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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순한 마음

  • 작성일 2015-10-03



청순한 마음




박민정



삽화-청순한-마음


너는 율동공원 호숫가 벤치에 앉아 번지점프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를 좋아했다. 누군가 어느 동네가 좋은지 물어 오면 가끔 분당이라고 대답했다. 분당 율동공원. 그러나 너에게는 자가용이 없었고, 그런 곳을 함께 갈 만한 남자 친구도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한참이나 가야 분당 야탑역이 나왔고, 거기서도 시내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적당히 선선하지만 포근한 날씨라 나들이를 가기 좋은 날에 카디건을 걸쳐 입고 도시락을 까먹으며 멀리서 떨어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는 딱 한 번 느껴 봤을 뿐이었다. 스무 살 초입, 대학 신입생 시절. 너를 따라다니던 대학원생의 차를 얻어 타고 무작정 들렀던 곳. 너는 사람들이 정말로 그런 위험한 놀이를 즐기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연예인들이 시청률을 올리고자 무모하게 벌이는 짓이라고만 생각했다. 우발적인 나들이였다. 어쩌다 보니 쾌청한 날씨였고, 본의 아니게 찾은 장소였고, 동행한 사람도, 생각지도 못한 맛있는 도시락도, 전부 너의 계획대로 이뤄진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떨어지며 소리를 질렀다. 호수 저편의 일이었고 너는 이편에 있었다. 너보다 열 살이나 많은 대학원생이 너를 집요하게 주시했다. 그의 입장에서도 운 좋게 얻어걸린 데이트였다. 그는 너의 모습을 한순간이라도 놓칠세라 눈을 부릅뜨고 너를 관찰했다. 늘 그의 시선이 짜증났던 너였지만 도망가고 싶지 않았다. 너는 그가 빤히 쳐다보는 걸 알면서도 태연히 김밥을 먹었고 사람들이 떨어질 때마다 박장대소하며 즐거워했다.
너에게 그날은 완벽한 날의 이상으로 남았다. 언젠가 남자 친구가 생긴다면 정성스레 도시락을 싸서 함께 율동공원에 나들이를 가고, 그때 앉았던 자리에 앉아서 저 멀리서 일어나는 바보 같은 퍼포먼스를 구경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처럼 우연히 너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내비게이션이 고장 났다는 핑계를 대며 수서?분당 간 고속화도로에서 길을 잃는 척하다가 율동공원 쪽으로 빠지는 남자도 다시는 생기지 않았다. 혼자 가보려고 몇 번이나 마음을 먹었지만 그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 너에게 가장 좋아하는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너는 율동공원에서 번지점프 구경하기, 라고 여전히 대답하는 것이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을 현재진행형으로 대답하던 그때. 선생을 처음 만난 날. 너는 지금부터 이런 꿈을 가져온 거야. 너는 이제부터 이런 사람이 되고 싶은 거야. 분명 이상한 화법이었지만 선생의 말이 싫지 않았다. 지금 너는 학생들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 너는 사실 그런 꿈을 가져온 거야. 너는 알고 보면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거야. 두 문장 간 차이를 생각하다 잠드는 일이 잦아졌다. 너의 꿈은 선생이 말한 대로 언제나 정직하다. 고등학교 시절 한창 자기소개서를 쓰던 무렵에는 동시에 윤이상 평전에 빠져 있었는데, 너의 꿈에서는 윤이상 할아버지가 대교협 1번 문항에 대해 열심히 답변하곤 했다. 깽깽이 같은 것은 배워 봤자 남의 구경거리밖에 안 된다는 아버지를 졸라 음악 선생님을 만나 보았지만 그분은 저에게 재능이 없다고 포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포기하지 않고, 상업학교를 그만둔 후 무작정 서울에 가서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총보를 보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파울 힌데미트를 탐독했습니다.
선생이 특별히 달변이었다고 기억되지는 않는다. 선생은 다만 꽤나 눈에 뜨이는 미인이었다. 심심찮게 TV에 출연하는 선생을 보는 일이 이제 그다지 낯설지 않다. 선생은 마치 아나운서처럼 말한다. 아나운서들이 구사하는 스테레오 타입의 말투를 흉내 내어 말하는 것 같다. 마흔이 다 된 선생은 조금도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다. 너의 기억 속 모습과 똑같다. 성격심리학 박사이자 이름난 프로파일러인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프로파일러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이 많아졌죠. 요즘. 국내외를 막론하고 수사물이 많아진 영향도 있을 테고, 범죄를 다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유례없이 인기를 끌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저간의 청소년들 역시 강력범죄가 일어났을 때 매스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사건의 표층만 보지 않지요. 이제 사회는 사건의 심층을 시스템과 연관해 생각할 줄 알게 된 겁니다. 그러나 많은 학생들이 프로파일러를 꿈꾸는 까닭, 그것에 대해서 저는 그다지 낙관적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프로파일러라는 이름이 그들에게 익숙해졌고, 그 이름이, 정확히는 그 이름의 발음이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겠죠. 저는 프로파일러를 꿈꾼다는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어요. 단언컨대 세상에 프로파일러라는 직업은 없습니다. 먼저 훌륭한 경찰이 되어야 하고, 훌륭한 심리학자가 되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겁니다. 그러면 언젠가 프로파일러로 불리는 자신을 보게 될 겁니다. 프로파일러를 꿈꾼다는 학생 여러분, 거듭 강조하건대, 프로파일러라는 직업은 직업명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을 겁니다. 그 이름이 먼저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재차 말씀드립니다.
너에게는 지금껏 목격한 선생의 수많은 인터뷰 중 가장 인상적인 내용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또박또박 발음하려고 애쓰는 태도로 말하는 선생.
“수지야. 오늘부터 너의 꿈은 심리학자야. 외우도록 해.”
그때도 선생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표정이 함께 기억나지 않았다면 그토록 작위적인 대사가 과연 실재했는지에 대해서 의심했으리라고, 너는 생각한다.


