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소설의 문체적 경향 - 천희란, 박상영, 고진권을 중심으로
- 작성일 201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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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리뷰(소설)]
최근 소설의 문체적 경향
- 천희란, 박상영, 고진권을 중심으로
선우은실
최근 소설을 읽는 동안 다양한 문체를 접함으로써 오는 즐거움이 남달랐다. 시점(point of view)을 철저히 제한함으로써 장면을 이미지화한다거나, 입말체를 다수 사용한다거나, 설명적 문체를 쓰는 등등. 이때 '문체'는 작가만의 특수한 감정 표현 및 문장쓰기의 형태를 일컫기도 하겠으나 단지 '작가 개인'에만 집중되는 것은 아니다. '화자'의 문장은 창작자에 의해 쓰였기에 '작가'의 문체라는 말에 이의가 없는 것일 테다. 다만 문학적 관점에서 문체를 조명한다는 것은 문체가 작품에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가 하는 질문과 연관됨을 한 차례 짚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오에 겐자부로는 「작가의 문체」(오에 겐자부로, 노영희 외 역, 『소설의 방법』, 소화, 1995.)에서 아도르노와 토도로프의 견해를 빌려와 문체를 구조적인 것으로 정리한다. 즉 문체는 "동적(動的)인 구조"(66)를 갖춘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문장 a를 a′로, 또 a″로 바꾸어 가는 것으로, 이미지의 장치를 견고히 하고 문체를 선명하게 하려고 한다. (...) 우리가 한 줄의 문장을 읽고 거기에 입체적인 이미지의 장치를 파악하고 다시 거기에 필자의 독자적인 육체와 같은 문체를 인정할 때, 우리는 그 문장을 an에 이르는, 즉 문장 a, 문장a′, 문장a″, ······라는 창작 과정이 연결되고 중복되는 구조를 문장 an 속에서 읽어내고, 그것을 문장 an의 문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69)
최초의 문장 a는 창작자의 의도와 무의식의 반영일 뿐만 아니라 작품의 사건 전개 및 인물의 성격, 사건과 서술 시점의 간극 등에 따라 변주된다. 이는 시점, 시제를 달리 선택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렇게 거듭된 '동적인 구조'로서의 문체는 작가와 작품 내적 구성 원리를 종합하여 보여주는 '소설 기술'의 중요한 형태가 된다.
문체가 작가의 개성을 보여주는 기술(記述)의 기법일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전달 방식 자체를 다르게 할 수 있다는 이러한 '동적인 구조'임을 염두에 두고 각각 천희란, 박상영, 고진권의 작품을 짧게 살피기로 한다.
현재형 문장의 이미지화 – 천희란을 중심으로
작가가 쓰고자 했던 것과 숨기고자 했던 것의 간극을 발견하여 창작자의 의식/무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문체의 한 가지 차원인 것은 맞다. 그러나 문학적인 관점에서 문체를 말할 때 '작가의 무의식'을 분석하는 것이 최종 도달점은 아니다. 문체가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점이 문체의 다른 차원, 즉 소설 작법상의 차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체는 소설의 많은 것을 아우를 뿐만 아니라 전달 방식 자체를 달리함으로써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변화를 준다. 천희란의 작품은 이를 설명하기에 적절하다. 천희란은 《릿터》(13호, 2018년 8/9월)에서 근대소설 새로 쓰기의 기획으로 김동인의 「광화사」1)를 다시 쓴 바 있다. 「광화사」가 화가의 입장에서 소경을 대상으로 삼은 데 비해 천희란의 「암굴의 살인」은 소경의 관점을 적극 착안하여 이야기를 전개한다. 대상이었던 소경이 '(대리)1인칭' ― 엄밀하게 말해 이 소설의 화자는 '소경'을 대변하여 '여'에게 말을 거는 여성 화자이므로 ― 을 획득함으로써 이야기에서 '예술가의 광증'이라는 낭만은 사라진다. 소설의 발화 형식에 따라 '사건'이 매우 다르게 조명되는 것이다.
