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인문학 ― 와포루, 빅 맘, 사카즈키, 호디와 ‘악’
- 작성일 201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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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원피스인문학]
"실체가 없는 공허한 적이다"
― 와포루, 빅 맘, 사카즈키, 호디와 '악'
권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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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무서운 뉴스가 쏟아진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 이웃들을 잔인하게 해쳤다는 소식들이다. 전남편이 아내를, 혼자 된 남자가 헤어진 연인과 그 가족을, 예비신랑이 예비신부를, 고등학생이 이웃집 소녀를, PC방 손님이 아르바이트생을 무참히 살해했다. '치정'이나 '원한', '심신미약'과 같은 말이 범행동기 칸에 적히겠지만 그것은 원인이 아니라 벌어진 일의 '알 수 없음'에 대한 분식(粉飾)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희생자들이 지금의 처지로 자신을 내몰아서, 평소 자신을 무시해서, 1000원을 돌려주지 않아서, 심지어는 그저 호기심으로 죽였다고 말한다. 저 사건들에는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상대를 '해칠 수 있는' 능력 내지 자격을 자신이 갖고 있다고 여겼다는 것.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육체적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상대를 소유물 내지 사물로 여겨 함부로 부수거나 파괴해도 된다고 여겼다. 그들은 이런 무서운 권력을 어떻게 부여받았을까? 왜 그들은 자신이 아닌 모든 자들을 파괴해도 좋은 장난감처럼 여겼을까? 상대에게 위해를 끼치는 모든 생각이나 행동을 우리는 나쁘다고 말하지만, 그중에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곧 그 근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는 생각이나 행동은 특별히 '악하다'고 말한다.
원피스 세계 역시 약육강식의 세계여서 다양한 악의 형상들이 출현한다. 악은 늘 선과 짝을 이룬 개념이다. 그런데 선/악이라는 영역은 원피스 세계의 두 대립세력인 해군/해적이라는 실체적 범주와 겹쳐져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 일당이 법에 의해서는 악으로 정립된 해적들이다. 밀짚모자 해적단은 원피스 세계를 횡단하면서 선의 이름 뒤에 숨은 악과 악의 이름 아래 모인 선의 실체를 폭로해 나간다. 원피스 세계의 몇몇 인물들을 통해서 악의 범주를 살펴보기로 하자.
2
'선/악'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옳음/그름'이라는 뜻이 하나라면, '좋음/나쁨'이라는 뜻이 다른 하나다.
두 경우는 매우 다른 내용을 뜻합니다. 옳음/그름은 초월적 가치 기준과 의무 개념을 함축하지만, 좋음/나쁨은 내재적 가치 기준과 행복/기쁨의 개념을 함축하기 때문이죠. 옳음/그름은 왜 초월적 가치 기준을 전제하느냐? 철수가 영희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합시다. 순수하게 내재적으로만 보면 영희가 그 거짓말 때문에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영희가 새로 산 옷이 철수가 보기에는 영 아닌데 그렇다고 진실을 이야기했다간 그날 분위기를 완전히 망치겠죠. 그럴 때는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덕의 관점에서 보면 "거짓말은 그른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도덕적 판단은 철수와 영희 사이의 내재적인 지평 바깥에 어떤 초월적인 기준이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도덕적 판단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는 "~해야 한다"는 의무의 개념을 함축하고 있어요. 반면에 좋음/나쁨을 느끼는 것은 철수와 영희 당사자들이죠. 무언가에 비추어서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내가 좋으면 좋은 것이고 나쁘면 나쁜 것이죠. 그리고 남과 나의 사이가 좋아지면 좋아지는 것이고 나빠지면 나빠지는 것입니다.1)
1) 이정우, 『개념-뿌리들』 2권, 철학 아카데미, 2004, 206-207쪽.