학생회관 복도에 너덜너덜해진 학보가 널려 있다. 학보사는 학생회관 2층에 있었다. 널려 있는 그것들은 학보라기보다는 그저 신문지에 가까웠다. 너도 그렇게 학보를 막 다루곤 했었다. 잔디밭에 둘러앉아 배달된 자장면을 안주로 술을 마실 때도,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만날 때도 학보를 썼다. 찌라시밖에 안 되는 어용 학교신문 따위, 라고 아무도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손수 그런 취급을 하는 셈이었다.
용기내서 학교와 재단을 비판하는 글을 쓴 학생기자는 곧장 학생처장 사무실로 불려갔다. 학생처장이 소리를 지르면 옆방에 있는 너에게까지 고스란히 들렸다. “탄압 좋아하네! 이건 팩트에 어긋나잖아! 팩트에 어긋나는 글을 쓰는 게 기자야?” 너는 소음이 짜증나서 귀를 틀어막았다. 대다수 학생들은 그런 사정도 모르면서 손쉽게 학보사를 비난했다. 너도 학생 때는 몰랐다. 모교의 직원이 되고 난 후에 알게 된 것이다. 너의 사무실과 학생처장의 사무실은 붙어 있었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학생처장은 자기 연구실보다 보직 전용 사무실에 붙어있는 날이 더 많았고 너는 불편했다. 아직도 풍물패의 타악기 소리가 들렸고, 온갖 현수막이 나붙은 학생회관이었다. 2층 한가운데 학생처장과 자신이 떡 버티고 있다는 게 조금 우스웠다. 풍물패 소리도 가끔은 환청이 아닐까, 생각하며 창밖을 내다보면 다행히 상모를 돌리는 학생들이 보였다.
수지 선생, 학생처장은 너를 그렇게 불렀다. 다른 직원들에게는 성씨를 붙이면서 너에게는 굳이 이름을 붙인 호칭을 쓴다는 게 거슬렸지만 그뿐이었다. 일단 수지 선생, 말을 걸어오면 너는 흠칫 놀랐다. 왜 또, 생각하며 철렁했다. 상담일지를 들고 나가는 학부생 앞에서 굳이 “우리 윤수지 선생도 내 수업 들을 땐 저렇게 어리고 예뻤는데.” 지껄이던 학생처장이었다. 십 년 전 태반이 졸고 있던 공통교양 수업시간, 대강의실 안에서 너는 백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학생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 단지 사무실에 들어오던 날 변죽 좋은 척하며 말을 걸어 “저도 예전에 교수님 수업 들은 적 있어요.” 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 틈만 나면 학생처장은 너를 기억하는 척했다.
정작 너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교수들과 캠퍼스에서 마주칠 때면 서로 데면데면했다. 아는 척이라고 해봐야 어색한 목례뿐이었다. ‘누구 새끼’도 아닌 게 용케 학교로 돌아왔다고. 언젠가 술자리에서 들은 말이 너에 대한 진실이었다. 누구 입에서 나온 말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네, 전 우리 부모 새끼예요. 너는 웃으며 좌중을 향해 대꾸했고, 몇몇이 표 나게 비웃으며 네게서 고개를 돌렸다. 누구 새끼도 아닌 게. 누군가에게는 비난의 도구일지 몰라도 너에게 그것은 조금도 부끄러운 사실이 아니었고 오히려 자랑에 가까웠다.
너는 힘차게 자라나는 식물을 본다. 사무실에 들어온 후 일 년 동안 너는 세 개의 식물을 죽였다. 하필 키우기 까다롭다는 허브류도 있었지만 쉽기로 소문난 강낭콩도 있었다. 너는 과거 선생과 헤어질 때 작은 화분 하나를 선물할 걸 그랬다고 생각한다. 선생이었다면 너처럼 식물을 죽이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워낙 손끝이 여물지 못한 너였지만 이토록 손쉽게 식물을 죽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파종 단계에서 잘못되었나 싶어 흙에 꼼꼼하게 표시를 한 후 씨앗을 열 맞춰 뿌려도 보았고, 볕을 조절하기 위해 창문을 수시로 여닫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씨앗을 뿌리고 나서 첫 싹이 올라오는 것을 보는 기쁨은 잠시에 지나갔다. 가장 빨리 자라난 데다 한나절이 멀다 하고 쑥쑥 자라나 너를 기대하게 만들었던 강낭콩도 결국 죽었다. 매일같이 적당량의 물과 볕을 공급해도 금세 이파리를 축 내리며 말라죽었다. 과습 아니면 건조로 식물이 죽어버릴 수 있다는 설명을 보면 모든 죽음의 원인이 결핍 아니면 과잉으로 여겨지곤 했다. 그 죽음을 막기 위해 어느 단계에 어떤 방식으로 개입해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고 너는 생각했다. 식물이 죽어 나갈 때마다 상심한 너는 죽은 그것을 며칠간 들여다보다 용기내서 뿌리째 잡아 뽑곤 했는데, 그럴 때면 죽은 줄기에는 어느새 허옇게 곰팡이마저 슬어 있었다. 언젠가 길가에서 본 죽은 길고양이 주위에 잔뜩 꼬여 있던 날파리 같았다. 너는 몇 번을 망설이다 물티슈에 죽은 것을 감아 휴지통에 버리고 나서 흙만 남은 화분을 재떨이 삼아 담배를 피웠다. 새싹을 피워 올리던 배양토에 담배꽁초를 짓이기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건물 내에서 흡연은 절대 금지였으므로 너는 학생회관 뒤편 주차장 구석까지 걸어가 담배를 피우곤 했다. 다시 화분을 들고 돌아오는 길에 아는 학생들과 마주친 적도 있었다. “윤수지 선생님, 안녕하세요?” 학생들은 쾌활하게 인사하며 너의 손에 들려 있던 화분을 들여다봤고 곧장 담배꽁초를 발견하자 헐, 하며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어머니가 보내준 스킨답서스는 겨우내 물 한 번 갈아 주지 않아도 끊임없이 새싹을 틔워 올렸다. 그 성장에 감탄한 너는 다른 식물들을 결딴내기를 그만두고 그것에 집중했다. 가끔 물만 갈아 주면 보답이라도 하듯 틈틈이 줄기 사이로 뽀얀 새 줄기가 가만히 돋아났다. 잊고 있다가도 한 번씩 들여다보면 심심찮게 동그란 새싹이 자라 있었다. 그런 것을 보는 마음이 좋았다.
너는 언제나 선생이라면 식물을 잘 키워냈으리라 생각했다. 1982년 가을 운동회, 라는 글자가 새겨진 30cm 자를 20년 넘게 쓰고 있던 선생. “우와, 선생님, 이건 군사정권 시절부터 있었던 거네요.” 네가 선생에게, 아니 너의 생각으로는 거의 ‘세상에 처음으로’ 내뱉은 농담이다. 농담의 기원이라 할 만한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배시시 미소 짓던 선생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제법인데, 하는 눈빛이었다고 너는 멋대로 생각한다.
오늘의 상담인원 역시 0이다. 두 달째 상담 신청자가 없다. 너는 창가에 놓아 둔 스킨답서스를 멍하니 보며 시간을 죽인다. 학생들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업무량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어려운 통계와 자료 분석, 세미나 기획 등 수많은 일이 날마다 네 눈앞을 막아서고 있다. 너는 강박적으로 다이어리에 일정을 정리하고, 몇 개나 되는 탁상달력과 빼곡한 포스트잇에 일정을 정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실에서 가장 많이 바라보는 것은 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식물뿐이다.
