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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 작성일 2019-01-01

[문학 리뷰(시)]




당신이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 리뷰) 이민하, 「누드비치」(문학동네, 2018, 가을호), 양안다, 「deja vu」(현대시, 2018, 10)




장은영





1


아시다시피 오늘날 시의 곤란함은 언어의 '바깥'을 언어화하려는 데 있다. 예술의 통념에 저항하면서 출발한 현대 예술이 재현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파울 클레) 만들고자 했던 것처럼, 그것의 한 장르로서 시는 언어를 매개로 언어를 초과하는 역설 위에서 이전 시대를 넘어섰다. 그렇게 도달한 오늘의 시 쓰기란, 언어의 상징적 의미를 해체하는 데서 나아가 재현의 논리를 거부하며 조직화 되지 않은 감각의 잠재성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동시대의 시인이 뚫고 넘어서야 하는 것은 우리의 눈과 감각을 조종하는 견고한 재현의 세계와 그것의 논리에 길든 언어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시 쓰기를 수행하는 이들이 맞서고 있는 것은 언어 일반이 아닌 자신의 모국어로서의 언어이다. 모국어의 아름다움과 숭고를 노래한 지난 세기의 시인과는 달리 동일시적 재현의 논리를 거부하는 현대 시인은 모국어를 무기로 모국어 안에서 배치된 감각의 질서를 넘어서야 하는 부조리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2000년대 이후의 우리 시에서 외국어로 된 지명이나 인물의 이름이 빈번히 출현하는 것도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발음조차 힘든 낯선 언어는 관습적 읽기를 방해하고 반사적인 의미 형성을 무너뜨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소리와 의미의 간격이 벌어지자 언어와 그것이 재현하는 대상의 간극이 드러나고 언어는 불안정한 기호임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그러나 당연한 얘기지만 모국어를 넘어서는 일이 모국어를 파괴하거나 외국어를 삽입하여 이국적 감각을 환기하는 단순한 기교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한 시인이 모국어로서의 언어와 마주 선다는 것은 이국적 분위기를 시의 장식물로 사용하는 경우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언어를 초과하는 시적 언어를 창조하기 위해 시도되는 모국어와의 '맞섦'은 모국어에 함축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담론과의 대결이며 한 사회공동체의 질서와 체제 안에서 분배된 감각을 재편하는 과정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그 행위의 결과는 모국어의 세계로부터 추방되면서 동시에 해방되는 역설의 증표와도 같은 낙인이자 왕관인 미적 자율성을 또다시 갱신한다.
지난 가을과 겨울 동안 문예 매체에 발표된 시들을 추려 보면서 ― 이것은 무척 제한적이고 주관적인 절차였음을 밝힌다 ― 모국어의 질서로 통합되지 않는 낯선 언어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기존의 것들과 접목되고 동화될 수 있는 쪽을 새로운 언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도 통합되거나 소비되지 않는 잉여와 같은 것을 낯선 언어라고 말해도 될까? 달리 말해 그것은 상식적 감각이나 합리적 의미 체제 등 모든 관습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을 응시하는 언어이다. 또한 말해지지 않는 언어의 바깥을 드러내기 위해 언어적 질서가 없는 세계로 탈출하는, 마침내 언어적 주체의 의식으로 회귀하지 않을 언어이다.
사소한 물건일지라도 용도를 알 수 없는 낯선 것을 집안에 들이기는 쉽지 않듯 낯선 언어를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불편한 어감이나 의미의 무지 때문이라기보다 낯선 언어가 몰고 오는 감각의 이질성이나 부조화를 경험해야 하므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시적 언어의 방향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새롭거나 참신한 것과 무관하더라도 투명할 만치 선명한 세계를 의심하게 만드는 낯선 언어를 향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낯선 언어는 지금의 언어가 재현하는 세계, 말에 의해 가시적으로 드러난 세계에 대하여 기존의 언어가 말하지 않은 부자유와 불평등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이민하 시인이 "남루한 모국어를 벗고"(이민하, 「누드비치」) 난 후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묻고 있듯이 재현의 논리에 길들여지지 않은 낯선 언어는 그 자체로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2


'누드비치'란 말은 어쩐지 온전한 자유를 향유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이국적 장소를 떠올리게 한다. '나체 해변'으로 바꿔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누드비치'라는 말에서 풍기는 황홀한 나른함은 금방 사라질 것만 같다. (사라진다니, 무엇이? 본 적이 없는 세계가 사라진다고?)


