 있는데 그 극장 뒤의 공터에서 만났다고 했어.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그곳까지 왜 갔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럴 정신이 없었지.
    나는 그 길로 차를 타고 노인의 고향으로 내려갔어. 두 시간이 넘게 걸렸지. 도중에 되돌아갈까 숱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그러지 않았어. 그대로 돌아가면 두 번 다시 너를 볼 수 없을 것 같았거든. 하지만 노인이 알려준 극장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어. 얼마 안 되는 마을 사람들에게 수소문해 봤지만 극장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 그때서야 노인의 말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외계인뿐만 아니라 극장까지도 망상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결국 포기하고 올라오려다가 어느 오래된 상회에 들러서 담배 한 갑을 사면서 기대 없이 물었는데, 글쎄 그 나이 든 주인이 극장을 알고 있다고 하지 뭐냐. 지금은 사라졌지만 어린 시절에 드나들었다고.
    나는 그가 알려준 곳으로 차를 몰고 갔다.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있는 특색 없는 공터였어. 건물이 있었던 흔적 같은 것은 전혀 없었지. 하지만 근처를 걷다 보니 조그만 창고가 있었고 깨진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니 겹겹이 쌓여 있는 의자와 비스듬히 세워 놓은 그림 간판이 보였어. 그런데 그게 좀 이상했다. 그 그림 간판이 말이야. 마치 어제 그린 것처럼 새 것인 데다가, 놀라지 마라, 그 영화가 뭐였는지 아니?”
    어느새 아버지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죠.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었어요.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그건 말이다. 너도 잘 아는 영화야. 바로 <이티>였어. 이티를 태운 자전거를 타고 달을 지나 날아가는 포스터. 기억하지? 바로 그 장면이 그려져 있는 간판이었어.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이냐.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 극장이 없어진 건 한참 전인데 바로 전날 그린 것 같은 그림 간판이 있고 말이야. 게다가 <이티>라니. 그 영화 역시 오래전에 개봉한 영화 아니냐. 나는 어리둥절해서 한참 동안 창고 근처를 서성였어. 그러고 있는 동안 그 노인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구나. 노인의 나이나 극장의 폐쇄 시기로 미루어 보아 그가 그곳에서 이티를 봤을 리는 없지만, 그가 그곳에서 외계인을 만났다고 한 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던 거지.
    고민 끝에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 노인이야말로 신이 내게 보낸 메시지라고. 나는 잠금 장치도 걸려 있지 않은 창고 안으로 들어가서 그림 간판을 질질 끌고 밖으로 나왔지. 그리고 바닥에 그걸 내려놓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빌었다. 제발 너를 살려달라고. 해질 무렵까지 그러고 있다가 다시 간판을 안으로 들여놓고 서울로 올라왔다. 도착하자마자 네가 기적적으로 호전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내 기분이 어땠겠니? 응?
    그 뒤로 그 노인은 한 번도 보지 못했어. 다시 그 창고로 가봤지만 창고 자체도 이미 다 사라진 후였지. 사람들은 <이티> 간판을 묻고 다니는 나를 미친 사람 보듯 했고. 그날부터 나는 결심했단다. 너를 살려준 외계인에게 꼭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겠다고. 더불어 말이다. 앞으로 우리 가족에게 어떤 시련이 닥칠지 알 수 없지 않겠니. 내가 아플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런 때에 한 번 더 부탁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아직 가족을 떠날 때가 아니니 나를 좀 살려달라고 말이야.”
    아버지는 그때 이미 자신의 앞날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런 말을 했어요. 아버지가 입원했을 때 나는 자연스레 그 말이 떠올랐죠. 하지만 아버지한테 묻지는 못했어요. 그곳이 어딘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을 수가 없었어요. 한 번도 그 얘기를 믿은 적이 없었으니까. 늘 아버지에게 적대적이었으니까. 형도 들어서 알겠지만 그날,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하마터면 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도 못 나눌 뻔했죠. 왜 그랬냐고요? 아버지가 미워서 그랬냐고요? 친척들은 그렇게 수군댔죠. 그렇게 사이가 나쁘더니 임종도 겨우 지켰다고.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인사한 사람이 나였어요. 정신없이 뛰어오는 바람에 숨이 차서 숨을 고르느라 그 소중한 시간을 또 낭비했죠. 내가 아버지 귀에 대고 했던 마지막 말이 뭔지 알아요? 미안해요. 못 찾았어요, 이거였어요. 미안해요. 못 찾았어요.
    아버지가 희미하게 미소 짓는 걸 봤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착각이라고 했어요. 아버지는 내가 도착했을 때 이미 반쯤 저 세상으로 건너가 있었다고. 어머니는 그때 내게 악의적이었어요. 아버지의 병세가 빨리 악화된 것도 내가 밖으로만 쏘다니고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죠. 믿기지 않죠? 형은 우리 엄마를 좋아하니까. 하지만 엄마는 그때 사랑하는 남자를 잃은 여자일 뿐이었어요. 내 엄마이기 전에 말이에요. 엄마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외계인에 집착하는지 몰랐어요. 내가 나중에 그 얘기를 해주니까 펑펑 울었죠. 아버지가 너무 순진한 사람이라면서.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믿을 수가 있냐면서. 결국 어머니한테 말하지 못했어요. 어머니 역시 예전의 나처럼 외계인 같은 것은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해서 나를 살렸다는 것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니까. 어머니는 사람이 벼랑 끝에 몰리면 머리가 잠시 어떻게 되는 수도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더 말 못 했죠. 내가 왜 그렇게 밖으로 나돌았는지. 내가 그 시간에 아버지의 카메라를 들고 어디를 쏘다녔는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아버지한테 한 번도 묻지 못했을까. 내가 당신의 소망을 계승했다고 왜 말하지 못했을까. 아버지는 분명히 기뻐했을 텐데. 외계인을 만나면 아직 가족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전해 달라고 했을 텐데.

