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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친구니까” ― 밀짚모자 해적단과 ‘우정’

  • 작성일 2018-03-01
  • 조회수 2,476

[기획-원피스인문학]

 

 

“우린 친구니까”

― 밀짚모자 해적단과 ‘우정’

 

 

권혁웅

 

 

 

 

    대작 만화 『원피스』의 세계관과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인문학의 여러 지식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번이 첫 회니까 이 만화의 주인공인 밀짚모자 해적단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 보자.

 

    1.
    원피스 세계는 세계정부의 군대인 해군, 네 명의 대(大)해적인 사황, 해적이면서도 왕의 명령에 복종하는(그 대가로 공공연히 해적질을 일삼으면서도 처벌을 받지 않는) 왕하 칠무해의 세 세력으로 분할되어 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이 세계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세계다. 원피스 세계의 악당들은 늘 이런 권력 내지 무력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일삼는다.

 

    ① “힘 있는 자에게 반항하는 놈은 죽어야 마땅하단 말이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거다.”(해적함대 제독 클리크, 8권 65화)

 

    ② “난 해병으로 시작해 이 팔뚝 하나로 대령까지 올라왔다. 알겠나…… 세상은 칭호가 전부다! 이 기지에서 가장 높은 대령인 이 몸께선 최고로 뛰어난 인간이란 말이다. 위대한 인간이 하는 일은 전부 옳다!”(도끼손 모건, 『원피스』 1권 4화)

 

    루피가 모험을 시작할 때부터 이런 악당들이 무수히 출현한다. 거침없이 힘의 논리를 설파하는 무력의 신봉자들이다. ① 클리크는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한 해적이다. 신세계(사황이 지배하는 위대한 항로 후반부의 바다)에 출항했다가 칠무해인 쥬라클 미호크 한 사람에게 함대가 궤멸했다. 잔당을 이끌고 먹을 것을 구걸하던 클리크는 밥을 먹고 기력을 회복하자 도리어 자신에게 밥을 준 해상 레스토랑을 탈취하려고 한다. 그의 힘은 순수한 무(武)를 추구하는 미호크에게 턱없이 미치지 못하지만, 그는 약자를 착취하고 희생 제물로 삼아서 강함을 회복하려고 한다. 약육강식의 맨얼굴이 그에게서 그대로 드러나 있다. ② 도끼손 모건은 한쪽 팔뚝에 손 대신 커다란 도끼를 장착한 인물이다. 그 도끼를 휘둘러 적을 제압해서 지금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지위에 부여된 이름(대령)과 인물의 위대함을 동일시한다. 이 기지에서는 대령이 제일 높은 지위이므로 자신이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무력이 권위나 명예로 전환되는 것을 모건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③ “이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인어의 힘이다. 신은 너희들과 인간에겐 이런 능력을 주지 않았지. 그러니까 하등한 거다. 태어날 때부터 차원이 다르다구!”(인어 아론, 10권 90화)

 

    ④ “저기 아버님…… 쓰레기 산 사람들은 왜 인간이 아니에요? 왜 태워버리는 거예요?” “이런 일을 두고 ‘자업자득’이라고 하지. 생각해 보렴. 그들이 귀족으로 태어나지 못한 게 잘못이지 않느냐.” “정말 그러네! 귀족으로 태어났으면 됐을 텐데! 바보들!”(고아 왕국 귀족 딸과 아버지의 대화, 60권 587화)

 

    무력이나 권위의 정당성을 내면화하면 인종이나 신분이 차별의 근거가 된다. ③ 톱상어 어인 아론은 타고난 체력과 힘을 우월성의 근거로 내세운다. 무력의 유무는 타고날 때부터 결정된 것이다. 이것이 권력으로 전환되면 이른바 왕권신수설의 근거가 된다. ④ 루피의 고향인 고아 왕국은 쓰레기가 없어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로 불린다. 실은 쓰레기를 왕국 바깥에 내다버렸기 때문에 겉으로만 깨끗해 보이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 쓰레기 산(山)을 뒤져 생필품을 조달해서 먹고산다. 후에 세계정부의 시찰단이 천룡인(800년 전에 세계정부를 만든 왕들의 후예로 권력의 최정점에 자리한 부패한 특권 귀족들이다)을 대동하고 방문하기로 하자, 아예 쓰레기 산 전체를 태워버리려고 한다. ④에서 인용한 대화는 고아 왕국의 귀족 딸과 아버지의 대화다. 권력을 가져서 귀족이 된 게 아니라 귀족으로 태어나서 권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③이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주장이라면, ④는 신분제를 정당화하는 지배계급의 주장이다. 칠무해 가운데 하나인 도플라밍고는 이런 세계관을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요약한다.

