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을 주는 소설과 질문하는 소설
- 작성일 2018-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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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비평가 특집]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제 막 자리매김한 '젊은'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부탁했다. 이들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습을 비트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어갈 한국문학의 풍경을 기대하며 '기획'의 지면을 연다.
답을 주는 소설과 질문하는 소설
― 임현의 「고두」와 김멜라의 「적어도 두 번」
인아영
1. 이 소설은 어떻게 읽힐 수 있는가
『21세기문학』 2018년 여름호 특집 《미투(#MeToo) 릴레이 매니페스토, 촛불1》1)에 실린 글에서 서영인 평론가는 김이설의 「부고」와 임현의 「고두」를 붙여 읽는다. 몇 년의 시차를 두고 발표된 두 작품을 나란히 놓고 읽어 보면 상당히 유사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고두」에서 제자와 성관계를 맺어 그녀를 임신시킨 윤리 교사 '나'는 「부고」에서 아내가 집을 나간 뒤 강간한 여자를 집으로 데려온 '은희'의 아버지와 겹쳐 읽히고, 또 「고두」에서 윤리 교사 '나'의 아이를 임신하여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혼자 아이를 기른 연주는 「부고」에서 '은희'의 아버지에게 강간당하여 임신한 아이를 키우게 된 여자와 포개진다는 것이다. 윤리 교사 '나'의 자기변명으로 이루어진 「고두」가 닫히는 시점에서, 아버지가 데려온 여자의 아들에 의해 윤간을 당한 '은희'의 이야기 「부고」가 열리는 것은 아닐까 독해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독법을 시도해 보는 까닭은 두 소설을 엮어 읽었을 때에야 「고두」의 "교사의 독백으로 윤색되고 은폐된 연주의 존재가, 혹은 같은 피해를 당한 구체적 인간들의 실물성"2)이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해의 목적은 「고두」를 폄훼하거나 단죄하려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비슷한 성폭력의 사건을 다룬 동시대의 두 작품을 하나의 서사로 연결해 읽음으로써, 이 소설이 가질 수 있는 현재적인 의미를 확장해 보는 것에 가깝다. 이를 통해 오늘날 한국 문학에 필요한 독법을 가다듬어 보는 동시에, 단독 작품에 대한 독해로는 가능하지 않은 문제의식을 선명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3) 그리고 그 문제의식의 핵심에 '소설은 성폭력 사건을 어떻게 재현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있을 것이다. 이 간단치 않은 물음을 우리 모두 '겪고' 있는 시점에서 서영인 평론가가 굳이 「고두」라는 소설을 불러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소설이 발표된 것은 2년 전이지만, 2017년 제8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하여 독자들에게 널리 읽힌 후로, '소설이 성폭력 사건을 재현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독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초점은 '이 소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라기보다는 '(독자들이 처한 다양한 맥락 속에서) 이 소설이 어떻게 읽힐 수 있는가'에 맞추어져 있다.
이 글 역시 「고두」라는 작품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현상과 독법에 대해서 다루려 한다. 여러 작품들을 "젠더폭력이라는 사건들 위에 얹힌 동시대의 연결된 서사"로 읽는 것이 "미투 이후 문학비평가"4)로서 해야 할 일이라면, 비교적 최근에 발표된 김멜라의 「적어도 두 번」(『자음과모음』 2018년 봄호)을 이 소설과 함께 읽는 것 역시 하나의 독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임현의 「고두」와 김멜라의 「적어도 두 번」을 붙여 읽음으로써 이러한 소설들을 읽는 독법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이러한 질문 제기는 문학에서 문제작이란 무엇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1)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특집은 미투 운동의 열기를 문학 장에서 이어가려는 취지로 마련되었다. 미투 운동에 관한 구체적인 질문에 여성 평론가들이 응답하는 형식의 글들이 실려 있으며, 2018년 여름호에는 강지희, 서영인, 오혜진, 이경진, 장은정, 정은경 평론가가 필자로 참여했다.
2) 서영인, 「미투 이후의 문학비평」, 『21세기문학』, 2018년 여름호, 224쪽.