'옮음/그름'으로 파악된 선/악이 도덕원칙의 문제여서 초월적인 명령의 형식("너는 ~해야 한다, ~해서는 안 된다")을 갖는다면, '좋은/나쁜'으로 파악된 선/악은 쾌/불쾌의 문제여서 내재적인 선택의 형식("나는 ~이 좋다, 싫다")을 갖는다. 악(惡)이 '싫어함, 미움'이란 뜻의 오(惡)로 읽힐 때는 전자가 아니라 후자일 때다. 악의 개념은 후자의 영역에서 전자의 영역으로 추론, 확장, 발전해 나갔을 것이다. '쾌적하지 않은 것, 좋아하지 않는 것'이 '올바르지 않은 것,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된 셈이다. 그렇다면 악의 최초의 모습은 '좋음'[善]의 부정으로서의 '나쁨'[不善]이었을 것이다. 선이 '분별'되지 않은 것, 곧 과도하거나 모자란 것이 악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는 지배하고 인도하는 두 가지 원리가 있어서, 우리는 그것들을 따르면서 그것들이 이끄는 쪽으로 끌려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네. 그 하나는 타고난 것으로서 쾌락에 대한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나중에 획득한 의견인데 이것은 가장 좋은 것을 좇는다네. (중략) 의견이 이성을 따라서 가장 좋은 것으로 이끌면서 힘을 쓰면 이 힘에는 분별이라는 이름이 붙지만, 욕망이 이성 없이 쾌락으로 끌고 가면서 우리 안에서 득세하면, 이런 지배에는 무분별이라는 이름이 붙네. (중략) 욕망이 먹기를 탐하면서 가장 좋은 것에 대한 이성적 판단과 다른 종류의 욕망들을 억누른다면, 그런 욕망은 식탐(食貪)이고, 이것은 그 소유자로 하여금 바로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할 것이네, 그런가 하면 음주에 대한 욕망이 독재자 노릇을 하면서 그 욕망의 소유자를 그쪽으로 이끈다면, 그 사람이 어떤 이름으로 불릴지는 자명한 일이네.2)
2) 플라톤, 『파이드로스』, 조대호 옮김, 문예출판사, 2008, 37-39쪽.
우리 안에 있는 것으로 상정된 두 가지는 '쾌락(hēdonē)에 대한 선천적인 욕망'과 '좋은 것에 대한 후천적인 의견(epikētos doxa)'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둘은 상극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에 부가된 것, 다른 하나를 제어하는 것이다. '쾌락'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그것이 지나치게 추구되었을 때가 나쁜 것(=악한 것)이며, 그래서 이를 제어하는 기능을 ‘분별’ 혹은 ‘절제(sōphrosynē)’라고 부른다. 식도락은 쾌락이지만 식탐은 악이며, 음주는 쾌락이지만 과도한 음주벽은 악이다.3) 선으로서의 쾌락이 과도해졌을 때 악이 된다면, 악은 바로 그 ‘과도함(excess)’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 죄악도 여기에 해당한다.
식탐, 탐욕, 나태, 분노, 교만, 욕정, 질투
식탐은 먹는 즐거움이 과도해진 것이요, 탐욕은 소망이 과도해진 것이며, 나태는 휴식이 과도해진 것이요, 분노는 정의감이 과도해진 것이며, 교만은 자부심이 과도해진 것이요, 욕정은 사랑이 과도해진 것이며, 질투는 사랑에 과도한 소유욕이 결합된 것이다. 모두가 좋은 것으로서의 즐거움이 과도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단계에 오면 이미 '악'은 과도함이라는 '좋음/나쁨'의 범주에서 '옳음/그름'의 범주로 옮겨간다. '좋음/나쁨'이 종교에 포획되자 '옳음/그름'이라는 초월적인 것, 신적인 행위/금지명령의 일부로 바뀐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런 범주의 이동을 되돌리려고 했다.
선과 악에 대하여 말하자면, 이것들 또한 우리들이 사물을 그 자체로 고찰할 경우 사물에 있어서의 아무런 적극적인 것도 지시하지 않으며, 사유의 양태나 우리가 사물을 비교함으로써 형성되는 개념일 뿐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사물이 동시에 선이고 악일 수 있으며 또한 양자와 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음악은 우울한 사람에게는 좋고, 슬픈 사람에게는 나쁘며, 귀머거리에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중략) 선이란 우리가 형성하는 인간의 본성의 전형에 점차로 접근하는 수단이 되는 것을 우리들이 인지하는 것이고, 악이란 그 전형에 유사하게 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을 우리들이 확실히 아는 것이다. (중략) 1. 우리들에게 유익하다고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을 나는 선(bonum)으로 이해한다. 2. 우리들이 선한 어떤 것을 소유하는 데 방해되는 사실을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을 나는 악(malum)으로 이해한다.4)
4) 스피노자, 『에티카』, 강영계 옮김, 2007, 244-246쪽.
음악이 각각의 사람들에게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을 수도 있다고 할 때, 그 '좋음/나쁨'은 '옳음/그름'과는 무관한 '쾌/불쾌'의 범주에 속한다. 스피노자는 이 범주에 따라서 선이란 우리에게 좋은 것(정확히는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요, 악이란 우리가 선한 것을 소유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不善]이라고 보았다.5)
최초의 악은 이처럼 선(좋음, 쾌락)의 과도함 내지 무절제로서 출현했으며, 종교의 세례를 거치면서 초월적인 범주에 귀속된 것으로 보인다. 원피스 세계에서 이런 악을 체현하고 있는 인물들은 대개 코믹하게 그려지거나 풍자적으로 그려진다.