 

    “정점에 서는 자가 선악을 뒤엎는다. 지금 장소야말로 중립! 정의는 이긴다고? 그야 당연하지. 승자만이 정의다!”(도플라밍고, 57권 556화 90쪽)

 

    정의가 이기는 것은 ‘사필귀정’이라는 교훈 때문이 아니다. 도플라밍고에 따르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며, 따라서 이긴 자만이 ‘올바름’을 독점할 수 있다. 그는 정상결전(사황 흰수염 일당, 루피를 포함한 임펠다운 탈옥수들과 해군 본부, 칠무해 연합군이 맞붙은 『원피스』 사상 최대의 전투)의 와중에 이렇게 선언했다. 누가 승자가 되든 후대의 사가들은 ‘정의가 승리했다’고 적을 것이다. 진정한 올바름의 ‘내용’(누가 정당했는가?)은 거기에 기록될 수 없다. 판단의 주체가 따로 없으며(중립이라는 말이 뜻하는 것이 이것이다), 있는 것은 행동의 결과에 수반되는 ‘정의’라는 호칭뿐이다.
    따라서 원피스 세계의 인물들은 현실의 ‘힘’ 자체를 모든 것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것이 형체를 갖추면 ‘무력’이 되고, 타인에 대한 강제력인 경우에는 ‘권력’이 되며, 칭호나 직위에 부여되면 ‘권위’가 되고, 관념에 스며들면 ‘명성’이나 ‘위엄’이 되며, 조직화되면 ‘위계’가 된다. 자신의 힘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확신하는 자들은 신이라 자처한다.

 

    “내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력(無力),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신인 것이다.”(갓 에넬, 30권 279화)

 

    하늘섬 스카이피아를 다스리는 에넬은 번개인간이다. 그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력(武力)을 자랑하며, 그 힘에 기초해서 자신을 신이라고 선언한다. 번개는 하늘(=우주)의 신 제우스의 무기이기도 했다. (신이 보기에) 불의한 자를 내려치는 번개의 파괴적인 힘은 신의 본성을 드러내는 데 손색이 없다. 어마어마한 위력으로 하늘 신의 위엄을 드러내는 장면은 공포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신화학자 엘리아데는 이런 힘을 역현[力顯, Kratophany]이라 부른다). 그는 뇌영이라 불리는 거대한 번개로 된 구체로 하늘 섬을 멸망시키려고 들었다. 문제는 그의 심판이 진정한 ‘올바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가 하늘섬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이유는 고작 이런 것이다.

 

    “잘 생각해 봐. 구름도 아닌데 하늘에 태어나 새도 아닌데 하늘에서 살고 있다. 하늘에 뿌리내린 이 나라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부자연스런 존재인 거야. 흙은 흙의! 사람은 사람의! 신에겐 신의! 돌아가야 할 장소가 있어!”(갓 에넬, 29권 274화)

 

    모든 존재는 분수(分數)를 지켜야 하며, 거기에는 장소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아무 근거도 없는 동어반복에 기초한 주장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흙에는 흙이 있어야 할 곳이 있고, 인간에게는 인간이 있어야 할 장소가, 신에게는 신의 장소가 있다? 흙은 목적성을 띠지 않은 물질(철학에서는 이를 기체[基體, substratum]라고 부른다)이므로 흙에는 ‘있어야 한다’는 당위가 부여될 수 없다. 흙은 그냥 제 있는 곳에 있을 뿐이다. 신의 속성은 무한이므로 신은 특정한 장소에 결박되어 있을 수 없다. 특별한 장소에만 존재하는 것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넬의 주장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며, 그때 인간에게 주어진 분수란 신이 부여한 것, 곧 천분(天分)이 된다. 에넬이 신이므로 결국 이것은 ‘내가 내 맘대로 인간의 자리를 지정하겠다’라는 주장에 불과하다. 에넬은 신 가운데서도 최악의 신, 종잡을 수 없는 변덕꾸러기 신에 불과했던 셈이다.

 

    2.
    이것이 루피가 이끄는 밀짚모자 해적단 앞에 펼쳐진 세계다. 힘(무력, 권력, 금력)을 제일의 가치로 추구하며, 그 힘의 유무와 크기에 따라 지배/피지배, 명령자/실행자가 배분되는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조직들로 득시글득시글한 세계. 그런데 루피는 모험을 떠날 때부터 이런 조직과는 전혀 다른 동기와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해적단원을 모집할 때마다 제안하는 말은 이렇다.