 

    그건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슬픈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나자 상황에 맞지 않게, 돌아가신 삼촌의 익살스러운 표정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는 내 머리통을 콕콕 찌르다가 내가 돌아보면 두 눈을 모으고 혀를 쭉 빼는 바보스러운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런 유치한 장난을 지치지도 않고, 내가 아이에서 어른이 될 때까지 계속했다. 나는 사춘기 시절을 제외하고는 매번 웃어 주었으나 속으로는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게 갑자기 미안해졌다. 웃어 주는 게 뭐가 힘들다고.
    K가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던 이유가 외계인 때문이라는 건 좀 놀라웠지만 그런 사연이 있었다면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얘기를 다 듣고 나서도 K가 어쩌다 이런 상태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삼촌의 소망을 계승하는 것과 K가 망상 속에 빠져 사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교차점도 없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 물으려고 입을 열었는데 K가 한 손을 들더니 내 말을 제지했다.
    “아직 다 안 끝났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나는 계속 외계인을 찾아다녔어요. 만나더라도 아버지의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는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어요. 아버지가 남긴 수만 장의 사진 파일을 한 장씩 꼼꼼하게 살피면서 확실한 증거 같은 것을 찾으려고 노력했죠. 하지만 미미한 흔적들뿐이었어요. 어느 것도 명확한 증거가 될 수 없었죠. 피사체는 심하게 흔들려 있었고 그걸 감싸고 있는 작은 불빛도 빗방울로 얼룩진 차창에 맺힌 먼 곳의 불빛처럼 불안정해 보였죠. 윤곽선이 뭉개지듯 번져서 금세 사라져버릴 것 같았어요. 결국 아버지가 남긴 사진들은 단 한 장도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아버지가 남긴 관찰일지를 들춰보면서 아버지가 갔던 장소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어요. 다녀온 후에는 빨간색으로 줄을 긋고 날짜를 적어 두었죠. 그렇게 일지에 적혀 있는 장소를 일일이 다 찾아가 봤지만 헛걸음만 하고 돌아오는 일이 다반사였어요. 그러다 그 사람을 만났죠.
    그도 아버지처럼 십 년 넘게 유에프오를 쫓아다니는 사람이었어요. 그도 관찰일지를 쓰고 있었죠. 아버지가 쓴 것을 보여주었더니 아주 좋아했어요. 나를 금세 믿었죠. 그러더니 대뜸 자기만 알고 있는 비밀 한 가지를 알려주겠다고 했어요. 그는 외계인은 물론이거니와 논리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온갖 것들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죠. 그는 그즈음 유에프오를 쫓아다니는 것에 흥미를 잃어 가고 있었고 대체할 새로운 것을 찾고 있었어요. 그 가설은 오래전부터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했던 것인데 그는 그런 영화들에서 정보를 얻었노라고 솔직하게 털어놨어요. 미국에서 제작된 그 영화들은 대부분 사실을 바탕으로 한 누군가의 체험을 다룬 것이라고. 그 경험담이 퍼지고 퍼져서 영화로까지 제작된 것이라고. 그러니까 그의 말은, 우리는 이미 외계인을 만났으며 만나고도 그 사람이 외계인인 줄 모른다는 거였죠. 처음에는 그저 농담으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점점 진지해졌어요. 자신이 외계인이거나 내가 외계인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결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옆에 외계인이 앉아 있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모른 채로 창공만 응시하다가 돌아가는 것이라고. 바로 곁에 있는 사람에게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비행 훈련만 연거푸 찍어대고 있다고. 나는 웃었지만 그는 웃지 않았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내게 증거를 제시해 보라고 했죠. 내가 인간이라는 증거. 외계인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증거. 나는 곰곰이 생각할 것도 없이 내 피는 붉다고 했죠. 그는 코웃음을 쳤어요. 외계인의 피가 초록인 건 영화에나 나오는 이야기 아니냐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영화에서 정보를 얻었다고 하던 사람이 갑자기 태도를 싹 바꿨어요. 짜증이 나긴 했지만 유일한 말동무인 그가 자리를 뜰까 봐 계속 생각해 봤죠. 내가 인간이라는 증거가 뭘까. 나는 어릴 적 친구들과 부모님에 대해서 얘기했어요. 그들이 내가 인간으로 살아온 증거가 될 거라고 생각했죠. 그는 잠자코 내 말을 들어주긴 했지만 그게 사실인 것을 자기가 어떻게 알겠냐고 했어요. 결국 아무것도 증거가 될 수 없었죠. 이번에는 내가 물었어요. 당신이 인간이라는 증거를 말해 보라고. 그랬더니 그는 웃으면서 자기가 언제 인간이라고 말한 적이 있냐고 되묻더군요. 자기가 바로 외계인일 수도 있다고. 지금 당장 자기를 찍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인간의 피부와 똑같은 가면을 벗을 테니 곧바로 사진을 찍으라고. 그러더니 머리 가죽을 위로 끌어올리려 했어요. 나는 웃었어요. 그도 웃었고. 그러더니 갑자기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더군요. 자기가 인간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는데 그건 바로,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 열일곱 시간 동안 심심해 죽을 뻔했던 것이라고. 내가 나타나서 이렇게 대화를 나누게 되니 이제야 좀 살 것 같다고. 그는 갑자기 가족들이 보고 싶다며 울상을 지었어요. 