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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몸의 회화

  • 작성일 2017-10-01

[비평in문학]




<새로운 시대, 문학의 키워드>

‘여성, 노동’같은 전통적인 주제에서 시작해 ‘문체, 주체’와 같은 비평 키워드나 ‘번역, 상호텍스트성’같은 문학적 키워드, ‘환상, 무의식’같은 인접학문 그리고 ‘빅데이터, 가상현실’같은 미래용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학의 키워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비평in문학]의 새로운 비평 기획입니다.




나혜석, 몸의 회화



홍지석





폭풍우가 지나갔다. 맑은 하늘빛이 들 때 그에 비치는 산수초목은 얼마나 명랑한가. 다시 엄동이 닥쳐왔다. 백설은 쌓여
은세계가 되고 말았다. 저 수평선에 덮인 백설은 얼마나 아름답고 결백하고 평화스러운가. 그러나 그것을 헤치고 빛을
보자. 얼마나 많은 요철굴곡이 있는가?(나혜석, 1932)1)




나는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의 글을 좋아한다. 특히 나혜석이 쓴 감각적인 글들, 그러니까 자기 몸의 경험을 묘사한 글이나 본업이었던 화가로서의 경험을 담은 글들이 좋다. “빛의 요철굴곡”이라는 표현은 얼마나 참신한가! 나혜석의 글에서 몸의 경험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생생한 표현들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이 작가의 매력은 그림에 대한 묘사에서 빛을 발한다. 읽으면 곧장 기분이 좋아진다. 글쓴이가 아주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쓴 글이어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화가 나혜석이 자랑스러워했던 걸작 회화작품들은 지금 거의 모두 없어진 상태다. 당시 도록이나 신문에 그 그림들이 흑백도판으로 실려 있는데 역시 흑백사진으로는 원작의 느낌을 되살리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렇게 사진으로 남아있는 작품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런대로 작품들의 매력을 감지할 수 있다. 그 흑백도판들을 나혜석이 직접 쓴 감각적인 글들과 함께 읽으면 화가 나혜석의 진정한 개성과 매력에 조금이라도 근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 나혜석,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歐米漫遊하고 온 後의 나」, 『三千里』 1932. 1, 전집, p. 490.


나혜석 <가을의 정원(秋의 庭)>, 1924
[caption id="attachment_139821" align="aligncenter" width="400"]김용준 <남산풍경>, 1931
(도판출처: 『동아일보』 1931년 4월 21일)
[/caption]



화가의 감각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도록』(1924)에는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의 <가을의 정원(秋의 庭)>이 실려 있다. 이 작품은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입선작이다. 아쉽게도 원작이 사라져 지금은 흑백 도판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을 당신이라면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아무래도 “너무 빽빽해서 답답하게 느껴진다”고 말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가을의 정원>을 두고 “시원시원하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제목이 말해주듯 이 작품은 ‘가을의 정원’을 그린 풍경화인데 그것을 이 화가는 대상(가을의 정원)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상태에서 그렸다. ‘정원 밖’에서 그린 것이 아니라 ‘정원 속’으로 들어가 그렸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화가는 절대로 “여백이 충만한” 시원시원한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대신 나혜석은 정원 가까이에서, 또는 정원 속에서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들을 그렸다. 따라서 여기에는 세부의 질감, 감각적 활기가 넘친다. 근원 김용준(金瑢俊 1904~1967)이 1931년 동미전(東美展)에 출품한 <남산풍경>을 비교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의 풍경화를 쏙 빼닮은 이 그림은 멀리서 본 남산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의 ‘남산 풍경’은 확실히 나혜석의 풍경에 비해 “탁 트인” 시원한 전망을 제시한다. 하지만 나혜석의 <가을의 정원>은 김용준의 <남산풍경>보다 좀 더 감각적이다. 생기가 넘친다. 이 화가가 가까이에서 자기 몸으로 직접 감각한 것들을 그렸기 때문이다.