삼 개월에서 육 개월의 상담을 마치고 나면 학생들은 너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네 생각에는 그랬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카카오톡에서 수시로 안부를 주고받았고, 캠퍼스에서 마주치면 살갑게 다가왔다. 더러 간식거리를 사들고 상담실로 찾아오는 학생들도 있었다. 이번 학기 성적에 대한 고민, 진로와 관련한 고민, 연애 사정과 집안 문제로 인한 스트레스도 기탄없이 털어놓았다. 수십 번의 컨펌을 거쳤을 프로그램으로 짜여진 ‘공학적’인 상담 일정에서보다 훨씬 더 내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간혹 너를 ‘실장님’이라고 부르는 눈치 빤한 학생들은 “실장님, 근무 시간도 아닌데 이런 이야기 죄송합니다.” 하기도 했다. 어떤 의미로는 상담에 관련한 ‘사후관리’라 해도 틀린 건 아니었지만 네가 먼저 그것을 초과 근무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진심이었다.
아직도 일부 학생들과는 SNS 친구 관계를 유지 중이었고 더러는 너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렀다. 캠퍼스에서 얼굴을 아는 학생들과 마주칠 때면 그들이 먼저 밝게 인사하는 일도 여전했다. 그러나 이제 학생들은 개인적인 메시지를 보내오지 않았고, 더 이상 새로운 ‘친구 신청’이 들어오는 일도 없었으며, 어쩐지 우연히 학생들과 마주치는 횟수도 현저히 줄었다. 무엇보다 이제, 두 달 전부터는 공식적으로 등록되는 학생이 없었다. 일주일이 지났고, 이주일이 지났고, 그렇게 두 달째 상황이 고착되고 있었다.
“윤수지 선생, 힘내시라고. 오해는 풀리게 되어 있어.”
“나도 지금은 학생들 신임 잃었지만, 수지 선생 나이에는 따르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어쩌다가. 힘내시라고. 아직 위에서는 모른다지?”
위로로 가장한 놀림을 일삼는 학생처장과 마주하기 싫어 너는 외출도 삼가게 되었다. 업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올 스톱되니 일정의 전체적인 흐름이 망가졌다. 숱한 임상실습과 교수법 세미나에서 이런 경우를 한 번도 짐작해 본 적 없었다. 통계 프로그램을 쓰다 막혔을 때처럼 선배들에게 연락하거나 다른 교직원에게 해결방안을 타진하고 싶었다.
이수지 선생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대처했을까.
이수지 선생도 비슷한 실습 과정을 거쳤을 것이고 자신보다는 훨씬 더 현명하게 모든 상황을 맞고 보냈으리라 너는 생각한다. 너의 아버지처럼 이수지 선생도 결국 교수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학이라는 데가 오래 있을 만한 데는 못 되지 않느냐고 아버지는 늘 말했다. “그래도 너는 나보다 훨씬 먼저 박사가 됐다. 나이로 보면. 힘들면 그냥 때려치워. 네 능력에 어디든 못 가겠냐.” 그런 아버지의 말을 들을 때면 너는 조금 오싹해지곤 했다. “누굴 닮아 이렇게 멍청한 게 나왔지?” 하며 자신을 비난하던 포닥 시절의 아버지가 너무 생생하게 떠올라서였다.
너는 세면대 앞에 깔아 둔 신문지를 무심코 밟고 섰다 거듭 놀란다.
물에 젖어 여기저기 울어 있는 신문지, 학보에 학생들의 얼굴이 찍혀 있는 것 같다. 그것도 꼭 네가 아는 학생들의 얼굴만. 학생들의 화난 얼굴이 클로즈업 되어 있고, 꼼꼼하게 윤곽을 딴 얼굴 사진 옆에 커다란 말주머니가 달렸다. 거기 “우리는 가장 믿었던 곳으로부터 배신당했습니다”라고, 성나 보이는 새빨간 폰트로 적혀 있는 것 같다. 우리 대학 상담실 윤○○ 실장은, 이라는 문장도 보이는데 이름을 가려 봤자 어차피 너라는 걸 누구나 안다. 상담실을 전유하는 사람이 너였으므로. 인용된 너의 해명은 구태의연하고 모순적이자 무성의하며, 때문에 여느 어용교수들의 워딩 못지않게 악랄해 보인다. 너도 그런 교수들을 욕했다. 교수들에게는 굽실거리며 학생들에게는 함부로 대하는 교직원들이야말로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들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랬다.
너는 신문지로부터 발을 조심스레 뗀다. 너의 환상일 뿐이다. 네가 밟고 선 학보 15면에는 우리 학교 앞 맛집 베스트 5, 학교 앞 자취방 월세 비교하기 등의 생활정보가 가득했다. 그러나 분명 학생들로부터 직접 들은 말임을 너는 모르지 않는다.
“만약 그분이 저희를 배신하신다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장 믿었던 곳이야말로 우리의 등에 가장 먼저 칼을 꽂아 넣을 수 있는 곳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배신하신다면. 학생의 말은 가정형이었으나 이미 그렇게 믿고 있다는 걸 너는 안다. 이어지는 너의 해명은 네가 듣기에도 구태의연하고 모순적이며 무성의했고 누구 못지않게 악랄하다. 프로그램 방영이 끝난 후 여기저기서 전화가 걸려왔다. 너의 친구들은 분노했다. 그런 사악한 편집이 어디 있느냐며, 당장 방송국에 전화해 재방송 금지 처분을 요청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누구나 대학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금방 너의 이름을 알아낼 수 있으므로 심각한 명예훼손에 가까운 일이니 절대 좌시하면 안 된다고도 했다.
상담실로 기자가 찾아왔을 때, 너는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했을 뿐이었다.
학내를 뒤흔든 성폭력 사건을 너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상담학생들 중 몇은 바로 그 사건의 당사자라는 것도. 학생들이 너에게 가해자가 교수라는 사실까지 털어놓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전부 억울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너는 가해자가 교수일 수도 있다는 것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가해자가 부모인 경우, 가해자가 형제자매 중 하나인 경우. 그토록 가까운 인간들이 가해자가 되는 경우를 너는 모르지 않았다. 임상사례부터 해결방안까지 적합한 모형을 설계하고 적용했으며 배웠고 연구했고 가르쳤다. 그러나 너는 학생이 울면서 이야기하던 ‘악마’가 비록 가식적이었으나 언제나 친절했던 바로 그 교수이리라고 짐작하지 못했다. 미국에서 범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사회심리학 수업을 도맡아 하던 교수였다.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의 상담 내역을 절대 기밀로 관리하십니까?”
“선생님께서는 동료 교직원들과 얼마나 자주 교류하십니까?”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의 피해 사실을 인지하신 후 신고를 권유하셨습니까?”
그토록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선생에게 묻고 싶다고, 너는 생각한다. 나는 딱 한 번 TV에 출연했을 뿐이었는데. 자신에 관한 오해를 풀기는커녕 의혹을 증폭시키고 말았다. 이수지 선생에게 너는 정말 묻고 싶다.
선생님, 대체 어떻게 하면 오해받지 않을 수 있죠?


