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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호 측량과 측정-지도제작자와 시계수리공

  • 작성일 2018-02-01
  • 조회수 1,101

기획의 말

2018년 커버스토리는 <문학과 일>입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측량과 측정 ― 지도제작자와 시계수리공

서희원

우리는 흔히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현재’라는 말로 표현한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를 시간의 개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사유를 진행한다면 ‘현재’를 결코 시간 개념만으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도, 감각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현재’의 맥락에서 시간은 필수적인 상관물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공간이다. 시간과 공간은 논리적인 사고 속에서는 개별적인 것으로 인식되지만 특수한 경우를 지칭할 때는 시간과 공간의 두 가지 축이 함께 요구된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을 예로 들면 아마도 분명하게 이해될 것이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에 특정한 목적지를 입력하면 그곳은 출발지와의 거리로 표현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곳까지 소요되는 시간으로 그 공간적 간격을 이해한다. 이렇듯 시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언제나 공간에 대한 개념과 뒤섞여 있다. ‘현재’는 ‘지금, 여기’이다.

그렇다면, ‘지금’과 ‘여기’는 어떠한 방식으로 측정할 수 있고, 측량할 수 있는가. 시간과 공간의 뒤섞임 못지않은 복잡함이 여기에 존재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공적인 동시에 개별적인 존재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즉 ‘나’는 연도와 나이, 공간과 장소라는 각기 다른 기준점을 가지고 존재한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이 글을 읽는 ‘우리’는 2018년의 한국에 있지만, ‘나’는 내가 살아온 시간의 경과를 통해서 형성된 주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위치한 공간보다는 좀 더 내밀한 느낌을 주는 장소에서 삶을 충만하게 감각하기 때문이다. 근대의 소설(novel)이 과거의 로맨스나 역사와는 구분되는 지점이 바로 이것인데, 과거의 서사 장르가 가치에 의해 인생을 드러내는 데 몰두했다면, 근대 이후의 소설은 시간에 의해서 인생을 제시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았다.

나는 종종 김연수의 좋은 소설에서 ‘현재’를 읽고, 감각한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 것은 ‘현재’의 감각이 연도와 공간에서 나이와 장소로 서사의 기준점을 옮겨 공동체의 압력 속에서 숨죽이며 살아왔던 개인의 내면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했던 것처럼 개인의 “정체성이란 고정된 장소나 변치 않는 물건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흐름, 흘러가는 물줄기”1) 같은 것이어서 그것은 변화와 뒤섞임을 본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소설은 시간과 공간을 고정된 상수로 표현하기보다는 변화와 뒤섞임을 가진 변수로 형상화한다. 의미 있는 소설이 난해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상을 측정하고 측량하려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에드워드 사이드 · 다니엘 바렌보임 지음, 『평행과 역설』, 노승림 옮김, 마티, 2011, 24쪽.

김연수가 2005년에 출간한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 수록된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과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하 「농담」과 「설산」으로 표기하겠다)은 각기 상이한 인물과 배경, 소재를 가지고 있지만 항상 기묘한 기시감 속에서 이해되고 읽혔던 단편이다. 그것은 어린 시절 부모의 어떠한 보증도 없이 헤어져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란성 쌍생아를 같은 공간에서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시감이다. 오랜 시간 품고 있었던 이 추측이 보다 분명한 증거를 통해 말해질 수 있게 된 것은 2013년 여름에 발표된 김연수의 단편 「벚꽃 새해」를 읽고 나서이다. 「벚꽃 새해」에는 주인공 성진이 황학동의 오래된 시계방의 노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회상하는 장면이 있다. “그가 들려준 건 꼭 산 사람이 그대로 굳어버린 듯한 병마용과 남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은 여인들의 사막과 목이 잘린 채 폐허의 사원에 앉아 있는 돌부처들과 설산의 눈 녹은 물로 재배한 포도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라고.”2) 흥미로운 것은 ‘병마용’과 ‘사막’과 ‘돌부처’에 대한 이야기는 「벚꽃 새해」에 직접적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설산의 포도’에 대해서는 이 단편에서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노인이 말했고, 성진이 들었다고 되어 있는 ‘설산의 포도’ 이야기는 「설산」의 서두에서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의 구절에 각주를 달고, 오탈자를 추정하는 과정에 등장하고 있다. 김연수의 실수인지 의도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대목이 알려주고 있는 것은 이 작품들 사이에 어떠한 연관이 있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벚꽃 새해」와 「농담」은 헤어진 연인이 우연한 기회에 재회하며 특정한 공간을 함께 걸어간다는 동일한 서사를 공유하고 있다. A≒C(「설산」과 「벚꽃 새해」가 다른 방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중첩을 가지고 있고)이고, B≒C(「농담」과 「벚꽃 새해」가 동일한 소재와 서사적 형식을 공유하고 있다면)라면, A≒B(「설산」과 「농담」의 기시감은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어떠한 연관을 통해 말해질 수 있지 않을까)이다. (여기에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 수록된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을 D로 치환하고 이 관계 속에 삽입하고 싶지만, 이 기시감에 대한 증명은 ‘아직’ 부족하다.)