나혜석 <봉황성의 남문>, 1923
나혜석 <지나정>, 1926

이 무렵 나혜석이 그린 작품들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도록』에는 <봉황성의 남문鳳凰城의 南門>이 실려 있다. 이 해에 조선미술전람회 4등상을 받은 작품이지만 역시 지금 흑백도판으로만 남아있다. <봉황성의 남문> 역시 <가을의 정원>과 마찬가지로 화가와 대상의 거리가 아주 가깝다. 아마도 나혜석은 건물 벽면에 바짝 다가가 그 벽면을 실제로 보았을(만져봤을) 것이고 그 생생한 경험을 그림에 담고자 했던 것 같다. 봉황성 남문 벽면의 생생한 질감은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림은 답답해졌다. 대상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나머지 눈은 쉴 틈을 찾을 수 없다. 이쯤해서 틀림없이 답답하다며 이 그림을 내칠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서 말이다. “역시 그림에는 시원한 여백이 있어야 해!”
그런데 1920년대 초반 나혜석은 식민지 조선화단의 주목을 독차지했던 최고 수준의 역량있는 화가였다. 그런 화가가 자신이 그린 풍경화가 사람들에게 답답하게 보일 수 있다는 걸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나혜석이 대상에 그토록 가까이 다가가 거기서 본 것들을 그려야 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시원한 여백을 포기하면서까지 얻고자 했던 뭔가가 있었을 거라는 말이다.



달큼한 맛_내 몸으로 직접 만난 세계


왜 나혜석은 풍경화를 그릴 때 그렇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풍경에 바짝 다가가야 했을까? 나혜석이 1926년에 그린 또 다른 풍경화가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지나정支那町>이라는 풍경화다. 이 작품은 만주의 지나정(支那町), 곧 사람들로 북적이는 '차이나타운'을 그린 풍경화인데 역시 원작은 사라지고 흑백도판으로만 전한다. 이 작품은 앞에서 본 <봉황성의 남문>(1923), <가을의 정원>(1924)과 마찬가지로 관객에게 여백이 거의 없는 빽빽한 풍경을 선사한다. 나는 거기서 “갑갑하다”랄까 아니면 “정신없다(시끄럽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은 아무래도 그림 안쪽 저 너머의 건물들과 나 사이에 있는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들 때문에 나는 찬찬히 풍경을 관조할 수 없다. 차라리 그 북적이는 분위기에 휩쓸려 있는 것 같다.
이 그림은 나혜석이 ‘지나정’ 한복판에서 그린 것이다. 실제로 나혜석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이 그림은 “지나(支那) 기분이 충만하여 있는 시가” 또는 “술집패가 남색, 홍색 합한 것이 주렁주렁 매달린 것”에 이끌려 그리게 된 작품이다. 물론 사람들로 북적이는 지나정 한복판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쉬울 리 없다. 그 험난한 과정을 나혜석은 이렇게 묘사했다.


어떻든 하루 아침 12호에다가 그리기를 시작하였다. 과연 콧물 눈물 흘린 아이들로부터 암내가 쏟아져 나오는 중국 노동자들이 삽시간에 우리를 짓는데 정신이 아득하여졌다. 게다가 만주의 명산(名産)인 바람이 휙휙 지나가자 마차 바퀴에 튀어 오르는 흙먼지가 쏵쏵 불어들어오면 한참씩 눈을 감았다가 뜰 때도 있었다. 나중에는 입에서 모래가 썰컹썰컹 씹히고 코에서는 말똥내 쇠똥내가 물큰물큰 나온다. 이렇게 오전 9시에서 10시까지의 광선으로 3일간을 겨우 대강만 사생해가지고 더 다니기가 너무 끔찍스러워서 더 못가고 세세한 것은 집에서 고치고 만들고 하였다.2)


이 묘사는 매우 감각적이다. 이렇게 풍경 “속”에 있으면 풍경 “밖”에 멀찍이 떨어져 있을 때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을 느낄 수 있다. 나혜석은 오로지 대상 속에서 대상과 더불어 있을 때만 “달큼한 맛”3)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 달큼한 맛을 느끼려면 결국 그 속에 들어가야 했다. 오로지 거기서만 맡을 수 있는 끔찍한 냄새들이 고통스럽기는 했으나 그녀는 그 달큼한 맛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나혜석의 말대로 “호가호식에 편한 거처에서 일생을 괴로움 없이 지내면 그 무엇에 유쾌한 맛을 볼 수 있을까?” 결국 나혜석이 대상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건 자기 몸으로 그 대상과 만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혜석은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귀로 듣고, 자기 코로 냄새 맡고 자기 손으로 만지고 싶었기 때문에4)풍경에 아주 가까이 다가갔던 것이다.