선생이 너에게 준 건 마음이다. 너는 항상, 선생이 너의 마음을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한다. 선생의 예쁜 손가락을 떠올린다. 선생은 커다란 곰 인형이 공을 안고 있는 모양의 USB를 건네줬다. 선생은 심리학과 박사 과정 재학생이었다. 컨설팅 아카데미의 모든 선생들의 프로필이 입구에 걸려 있었다. 선생의 증명사진을 너는 한참이나 들여다보곤 했다. 선생의 미모는 사진보다 실물로 보는 편이 훨씬 나았지만 선생의 눈을 똑바로 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선생 앞에서 너는 내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렇게 마주 앉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황홀해지는 여자의 애인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선생을 만나고 돌아온 날에는 하루 종일 특정한 향기가 맡아지는 듯했다. 섬유유연제 향에 가까운 특정한 향이었다. 어느 날에는 그 향기에 취해 선생이 말하는 것을 제대로 못 들었다. 선생을 알기 전에 너는 수재들만 간다는 그 학교 출신들은 전부 도수 높은 안경에 못생긴 줄로만 알았다. 실제로 아카데미 로비를 오가는 다른 선생들은 죄다 너의 편견에 부합하는 모습이었다.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그토록 후줄근한 옷차림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눈에 거슬렸다. 선생처럼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틀어 올린 여자도, 투피스 정장 차림에 힐을 신은 여자도 없었다. 죄다 무기력해 보였고 마른 입술을 달고 커피믹스를 들이켜는 그녀들의 몸가짐은 부주의해 보였다. 그녀들의 지저분한 운동화나 슬리퍼짝을 보며 매끈하게 올라붙은 복숭아뼈가 돋보이는 힐을 신은 여자가 너의 담당 선생이라는 것을 내심 뿌듯해하곤 했다.
“너는 윤수지구나. 나는 이수지야. 만나서 반갑다.”
선생이 네게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선생은 명함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낯선 이와 손을 나누는 일은 여전히 어려웠다. 너는 쭈뼛거렸다. 어머니가 옆에 있었다면 한번 쥐어박고도 남을 만한 상황이었으나 다행히 너와 선생 둘뿐이었다.
너는 그토록 몸가짐이 단정하고 지적인 여자는 난생처음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선생이 너에게 “수지는 나와 이름이 같을 뿐만 아니라 내가 고등학생일 적과 참 많이 닮은 것 같아.”라고 말하기까지 했을 때, 너는 몸 둘 바를 몰랐다. “나도 수지 너처럼, 안경을 썼었거든.” 선생은 빨간 입술을 앙다물었다. 선생의 아랫입술 위로 우윳빛 앞니 두 개가 올라탔다. 선생은 그렇게 자주 입술을 앙다물었고 볼에 바람을 넣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곤 했는데 너에게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여겨졌다. 너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선생의 그런 습관들을 잊지 못했다. 방송에 출연하는 선생을 보며 그런 습관이 아직 남았는지 유심히 관찰하기도 했다. 카메라 앞에 선 선생은 부주의한 습관들을 보이지 않았다.
선생을 처음 만난 고3 때 너는 날마다 죽기를 결심하고 있었다. 국제고등학교에서 너는 열등생에 가까웠다. 모의고사를 보면 전 과목 1등급을 받을 수 있었지만 내신 점수는 민망할 만큼 좋지 않았다. 입학식 날 신입생 대표로 ‘미래를 향한 나의 포부’를 낭독한 이후, 국제고에서는 아무도 너를 주목하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신입생 대표’가 너에게 주어진 영광의 끝이었다. 국제고에서 너는 빠르게 부진아로 분류되었다.
너는 다른 친구들처럼 날마다 CNN 뉴스를 시청하지도 않았고,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즐겨보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미국 소설도 재미가 없었다. 『나폴레옹 다이너마이트』나 『프렌즈』를 보고 낄낄대는 친구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공부를 못 하면 매를 맞고 비난받았기에 열심히 공부했을 뿐이었다. 국내 최초이자 전국에서 유일하게 ‘자기주도형 학습’을 한다는 국제고에서 너는 내내 어안이 벙벙했다. 야간자율학습과 기숙사 생활은 의무사항이었다. 학교가 신도시 외곽에 위치한 탓에 평일에는 학원이나 과외 수업을 받을 수 없었다.
너는 적응을 못 했다. 열심히 학원을 돌다가 밤늦게 할머니 집에 돌아가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한국에 혼자 남겨진 후로 너는 학원과 과외를 끊어 본 적이 없었다. 용돈은 넉넉했지만 너는 길바닥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문제집을 풀었고 엘리베이터 이동 중에 햄버거를 먹으며 끼니를 때웠다. 초등학생일 때부터 익숙한 일이었다. 생전 대중가요를 들어 본 적 없었고,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간 적도 없었다. 국제고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모여 앉으면 영어로 토론 따위를 했다. 『트루먼 쇼』나 『죽은 시인의 사회』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고, 제임스 조이스나 사뮈엘 베케트의 소설에 대해, 뷔욕과 콜드플레이에 대해 방담을 주고받기를 즐겼다. 부모나 교사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알아서 토론 같은 것을 하는 아이들이 너에게는 괴물 같아 보였다.
3학년이 되자 전부 수시 준비를 했다. 수능 성적만으로도 충분한 학생들이었지만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입시를 치른다는 걸 그들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해 새로 생긴 수시 전형은 외국에서 자란 아이들을 뽑아 가던 기존 특례입학과는 종류가 달랐다. 외국 체류 경험이나 어학 자격증, 전국 대회 수상경력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오직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된 교내활동과 내신 성적만이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네가 다니던 국제고는 입시 전형의 변화와 함께 신설된 학교였다. 1기 입학생인 선배들은 『하드보일드와 미니멀리즘 연구반』, 『알레고리와 필름 느와르 연구반』, 『야오이와 백합물의 대항 문화적 가능성 연구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적 연구반』 등의 특별활동 부서를 만들어 신입생들에게 가입을 권유했다. 너는 바둑반에 들어 특별활동 시간을 이수했다. 주동아리와 부동아리, 각종 스터디와 소모임에 가입해 어려운 책을 읽느라 고생하는 친구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교과 공부도 따라가기 벅찼다.
3학년이 되자마자 그간의 활발한 활동 기록을 토대로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 준비를 하는 친구들이 생겼다. 너는 생각해 보았다. 생활기록부 진로희망란에 아무런 생각 없이 ‘교수’라고 적어 넣었다. ‘교수’나 ‘기자’가 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부모의 꿈이었으므로. 그 즈음 아버지는 결국 국내 대기업의 연구원으로 취직하기로 결정하고 귀국을 준비 중이었다. 한국 대학에서 교수가 되는 것을 끝내 포기한 참이었다. 너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비웃어 보았다. 아버지는 실패한 거였다.
아버지가 귀국하면 당연히 어머니도 귀국하는 것이었다. 너는 어머니를 단 한 번도 기자라고 여겨 본 적 없었다. 여유 있는 교포들이 모여 만든 한인회 지역신문 따위는 네 눈에도 우습기 짝이 없었다. 한국 연예계나 국가 대항 축구 경기에 관련한 잡다한 소식 같은 걸 쓰면서 스스로를 기자라고 칭하는 어머니가 우스웠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미국에 갈 일도 없었을 거면서, 교수나 포닥 부인들과만 어울려 다니는 어머니가 부끄러웠다. 미국에 있는 어머니는 지역신문에 글쓰기를 소일 삼는다 해봤자, 할머니가 아버지의 타국 생활에 붙여 보낸 가정부일 뿐이었다.
그 말을 할 때 선생의 눈빛이 흔들렸다.
딱 한 번 선생이 집에 데려다준 적 있었다. 수업을 마친 후 선생은 자신이 운전하는 차로 함께 귀가하지 않겠느냐고 너에게 물어 왔다. 지하주차장에서 너는 앞장서 걸어가는 선생을 좇으며 할머니가 도끼눈을 뜨고 맞을 분당의 아파트가 아닌 선생이 혼자 산다는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늘만 재워 주시면 안 돼요? 미친 척하고 그렇게 말해 보고 싶었다.
아, 그렇게 생각하니. 어머니를. 그리고 아버지를.
신호에 걸려 차를 멈춘 선생은 운전대에 얹은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선생이 당황한 것 같았다. 마음속의 말을 털어놓은 너는 흥분감에 젖었다. “네. 저는 할머니도 싫지만 부모님은 더 싫어요. 그냥 안 보고 살아도 될 것 같아요.” 선생은 고개를 돌려 너를 봤다. “그래도 꽤 오래 떨어져 있고 아주 가끔만 뵙는데 그립지도 않니?” 너는 고개를 저었다. 선생은 한숨을 쉬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너만 들어온 거야? 미국에 계속 있었다면 한국에서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너는 선생의 질문이라는 걸 잊고 몹시 화가 난 듯 말했다. “아뇨. 저는 뉴저지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가장 불행했어요. 반에 한국 애들이 다섯 명이나 있었는데 우린 전부 멍청이들이었거든요. 당연히 말이 안 통하는데 바보 취급을 하면서 매일 벌점을 줬어요. 교실 바닥에 지렁이처럼 기어 다니면서 껌을 떼고 걸레질을 하라고 하는데, 엄마는 딸이 그런 취급을 받는지도 모르고 잘난 척이나 하고. 미국에서는 중학교까지 나와야 한다고 하고 말이에요.”
선생은 갑자기 박장대소했다.
“수지야, 중학교까지만 나와야 한다고 하신 거겠지. 그렇지 않니?”
너는 실소를 터뜨렸다. 선생과 너는 한참을 낄낄댔다. 너는 계속 선생의 집에 놀러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날이 어두웠고 복잡한 차선에 늘어선 차들은 성난 듯 빨간 헤드라이트를 켰다. 선생이 혼자 산다는 집은 어떨까. 독신녀의 보금자리는 어떤 모양새일까. 선생의 홈드레스를 빌려 입고 그녀와 라면을 끓여 먹으며 수다를 떨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서?분당 간 고속화도로는 시원하게 뚫렸다. 선생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이다. 혹여나 길 막히면 할머니께 죄송스러워서 어쩌나 했는데. 주말인데 일찍 들어가서 할머니 말동무도 해드려야지.” 너는 그 말이 왠지 이상하게 느껴져 웃음을 거두고 선생을 슬쩍 봤다. 너를 놀리는 것 같았다. 선생이 나를 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니, 불온한 생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와 너는 어느 정도 그 말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고 확신한다. 할머니가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서도 너는 선생에게 꽤나 자세히 털어 놓았었다. 선생과의 대화를 복기해 보면 당시의 너는 짐작도 못 했을 만한 의미심장한 말이 여럿 있었다. 너는 이제야 겨우, 선생도, 많이 지쳐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모든 것이 아르바이트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날 밤 차 안에서의 대화도.