 

    “너, 동료로 들어와라.”(루피가 해골 브룩에게, 46권 442화)

 

    다른 해적단의 선장들은 일당을 영입할 때 모두 ‘부하’가 될 것을 강요한다. 그들은 상대에게 자신의 수하(手下)로 들어올 것을 명령하며, 상대가 말을 듣지 않거나 실력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면 가차 없이 베어버린다. 그러나 루피는 상대의 힘을 영입의 기준으로 삼지 않으며(이 기준에 관해서는 잠시 후에 얘기하겠다), 상대를 자신의 아래에 두지도 않는다. 다른 자들이 ‘계약’을 통해 성립된 수직적인 위계 관계로 모였다면, 밀짚모자 해적단은 ‘약속’으로 맺어진 수평적인 동지, 동료, 친구들이다. 루피가 형(불주먹 에이스)을 잃고 한없는 절망 가운데 빠져 있을 때, 그를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심연에서 건져 준 것도 바로 이들이다.

 

    “지금은 힘겨울 테지만 루피, 그것들을 억눌러! 잃은 것만 헤아리지 마라. 없는 것은 없다. 확인해. 네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이냐?”
    “동료가 있어!”(징베의 질문에 대한 루피의 대답, 60권 590화)

 

    이렇게 모인 이들에게 위계나 상하 관계가 있을 리 없다. 선장의 강함이 부하를 복종하게 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다른 집단과 달리, 이들에게는 서로의 약점이 서로를 지켜주는 근거가 된다.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가 건져진 루피(이른바 ‘맥주병’은 악마의 열매를 먹은 자들이 갖는 공통의 약점이다)를 아론이 비웃자 루피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무것도 못 하니까 도움을 받는 거지. 그래 난 검술도 할 줄 모른다, 이놈아. 항해술도 없고! 요리도 못 하고! 거짓말도 못 해! 난 도움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루피가 아론에게, 10권 90화)

 

    이 말을 모든 동료(검객 조로, 항해사 나미, 요리사 상디, 저격수 우솝)가 듣는다. 말하자면 루피는 ‘무능’(아론이 비웃으며 한 말이다)한데, 오히려 그 무능으로 단 하나의 일, 눈앞의 적을 ‘이기는 것’(루피가 아론에게 한 말이다)을 할 수 있다.

 

    다양, 그것을 만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언제나 상위 차원을 덧붙임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가장 단순하게, 냉정하게,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차원들의 층위에서, 언제나 n-1에서(하나가 다양의 일부가 되려면 언제나 이렇게 빼기를 해야 한다). 다양체를 만들어내야 한다면 유일(l’unique)을 빼고서 n-1에서 써라. 그런 체계를 리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땅 밑 줄기의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球根)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들뢰즈, 『천 개의 고원』)1)

  1)  들뢰즈,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18쪽.

 