2) 나혜석, 「美展 出品 製作 中에」, 『조선일보』 1926년 5월 23일, 나혜석기념사업회, 서정자 편 『원본 나혜석 전집』, 푸른사상, 2013(이하 전집) p.488.
3) 나혜석, 위의 글, p.562.
4) 그 자리에서 몸의 감각들은 서로 통하는 경향이 있다. 시각과 촉각, 시각과 후각이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나혜석이 『신여성』 1924년 7월(전집, p. 273)에 발표한 「만주의 여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까만 얼굴 속에서 눈알만 번쩍거리는 중국 노동자가 두 팔을 쫙 벌려서 흙부대를 잔뜩 실은 외바퀴 차 자루를 쥐고 …찌걱찌걱 끌고 간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비오듯 하고 그의 두 팔의 힘줄은 있는대로 뚜렷이 나타난다. 아아 더워. 그 삐걱삐걱하는 무겁고 괴롭고 강한 소리만 들어도!”



흐늘거리는 시대의 신경을 죄여줍시다


이쯤해서 192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짚어봐야 할 것 같다. 그 전에 나혜석이 근대 최초의 여성화가였다는 점을 새삼 상기할 필요가 있다.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진명여자보통고등학교와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당대의 엘리트 예술가였다. 이 최초의 여성화가는 여성의 몸을 억압하는 식민지 조선의 가부장적 사회가 못마땅했다. 가부장적 사회가 여성에게 강제한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듣고도 못 들은 체 하고 말 없어야 잘 산다”는 식의 요구 내지 “시집가서 벙어리로 삼년, 장님으로 삼년, 귀머거리 삼년”5)따위의 부당한 요구에 이 화가는 분노했다.
벙어리, 장님, 귀머거리로 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남들이 요구한 대로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귀로 듣고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나혜석은 조선의 여성들에게 “암흑을 명랑화하기 위해 어두침침한 골방에서 나오라”고 권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화가에게 골방에서 나와 밖에서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을 그리는 풍경화는 ‘해방’의 미술이었다. 따라서 나혜석은 조선 여성들에게 화가가 될 것을 권했다. “우리의 눈에서 우리의 손끝에서 우리의 만들어내는 예술 우에서 저 흐늘거리는 시대의 신경을 죄여줍시다”6)나혜석에게 성(性)의 해방은 무엇보다 몸의 해방이었고 몸의 해방은 신경(감각)의 해방을 뜻했다. 어두컴컴한 방에 있다가 눈부시게 환한 바깥 세계로 나올 때 내 몸, 내 오감(五感)이 경험하는 저릿저릿한 떨림을 여기에 빗댈 수 있을까? 또한 화가가 되어 그 떨림과 진동을 화폭 위에서 증폭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미술의 세계를 바라보면 “우리의 심장이 벌떡거려지지 않습니까?”라고 그녀는 물었다.7)하지만 나혜석이 빛과 색채, 냄새로 가득한 세계를 온 몸으로 감각하여 그린 1920년대의 풍경화들은 지금 대부분 어두침침한 흑백사진으로만 남아있는 상태다. 기막힌 아이러니다.


5) 김건의, 「은율지방동요」, 『동아일보』 1923년 11월 18일.
6) 나혜석, 「女子美術學舍-畵室의 開放」, 『三千里』 1933년 3월, 전집, p. 600.
7) 나혜석, 위의 글, p. 600.



이 몸을 어디로 향하여야 좋은가?