3) 이러한 시도는 고전으로 불리는 문학작품을 여성의 입장에서 새로 써본 『릿터』 13호의 플래시픽션(김이설의 「운발 없는 생」, 김보현의 「미망기」, 천희란의 「암굴의 살인」, 손보미의 「반딧불이」)이나 페미니스트의 시각으로 한국 문학사를 새롭게 검토한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민음사, 2018)과 같이 오늘날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문학사를 새로 써보려는 시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4) 서영인, 위의 글, 227쪽.
2.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게' ― 임현의 「고두」
「고두」를 둘러싼 독자들의 반응에 대한 가장 기민한 응답 중 하나는 황현경 평론가의 「윤리냐 도덕이냐」5)가 아니었을까. 「고두」가 수록된 소설집 『그 개와 같은 말』의 해설을 쓰면서 임현의 작품들을 이미 꼼꼼하게 독해했을 그는, 이 소설을 불편해한 독자들이 "결코 간단하다고는 할 수 없는 소설적 재현의 작동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며 그 해석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의 주안점은 「고두」에서 제자와 성관계를 맺은 윤리 교사가 나름의 신념에 충실한 "꽤 도덕적"인 인물인 동시에 자기변명에 급급한 "덜 윤리적"인 인물이라는 사실, 그러니까 이 인물은 "옳지 않으나 틀리진 않"은 인물이라는 사실에 놓인다. 긴 고백 끝에 결국 자기폭로에 이르고 마는 이 모순적인 인물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비윤리적 인물에 질질 끌려 다니며 기어이 윤리냐 도덕이냐를 사유하게끔 했다"는 것이 이 소설에 대한 황현경 평론가의 요지이다. 그러므로 아이러니한 재현의 형식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 소설에 여혐 딱지를 붙이는 독해는 온당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 맞다. 그의 말대로 「고두」는 "윤리냐 도덕이냐"를 사유하게 하는 독법을 가능케 하는 소설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그 지점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 이러한 명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고두」는 이러한 독법을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게' 가능케 하는가? 즉, 여고생과 성관계를 맺고 그녀를 임신하게 만든 윤리 교사의 변명과 궤변은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게' "윤리냐 도덕이냐"라는 보편적인 사유로 읽히는가? 먼저 '어떻게'를 생각해 보면, 이 소설은 중년 남성 교사인 '나'가 자신이 임신시킨 여고생이 낳아 기른 아이에게 훈계하듯 고백하는 방식을 취한다.6) 그리고 '누구에게'를 생각해 보면, 일단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독자들에게는 이 고백의 서사가 적어도 '윤리냐 도덕이냐'라는 보편적인 사유의 틀로는 받아들여지긴 어려웠던 모양이라고. 소설 안팎에서 밀어붙이는 이 목소리를 지겹도록 들어왔다고 느끼며 그때마다 이 목소리로부터 소외되거나 대상화되었을 어떤 독자들에게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던 모양이라고 말이다.
뭇 독자들의 비판적 반응은 「고두」라는 소설 자체를 향한다기보다는 이 소설의 서사를 쉽사리 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의 문제라고 끌어올리는 독법을 향해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워진 까닭은 「고두」가 "여혐 소재를 단순히 탐닉하거나 재생산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 내에서 작동하는 가치 규범들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기만적인지를 폭로하기 위한 장치의 일부로 사용"7)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왜 그런 것도 모르냐는 준엄한 목소리에 자신들의 자연스러운 반응과 독해가 억눌리거나 틀린 것으로 구획된다고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문제가 소설이 아닌 독법에 있다면, 이제 「고두」라는 소설에서 논의를 연장해 나가기보다는 이러한 독법을 다각도로 조명해 볼 수 있는 다른 소설을 함께 읽어 보는 일이 한결 생산적일 것이다. 그러니 방향을 바꾸어 이렇게 상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만약 미성년과 성관계를 맺은 뒤 자신의 행동을 회고하며 변명하고 있는 화자가 「고두」의 '나'처럼 '중년' '남성' '교사'가 아니라면? 그처럼 존재의 조건만으로도 권위를 부여받은 화자가 아니라면? 예컨대 '20대' '여성' '학생'이라면? 게다가 한국 문학에서 좀처럼 드물게 재현되는 레즈비언이라면? 그래서 그녀가 가해자로 지목된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가 미성년 여성이라면? 그것도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라면? 그렇다면, 우리의 독법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5) 황현경, 「윤리냐 도덕이냐」, 『문학과사회』, 2017년 겨울호.
