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 인류의 대변자
- 작성일 2019-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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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어쨌거나 인류의 대변자
배명훈
생선을 좋아하는 남편은 매번 처음 하는 것처럼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이건 진짜 하나도 안 비린데. 맛있어, 먹어 봐."
물론 매번 처음인 것처럼 생선은 비렸다. 비린 맛이 나지 않으면 남편은 굳이 생선을 먹지 않을 것이다. 남편에게 "안 비린데"와 "맛있어"는 나란히 놓일 수 없는 말이다. 집 안에는 아침부터 생선 냄새가 가득했다.
"야, 하필 오늘 같은 날 생선을 굽냐."
"응? 오늘이 무슨 날인데?"
"이거 입은 날이잖아."
"그 옷은 뭐지? 못 보던 옷이네. 오늘은 정장 입고 출근하는 거야?"
먹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먹고는 우산을 챙겨들고 출근길에 나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 단지 앞 화단 길로 들어섰다. 화단의 지배자는 치킨집 고양이다. 길 한가운데에 느긋하게 드러누워 출근하는 사람들의 아침 문안인사를 받는 것으로 하루를 여는 작고 뚱뚱한 맹수. 비가 내리는 바람에 벤치 밑에 드러누워 있던 고양이가 황송하게도 고개를 들어 출근하는 은수를 돌아보았다. '아침부터 생선 구웠네?' 하고 묻는 표정이었다.
꾸벅 고개를 숙여 문안인사를 드리고 버스정류장 쪽으로 종종종 걸어갔다. 우주군 정복은 요란하지 않아서 좋다. 모자까지 쓰면 별수 없이 요란해지지만 모자까지 챙겨 쓰고 다니면 우주군이 아니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규정에는 분명 모자를 착용하라고 되어 있지만, 잊어버렸다고 하거나 얼룩이 묻어서 세탁소에 맡겨 놨는데 세탁소 주인이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한동안 찾으러 가지 못했다고만 말해도 충분히 소명이 됐다. 사실 그렇게 길게 변명하는 사람도 거의 없어서 상관들은 변명하는 성의 자체를 높게 사곤 했다. 스토리가 들어간 변명은 원 스타나 투 스타가 물었을 때나 대는 공손한 핑계였다.
우주군 정복은 검은 바탕에 반짝이가 들어간 원단으로 되어 있었다. 진중문고로 자주 들어오는 SF 소설 책표지도 본문에 우주가 나오든 말든 일단 그런 배경을 하고 있다. 우주라는 뜻이고 막연히 미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사실은 밤하늘도 똑같이 생겼는데 눈치 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했다. 공군만 하늘색이 아니고 우주군도 하늘색인 셈이다. 야근하는 공군이 우주군이라는 농담도 있다. 하지만 우주군은 정복을 싫어해서 일 년에 한 번도 입지 않는다. 본부 지휘관참모회의에 가봐도 태반이 우주군 티셔츠를 입고 앉아 있을 정도다. 그러니 우주군이 정복을 꺼내 입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행사에 참석한다는 뜻이었다.
맑은 날 낮에 정복을 입고 밖에 나가면 반짝이가 거의 무대의상처럼 빛나서 정체를 숨기기가 힘들지만, 비 오는 날이나 저녁 이후에는 상관없었다. 군데군데 들어간 빨간 장식만 잘 가리면 곧바로 상갓집에도 갈 수 있다. 그러면 정말 아무도 못 알아본다. 남편도 못 알아본다. 원래는 가능하면 택시를 탈 생각이었지만 아침부터 날이 어둑어둑한 게 버스를 타도 무방할 것 같았다. 은수는 택시 한 대가 길가에 서서 손님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는 발길을 돌려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은수는 뒷문 바로 뒤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서류가방은 다리 위에 올려놓고 우산은 접어서 손목에 걸었다. 옷 구겨질 걱정은 덜어서 다행이었다. 유리창에 김이 서려 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려 놓은 외계인 그림이 희미하게 흔적만 남아 있었다. "지구정복"이라는 글씨가 좌우가 뒤집힌 모양으로 씌어 있었는데 기역자 방향은 뒤집히지 않은 채였다.