2) 김연수, 「벚꽃 새해」, 『사월의 미, 칠월의 솔』, 문학동네, 2013, 31쪽. 이하 인용된 구절 옆에 쪽수만 병기하겠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창비, 2005)의 인용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겠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벚꽃 새해」는 「농담」을 보다 읽기 편하게 풀어쓴 작품이다. 「농담」에서 장엄하지만 어지럽게 이어지던 1인칭 화자의 진술은 「벚꽃 새해」의 간결한 3인칭으로 바뀌었고,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과 진술을 통해 사유를 주도하던 「농담」 주인공의 역할은 「벚꽃 새해」에서 성진과 황학동 시계방 노인으로 분할되어 명확한 사건의 진행과 함께 보다 알기 쉬운 행동과 대화로 전달된다. 「농담」과 「벚꽃 새해」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 ‘나’와 ‘성진’은 모두 자신의 삶이 어느 순간 그들이 바라던 인생의 행로에서 크게 벗어났다는 절망감을 공통적으로 토로하고 있다. 「농담」의 ‘나’는 “말했다시피 나는 평범하달 수는 없는, 그렇다고 평범하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는 서른네 살의 회사원이고 가끔씩 내 삶이란 어느 지점에선가 대단히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한다”(21쪽)고 말하고, 「벚꽃 새해」의 ‘성진’은 “4년 동안 그는 원하는 인생을 살지 못했다”고, “그건 동네 공원을 산보하는 것 같았던 평이한 삶이 백운대 절벽 끝을 디디고 걸어가는 묘기로 둔갑”(21쪽)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표현한다. 자신의 기대와는 어긋난 현재의 감각을 시간과 공간의 혼재로 표현하는 이러한 방식은 김연수가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의 서두에서 ‘나’의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인용한 단테의 『신곡』 중 「지옥」 편의 구절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어두운 숲에 처했었네”(159쪽)에 대한 참조이며,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햄릿’이 유령(그렇다, 김연수가 자신의 소설집에 사용했던 바로 그 ‘유령’의 계보가 여기에 있다)을 만난 후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The time is out of joint)”3)고 말한 유명한 대사의 변형이다. 그리고 어긋난 현재에서 살아가는 주인공의 심정과 이에 대한 표현과 이해는 각각의 작품에서 지도제작자와 시계수리공의 작업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농담」의 ‘나’는 우연히 지하철 종로3가역에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전처를 보게 된다. 그리고 ‘나’는 전처와 안국역에서 내려 어색한 대화를 하며 주변을 걷는다. “일 년 만에 우연히 만난 전처와 나눌 수 있는 대화의 길이는 송현동과 안국동과 화동과 가회동을 거쳐 재동으로 빠져나오는 정도의 거리면 충분했다. 나는 재동 교차로 어디쯤에서 헤어질 참이었다. 내가 담배를 피워 문 것은 그런 의미였다. 그런 까닭에 그녀가 자신에게도 담배를 달라고 말했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그녀는 담배 냄새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담배를 다 피운 뒤에는 더 놀랐다. 율곡로를 따라 걸어간 그녀가 다시 송현동과 안국동 사잇길을 걸어 올라갔기 때문이다. 그날, 우리는 갔던 길을 한 번 더 걸어갔다.”(14~15쪽) 우연히 다시 만난 전처, 의도하지 않은 산책과 대화, 그리고 그것의 기이한 반복. ‘나’는 “길 잃은 아이들처럼 그녀와 함께 걸어 다녔던 그 골목길들에 대해, 그리고 그 골목길에서 본 것들에 대해 생각”(9쪽)하게 되고, 마침내는 “종로구청 앞에 있는 중앙지도사”(14쪽)를 찾아가 “5천분의 1 축적의 종로구 북쪽 지역 지도”(15쪽)를 사서 그날의 행로를 표시한다. “이 행로에도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 대답을 구하기 위해 지도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나는 그다지 논리적이랄 수 없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녀가 어떤 나무 한 그루를 중심으로 나를 끌고 다녔다는 결론에. (…중략…) 그녀가 그 나무를 알 리가 없다. 그건 우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도상으로 볼 때, 내가 알아낼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그것 하나뿐이었다.”(16쪽) ‘나’의 결론에 등장하는 “그 나무”는 “재동 83번지 헌법재판소” 경내에 있는 육백 년 된 백송이며, ‘나’는 이것을 조선 후기 개화파들에게 큰 영향을 준 박지원의 우연하지만 결정적인 유산이라고 설명한다. “나는 역사라는 이름의 위험천만한 폭약을 단숨에 폭파시키는 뇌관은 『열하일기』나 실학사상 같은 게 아니라 벽장 속의 지구의나 뜰 앞의 나무 한 그루처럼 사소하고 하잘 것 없고 우연의 소산으로만 보이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만을 두고 본다면 세상의 모든 일은 인과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그 사이의 행로는 때로 매우 우연적이고 사소한 것들로 채워지곤 한다.”(18쪽) 종로구 북쪽 지역의 지적도 위에 그들이 걸었던 행로가 표시된 지도를 벽에 붙여 놓고 틈날 때마다 바라보는 일. 삶의 의미는 지적도에도, 행로에도,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참담한 심정에도 표시되지 않고, 그것의 개별을 통해서도 표현되지 않는다. 김연수가 「농담」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이것은 겹쳐지고 뒤섞인 장면을 통해서 감각된다. 그렇다. 좋은 소설이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잊히지 않는, 아니 잊을 수 없는 바로 그 장면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 갑작스러운 순간 삶의 밀도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아지고, 그것이 만드는 희귀한 아름다움, 매혹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 만들어진다. 이 돌연한 행로를, 이 우연한 만남을, 예기치 않은 순간을 ‘농담’이 아니라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은 밀란 쿤데라가 동명의 장편에서 멋지게 서사화한 것처럼 인과도 맥락도 없이 입 밖으로 발화되는 ’농담‘에 불과하다.