5) 스피노자를 무신론자로 보는 것은 그가 이처럼 선/악을 초월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는 '기쁨'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나는 기쁨을 정신이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으로 이해하지만, 슬픔은 정신이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으로 이해한다."(같은 책, 166쪽) 선 곧 쾌적하고 유익한 것은 우리 자신의 능력을 증가하게 하며 그때 느끼는 감정이 '기쁨'이므로 기쁨만이 본원적인 감정이다. 슬픔은 기쁨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때 느끼는 방해받은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맛, 죽인다. 알았나, 국민들아. 이 나라에 있는 건 모두 내 과자다. 이 몸이 왜 위대한지 가르쳐줘라, 쿠로마리모!"
"그건 당신이 왕이기 때문입니다, 와포루님."
"그래! 역시 집은 태워 먹어야 제 맛이지!"(와포루, 15권 136화)
와포루는 드럼왕국을 다스리던 폭군이었다. 해적이 쳐들어오자 나라를 버리고 달아났다가 해적이 가버리자 다시 왕이 되기 위해서 돌아온다. 그는 우걱우걱 열매 능력자로 모든 것들을 먹어치우는 탐식(貪食)의 대가다.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칼과 배를 뜯어먹더니, 자기 나라에 도착해서는 마을에 불을 지르고는 집들을 통째로 씹어 먹는다. 그에게 '다스린다'는 것은 '먹어치운다'는 뜻이다.
우걱우걱 열매의 장점은 먹어치운 것들을 다시 산출하는 데 있다. '우걱우걱 쇼크'라는 기술은 먹어치운 것들을 자신의 몸에 구현하는 기술이며(대포를 먹고 손이나 입을 대포로 변형시키는 식이다), '우걱우걱 팩토리'는 먹어버린 것들을 자신의 체내에서 합성시키는 기술이다(이 기술로 두 부하인 '체스'와 '쿠로마리모'를 '체스마리모'로 합쳐버렸다). 그러나 인간에게 이 과정은 '배설'에 불과하다. 체내에서 음식은 분자 단위로 낱낱이 분해되어 재활용된다. 산출이나 합성은 꿈도 꿈 수 없다. 마침내 그는 그 자신을 먹어치운다.
"으윽! 요새 좀 쪘나! 그럼 이러면 되지! 우걱우걱 팩토리! 날 먹는다!"
"우거우걱! 꿀꺽!"(와포루, 17권 150화)
그러고는 입만 남기고 제 몸을 먹었다가 다시 입으로 날씬한 몸을 토해 낸다. 이 장면은 그리스 신화의 에뤼시크톤, 힌두 신화인 키르티무카를 떠올리게 한다. 허기를 못 이겨 자기 자신을 먹어치운 인물들이다. 탐식이 '자신마저 먹어치웠다'는 것은 지나친 욕망이 '자기의식마저 집어 삼킨다'는 뜻이다.
과도한 욕망에 휘둘려 제 자신을 잃은 자, 자기절제로 욕망을 통제하지 못한 자로는 빅 맘도 빼놓을 수 없다. 사황 중 한 명인 빅 맘 샬롯 링링은 자신이 다스리는 왕국의 전력과 통치자를 자식들로만 채웠다. 사황 흰수염과 대조되는 지점이다. 흰수염이 부하들을 일러 '가족'이라고 선언할 때 그 말은 '이 나라 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한 가족이다)'는 이상(理想)의 표현이었다. 반면 빅 맘에게 가족은 실제로 자신이 낳은 혈육만을 의미했다. 게다가 자식을 낳은 후에는 남편마저 내치거나 죽였다. 빅 맘에게 가족이란 자식으로만 이루어진, '자기'의 확장 내지 증식(增殖)에 해당한다.
빅 맘에게도 병적인 식탐이 있다. 그녀는 불과 다섯 살에 과자를 주지 않는다고 거인족 마을을 몰살하고 용사를 죽였으며, 생일 케이크를 정신없이 먹다가 은인인 마더 카르멜과 고아였던 가족들을 모두 먹어버렸다.
