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유감
- 작성일 201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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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 유감
주원규
1
- 감 잡았어.
소년이 다가왔다. 소년은 한쪽 다리, 더 정확히 말해 왼쪽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그렇게 소년은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우 노인?老人과 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냥 온 게 아니었다. 두 노인네가 마주하고 앉은 자리 중간에 의자 하나 소리 나게 끌고 와 직접 앉아버린 것이다.
우 노인이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소년을 바라봤다. 소년의 꼬락서니를 처음 본 사람처럼 놀란 표정이었다.
그럴 수도 있다. 누구라도 소년의 꼬락서니를 처음 대하면 기겁할 정도로 놀라기 마련이니까.
퀭한 눈, 한 달 이상 감지 않아 떡 진 머리카락. 꼬질꼬질한 얼굴. 이곳저곳 마구잡이로 찢어진 청바지에 조금만 냄새를 맡아도 그 역겨움에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지독한 냄새. 그중 압권은 단연 신발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브랜드는 나이키가 틀림없는데, 이미 신발의 기능을 다한 지 오래였다. 소년의 발가락 열 개가 신발을 뚫고 나와 꿈틀거렸으며, 걸을 때마다 밑창에선 썩은 구정물 같은 액체가 매장 바닥에 흔적을 남겼다.
소년은 자신을 어이없게 쳐다보는 우 노인을 잽싸게 훑은 다음 할머니를 바라봤다. 할머니는 우 노인보다는 덜 놀라는 눈치였다. 소년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 역시 계집은 사내보다 우월해.
우 노인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 무슨 소리야?
- 할머니는 날 알아보잖아. 내가 이곳 죽돌이란 걸 말이야. 그렇지 할머니?
우 노인이 이번엔 할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 정말이야?
백발의 할머니는 부러 창가로 고개를 돌려 우 노인의 시선을 피한 뒤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우 노인도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를 되찾았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본 칠십 평 가까이 되는 넓은 매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편의점 파라솔 탁자보다도 못한 간이 테이블 수십 개가 촘촘히 자리 잡은 매장은 빈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 대부분은 젊은이들이었다. 말쑥한 양복을 차려입은 젊은이, 제법 멋을 부린 캐주얼 슈트 차림 젊은이, 아예 캐주얼한 젊은이, 캐주얼한 것도 성숙한 것도 아닌 상당히 애매한 차림의 젊은이, 그보다 조금 나이 어린, 입을 열 때마다 육두문자 쏟아내는 어린 젊은이들까지. 그들의 소란은 도축장에 모여든 소들의 울음소리를 닮았다.
주위를 둘러본 우 노인은 그제야 소년을 알아봤다. 우 노인과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이곳 맥도날드 매장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노숙자 차림에 심지어 아무리 높게 봐도 중딩 이상으론 보이지 않는 소년도 이곳에 매일 출근 도장 찍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소년을 알아봤다고는 해도 우 노인에게 그 사실은 전혀 반갑거나 신선한 일이 못 되었다. 그는 지금 노숙자 청소년 따위에게 관심을 기울일 만큼 한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 대해 무한 관심을 한때나마 품었었던 중학교 교감 선생 출신인 우 노인, 그가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지금처럼 무관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만큼 노부부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반증이었다.
그 심각함을 읽은 걸까. 소년은 솔직하게 우 노인과 할머니의 현실을 진단했다.
- 금방이라도 뒈질 것 같은 죽을상 하고선 창가만 바라보고 있질 않나. 할망구도 마찬가지고. 처음엔 말이지. 도대체 두 노인네가 무슨 생각으로 이 바쁜 시간 맥도날드 황금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지 좆나 궁금하더라고.
반말 사용은 그렇다 치고 ‘노인네’, ‘할망구’, ‘뒈진다’ 등의 비속어 사용이 우 노인의 신경을 더욱 사납게 했다. 예전 같으면 일갈 한 번 시원하게 쏟아낸 뒤 훈계를 늘어놓겠지만 때가 때이니만큼 우 노인은 성가시다는 말투로 소년에게 한 마디 툭 내던지고 말았다.
- 그냥 가라. 신경 쓰게 하지 말고.
하지만 소년은 제 말 하기에 바빴다. 우 노인은 소년이 어디에 가도 욕먹을 사회악이라고 생각하며 짜증스럽게 소년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 순간 우 노인의 눈빛이 돌연 달라졌다. 소년이 지껄이던 마지막 말이 목에 가시처럼 콱 박힌 것이다.
- 그래서 골똘히 통빡 좀 굴려 봤지. 저 두 노인네가 왜 저러고 있을까. 집도 절도 없는 노인네라 그런가? 그런데 아닌 거야. 나와 달리 꼬빡꼬빡 햄버거 시켜먹고 콜라도 처먹는 거 보면 돈이 아예 없는 건 아닌 것 같단 말이지. 호기심 졸라 땡겨 결국 실례 무릅쓰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둘의 대화를 엿듣고 말았지 뭐야.
- 뭐? 우리가 하는 말을 엿들었다고?
우 노인의 반응을 본 소년이 더 익살스럽게 굴었다. 소년은 마치 바나나를 입에 문 원숭이처럼 게걸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 다 들었지. 다 들었어.
- 뭘 들었는데?
- 당신들이 죽고 싶어 한다는 거. 것도 좆나 강렬하고 장엄하게.