3) 자크 데리다 지음,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7, 17쪽. 『햄릿』의 번역(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햄릿』, 박우수 옮김)에는 이 구절이 “시기가 어긋났군.”이라고 옮겨져 있다. 하지만 시간의 어긋남을 강조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번역을 인용하였다.

「벚꽃 새해」의 프리랜서 사진작가 ‘성진’은 4년 전인 2009년 헤어진 ‘정연’의 문자를 받는다. ‘정연’은 연애 기간에 자신이 선물한 명품 시계를 돌려 달라고 ‘성진’에게 요구하지만, ‘성진’은 그 시계를 며칠 전에 시계수리점에, 시계수리점 주인은 이미 다른 곳에 팔아버린 후였다. 「농담」의 서사가 지적도 위에 표시된 개인들의 행로를 따라가는 방식으로 기술되고 있다면, 「벚꽃 새해」의 서사는 한국인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역사적 시간 위에 새겨진 개인의 흔적을 읽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마치 공동체의 기념일이 새겨진 다이어리에 덧쓴 개인의 행적을 함께 읽는 것처럼 말이다. ‘성진’은 ‘정연’과 헤어진 2009년을 이렇게 말한다. “그해 5월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낮고 어두운 골짜기였달까. 물론 우리가 익히 아는 그 불행한 사건도 어느 정도 영향은 미쳤겠지만, 그가 그 시기를 인생의 가장 낮고 어두운 골짜기였다고 말하는 주된 이유는 그해 4월에 정연과 헤어졌기 때문이었다.”(16쪽) 이러한 역사와 개인의 기억을 중첩하는 김연수의 방식은 ‘성진’과 ‘정연’의 우연한 여정을 이끌어내는 시계의 사연에서 도드라진다. 2012년 12월 19일 지지하는 후보자의 당선을 기원하고 함께 축하하기 위해 ‘성진’과 친구들은 모여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성진과 친구들의 기대는 무참히 깨어지고 그들은 절망에 만취한다. 그리고 시계는 “대선이 끝나고 난 다음날, 새벽 12시 54분 49초”에 “세 개의 침이 예각을 이루며 자정 무렵에 몰려”(10쪽) 있는 형상으로 멈춘다.4)
멈춰버린 시계를 찾기 위해 ‘성진’과 ‘정연’은 시계수리점 주인이 알려준 황학동의 “정시당”(한문이 병기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지만 ‘定時/正視/正始’로 추측해 볼 수 있다)으로 간다. 하지만 12월 20일 12시 54분 49초에 멈춰버린 것이 그들의 명품 시계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올바른 삶에 대해 가졌던 한국인의 기대와 희망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여정은 ‘잃어버린 시계를 찾아서’인 동시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다르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시당에서 ‘성진’과 ‘정연’은 “양팔에 토시를 끼고 백열등을 환하게 밝힌 작업대에 앉아서 두꺼운 책을 들여다보던 늙은 남자”(21쪽)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노인은 시계를 찾으러 왔지만 찾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는 짧은 여정이 “헛된 시간”(24쪽)에 불과하다는 ‘정연’의 푸념을 듣고는 그들을 자리에 앉히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정연’이 관심 있게 바라본 “병마용 모형”을 들고 이 오래된 물건이 자신에게 오게 된 경위와, 그로 인해 관심을 갖게 된 중국의 오래된 역사와, 매일 밤마다 자신이 읽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잠을 이루던 아내와의 애틋한 관계와, 함께 “시안과 그 너머의 사막을 여행”(27쪽)가자고 약속했으나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 아내의 사연을 이야기한다. 