    들뢰즈식으로 말해서, 밀짚모자 해적단은 동료가 들어올 때마다 특별한 중심 없이 퍼져 나가는 덩이줄기(리좀) 모델로 설명될 수 있다. 다른 집단은 선장이나 대장의 (힘에 의거한)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른다는 점에서 뿌리 모델에 의거한다. 후자가 수직적이고 유한하며 하나의 중심으로 수렴된다면, 전자는 수평적이고 무한하며 다양체로 퍼져 나간다. 리좀이 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유일한 것 곧 일자(一者, the one)를 제거할 것. 일자란 체계나 조직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 기제, 힘, 명령권, 정본성(正本性, authority)을 말한다. 일자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거기에 종속된다. 일자는 모든 것을 하나로 관통하며, 구석구석까지 미치고, 모든 것을 수렴하는 뿌리의 중심과도 같다. 예를 들어 밀짚모자 해적단 최대의 적수인 검은수염 해적단의 경우, ‘검은수염’은 선장인 마샬 D. 티치의 별명으로 그의 힘과 능력을 대표하는 제유다. 일부로 전체를 대표하는 수사법을 제유라고 부른다. 검은수염은 티치의 신체 일부이며 이것이 티치, 나아가 이 해적단 전체를 대표한다. 반면 밀짚모자 해적단에게 ‘밀짚모자’는 루피가 쓰고 다니는 것인데, 실제로는 루피의 것도 아니다. 이렇게 대상과 유관한 사물로 대상을 비유하는 수사법을 환유라고 부른다. 이것은 빨간머리 샹크스(지금은 사황이라는 대해적이 되었으나, 이 모자를 맡길 당시에는 그 정도의 위명을 날리지는 않았다)가 루피에게 맡기고 간 우정의 징표다. 본래 제유에서는 전체가 그것을 대표하는 유한한 부분으로 집중되고, 환유에서는 대상이 그것과 연관된 다른 대상들로, 말하자면 유관한 다양체들로 무한하게 떠돈다. 검은수염 해적단은 ‘검은수염’(티치의 별명이자 티치의 일부)으로 수렴되고 집중되는 무력 집단이다. 심지어 티치가 먹은 악마의 열매마저 어둠어둠 열매이며 대표적인 공격기 이름이 ‘블랙홀’이다. 반면 ‘밀짚모자’(루피의 별명)는 루피의 별명이지만 빌려온 것이며, 그것이 루피나 이 해적단의 능력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루피가 아무리 소중하게 여겨도 전투 중에 밀짚모자는 자주 너덜너덜해지거나 분실된다. 그것은 오히려 무능의 표식이다. 따라서 검은수염 해적단에게 ‘검은수염’은 해적단 전원(숫자 n)을 대표하는 n번째 숫자다. 반면 밀짚모자 해적단에게 ‘밀짚모자’는 해적단 전원(숫자 n)에서 ‘일자’가 빠졌음을 표시하는 n-1번째(n에서 1을 뺀) 숫자다. 처음부터 밀짚모자는 이 해적단에 속한 것이 아닌 데다가, 다른 모든 구성원=다양체들이 가진 능력을 갖지 못한 무능의 표식이었기 때문이다. 밀짚모자 해적단은 이 n-1의 힘, 일자를 제거한 다양체의 힘으로 적들을 제압해 나간다.
    딱 한 번, 루피가 스스로 내세운 이 약속을 어긴 적이 있다. 오랜 여행으로 용골(龍骨)이 상해서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배 고잉메리 호의 처분을 둘러싸고 우솝과 루피가 언쟁을 벌일 때 일이다. 배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던 우솝에게 루피가 “그렇게 내 방식이 마음에 안 든다면, 지금 당장 이 배에서……”(35권 331화) 나가라고 소리를 지른다. 선장의 권위와 명령권을 앞세운 유일한 순간이다. 마지막 말은 다 하지 못했는데, 상디에게 제지당했기 때문이다. 루피는 바로 사과했지만, 이 일로 우솝은 밀짚모자 해적단에서 탈퇴하고 만다. 물론 우솝도 후에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복귀했으며, 그사이에도 로빈을 구하는 일에 가면을 쓰고 돕는다. 우솝은 해적단원이 아니었을 때도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저격왕’이라는 별명으로 참여한 것이다. 우솝 역시 n-1의 역량으로 자신의 역량을 보탠 셈이다.

 

    3.
    루피의 목표도 다른 해적들처럼 대비보(大祕寶) 원피스를 찾아서 해적왕이 되는 것이지만, 그 이유는 다르다. 다른 해적들의 목표는 가장 큰 무력 내지 권력을 얻어서 전 세계 바다를 제패하는 것이다. 그들은 가장 힘 있는 자, 곧 패자(霸者)를 꿈꾼다. 그러나 루피는 그런 힘의 행사에는 관심이 없다. 스승 레일리의 질문에 대답하며, 루피는 자신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힌다.

 

    “네가 해낼 수 있겠나? 위대한 항로는 너희들의 상상을 한참이나, 훌쩍 더 능가하지. 네가 이 강고한 바다를 지배할 수 있겠나?”
    “지배 같은 거 안 해. 이 바다에서 가장 자유로운 녀석이 해적왕이야.”(루피가 실버즈 레일리에게, 52권 507화)

 

    루피가 생각하는 ‘왕’은 패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지배·교화·통치·명령·강제 하는 자가 아니다. 왕은 ‘가장 자유로운 자’다. 자유(自由)란 자신의 의지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행하는 것이다. 외부의 힘에 영향을 받거나 휘둘리지 않는 자(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루피에게 로맨스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나아가 그 힘을 타인에게도 강요하거나 강제하지 않는 자가 루피가 꿈꾸는 왕이다. 그가 부하(왕에게는 모든 부하가 신민이다)가 아니라 동료를 찾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동료는 아랫사람이 아니라 동등한 지위를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이를 보여주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드레스로자에서 루피 덕에 목숨을 구한(정확히는 인형으로 전락한 채 평생 노예 노릇을 해야 하는 신세에서 벗어난) 투기장의 전사들이 루피에게 밀짚모자 선단에 들어가겠다고 하며 ‘부자의 잔’을 나누자고 한다. 선장이 부모이고 전사들이 자식이 되는 예식이다. 이 잔을 나누면, 이들은 모두 밀짚모자 해적단의 산하(傘下)에 드는 것이다. 루피는 즉각 거절한다.