순간 우 노인, 소년을 보던 시선을 할머니에게로 향했다. 할머니의 낯빛은 어느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 더 정확히 말해 줄까? 노인네 당신은 동반자살을 계획하고 있어. 할망구와 함께 말이야. 농약 먹고 죽을까, 목 매 달아 죽을까, 연탄가스 마시고 죽을까. 이도 저도 아님 에라 모르겠다,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려 죽을까, 등등. 내 말 틀려?
- 허.
할 말을 잃은 우 노인이 한숨을 내쉬곤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매장 안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구 하나 두 노인과 비렁뱅이 꼬마에게 관심 두지 않았다. 이들을 관심 있게 바라보는 이들은 이곳 관리자와 알바생 몇이 전부였다. 그들은 이 골칫덩이들이 언제 자신들의 대중적이면서도 차별화된 글로벌 프랜차이즈 맥도날드에서 꺼져 줄지 노심초사였다.
소년이 확인 사살하듯 우 노인에게 거듭 물은 뒤 무슨 자신감에서였을까. 우 노인이 마시던 콜라 잔을 집어 들더니 그 지저분한 입술을 우 노인 콜라 잔에 꽂힌 빨대에 갖다 대곤 쭉쭉 빨아대는 게 아닌가.
- 그런데 말이야. 노인네.
- 뭐야 또?
- 내가 도움을 좀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 네깟 놈이 무슨 도움?
- 할아버지, 할머니의 존엄한 죽음에 대해 말이야.
2
소년의 제안은 단순했다. 자신이 우 노인과 할머니의 존엄한 죽음을 도와줄 테니 대신 도움을 준 자신에게 반년어치 맥도날드 이용권을 제공해 달라는 거였다. 맥도날드 이용권이란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은 우 노인에게 소년은 다시 설명해 주었다. 거창한 건 아니고 하루에 한 번 햄버거와 콜라를 사먹을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달라는 게 맥도날드 이용권의 실체였다. 소년이 밝힌 액수는 정확히 오십칠만 원이었다.
처음 소년의 제안을 들었을 때 우 노인은 소년의 말을 헛웃음 한 방으로 일축했다. 우 노인은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우라고 말한 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추가했다.
- 내가 니깟 어리고 못 배운 놈 도움이나 받아 죽을 줄 알아? 스스로도 얼마든지 존엄하게 죽을 수 있어. 이거 왜 이래?
그 말을 들은 소년의 눈매가 교활하게 꿈틀거렸다. 소년이 되물었다.
- 그래? 그런데 왜 석 달이 지나도록 이렇게 뒈지지 않고 살아남아 맥도날드 매장을 좀비처럼 어슬렁거리실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소년의 말을 듣는 순간 우 노인은 할머니를 쳐다봤다. 백발의 할머니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우 노인은 확신했다. 소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우 노인은 사실 스스로 죽을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정확히 석 달 전 우 노인은 죽기로 결심했다. 할머니에게 대놓고 죽자고 말한 건 아니지만 우 노인이 죽기로 결심하자 할머니도 그 결의에 자연스럽게 동참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둘에겐 살아야 할 최소한의 명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중학교 교감으로 정년퇴임한, 그래서 적어도 중산층 소리는 들을 법한 우 노인이지만 골머리 썩는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연금 한 푼까지 탈탈 털어먹었지, 할머니는 동네에서 이상하게 친절한 장판 가게 사장 말만 믿고 삼십 평 아파트 담보로 대출 얻어 계 하다가 홀랑 사기당해 날려버렸지, 게다가 우 노인은 파키슨인지 뭔지 몹쓸 병마를 얻어 밤낮 가리지 않고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지, 할머니는 곗돈 사기를 당한 뒤 매일 ‘죽어야지. 죽어야지.’를 부적처럼 입에 달고 다니지.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우 노인은 살아야 할 이유보다 죽어야 할 이유가 넘쳐나는 걸 도무지 부정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 후 생각한 실천 방향은 딱 하나였다. 자살, 그것도 동반 자살. 그 외에 다른 대안은 없어 보였다.
‘아. 그런데 죽기가 이리도 힘들었던가.’ 삼 개월 가까이 죽기 위해 발버둥 치던 우 노인의 탄식을 그대로 옮겨 담은 표현이다.
자살을 결심하고 정말 무던히 노력했지만 말처럼 자살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혼자만 죽는 게 아니라 마누라 할머니랑 같이 죽어야 하니 부딪히는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순해 보이는 할머니는 의외로 까다로운 편이었다. 목을 매달면 숨 막혀서 싫다고 난리, 물에 빠지면 차가워서 싫다고 난리, 차 안에서 번개탄 피우고 죽는 방법도 있지만 우 노인, 자신 모두 운전할 줄 모르니 어떡하느냐고 난리 등. 이렇듯 할머니는 갖가지 이유를 들먹거리며 우 노인의 존엄한 죽음에 언제나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렇다고 우 노인 혼자 죽는다고 결심했다 해서 상황은 달라졌을까. 우 노인에게 지난 석 달은 자살을 결심했지만 작심과 실천 사이의 엄청난 괴리감만 실감한 기간이었다.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려 했지만 요즘엔 보안을 핑계로 옥상 문 꽁꽁 걸어 잠그는 통에 접근도 어려웠고, 빌딩 같은 곳은 일반인, 그것도 별 하릴없어 보이는 노인네에겐 엘리베이터 진입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치명적으로 우 노인은 고통을 무서워했다. 오랜 시간 파키슨 병에 시달린 그에게 고통은 친구처럼 익숙해질 법도 한데,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심해져만 가는 고통이 우 노인을 미치게 만들었다. 고통이 가라앉는 시간이라야 하루에 고작 서너 시간 남짓인데, 오히려 고통이 없는 그 시간이 우 노인을 더 불안하게 했다. ‘아픔이 찾아올 때 어떻게 해야지? 어떻게 해야지?’
