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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telling City –영국편② 발견자들

  • 작성일 2017-11-01
  • 조회수 2,082

[기획]

 

 

 

 

발견자들

The Discovered

 

 

정소연

 

 

 

 

    1.
    그곳에서 죽음은 천사의 날개처럼 떠다녔다.
    그녀가 죽음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그것들이 떠다녔기 때문이다. 날지 않고. 내려앉지 않고. 느리게, 여유롭게, 그녀의 작은 눈에도 보일 정도로. 그녀의 여물지 않은 손으로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무섭기보다는 아름답게.
    삶은 죽음의 사이로 새어나왔다.
    죽음보다 삶을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이상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삶은 연기였다. 증기였다. 오랫동안 이어 메우고 고친 지붕 사이로도 흘러나가는 것이었다. 비가 그친 숲에, 햇살이 큰 나무 사이를 구석구석 비추기 전에 잠시 머무르는 것이었다. 굴뚝 밖으로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삶은 마음만 먹으면 가볍게, 멀리, 높이 날았고, 멀리 퍼졌다. 그렇다면 천사는 삶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다른 많은 일들과 마찬가지로, 지각되어 물성이 부여되는 지점은 끝, 매듭에 가까이 있는 법이다.
    그러니 그녀가 어린 나이에도 죽음을 발견할 수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삶도 발견했다는 점이었다. 그 쉽게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렇게, 그녀는 발견한 자가 되었다.

 

    2.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걸 발견했단 말이야? 굉장한데? 오로지 믿음으로 깨달았노라, 그런 건가?”
    지수가 칠리를 뿌린 감자를 포크로 쑤시며 말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투명한 게 아니라니까. 게다가 나한테는 그런 느낌이었단 말이지. 꼭 보이고 만져져야 발견하는 거면 세상에 시체 한 번 본 사람은 다 죽음을 발견하고 출산 한 번 한 사람은 다 삶을 발견하게? 그게 안 되니까 우리 수가 이것뿐이지.”
    애니(Annie)는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물통의 빨대를 쪽쪽 빨았다. 작은 손에 들어가는 작은 병이었다.
    “그건 뭐야?”
    “맹물.”
    “흐응. 건전하네.”
    “이게 얼마나 귀했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난 다른 건 잘 못 마시겠어. 물이 너무 귀해 보여서.”
    “와, 늙은이 같아.”
    애니가 피식 웃었다.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 잠깐 머물렀다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렇게 따지는 건 그만두라는 말, 많이 들었지? 다들 자기 시대의 흔적을 한두 가지는 갖고 있잖아.”
    “지긋지긋하게 들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걸 어떡해. 일단 나는 아직 죽지도 않았다고. 이런 경우에는 좀 봐줘야 하지 않아?”
    “야, 원래 다들 죽기 전에 발견해. 죽어서 되는 존재면 그냥 귀신이야.”
    지수가 뜨끈한 감자를 입에 한 입 떠 넣고 우물거렸다.
    “하긴, 사람은 어차피 죽으니까. 그냥 죽어서 되는 거면 이렇게 복잡할 것도 없겠지.”
    지수의 입술 사이로 잠깐 김이 새어나왔다가, 곧 허공으로 흩어졌다. 애니는 아주 잠깐 삶이 묻었다가 흩어지는 궤적을 눈으로 따라갔다가, 지수를 올려다보았다.
    “의심하기 시작한 거야? 아니, 그럼 네가 여기까지 오기 전에 모두가 알았겠지. 의심하고 싶어지기라도 했어?”
    지수가 말없이 플라스틱 포크로 감자를 뒤적였다. 분수 물을 손으로 막은 아이 때문에 벤치까지 물이 튀어왔다. 애니는 공원을 가득 채운 삶과 죽음을 훑다가, 자기처럼 그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동료를 다시 살피며, 조금 더 상냥하게 물었다. 어쨌든, 지수는 아직 죽지도 않은 어린애니까.
    “얘기하고 싶어?”