6) 이러한 방식은 황현경 평론가가 독자들의 반응 중에서 "그나마 경청할 만한 비판"이라고 인정한 물음, 즉 "윤리와 도덕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하필 여제자와 잔 선생을 등장시켜야 했냐는 물음"을 촉발한다. 그러나 그는 이 핵심적인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하는 대신, 「고두」가 '문단 내 성폭력' 고발이 시작되기 전에 쓰였다는, 다소 맥락이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이러한 사실 관계의 확인은 임현 작가를 불필요한 오해로부터 구제하는 데 필요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단 내 성폭력이 '폭로'된 시기는 이 소설을 둘러싼 독법과는 거의 무관하다. '문단' 내에서 성폭력 문제가 '폭로'되기 이전에도 한국 사회 전반에서 이러한 문제로 고통 받아 온 사람들이 존재해 왔으며, 「고두」에 대한 뭇 독자들의 비판적인 반응은 그것이 '폭로'된 시기 자체보다는 그러한 문제를 몸소 겪어 온 오랜 경험과 더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그나마 경청할 만한 비판"이라고 인정한 이 물음의 타래는 결코 적지 않았다. 이 글은 어쩌면 그가 제기했으나 답하지는 않은 이 물음에서부터 시작된 글이다. (황현경, 위의 글 참조.)
7) 이은지, 「자기기만 시대의 도덕과 사랑」, 『한겨레』, 2018.1.21.
3. '유파고'를 죽인 자리에 ― 김멜라의 「적어도 두 번」
이 몇 겹의 복잡한 질문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내고 있는 소설이 김멜라의 「적어도 두 번」일지 모른다. 이 만만치 않은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 먼저 줄거리를 소개해야겠다.
이 소설의 화자인 '나'는 레즈비언인 20대 여대생이다. '나'는 자신이 '유파고'라고 부르는 건축과 교수 남성에게 메일을 보내며 무언가를 고백하겠다고 한다. (그녀는 메일에서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유파고'로, '아버지'라는 단어를 '줄파추'로 바꾸어 쓴다.) 첫째로 그녀가 고백하려는 것은 자신이 세 살 때부터 자위를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중년 남성인 '유파고'에게 당신의 다섯 살짜리 딸의 클리토리스를 상상해 본 적이 있느냐고 질문하며, 이런 이야기가 불편하다면 '자위'라는 단어를 '지위'로, '클리토리스'라는 단어를 '클리토리우스'로 바꾸어 쓰겠다고 말한다. 둘째로 그녀가 고백하려는 것은 자신이 맹인학교 학생을 위한 복지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난 열여섯 살 여학생인 이테와 있었던 일이다. '나'는 "남다른 신체 발육과 당당한 자세"를 가진 건강하고 밝은 모습의 이테에게 수학을 가르치면서 점점 가까워진다. 어느 날 아파서 수업에 빠진 이테의 집으로 직접 찾아간 '나'는 뜨거운 죽을 옷에 쏟은 이테가 옷을 벗고 몸을 샤워기의 물로 씻는 것을 돕는다. 씻고 나온 뒤 따뜻한 침대 위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이테에게 자위하는 법을 알려주게 되고, 이테는 "재밌어요. 유파고랑 하니까."라고 말하며 적어도 두 번은 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테가 잠시 잠든 사이 갑작스러운 동정심에 휩싸여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핥는 순간 그 장면을 발각한 이테의 아버지에게 '나'는 고소를 당하고 만다. 이 이야기를 '유파고'에게 고백하면서, '나'는 둘 사이에는 아무런 강요도 없었기 때문에 자신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부끄러운 점이 있다면 이테를 동정했었다는 사실뿐이라고 말이다.