누드비치라는 말은 기분이 좋다
먼 나라 사람 이름 같다


달리는 말 위의 소나기 같고
골목 끝 신혼집에서 불어오는 콧노래 같고 그곳에선
밤이면 까르르 한 쌍의 깃털베개도 날아다닌다


말을 달려도 말을 멈춰도 소나기는 내린다
베개 솔기가 터지도록


찢어지게 웃다가 찢어지는 연인과 찢어지게 가난해서 찢어지는 가족과 찢어지게 낡아서 찢어지는 책들과
속수무책이 쌓여서
읽을 수 없는 날이 오고


- 이민하, 「누드비치」 부분(《문학동네》, 2018, 가을호)


이민하 시인의 「누드비치」 앞부분이다. 시적 화자는 소극적인 태도로 언어가 환기하는 기분을 떠올리고 있다. "누드비치라는 말은 기분이 좋다"라고 말하면서 화자는 소리의 유사성에 따른 언어유희를 즐기듯 "귀르비치 말코비치 이바노비치" 등 "먼 나라 사람 이름"들을 불러낸다. 그리고 곧이어 달콤한 베개 싸움이 벌어지는 "신혼집"에서 들리는 "까르르" 웃음소리가 이어지고, 소나기 속에서 말을 달리는 장면도 등장한다. "누드비치"라는 단어만으로도 어떤 기분과 장면들이 거의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중이다. 그러나 4연에 이르면 화자는 갑자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속수무책"인 기분에 빠진다. "찢어지게 가난해서 찢어지는 가족과 찢어지게 낡아서 찢어지는 책들"이 환기되었기 때문이다. "누드비치"에 대한 상상 때문에 좋았던 기분이 사라지고 난 후에, 화자는 자동기계처럼 자기 스스로 의미를 재현하는 언어를 의식하며 "읽을 수 없는 날이" 왔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비로소 질문한다. 언어를 읽을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언어 없이도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시의 중반부에 이르면 화자는 "누드비치"란 단어가 야기하는 연상에서 벗어나 자기 앞에 펼쳐진 세계를 본다. 그리고 거기서 언어와 국경으로부터 배제된 벌거벗은 몸과 마주친다. '본다'라는 행위는 벌거벗은 몸과의 마주침이라는 사건이 되고 그제야 시적 화자가 반사적으로 떠올렸던 달콤하고 나른한 "누드비치"의 환영은 사라진다. "누드"는 벌거벗음이란 사건을 드러내는 기표가 되고 이제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말해지지 않은 '봄'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가.


창 밖의 창 밖의 창 밖의 별들을 더듬으며


과거를 알고 싶어요?
나체로 말을 하면 이야기가 달라질까


그런데 왜 양말은 신고 있죠?
그것이 이름표라는 듯이
아직 벗을 게 더 남았다는 듯이


국경을 벗으면 세계는 하나라는 듯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얼기설기 발 담근 지중해 어디쯤


난민들은 난민의 옷을 벗고
남루한 모국어를 벗고
그을린 피부색을 벗고


모든 걸 벗고 나면 새사람이 될까
뼈대를 벗고 핏줄도 벗고
죽고 나면 모든 게 투명해질까


열 달 동안 물을 건너 우린 국적을 얻었는데
난파된 바다 위에는 기다리는 꼬부랑 산파도 없이


- 이민하, 「누드비치」 부분(《문학동네》, 2018, 가을호)