우주군에는 희한하게도 외계인 대응 부서가 있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상황이 발생했을 때 담당할 사람을 지정하는 정도인데, 보통 행정 담당 부서의 위관급 장교가 겸직을 하곤 했다. 일종의 농담이라는 뜻이었다. 에너지절약 담당관에서부터 사무용품관리교육 담당관까지, 안 그래도 타이틀이 마흔 개쯤 되는 사람들이라 중간에 특이한 임무가 한두 개쯤 끼어 있어 봐야 눈치 채는 사람도 얼마 안 됐다.
은수도 마찬가지였다. 외계인 대응 매뉴얼이라는 것을 읽어 본 적은 있지만 딱히 와 닿는 내용은 아니었다. 한국 우주군 조직이 다 그렇듯 연합우주군이 만들라고 해서 만들어 놓은 매뉴얼이라 한국인에게 해당되는 내용이 별로 없었다. "미군이 알아서 하겠지." 그게 한국 우주군의 비공식 입장이었다. "외계인이 지구에 쳐들어오면 일단 미국 대통령 만나러 가지 않겠어?"
현실적으로도 한국 우주군은 많은 부분을 연합우주군에 의존했다. 일단 우주군은 있는데 우주선이 없다시피 했다. 위성해킹이나 정보전 쪽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직접 우주로 날아가는 일은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연합우주군은 케슬러 신드롬을 막기 위한 집단방위체제였다. 우주전쟁이 일어나고 연쇄폭발로 인해 위성궤도 전체가 마하 25의 속도로 떠도는 우주쓰레기들로 가득 차는 사태. 그 일을 막기 위해 선진국들이 조인한 국제협약의 집행기구. 한국 정부도 여기에 꽤 큰 규모의 분담금을 내는 대신 우주 관련 기술을 이전받기로 했는데, 그 분담금 관리기구로 만든 게 한국 우주군이었다.
선거철만 되면 대통령 후보부터 군의원 후보까지 전부 우주군 감축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게 일이었지만 다행히 우주군은 감축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줄면 기상예보관이 야간 근무 서는 김에 기지외곽 경비도 같이해야 할 판이었다. 그래도 우주 문제에 관한 정부의 공식입장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늘 한결같았다. "미국의 반응을 지켜보겠습니다. 아니면 중국이나."
그래서였다. 맨 처음 외계대응 담당관에 임명되고, 엉망으로 번역된 매뉴얼을 훑어볼 때만 해도 은수 역시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정말로 자기가 직접 외계인을 만나러 가게 되는 일 같은 건.
버스가 지하철역이 있는 사거리를 지나자 사람들이 우르르 타고 내렸다. 바닥이 미끄러워 차가 흔들릴 때마다 사람들의 발놀림이 신경질적으로 분주해졌다. 하지만 사거리를 두 번 지나자 모든 승객들의 움직임이 슬로모션처럼 느려졌다. 동시에 차에 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한쪽으로 향했다. 창밖 하늘 위 어딘가였다.
잠실에 있는 120층짜리 빌딩은 서울 남쪽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은 아니었지만 순위권 안에는 드는 높이였다. 상대적인 높이로 따지면 더 인상적이었다. 맨해튼에 있는 수많은 고층건물들이 이 건물보다 덜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바로 옆에 서 있는 비슷한 높이의 건물들 때문이다. 잠실에 있는 롯데타워는 혼자 비죽 튀어나와 있다는 점에서 뉴욕에 있는 건물들보다 입지가 좋은 셈이었다.
그 건물 전망대에 올라가 주위를 내려다보면 웬만한 동네는 다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서울이 아닌 곳도 훤히 보였다. 반대로 말하면 그 일대에 있는 웬만한 집의 창문에서는 어디서나 롯데타워를 볼 수 있었다. 그 건물에서 불꽃놀이라도 하는 날에는 온 서울 사람들이 불꽃놀이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곤 했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건물 전체가 화염에 휩싸여 있는 무시무시한 사진들이었다.