「적어도 두 번」을 「고두」와 겹쳐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두 소설에서 모두 화자가 실제로 미성년자를 강제로 추행했다고 볼 수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고두」에서 연주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을 남긴 채 학교를 떠나고 「적어도 두 번」에서 이테는 '나'에게 자위하는 법을 배운 뒤 호기심을 머금은 듯 "또 해도 돼요?"라고 묻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성년인 선생이 미성년인 제자와 성적인 관계를 맺은 뒤 스스로 그 사건을 회상하며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두 소설의 '나'는 모두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말을 길게 늘어놓지만, 고백이 거듭될수록 그것은 자기폭로에 가까워진다. 그러니까, 「고두」와 「적어도 두 번」은 '이성애자 중년 남자 교사'와 '동성애자 20대 여자 대학생'이라는, 정반대의 조건을 지닌 듯한 화자들을 내세우고 있지만 자기변호를 할수록 자기폭로에 가까워진다는 아이러니를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비슷하게 읽히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두 번」이 「고두」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이러한 긴 고백이 대상으로 삼는 청자다. 「고두」의 이성애자 중년 남자 교사 '나'가 자신이 임신하게 만든 여고생이 낳은 아이, 즉 자신의 가난한 자식에게 훈계하듯 고백한다면, 「적어도 두 번」의 동성애자 20대 여자 대학생 '나'는 자신과 한때 "은밀한 신뢰를 나눈 사이"였던 중년 남성인 건축과 교수에게 고해하듯 고백한다. 이 고백이 흘러가는 방향은 정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고두」에서는 권위를 가진 자가 권위를 가지지 못한 자를 향해 내려 보내는 고백이었다면, 「적어도 두 번」에서는 권위를 가지지 못한 자가 권위를 가진 자를 향해 올려 보내는 고백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적어도 두 번」의 '나'는 청자인 '유파고'가 자신의 고백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임을 상정하고 말을 하기 시작한다.
누군가에게 고백을 한다면 그 사람은 다른 이의 말을 잘 들어주거나 이해심이 많은 사람일 겁니다. 그렇다면 유파고는 노. 유파고는 학생들의 앓는 소리나 넋두리에 질색을 하니까요. (...)
여러모로 유파고는 제 고백을 들어줄 만한 분이 아닙니다. 더구나 섹슈얼에 관한 이야기는 오해의 소지가 많으니까요. 이십대 여학생이 남자 유파고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겠죠. 저도 이런 편지를 쓰게 될 줄 몰랐습니다.
저는 유파고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이 말이 대답이 될까요.
저는 매일 유파고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왜 이런 메일을 쓰는지 이유를 묻는다면 이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군요. 생각은 보통 '든다고' 하죠. 하지만 저는 유파고의 죽음이란 생각을 '만났습니다.' 지금부터 그 얘길 해드리겠습니다.8)
8) 김멜라, 「적어도 두 번」, 『자음과모음』, 2018년 봄호, 75쪽.
이 소설의 서두에서 흥미로운 것은 '나'가 '유파고'에게 고백을 하기 위해 그의 죽음을 만나야 했다는 사실이다. '나'가 '유파고'의 죽음을 상상한 이후라야 비로소 고백을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게 설명된다. 그것은 '유파고'가 "다른 이의 말을 잘 들어주거나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며 "학생들의 앓는 소리나 넋두리에 질색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가 자신의 고백에, 아니, 어쩌면 자신의 존재에도 관심이 없을 '유파고'에게 굳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어쩌면 「고두」와 함께 읽음으로써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두 소설의 두 '나'를 같은 자리에 포개는 방식이 아니라 두 소설을 연쇄적인 흐름으로 읽어내는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고두」의 윤리 교사는 「적어도 두 번」의 건축과 교수인 '유파고'가 아닐까? 그리고 「고두」에서 윤리 교사와 성관계를 맺어 임신하고 학교를 떠나야 했던 연주는 「적어도 두 번」에서 시각장애를 가진 미성년 여성을 추행했다고 고소된 여대생의 자리에 오게 되는 것은 아닐까? 물론 두 소설의 구체적인 정황이 다르기 때문에 사실적으로 연결되는 이야기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한때 유파고와 은밀한 신뢰를 나눈 사이였다"는 「적어도 두 번」의 '나'의 말에 기대어 두 소설을 붙여 읽는다면, 이 소설들에 대한 새로운 독법이 가능해진다.