이처럼 소설에서 시점의 변화는 종요롭다. 그런데 시점은 단지 '누가' 말하느냐에 그치지 않는다. 누구의 시점에서 서술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그가 어떤 '시제'를 활용하여(사건의 과거 회상, 현재 진행 등), 어떠한 말투(주인공의 성격)를 사용하여 말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따라서 시점을 말함에 있어 발화 방식으로서의 '문체'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천희란의 다른 소설 「잃어버린 것」(웹진 《비유》 11호, 2018년 11월)에서 시점과 시제에 따른 문체의 활용이 발견된다. 천희란의 소설을 포함하여 (모든 소설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조건은 아니지만) 대체로 1인칭 시점과 현재 시제를 활용하여 다소 독특한 분위기를 주는 작품군은 다음과 같다. 한유주의 「낯선 장소에 세 사람이」(《문학과사회》, 2018년 가을, 이하 「낯선」), 민병훈의 「장화를 신고 걸었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연꽃 사이를 헤치며」(《쓺》, 2018년 하반기, 이하 「장화」)가 그러하다.
이 작품들은 소설 구성의 세 요소라 일컬어지는 인물, 사건, 배경 중 특히 '인물'에 집중하는데, 특히 인물의 '말하기 (방식)'가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다. 예컨대 한유주의 「낯선」에서는 1인칭 화자 '나'가 마치 소설을 쓰듯 '너'라는 사람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너의 존재를 구성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형식을 취한다.2) 민병훈의 「장화」는 1인칭 '나'의 시점을 취한다. '나'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흐름 위주로 서술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인지 '수'를 비롯한 타인의 대사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만 화자 자신의 대사는 나오지 않는다. 사건의 유기적 연결보다는 장면 단위로 소설이 진행된다. 즉 플롯과 플롯이 시간이 아니라 이미지 단위로 제시된다. 이는 서사의 인과관계나 구체성을 부각하기보다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강조한다.3) 천희란의 「잃어버린 것」은 뭔가를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에 시달리는 1인칭 화자가 비슷한 증상의 '그'를 만났던 이야기를 "너"에게 전하는 형태를 취한다. '그'와의 만남을 회상할 때 '그'의 대사는 나올지언정 '너'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의 대사도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나'의 발화를 거쳐 나온 것이므로 큰 틀에서 '나'의 기억에 따른 발화로 보아야 마땅하다. 요컨대 이 세 편의 소설에는 서사적 사건이 있고 (최소한 물리적인) 배경도 있지만 '인물'의 발화가 가장 강력하게 서사성을 지니며 화자의 말투 ― 문체 ― 와 직결된다.
문체의 측면에서 강력하게 소설의 서사성 및 특이성을 환기하는 소설 중에서도 천희란의 작품은 특히 주목을 요한다. 그녀의 소설이 사건과 서사가 주가 되는 소설의 문법4)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시점/시제의 적절한 변주가 어떻게 소설가의 '문체'를 형성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보통 소설을 말할 때 '사건' 중심으로 화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화자는 '어떤' 사람이며, 화자가 '어떤 사건'을 겪고 있느냐 하는 면을 주목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비교적 인물의 발화 방식이 두드러지는 문체적 차원에서 소설을 말한다는 것은 그 기술적 방법과 문학적 효과 간의 관계를 보여주기에 소설 독법의 또 다른 차원에서 주목해 볼 만하다.
「잃어버린 것」의 화자는 '너'에게 '그'와 만났던 이야기를 하는 형태를 취한다. 이때 화자는 '그'와의 만남을 회상할 때 '~했다'는 과거형을 쓰지 않고 현재형 어미를 사용한다.
1) 김동인의 「광화사」는 '여'를 중심으로 전지적 작가 시점을 취한다. '여'는 등반을 하다가 소설의 내용을 구상하게 되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미인도를 그리고자 하는 박색의 화가 '솔거'(가칭)가 우연히 아름다운 소경 여성을 산속에서 만난 뒤 그 여성을 취하여 미인도를 그리고자 한다. 그는 최초에 보았던 소경의 '빛나는 눈'을 발견할 수 없게 되자 광증에 사로잡혀 여자를 죽인다. 그 과정에서 소경의 머리 위로 떨어진 벼루에서 먹이 튀어 미인도의 눈동자가 찍힌다.