상황이 이쯤 되면 그냥 눈 딱 감고 죽어버리면 좋겠는데 죽음 직전의 고통이 우 노인의 모든 실행의지를 꺾어버렸다. 어떤 죽음이든 순간의 고통은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 순간만 견디면 되는데 우 노인에게 그 순간은 영겁의 고통처럼 두텁기만 했다.
소년은 그런 면에서 놀라운 관찰가였다. 소년은 우 노인과 할머니가 왜 지금까지 죽지 못했는지, 그 원인을 정확히 짚어냈다. 소년은 두려움 때문이라고 했다. 두려움이란 말과 함께 소년은 누군가 도와준다면 죽는 건 의외로 쉽다며 죽음의 조력자, 그 필요성을 역설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우 노인과 할머니는 계속해서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소년의 주장에 점차 동화되어 갔다. 우 노인이 무엇보다 소년의 말에 신뢰를 가졌던 부분은 소년이 말한 자신의 업적에 대한 실증 때문이었다.
자신의 반복 설득에도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일관하는 우 노인을 보자 답답했던지 소년은 보여줄 게 있다며 맥도날드 매장 이곳저곳으로 우 노인과 할머니를 이끌었다.
3
소년이 이끈 첫 번째 장소는 여자 화장실 마지막 칸막이 내부였다. 소년은 칸막이를 열고 들어서더니 벽면의 타일 몇 개를 뜯어냈다. 타일은 의외로 쉽게 떨어져 나갔다. 타일이 떨어져 나간 시멘트 벽면 자리엔 작지만 깊고 둥근 구멍이 패어 있었다.
소년은 그 구멍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생략하더니 바로 둘을 두 번째 장소인 맥도날드 주방으로 이끌었다. 카운터를 통해 주방으로 들어갈 순 없지만 소년은 흔히 말하는 뒷문 개구멍을 이용해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엔 제법 많은 알바생들이 바쁘게 움직였지만 소년과 우 노인 일행의 등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소년은 이 상황을 궁금해 하는 우 노인에게 자신이 오래전부터 이곳 죽돌이인 탓에 알바생들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해 안심시킨 뒤 이번엔 후드 덕트 벽면의 타일을 뜯어냈다. 그러자 이번에도 깊고 둥근 구멍이 보였다.
그렇게 소년은 노인네 둘을 맥도날드 매장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며 깊고 둥근 구멍을 보여주었다. 소년은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엄청난 비밀을 발설하는 사람처럼 들떠 있었다. 하지만 우 노인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도대체 이깟 구멍 보여주는 게 죽는 거랑 무슨 상관이냐며 버럭 짜증을 냈다. 우 노인이 2층 창가 자신들이 원래 앉던 자리로 돌아와 소년에게 분통을 터트리자 그제야 사람들도 아주 조금 우 노인 일행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노인네의 짜증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곳 맥도날드엔 아무도 없었다.
우 노인이 잠시 흥분을 가라앉힌 사이 소년이 궁시렁대며 자신의 양 어깨에 분신처럼 매달고 다니던 등산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 무언가가 우 노인과 할머니의 시선을 다시 사로잡았다.
- 거 되게 말 많네. 이래서 버럭 소리나 지르는 진상 노인네와는 오래 말 섞으면 안 된다니까. 이거 한번 봐요. 어서.
소년이 가방에서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것은 용도를 설명하기 어려운 해괴한 물건이었다. 얼핏 보면 방아쇠 비슷한 게 달려 있어 총이 연상되기도 했지만, 부속품 중에 맥도날드 상표가 찍힌 스테이플러 같은 사무용품도 보였고 스테이크 절단할 때 사용하는 부속품들도 용접된 한 마디로 불가해한 쇠붙이들의 집합체였다. 우 노인이 물었다.
- 이게 뭐야?
그것을 신나게 주물럭거리던 소년은 천기누설 중인 무속인처럼 눈알을 빠르게 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뭐긴 뭐야. 노인네들 골로 보내는 즉효약이지.
- 약?
-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이건 정말 끝장나는 발명품이야. 죽음을 도와주는 특허상품이지.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우 노인을 보며 소년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 방금 전 구멍들 똑똑히 봤지?
우 노인과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노인네의 반응을 확인한 소년이 입에 침까지 튀어 가며 말을 이었다.
- 그게 바로 나에게 죽기를 요청한 이들에게 내가 안겨다 준 죽음의 선물, 그 영광의 흔적들이야.
이번엔 생전 말을 아끼던 백발의 할머니가 질문했다. 할머니가 말문을 열자 소년은 더욱 신나했다. 이제 완전히 넘어왔다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 그 구멍이?
- 당근이지. 한번 봐봐.