「고두」의 연주가 「적어도 두 번」의 여대생이 되어 윤리 교사가 했던 것과 똑같은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발화하는 것만으로 부여받을 수 있었던 중년 남성 윤리 교사의 권위, 그래서 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의 문제로 곧장 독해될 수 있었던 그 고백이 가진 권위를 삭제해야만 했던 것 아닐까?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존재해야만 '독백'이 아닌 '고백'이 성립한다고 했을 때, 20대 레즈비언 여성인 자신의 고백이 윤리 교사의 것과 마찬가지로 (궤변이든 자기변명이든 자기폭로든) 어떤 목소리로 들릴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그 목소리가 가진 권위의 죽음을 상상해야 했던 것 아닐까? 20대 레즈비언 여대생이라는 '새로운' 주체의 성욕과 자위와 추행 자체가 너무도 낯설고 불편하고 곤혹스러울 누군가에게 발화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물론 이 소설이 20대 레즈비언 여대생의 목소리를 기입함으로써 이 목소리에도 어떤 권위를 부여하거나 힘을 실어 보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김멜라 작가가 「고두」를 의식하여 그에 대한 소설적 응답으로 「적어도 두 번」을 썼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소설은 어떤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니까 「적어도 두 번」의 '나'는 「고두」의 윤리 교사의 고백이 발화되었던 바로 그 자리에 똑같이 서봄으로써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고두」의 윤리 교사의 궤변이 곧장 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의 문제를 다루는 고백으로 끌어올려질 수 있었던 것처럼, 「적어도 두 번」의 여대생의 변명도 그렇게 읽히는가? 여고생과 성관계를 맺고 그녀를 임신하게 만든 윤리 교사의 난관을 이해했을 때처럼, 시각장애를 가진 미성년 여성을 추행했다고 고발된 20대 레즈비언 여대생의 곤경을 해석하기 위해서, 윤리, 도덕, 정치적 올바름, 보편의 문제, 인간의 이기심, 위선 폭로와 같은 단어들로 곧장 나아갈 수 있는가? 우리에게 지겹도록 익숙한 이 단어들을 해석의 틀로 삼아 「적어도 두 번」의 '나'의 입장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가?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왜인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 긴 고백을 곧장 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의 문제로 승화되지 못하게 만드는가?
그러니까 「적어도 두 번」에서 20대 레즈비언 여대생의 목소리를 들은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어떤 독법에 대해 제대로 질문하게 된다. 즉, 「적어도 두 번」은 「고두」가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게' 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의 문제로 독해될 수 있었는지 그 과정 자체를 묻게 한다. 우리는 누구의 어떤 목소리에 익숙한가? 그리고 누구의 어떤 곤경을 보편적인 문제로 받아들여 왔는가? 그동안 소외되었던 주체들을 적극적으로 문학사 속에 기입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적어도 두 번」은 지금까지 어떤 독법이 이루어져 왔으며 앞으로는 어떤 독법이 가능할 수 있을지에 대해 쉽고 선명하게 마무리 지을 수 없게 만든다.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독법의 난항 속에서 오래, 그리고 신중하게 머무르게 하는 것. 그것이 「적어도 두 번」이 우리에게 마련해 준 독해의 공간이다.