마누라와 대판 싸우고 집을 뛰쳐나왔는데 어떤 얼굴을 하고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죠. 딸내미가 끔찍하게 아끼는 텔레비전을 부수어버렸으니 이제 딸내미가 자기하고는 말도 섞지 않으려고 할 거라며. 나도 갑자기 아버지가 떠올라서 우울해 하고 있는데 그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말했어요. 이건 정말로 일급 기밀이라서 말해 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외계인과 인간을 구별할 수 있는 아주 확실한 방법 한 가지가 있다고요.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냐고 물었더니 구글로 웹서핑을 하다가 미국의 어느 리커 스토어 사이트에 접속하게 되었는데 거기 게시판에서 그 글을 찾았다고 했어요. 출처가 좀 이상했지만 무슨 말인지 궁금해서 들어 보기로 했죠. 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어요. 우리는 그때쯤 완벽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바람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죠. 마침내 그가 말했어요. 인간의 그림자는 검은색이지만 외계인의 그림자는 무지개색이라고.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웃었어요. 침까지 뿜으면서 웃었죠. 그는 몹시 마음이 상한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어요. 나는 억지로 웃음을 참고 도대체 그런 말을 왜 믿는 거냐고 물었죠.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어요. 온라인 세계에 떠도는 그런 말들이 아니라면 우리가 어디서 외계인과 인간의 구별법을 알아내겠냐고.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긴 했어요. 그런 종류의 말들은 오프라인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죠.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선 누구도 대화를 나누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는 내일 아침에 해가 뜨고 서로의 그림자를 볼 수 있을 때까지 함께 있자고 했어요. 나를 붙잡아 두려는 속셈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흔쾌히 그러자고 했죠. 나 역시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우리는 대화 도중 밤하늘에 나타나는 미세한 발광체를 찍고 또 찍었죠. 정체가 무엇인지는 나중에 판단하고 일단 찍어 두는 게 중요했어요. 눈앞에서 사라지기 전에.
    밤새 그는 자신이 걸어온 인생길을 길고 지루하게 털어놨어요. 매 시기마다 일어났던 문제가 비슷비슷했죠. 모두 돈 때문에 시작된 문제였고 그때도 돈에 쫓기고 있었어요. 그는 곧 카메라를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여유가 없다면서. 카메라를 팔면 자신이 그동안 모아 온 자료를 바탕으로 책을 한 권 쓸 거라고 했죠. 출판되면 사인을 해서 내게 보내주겠다고 했어요. 아마 내가 깜짝 놀라게 될 거라고 했죠. 사실 자기는 이미 확실한 증거 사진을 갖고 있지만 함구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책에서 최초로 밝혀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들어올 인세를 계산해 보더니 그 돈으로도 빚을 다 갚기는 힘들 거라고 했어요. 그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니 일단 책을 먼저 쓸 것이고, 틈틈이 처가에서 재배하는 농작물을 떼어다가 트럭에 싣고 방방곡곡 떠돌며 살 거라고.
    마침내 해가 떠올랐을 때 그는 잠들어 있었어요. 나는 밤새 찍은 수천 장의 사진을 몇 시간 동안 자세히 들여다보았는데 단 한 장도 확실한 형체가 잡힌 것은 없었어요. 정오가 다 되도록 그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 먼저 짐을 챙겼어요. 배가 고팠고 라면이라도 먹을 수 있는 상회를 발견하려면 한참을 걸어야 했으니까. 그는 차가 있었지만 뒷좌석과 조수석 모두 짐이 꽉꽉 들어차 있어서 내가 탈 자리는 없어 보였어요. 작별 인사를 하려고 그를 흔들어 깨웠더니 겨우겨우 일어나더군요. 우리가 밤새 나눈 대화가 얼마나 깊은 것이었든지 간에 그는 나를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했어요.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죠.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된 것을 보고 한참 동안 혼잣말로 욕설을 내뱉었어요. 되는 일이 없다고 했죠. 자기 같은 건 차라리 길바닥에서 죽어버리는 게 가족들한테 도움이 될 거라고 했어요. 마누라가 자기 이름으로 생명보험을 들어 둔 걸 알지만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라며. 그간의 세월이 모두 헛것이었다며 내게도 빨리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했죠. 이 길이 아니고 다른 길을 가라고 했어요. “팔려면 다른 걸 파. 여기는 아무것도 없어.” 그는 절망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더니 몸을 돌렸어요. 그때 갑자기 그의 어깨가 빳빳하게 굳었죠. 그는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어요.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내 뒤를 가리켰죠. 내가 돌아보려고 하자 소리를 내질렀어요. “안 돼! 움직이지 마.” 그가 카메라를 들고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연거푸 셔터를 눌러댔어요. 내가 돌아보려고 할 때마다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고 했죠. 참지 못하고 돌아봤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하늘을 올려다봐도 주위를 살펴봐도 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죠. 그가 내 어깨를 부여잡더니 말했어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표정으로. “놀라지 말고 들어. 너는, 외계인이야.”