대상을 너무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갑갑하고 어지럽고 정신없다. 나혜석의 풍경화를 두고 말하자면 그것은 “자연의 국부적 호감으로만 화작(畵作)”8)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적당히 뒤로 물러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뒤로 물러나는 일은 게다가 많은 장점이 있다. 대상과 거리를 두고 멀리 떨어지면 가까이에 있을 때나 그 안에 있을 때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 말이다. 따라서 전체에 대한 통찰을 얻으려면 충분히 멀리 떨어질 필요가 있다. 게다가 대상과 충분히 거리를 두고 물러선 자리에서는 전체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한 ‘관조와 사색’을 누릴 수 있다.
이런 까닭에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들은 언제나 일종의 ‘진퇴양난’의 상태에 있다. 어떤 딜레마에 빠졌다고 할 수도 있을 게다. 그를 괴롭히는 질문은 “가까이 다가갈 것인가? 아니면 멀리 물러날 것인가?”이다. 또는 “개별과 순간을 중시할 것인가? 아니면 전체와 영원을 중시할 것인가?”이다.
양쪽 다 장점이 있다. 풍경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화가의 감각활동은 활발해진다. 그가 그리는 풍경화는 필경 “감각적인 풍경화”가 될 것이다. 반대로 뒤로 물러날수록 화가의 인식활동이 활발해진다. 이 경우 그의 풍경화는 “사색적인 풍경화”라는 평을 듣게 될 것이다. 미술비평가였던 윤희순(尹喜淳 1906~1947) 선생의 표현을 빌면 전자는 ‘열정의 회화’이고 후자는 ‘이성의 회화’이다.9)
그렇다면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는 어디에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려야 할까? 일찍부터 나혜석은 이 문제에 매달렸다. 나혜석은 이렇게 물었다. “이 몸을 어떻게 서야 할까? 이 몸을 어디로 향하여야 좋은가”10)일단 너무 가깝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은 자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신경을 죄여주는” 감각활동과 그것을 “내 정신의 것으로 만드는” 인식활동을 다함께 할 수 있는 적당한 자리가 있을까? 그런 자리를 찾기 위해 나혜석은 풍경에 거리를 두고 뒤로 물러서 보았다. 물론 이 때 지나치게 멀리 물러날 수는 없다. 대상 속에서 대상과 더불어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달큼한 맛을 절대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고심 끝에 택한 자리에서 그린 풍경화는 종종 “애매하다”거나 “어정쩡하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나혜석이 1925년에 발표한 <낭랑묘娘娘廟>는 만주 안동현(단둥)의 오래된 건축물인 ‘낭랑묘’를 그린 것인데 나혜석이 찾고자 했던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풍경화가의 자리를 보여주는 사례다. 여기서 그녀는 건물로부터 적당히 물러난 자리를 택해 화폭 안에 공간 전체를 아우를 수 있었다. 공간 전체의 분위기를 포착했다고 하는 것이 좀 더 적절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가까이에서만 볼 수 있는 세부의 질감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대의 비평가들에게 이 그림은 뭔가 어색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일례로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은 이 작품을 두고 “집과 집 사이에 있는 나무가 웃음거리가 되었다”11)고 평했다. 다가가는 일과 물러나는 일, 또는 근경(近景)과 원경(遠景)을 하나의 화면에 종합하는 일은 역시 쉽지 않았다.



8) 김기진, 「제6회 선전 작품 인상기」, 『조선지광』 1927년 6월, 윤범모, 『화가 나혜석』, 현암사, 2005, p. 176. 재인용.
9) 윤희순, 「제10회조미전평(5)」, 『동아일보』 1931년 6월 7일
10) 나혜석, 「경희」, 『女子界』 1918년 3월, 전집, p.165.
11) 김복진, 「제4회 미전인상기」, 『조선일보』 1925년 6월 3일