그러고는 “어쩌다 이런 구석까지 찾아왔대도 그게 둘이서 걸어온 길이라면 절대로 헛된 시간일 수 없는 것이라오”(28쪽)라고 말한다. 노인이 들려준 이야기는 ‘성진’에게 자신의 기억을 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주고, 이러한 기억을 통해 ‘성진’은 잠시나마 “세상이 근사하게 바뀌는”(33쪽) 것을 감각한다. 「벚꽃 새해」는 이 순간에서 끝나기 때문에 ‘성진’이 느낀 충만함이 정연과의 이별을 되돌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헤어진 연인의 재결합이 항상 의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의 후회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4) 김연수는 “12시 54분 49초”를 어둠을 향해 가는 예각이라고 쓰고 있으나, 이러한 시간은 굳이 “12시 54분 49초”가 아니어도 표현이 가능하다. 오전 1시 44분 16초면 어떻고, 2시 34분 56초면 다른가. 이 시간의 의미는 이 시침과 분침과 초침이 이루고 있는 예각을 시계의 형상으로 치환하고 이를 뒤집어 볼 때 나타나는 모양이 우리가 헛웃음을 표현하는 자음 ‘ㅋ’와 닮았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박정희의 당선과 박근혜의 당선. 마르크스가 역사의 필연적 반복이라는 헤겔의 사유를 수정하며 그의 저작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쓴 이런 구절 “헤겔은 어디에선가, 모든 거대한 세계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은 말하자면 두 번 나타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소극(笑劇)으로. 당똥 대신에 꼬시디에르, 로베스삐에르 대신에 루이 블랑, 1793~95년의 산악파 대신에 1848~51년의 산악파, 삼촌 대신에 조카.”(칼 맑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김세균 감수,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박종철출판사, 1992, 287쪽)를 변형한 ‘아빠 대신에 딸’이라는 역사적 블랙코미디에 대한 조소로.
물론 이것은 발터 벤야민을 통해 잘 알려진 1848년 7월 혁명의 멈춰버린 시계의 에피소드 ― “투쟁의 첫날밤에 파리의 여러 곳에서 상호간에 아무런 관련도 없이 독자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시계탑에 총격이 가해졌다는 사실” ― 에 대한 불길한 변주이기도 하다(발터 벤야민, 「역사철학테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옮김, 민음사, 1983, 353~354쪽).

김연수는 「농담」에서는 지적도 위에 지극히 개인적이고 우연한 행로를 표시하며 오직 하나밖에 없는 지도를 만드는 ‘나’의 이야기를, 「벚꽃 새해」에서는 시간의 이음매가 어긋난 동시대 한국인의 절망을 실연과 우연한 재회의 이야기로 변주한다. 흔히 철학자를 지도제작자와 시계수리공으로 비유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소설가의 작업은 철학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지도와 시계가 서로 분별될 수 없듯이. 우리는 내일 어디를 지나가고 있을까? 김연수식으로 말하자면,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다다르게 된다는 “바로 저기. 문장이 끝나는 곳에서 나타나는 모든 꿈들의 케른,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는 수정의 니르바나, 이로써 모든 여행이 끝나는 세계의 끝”(154쪽)은 어느 방향일까?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란 각자의 지도와 시계를 들고 어딘가로 걸어가는 시간의 순례자들이란 사실이다. 그리고 이 우연한 행로들의 무수한 겹침을, 이 장엄한 혼돈을 우리는 ‘우주’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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