"하아, 행복해. 정신없이 먹다가 탁자까지 물어뜯어 버렸네. 웁. 다들 정말 고마워. 나 평생 오늘을 쭉······ 어라? 얘들아? 마더? 어디 갔어?"(어린 샬롯 링링, 86권 867화)
당사자는 마더와 아이들이 어딘가로 가버렸다고 여기지만 이 사건 이후에 샬롯 링링에게 마더의 능력이 생긴 것으로 보아 마더와 아이들이 식탐의 결과로 희생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토트랜드 에피소드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빅 맘은 그 엄청난 능력과는 무관하게도 생일 케이크가 쓰러져 먹지 못하게 되자 정신이 붕괴해 버린다. 이후 이야기는 허기로 인해 급격하게 노쇠해 가는 와중에도 "생일 케이크"를 외치며 루피—벳지 연합군을 쫓아오는 빅 맘의 추격담으로 채워진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자식들을 죽이고 자신의 영토를 파괴하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과도한 욕망, 그것은 악의 시작이다.
3
처음의 악은 과도하거나 무절제한 좋음[善]이라는 형식으로 출현했다. 그런데 '옳음'이라는 의미의 선에서도 악은 자라 나온다. 앞에서 '옳음/그름'은 초월적인 당위/금지의 형식으로 바뀐 선/악이며, 따라서 초월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근대가 되면서 초월은 외재적인 것(신)에서 내면적인 것(윤리)으로 넘어온다. 근대인은 신의 명령이 아니라 이성의 판단에 따라 '옳음/그름'을 판별한다. 근대인에게 행위의 옳고 그름을 나누는 주체는 이성이며, 이성이 이 판단을 내리는 기준은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선택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법칙이다. 따라서 이 법칙(도덕법칙)은 선악보다 먼저 주어져야 한다. 칸트에 따르면 "선악의 개념은 도덕법칙에 앞서서가 아니라, 오히려 도덕법칙에 따라서(도덕법칙의 뒤에) 그리고 도덕법칙에 의해서 규정될 수밖에 없다."6)
6) 칸트, 『실천이성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 138쪽.
선악의 개념들은 (중략) 이성의 범주들처럼, 객관들과는 관계하지 않는다. 선악의 개념들은 오히려 이 객관들을 주어진 것으로 전제한다. 선악의 개념들은 모두 단 하나의 범주, 곧 인과성 범주의 양태들이다. (중략) 이 인과법칙은 자유의 법칙으로서 이성이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이고, 그로써 자기 자신이 선험적으로 실천적임을 증명하는 바이다.7)
7) 같은 책, 141쪽
칸트에게 선악은 객관적인 외부 세계와 관계 맺는 것이 아니다. 선악은 오직 인과성만을 따르며 이 인과법칙은 "자유의 법칙으로써 이성이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순수이성이 객관적인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를 목적으로 한다면, 선악과 관련된 이성(실천이성)은 그와 무관하다. 실천이성은 판단의 근거를 외부의 어떤 것에서도 찾지 못하며, 오직 자기 자신의 판단에 따라(=자유롭게) 행동한다. 내가 옳다고 믿었으므로 이 행동은 옳다. 이것이 실천이성이 유일하게 따르는 인과의 원리다. 이것은 내용과는 무관한 것, 따라서 전적으로 형식적인 것이다. "오로지 형식적인 법칙만이 (중략) 실천이성의 규정 근거일 수 있는 것이다."8)
여기에는 무엇인가 도착적인 면이 있다. "그것을 행해야만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행할 수 있다고 의식한다."9) 이것은 당위(해야 한다)가 행위능력(할 수 있다)을 규정하는 것인데, 거꾸로 '해야 한다'의 근거는 순전히 형식적인 것, 내가 옳다고 믿는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것에 따라서 행동해야 하며, 그렇게 행동해야 하기 때문에 행동할 수 있다. 지젝은 라캉의 말을 따라 칸트의 도착이 사드의 실천으로 귀결되었다고 말한다.
8) 같은 책, 140쪽.
9) 같은 책, 265쪽.
사드는 우리가 악이라는 내용을 발견하는 것을 선의 자리에 갖다 놓은 것뿐이다. 달리 말해서, 사드가 타인을 자신의 성적 향락을 위한 수단으로 아무 제약 없이 사용할 때 그것은 그가 완전한 충성을 바치는 그 자신의 선이다(혹은 밀턴의 『실낙원』 속 사탄을 인용하면 "악, 그대는 나의 선이다!"). 우리는 '악'은 그것의 형식 자체가(무조건적인 윤리적 서약) 선의 형식으로 남아 있는 내용이라는 생각을 뒤집어야 한다. 선과 악의 차이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의 차이이다.10)
10) 지젝,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박정수 옮김, 그린비, 2009, 515쪽.
칸트에게도 사드에게도 선/악은 실체적인 것, 내용적인 것이 아니라 순전히 형식적인 것이다. 사드는 칸트가 선하다고 믿은 자리에 악을 대치한 게 아니라, 자신이 선하다고 믿은 것(성적 향락을 위해 타인을 희생하는 것)을 열심히 실천했다. 그 결과 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행위능력에 비추어보았을 때 선한 것은 악한 것과 구별되지 않게 되었다.