2)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에 너는 어떻게 존재해야 할까. 혹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너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혹은, 어디로 갔는가?"; "혹은 아직 이름이 되지 못한 이름. 쓰고 지워진 자리에 네가 있다."
3) "기억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친구가 내게 손짓하고 있다. 종종 보던 얼굴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계속 지나친다. 기억들을 더디게 지나치면서 망망한 미래의 한가운데로."; "점점 사라지는 기억들을 붙들어 놓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이 기억과, 저 기억 사이를 헤치며, 헤매며, 헤집으며, 걷는 것 말고는."
4) '사건·서사 중심의 소설의 문법'이란 인물, 사건, 배경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소설을 의미한다. 가령 한국 소설에서 '리얼리즘 소설'이라 분류되는 소설은 '사건'이 서사의 주요 측면으로 부각된다. 물론 이러한 경향을 단점이나 장점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다.
그때 그가 내게 다가온 거야. 그는 다짜고짜 어두운 나무 그늘을 가리키며 그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고 말해. (...) 그는 내게 무엇을 찾고 있느냐고 묻지. 그럼 나는 아무것도 찾지 않는다고 대답해.
이 장면은 "벌써 수년 전 어느 날 오후의 일"의 회고이지만 '~해'라는 현재형 시제를 사용함으로써 당장 눈앞에 장면이 그려지고 있는 듯한 효과를 부여한다. 소설의 '현재'는 화자가 '너'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현재 시제를 사용함으로써 과거의 장면을 현재화시킨다. 이러한 현재형 어미는 장면의 이미지 자체를 불러일으킨다. 과거의 한 '장면'을 통째로 끌어오는 문장의 기법인 셈이다.
여기에서 이 소설이 줄곧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 화자의 이야기라는 점을 떠올려 보자. 이미지화를 통해 '현재화'하여 제시되는 소설의 장면은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공고하게 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소설의 말미에 화자는 "어째서 나는 나 자신을 설득하는 일마저 매번 실패하고야 마는 걸까" 읊조리며 "너는 여기에 있어도 좋아"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이는 소설에서 한 번도 목소리를 가진 적 없는, 그러나 청자로 자리하고 있는 '너'라는 사람은 '나'와 다른 타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 즉 처음부터 '나'였던 사람은 아닌가. 동시에 화자'였'던 사람으로 자리하게 되는 화자의 일부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과거의 현재형 묘사가 설득력을 지닌다. 처음부터 '나'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었으므로. 천희란은 이처럼 사건의 구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도 현재형 어미를 구사하여 서술형이 아닌 독특한 문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행보가 기대된다.5)
5) 천희란의 단편집 『영의 기원』(현대문학, 2018)을 참조하건대 '죽음'이라는 감각을 키워드로 꼼꼼하게 '구상된' 소설적 세계를 구성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 그녀의 문장이 매우 조밀하며 시제 등을 활용하여 문장이 매우 섬세한 형태로 어떠한 장면을 지시하고 있음은 '구성된 세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문체적 특성인지도 모른다.
입말체 – 박상영
현재형 어미를 사용하여 '이미지화'를 시도하는 일군의 작가들이 있는가 하면, 입말체를 십분 활용하여 서사를 진행하는 경우6)도 있다. 전자가 소설적 방법 내지는 기법으로서의 문체적 특성을 살피도록 한다면, 후자의 경우 소설의 사실성 내지는 인물의 성격을 문체라는 목소리를 통해 드러낸다. 박상영의 경우가 그러하다.