 

    “까불지 마, 밀짚모자! 선배이자 스타인 내가 산하에 들어가겠다 말하고 있는데!”(미남 검사 캐번디시)
    “묶어 놓고 마시게 하자.”(파괴포 이데오)
    “너 임마, 부하의 강함 얕보고 있지? 은인 주제에!”(팔보수군 두령 돈 사이)
    “난 해적왕이 될 거라구! 높은 놈이 되려는 게 아니야! 만약 우리가 위험하다 싶은 그때는 큰 소리로 너희를 부를 테니까 그럼 와서 구해 줘! 두목이나 대해적이 아니어도 되잖아? 너희가 곤란할 땐 우리를 불러! 반드시 도와주러 갈 테니까! 함께 밍고와 싸웠던 건 잊지 않아.”(루피)
    “뭔지 알 것 같디야. 루피 선배헌티 ‘해적왕’이란 의미가. 위대헌 게 아니라 ‘자유’?”(식인종 바르톨로메오)(80권 800화)

 

    루피는 계약을 통해 주종 관계를 맺자는 제안을 “답답하다”며 거절한다. 계약은 어디까지나 의무가 부과되므로 자유에 배치되는 속박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수평적인 동료라는 것이다. 그는 자유의사를 지닌 이들끼리의 자발적인 출항 내지 출전을 제안한다. 이것이 약속과 계약이 다른 점이다. 약속은 자발적으로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선언이며, 그것의 위반이나 실행에 징벌이나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서로를 기꺼이, 자유의지를 갖고 돕게 될 것이다. 그러자 역설적인 의식이 행해진다.

 

    “하하하! 동감이다. 어이, 바르톨로메오! 선언사를 읊어라! 이 녀석이 ‘부모’의 잔을 마시지 않아도 상관없어.”(거인 전사 하이루딘)
    “확실히 그렇군.”(캐번디시)
    “서로가 내키는 대로라면 괜찮겠지.”(이데오)
    “넌 남의 자유 또한 막지 못할 것이니!”(돈 사이)
    “응? 그런 거군요?”(소인족 톤타타 전사 레오)
    “루피 선배! 참말로 말대로다가 선언사를 읊어야 쓰겄어라!”(바르톨로메오)
    “여기 있는 우리는 부하가 되어 언제 어느 때라도 우두머리 밀짚모자 루피 선배의 방패가 되고 또 창이 될 것이니! 이번에 그 은혜에 답하고자 우리 7명 목숨을 다 바쳐 이 ‘부하 술잔’ 멋대로 받들도록 하겠구마이라.”(바르톨로메오 대표 선언)(같은 화)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이들은 루피가 강조한 바로 그 ‘자유’의 의지를 행사해서, 자발적으로 부자의 잔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유의지에 의한 신민이다.

 

    여기에 순수한 자기의식과 순수히 자립적이 아닌, 타자와 관계하는 의식, 즉 사물의 형태를 띠고 존재하는 의식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은 의식에게는 모두가 본질적이다. ― 일단 이 양자는 ―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의식 형태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한쪽이 독자성을 본질로 하는 자립적인 의식이고, 다른 한쪽은 생명, 즉 타자에 대한 존재를 본질로 하는 비자립적인 의식이다. 여기서 전자가 ‘주인(der Herr)’이고 후자가 ‘노예(der Knecht)’이다.(헤겔, 『정신현상학』)2)