4. 오늘의 우리에게 문제작이란
「적어도 두 번」이 이러한 성취에 이를 수 있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이 소설이 20대의 레즈비언 대학생, 그리고 그녀의 성욕과 자위와 추행이라는, 한국 문학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낯선 대상을 주체로 등장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최근의 한국 문학에서 퀴어라는 존재가 점점 더 가시화되고 있는 주목할 만한 현상과도 맞물린다. "정체성을 고정하고 배치하는 규범적 권력을 넘어서서, 퀴어를 변화를 생산하는 범주로 사유"9)할 수 있다면, 퀴어라는 새로운 주체를 등장시켜 움직이게 하는 것만으로도 문학에서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국 문학 시장에서 '타자/소수자(성) 재현에 대한 실험'이라는 명분 없이 성소수자를 서사화하는 일은 거의 시도되지 않으며, 특히 '게이 서사'에 비해 '레즈비언 서사'는 그러한 명분의 중압감을 더욱 강하게 받는다."10)는 지적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곱씹어야 할 타당한 지적이다. 다만 최근에는 소수자성 재현의 실험에 머무르지 않는 레즈비언 서사도 한국 문학에 적지만은 않다는 것을, 김멜라의 소설과 더불어 기억해야 한다.11)
마지막으로 「적어도 두 번」이 남기고 있는 질문의 성격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이 소설이 20대 레즈비언 여대생을 주체로 등장시킴으로써 우리가 소설을 읽어 온 익숙한 독법을 질문해야 할 대상으로 밀어 넣고 있다고 앞서 언급했다. 그렇다면 소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좋은 질문이란 무엇일까? 만약 몇몇 비평의 해석대로 「고두」라는 소설을 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의 문제로 독해해 낸다면, 「고두」는 중년 남성인 윤리 교사의 자기고백을 통해 어떠한 도덕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명제를 훌륭하게 재현하고 있는 소설일 것이다. 만약 이 소설이 진리라고 확신한 것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서사라면,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화자의 말을 거듭 의심하게 하면서 도덕과 윤리의 낙차를 사유하도록 만들어진 서사라면, 그것은 의심 자체가 아니라 '의심해야 한다'는 믿음이자 답을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닐까. 이 경우에 「고두」는 좋은 답을 주는 소설일 수는 있지만 좋은 질문을 던지는 소설은 아니게 된다.
소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좋은 질문이란 그 작품이 속해 있는 당대 사회의 가망과 한계를 동시에 건드리는, 그래서 그 사회에서 이미 굳어진 익숙한 가치판단과 해석의 방식을 물음에 부치는, 결국에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해 왔던 문학이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일 수 있는지 점검하게 하는 질문이 아닐까. 그런 질문으로서의 소설을, 우리는 문제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9) 차미령, 「너머의 퀴어」, 『창작과비평』, 2017년 여름호, 56쪽.
10) 오혜진, 「비평의 백래시와 새로운 '페미니스트 서사'의 도래」, 『21세기문학』, 2018년 여름호, 254쪽.
11) 최근 1-2년 동안 '여성 퀴어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서사가 눈에 띄게 증가하는 추세다. 김멜라뿐만 아니라 권여선, 김혜진, 이나리, 이종산, 최은영, 최진영, 천희란, 황정은 등 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흐름 안에 있다. 지난 8월에는 이종산, 김금희, 박상영, 임솔아, 강화길, 김봉곤 작가가 참여하여 고전의 문학작품들을 현대의 퀴어 이야기로 다시 쓴, 큐큐퀴어단편선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큐큐, 2018)가 출간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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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18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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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의 경제 2(3) - 문학적 사용에 관한 비체계적 단상1) 강동호 1. 예술과 상품의 새로움을 구별할 수 있는 원리를 탐색하는 데 있어 ‘유용성’이라는 가치에 주목하는 것은 여전히 유의미한 출발점으로 보일 수 있다. 유용성의 관점에서 예술과 상품이 식별될 수 있다면, 양자의 새로움이 발휘하는 효과 또한 서로 다른 원리로 해명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상품 경제에서 새로움은 도구성과 결부된 차별적 정보 가치로 통용된다. 