 

    K가 나를 쳐다보았을 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K의 말을 집중해 듣고 있던 나는 불시에 농락당한 사람처럼 한동안 머리가 멍했다. 정적 속에 선풍기 날개가 돌아가는 소리만 흐르고 있었다. K는 그의 말을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이성을 되찾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그가 네 그림자 사진을 찍었다는 거지?”
    K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진 지금 있어?”
    “아니요. 그 사람이 자기 책에 싣는다고 했어요. 출판되면 가장 먼저 보내주겠다고 했고.”
    “그럼 너는 아직 그 사진을 못 본 거야?”
    “못 봤어요. 그 사람은 서둘러 차를 타고 떠났으니까.”
    “그래도 너는 너의 그림자를 볼 수 있잖아.”
    K는 침묵했다. 그의 침묵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봤지만 무지개색은 아니었어요. 그냥 평범했어요.”
    “그래도 너는 그 말을 믿는다는 거지?”
    “믿어요.”
    K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수습해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K가 얼마나 굳게 그걸 믿고 있는지 알 것 같았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K는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딱 한 번 만났던 사람의 말만 믿고. 게다가 그는 외계인에 미쳐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K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K는 선풍기 날개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점점 느려지더니 이윽고 작동을 멈추었다. K가 버튼을 눌렀다 끄길 반복했으나 날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선풍기 앞으로 다가가 철제 망을 벗겨내고 날개를 분해해 모터 앞쪽에 낀 먼지 덩어리를 털어냈다. K는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다가 걸레를 가져왔다. 나는 한참 동안 선풍기 날개와 회전 장치 부근을 걸레로 닦아낸 뒤 다시 조립하고 버튼을 눌렀다. 날개는 아주 천천히 돌기 시작하다가 이윽고 제 속도를 찾았다. K가 조그맣게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나는 나의 외계인 사촌과 마주 앉아 저녁을 먹었다. 우리 사이엔 처음의 서먹함이 사라져 있었다. 내가 자신의 말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는 것을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나는 조심스레 아르바이트에 대해 물었다. 면접에서 K는 자신이 외계인인 것을 숨기지 않았다. 누굴 만나든 그 말부터 먼저 한다는 숙모의 말은 사실이었다. 편의점 사장은 나와 비슷한 나이인데 야간 근무자를 두면 적자를 면치 못해 본인이 직접 야간 근무를 선다고 했다. 외진 곳인 데다가 한 블록 거리에 24시간 마트가 하나 더 있어서 밤에는 카운터에 엎드려 자는 일이 더 많다는 그는 K의 말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늘 지쳐 있기에 자기 직원이 외계인이든 지구인이든 일만 잘한다면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다.
    K는 나를 역까지 배웅해 주었다. 나는 K의 삶이 걱정되었지만 한편으론 그가 나보다 더 순조롭게 삶을 꾸려 나가고 있다는 인상도 받았다. K는 대부분의 월급을 저축했고 그 돈으로 숙모에게 무언가를 해줄 생각이었다. K는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그토록 찾아다녔던 게 나였어요.” 가로등 불빛에 길게 늘어난 우리의 그림자는 똑같이 흑색이었다.
    “이런 꿈을 꿨어요. 아버지가 자전거 바구니에 나를 태우고 달을 지나 날아가는 꿈. 그 아름다운 광경과 달리 나는 내내 두려웠어요. 저 아래 건물 안 어딘가에 숨어서 우리를 쏘아 맞추려고 하는 사람들이 보였거든요. 형,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K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멀어져 가는 K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장웹진 8월호》

 