나혜석 <낭랑묘娘娘廟> 1925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오랜 고민 끝에 이 화가는 마침내 특별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 1926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수상한 <천후궁天后宮>은 나혜석 회화세계의 백미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천후궁’은 이 무렵 나혜석이 거주했던 안동현(단둥) 원보산 공원에 있던12) ‘천비’의 사당이다.
사당의 주인공은 천비, 또는 천후낭랑이라 불리는 중국 송(宋)나라 때 여성이라고 한다. 그녀는 “눈이 멀어서 신을 불러 구함을 구하다가 20세의 꽃다운 나이를 최후로 죽고 만” 여성이다.13)“눈 먼 여성”에 대한 연민이 유달리 강했던 나혜석이 그 눈 먼 여성을 기리는 사당을 그린 것이 바로 <천후궁>이다. 이 풍경화가 특별한 것은 풍경에 아주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불구하고 탁 트인 전망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눈(目)처럼 둥글게 개방된 출입문 덕분이다. 여기서 나는 바로 눈앞에 있는 담 벽의 생생한 질감을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로부터 답답함이나 어지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문 안쪽 개방된 영역으로 시선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가까운 풍경과 먼 풍경은 한 작품에 어색하지 않게 공존하게 됐다.
이 그림의 또 다른 특징은 단번에 ‘전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지금 보이지 않는 담 너머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것을 보려면 상상을 통해서나마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출입문 바깥에 있는 이상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없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아예 둥근 출입문 안쪽으로 들어가면 어떨까? 그러면 이제 출입문 바깥쪽에 있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나혜석 <천후궁> 1926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천후궁>에서 화가가 택한 자리는 결정적인 자리가 될 수 없다. 매우 애매한 자리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바로 그 애매한 자리가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전에 본 것과 그 다음에 보게 될 것을 함께 고려하게 만든다. 따라서 적절한 자리를 찾는 일, 보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 이 작품은 “내 눈으로 보는 일을 결코 중단할 수 없다”는 나혜석 특유의 신념이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나혜석은 “집에 가져다 놓고 멀리 보고 가까이 보고 뒤집어 놓았다가 눈을 새로 해 가지고도 보고 다른 방에다가 놓고도 하야 잘못된 것을 알아내려고 고심”하면서 그 구도를 얻었다.14)이렇게 내 한 몸을 계속해서 움직이며 보는 일을 나혜석은 “나를 잊지 않는 행복”에 비유했다. 반대로 몸의 요구(감각)와 무관하게 전개되는 관념적 인식과 생활에 대해 나혜석은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마땅히 아껴야 할 반드시 사랑하여야 할 우리 몸을 그렇게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굴려 왔으나 지금 앉아서 과거를 회억하니 끔찍스러워 내 뼈와 살에 대하여 눈물을 뿌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15)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혜석은 “어서 속히 내 한 몸이 있는 것을 확인하여야” 하며 그 몸을 “남의 손에만 맡겨둘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이제 더 이상 남들이 보라는 데로 보지 않고 내 몸으로, 내 자발적 의지로 보겠다는 선언이다. 해방의 선언이다.


12) 장성식, 「월강 이역의 국제도시(8) 산업은성한 안동현」, 『동아일보』 1927년 5월 1일.
13) 나혜석의 설명에 따르면 천후궁이 세워진 내력은 다음과 같다. “그 후 종종 해상의 영험이 출현하므로 바다를 건너는 사람들이 다 崇祭하여 기도를 하면 즉시로 풍랑이 잦아진다고 한다. 명(明)의 永樂중에는 封하여 천비라 하고 廟를 京師에 세우고 후에 이르러 격을 進하여 천후라 칭하였다” 나혜석, 「美展 出品 製作 中에」, 『조선일보』 1926년 5월 21일, 전집, p.559.
14) 나혜석, 「美展 出品 製作 中에」, 『조선일보』 1926년 5월 22일, 전집, p. 560.
15) 나혜석, 「나를 잇지안는 행복」, 『新女性』 1923년 11월, 전집, p. 464.



거울 앞, 경희


나혜석 단편소설 『경희』(1918)에는 다음과 같은 매우 흥미로운 서술이 등장한다.


경희는 제 몸을 만져본다. 왼편 손목을 바른편 손으로, 바른 편 손목을 왼편 손으로 쥐어본다. 머리를 흔들어도 본다. 크지도 않고 조그마한 이 몸……이 몸을 어떻게 서야 할까? 이 몸을 어디로 향하여야 좋은가16)


인용문에서 화자(경희)는 방금 전까지 만져지던 것(왼쪽 손)이 만지는 것이 되고, 방금 전까지 만지던 것(오른 손)이 만져지는 독특한 경험을 말한다. 『경희』에는 이와 유사한 묘사가 많다. 다음은 보는(보이는) 몸에 관한 서술이다.