주권 밖으로 내몰린 채 국적도 없이 바다를 표류하는 난민은 지금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난민 문제를 전면화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의 궁극적 문제제기는 난민을 외면하는 환대 없는 세계의 비정함에서 조금 더 나아간다. 시인은 모국어와 국경을 넘어서는 벌거벗은 몸을 통해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하나는 난민이 상징하는 벌거벗은 생명이다. "얼기설기 발 담근 지중해 어디쯤"이란 구절이 암시하듯이 벌거벗은 생명이 존재하는 곳은 구체적으로 언표화 되지 못하는 비-장소이다. 국적을 잃은 그들은 자신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장치들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상징적 질서 내에서는 그들이 어디 있는지 또 누구인지 말할 수 없다. 벌거벗은 몸으로 우리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증명할 수 없는 존재로 간주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보았지만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다면, 우리가 본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벌거벗은 몸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리'가 본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난민은 언어적 재현을 초과하여 그 자체로 하나의 질문인 존재이다. 국적도 모국어도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몸은 아무말 하지 않고도, 두려움과 경계의 시선으로 낯선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 우리에게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되돌려준다.
여기서 다시 "모국어"와 "피부색을 벗고" "모든 걸 벗고 나면 새사람이 될까"라는 구절을 천천히 따라가 보자. 그러면 모국어와 국적을 가지기 전 어떤 의미도 부여받지 않은 순수한 생명으로서의 몸을 마주하게 된다. 벌거벗음, 그것은 주권으로부터 배제된 희생양적 존재지만 그것을 본다는 것은 다만 비극적 타자를 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아감벤의 말처럼 벌거벗음을 본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앎이 아니라 "객관적 속성 이전이나 그 너머에 있는 순수한 지식-인식의 가능성"1)을 깨닫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민하 시인이 난민의 벌거벗음을 보며 '봄'에 대해 반성적 사유를 시작하게 되었듯이.
시인이 제기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우리의 감각을 은폐하는 언어의 억압에 대해서이다. 말해진 것, 즉 말로써 재현된 것은 볼 수 있지만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없다면 우리가 가진 모국어로써의 언어란 감각을 배제하는 억압적 재현 도구에 불과함을 의심해야 한다. "나체로 말을 하면 이야기가 달라질까"라는 문장에서 엿보이듯이 시인은 "누드"와 "나체"에서 벌어지는 의미의 틈을 사유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재현할 수 있다고 믿는 합리적 언어에 따르기를 거부한다. 시인은 동일한 의미라고 간주되는 "누드"와 "나체" 사이에 무수한 의미의 스펙트럼이 존재함을 발견한다. "누드"라는 기표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대응하지 못한 채 끝없이 의미의 차이를 만들어내며 틈을 벌리는 하나의 구멍이고 시인은 그것을 응시하고 있다.
랑시에르의 말을 참조하면 대상을 지시하여 부재한 것을 소환하고 감춰진 것을 드러내는 말(하기)에 의한 '보게-만듦'은 실제로 고유한 억제를 통해 기능한다.2) 이때 말은 기존의 재현 체제에 종속된 도구이며, 이것에 의한 '보게-만듦'은 자율적 감각작용에 의한 '봄'을 제한한다. 문제는 자율적 감각작용이 억압되면 보이는 것이 평등하게 재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적 언어는 '보게-만듦'으로부터 벗어나 감각의 자율성을 획득하고자 시도된, 말을 초과하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이민하 시인에게도 시적 언어란, 국경 안쪽의 규범과 질서가 기입된 모국어를 넘어섬으로써 불평등한 재현체제를 거부하고 억제된 감각적 경험을 되살리는 낯선 이방의 말인 셈이다. 벌거벗은 몸에게서 흘러나오는 소리와도 같은.

1) 조르조 아감벤, 김영훈 역, 『벌거벗음』, 인간사랑, 2014, p.131.
2) 자크 랑시에르, 김상운 역, 『이미지의 운명』, 현실문화, 2014, p.204.


어느 새벽, 소년이 정신을 차렸을 땐 모르는 장소를 헤매고 있었다 그곳은 낡고 비 냄새를 풍기는 아파트였는데, 소년은 그곳을 왜 헤매고 있는지, 어쩌다 그곳에 가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출구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건물이었다 오랜 시간 복도를 헤맨 끝에 소년은 아무 문이나 붙잡고는 두드리기 시작했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저 이곳에 있는데요……


그러니까 문제는 창문이라는 것입니다


난생 처음으로 열차를 탑승했다는 남자와 있었던 일입니다
(중략)
나는 남자의 코에서 쏟아진 코피가
남자의 손을 적시는 걸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작스럽게
두 다리 위로 구토를 해버렸습니다


닫고 싶은 입을
닫지 못한 채로


서로의 고통을 카피하면서


한국 남성은 프랑스 여성과 위험한 놀이를 시작한다 한낮이면 한국 남성은 자신의 손목과 선로를 단단히 묶었고 동시에 프랑스 여성은 이른 아침에 자신과 선로를 연결시켰다 그들은 선로에 누워 눈을 감는다 먼 곳에서 열차 오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점점 증폭되는 진동을 느끼기 전까지