 

    3.
    지수에게도, 죽음을 발견하기란 삶을 발견하기보다 쉬웠고, 자연스러웠다. 학기 중에 교실에서 키우던 화분 속 화초가 방학이 끝나 학교로 돌아가 보니 죽어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삶이 조금도 남지 않은 화분은 며칠 방치되다가, 어느 날 조용히 사라졌다. 화초가 죽었어. 지수의 말에 친구들은‘응’ 하고 답했다. 화초가 죽었어요. 지수는 선생님에게 가서 말했다. 선생님은 지수의 말에 잠시 당황하더니, ‘그러게, 방학 동안 풀님이한테는 교실이 너무 더웠나봐. 그래서 선생님이 치웠어’ 하고 답했다. 다정한 설명이었지만 지수는 선생님의 말이 거짓인 것을 알고 있었다. 선생님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화분의 화초는 더워서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것은 볕만 잘 받으면 좀처럼 죽지 않는 열대성 화초였다. 물이 없어도 어지간하면 오래 버티는 종류였다. 그러나 화분이 너무 작았고, 방학 중에 당번 중 몇 명이‘화분에 물주기’를 깜박했고, 작은 화분에 잠시 담겨 있던 생명은 물이 모두 빠져나가 죽었다.
    지수는 갑자기 찾아온 이 모든 깨달음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선생님의 틀린 설명을 바로잡으려 들기에는 너무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지수는 네, 하고 답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여덟 살 때, 지수는 두 가지 발견 중 반쪽, 죽음을 발견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사람인 채로 머무르다 가는 평온한 영역, 평화롭고 불완전한 자리였다.

 

    4.
    “삶 쪽이 문제인 거지?”
    지수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애니가 지수의 포크를 애써 외면하며 거듭 다정하게 물었다. 제대로 먹지도 않으면서 감자를 대충 헤집기만 하는 모양이 자꾸 눈에 거슬렸다. 그러나 얘는 아직 죽지도 않은 어린애였고, 감자 한 알에서도 죽음과 삶이 보이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것은 애니가 갖고 있는, 누구나 한두 가지쯤은 있다고 말하는 흔적일 뿐이었다. 사실 한두 가지보다 더 있지만. 애니는 천정이 높은 건물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즐겨 탔다. 디스커버리와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 탐닉했다. 자신이 살았던 시대가 과하게 피하게 만든 것들과 과하게 탐하게 만든 것들로 회색의 존재를 겹겹이 둘러쌌다.
    “응.”
    지수가 분수에서 솟아오르는 물줄기 옆을 응시했다. 애니에게도 그 자리에 선 죽음이 보였다. 아직 제대로 보는군. 둘이나 보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 애니는 그 건너편에서 넘실대는 삶들을 맡아 살폈다.
    “너는 그냥 공장에서 나오는 증기를 보고 문득 삶을 발견했단 거야? 그게 다였어? 아무 사건도 없이?”
    “응. 그게, 그때는 굴뚝이 정말 크고 많았거든. 지붕 사이도 지금처럼 단단하게 이어져 있지 않았어. 그게 네 상상처럼 잘 안 보이는 게 아니야.”
    애니는 변명하듯 무의미한 설명을 덧붙였다. 위로는 어려웠다.
    “나는 나한테서 발견했었거든.”
    지수가 고백하듯 중얼거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건 몰랐다.
    애니는 당혹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자연스레 말을 받았다.
    “그런 경우도 종종 있지.”