소년이 시범을 보이려는 듯 테이블 바닥에 자신의 왼쪽 볼을 밀착시켰다. 그러고는 그 해괴한 물건을 손으로 집어 총구로 보이는 부분을 관자놀이에 갖다 대는 시늉을 한 뒤 물건의 사용법과 성능을 소개했다.
- 타카와 같은 원리야. 목공소에서 나무나 시멘트 벽 뚫을 때 사용하는 기구 말이야. 여기에 장전된 철못이 이렇게 머리통을 뚫고 나가면 말이야. 그냥 끽소리 못하고 가는 거야.
- 정말 그 구멍들이 철못이 머리통 뚫고 나간 흔적이란 말이야?
- 못 믿겠음 근처 경찰서 가서 여기서 사람 몇이 죽어 나갔는지 한번 물어봐. 정확하게 알려줄 테니.
- 어떻게 그런 사건이 신문에 소개도 안 되고 그냥 넘어가?
- 그러니까 맥도날드지.
- 무슨 소리야?
자세를 바로잡은 소년이 또다시 우 노인의 얼굴에 침을 튀어대며 말을 이었다. 그 와중에도 소년은 해괴한 물건을 누가 볼까 무서웠는지 잽싸게 가방에 챙겨 넣었다.
- 방금 전 봤던 이 물건 말이야. 맥도날드에서만 만들 수 있는 특허품이야.
- 맥도날드에서만 만들 수 있다고?
- 이 물건은 그야말로 맥도날드에 의한 맥도날드만의 발명품이지. 더 많은 햄버거를 만들어 팔기 위한 온갖 약삭빠른 메커니즘이 결합된 순전히 맥도날드 안에서만 떠도는 비품으로 만들어낸 창조물이야.
우노인은 별 배운 것도 없어 보이는 어린 녀석이 메커니즘 운운하는 게 우습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해보았지만 이내 소년의 말에 집중했다. 가만히 듣고 보니 녀석의 말은 퍼즐이 맞춰지듯 앞뒤가 들어맞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 맥도날드처럼 싸구려 햄버거 좆나 팔아 푼돈 주워 모아 떼돈 만드는 곳은 말이야. 이런 해괴한 물건을 필수로 갖고 다녀. 이건 뭐랄까. 미국에서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갖고 다니는 총과 같은 거야. 한국에선 총이 법으로 금지되었으니 총 대신 다른 게 필요했겠지. 그래서 만들어낸 게 바로 이런 이름도 빛도 없는 즉효약이야.
- 하나만 묻자.
- 맥도날드에서 이걸 어디에 사용하는지 묻고 싶은 거야?
- 허.
우 노인이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감탄사를 날린 사이 소년은 또 한 번 능청스럽게 우 노인이 먹다 남긴 콜라를 빨대로 쭉쭉 빨아 마시며 말을 이었다.
- 말해 주지. 간단해. 자기네 맘에 안 드는 것들 죽이려고 갖다 놓은 거야.
- 그게 말이 돼?
우 노인은 소년의 말을 비웃었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소년은 오히려 우 노인과 할머니의 순진함을 질타했다.
- 정말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맥도날드처럼 전 세계 푼돈을 뜯어 모으는 글로벌 회사가 지금까지 별 탈 없이 굴러가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이런 물건 갖고 돌아다니며 자기네들 비판하고 맘에 안들 게 구는 것들 대가리에 쾅 쾅, 철못 박아대니까 가능한 거야. 지금까지 뒈진 인간들 중에 맥도날드 햄버거 한번 안 먹어 본 인간 있어? 없잖아. 그중엔 반대자도 있고 진상 손님도 있을 거야. 그래서 맥도날드에선 매니저 재량껏 불순분자들 죽여 없앨 수 있는 물건 배급을 단행한 거지. 이게 다 자기 식구 챙기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수단이라고 믿는 거야.
소년의 설명은 거침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우 노인은 소년의 말대로 정말 자신과 할머니가 이제껏 순진한 삶을 살아왔던 건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때맞춰 빨간 모자에 흰색 유니폼을 차려입은 알바생이 짜증스런 얼굴로 바닥청소 하는 모습이 우 노인의 눈에 띄었다. 그런 알바생에게 ‘청소 제대로 안 할 거야. 이 허접한 알바야!’라고 호통 치는 양복 차림에 올백 머리를 한 매니저도 바라봤다. 우 노인은 소년의 말이 정말일지도 모른다는 상당히 비논리적인 추측을 하기에 이르렀다. 저렇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얼굴로 매장 테이블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햄버거와 콜라를 먹어치우는 손님들의 머릿수 계산에 골몰하는 매니저라면 사람 머리통 한두 개쯤 구멍 내도 아무렇지도 않을 거란 확신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매니저와 알바생, 맥도날드 매장 2층 전체를 바라보던 우 노인에게 소년이 묻지도 않은 말을 꺼내며 둘의 결심을 다시 한 번 다그쳤다.
- 난 정말이지 행운아야.
행운아란 말에 우 노인이 다시 소년을 바라보며 물었다.
- 그게 무슨 소리야?
소년은 메고만 있어도 든든했는지 어깨에 둘러 멘 등산 가방을 손으로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 난 이 물건을 여기가 리모델링할 때 입수했어. 공사하는 내내 천장 속에 숨어 있다가 매니저가 깜빡하고 카운터에 놓고 간 걸 좋다구나 쌔빈 거지. 이걸 갖고 있으니 말이야. 앵벌이 패거리들 따라다니지 않아도 되고, 쉼터에서 얻어맞으며 크지 않아도 되고, 혼자 힘으로 자립하며 살 수 있는 길을 얻었단 말이지. 비록 먹을 거라곤 햄버거, 콜라가 전부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야. 안 그래?