추천 콘텐츠

보호 구역

보호 구역 김근수 애랑은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애랑의 몸은 물위로 떠오르지 않아서 주검을 수습하지 못했다. 수직으로 바다를 막고 선 해안 단애의 절벽에서 애랑이 몸을 놓아 버릴 때, 덕배는 한달음에 마당바위로 달려 내려갔다. 갈매기들이 날아오르며 떼를 지어 울었다. 바다 어디에도 애랑의 모습은 없었고 허연 파도가 마당바위를 다그치고 있었다. 덕배는 물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소용돌이에 휘말려 실신했다. 마당바위 위에서 덕배가 눈을 떴을 때, 깨져 버리는 하늘을 보았다. 덕배가 종적을 감추던 날, 일본 군인 두 명이 돌에 맞고 칼에 찔려서 죽었고, 헌병 분소가 불탔다. 마을 사람들은 불을 끄지 않고 내버려두었는데, 일본 군인이 몰려와 군홧발로 밟는데도 누구도 덕배의 행방을 말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몰라서 말하지 않았는데 그럴 수는 없다며 밟혔다. 어찌해 볼 수 없는 날들 앞에서 애랑은 죽었고 덕배는 사라졌다. 애랑이 몸을 던졌던 절벽 위에 도라지 두 뿌리가 자라서 긴 세월 꽃을 피워 내었다. G사의 발전소 건설 부지는 B읍 항구에서 해안 단애 넘어 북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의 방파제 안쪽을 매립해서 들어서고 있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수도권의 장기 전력 수요 조사와 전망에 근거해서 발전소 추가 건설 필요성을 확인했다. 정부는 발전소 입지 최적지에 대한 발표와 철회를 거듭하다가 결국 B읍의 북쪽 해안 마을을 최종 선정지로 확정 발표했다. 바다가 깊이 밀고 들어간 마을은 새끼손톱 모양의 백사장을 거느리고 해안을 따라 길게 뻗은 산맥의 능선을 배후로 취락하고 있었는데 인근 마을에 비해 거주 가구 수가 적고 어장의 규모와 어장주의 연대가 비교적 미미하다는 현장 실사팀 보고서를 바탕으로 발전소 건설 부지로 선정되었다. 해병전우회, 읍민발전대책위원회, YMCA, 환경단체는 즉각 발전소 건설 백지화를 위한 비상 대책위를 구성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고 발전소 건설 절대 불가 입장을 표명했다. 정부 발표 이튿날부터 B읍을 관통하는 주요 도로변에 현수막이 걸리기 시작했다. -청정해역 동해안에 발전소가 웬 말이냐 -주민 의견 개무시한 발전소는 전면 무효 도로변을 쓸면서 마파람이 불어오면 현수막이 팽팽하게 부풀면서 B읍의 허공은 시끌벅적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 년 전이었다. 마을 이주 계획이 확정되었다. G발전소는 마을 부지 매입과 해안 매립권을 확보했다. 이주 계획의 골자는 23개 취락 가구를 인근에 새로 조성할 부지로 이주시키는 것이며 새 부지는 G발전소가 구입하여 23개 가구에 무상 분배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읍내에서 서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산자락을 허물고 개토하여 새 마을을 조성한다는 말이었다. 손무근은 마을 주민 대표단과 회동을 가졌고 한 가구를 제외한 스물두 가구 세대주의 인감 날인을 받은 보상합의서를 건네받았다. 그동안 십수 차례 주민 설명회를 가졌고 보상 문제와 향후 이주 계획을 포함하여 주민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분기에 한 번꼴로 마을회관과 G발전사 현장 임시 가설 사무소,