원피스 세계에서 바로 이런 선, 그 자신이 옳다고 믿는 순수하고 강렬한 의지에 따라 행동하였으나, 결코 그 결과가 선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인물이 해군 원수 사카즈키(일명 아카이누)다. 그에게 해군은 선한 세계의 수호자이며 해적은 박멸해야 해야 하는 악이다. 이것은 사카즈키에게는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인 행위준칙이다. 그런데 선악이 이처럼 형식이 아니라 내용(실체)에 구현되면 실제의 선악이 가려지고 만다.
해군은 세계정부를 지키는 군대이며, 세계정부는 800년 전 20명의 왕들이 모여서 구성한 연합정부다. 이 20명 왕들의 후예(네펠타리 왕족이 빠져서 실제로는 19개 왕족)를 세계귀족 혹은 천룡인이라 부르는데, 원피스 세계에서 악한 짓들은 골라서 저지르는 망나니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신 혹은 창조주의 후손이라 부르며, 원피스 세계의 모든 종족들을 미천한 동물 취급한다. 천룡인 중 하나인 차를로스 성(聖)은 세계정부 회의에 참석한 가맹국 어인섬의 공주인 시라호시를 진귀한 수집품이라 하여 납치하려 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로즈워드 성은 칠무해이자 소르베 왕국 국왕이었던 바솔로뮤 쿠마를 소나 말처럼 타고 다녔다. 사카즈키의 믿음에 따르면 천룡인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선한 자들이다. 사봉디 제도에서 차를로스 성이 비슷한 망나니짓으로 루피에게 얻어맞자, 사카즈키는 보르살리노를 파견하여 이를 응징하려고 한다. 정상결전에서도 그는 음모와 협잡으로 거대소용돌이거미 스쿼드를 속여 흰수염을 배신하게 만들었다. 요컨대 그는 자신이 선이라 믿는 천룡인들을 지키기 위해, 또 악이라 믿는 해적을 박멸하기 위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선을 실천하는 괴물 내지 선이라 믿는 악을 추구하는 인물이 사카즈키다.
4
'좋음/나쁨'에서 파생된 과도한 선으로서의 악, '옮음/그름'과 관련된 선의 이름으로 추구되는 악을 살펴보았다. 이 두 가지로도 현존하는 악을 대부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악이 더 있다. 선과 상관적인 개념으로서의 악이 아닌, 그래서 좋음이나 옳음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악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 악은 정의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이런 악을 '심연으로서의 악' 내지 '공허한 악'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악마는 3천 년 동안을 앉아 있으면서 어떻게 인간을 파괴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중략) 악마적인 것은 공허한 것, 지루한 것이다. (중략) 권태와 소멸성은 바로 무(無)에서의 연속성이다. (중략) 3천 년을 강조하는 것은 갑작스러운 것을 부각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그 엄청난 시간의 길이는 악이 무서운 공허함이며 끔찍스럽게도 공허한 것이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11)
11) 키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임규정 옮김, 한길사, 343-346쪽.
이 악은 텅 빈 악, 어떤 가치도 없고 어떤 연속성도 없으며 그저 무한히 이어지는 무와 권태만이 지속될 뿐인 악이다. 추구해야 할 어떤 목적도 없을 때, 그래서 어떤 행동이든 그저 우연의 주사위던지기와 같은 행동이 될 때, 모든 행동은 필연적으로 악해진다.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인류가 저지른 악이 바로 이런 악이었을 것이다. 악으로 선언된 하나의 금지명령(동산의 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선 안 된다)을 인간이 어긴 것은 무한히 이어지는 권태에 굴복했을 때다. 그 열매를 먹기 전에는 권태는 영구히 이어졌을 것이고, 이때 인간은 그 권태를 이기기 위해 무엇이든 저지른다. "진부하고 소외된 일상을 흥미진진한 대상으로 되살릴 수 있는 약은 악뿐이다."12) 이것은 죽음충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것이다. 죽음충동이란 무한한 권태로서의 삶, 어떤 흥미도 선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텅 빈 심연으로서의 삶에 붙여진 역설적인 이름이다. 이들은 이 권태로운 무의미를 휘젓기 위해서 대량살상도 마다하지 않는다. 파시즘의 강령이 바로 이것이며, 이 때문에 그들은 역설적으로 선을 가장한다.
12) 테리 이글턴, 『악』, 이매진, 오수원 옮김, 2015, 88쪽.