새로운 상품은 대개 기능적 유용성(사용가치)의 측면에서 과거의 상품과 구별되며, 뚜렷한 비교 우위의 원리에 따라 그 가치가 측정되기 마련이다. 이때 새로운 상품에 부여되는 더 높은 가격이라는 차이적 가치(교환가치)는, 한층 개선된 사용가치의 우월성을 통해 정당화될 수 있다. 반면 예술 작품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예술의 새로움 역시 과거와의 차이를 전제로 한 비교적 가치라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그 가치를 정당화하는 비교 우위의 척도(사용가치의 명시적 우월성)가 설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새로운 예술 작품은 과거의 것보다 한층 매력적으로 인식될 수 있고, 동시대의 감각에 보다 적합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과거 작품에 대한 일방적 우위를 뜻하지는 않는다. 이른바 유용성처럼 명확히 우열을 판별하는 기준이 부재한다는 사실은 예술에서의 새로움을 더욱 복잡한 가치로 만드는 주요 원인일 것이다. 2 예술의 자율적 가치를 정당화하고자 했던 전통적 이론들은 대체로 유용성의 결여 또는 그로부터의 자유를 예술의 핵심 본질 중 하나로 파악해 왔다. 유용하지 않다는 점, 즉 그 어떤 실용적 목적이나 기능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예술이 예술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때 유용성의 부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공통 척도의 결여를 통해 부각되는 교환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이다. 주지하듯, 이러한 사유의 계보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적 전환점을 제공한 인물은 칸트이다. 『판단력 비판』에서 그가 제시한 ‘목적 없는 합목적성’(purposeless purpose)이나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과 같은 개념은, 예술을 시장적 가치 평가와 경제적 교환의 논리로부터 구분하는 철학적 근거에 해당한다. 칸트에 따르면, 예술가는 그 어떤 외적인 목적에 의해 지배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을 생산해야 하며, 감상자는 이해득실과 무관한 순수한 향유를 통해 작품의 아름다움을 경험해야만 한다. 이처럼 예술의 자율성은 어떤 보상이나 대가에도 편향되지 않는 행위의 독립성과 무관심성에 깊이 맞닿아 있다. 이를테면 수공업적 기예는 임금이라는 대가를 전제하는 강제적 노동이지만, 예술은 그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기에 전적으로 자유로운 행위로 간주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이익과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경제적 주체(호모 이코노미쿠스)와 동일시할 수 없으며, 무용성은 이와 같은 비환원성,
- 관리자
- 2025-06-01
점과 획의 시간 ― 한강, 『빛과 실』1)로 『바람이 분다, 가라』2) 다시 읽기 이지연 1. 코스모스의 정원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별의 자녀들이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 ‘우주(宇宙)’라는 이름은 ‘예로부터 오늘, 위아래와 사방’을 가리키는 단어로 기원전 4세기경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모두 포함한 이 말은 천지만물(天地萬物)과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아우르는 세상의 총체를 뜻하는 것이었다.3) ‘우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에는 스페이스(Space), 유니버스(Universe), 코스모스(Cosmos) 세 가지가 있는데 각각 목적과 용도에 따라 다르게 쓰인다. 그중 ‘코스모스’는 혼돈, 무질서를 뜻하는 ‘카오스(χάος)’의 반의어로서 고대 그리스어로부터 유래됐다. 1980년 칼 세이건은 천문학과 우주에 대한 지식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겠다는 목적으로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거기에 ‘코스모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방영되자마자 전 세계 인구의 3%가 시청했다는 이 프로그램은 동명의 책으로도 출간되면서 현재까지 1,000만 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한 칼 세이건의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코스모스』가 처음 한국에서 번역된 것은 원본 출간 이듬해인 1981년이었다. 