    사실 종종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 고르자면, 드문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삶을 살지, 존재로서의 삶을 자신의 안에서 발견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아니 내가 살던 곳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거든. 그런데 해결이 안 됐어. 많은 일이 있었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그래. 그래서 몇몇 사람들이 단식을 했어. 오랫동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하루 동조 단식을 했어. 하루 동안 돌아가면서 옆에서 같이 굶어서, 연대하는 마음을 전하는 거야. 그런 거 알아?”
    하루 굶는 일쯤, 애니가 살던 시대에는 일도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기 직전까지 굶주렸다. 애니는 죽기 전에도 많은 시체와, 시체나 다름없는 삶들을 보았었다.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굶어도 죽지 않는다.
    “대충은.”
    “나도 그걸 해보려고 했거든. 아침7시부터 저녁6시까지였나? 아침9시부터였나? 여하튼 실제로24시간도 아니었어. 그냥 앉아 있을 뿐이었지. 생수 한 병 들고. 그런데 점심이 지나니까 배가 고픈 거야. 평소에 매 끼니를 챙겨 먹지도 않으면서. 계속 음식 생각을 했어. 그러다가 딱 여섯시가 되자마자 허겁지겁 그 자리를 나서서, 서울 중심가 롯데백화점 본점 지하 대형 푸드코트에 가서, 평소에 잘 먹지도 않는 돈가스 세트를 시켜 허겁지겁 먹었어. 무슨 열흘은 굶은 사람처럼. 다 먹지도 못했어. 3분의1쯤 남긴 식판을 반납대에 집어넣는데, 그 순간 삶을 발견했어. 나한테서. 정말 우스꽝스럽지 않아? 그럴 때 발견하는 개념이라면 뭔가, 삶 같은 관념이 아니라 기껏해야 허기 정도인 게 자연스럽잖아? 그런데 나이 서른에, 고작 열 시간 남짓 굶는 시늉을 하고, 이렇게 되어버린 거야.”
    지수가 자신을 가리켰다. 포크에 달려 있던 삶은 감자 조각이 지수의 가슴에 튀었다. 애니는 이해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백 년 넘게 발견자로 살았지만, 사실 애니는 그다지 브래드포드 주위를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지수가 말하는 푸드코트니 백화점이니, 본 적이 있는 정도였다. 밥을 일부러 굶어본 적도 없었다.
    애니는 이 마을을 휘감는 삶과 죽음의 궤적에 익숙했다. 이 마을은, 마을이었다가, 도시였다가, 지금은 도시라고 불리는 마을이 되었다. 애니가 삶을 발견했던 굴뚝이 철거되었을 때는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깨달음은 사라지지 않았고, 믿음은 단단하게 애니를 붙들었다. 애니가 다른 수십 명의 여자아이들과 함께 무너진 공장에 깔렸을 때, 삶이 죽음으로 천천히 바뀌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도 보이는, 파리와 쥐들이 찾아오는 부패한 시체가 되었을 때에도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것은 흔히 본 죽음이었다. 애니가 그다음에, 자신의 부패해가는 몸을 끌어안고 병원에서, 마침내, 다행히 빨리 죽었을 때, 그리고 죽음을 경험한 발견자로 다시 일어섰을 때에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긴 했다. 발견자로서 마침내 완전해진 듯한 착각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안다. 발견자가 실제로 생사를 경험했는지 여부는 그 존재와 무관하다는 것을. 지수는, 아직 애니보다 어리고, 죽어보지 않았으니. 비행기를 타고 먼 길을 직접 이동해 다른 발견자를 만나야 하는 자는 잘 모를 것이다.
    지수는 우울해 보였다. 지쳐 보였다. 어쩌면 발견자로 머무르기에는 너무…. 하지만 지수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발견은 선택이 아니다. 발견자들은 죽음과 삶에 발견된 자들이기도 했다. 애니는 자신을 갈망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질투심과, 그 질투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자존심으로 손끝까지 뻣뻣하게 굳던 수행자들을 떠올렸다. 애니는 그들의 삶을 지켜보았다. 때로는 죽음을 보았다.