악의 고결하고 금욕적인 천사 같은 면은 타락한 육신을 초월해 무한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런 현실 도피는 세상을 공격해 모든 가치를 박탈당한 공허한 상태로 만든다. 현실 도피는 세상을 무의미한 물질로 환원시키며, 그렇게 되면 악의 악마 같은 면은 무의미한 세상에 탐닉할 수 있게 된다. 악은 늘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상정하거나 적은 의미를 상정하거나, 둘 다 동시에 한다. 악의 이런 양면성은 나치즘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나치 일파들은 희생과 영웅적 용맹과 혈통의 순수성에 관한 '천사 같은' 허풍으로 가득 차 있는 동시에 죽음과 비존재에 홀딱 빠져 프로이트 학파가 '도착적 쾌락(obscene enjoyment)'이라 부른 것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었다.13)
13) 같은 책, 96쪽.
파시스트들이 내세우는 것은 숭고한 목표지만, 그것은 그 뒤의 무와 심연을 은폐하기 위한 가림막에 지나지 않는다. 초창기의 성공을 넘어서 히틀러는 독일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이길 수 없는) 목표를 설정하고 전선을 확대했다. 패배가 명확해지자 총통은 독일의 모든 시설과 인민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죽음충동은 그 파괴적인 행위 속에서만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는, 무의미로서의 악이다.
어인섬의 신어인해적단을 이끄는 호디 존스가 바로 이런 악을 체현한 인물이다. 그는 어인 우월주의자로 어인섬을 다스리는 국왕 넵튠을 죽이고 어인섬을 장악한 후에, 지상의 인간들을 절멸시키려고 한다. 게르만 우월주의자들로 유태인들을 죽이고 세계를 장악한 후에, 다른 모든 인종을 절멸시키려고 했던 나치들과 판박이다. 호디는 어인들을 무시했던 인간들에게 '복수'하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떠벌렸지만, 사실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인간과 공존할 것을 주장했던 평화주의자 오토히메 왕비를 저격해서 죽인 것도 실은 호디였다. 인간이 왕비를 죽였으므로 복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말이다.
난 너희들을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중략) 난 기필코 너희 인간에 대한 복수를 이루고 말겠다!"(호디 존스)(후카보시, 65권 641화)
"과거, 너의 신변에 얼마나 엄청난 일이 일어났던 것이냐? 인간은 대체 네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후카보시가 호디 존스에게)
"아무것도."(호디 존스의 대답, 회상 장면)
"놈들의 한에는 체험과 의지가 결여돼 있어! 실체가 없는 공허한 적이다!"(후카보시가 루피에게, 65권 643화)
인간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복수하겠다는 것이냐는 후카보시(넵튠왕의 장남)에게, 호디 존스는 대답한다. "아무것도." 그저 무(nothing). 그에게는 동기도 목적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복수하겠다"는 말은 원한의 표현이 아니라 그저 아무렇게나 던진 말, 자신의 파괴적인 행동(악)을 그럴싸하게 보이게 만드는 가림막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실체가 없는 공허한 악이었던 것이다. 루피에게 패배한 후에 호디 존스와 일당들은 하루아침에 노인들로 변해버린다. 일종의 스테로이드약인 ES의 과다복용 탓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은 그 '늙음'은 저 공허한 악의 속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늙음이란 아무 희망(목표와 의지)도 없는, 3천 년과 하루가 다르지 않은 무의미한 시간에 붙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ES는 실은 에덴동산에 놓여 있던 그 나무의 열매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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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1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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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REWIND]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그 슬픔의 음역 -강성은의 「고딕 시대와 낭만주의자들」(《문장 웹진》 2008년 6월호) 최하연(시인,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글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생각하면―.’ 