“그러면 내 명칭은 무엇인가? 사람이지! 꼭 사람이다” 경희는 벽에 걸린 거울(休鏡)에 제 몸을 비춰 본다. 팔도 들어보고 다리도 내어놓아 본다. 분명히 사람 모양이다. 그러고 드러누운 탑실개와 굼벵이 찍으러 다니는 닭과 또 까마귀와 저를 비교해 본다. 저것들은 금수, 즉 하등동물이라고 동물학에서 배웠다. 그러나 저와 같이 옷을 입고 말을 하고 걸어 다니고 손으로 일하는 것은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라고 배웠다. 그러면 저도 이런 귀한 사람이다.17)


인용문에서 경희(의 몸)는 보는 일과 보이는 일을 동시에 수행한다. 경희는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표현을 빌면 “보는 사람이 그가 보는 것 속에 내존된 자아” 또는 “느낌의 행위(sensing)가 느껴진 것(the sensed)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자아”에 해당한다. 18)이렇게 능동과 수동, 주관과 객관이 겹쳐진 몸의 상태에 집중하는 경희는 화가 나혜석과 통할 것인데 그 화가는 자기 몸의 현실에 부합하는 작품을 지향했다. 또는 회화를 통해 “이 몸을 어디로 향하여야 좋은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했다. 실제로 나혜석은 “내가 그림이요, 그림이 내가 되어 그림과 나를 따로따로 생각할 수 없는 경우”19)를 지향했다. 이 화가는 즐겁게 그 탐구에 임했다. <봉황성의 남문>(1923)에서 <천후궁>(1926)으로 이어진 전성기 나혜석 그림들은 그 값진 결실들이 아닌가!


16) 나혜석, 「경희」, 『女子界』 1918.3, 전집, p.165.
17) 나혜석, 「경희」, 『女子界』 1918.3, 전집, p.169.
18) M. 메를로-퐁티, 오병남 역, 『현상학과 예술』, 서광사, 1983, p.291.
19) 나혜석, 「美展 出品 製作 中에」, 『조선일보』 1926, 5, 20, 전집, p.558.