 

    5.
    지수는 애니의 평온한 표정을 내려다보았다. 애니는, 뭐랄까, 너무나 발견자다웠다. 인종이 달라 더 그리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 약간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밝은 피부. 나이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작은 몸, 어려 보이는 얼굴에 조금 남은 주근깨. 차림새 때문일지도 몰랐다. 애니는 머리를 대충 묶고, 제 나이보다 조금 더 어린 아이들이나 들 것 같은 플라스틱 물병을 들고 형광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스타벅스 텀블러를 들었다면, 구두를 신고 있었다면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였으리라. 일부러 위장한 것일까? (지수는 아직 발견자로 사는 일에 서툴렀고, 다른 발견자들을 보면 모방할 곳을 찾았다.)
    “그것 참. 놀랐겠네.”
    애니가 뻣뻣하게 말했다.
    “응. 놀랐어.”
    “그런데 음, 왜 나한테까지 왔지? 여기 꽤 멀지? 너는 아직 안 죽었으니까 비행기 표도 사고, 비자? 뭐 그런 것도 받아야 하지 않나?”
    지수가 한숨을 쉬었다.
    “한국인들은 영국 올 때 관광비자 없어도 돼. 지금은 비수기고.”
    “거기도 발견자들은 있잖아. 다 만나보고 온 건 아니지?”
    “응. 몇 명 만나보긴 했는데,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없었어. 아예 다른 데로 와서 물어보고 싶었어.”
    다른 곳, 다른 시간. 어느 쪽일까.
    지수는 천천히 할 말을 생각했다. 발견자들 사이의 대화는 양쪽 모두에게 기억된다. 두 명의 발견자가 함께 기억하게 되는, 아주 적은 부분 중 하나였다.
    “믿음을 잃은 적, 확신이 흔들린 적은… 없겠지. 있다면 넌 이미 여기 없을 테니까. 그런데 혹시 단 한 번이라도, 끝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 그만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우리는 살아 있는 게 아냐.”
    애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학생을 꾸짖는 선생님 같은 말투였다.
    지수가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어. 그리고 미안하지만, 난 그런 적이 없어. 왜 나한테는 그런 경험이 있으리라고 생각한 거야?”
    “어… 많이 봤을 테니까. 사람이 쉽게 태어나고 쉽게 죽는 걸.”
    “그야 모든 발견자들이 마찬가지지.”
    “미안. 사실 여기저기 좀 알아봤었어. 넌 음, 극적으로 죽었잖아.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지만. 그다음에 전쟁도 겪었고. 그땐 다들 수명도 짧았고. 애 낳으면 바로 두세 명은 죽고, 조금 자라면 일 시키고 그랬다며. 그게 아니면 전쟁 나가서 죽고. 게다가 넌 이렇게….”
    지수는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예의를 차릴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포기했다. “시골에 있잖아.”

 