떠오른 첫 문장은 이랬다. 이 첫 문장의 그 앞 문장은 없으므로, 돌아갈 곳이 없으니, 불능의 세계인데, 나는 없는 출발점으로 자꾸 돌아가고 있다. 어쩌면 나는 몇 덩어리의 문장을 쓴 뒤에, 원래의 첫 문장을 지우고 다시 썼는지도 모른다. 쓰던 글을 재차 읽어 가며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나면, 그땐 첫 문장을 또 고치게 될까. 그렇게 고친 문장이 사실 저 앞의 문장이라면―아니 고친 뒤에 읽어 보니 아까 것이 나은 듯싶어 고민 끝에, 원래대로 돌려놓은 문장이라면―출발점 없는 출발점은 글 안에 있고, 여전히 불능한 첫 문장은 불능을 모른 채 남게 될 것이다. 2008년 5월호 문장 웹진엔 강성은의 시 「고딕 시대와 낭만주의자들」이 실려 있다. 이 글의 진짜 출발점은 사실 여기이다. 뾰족한 첨탑 위에 갇힌 누군가 구름에 편지를 써요 그럴 때 구름은 검은 빗방울을 뚝뚝 떨어뜨리지요 구름의 얼룩진 편지를 읽은 어떤 이들은 울음을 멈추고 검은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도시엔 무서운 전염병이 돌고 녹색의 박쥐 떼가 공중을 날아다닙니다 창백한 입술을 잃은 자들은 곧 두 손과 머리털을 잃고 두 눈알과 심장을 잃었지요 점점 희미해져 우리는 우리를 잃었지요 당신과 나의 비밀 이야기는 입속에서 입속으로 공기와 밤의 중얼거림을 통과하고 얼룩진 편지는 얼룩 고양이가 물고 밤의 담장 너머로 사라집니다 우리는 내일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지만 내일의 악몽을 점칠 수는 없었어요 빗방울은 때로 격렬하게 내립니다 한 방울 뒤에는 수천만 우주의 모든 물방울들이 뾰족하고 오래된 첨탑 위의 편지는 전해 오는 이야기 속에서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 갑니다 우리는 첨탑 위로 답장을 보내는 법을 모르고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슬픔의 음역을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고딕 시대와 낭만주의자들」 전문 회고가 실패의 알리바이를 지워 내듯, 전망이 이 지울 수 없는 실패의 유예이듯, 지속 가능한 내일에 대한 일반의 믿음 또한 불능을 모르는 불능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언제나 힘이 셌다. 우리는 그것을 산문의 세계로 불렀고, 시는 산문의 세계로부터 이격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나아가 그곳에서 늘 첫 문장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내일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지만/ 내일의 악몽을 점칠 수는 없”는 것처럼, 그렇게 시작한 시는 늘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산문의 세계로 붙잡혀 돌아오는 “내일의 악몽”이다. 이 정황에는 하나의 커다란 허방이 있다. 누가 누의 내일이 될 수 있는가. 혹은 되어야만 하는가. 시인은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슬픔의 음역”을 발견한다. 그런데 빙점은 과연 물의 내일일까, 얼음
- 관리자
- 2025-08-01
[에세이] 스물의 체스 유지혜 생애 처음 체스를 배웠다. 체스는 내 왕을 사수하면서 상대의 왕을 공격하는 전략 게임이다. 내 편에는 총 16개의 기물이 주어진다. 앞줄에는 폰(pawn)이 줄지어 서 있고, 뒷줄에는 왕, 퀸 등 다양한 말들이 대칭을 이루며 자리하며 각 기물마다 고유한 움직임이 있다. 킹(king)은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움직임이 적다. 생존이 최우선 인지라 보통 다른 말들의 보호를 받으며 자리를 보존한다. 반면 작은 몸집으로 제일 많이 싸우는 건 앞줄의 작은 말 폰(pawn)이다. 그러나 나는 폰의 쓸모를 무시했다. 한 칸씩만 움직이는 폰이 지루했기 때문이다. 대각선을 가로지르는 비숍(bishop)으로 판을 압도하고 싶었고, L자로 움직이는 나이트(knight)로는 상대가 시야에서 놓친 구석을 공격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근사하고도 빨리 이기고 싶었다. 결국 큰 말을 무리하게 내세우다 졌다. 그때 게임을 같이 두던 상대가 내게 말했다. 폰, 이 쫄병을 쭉쭉 내보내는 것도 중요해. 하찮아 보여도 얘가 뭘 지켜줄지 몰라. 체스판처럼 인생에도 전략과 기세, 무엇보다 여러 번의 기회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너무 빨리 망하지 말라고, 인생에는 젊음이라는 폰이 주어지는 줄도 모른다. 폰처럼 젊은 날은 가치는 적은 대신 여러 개이기 때문이다. 아직 무엇이 될지 모르는 인생의 한복판에서 기껏해야 한두 걸음 내딛는 시기. 젊음은 헐값에 좋은 것을 쟁취할지도 모를 기회이다. 하지만 스물엔 그 누구도 전지적 작가 시점에 있지 않다. 앞수를 읽는 노련함은 없다. 가장 작은 몸집으로 큰 세상을 향해 나가는 폰의 시점일 뿐이다. 스스로의 위치조차 가까스로 가늠할 수 있을 뿐. 좀 더 가면 헐값에 잡아먹힐 것 같다는 불안이 몰려올 수도 있다. 