  2)  헤겔, 『정신현상학』 1권, 임석진 옮김, 한길사, 2005, 227-228쪽.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는 유명한 항목에서 자유/종속의 역전에 관해서 설명한 바 있다. 여기서 ‘주인’이란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있는 존재(대자존재)이며, ‘노예’는 비자립적으로, 타자(여기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말할 것이다)에 대해서 있는 존재(대타존재)다. 그런데 이런 자립성/비자립성의 관계는 역전된다. 주인은 직접 자기를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기를 의식한다. 노예에게서 인정을 받고 노예의 노동을 강요하고 그 산물을 착취해야 주인 노릇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인의 자립성은 의존적이다(=주인은 노예가 된다). 반면 노예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노동에 대한 강요 속에서 자신의 한계, 곧 자신이 ‘예정된 죽음’ 내지 ‘보존된 죽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절대적인 부정의 자리, 자신의 모든 근거가 유동적이고 유한하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역설적으로 ‘순수한 자립성’을 획득하게 된다. 게다가 그는 노동을 통해서 사물을 생산하며, 그 과정에서 산출하는 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직관한다. 따라서 노예의 의존성은 자립적인 것이 된다(=노예는 주인이 된다).
    밀짚모자 산하 해적단이 되기로 맹세한 7인의 “괴걸”(『원피스』의 표현이다)은 스스로 종속 관계가 됨으로써, 주인의 자발성을 획득하였다. 루피가 놀란 것은 당연하다. 그는 처음에 “나 안 마셨거든?”이라고 항의하지만 술은 이미 다른 동료가 먹어버린 지 오래이다(조로가 마셨다). 그러니까 루피는 의식의 주관자 내지 참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의식이 차질 없이 진행된 것이다. “우리는 ‘멋대로’ 네게 충성을 맹세한 거”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이름과 얼굴을 소개하려는 멤버들을 외면하고, 루피는 고기를 찾아 줄행랑을 친다. 물론 의식적인 도주가 아니라 자유로운 이끌림이다.
    바로 이 점이 대해적 흰수염의 실패담과 밀짚모자 해적단의 (미래의) 성공담이 대비되는 지점이다. 흰수염 에드워드 뉴게이트 역시 서로가 서로를 억압하지 않고 서로에게 차별 받지 않는 공동체를 꿈꾸었으나, 그것은 무력에 기반 한 가족 공동체였다. 흰수염이 일당을 영입할 때 하는 말은 늘 “내 아들이 되어라”였다. 그는 자애로운 아버지였으나 그 자애는 가부장적인 권위에 기반 한 배타적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었다. 힘에 의한 질서는 그 힘이 약해지면 흐트러지고 만다. 결국 그는 한 아들(불주먹 에이스)을 구하기 위해 산하 해적단까지 이끌고 와서 정상결전을 벌였지만, 다른 아들(거대소용돌이거미 스쿼드)의 배신으로 칼에 찔리고, 끝내 목숨을 잃고 만다. 가족 공동체로 유지되는 것은 빅 맘 해적단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 해적단의 간부는 아예 빅 맘(샬롯 링링)의 자식들로만 구성되어 있다(자녀들이 46남 39녀다). 이들은 과자를 제때 주지 않는다고 한 나라를 파괴하는 욕망의 화신들이다.
    루피가 가족은 물론 은인이나 스승 앞에서도 반말로 일관하는 것도 그런 자유의지의 표현이다. 존댓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상대의 권위나 위엄이 자신을 능가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화법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을 높이지 않는 대신, 상대방이 쓰는 화법에도 개의치 않는다. 하나의 모험이 끝나고 승리를 자축할 때마다 밀짚모자 일당이 잔치를 벌이는 것도 주인과 노예가 뒤섞여 구별이 없어지는, 곧 모든 차별을 철폐한 자리에 동료들과 함께 있음을 확인하는 행동이다. 그들의 승리는 다양체의 승리, 곧 소수와 구별되는 다수, 귀족이나 부르주아와 구별되는 민중의 승리이다.

 

    민중·축제적 전통에서 (그리고 라블레에게서) 나타났던 향연의 이미지들은 초기 부르주아 문학에 나타났던 사적인 일상의 음식, 일상적인 과식과 음주의 이미지들과는 날카롭게 구별된다. 후자의 이미지들은 개별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의 현재의 만족과 포식, 개별적인 쾌락의 표현으로 나타나지 전 민중적인 승리의 표현으로 나타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노동과 투쟁의 과정에서 분리되었다. 이들은 민중의 광장으로부터 멀어졌으며, 가정과 방(가정의 풍요로움)이라는 영역에 들어박혀 있었다. 이는 더 이상 모든 이들이 참여하는 <전 세계를 위한 연회>가 아니라 기껏해야 문지방에서 구걸하는 배고픈 거지들하고나 나누는 가정의 소연회인 것이다. 만약 이러한 음식의 이미지들이 과장되어 나타난다면, 이는 탐욕의 표현이지 사회적 정의감의 표현은 아닌 것이다. (중략) 이와는 달리, 음식과 음료의 민중·축제적인 이미지들은 정적인 일상 세태나 사적 개인의 금전적 부유함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대단히 능동적이며 의기양양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사회적 인간과 세계의 투쟁 및 노동 과정을 완결 짓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미지들은 전 민중적인데, 이는 그 토대에 고갈되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물질적 기원의 풍요로움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바흐친,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3)

  3)  미하일 바흐친,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이덕형·최건영 옮김, 아카넷, 470-471쪽.