박상영의 「재희」(《자음과모음》, 2018년 가을)는 '나'와 대학 시절부터 친구였던 '재희'가 결혼하게 되기까지 그들의 우정을 다룬 소설이다. 이 소설은 '나'라는 화자의 시점을 취하면서, 화자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속말을 소설 곳곳에 놓아두었다. "원래 집단의 속성이라는 게 웃겨서 한번 속했다가 튕겨져 나온 사람이 더 맛좋은 재물이 되기 마련이었다"(84)든가, "내 연애사의 외장하드 재희"(115)와 같은 구절은 지시하는 내용만으로 살피자면 집단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은 뒷말이 나오기 좋다, 내 연애사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또 다른 '나'로서의 재희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다소 키치한 느낌이 살아나며, 발랄한 인물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더불어 괄호를 자주 삽입하여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을 하거나(감추거나), 진실을 폭로(숨기고자)하려는 욕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6) 입말체가 소설에 쓰였다는 사실 자체가 새로운 것으로 특기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추측건대 김금희의 특이한 문체적 특징 ― '해요'체의 활용, 노래 가사의 인용, 의미상 같은 문장을 두 번 다른 표현으로 이어 말하기, 특이한 의성어와 의태어의 사용 등 ― 과 더불어 최근의 소설에서 꽤 두드러지는 것도 사실인바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한다.
대충 발이나 털고 지나가 버리면 그만인, 그런 존재. (객관적인 자기 판단 능력!) (86)
(나만큼이나) 충동적인 성향이 강한 아버지의 위험천만하고 공격적인 투자로 인해 집이 완전히 망해버렸고(후략) (87)
만난 지 8주 만에 형은 사랑하지만 형의 주사(길에서 노래를 부르고 키스를 하고 욕을 하고 난리를 치다 마지막엔 꼭 울면서 끝나는)만큼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며 이별통보를 했고(섹스할 때 내 목소리가 좋다더니!) (후략) (91)
괄호 안에 들어가 있는 화자의 혼잣말이라고 해도 좋을 발언에 이어 내심 '발끈'하는 내심(?)을 괄호치고 써넣음으로써 '입말체'의 매력을 더한다. 이는 화자로 치면 말투이지만 소설작법상 문체가 된다. 박상영의 입말체 및 괄호 치기의 방법은 '공고한 화자'의 자리를 확보한다. 화자의 입말은 게이 작가인 화자가 다른 인물(의 목소리)로 대체될 수 없는 '나'로 위치하도록 한다. 이로써 화자는 생동감 있고 대체 불가능한 인물로 거듭난다. 화자가 줄곧 강조하는 "객관적인 자기 판단 능력"이라는 문장을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은, 화자 스스로가 '객관적인 자기판단 능력'을 부지불식간에 발휘하는 방식으로 입말체를 조정하는 듯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설명적 문체 – 고진권
고진권의 「홍정우」(《문학동네》, 2018년 가을)는 유쾌한 가족 서사이다. 이 소설은 전지적 작가 시점을 바탕으로 특히 '요한'의 내면에 집중한다. 요한과 그의 누나 '은미'의 유년 시절을 거쳐 은미가 결혼하고 조카 홍정우와 서준이 태어난 뒤 그들과 지내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전부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소설에 내포작가의 말인지, 요한의 내면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일종의 판단을 유도하는 구절이 다수 활용되어 있다는 점이다.
비록 꿈이었지만 그것은 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은미의 출현은 난장판을 만든다는 것. 은미는 '악인'이어서 비극보다는 희극에 적합하다.
선인은 합당한 결과를 만들지만 악인은 그렇지 않다. 선인은 기준을 가지고 일관되게 판단하지만 악인은 기분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한다. 선인은 기뻐하고 축하하지만 악인은 질투하고 시기한다. (175)
선인은 헤쳐 나가지만 악인은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선인은 자기를 탓하고 악인은 환경을 탓한다. (...)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절박함이 없고 절박함이 없다면 진정한 어려움이 아니라고 생각한 요한은 자기의 가난을 의심했다. (179)
선인은 '자기와 다른 전체' 안에서 자기의 역할을 '이해'하기 때문에 의무에 대한 구속력이 그 내부에 있다. 그러나 악인은 의무에 대한 구속력이 그 내부에 없다. 그래서 성희는 지금 병실에 없다. (186)
위의 설명적 진술은 주로 선인과 악인에 대한 내용을 담는다. 이는 언뜻 서사와 무관해 보이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어떤 인물의 성격을 추측할 수 있는 상황을 묘사한 뒤 일종의 철학적 진술이 따라붙는다. 가령 마지막 인용은 '매형(성희)이 은미가 정우를 낳던 날 병실에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요한'의 상황을 묘사하는 구절이다.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묘사하는 것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설명적(비평적?) 문체는 실제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아니고 다만 유도할 뿐이다. '성희가 산모의 병실에 없다'는 상황과 '악인에 대한 논리'는 상황적으로 유비적 논리관계를 가짐을 보여주는 장치인 것이다.