너로서는 아직도 결코 짐작하지 못할 만한 것들이 많이 남았다.
당시 선생이 얼마나 가난했는지, 얼마나 병들어 있었는지 너는 결코 알지 못한다. 당시 선생은 스물아홉의 박사 과정 재학생이었다. 진작 선생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선생에게는 보증금 몇 백과 대학생인 남동생이 있었다. 선생은 남동생과 함께 원룸 월세를 살았다. 석사 과정 때 연구 조교로 일을 하고 받은 장학금을 교수의 강요로 반납한 후 학자금 대출 빚을 고리로 갚고 있었다. 선생은 옷도 화장품도 사지 않았다. 네가 본 정장이나 힐 같은 것은 전부 친구에게 물려받은 것들이었다. 아카데미에 올 때마다 몰고 오던 차량 역시 친구의 것이었다. 선생은 자신을 위해서는 학자금 외 한 푼도 쓰지 않는데 늘 허덕여야 하는 것에 진력난 상태였다. 지도교수가 자기 논문을 표절한 사실을 학보사를 통해 폭로한 후 선생은 사실상 대학원 커뮤니티에서 아웃된 상태였다. 교수들은 물론이고 동료 학생들조차 선생을 따돌렸다. 선생에게 말을 거는 자들은 수작을 걸어 보려 하는 치들뿐이었다. 선생은 자신이 교수의 총애를 받을 때는 말조차 걸지 않다가 이제와 수작을 거는 치들을 가슴 깊이 경멸했다. 박사학위를 받는다고 해도 가망이 없었다. 유학은 단 한 번도 꿈꿔 본 적 없었다. 너를 만날 때 즈음 선생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해 있었다. 컨설팅 아카데미에 프리랜서 컨설턴트로 계약을 하고, 학원이 물어다 주는 학생들을 관리하는 대가로 받는 돈은 고작 1인당 월 10만 원씩이었다. 너는 학원에 선생이 받는 돈의 20배 이상을 결제했고, 그 돈은 전부 너를 가르치는 단 한 사람인 선생이 고스란히 받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고 그 사실에 대해서 너는 지금도 모른다. 선생은 월 10만 원에 매일같이 너에게 전화를 걸어 기분을 묻고, 일주일에 한 번씩 너를 만나 상담을 하고, 논문과 칼럼을 복사해 주고, 전공지식에 대해 강의해 준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컨설팅 아카데미에서의 일을 괴로워하지 않았다.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아르바이트라 다행이라 여겼을 뿐이었다. 그 시기의 선생은 다만 처방받은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었고, 겨우 잠든 후에는 심한 이갈이를 해서 치아가 마모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평소에도 수시로 이를 악무는 습관이 있었는데 때문에 늘 못 견딜 정도로 턱이 아팠다. 네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모습, 선생이 종종 볼에 바람을 넣고 이리저리 흔들었던 까닭은 턱이 곧 깨질 듯 아팠기 때문이었다.
너는 듣거나 보지 못했겠지만, 선생은 종종 혼잣말을 했고 즐거운 상황들을 강박적으로 상상하다 히죽 웃곤 했다. 아카데미가 있는 동네를 벗어나면 선생은 고삐 풀린 것처럼 행동했다. 집 앞 카페에 앉아 공부를 할 때 증상은 심해졌다.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콧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후비는가 하면, 아이처럼 손가락을 빨아대기도 했고 머리카락을 뽑기도 했다. 선생은 어느 정도 자기 행동을 자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상습적으로 구타를 당하던 때 그랬던 것처럼 일종의 틱 증상 비슷한 것이 오고 있다는 것도 물론 느끼고 있었다. 선생은 애써 자기 행동을 고치려 들지 않았다. 대학원생으로서, 시간강사로서, 입시 컨설턴트로서의 자신과 그 외의 자신을 구분하는 것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선생은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고 그런 자신을 들키지 않는다는 것에 일종의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만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내게는 요즘 심각한 문제가 있어. 임상적으로.”라고 가볍게 털어놓았을 뿐이었다.
선생은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을 싫어했고 자신이 다름 아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선생은 교수를 꿈꾸지 않았다. 언제까지 될지 모르겠지만 어디서든 일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러 지역의 대학을 떠돌며 강의하는 시간강사여도 좋았고 운이 풀려 상담센터의 슈퍼바이저로 자리를 잡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많은 이들이 노리고 있으며 결코 쉬운 길이 아니라는 것도 선생은 잘 알고 있었다. 선생은 윤수지 학생의 아버지 사례를 들으며 그에게 교수가 되고자 하는 오랜 노력이란 일종의 취미생활에 가까웠으리라고 판단했다. 자신은 그런 짓을 할 수 없었다.
선생은 너를 만난 당시 박사 논문 계획서를 거의 완성한 상태였다. 그러나 선생의 고발로 정직 징계를 받은 지도교수를 대신해 새로운 지도교수를 맡아 줄 사람은 없었다. 지도교수가 반드시 선생의 세부 전공인 성격심리학 교수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선생은 이대로 학교를 그만두게 되는 일을 상상했다. 뭐라도 해서 먹고살 수 있을까? 동네 보습학원 강사라도 하면 되는 걸까? 그렇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으며 감당하리라는 각오를 했다. 표절 교수가 정직이 된 후 학부생들이 선생에게 몰려와 항의를 했다. 이번 학기에 꼭 들어야 하는 수업이었는데 선배님 때문에 다 망쳤다고, 학생들은 삿대질을 하며 선생에게 항의했다.
윤수지 학생의 진로 계획을 설계하던 때도 꼭 그때 즈음이었다. 선생은 너 말고도 여럿 학생들의 진로 계획을 손수 설계했다. 영문과, 철학과, 사회학과, 신문방송학과 등 다양한 학과를 추천했지만 정작 심리학과를 추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선생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분과이자 세계였지만 선뜻 안내할 수 없었던 터였다. 자기가 걸어온 길을 추천하지 않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걸까. 선생은 컨설팅 아카데미에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선생은 너를 만날 때마다 다수의 기획기사를 복사해 주었다. 선생은 너에게 기사를 꼼꼼하게 읽고 내용을 요약한 후 낯선 어휘와 개념을 찾아 숙지하고 느낀 점을 쓰게 했다. 선생이 주는 기사는 주로 촉법소년에 관련한 것이었다. 너는 너보다도 어린 수많은 아이들이 학교가 아닌 현장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공장이거나 공사장이거나 성매매 집결지거나, 그러한 노동 현장은 곧장 범죄 현장이 되었고, 어떤 아이들은 일찌감치 소년수가 되었다. 선생은 상담심리를 전공한 후 소년원에 가서 아이들을 상담하는 교정 심리학자가 되라고 너에게 말했다. 너에게는 교수나 기자 같은 부모의 꿈과는 다른 구체적이고 명확하며 의미 있는 직업으로 여겨졌다. 너는 진로희망란에 새로운 장래희망을 적었다. 희망사유도 선생이 불러 준 대로였다. 사람과 사람들 간의 관계에 관심이 많아 심리학이라는 학문에 관심이 생겼고 범죄를 다룬 신문기사와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범죄자를 인간학적인 폭넓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함. 단죄와 처벌보다는 교정을 통한 사회 복귀에 관심이 있음.
선생은 3학년 1학기를 막 시작하는 너에게 두 개의 소모임을 창설할 것을 지시했다. 너는 선생의 말대로 또래상담 모임과 탐사보도 저널리즘 연구회를 창설했다. 담임교사는 이제야 부랴부랴 준비한다며 한심하다고 했다. 국제고 소모임 창설 조건은 연구계획서와 네 명의 학생이면 충족할 수 있었다. 담임교사는 네 흉을 입에 달고 살면서 여러 학급을 돌아 소모임 멤버들을 모아 주었다. 너와 같은 심리학과 지망학생이 있었고, 사회학과와 신문방송학과를 지망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선생은 연구계획서뿐만 아니라 상담 팁과 토론 주제, 방향도 만들어주었고 결과보고서도 손 봐 주었다. 너는 선생과 함께 분석한 촉법소년 관련 기획기사들을 참고해서 소논문을 작성했다. 너는 불행한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불행한 아이들을 불쌍하게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생활기록부와 너의 마음이 함께 만들어졌다. 너는 다른 아이들처럼 수시에 지원했고 자기소개서와 면접에 이르기까지 선생의 관리를 받았다.