 

    부르주아와 귀족의 식사 공간은 복잡한 예절과 고급스러운 음식이 어우러진 개인의 공간이다. 이들의 욕망이 아무리 고급스러워 보인다고 해도 그 안에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전유(專有)의 욕망이 들끓는다. 이런 욕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무제한의 식탐을 뽐내는 빅 맘이 아니라 파이어 탱크 해적단 선장 카포네 벳지다. 그는 첫 등장부터 고급 레스토랑에서 혼자 식사를 즐기며, 대식가 쥬얼리 보니의 폭식을 보면서 “천박한 계집. 내 식사의 맛이 확 떨어지는군.”(51권 498화)이라고 화를 낸다. 그는 성성(城城) 열매 능력자로 자신의 몸 안에 무수한 병력과 무기를 숨겨 두고 있다. 부르주아의 탐욕에 대한 은유인 셈이다. 게다가 『원피스』에 등장하는 해적 가운데 드물게 부인과 아이를 아끼는 캐릭터다. 일부일처제의 미덕을 강조하고 핵가족을 삶의 단위로 제시한 것은 부르주아의 가치관이다. 반면 모든 이가 참여하는 왁자지껄, 야단법석의 식사 자리야말로 유한계급의 일상이나 부의 과시와는 무관한 민중적인 축제다. 여기서는 어떤 이도 차별하지 않으며, 어떤 이도 소외되지 않는다. 루피는 이런 왁자지껄한 식사자리를 추구하는 자신의 세계관을 이렇게 말한다.

 

    “영웅? 싫어! 우리는 해적이라구. 이를테면 고기가 있다고 쳐. 해적은 고기로 잔치를 벌이지만, 영웅은 고기를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녀석을 말한다구. 난 고기가 먹고 싶어.”(루피가 징베에게, 64권 634화)

 

    어인섬을 구하는 영웅이 되어 달라는 징베의 부탁을 거절하며 루피가 한 말이다. 이것은 루피의 식탐에 빗댄 농담이다. 루피가 영웅 되기를 거절하는 이유는, 영웅이 민중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선의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영웅은 다수와 구별되는 소수, 다양체가 아닌 중심, 리좀이 아닌 뿌리다. 그는 함께 참여해서 다양체의 일원이 되는 n-1이 아니라, 그 식사자리를 주관하는 시혜적인 인물, 이를테면 왕이나 아버지에 불과하다.

 

    4.
    그런데 밀짚모자 일당은 10명에 불과하다. 이들이 어떻게 다양체를 구성할 수 있을까? 이것은 이들이 동료를 영입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 그 기준은 힘의 유무가 아니다(특히 초기에 합류한 나미와 우솝은 전투력이 형편없었다). 물론 해적단이므로 항해에 필요한 인원과 전투를 주로 담당한 인원들이 영입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면면이 매우 독특하다. 루피는 어떤 이들에게 끌릴까?

 

    우리는 절대적이고 과장적이고 무조건적인 환대란 언어를 정지시키는 것으로, 어떤 한정된 언어를, 그리고 타자에게 건네는 말까지도 정지시키는 것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을까 자문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타자에게 그가 누구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어디 사람인지 등을 묻고 싶은 유혹조차 억제해야 하지는 않을까? 그러한 질문들은 환대에 필요조건들을, 그러니까 결국 환대에 한계를 통고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환대를 권리와 의무에 구속되고 폐쇄시키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까 결국 환대를 순환적 경제라는 테두리에 가두는 것이니 말이다. 이 딜레마는 끊임없이, 한편으로 권리나 의무나 정치까지도 초월하는 무조건적인 환대와 다른 한편 권리와 의무에 의해 테두리가 정해지는 환대 사이에서 우리를 번민하게 할 것이다.(데리다, 『환대에 대하여』)4)

 

    데리다의 이 글에서 환대의 대상은 ‘이방인’ 곧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타자(the other)다. 그는 나의 장소에 속하지 않으며, 내가 아는 언어에 포획되지도 않고, 나의 관습이나 믿음과도 일치하지 않는 자, 요컨대 나와는 절대적으로 다른 사람이다. 그를 초대하는 사람인 주인은 그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 대망(待望)의 손님인 이방인은 주인이 <오라>고만 하는 사람이 아니고 <들어오라>고 하는 사람이다. 머뭇거리지 말고 들어오라, 기다리고 있지 말고 우리 집에서 즉시 발길을 멈춰라, 빨리 들어오라, <안으로 오라>, <내 안으로 오라>. 내 쪽으로만이 아니라 내 안으로 오라. 요컨대 나를 점령하라, 내 안에 자리를 잡아라. 동시에 이러한 것이 의미하는 것은 나를 향해서 또는 ‘내 집'에 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숫제 나의 자리도 차지하라, 이다.”(같은 책)5) 그러니까 환대는 절대적으로 다른 이에게 문을 활짝 열고, 그가 나의 자리를 차지하기를 요청하는 것이며, 그에게 이름도 묻지 않고 권리나 의무도 지우지 않고 오직 제한 없이 내 자신(=우리)이 되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절대적인 환대다.
    루피가 동료를 영입하는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에게 우리가 되자고 제안하기. 그래서 밀짚모자 해적단은 점점 더 타자들로 북적거리며 증식하고 방산(放散)하는 그래서 끝내는 세계의 모든 이들을 ‘대표’하는 다양체가 되었다. 이들을 살펴보자.