사우론의 탑처럼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 건물 꼭대기에 거대한 눈을 달아야 한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우주를 건너온 "지적인" 손님들은 조금 특이한 용도로 건물을 활용했다. 일종의 부두 접안시설로 이용한 것이다. 은수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린 채 창가에 딱 붙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버스에 탄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잠시 후 버스가 목적지에 다다랐다. 사우론의 탑 바로 근처였다. 은수는 버스에서 내려 우산을 폈다. 우산을 쓰고 있었지만 하늘을 올려다보느라 머리 위를 완전히 덮지는 않았다. 한 달 내내 그랬듯 그 일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장사꾼들은 투명한 우산을 팔았다. 달러도 받고 엔화도 받았는데 유로로 사는 게 제일 유리해 보였다. 물론 편의점에서 사는 게 제일 싸 보였다. 편의점은 그리 멀지도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깨진 유리창을 고치지 못한 건물이 여럿 눈에 띄었다. 판자나 이불 같은 것들로 창문을 가려 놓은 모습이 외국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은수는 관광객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걸음으로 사거리를 향해 걸어갔다. 왠지 머리에서 생선 냄새가 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멀리서 보면 감쪽같이 프로다운 걸음걸이였다. 한 달 내내 타워가 폐쇄되어 있어서 롯데타워가 있는 사거리에서는 버스가 정차하지 않았다. 지하철 출구도 통제되어 있었다. 환승역이라 정차를 하기는 했지만 그곳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상대적으로 좋은 위치를 차지했다가 갑자기 망해버린 상가가 수십 군데는 됐다.
우산에서 투두둑 빗소리가 들렸다. 은수는 사람들을 헤치고 송파구보건소 앞, 출입통제선이 쳐져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인파의 맨 앞쪽에 다다르자 우주군 정복을 제복으로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시선이 느껴졌다. 흘끗 돌아보는 사람도 있고 빤히 쳐다보는 눈도 있었다. 내색하지 않고 곧장 관계자용 출입구로 향하면서 상의 주머니에서 출입증을 꺼내 목에 걸었다.
그다음부터 건물 입구까지는 혼자였다. 버스정류장을 하나 건너뛴 만큼 계속 도도하게 걷기에는 꽤 먼 거리였다. 인파가 만들어내는 웅성거리는 소음이 사라지자 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한층 크게 들렸다. 그러다 갑자기 그 소리마저 사라져 버렸다. 은수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기서부터는 땅이 젖어 있지 않았다. 우산을 접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120층짜리 타워가 보였다. 550미터짜리 건물이 끝나는 지점에 풍선처럼 둥실 떠 있는 거대한 인공구조물과 함께였다. 그것은 하늘을 반이나 덮고 있었다. 그리고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방향은 별 상관이 없었지만 그렇게 거대한 물체가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상식과 직관을 망가뜨리는 문제였다. 그래서 현기증이 났다. 오래 들여다볼수록 정신이 아득해지는 광경이었다.
문득 정신이 들었는지 은수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가던 길을 걸어갔다. 아래층이 쇼핑몰로 만들어져 있어서 사실상 아무 문이나 열고 들어가면 되는 건물이었지만 그 많던 출입문은 대부분 폐쇄된 상태였다. 은수는 화살표를 따라 건물 주위를 빙 돌았다. 화살표가 인쇄된 종이 하나가 바닥에 떨어진 채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 그대로 잠시 후 화살표 없는 갈림길이 나타났다.
은수는 침착하게 우산을 정리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나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은수가 걸어온 길을 따라 사람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은수는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공군 정복을 입은 여자였다. 그 사람을 보는 순간 은수는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 사람이 먼저 은수에게 말했다.
"뭐야, 조은수잖아."
"아, 우매희 맞구나."