멀지 않은 과거 너는 선생이 집필한 에세이를 구입했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것을 읽었다. 제3장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사거리는 항상 기묘한 느낌을 주었는데, 재개발을 목전에 둔 옛날식 아파트들과 신축 빌딩이 혼재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게도 그 아파트들은 익숙한 터, 유치원 다니던 시절까지 그 동네에 살았다. 금방이라도 하얀 칼라에 남색 원피스를 입은 여고 언니들이 곁을 지나갈 것 같다. 그러나 어린 시절이 아닌 지금, 내가 입장해야 하는 곳은 지하 5층에 지상 10층짜리 신축 빌딩, 한 층에 대여섯 개씩 각종 학원이 임대하고 있는 대형 입시 빌딩이다. 왜 저 엄마들에게는 시간이 넘쳐나는 걸까. 당최 가능성도 없는 자식을 데리고 여기저기 입시설명회를 다니느라 쓰는 주유비가 아깝다. 당시의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했다. 흔히 볼 수 있는 ‘엄마’의 모습은 이렇다. 탈모가 진행되어 숱 없는 머리카락을 질끈 묶었고, 푸석한 맨얼굴인데 가방과 신발은 전부 명품이다. 그 모습이 기묘했다. 나는 엄마들의 좋은 차가 아까웠고, 그녀들의 명품 가방이 아까웠다. 그녀들이 빌딩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볼 때 어떤 생각을 하는지 대강 알 수 있었다. 손목시계며 가방이며 구두며 전부 싸구려를 했구나. 너는 학벌 좋은 가난뱅이구나. 그래서 여기 출입하는구나.
두서없이 쏟아내는 선생의 회한에서 너는 너에 대한 경멸을 읽었다. 선생이 어떤 마음으로 너를 만났을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모자이크 처리된 얼굴과 변조 처리된 음성, 너의 것이다. 너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대사를 곱씹는다.
제가 어떻게 일일이 기억하겠습니까. 학생이 한둘도 아니고 업무일 뿐입니다.
그런 말이야말로 학생들을 화나게 했을 것이다. 너는 결백을 주장하려 진심을 이야기했으나 학생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상담실장 자리를 잃게 될 수도 있다고 너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리라는 생각은 쉬이 들지 않았다. 센터명과 프로그램을 수정하거나 한 학기 혹은 두 학기 휴직한 후 다시 상담을 재개하면 되지 않을까. 너는 최악의 경우를 상상했다. 상담실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는 걸까. 단지 학생들의 오해 때문에. 대학이라는 곳은 오해와 소문에 민감했고 사립대학의 직원들은 그야말로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너는 온갖 잡다한 이유로, 혹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일자리를 잃은 경우를 수없이 보고 들었다. 개강을 일주일 앞두고 수업을 잃은 시간강사. 십 년간 형식상의 재계약을 이어 오다 돌연 ‘계약 해지가 아니라 재계약을 하지 않을 뿐’이라는 이유로 해고 통보를 받은 교직원들. 이 년에 한 번씩 짐을 싸는 미래를 빠르게 마주한 비정년 트랙 교수들. 너의 선배들이자 친구들이었다.
나도 그들처럼.
너는 과거 선생과 함께 불행한 아이들을 공부하며 끊임없이 불행에 대해 상상했었다.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을 가까이에서 취재한 기자들은 불편할 정도로 생생한 목소리를 전해 주었다. 선생이 준 첫 번째 기사를 읽고 난 후 너는 이렇게 적었다. 가출한 아이들은 인내심이 부족합니다. 부모의 양육을 거부했다는 것은 스스로 세상의 보호를 거부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 역시 부모님과 할머니의 억압 속에 살고 있지만, 아파트 난간에 서서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지만 참고 견뎠습니다. 꾹 참고 견뎠기에 탈선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가정환경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참고 견뎌야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아이들은 인내심이 부족하여 정글 같은 세상에 던져진 것입니다.
선생이 너의 앞에서 네가 쓴 글을 읽어내려 갈 때 너는 긴장했다. 단어와 표현에 문제가 있거나 비문을 썼다고 지적받을까 봐 걱정했다. 선생의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선생은 안경을 벗고 너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용과 상관없이 문장은 좋구나.”
그런데. 선생은 언성을 높였다. 덧붙이는 선생의 말은 너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던 지적이었다. 선생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너를 꾸짖었다. 너는 사회구조와 타인에 대한 이해도 부족할뿐더러 최소한의 아량마저 없다. 그런 생각으로는 범죄자를 인간학적인 맥락에서 이해한다는 말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집에 가서 기사를 꼼꼼하게 읽고 그들이 왜 그래야만 했을까를 생각해라. 그리고 이해하려고 노력해라. 스스로의 삶을 불행하다고 여기는 것은 자유지만 훗날 너는 네 생각을 부끄럽게 여기는 날을 맞게 될 것이다.
너는 단 하나의 문장을 씁쓸하게 떠올린다. 그러나 참고 견뎌야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열아홉의 네가 스스로에게 건 일종의 주문이었다. 선생이 보기에는 가소로웠을 것이다. 너도 네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고 있다. 이만큼 참고 견딘다, 는 자만과 앞으로도 참고 견디려고 애쓸 것이다, 라는 각오가 뒤섞인 문장이다. 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한참 동안 분당의 할머니 집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때도 너는 과거의 어리석은 문장들을 반복해서 떠올렸다. 그래서 지금 자유를 얻었나. 너는 지금 다시 생각한다.
나는 참고 견뎠나. 그래서 자유를 얻었나.
선생이 마지막으로 준 기사는 『확대된 수시 전형: 공교육 정상화인가, 현대판 음서제인가』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너는 그때까지만 해도 의도를 짐작하지 못했다. 수시에 지원하기 위해 관리를 받는 것은 영어, 수학 과목의 점수를 올리기 위해 과외를 받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선생을 만나지 않았다면 너는 처지를 비관해 자살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선생은 네가 얼마나 가진 게 많은 줄 아니, 라는 말로 너를 부끄럽게 했다. 부끄러움은 절망을 잊게 했다. 위태로웠던 고3의 너를 진단하고 처방했으므로 컨설팅 아카데미는 일종의 클리닉이었다. 선생 자신도 몸담고 있으면서 수시 제도를 ‘현대판 음서제’로 비유해 비아냥대는 기사를 읽히는 까닭을 너는 이해할 수 없었다.
윤수지 학생, 너는 네가 얼마나 멍청했는지 알아야 해.
선생의 얼굴로 학생처장의 얼굴로 2014년 1분기 A학생의 얼굴로 2분기 B학생의 얼굴로, 주눅 들어 처장의 사무실에서 쫓겨 나오던 학보사 기자의 얼굴로, 너를 취재하던 기자의 얼굴로, 금수저 물고 태어났으니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지 않느냐고 다그치던 사람들의 얼굴로 집행되는 대사다. 대사가 떠오르려고 할 때마다 너는 거기서 도망치려고 했다. 언제든 선생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지금 앉은 자리가 너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란 어려웠다.
너는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한다. 학생들은 너를 오해하고 있다. 학생들은 너와 범죄학 전공 P교수가 결탁해서 사건에 대처했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네가 학생의 상담 내역을 유출했거나, 최소한 허술하게 관리해서, 그중 한 학생의 신경정신과 병력을 P교수가 입수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생각한다. P교수는 학생의 병력을 이용해서 자신은 억울하게 모함을 받는 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너는 상담실로 찾아온 기자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했다. 2014년 1분기부터 4분기까지 내내 상담을 받아 온 J학생이 털어놓은 학내 성폭력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 학생은 내게 상세하게 사건의 전말을 털어놓았다. 당연히 신고를 권유했으나, 학생의 자유에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P교수와는 물론 선후배 관계지만, 비밀을 털어놓을 만큼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상담 내역을 유출할 만큼의 관계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내게도 책임이 있다. 학생이 말한 가해자가 바로 그라는 것, 아니 교수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이다. 나는 학생이 말하는 끔찍한 인간과 선배인 P교수를 연결시킬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만약 그가 P라는 것을 알았다면…….
너는 스스로에게 다시 묻는다. “만약 그가 P라는 것을 알았다면?” 기자에게는 얼버무렸지만 자신에게는 답할 수 있다. 그와 친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겠지. 네 이름으로 학보에 자유 원고를 투고해서, 에둘러 P교수의 각성을 촉구했을 것이다. 너는 거짓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 본 적도, 그런 소문 때문에 인생을 걸고 노력한 것을 한순간에 잃어 본 적도 없었다. 지금 너는 거짓 소문 앞에 서 있다. 자기 삶이 결코 쉬이 불행해지지 않으리라는 확신과 뒤늦게 세간의 오해를 뒤집어쓰고 삶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 사이에 있다. 이 확신과 저 불안이 모두 명료해서 너는 당황스럽다.