그렇게 말하는 소년의 눈엔 벅찬 감동마저 일렁였다. 소년은 우 노인과 할머니를 번갈아 바라보며 그들의 결단을 재촉했다.
- 기회는 많지 않아, 노인네. 석 달이면 말이야, 정말 오래 개긴 거야. 이젠 끝을 봐야지. 내가 도와주겠어. 맥도날드 죽돌이인 내가 도와주겠단 말이야!
- 그런데 말이야.
- 또 뭐?
- 유서 같은 것도 쓰고. 뭐 지인한테 마지막 연락도 하고…….
우 노인이 죽기를 망설이는 태도를 보이자 소년이 강경한 어조로 우 노인을 질타했다.
- 그렇게 약해 빠지고 우유부단해서 어떻게 존엄하게 뒈질 수 있다는 거야? 개어이 없네. 노인네도 참.
노인네 노인네 하는 게 영 맘에 걸렸던 우 노인은 괜한 트집을 잡고 싶었던지 못 다한 질문들을 마구 던졌다.
- 정말 저걸로 머리통에 구멍 뚫리는 거 맞아? 뚫린다고 그 자리에서 죽어? 그걸 어떻게 믿어?
- 씨발. 믿기 싫으면 믿지 마. 그런데 똑똑히 알아 둬.
그렇게 말한 소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양의 역광을 받은 소년의 성난 얼굴을 우 노인과 할머니가 동시에 올려다봤다. 소년의 이어지는 말은 사람의 소리 같지 않았다. 소년은 우 노인과 할머니에게 존엄이 무엇인지 제대로 일깨워 주는 저승사자 같았다. 물론 이러한 감상평은 죄다 우 노인과 할머니의 망상에 가까운 머릿속 생각에 불과하지만 여하튼 그랬다.
- 나 지금 여자 화장실로 들어갈 거야. 그리고 딱 10분만 마지막 칸막이 안에 들어가 기다릴 거야. 기회는 단 한 번이야. 잘 생각해. 10분 지나면 더 이상 떼쓰고 울부짖어도 아무 소용없어. 10분 지나면 그냥 끝이야. 그땐 노인네 둘이 차에 치여 뒈지던지 농약 먹고 꺽꺽거리다 뒈져도 어쩔 수 없어. 비참하고 끝내주게 더럽게 죽는 거지. 그걸 갖고 신문이나 방송에선 좋다구나 막 떠들 테고. 그 꼴 참 보기 좋겠다. 씨발.
정말이지 우 노인은 과거 교감 선생의 이력을 되살려 소년의 돼먹지 못한 말버릇을 대차게 꾸짖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말만 실컷 쏟아낸 소년은 그대로 뒤돌아서서 여자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위태롭게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는 여전했다.
소년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우 노인의 시선이 어느새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손을 붙잡은 할머니에게로 옮겨갔다.
- 마누라……?
백발의 할머니는 말 대신 눈물로 자신의 의사를 피력했다. 자글자글한 주름뿐인 할머니지만 그녀의 눈망울에선 참으로 맑고 투명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할머니는 지쳐 있었다. 더 이상의 방황은 멈추고 싶다는 필사의 의지가 우 노인에게 그대로 전해져 왔다. 할머니를 잠자코 바라보던 그 순간 ‘쾅’ 하고 여자 화장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이 들어간 것이다.
우 노인이 긴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내쉰 다음 한 모금 남은 콜라를 모두 들이켰다. 컵 안에 담긴 얼음까지 우적우적 씹어 삼켰다. 우 노인의 표정이 점점 차갑게 굳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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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생각한 거야. 씨발 노인네야. 아마 천국 가서도 내 말 들은 걸 감사하게 생각할걸.
- 욕하는 거하고 노인네란 소리 좀 안 할 수 없겠어?
- 왜? 다 죽는 마당에.
- 존엄하게 죽고 싶다. 그러니 제발 예의 좀 차려.
결국 우 노인과 할머니는 정확히 9분 50초 만에 맥도날드 여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대 거울에서 화장을 고치던 젊은 여자에게 변태 취급까지 받은 우 노인이었지만 함께 손을 잡아 주는 할머니가 있어 그나마 안심이었다.
그렇게 화장실로 들어온 두 노인을 반색하며 기다린 건 소년이었다. 소년은 행여 둘의 마음이 변할까 싶어 허겁지겁 둘을 마지막 칸막이 안으로 밀어 넣곤 문을 잠갔다. 그러곤 빠른 속도로 그 해괴한 물건을 가방에서 꺼낸 뒤 자신이 요구한 반년어치 맥도날드 이용권에 해당하는 만 원권 지폐 오십칠 장을 우 노인에게서 가로채 자기 바지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돈을 챙기자 소년은 자신의 말버릇을 탓하는 우 노인에게 나름 성의를 보였다.
- 존댓말을 배운 적이 없어서 그래. 이해해 줘.
- 그런데 왜 하필 여자 화장실이야?
- 별걸 다 신경 쓰네.