더 대범했어도 되었다는 건 순전히 그 시기를 지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갓 성인이 된 2011년, 나에게도 스물이라는 핑계로 얼떨떨한 용기를 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대학에 진학하지도, 술을 마시지도, 첫 애인을 사귀지도, 여행을 가지도 않았다. 대신 압구정에 있는 모델 학원을 등록했다. 어릴 적부터 사람들은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인 내게 모델을 권했기 때문이었다. 지망했던 대학에 불합격한 나에게는 아득할 만큼 시간이 많았다. 뉴코아 아울렛에서 5만원을 주고 산 빨강색 게스 구두를 신고 몸매를 드러내는 옷차림의 나는 한쪽 벽 전면이 거울인 연습실에서 워킹을 연습했다. 우리 기수에는 타고난 것으로 먹고 살고자 하지만 그렇다 할 독기는 보이지 않는 이십 대 초반 언저리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자신감이 충만한 건지 없는 건지 분간하지 어려운, 겉멋이 잔뜩 들었지만 그로 인해 활기찬 사람들이었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몇몇 친구들과 나는 금세 친해졌다. 그들은 당시 유행했던 발렌시아가 가방을 어디서 제일 싸게 구할 수 있는지를,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립스틱의 품명을, 이마 보톡스의 효과를 알았다. 그들은 어른의 세계에 진입한 이들이었으나 나는 아니었다. 다들 택시를 타고
- 관리자
- 2025-08-01
[에세이] 날마다 한 걸음 고수리 상경했던 날을 기억한다. 버스를 타고 다섯 시간을 달려 강남터미널에 도착했다. 대합실을 나서자마자 길을 잃었다. 인파 속에 덩그러니 나 혼자. 서울 한복판에 뚝 떨궈진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서울의 첫인상은 삭막한 회빛, 그리고 몹시 추웠다. 눈이 푹푹 내리던 강원도는 사방이 희고도 따뜻했는데. 나는 목도리를 둘둘 고쳐 매고 한 걸음 내디뎠다. 서울은 복잡하구나. 시끄럽구나. 무심하구나. 아무도 웃지 않는구나. 애꿎은 지하상가를 헤매다 얽히고설킨 출구를 빙빙 돌다가 겨우 개찰구를 찾아 전철표를 샀다. 전철을 타 보는 것도 혼자선 처음 해 보는 일이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전철 손잡이를 붙들고 서서 노선도를 올려다보았다. 풀빛으로 주욱 이어진 선을 따라 도착할 역사는 ‘온수(溫水)’. 따뜻한 물이라는 이름이 그나마 위안처럼 스몄다. 온수역에 내려 자취방을 찾아갔다. 대로변 가로 이어진 인도를 한참 걸어가다가 멈춰 섰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새겨진 해태상을 맞닥뜨렸을 때, 기이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돌아보니 ‘안녕히 가십시오 서울특별시입니다’라는 표지판이, 바로 맞은편에는 ‘어서 오십시오 경기도 부천시입니다’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나는 경계에 서 있었다. 아니, 이 기이한 기분의 실체는 기시감일지도. 불안하고 난처한 마음 한구석에 익숙하고도 지긋한 체념이 몰려왔다. 나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서울과 부천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을 한 걸음 넘어섰다. 거기에 내가 살 방이 있었다. 내 사정 역시 고학생들의 유구한 상경의 역사와 다를 바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고, 집안 형편이 어려웠고, 집세는 감당할 수 없으니, 학교 근처에 가장 싼 방을 수소문해 들어갔다. 상경해 처음으로 얻은 방은 월세 18만 원짜리 남녀공용 고시원 방이었다. 한낮에도 침침한 복도를 걸어가 방문을 더듬어 열 때마다, 엄마가 이 방을 안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형광등부터 켰다. 창문 없는 길쭉한 방. 방문을 걸어 잠그고 웅크려 누우면 어둡고 눅눅한 관 속에 눕는 기분이었다. 얇은 합판을 덧대어 가른 방은 방음이 되지 않았고, 간간이 들리는 기침 소리와 통화 소리, 텔레비전 소리에 사람들이 나란히 누워 살아 있구나 실감했다. 아침마다 등교하는 대학교는 서울시 구로구 온수동에 있었다. 밤마다 돌아가는 고시원은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에 있었다.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랬다.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3년을 유학하고, 졸업 후에 잠시 강원도 삼척시에서 지냈다. 삼척은 엄마의 고향이자 내가 중학교 시절을 보냈던 도시지만, 거기도 선뜻 내 고향이라고까지 말하긴 어려웠다. 나는 오래전부터 떠돌며 살았다. 아무도 모르게 함구해야 할 사정이란 게 삶을 짓누를수록 나는 가벼워져야 했다. 짐 하나만 꾸리면 잠시나마 살아갈 사람처럼, 짐 하나만 꾸리면 언제라도 사라질 사람처럼. 갑작스럽고 비밀스럽게
- 관리자
- 2025-08-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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