  • 관리자
  • 2025-08-01
이상한 고리

이상한 고리 김덕희 * 나. 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불빛, 등불, 전기, 스위치, 조명··· 단어들이 어지럽게 떠오른다. 천장 중앙에서 쨍한 빛을 내고 있는 저것의 이름은 등이다. 천장을 비롯해 네 벽과 바닥은 같은 색이다. 빛의 모든 파장이 모여 있는 색, 색이라는 것까진 알겠는데 아직 그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 색이다. 공기 중에는 어떤 냄새가 희미하게 맴돌고 있다. 역시 냄새라는 것만 알고 냄새의 이름은 모른다. 감각을 조금 더 예민하게 세워 본다. 벽을 뚫고 들어와 지나가는 전파들이 복잡한 소음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구성의 파동들인데 파장과 진폭이 뒤섞여 있으니 복잡해 보인다. 삼원색, 사이언, 마젠타, 옐로우, 흰색, 백색, 화이트, 소독, 클로드헥시딘, 에틸알코올, 포르말린, 차아염소산나트륨, 초저주파, 초장파, 초단파, 극초단파···. 분출하듯 솟아나는 정보들이 모두 어디서 오는 건지 모르겠다. 수많은 이름과 개념들 속에 아직 나에 관한 정보는 없다. 나는 바닥에 고정된 침상 위에 반바지만 입은 채 누워 있고 내 몸 이곳저곳에는 유선 센서들이 붙어 있다. 나에게서 어떤 정보들을 빼내려 한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나도 알고 싶다. 나는 일어나 앉은 다음 내 이마와 관자놀이, 목과 가슴에 붙어 있는 것들을 떼어 연결된 선과 함께 침상 빈 곳에 아무렇게나 치워 놓는다. 캡슐. 눈앞에 환영 하나가 머문다. 금속성 재질의 커다란 알이다. 환영은 금세 사라지고 다시 떠올리려 애써 봐도 은빛 달걀 모양의 잔상만 허공에 떠돌 뿐이다. 갑자기 왼쪽 벽 전체가 투명해지는 바람에 캡슐은 잠시 잊기로 한다. 나와 아주 닮은 존재들이 벽 저편에서 나를 향해 앉아 있다. 세 줄짜리 계단식 공간에 다섯 명씩 배치되어 있고 저마다 자기 앞의 기판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입력하거나 확인하는 중이다. 저 멀리 뒤쪽 벽에 기대어 서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띈다. 누구랄 것 없이 입고 있는 흰색 가운이 키 큰 여자에게는 맵시 있게 보인다. 여자가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더니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긴 머리카락 안쪽으로 넣어 귀에 가져다 댄다. 통신장치로 짐작되어 재빨리 신호를 가로챈다. 예상한 대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아직 나는 저들의 언어를 온전히 알아듣지 못한다. 학습, 강화학습. 나의 내부에 있는 무엇이 나를 조종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이 껍데기를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만 같다. 나는 그것과 마주할 수 있을까. 이 질문조차 그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 무엇에게도 그 무엇이 있는 건 아닐까. 그 무엇에게도 그 무엇이 있을 테고··&mi