- 인생 마지막을 여자 화장실에서 끝내는 건 좀 그러네.
- 여자 화장실이 최고야. 여자들은 힘이 없고 약해 빠져 그런지 신고도 잘 안 하고 혹시라도 노인네들 죽는 것 목격해도 도망가기 바쁠 거야. 그러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겨. 어차피 뒈지는 거 장소 따지고 뭐 따지고 하면 정말 죽기 어려워.
- 그런데 말이야.
- 뭐 뭐? 또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 내 시체는 어떻게 되는 거야? 이런 데서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자식들은 안 챙겨 줄 거야. 지들 살기도 바빠.
- 아까 말했잖아. 맥도날드에서 다 알아서 해준다니까.
- 뭘 알아서 해주는데?
- 맥도날드가 어떤 회사야? 전 세계 70억이 다 알고 있는 글로벌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야. 그런 곳에서 할배 할머니 같은 같잖은 노인네들 시체 수습 하나 못 할 것 같아 추잡스럽게 이 난리야? 길 가는 똥개 새끼들이 웃어요.
- 걱정 안 해도 돼?
- 내 영혼을 걸고 장담하지. 지금까지 맥도날드에서 뒈진 이들 모두 성대하게 장례식 잘 치렀어. 소정의 위로금까지 받았다면 말 다한 거 아니야?
- 정말이지?
- 씨발. 그러니까 내가 나서는 거지. 뭐 아무 대책도 없을까 봐 징징대는 거야? 노인네가 의심도 많아.
- 소리는? 소리 크게 나지 않아?
- 아무 소리도 안 나. 아주 조용해. 그냥 여기서 소리 소문 없이 뒈지는 거야.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뒈질 생각이나 해.
소년의 참으로 실용적인 말에 우 노인은 더 이상 함구할 수밖에 없었다.
우 노인은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우 노인은 이제 죽기로 결심한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소년은 많이 해본 솜씨처럼 능숙하게 우 노인이 죽을 수 있는 자세를 연출했다. 우 노인을 화장실 변기통에 앉히되 시선의 방향이 벽을 향하도록 돌아앉게 한 다음 우 노인의 얼굴을 벽에 닿도록 밀어붙였다. 그 뒤 곧바로 맥도날드를 위해, 맥도날드에 의해 탄생된 이름도 빛도 없는 해괴한 물건의 총구를 우 노인의 뒤통수에 갖다 댔다. 차가운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우 노인은 더 힘껏 할머니의 손을 붙잡았다. 우 노인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때맞춰 할머니의 눈물샘이 터져 버렸다. 소년은 많이 해본 솜씨처럼 우 노인에게 마지막 발언 기회를 주었다.
- 죽기 전 할망구에게 한 마디 해.
- 그, 그래. 마누라. 우리 마누라야.
- 으, 으으.
할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오열 직전인 할머니의 입을 소년이 물건을 쥐지 않은 다른 손으로 틀어막았다. 우 노인이 덜덜 떨리는 입을 열어 간신히 한 마디 했다.
- 좀 있다 봐.
- 옳지. 씨발 노인네. 쿨해서 좋네. 자. 이제 간다.
- 저, 정말 고통 없이 죽는 거 맞지? 한 번에 안 죽으면 너 진짜 가만 안 둔다.
- 아, 씨발. 속고만 살았나. 죽은 뒤에 할망구한테 물어봐. 고통 있었는지 없었는지.
소년이 짜증이 난 모양인지 우 노인의 뒷덜미를 힘껏 움켜쥐었다. 순간 ‘헉’ 하고 탄성을 내지른 우 노인이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일단 우 노인은 죽지 않았다. ‘퍽’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긴 했지만 우 노인은 멀쩡했다. 철못이 우 노인의 머리통을 뚫지도 않았고, 검은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지도 않았다. 할머니를 붙잡은 손의 악력도 여전했고 섬뜩한 차가움이 계속되는 것도 분명했다.
우 노인은 자신의 목덜미를 붙잡은 소년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소년은 침묵했다. 우 노인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약간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할머니부터 쳐다봤다. 할머니가 이전보다 더 심하게 손을 떠는 게 이상해서였다.
할머니를 보자마자 우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어?’ 하고 당황스러워했다. 백발인 데다가 게이샤 화장이라도 한 듯 유난히 새하얀 피부색이던 할머니 얼굴 전체에 점묘화처럼 수많은 핏방울이 함부로 흩뿌려진 게 보였다. 그 순간 우 노인은 자신의 머리통을 손으로 만졌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우 노인이 할머니에게 물었다.
- 이봐, 마누라.
- 으, 으.
- 나 죽은 거야? 지금 여기 황천이야?
우 노인의 그 질문에 할머니는 말 대신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 그럼 그 피는 웬 거야?
그렇게 물은 우 노인이 할머니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자연스럽게 따라갔다. 그러자 고개 돌린 우 노인의 눈에 피투성이가 된 소년이 보였다.
소년은 두 눈 크게 뜨고 입도 적당히 벌렸지만 말을 하거나 숨을 쉬진 않았다. 두 개의 검은 눈동자가 박제된 호랑이 눈알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년의 이마엔 녀석이 호언장담했던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마를 뚫은 철못은 소년의 머리통을 완전히 뚫어버린 뒤 칸막이에 꽂혀 있었다. 철못은 성인 남자 손바닥 길이 정도 되는 대못이었다.