  4)  데리다, 『환대에 대하여』, 남수인 옮김, 동문선, 2004, 141쪽.
  5)  같은 책, 133쪽.

 

    ① 루피, 조로, 상디는 이 해적단의 주요 전투원이다: 고무고무 열매를 먹은 고무인간 루피는 ‘온몸’을 동원해서 싸운다. 팔다리를 늘이거나 키우거나 감으면서 싸우고 심지어는 박치기를 하기도 한다. 조로는 검객이다. 근육을 단련하기도 하지만 적과 부딪치는 부분은 언제나 몸 ‘바깥’의 도구다. 요리사인 상디는 손을 보호하기 위해서 다리로만 싸운다(면발로 공격하는 CP7의 완제에게만 손을 썼는데, 이때는 싸움이 아니라 요리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셋은 몸, 몸 바깥, 몸의 일부로 대표되는 트리오다.
    ② 조로, 상디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우솝과 나미가 합류한다: 우솝은 저격수에 거짓말쟁이이고, 나미는 항해사에 도둑이다. 둘의 무력은 평범한 인간에 가깝지만 차츰 전투원으로 성장해 간다. 루피, 상디, 조로가 근거리 전투원이라면 우솝은 원거리 전투원이며, 루피, 상디, 조로가 육체를 무기로 쓴다면 나미는 두뇌로 싸운다.
    ③ 여성 캐릭터인 나미와 로빈은 처음에는 도둑, 적으로 출현했다가 동료가 된다. 해적단에 합류하지는 않았으나 동료로 인정받은 왕녀 네펠타리 비비 역시 처음에는 적이었다. 처음에 이들이 적의 입장에 선 것은 한 마을이나 섬이나 나라 전체의 운명을 짊어졌기 때문이다. 이들의 대의는 모험에 나선 다른 전투원들의 동기(해적왕이나 최고의 검객, 올블루의 요리사가 되겠다는 목적)보다 훨씬 더 숭고하다. 셋은 사연이 알려진 후 동료가 된다. 어쨌든 최초의 출현에서 이들이 적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밀짚모자 해적단에게 최초의 분열은 성차였던 셈이다. 이 구별은 금세 흐트러지는데, 이들 서로가 이 구별을 차별로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원피스』에서 최고의 우정을 보여주는 인물이 뉴하프인 Mr.2 봉 쿠레(그/그녀는 복사복사 열매의 능력을 이용해서 루피를 임펠다운에서 탈옥시킨 후 대신 감옥에 갇힌다)인 점에서도 확인된다. 남녀의 구별 내지 차별을 횡단하는(=무시하는) 인물이야말로 진정한 우정의 화신이다. 하나 더. 루피는 임펠다운에서 탈옥할 때, 정상결전에서 뉴하프만 왕국의 왕/여왕인 엠포리오 이반코프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받기도 한다.
    ④ 루피와 조로는 무지한 캐릭터들이다. 루피는 조금만 설명이 길어지면 잠이 들어버리고, 조로는 유명한 ‘길치’여서 도중에 길을 잃고 늘 현장에 뒤늦게 도착한다. 반면 나미는 현존하는 모든 실용적인 지식(재무관리에서 항해술에 이르기까지)의 대가이며, 로빈은 실전(失傳)한 지식을 찾아 전 세계를 여행하는 고고학자이다.
    ⑤ 쵸파는 사람사람 열매를 먹은 사슴이며, 징베는 어인이다. 이로써 밀짚모자 해적단은 인간과 동물 그리고 그 중간형의 존재를 모두 대표하게 되었다.
    ⑥ 프랑키는 부서진 몸을 개조한 사이보그이며, 브룩은 죽은 지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부활부활 열매 덕에 살아 있는(?) 해골이다. 이로써 이 해적단은 생물, (처음부터 생명이 없는) 사물, (처음에는 생명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는) 시체를 모두 대표하게 되었다.
    이로써 밀짚모자 해적단은 서로 다른 유형의 전투원들이자, 무지/지식, 남성/여성, 무력(武力)/무력(無力), 사람/동물, 생물/사물, 생명/죽음…… 이라는 서로 다른 성질[異他性]들이 차별 없이 모인 다양체가 되었다. 이들의 승리가 거듭될수록 세계에 평등과 자유, 환대와 우정이 확산될 것이다.

 

 

 

 

 

 

 

 

 

 

 

 

 

 

작가소개 / 권혁웅

1997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마징가 계보학』, 『소문들』,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등이 있음.

 

   《문장웹진 2018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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