    6.
    애니는 잠시 말을 잃고 지수를 올려다보았다. 아, 이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
    지수가 애니의 표정에 얼굴을 붉혔다.
    “미안.”
    애니는 자신이 살았던 곳을 떠올렸다. 시골이라니! 그때의 브래드포드는 도시였다. 연기가 자욱하고 솜 부스러기가 끝없이 날리는. 기차가 서고 큰 건물들이 세워지고 사람들이 모이던. 물론 지금의 런던이나 서울 같은 도시는 아니었다. 그런 도시인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 현재는 애니가 살았던 시대의 마을들을 무너뜨리고 그 돌과 삶들을 바닥에 깔아 일으킨 시간이었다.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다시는 오지 않을 시대였다. 이미 그 시간 위에 선 지수 같은 발견자들은, 그래, 알지 못할 시간이었다. 그들 각자는 다른 장소와 다른 시대에서, 생사를 누적해가는 존재들이었다.
    “내가 삶을 발견했던 날은 말이지, 평소랑 비슷했어. 해가 뜨기도 전에 집을 나서야 했지. 내가 일하던 공장은 집에서 꽤 걸어가야 했거든. 우리 가족은 더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할 수 없었던 것 같아. 너무 늦게 집을 나서면 가는 길에 해가 뜨는데, 그러면 일하다 중간에 지쳐버리니까, 동트기 전에 나가는 편이 나아.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땐 큰언니랑 같이 다녔어. 언니가 죽고 나서는 나 혼자 다녔지.”
    토요일 아침에 출근한 언니가 예배 시간까지도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는 공장까지 찾아갔었다. 마스터는 언니를 내보낼 수 없다고 했다. 아마 언니는 종일, 밤새도록 일했을 터였다. 주문이 밀려 있었다. 다른 일할 아이를 데려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버지는 굶주리고 지친 언니를 집에 데려왔다. 아버지의 옷과 머리는 엉망이었다. 우리는 함께 조용히 예배를 드렸고, 언니는 죽었다. 다른 많은 소녀들과 비슷한 죽음이었지만, 아버지는 그리 말했다. 깨끗하게 떠났다. 언니는 직조 기계에 깔리지도 바늘 기계에 찔리지도 않았다. 폐를 채운 솜 때문에 오래 기침하며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그런 점에서는, 깨끗한 죽음이었다. 공장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공장에서는 자주 불이 났고, 사람들은 자주 공장에서 몸을 잃었다. 언니는 온전히 돌아와 온전히 떠났었다.
    “시작은 평소랑 비슷했어. 나중에, 매니저가 굴뚝에 문제가 있으니 수리를 해야 한다는 편지를 마스터한테 썼었대. 원래 위험했다고. 백 년쯤 지나서 알았지. 나한테는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어. 새벽부터 일을 하다 아침을 먹으려고 잠깐 손을 쉬었는데, 사방이 흔들리기 시작했어. 굴뚝이, 그 높고 단단하고 큰 굴뚝이 공장 위로 무너져 내렸지. 비명은 돌이 무너지는 소리에 묻혔어. 브래드포드의 돌이었지. 단단하고 아름다운. 즉사한 사람들도 여럿 있었어. 내가 발견한 삶은, 한두 번 같이 아침을 먹은 적이 있는 여자애의 것이었어. 내 다음 줄에서 일하는 파트타이머였지. 그 집은 애가9명이나 있어 자기는 아직 종일 일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었어. 얼마나 부러웠던지! 굴뚝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할 때, 마침 기계 밑에 비스듬히 쭈그리고 앉아 있던 그 애의 삶을 발견했지. 솜 부스러기와 실 조각과 굴뚝과 천정에서 무너져 내린 돌 먼지 사이에서 그 애의 삶이 스며나오는 것을 발견했어.
    일단 발견한 다음부터는, 주변의 삶들을 천천히 하나씩 셀 수 있었어. 발견되는 삶들을. 내가 발견하자마자 죽음으로 이어지는 삶들을, 나는 한쪽 팔이 깔린 채 느꼈어. 연말이었지. 무너진 굴뚝의 돌들을 들어내는 데 대강 사흘이 걸렸어. 시체가 부패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고, 내 상처가 곪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지. 우리 가족이 다음 집세를 걱정하기에도. 사람들은 제 가족을 찾아 현장에 왔어. 하지만 잘 찾아내지 못했지. 높은 굴뚝이 무너졌으니, 성한 사람이 없었어. 얼굴이 뭉개진 시체들, 사지 중 어디 하나라도 멀쩡한 시체가 거의 없었던 데다, 우리 모두 옷차림도 다 비슷했거든. 솔직히 자기 누나가 누구인지, 누가 자기 딸인지, 연인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지.”
    “가족들이 찾아왔던 거야?”
    “…그래.”
    “네 가족도 왔어?”
    “응.”