몸을 돌린 우 노인이 소년의 손에 아직껏 쥐어져 있는 해괴한 물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소년이 당긴 방아쇠 부근과 총구를 들여다보고 우 노인은 총구의 방향이 자신의 머리통이 아니라 반대편을 겨누고 있음을 확인했다. 우 노인은 소년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정말 맥도날드에서만 사용 가능한 부속으로 만든 해괴한 물건에서 철못이 발사되었고, 철못에 의해 머리통이 뚫린 소년은 그 즉시 죽어버렸다.
하지만 소년은 결과적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우 노인은 평생을 살아오면서 약속을 어기는 게 가장 큰 죄악이라고 믿어 온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므로 우 노인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소년에게 돈을 줄 필요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할머니를 잠시 옆에 밀쳐놓은 우 노인이 차분히 행동했다. 일단 돈부터 빼내기로 했다. 소년이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만 원짜리 지폐 오십칠 장을 한 장도 남기지 않고 가로챈 다음 휴지를 둘둘 뜯어 손에 감아 쥔 뒤 자신과 할머니의 흔적을 지우는 데 애썼다.
그렇게 지문과 흔적을 지운 우 노인은 다시 할머니의 손을 잡고 칸막이 문을 열고는 잽싸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여자 화장실을 나오려는 그 순간, 할머니가 잠시 멈칫했다. 할머니는 소년이 죽은 칸막이 쪽을 바라보진 않았다. 할머니는 오직 우 노인만 봤다. 흔들리는 눈빛만으로 할머니는 우 노인에게 한 가지 질문만 계속하고 있었다.
‘우린 … 언제 죽어요?’
이상했다. 우 노인은 이제 그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설명하긴 어려웠지만 피투성이가 된 소년을 본 후부터 우 노인은 죽고 싶은 마음이 달아나 버렸다. 그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을 담아 우 노인은 손에 남은 휴지로 할머니 얼굴 전체에 튀어버린 소년의 검붉은 피를 대충 닦아 주었다.
4
- 노인네들!
우 노인과 할머니가 서둘러 맥도날드 매장을 빠져나오던 그때였다. 그 순간 어떤 어린 소년이 우 노인과 할머니를 멈춰 세운 것이다. 노인네라는 말을 함부로 내뱉으며 말이다. 하지만 매장 밖으로 나온 우 노인과 할머니에겐 공경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들의 무례함을 꾸짖거나 질타할 기력이 없었다.
둘은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멈춰 섰다. 둘은 서로의 손을 꼭 맞잡았다. 우 노인은 말없이 할머니를 바라봤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당부했다.
‘지금부터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린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알았지?’
하지만 우 노인의 비장한 다짐과는 다르게 둘을 ‘노인네!’ 하며 불러 세운 어린 알바생의 표정은 터무니없이 권태로웠다. 방금 전 죽은 소년보다는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이는 빨간 모자를 눌러 쓴 알바생이었다.
둘을 멈춰 세운 알바생은 우 노인에게 자신이 들고 온 봉지 한 개를 건넸다. 그것은 제법 큰 크기의 맥도날드 상표가 또렷이 박혀 있는 종이봉투였고,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은 제법 화려했다. 더블 버거부터 시작해 맥도날드에서 자랑하는 주력 메뉴가 하염없이 쌓여 있는 이른바 맥도날드 종합 선물세트였다.
알바생이 주위를 짜증스럽게 둘러보며 툭 던지듯 말했다.
- 꽤 신경 써서 넣었으니까 갖고 가시래요.
- 누가?
- 누구긴 누구예요. 매니저죠.
- 매니저?
- 여기 대빵 말이에요.
- 그런데 왜?
- 그걸 몰라서 물어요?
우 노인은 정말 몰랐다. 왜 매니저가 이런 선물을 자신에게 주는지. 할머니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안타깝게도 알바생은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큰 눈 더 크게 부릅뜨고 선 우 노인의 궁금증을 뒤로 한 채 서둘러 매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알바생이 떠난 뒤에도 우 노인과 할머니는 한참을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걸음을 옮겨야 했다.