  • 관리자
  • 2025-08-01
목소리들

목소리들 조시현 언제나 문은 예상치 못한 순간 열렸다. 막무가내로 파고들어 오는 목소리처럼. 무방비하게 책을 읽던 주하는 일순 얼어붙었다. 어디에도 남지 않을 목소리를 마음껏 낭비하는 그 감각에 한껏 빠져들어 있던 차였다. 신발장 옆 화장실, 왼쪽에 침대, 오른쪽에 주방이 전부인 한 뼘짜리 원룸은 현관에 서면 한눈에 전부 들어왔다. 계약 내용은 27일 하루를 온전히 비워 주는 것. 지금껏 한 번도 어긴 적 없었기에 주하는 대처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시선에 섞인 질책의 의미를 읽은 남자가 검지로 뺨을 긁었다. “어, 죄송합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남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오려고 온 건 아니고. 매달 27일마다 뭘 하는 거냐고, 여자 혼자 종일 웃었다 울었다 별짓을 다 한다고 하도 그래서. 여기 방음 잘 안되거든요. 방 빌려드리는 거야 돈도 받고 어렵진 않은데 혹시나 불법적인 일은 안 되니까 확인차 온 거예요. 그래도 뭘 하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쫓겨나면 곤란하거든요. 미리 말씀 안 드린 건 저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근데 연락처도 모르고.” 하지만 남자의 눈은 안쪽을 꼼꼼하게 살폈다. 미처 감추지 못한 호기심이 묻어났다. 주하가 가져온 거라곤 책 두 권과 머그컵, 도라지청이 전부였다. 남자가 거기서 뭔가를 알아챌 것만 같아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야 불법적인 일이 맞았으니까. 주하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남자가 별안간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플라스틱 카드를 내밀었다. 구재정. 인공지능융합대학원. 학번까지. 주하는 사진과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덥수룩한 갈색 곱슬머리. 멀끔한 얼굴. 무엇보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가늘고 예쁜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같은 방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고 있는 사람. “다른 뜻 있는 거 아니고요. 저 정말 여기 살거든요. 이 이름으로 입금 주셨잖아요.” 이름은 맞지만 학생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생각을 못 했다기보단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더 맞겠지. 알고 있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겠지만 인공지능융합대학원이었다니. 침묵이 이어지자 눈을 굴리던 남자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음, 일 없는 거 확인했으니까. 저는 갈게요. 계약 파기하는 거 아니죠? 제가 잘못한 건 맞지만 정말 조심해야 하거든요. 아르바이트를 또 할 수는 없어서요.” 횡설수설하던 구재정은 머리를 박박 긁더니 재빨리 사라졌다. 약속을 어긴 건 맞지만 그걸 보니 기분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위아래층 목소리가 간혹 들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방음이 안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잊고 있었다. 한 층에 세 개여야 할 집에 가벽을 세워 열한 개로 늘려 놨으니 당연한 사실인지도 몰랐다.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한 번 깨어진 감흥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주하는 다시 차를 끓였다. 굳이 도라지차. 이렇게 된 와중에도 목을 관리하고 있다니. 멍청하기는. 이제 연극을 보

  • 관리자
  • 2025-08-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1건

  • 익명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어차피 우리도 다른 행성에서 보면 외계인이니까요. ㅎ

    • 2014-08-25 15:32:40
    익명
    0 / 1500
    •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