이러한 설명적 문장은 묘사가 아니라 직접 서술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생각이 '요한'의 것인지 내포작가의 것인지 불분명하다는 간극으로 인해 '보여주기'에 가까워진다. 소설이 어떤 일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이기보다는 그 문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는 말을 다시 떠올려 보건대, 어떠한 시점을 취하여 발화할 것인가 하는 것은 소설적 '보여주기'의 또 다른 형식이 될 수 있다.
'문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말들이 떠오른다. 문체는 흉내 낸다고 해서 훔쳐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든가, 글을 오래 쓰다 보면 '문체를 가져야겠다'고 애쓰지 않아도 어느 때가 되면 자기의 문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라든가 하는. 이렇게 보면 문체는 그것을 쓰는 자의 '개성'이 강하게 부각되는 듯하다. 그러나 문체가 그저 '작가 개인의 특성'일 뿐이라고 한정할 필요는 없다. 소설이 서술의 시제, 시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장면이 포착되거나 전혀 다른 메시지가 전달됨을 고려하면 문체는 소설적 '방법'이다. 최근 발표된 소설들이 다양한 문체적 특성을 띠고 또 저마다의 서술방식으로 재미있는 서사를 이끌어 간다는 것은 읽는 자로서 무엇보다도 즐겁고 기쁜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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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19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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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쳇말: 문학이란 레퀴엠 방승호 1. 레퀴엠 2. 아직 있는 것을 위한: 예기적 애도 3. 거처가 되어 주는: 자기 삭감의 애도 4. 시체들의 말 5. 문학이란 레퀴엠 1. 레퀴엠 “Dona eis requiem” 저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레퀴엠.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 진혼곡(鎭魂曲)이라고도 불리는, 생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를 위한 노래들. 누군가는 이것을 두고 모차르트를 떠올리거나 주세페 베르디를 말하겠지만, 이번 작업의 초점은 레퀴엠의 현대적 흔적들을 더듬어 보는 일이다. 흔적들은 떠다닌다. 다만 우리가 찾지 않았을 뿐. 레퀴엠은 그 형태를 달리하며, 혹은 변주하며 또 다른 가면을 쓰고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것이 15세기에 여러 성부의 형식으로 변주되었듯이, 이 시대의 레퀴엠은 더 다양한 이미지가 되어 잔존한다. 원형이 훼손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죽은 이가 죽어서도 세계에 존재하듯이 원형은 몰락하였더라도 그것은 이미지가 되어 세계에 기생한다. 문학이란 이름으로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도사리는, 잠재적 가능태로서 숨죽인 기표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레퀴엠은 죽은 자의 죽음을 위로하는 일뿐만 아니라 죽은 자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한다고 말하는 일에도 쓰인다. “Dona eis requiem(저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이것은 타자를 기억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영원한 시간을 부여하려는 주문이기도 하다. 기억과 애도는 호출과 재생을 야기한다. 응답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호명하고 증언하며 기록을 거듭하는 일이 때로는 제한된 해석 바깥의 사건을 일으킨다. 상징이 이미지가 되듯 레퀴엠은 파생된다. 형식적 애도 바깥에서 주체의 출현을 예비하는 시도로서 레퀴엠은 변이된다. 들뢰즈가 말한 해석 자체를 전환시키는 해석, 다시 말해 관습 바깥의 해석을 가능케 하는 이행은 정형화된 애도에서 탈피할 때 비롯된다. 의식과 실천이 범벅되는 그 경계로부터 현대식 레퀴엠은 다시 꿈틀댄다. 문학이란 이름의 레퀴엠이 모습을 드러낸다.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이라는 전제를 뒤흔들면, 관행의 중력 바깥으로 무엇인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 죽지 않은 자를 위한 형식. 