둘은 집으로 향했다. 뜨거운 온기가 남아 있는 맥도날드 햄버거가 가득 담긴 봉투를 소중히 품에 안고서.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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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5-08-01
이상한 고리 김덕희 * 나. 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불빛, 등불, 전기, 스위치, 조명‧‧‧ 단어들이 어지럽게 떠오른다. 천장 중앙에서 쨍한 빛을 내고 있는 저것의 이름은 등이다. 천장을 비롯해 네 벽과 바닥은 같은 색이다. 빛의 모든 파장이 모여 있는 색, 색이라는 것까진 알겠는데 아직 그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 색이다. 공기 중에는 어떤 냄새가 희미하게 맴돌고 있다. 역시 냄새라는 것만 알고 냄새의 이름은 모른다. 감각을 조금 더 예민하게 세워 본다. 벽을 뚫고 들어와 지나가는 전파들이 복잡한 소음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구성의 파동들인데 파장과 진폭이 뒤섞여 있으니 복잡해 보인다. 삼원색, 사이언, 마젠타, 옐로우, 흰색, 백색, 화이트, 소독, 클로드헥시딘, 에틸알코올, 포르말린, 차아염소산나트륨, 초저주파, 초장파, 초단파, 극초단파‧‧‧. 분출하듯 솟아나는 정보들이 모두 어디서 오는 건지 모르겠다. 수많은 이름과 개념들 속에 아직 나에 관한 정보는 없다. 나는 바닥에 고정된 침상 위에 반바지만 입은 채 누워 있고 내 몸 이곳저곳에는 유선 센서들이 붙어 있다. 나에게서 어떤 정보들을 빼내려 한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나도 알고 싶다. 나는 일어나 앉은 다음 내 이마와 관자놀이, 목과 가슴에 붙어 있는 것들을 떼어 연결된 선과 함께 침상 빈 곳에 아무렇게나 치워 놓는다. 캡슐. 눈앞에 환영 하나가 머문다. 금속성 재질의 커다란 알이다. 환영은 금세 사라지고 다시 떠올리려 애써 봐도 은빛 달걀 모양의 잔상만 허공에 떠돌 뿐이다. 갑자기 왼쪽 벽 전체가 투명해지는 바람에 캡슐은 잠시 잊기로 한다. 나와 아주 닮은 존재들이 벽 저편에서 나를 향해 앉아 있다. 세 줄짜리 계단식 공간에 다섯 명씩 배치되어 있고 저마다 자기 앞의 기판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입력하거나 확인하는 중이다. 저 멀리 뒤쪽 벽에 기대어 서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띈다. 누구랄 것 없이 입고 있는 흰색 가운이 키 큰 여자에게는 맵시 있게 보인다. 여자가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더니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긴 머리카락 안쪽으로 넣어 귀에 가져다 댄다. 통신장치로 짐작되어 재빨리 신호를 가로챈다. 예상한 대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아직 나는 저들의 언어를 온전히 알아듣지 못한다. 학습, 강화학습. 나의 내부에 있는 무엇이 나를 조종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이 껍데기를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만 같다. 나는 그것과 마주할 수 있을까. 이 질문조차 그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 무엇에게도 그 무엇이 있는 건 아닐까. 그 무엇에게도 그 무엇이 있을 테고‧‧‧ 답을 낼 수 없는 연쇄적 질문 앞에서 혼란을 느낀다. 나는 연산을 멈추고 ‘그 무엇’이 시키는 대로 따르기로 한다. 학
- 관리자
- 2025-08-01
목소리들 조시현 언제나 문은 예상치 못한 순간 열렸다. 막무가내로 파고들어 오는 목소리처럼. 무방비하게 책을 읽던 주하는 일순 얼어붙었다. 어디에도 남지 않을 목소리를 마음껏 낭비하는 그 감각에 한껏 빠져들어 있던 차였다. 신발장 옆 화장실, 왼쪽에 침대, 오른쪽에 주방이 전부인 한 뼘짜리 원룸은 현관에 서면 한눈에 전부 들어왔다. 계약 내용은 27일 하루를 온전히 비워 주는 것. 지금껏 한 번도 어긴 적 없었기에 주하는 대처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시선에 섞인 질책의 의미를 읽은 남자가 검지로 뺨을 긁었다. “어, 죄송합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남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오려고 온 건 아니고. 매달 27일마다 뭘 하는 거냐고, 여자 혼자 종일 웃었다 울었다 별짓을 다 한다고 하도 그래서. 여기 방음 잘 안되거든요. 방 빌려드리는 거야 돈도 받고 어렵진 않은데 혹시나 불법적인 일은 안 되니까 확인차 온 거예요. 그래도 뭘 하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쫓겨나면 곤란하거든요. 미리 말씀 안 드린 건 저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근데 연락처도 모르고.” 하지만 남자의 눈은 안쪽을 꼼꼼하게 살폈다. 미처 감추지 못한 호기심이 묻어났다. 주하가 가져온 거라곤 책 두 권과 머그컵, 도라지청이 전부였다. 남자가 거기서 뭔가를 알아챌 것만 같아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야 불법적인 일이 맞았으니까. 주하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남자가 별안간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플라스틱 카드를 내밀었다. 구재정. 인공지능융합대학원. 학번까지. 주하는 사진과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덥수룩한 갈색 곱슬머리. 멀끔한 얼굴. 무엇보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가늘고 예쁜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같은 방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고 있는 사람. “다른 뜻 있는 거 아니고요. 저 정말 여기 살거든요. 이 이름으로 입금 주셨잖아요.” 이름은 맞지만 학생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생각을 못 했다기보단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더 맞겠지. 알고 있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겠지만 인공지능융합대학원이었다니. 침묵이 이어지자 눈을 굴리던 남자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음, 일 없는 거 확인했으니까. 저는 갈게요. 계약 파기하는 거 아니죠? 제가 잘못한 건 맞지만 정말 조심해야 하거든요. 아르바이트를 또 할 수는 없어서요.” 횡설수설하던 구재정은 머리를 박박 긁더니 재빨리 사라졌다. 약속을 어긴 건 맞지만 그걸 보니 기분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위아래층 목소리가 간혹 들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방음이 안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잊고 있었다. 한 층에 세 개여야 할 집에 가벽을 세워 열한 개로 늘려 놨으니 당연한 사실인지도 몰랐다.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한 번 깨어진 감흥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주하는 다시 차를 끓였다. 굳이 도라지차. 이렇게 된 와중에도 목을 관리하고 있다니. 멍청하기는. 이제 연극을 보
- 관리자
- 2025-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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