당시 번역자인 서광운은 ‘Cosmos’를 ‘우주’라고 번역했고, 이후 2004년 홍승수의 번역본에서는 원어 그대로 ‘코스모스’라는 단어를 썼다.4) 그가 번역한 『코스모스』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코스모스(COSMOS)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5)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를 한 번에 오가는 ‘모든 것’의 이치가 우주에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우주는 ‘스페이스’도 ‘유니버스’도 아닌, ‘질서’를 뜻하는 이름 ‘코스모스’로 불린다. 600쪽에 달하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세이건의 메시지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인간은, 나아가 모든 생명체는 그 탄생부터 소멸까지 모두 코스모스로부터 비롯되었다. 우리는 코스모스의 일부로서 코스모스의 자손이자 미래이다. 올해 4월, 문학과지성사는 한강의 산문집 『빛과 실』을 출간했다. 책의 제목은 작년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뒤 진행한 기념 강연의 제목을 땄고, 표지에는 그의 작은 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의 흑백 사진이 실려 있다. 온통 까만 배경에서 유독 흰 사각형의 무늬가 눈에 띈다. 책에 수록된 산문 「북향 정원」에서 한강은 볕이 들지 않는 정원에서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거울을 이용해 햇빛을 모아 주어야 한다고 썼다. 거울에 반사된 빛의 형상인 듯한 그것은 &lsqu
- 관리자
- 2025-06-01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 - 김멜라의 「이응 이응」1)을 읽으며 ‘사랑’을 생각하기 송연정 동그란 이응 “성욕은 만지고 닿고 싶은 마음과 어떻게 다를까.”2)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다만, ‘사랑 없는 섹스’라는 말을 생각해 볼 때, 어떻게든 다르긴 다를 것만 같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무수한 열망 중 하나가 성적인 끌림으로 발현될 수는 있지만. 성적으로 결합했다고 해서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말하기엔 다소 난감하다는 쪽이 우리에게는 훨씬 익숙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이러한 태도에서라면 성욕과 사랑 중 우위를 점한 쪽은 아마도 사랑이다. 사실 성욕은 사랑이 아닌 그 어떤 감정과 붙어도 대부분 진다. 적어도 성욕이 순전히 육체적인 충족만을 위해 발동된다는 전제하에서는 말이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이끌려 마침내 두 영혼이 공명하는 일은 낭만적이며 아름답고 심지어 숭고하지만, 몸과 몸의 결합은 충동적일뿐더러 한때이고 가끔 추잡하기까지 한 것 같다. 몸을 열등한 것으로 깎아내리며 그와 관련한 일체의 욕망을 부정하고 터부시하는 일은 우리의 오랜 습관이기도 하다.3) 그러나, 만지고 닿고 싶은 마음은? 상대를 만지고 싶고 또한 상대의 손길이 나에게로 향했으면 하는 애욕은, 어쩐지 성적인 뉘앙스를 함의하고 있는 듯하면서도 정서적인 이끌림을 수반하는 것도 같기에 더욱 미묘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김멜라의 「이응 이응」은 ‘이응’이라는 둥근 캡슐을 통해 성욕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나아가 앞선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마련해 본다. 「이응 이응」의 세계관에서 이응은 공원이나 목욕탕, 미술관이나 도서관, 학교와 주민센터와 병원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상용화된 기계이다. 사람들은 거대한 물방울처럼 생긴 캡슐 형태의 이응으로 들어가 “손오공의 머리띠처럼 생긴 은색 띠를 머리에 두르기만 하면 됐다.”(32쪽) 남성과 여성 혹은 그 너머의 스펙트럼 속 정체성의 명도를 조절하고, 성적 끌림 대상과 정서적 끌림 대상, 끌림의 크기, 받고 싶은 곳과 하고 싶은 곳··· 이외에도 몇 단계의 설정을 완료하고 나면 이응이 작동한다. “근육의 수축과 경련 그리고 이완. 오감을 채워 주는 이미지에 둘러싸여 양극과 음극의 전기 자극에 따라 맥박수와 혈압이 상승하고 나중에는 모든 긴장이 풀리며 상쾌해진다. 무의식 상태로 들어서게 하는 델타파부터 휴식과 이완을 주는 알파파까지. 이응은 단계별로 뇌파의 변화를 유도해 우리의 몸과 의식을 열린 상태로 만들어” 주는(30쪽), 그야말로 청결하고도 건강하며 합법적인 성욕 해소 기계인 것이다. 이응의 현자는 바야흐로 새로운 로맨틱의 시대가 열렸다고 말했다. 번식과 성욕, 사유재산이 만들어 낸 오랜 통치술의 사슬을 끊어 내고, 진실로 사랑의 의미를 깨우친 이들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를 맺는 반려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다고 말했다.
- 관리자
- 2025-05-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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