자기 삭감의 형식으로 뒤틀린 채 존재하는 양태. 오히려 이러한 지점들이 레퀴엠을 작동하는 작금의 방식이랄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학을 레퀴엠이라는 이름 아래 포섭하자는 말은 아니다. 타자에 대한 애도라는 명분으로 다시 정형화된 그 관습 이면의 무엇들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문학은 늘 질서 바깥의 것을 주목해 왔으며, ‘문학적인 것’은 그 양태들과 함께 뒤섞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레퀴엠으로부터 다시 보아야 하는 것은 반드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아닐지라도 주체와 타자로 호명되는 그 이분적 질서 사각지대에 애도 대상이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죽음으로 호명된 타자는 잠시나마 주체의 자리에 서게 되지만, 죽지 못한 존재는 타자라는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채 경계에
- 관리자
- 2025-10-01
한강의 양의성(Ambiguity)1) 후쿠시마 료타(福嶋亮大)2) 한국어 번역: 정창훈 1. 우선 한 가지 밝혀 두자면, 나는 한강의 열렬한 독자라고는 할 수 없다. 그녀가 주제화하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에는 큰 관심을 갖고 있지만, 내가 그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으며, 한강의 서술 방식 또한 종종 암시적인 측면이 있기에 읽어 나가다 보면 구름을 잡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적지 않다. 그녀가 예리한 감각의 소유자이며 그것이 문장에 추진력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모든 작품에서 소재나 주제에 적합한 서술 방식이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게다가 그녀의 문학이 일본에서 수용되는 방식을 보면, 전반적으로 비판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 위화감을 느낀다. 예를 들어, ‘시적(詩的)’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녀의 문체가 구체적으로 분석되지 않고 무조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이 그러하다. 그러한 평가를 하고 싶다면, 글쓴이가 먼저 ‘시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단순히 꾸밈만 있고 내용이 없는 문장과 어떻게 다른지를 책임을 갖고 확실히 검증할 필요가 있다. 솔직히 말해서, 한강을 둘러싼 일본 독서계의 분위기는 ‘아픔’이나 ‘상처’나 ‘회복’과 같은 심오해 보이지만 결국 누구나 안심하고 입에 담을 수 있는 클리셰를 동반할 뿐이며, 개별성・비판성을 결여한 채 모호한 안개처럼 퍼져 나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녀에 관한 일본인들의 비평은 대체로 판에 박힌 듯이 이러한 클리셰로 이뤄져 있는데, 이는 현재 일본에서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 전쟁이 빈번히 언급되는 반면,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서구의 독자들이라면 그래도 괜찮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본의 독자들이 한강이 묘사하는 ‘아픔’을 그토록 쉽게 일반화해도 괜찮은 것일까? 애초에 근현대 한국의 ‘아픈 역사’의 원인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카터 에커트의 방대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 뿌리내린 군사주의의 뿌리는 일본 육군의 사관 교육에 있었다. 군사 쿠데타를 거쳐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본래 만주국 군관학교 출신으로, 일본인 교관으로부터 규율과 가치관을 주입받은 군인이었다. 따라서 ‘개발 독재’를 기축으로 하는 그의 국가 형성 사업은 “항상 현저한 군사적 색채”를 띠었고 “경제를 포함한 모든 분야의 국가 프로젝트가 군대식으로 행해졌으며, 그 영향은 한국 사회 곳곳에까지 미쳤다”고 한다.3) 한강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에서 다뤄진 1980년 광주 항쟁도 한국의 군사주의적 정신 풍토를 고려하지 않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박정희 암살 사건 이후, 전두환의 계엄령 아래 북한의 공작에 의한 치안상 위협을 구실로 삼아 일어난 이 학살에는
- 관리자
- 2025-10-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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