너는 재떨이로 사용한 화분을 일별한다. 없던 것이 보인다. 담배꽁초가 섞인 배양토를 뚫고 허연 버섯들이 자라 있다. 세면대 밑에 함부로 두었더니 습기가 찬 모양이었다. 어젯밤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가장 잘 자라 둥근 머리를 내민 버섯을 들여다본다. 표면의 결이 촘촘하다. 화분을 받친 손의 미세한 떨림 때문에 버섯 줄기가 파르르 흔들리는 것 같다. 더러운 것이 증식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몹시 역겨워진다. 동시에 문득 강낭콩이 자라나 떡잎 사이로 본 잎을 틔우던 모양이 생각난다. 출근할 때마다 오늘은 얼마나 자랐을까 기대하며 화분을 들여다보곤 했다. 내 손에서 뭔가 자라나고 있다는 생각에 들떴고 뿌듯했던 그때를 떠올린다. 그것과 이것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너의 머릿속을 스친다. 너는 곧 생각하기를 그만둔다.



작가소개 / 박민정(소설가)

- 1985년 서울 출생, 2009년 《작가세계》로 등단. 소설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가 있음.



《문장웹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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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박솔뫼 어느 날 아침 애리는 자신이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시간을 보내왔음을 알았다. 일을 하러 가는 길이었고 이곳에 이사와 이 열차를 탄 것은 1년 7개월째였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이일 때 모든 것이 멈춰 서 있고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던 때부터 탈 것에 올라타 멀어지는 집과 나무들을 보아 왔다고 느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텐데 왜 그제야 그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진 것일까. 어딘가로 향하는 감각과 함께 창 너머 공터와 집들과 골목들을 실제로 걷는 일은 왜인지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느껴지고 언제까지나 좌석에 앉아 멀어지는 사람과 집들과 빨래와 커튼을 보고 있을 것 같다. 애리는 사원 숙소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 그만두고 나와 집을 구해 살다 사회복지와 개호 관련 자격증을 따고 이후에는 자격증과 상관없는 일을 몇 년을 하였다. 그러다 역시나 숙소를 제공하는 지금의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회사는 큰 항구가 있는 대도시와 인접한 소도시에 있었고 숙소는 회사 직원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곳이었기 때문에 회사와는 아주 가깝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예전 회사는 숙소에서 회사까지 걸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 회사에 가기 위해서는 숙소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역으로 가서 다시 20분가량 열차를 타야 했다. 숙소 앞에서 버스를 타는 방법도 있었고 버스를 타는 것이 여러모로 더 편했지만 버스는 늘 같은 회사 사람들로 붐볐고 앉아 가기가 힘들어서 애리는 보통 열차를 탔다.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자 곧이어 오랜 시간 기숙사에서 공동 부엌에서 공용 생활공간에서 얼굴만 익숙한 사람들과 살아왔다는 사실이 마치 연결된 문제처럼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둘은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 마음을 먹자면 살 곳을 구해서 혼자 사는 것이 가능했던 것도 같지만 애리는 왜인지 그럴 마음을 쉽게 먹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공동 숙소에서 사는 것이 부끄럽거나 괴롭지는 않고 돈을 아낄 수 있고 여러모로 편리한 점도 많았지만 혼자 살 집을 찾아 오래 쓸 가구를 사는 일에 겁을 먹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창은 여전히 흔들리고 창밖으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가 보인다. 공터 구석에서는 무언가 야채 같은 것을 심는 것도 같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없는 공터. 도시 어느 한구석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는 드물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은 누군가의 넓은 방과 책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가도 애리는 동시에 이것저것 모든 것을 한 번에 버리고 어딘가로 금세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것이 실제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지금 생활은 지금 생활대로 좋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텅 빈 방 (떠올려 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것을 원하는 마음은 원하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곳에 확실하게 붙여 두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텅 빈 방의 모습이