홍지석
작가소개 / 홍지석

홍지석은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원대, 성신여대, 서울시립대, 상명대, 홍익대 등에서 미술사, 미술비평, 예술심리학을 강의했고 지금은 단국대학교 부설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답사의 맛!-우리문화유산 무엇을 볼 것인가』, 『동아시아 예술담론의 계보』(공저),『스타일의 탄생』(공저) 등이 있고, 『꼭 읽어야 할 예술 비평용어 31선』, 『아트폼스』 등의 번역에 참여했다. 「해방기 중간파 예술인들의 세계관: 이쾌대 [군상] 연작을 중심으로」, 「나혜석論: 몸의 회화로서의 풍경화」, 「근대의 매체환경과 천경자 회화의 관련 양상」, 「1930년대의 초현실주의 담론-삼사문학과 정현웅」 등의 논문을 썼다. 2014년에 제4회 정현웅 연구기금의 신진연구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문장웹진 201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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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의 경제 2(3) - 문학적 사용에 관한 비체계적 단상1) 강동호 1. 예술과 상품의 새로움을 구별할 수 있는 원리를 탐색하는 데 있어 ‘유용성’이라는 가치에 주목하는 것은 여전히 유의미한 출발점으로 보일 수 있다. 유용성의 관점에서 예술과 상품이 식별될 수 있다면, 양자의 새로움이 발휘하는 효과 또한 서로 다른 원리로 해명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상품 경제에서 새로움은 도구성과 결부된 차별적 정보 가치로 통용된다. 새로운 상품은 대개 기능적 유용성(사용가치)의 측면에서 과거의 상품과 구별되며, 뚜렷한 비교 우위의 원리에 따라 그 가치가 측정되기 마련이다. 이때 새로운 상품에 부여되는 더 높은 가격이라는 차이적 가치(교환가치)는, 한층 개선된 사용가치의 우월성을 통해 정당화될 수 있다. 반면 예술 작품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예술의 새로움 역시 과거와의 차이를 전제로 한 비교적 가치라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그 가치를 정당화하는 비교 우위의 척도(사용가치의 명시적 우월성)가 설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새로운 예술 작품은 과거의 것보다 한층 매력적으로 인식될 수 있고, 동시대의 감각에 보다 적합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과거 작품에 대한 일방적 우위를 뜻하지는 않는다. 이른바 유용성처럼 명확히 우열을 판별하는 기준이 부재한다는 사실은 예술에서의 새로움을 더욱 복잡한 가치로 만드는 주요 원인일 것이다. 2 예술의 자율적 가치를 정당화하고자 했던 전통적 이론들은 대체로 유용성의 결여 또는 그로부터의 자유를 예술의 핵심 본질 중 하나로 파악해 왔다. 유용하지 않다는 점, 즉 그 어떤 실용적 목적이나 기능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예술이 예술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때 유용성의 부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공통 척도의 결여를 통해 부각되는 교환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이다. 주지하듯, 이러한 사유의 계보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적 전환점을 제공한 인물은 칸트이다. 『판단력 비판』에서 그가 제시한 ‘목적 없는 합목적성’(purposeless purpose)이나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과 같은 개념은, 예술을 시장적 가치 평가와 경제적 교환의 논리로부터 구분하는 철학적 근거에 해당한다. 칸트에 따르면, 예술가는 그 어떤 외적인 목적에 의해 지배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을 생산해야 하며, 감상자는 이해득실과 무관한 순수한 향유를 통해 작품의 아름다움을 경험해야만 한다. 이처럼 예술의 자율성은 어떤 보상이나 대가에도 편향되지 않는 행위의 독립성과 무관심성에 깊이 맞닿아 있다. 이를테면 수공업적 기예는 임금이라는 대가를 전제하는 강제적 노동이지만, 예술은 그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기에 전적으로 자유로운 행위로 간주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이익과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경제적 주체(호모 이코노미쿠스)와 동일시할 수 없으며, 무용성은 이와 같은 비환원성,

  • 관리자
  • 2025-06-01
점과 획의 시간

점과 획의 시간 ― 한강, 『빛과 실』1)로 『바람이 분다, 가라』2) 다시 읽기 이지연 1. 코스모스의 정원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별의 자녀들이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 ‘우주(宇宙)’라는 이름은 ‘예로부터 오늘, 위아래와 사방’을 가리키는 단어로 기원전 4세기경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모두 포함한 이 말은 천지만물(天地萬物)과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아우르는 세상의 총체를 뜻하는 것이었다.3) ‘우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에는 스페이스(Space), 유니버스(Universe), 코스모스(Cosmos) 세 가지가 있는데 각각 목적과 용도에 따라 다르게 쓰인다. 그중 ‘코스모스’는 혼돈, 무질서를 뜻하는 ‘카오스(χάος)’의 반의어로서 고대 그리스어로부터 유래됐다. 1980년 칼 세이건은 천문학과 우주에 대한 지식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겠다는 목적으로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거기에 ‘코스모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방영되자마자 전 세계 인구의 3%가 시청했다는 이 프로그램은 동명의 책으로도 출간되면서 현재까지 1,000만 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한 칼 세이건의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코스모스』가 처음 한국에서 번역된 것은 원본 출간 이듬해인 1981년이었다. 당시 번역자인 서광운은 ‘Cosmos’를 ‘우주’라고 번역했고, 이후 2004년 홍승수의 번역본에서는 원어 그대로 ‘코스모스’라는 단어를 썼다.4) 그가 번역한 『코스모스』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코스모스(COSMOS)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5)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를 한 번에 오가는 ‘모든 것’의 이치가 우주에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우주는 ‘스페이스’도 ‘유니버스’도 아닌, ‘질서’를 뜻하는 이름 ‘코스모스’로 불린다. 600쪽에 달하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세이건의 메시지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인간은, 나아가 모든 생명체는 그 탄생부터 소멸까지 모두 코스모스로부터 비롯되었다. 우리는 코스모스의 일부로서 코스모스의 자손이자 미래이다. 올해 4월, 문학과지성사는 한강의 산문집 『빛과 실』을 출간했다. 책의 제목은 작년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뒤 진행한 기념 강연의 제목을 땄고, 표지에는 그의 작은 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의 흑백 사진이 실려 있다. 온통 까만 배경에서 유독 흰 사각형의 무늬가 눈에 띈다. 책에 수록된 산문 「북향 정원」에서 한강은 볕이 들지 않는 정원에서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거울을 이용해 햇빛을 모아 주어야 한다고 썼다. 거울에 반사된 빛의 형상인 듯한 그것은 &lsqu