    오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애니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애니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제 딸을 찾지 못하자 폐허 앞에서 한참을 넋 놓고 있다가 딸이 사실은 출근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어머니가 있었다. 애니는 여전히 팔이 깔린 채, 파리가 모여든 시체 중 한 구에서 파리처럼 날아가는 그 딸의 죽음을 보았다. 아파서 말을 할 수 없었다. 머리카락을 모두 씻겨 원래 색을 확인해보고 싶다고 주장하는 청년이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시신이 나오지 않았지만, 남편이 그날 분명 출근했다고 울부짖는 여인도 있었다.
    공장에 정확히 몇 명이 있었는지, 누가 있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애니의 아버지는 고만고만한 소녀들의 시신 사이에서 아직 숨이 붙어 있던 애니를 찾아냈다. 그리고 병원에까지 데려갔다. 이미 팔은 감염되었고, 낫는다 한들 한쪽 팔만으로는 공장에 돌아갈 수 없는데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병원비 걱정이 더 커지기 전에 죽었다는 점이었다. 애니의 가족들은 애도할 수 있었다.
    그 돌무더기에 파묻힌 채 삶과 죽음의 직조를 관찰하던 시간들. 하루, 삶에 대한 발견, 이틀, 어둠, 사흘, 어둠, 나흘, 흐린 햇살, 닷새, 아버지, 엿새, 고통, 이레, 죽음. 애니는 그 발견을 의심할 수 없었다. 발견을 잃는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애니는 이곳, 브래드포드에서 두 번의 전쟁을 겪었다. 사람들이 떠나가고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삶과 죽음이 직조되는 것을 보았다. 솜이 증기와 만나, 눅눅하게 가라앉았다가 한때는 애니가 살아 있는 손으로 만졌던 천처럼 길게, 폭폭이 쌓여 가는 것을 보았다. 애니는 자신이 보았던 그 최초의 삶과 죽음들을, 지금도 애니 안에 쌓여가는 그 생사의 역사를 믿었다. 확신했다.
    지수는 하루 밥을 굶고 삶을 발견했노라 말했지만, 그 발견은 그렇게 가볍지 않았으리라. 글쎄, 하루 밥 굶는다고 발견자가 된다면 지구상에 애당초 그냥 사람이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지수는 발견을 의심하고 싶다고 하지만, 사실 아직 자신이 발견자가 된 진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인지도 몰랐다.
    애니는 지수가 말한 일들을 다시 짚어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죽자 위로를 하려고 하루를 일부러 굶는 사람을 애써 상상해보았다. 그러자 애니는 조금쯤, 정답을 알 것 같았다.
    지수에게 말하지 않았다. 발견자들의 대화는 서로에게 기억되고, 죽음과 삶에 대한 발견은 갑자기 찾아오지만, 그 발견을 숙고할 시간은 아주 오래, 아주 길게 주어지고, 발견자들은 결국 홀로 서야 한다. 오랫동안. 진짜 의심이 찾아오기 전에는.
    그래서 애니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그건, 한 번도 가벼운 적이 없었어. 그때에도. 흔했을 뿐이야. 너한테도 아마 그럴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발견자가 된 거야.”
    지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지수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이 있었다. 애니는 그때, 그 공장에서가 아니라도 어차피 십 년을 넘기지 못했겠지만, 지수는 어쩌면 아주 오래, 발견자인 채로 살아 있게 될 수도 있었다. 이것은 애니가 알 수 없는, 이 시대의 발견자들이 갖는 특징이었다.
    “잘 모르겠으면 다시 가서 그, 단식을 해보는 건 어때? 연대 어쩌고 했던 것?”
    애니의 제안에, 지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제 그건 끝났어. 말하자면.”
    애니가 풉 웃었다.
    “나는 여기 밖의 일은 잘 모르지만, 그럴 리가 없어.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거야. 비슷한 곳이. 비슷한 일이. 발견자로 좀 살다 보면 비슷한 일을 거듭 만나게 되거든. 한번 찾아서 시도해봐. 하루가 아니라 열흘쯤 굶어도 안 죽어. 열흘 굶은 손으로는 방직 기계도 당길 수 있어. 게다가 너한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이라고 해봐야, 이제, 죽음을 경험한 발견자가 되는 거잖아?”
    지수는 여전히 확신이 없는 표정으로, 발견자의 모호한 지대에, 분명하게 서 있었다. 그 단단한, 그러나 이곳이 아닌 땅에서, 애니는 지수를 두고 먼저 일어섰다.
    “가보라니까. 시골 어쩌고 한 말은, 나중에 진짜 미안하다 싶을 때 와서 사과하면 받아줄게. 난 이제, 5시TV 방송 보러 가야 해.”
    사실 애니에게는 텔레비전이 없었고, 요새 애니는 스트리밍으로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마을에는 기억해야 할 삶과 죽음이 많이 있었고, 지수에게는 아마, 지수의 몫이 있을 것이다.