어째서 환각은 언제나 편도인 걸까요 머릿속을 휘젓고는 이내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는 열차라도 되는 걸까요 나는 반복된다 반복되어 매일 죽는다 눈을 감으세요 두 눈을 감고 어둠 속에서 옅게 번지는 빛을 바라보세요 갈라지는 빛의 파편을 바라보세요 그곳에서 나는 죽는다 그곳에서 반복되어 매일 살아나고 다시 죽는다 누가 나를 되감는 것이겠습니까


(중략)


꿈속에서 꿈밖을 바라보듯이


나는 계속 뒤집어진다


열차의 창문은 풍경을 자꾸 바꾸는데


- 양안다, 「deja vu」 부분(《현대시》, 2018, 10)


꿈을 텍스트화한 이 시를 통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논리화될 수 있는 서사 구조가 아니다. 프로이트의 꿈 이론을 참조하면 논리적 사고를 이미지로 변환하는 꿈의 작업은 사고와 언어를 퇴행시키고 인과관계를 단순한 병렬로 바꿔 놓는다. 이 시 역시 논리적 동일성을 결여한 서사가 "갈라지"고 "파편"화 된 다층적인 발화를 만들어낸다. 여러 인물이 동시에 이야기하는 듯한 발화는 꿈의 속성을 그대로 반영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은유의 구조를 띤 꿈의 증상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꿈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먼저 '소년'에 주목해 보자. 소년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미숙한 존재이고 혼자의 힘으로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출구는 어디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이기도 하다. 심지어 소년은 누군가 "방향을 가리키면/ 그곳이 출구라고 믿은 채/ 달려"가 또다시 위기에 처하는 부조리를 반복한다. 소년이 누구인가에 대한 확증은 없지만 화자의 꿈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시적 화자 자신에 대한 은유로서 화자가 지닌 퇴행적 욕망의 형상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소년으로의 퇴행을 통해 화자는 현실세계에 대한 거부나 회피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화자에게는 자기 앞에 펼쳐진 재현된 세계로서의 현실이 출구 없는 견고한 감옥처럼 억압적 공간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소년이 등장하는 꿈이 말하듯, 재현된 세계가 시적 화자에겐 하나의 감옥이라면 그 매개는 언어이다. 따라서 그곳에서 탈출하려는 화자는 곧 언어의 질서로부터 해방되려는 주체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언어를 넘어서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양안다 시인에게 언어를 넘어선다는 것은 언어의 질서와 논리를 거치지 않은 꿈처럼 제각각으로 펼쳐지는 시각적 감각의 세계를 경험하는 일이다. "뽑아 놓은 눈알이 테이블 위를 굴러가"는 비현실적 상상은 바로 그러한 시각적 경험, 즉 재현의 논리에 갇히지 않고 해방된 자의 눈으로 세계를 보려는 열망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해방의 열망은 동시에 재현된 세계에서의 죽음을 대가로 치름으로써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언어를 넘어 의미화 되지 않은 실재로서 세계를 보기 위해선 "창문" 밖에 펼쳐진 심연과도 같은 의미의 부재를 피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의미의 세계를 허물고 나면 그 자리엔 또 다른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하게 펼쳐지는 공백이 있을 뿐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공백이야말로 재현된 세계의 죽음을 의미하는 증상임을 시인도 직감하고 있다. 사실 "매일 살아나고 다시 죽는"다는 고백에서 이미 시인은 죽음 충동을 고백했다. 선로에 자신의 몸을 연결하는 "위험한 놀이"에서도 드러나듯이 시인은 삶의 본능에 은폐되었던 파괴와 해체의 충동을 드러내며 삶의 방향과 의미를 지시하는 재현의 논리를 거부한다. 그는 재현된 세계에서의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공백으로서의 세계와 마주하려는 불온한 충동을 숨기지 않는다.
양안다 시인에게 꿈은, 언어를 넘어서야 도달할 수 있는 시적인 것의 저장소이다. 의식의 오류이거나 실수로 "환각"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꿈을 "머릿속을 휘젓고는 이내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는 열차"에 비유한 까닭은 그것이 의식에 귀속되거나 포착되지 않은 영역임을 주장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해방된 눈으로 세계를 평등하게 볼 수 있기를 열망하면서 시인은, 줄곧 언어와 의식의 틈을 추적해 나간다. 언표 될 수 없는 그 틈을 "꿈", "deja vu", "환각"이라는 부재의 장소로 명명하면서 시인은 현실이라고 불리는 재현된 세계 내부로 그 공백의 장소를 끌어들인다. 서로 다른 두 세계의 경계가 교란되고 그로써 꿈은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얻으면 데쟈뷰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잠재된 세계의 존재를 암시하는 데쟈뷰, 이것은 시인이 꿈의 세계를 현실세계와 의도적으로 병치시켜 본 궁극적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시인의 의도가 성공적이라면 "서로의 고통을 카피"하듯이 꿈과 현실이 마주 보고 뒤섞일 때, 현실화된 적 없는 가능성으로써 잠재된 세계는 질문하기 시작할 것이다. 말해진 것을 보고 있는 당신에게 당신의 눈으로 감각하라는 요청이자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작가소개 / 장은영