  • 관리자
  • 2025-07-01
알고 싶습니다

알고 싶습니다 최재영 가끔 인생이 내게 애벌레가 파먹는 중인 사과를 베어 물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토요일 저녁 아홉 시 뉴스에선 오늘도 전 세계 기아들이 굶고 있고 남미 쿠데타 정부의 진압 몽둥이에 시민들이 맞고 있으며 전장의 포탄은 군인과 민간인들을 죽인다. 그러나 우리 집 안방엔 세 살 연상 아내와 세 살짜리 딸이 곤히 잠들어 있다. 비록 내일이면 공룡 박사 딸은 파키케팔로사우루스 흉내 내며 내 턱에 박치기를 날릴 것이고 아내는 원시인 사냥꾼처럼 괴성을 지르며 딸을 쫓을 것이지만··· 서른여섯 살의 나는 대한민국 성남시의 아파트에, 지금 여기에, 우리 세 가족과 잘 있고, 그것참, 다행이다. 내가 베어 문 사과 반쪽에 벌레가 없어서. 뉴스에 어느 북한군이 등장한 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장이었다. 한 북한군이 부상 때문에 낙오했는지 홀로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다. 러시아 것인지 우크라이나 것인지 모를 드론이 공중에서 그를 촬영하고 있었다. 곧 드론은 부드럽게 수직 하강하며 그에게 다가갔고 그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쓰으윽- 줌인 됐다. 뉴스 진행자와 패널들이 호들갑 떨었다. “너무나 리얼합니다!” 무슨 아는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오바하네. 나는 그들의 반응에 코웃음 치며 손에 든 캔맥주를 쓰으윽- 들이키려다, 멈칫했다. 아는 사람 같았다. 낯이 익었다. * 약 15년 전 여름, 나는 백령도에 주둔한 해병대 6여단 영창에 15일간 구금되어 있었다. 죄명은 후임 폭행이었다. 막 상병이 됐을 때 생긴 일이었다. 영창의 개인 감방에 들어서자 정말이지 감옥처럼 생겨서(정말 감옥이긴 했지만) 울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커덩 자물쇠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스물한 살에 인생이 망해 버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감방 철창 너머론 건물의 입구와 헌병 하나가 근무하며 감시하는 공간이 보였다. 그 공간을 기준으로 네 개의 감방들이 반원을 그리며 각각 1호 창, 2호 창, 3호 창, 5호 창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다(4호 창은 없었다, 해병대에선 숫자 4를 쓰지 않으니까). 나는 3호 창에 수감됐다. 감방 안에 앉아 있으면 보이는 건 꾹 닫힌 건물 문, 그리고 중앙의 그 헌병밖에 없었다. 양옆의 다른 감방들은 시야에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1호 창과 5호 창에도 수감자가 한 명씩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단 2호 창만은 비어 있다고 했는데 폭행 사건이 일상적이라 항상 미어터지던 백령도 해병대의 영창에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중에 듣기론 당시 북쪽 상황이 심상치 않아 각 부대들의 징계 절차가 보류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감방 안은 어두컴컴하고 축축했다. 폭은 누워서 다리를 뻗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화장실은 따로 없었다. 안쪽으로 세 걸음 가면 구석에 수도꼭지를 비롯해 쪼그려 앉아 일을 보는 일명 고무신 변기가 있었다. 무릎 정도 높이의 아담한 담만이 가림막을 해 주었다. 큰 것이든 작은

  • 관리자
  • 2025-07-01
프레살레

프레살레 반수연 홍은 미로처럼 이어진 길을 솜씨 좋게 빠져나갔다. 홍을 놓칠세라 일행들은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공항은 번잡했다. 챙이 넓은 홍의 검은색 모자는 인파 사이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했다. 모자가 사라질 때마다 짧은 불안이 스쳤다. 우리 중 누구도 파리에 처음 오는 이는 없었다. 정아는 작년 패션 위크에도 왔다고 했다. 하지만 출구로 빠져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홍을 만난 순간, 홍이 웰컴 투 패리스, 라며 환하게 웃던 순간,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라며 농담과 카리스마가 뒤섞인 환영 인사를 건네는 순간, 홍은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깃발이 되었다. 몇 개의 건물과 긴 복도를 통과해 홍이 예약해 둔 렌터카 사무실에 도착했다. 미리 맡겨 두었다는 홍의 짐이 사무실 모퉁이에 쌓여 있었다. 각지고 거대한 두 개의 캐리어, 명품 마크가 선명한 가죽 배낭과 보스턴백, 두 개의 쇼핑백도 포개져 있었다. 캐리어 계의 에르메스라는 바로 그 리모와 아닌가요? 색깔 너무 이쁘다. 이삿짐을 떠올리게 하는 홍의 짐에 약간의 충격을 받은 나와는 달리 정아는 레몬색 캐리어에 먼저 관심을 보였다. 자기야, 그건 좀 그렇지 않아요? 에르메스야 버킨 말고는 뭐가 있나. 홍과 정아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며칠 전 정아가 단톡방에 올린 메시지를 떠올렸다. 유럽 항공은 수하물 분실이 잦으니 위탁 수하물 없이 기내용 캐리어와 작은 손가방으로 짐을 제한해요! 정아는 해당 항공사의 기내 반입 수하물 규정을 캡처해서 올리며 당부했다. 같은 옷을 이틀 연달아 입거나, 옷과 콘셉트가 맞지 않는 신발이나 가방을 견디지 못하는 예민한 패션 감각의 소유자인 정아가 분실이 두려워 그런 제안을 한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정아는 홍의 짐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아가 홍을 위해 우리 짐을 단속했다는 사실보다 진실의 내막을 뒤틀었다는 것이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독일제 7인용 SUV 차량의 마지막 3열을 접어 트렁크의 공간을 넓혔다. 홍의 캐리어를 먼저 싣고 그사이에 네 개의 기내용 캐리어를 테트리스 하듯 넣었다 뺐다 씨름하느라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어찌어찌 짐을 욱여넣고 나니 트렁크는 룸미러로 후방이 보이지 않을 만큼 꽉 찼다. 배낭이나 손가방은 발아래에 두거나 안고 타면 될 거라고 홍이 운전석으로 올라타며 말했다. 나는 노트북과 파우치와 책이 담긴 배낭을 가슴에 안고 뒷좌석에 올라 안전띠를 당겨 맸다. 짐과 사람이 뒤엉켜 숨 쉴 공간마저 충분치 않게 느껴졌다. 답답함이 불안으로 바뀌며 숨이 가빠 왔다. 다른 일행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프로작을 한 알 꺼내 입에 물고 창을 조금 열었다. 약기운이 신경을 눌러 주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파리는 오전 열한 시, 한국은 오후 여섯 시였다. 지금쯤이면 윤수는 일어났을 것이다. 냉장고 제일 위 칸에 김치찌개 있어. 냉동실에 육개장도 얼려 두었어.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나는 신발을 신다 말고 식탁에 앉아 짧

  • 관리자
  • 202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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