 

 

 

 

 

 

 

 

 

 

 

 

 

- 정소연
  SF작가 『옆집의 영희씨』 『이사』 『백만 광년의 고독(공저)』
  역서 『허공에서 춤추다』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등
 

 

 

《문장웹진 201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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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올 수 있는가?

[에세이] 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올 수 있는가? - 긴 시간의 미로를 살피는 시, 김행숙의 눈 양경언 장훈이 기자에게 물었다. 유족들이 가장 원하는 게 뭔지 아냐고. 글쎄,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일까. 말을 고르는 사이 답이 돌아왔다. “죽은 아이가 살아 돌아오는 거예요.” - 진달래, 「[산 자들의 10년] 내 새끼는 왜 죽었나··· 정치에 밀려난 과학, 아빠가 붙잡았다」 부분, 《한국일보》 2024년 4월 25일. 수학여행을 간다고 집을 나선 아이들이 탔던 배가 왜 침몰했는지에 대한 답을 알아내기 위해 십 년 동안 분투 중이라는 장훈 님(‘4·16 안전사회연구소’ 소장)의 인터뷰를 읽다가, 불가능한 바람이 담긴 저 답변 앞에 오래 멈추어 있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일이 가능한가. 기적은 인간의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을 맞닥뜨렸을 때 요청된다. 이뤄질 수 없으므로 간절해지는 것이다. 떠나간 사람을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고 안고 싶은 마음이, 살아 움직이는 너를 마주하고픈 바람이. 죽은 남편과 아이를 다시 만나고픈 마음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살아가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나는 그런 엄마가 내내 애달팠다. 그런 바람이, 엄마가 당신 스스로를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엄마, 죽은 아빠도 오빠도 살아 돌아오진 못해,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안타깝지만,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면 애당초 거기에 매달리지 않는 편이 나아. 나는 이편이 남겨진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런가. 그게 정말인가. 어째야 하는가. 참사의 진상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할수록 ‘벌어져선 안 됐던 사건’이었다는 사실만이 분명해지는데, 내내 드는 저 불가능한 바람을. 잠재우지 못하는 바람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심경을. * 김행숙의 소시집 『1914년』(현대문학, 2018)은 특정 사건을 연상시키는 제목으로 2018년에 발간된다. 2014년으로부터 정확히 백 년 전의 시간이 시집 제목으로 소환되고 있으므로, 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가 한 권의 시집에 ‘1914년’이란 이름을 부여한 셈이다. 누군가는 시가 품은 말들의 속성인 ‘애매성(ambiguity)’ ― 시어에는 여러 의미가 중첩되어 있어 다양한 갈래의 해석이 만들어진다는 특징 ― 에 기대어 먼저의 언급을 꺼릴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1914년’이라는 말 자체로부터 얼마나 많은 해석이 가능한데 시집이 세상에 놓일 닻으로 굳이 2014년 4월 16일의 참사를 삼아야만 하나, 그러한 접근은 김행숙 시가 그간 벌여 왔던 시적 우주의 확장과 연결되지 못하는 해석을 낳지 않겠는가 하며 의아해하는 이들이 있을 거란

  • 관리자
  • 2024-06-01
자라요, 언제나요.

[에세이] 자라요, 언제나요. 권여름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나는 장편소설 초고를 쥐고 있어야 했다. 지난겨울, 내게는 새로운 이야기의 처음, 중간, 끝이 있었다. 그걸 바탕으로 처음 몇 줄을 썼다. 시작이 반이니 이미 절반을 쓴 것 아니겠냐는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고 다녔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어느 정도 진심이 묻어 있었다. 이번에는 어쩐지 그전보다는 빠르게 장편소설 한 편을 뚝딱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장편소설을 쓰는 데 장애물이 없겠냐만, 무엇을 만나더라도 씩씩하게 넘어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일렁였다. 막 두 번째 장편소설을 출간하고 고무된 소설가의 자기효능감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더욱이 내게는 겨울 방학이 있지 않은가. 성긴 시놉시스를 촘촘하게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초고를 시작하기에 충분했다. 두 번째 장편소설 출간 직후 크고 작은 일정도 서서히 마무리되면서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으니 타이밍이 좋았다. 온 우주가 나의 세 번째 장편소설을 위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호기롭게 세 번째 장편소설을 시작하려던 겨울 방학, 두 돌짜리 조카아이가 우리 집에 왔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겨울 동안 우리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미안해하는 동생 부부에게 아기의 짐을 건네받으며 나는 소설 쓸 시간을 계산했다. 순둥이 조카아이는 꼬박꼬박 낮잠을 자고, 저녁이 되어 8시 30분에 씻기면 바로 잠이 든다고 했다. 아이의 낮잠 시간과 저녁 9시 이후를 활용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간과한 것이 있었다. 아이를 재우며 나도 함께 스르륵 잠들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조카와 잠들지 않더라도 그 시간에 온전히 글을 쓰는 일은 어려웠다. 조카아이가 잠든 사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아기 전용 세제로 옷을 빨고, 젖병을 씻어야 했다. 아이가 여기저기에 숨겨 놓은 물건을 찾아 제자리에 놓으며 청소도 했다. 재채기 한 번에 아이의 코에서 누런 콧물이 입술까지 내려온 날부터는 더 분주해졌다. 아이는 밤에 통잠을 자지 못하고 계속 깨어나 울었다. 주먹만 한 작은 얼굴 어디에 이렇게 많은 콧물이 숨겨져 있는 것인가. 소아청소년과 병원의 대기 시간이 그렇게나 길다는 것, 예약 앱이 따로 있다는 것 등 새로 알게 된 것투성이였다. 아이를 낳고 길러낸 나의 자매들과 동료, 친구들의 얼굴이 지나갔다. ‘이 사람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구나.’ 나는 조카들이 많다. 특히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초등생 조카들은 자주 우리 집에 놀러 왔고, 금요일은 대부분 우리 집에 와서 잔다. 조카들이 우리 집에 오지 않을 때는 내가 자주 놀러 간다. 주변 친구들은 나를 ‘조카 바보’라 부르며 나의 조카 사랑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한 발 떨어져 그들을 지켜본 것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 이틀 놀아 주는 것과 함께 지내며 먹이고 돌보고 재우는 일은 차원이 달랐다. 겨울 방학을 꽉 채우고, 2월 27일에 조카아이는 무사히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함께 양육을 담