  • 관리자
  • 2025-06-01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 - 김멜라의 「이응 이응」1)을 읽으며 ‘사랑’을 생각하기 송연정 동그란 이응 “성욕은 만지고 닿고 싶은 마음과 어떻게 다를까.”2)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다만, ‘사랑 없는 섹스’라는 말을 생각해 볼 때, 어떻게든 다르긴 다를 것만 같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무수한 열망 중 하나가 성적인 끌림으로 발현될 수는 있지만. 성적으로 결합했다고 해서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말하기엔 다소 난감하다는 쪽이 우리에게는 훨씬 익숙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이러한 태도에서라면 성욕과 사랑 중 우위를 점한 쪽은 아마도 사랑이다. 사실 성욕은 사랑이 아닌 그 어떤 감정과 붙어도 대부분 진다. 적어도 성욕이 순전히 육체적인 충족만을 위해 발동된다는 전제하에서는 말이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이끌려 마침내 두 영혼이 공명하는 일은 낭만적이며 아름답고 심지어 숭고하지만, 몸과 몸의 결합은 충동적일뿐더러 한때이고 가끔 추잡하기까지 한 것 같다. 몸을 열등한 것으로 깎아내리며 그와 관련한 일체의 욕망을 부정하고 터부시하는 일은 우리의 오랜 습관이기도 하다.3) 그러나, 만지고 닿고 싶은 마음은? 상대를 만지고 싶고 또한 상대의 손길이 나에게로 향했으면 하는 애욕은, 어쩐지 성적인 뉘앙스를 함의하고 있는 듯하면서도 정서적인 이끌림을 수반하는 것도 같기에 더욱 미묘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김멜라의 「이응 이응」은 ‘이응’이라는 둥근 캡슐을 통해 성욕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나아가 앞선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마련해 본다. 「이응 이응」의 세계관에서 이응은 공원이나 목욕탕, 미술관이나 도서관, 학교와 주민센터와 병원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상용화된 기계이다. 사람들은 거대한 물방울처럼 생긴 캡슐 형태의 이응으로 들어가 “손오공의 머리띠처럼 생긴 은색 띠를 머리에 두르기만 하면 됐다.”(32쪽) 남성과 여성 혹은 그 너머의 스펙트럼 속 정체성의 명도를 조절하고, 성적 끌림 대상과 정서적 끌림 대상, 끌림의 크기, 받고 싶은 곳과 하고 싶은 곳··· 이외에도 몇 단계의 설정을 완료하고 나면 이응이 작동한다. “근육의 수축과 경련 그리고 이완. 오감을 채워 주는 이미지에 둘러싸여 양극과 음극의 전기 자극에 따라 맥박수와 혈압이 상승하고 나중에는 모든 긴장이 풀리며 상쾌해진다. 무의식 상태로 들어서게 하는 델타파부터 휴식과 이완을 주는 알파파까지. 이응은 단계별로 뇌파의 변화를 유도해 우리의 몸과 의식을 열린 상태로 만들어” 주는(30쪽), 그야말로 청결하고도 건강하며 합법적인 성욕 해소 기계인 것이다. 이응의 현자는 바야흐로 새로운 로맨틱의 시대가 열렸다고 말했다. 번식과 성욕, 사유재산이 만들어 낸 오랜 통치술의 사슬을 끊어 내고, 진실로 사랑의 의미를 깨우친 이들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를 맺는 반려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다고 말했다.

  • 관리자
  • 202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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