201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문장웹진 2019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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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01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 - 김멜라의 「이응 이응」1)을 읽으며 ‘사랑’을 생각하기 송연정 동그란 이응 “성욕은 만지고 닿고 싶은 마음과 어떻게 다를까.”2)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다만, ‘사랑 없는 섹스’라는 말을 생각해 볼 때, 어떻게든 다르긴 다를 것만 같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무수한 열망 중 하나가 성적인 끌림으로 발현될 수는 있지만. 성적으로 결합했다고 해서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말하기엔 다소 난감하다는 쪽이 우리에게는 훨씬 익숙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이러한 태도에서라면 성욕과 사랑 중 우위를 점한 쪽은 아마도 사랑이다. 사실 성욕은 사랑이 아닌 그 어떤 감정과 붙어도 대부분 진다. 적어도 성욕이 순전히 육체적인 충족만을 위해 발동된다는 전제하에서는 말이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이끌려 마침내 두 영혼이 공명하는 일은 낭만적이며 아름답고 심지어 숭고하지만, 몸과 몸의 결합은 충동적일뿐더러 한때이고 가끔 추잡하기까지 한 것 같다. 몸을 열등한 것으로 깎아내리며 그와 관련한 일체의 욕망을 부정하고 터부시하는 일은 우리의 오랜 습관이기도 하다.3) 그러나, 만지고 닿고 싶은 마음은? 상대를 만지고 싶고 또한 상대의 손길이 나에게로 향했으면 하는 애욕은, 어쩐지 성적인 뉘앙스를 함의하고 있는 듯하면서도 정서적인 이끌림을 수반하는 것도 같기에 더욱 미묘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김멜라의 「이응 이응」은 ‘이응’이라는 둥근 캡슐을 통해 성욕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나아가 앞선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마련해 본다. 「이응 이응」의 세계관에서 이응은 공원이나 목욕탕, 미술관이나 도서관, 학교와 주민센터와 병원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상용화된 기계이다. 사람들은 거대한 물방울처럼 생긴 캡슐 형태의 이응으로 들어가 “손오공의 머리띠처럼 생긴 은색 띠를 머리에 두르기만 하면 됐다.”(32쪽) 남성과 여성 혹은 그 너머의 스펙트럼 속 정체성의 명도를 조절하고, 성적 끌림 대상과 정서적 끌림 대상, 끌림의 크기, 받고 싶은 곳과 하고 싶은 곳··· 이외에도 몇 단계의 설정을 완료하고 나면 이응이 작동한다. “근육의 수축과 경련 그리고 이완. 오감을 채워 주는 이미지에 둘러싸여 양극과 음극의 전기 자극에 따라 맥박수와 혈압이 상승하고 나중에는 모든 긴장이 풀리며 상쾌해진다. 무의식 상태로 들어서게 하는 델타파부터 휴식과 이완을 주는 알파파까지. 이응은 단계별로 뇌파의 변화를 유도해 우리의 몸과 의식을 열린 상태로 만들어” 주는(30쪽), 그야말로 청결하고도 건강하며 합법적인 성욕 해소 기계인 것이다. 이응의 현자는 바야흐로 새로운 로맨틱의 시대가 열렸다고 말했다. 번식과 성욕, 사유재산이 만들어 낸 오랜 통치술의 사슬을 끊어 내고, 진실로 사랑의 의미를 깨우친 이들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를 맺는 반려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다고 말했다.

  • 관리자
  • 202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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