  • 관리자
  • 2024-06-01
두고 온 것들의 목록

[에세이] 두고 온 것들의 목록 송진권 아, 참 세월 빠르다. 엊그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더이 벌써 나뭇잎이 우거지고 버찌가 익어 떨어지기 시작한다. 옛 시인이 읊었던 아침에 삼단 같던 머리가 저녁이 되니 눈빛이구나 [조여청사 모성설(朝如靑絲 暮成雪)]이 실감이 나게 내 머리에도 벌써 이팝꽃이 만발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서 삐삐에서 시티폰으로 스마트폰으로 바뀌고 이젠 인공지능에 메타버스까지 점입가경으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아직 나는 흐르는 물 위에 표시를 해놓고 칼을 구하고자 하니 미련퉁이고 그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로구나. 아침이면 잠결에 들려오는 나뭇가지 뚝뚝 꺾어 가마솥에 불 넣는 소리, 가마니 짜는 소리, 침을 뱉어 가며 아버지가 새끼줄 꼬는 소리, 와르르릉 가마솥 뚜껑 여는 소리, 콩나물시루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 아랫목에 묻어 둔 담북장 냄새와 메주 띄우는 냄새, 쥐가 뚫어 놓은 구멍으로 스며들던 냇내와 고구마 통가리에서 나는 흙냄새가 엊그제처럼 새삼 다시 생각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내가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고 보니 그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알게도 되었는지 모르겠고 아침이면 학교 간다고 나서며 돈 달라고 손 벌리는 자식들 무서워 뒤꼍에 숨었다던 어머니의 마음 언저리에나 가닿았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에서는 나와 함께 살다가 어른이 되거나 도시로 나오면서 두고 온 것들의 목록을 하나씩 적어 보려고 한다. 어릴 적 친구를 만나듯이 아니면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인형이나 장난감을 다락이나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하듯 읽어 주면 좋겠다. 전북 장수군 신무산 뜬봉샘에서 시작된 강물은 물뿌렝이 마을을 지나고 무주 진안을 지나고 충북 영동을 거치며 내가 사는 마을 앞을 지나가면서부터 제법 큰 강물의 태가 나기 시작한다. 각지에서 나온 도랑과 시냇물이 합수되면서 나루를 만들고 철길과 다리를 만들면서 수레와 차가 다니고 물가에 사람 사는 마을까지 만들어 까치집처럼 둥둥산이로 지붕을 잇대어 집 짓고 돌담을 쌓고 사람들이 모여 산다. 곳곳이 산이라 앞을 봐도 답답하고 뒤를 봐도 첩첩한 산골 벽지 내륙의 한가운데 그나마 밭이라고 있는 것은 소도 쟁기를 끌다 구른다는 비탈이고 논이라고는 손바닥만 한 하늘바라기 천수답뿐인 궁벽한 곳에서 나는 태어났다. 이 척박한 땅에서 굶어죽지 않고 살아 보려고 내 부모님은 눈만 뜨면 풀방구리 쥐 드나들 듯 뭐라도 물어들여야 살지 밥 먹는 입들 무섭다고 해 뜨기 전부터 해지고 난 뒤까지 몸뚱이 가루가 되도록 일을 했다. 어떻게든 새끼들만은 무골충이로 살지 말라고 한 몸 거름 되어 새끼들 밑으로 고스란히 밀어 넣고도 모자라 대대로 이어 온 전답까지 팔아 새끼들 밑에 거름으로 넣었다. 지금이야 태생이 뭐 그리 중요하진 않으나 시골에 눌러앉은 나는 곳곳의 자연부락들과 무슨 무슨 ‘골’이나 ‘티’, ‘미’로 끝나는 이름을 가진 자연부락들의 내력을 굳이 일러주지 않아도 알고 있으니 여기 토박이라 하겠다. 다들 사는 형편이 비

  • 관리자
  • 20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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