꼭대기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위쪽이 아니라 지하로 내려가야 했다. 원래는 전망대로 올라가는 관광용 엘리베이터인데 일반 엘리베이터보다 보안시설을 설치하기가 용이해서 이쪽이 공식 출입구 역할을 했다.
내려가면서 보니 쇼핑몰은 거의 텅 비다시피 한 상태였다. 말을 하면 메아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다행히 카페와 식당 몇 개는 계속 영업 중이어서 끼니때마다 민가를 찾아 나설 필요는 없다고 했다. 우매희가 덧붙였다.
"영업 중이라기보다는 정부에서 돈을 주고 계속 열어 놓게 한 거지만. 그래서 계산 따로 안 해도 돼. 나라에서 하루에 얼마씩 정액으로 지불할 건데 그만큼 다 먹기도 힘들댔어. 상주하면서 일하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아, 그래도 싸 가면 안 돼."
은수는 우매희를 따라 엘리베이터가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보안 문제 때문에 통로를 이렇게 복잡한 동선으로 꼬아 놓은 건가?"
은수가 묻자 우매희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반문했다.
"놀리는 거야?"
"뭘?"
"길 못 찾아서 헤맨 거거든. 나도 3일밖에 안 돼서."
"아, 저런."
우매희는 같은 고등학교를 다닌 동네 친구였다. 동네라고 해봐야 걸어서 30분은 걸리는 거리였고 학교 친구라고 해봐야 서로 얼굴이나 알아보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단번에 이름을 떠올릴 정도면 15년 만에 만난 것치고는 나쁘지 않은 재회였다.
"그런데 우주군은 정복에 모자 안 쓰고 다녀?"
"어디 있는지도 몰라. 임관하고 쭉 처박아 놔서 계급장도 잘못 달고 올 뻔했잖아. 셀프 2계급 강등시킬 뻔했네."
은수는 앞서서 걸어가는 우매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우주군 정모 좀 이상해. 어떻게 만들었는지 앞뒤로 긴 타원이 아니라 옆으로 긴 타원이 돼버리거든. 쓰고 있으면 이마에 눌린 자국 생겨서 손오공 돼."
우매희가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며 킥킥거렸다.
"우리도 그래. 나도 지금 머리가 저릴라 그래. 너 보면 웃길까 봐 벗을 타이밍을 놓치고 있었는데."
"벗어도 돼. 내 눈에는 안 보이는 걸로 할게. 공군은 역시 군기가 굉장하구나."
"와, 우주군은 정말로 그런 말을 하네. 소문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그렇게 말하는 걸 듣다니. 영광이야."
"뭐가?"
"공군 군기 어쩌고 하는 거. 진짜 어이없는데 너무 진심이 느껴져서 더 어이가 없네. 이제 좀 실감이 난다. 졸업하고 몇 년 뒤에 너 우주군 간다는 소리 전해 듣고 부러웠는데."
은수는 우매희를 잘 알고 있었다. 우매희는 공부를 잘해서 시험 기간만 되면 아이들 입에 이름이 오르내리곤 하는 아이였다. 매번 그런 건 아니고 가끔은 그랬다. 그런 것치고는 인기도 없고 평범했지만 눈에 띄지 않게 평범한 것을 좋아하는 아이이기도 했다. 은수가 우매희를 눈여겨본 건 플레밍 때문이었다. 우매희 덕분에 지금껏 플레밍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플레밍의 왼손 법칙은 자기장 속에 있는 도선에 전류가 흐를 때 힘이 작용하는 방향을 왼손으로 표현한 것이다. 엄지와 검지와 중지를 서로 90도가 되게 펴면, 검지가 자기장의 방향, 중지가 전류 방향, 그리고 엄지는 힘의 방향을 나타낸다. 그런 다음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기간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세 손가락을 내내 90도로 해둘 필요는 없다. 너무 힙해서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장 속에 전선이 놓여 있는 그림이 시험문제로 나오면 왼손을 꺼내 손가락 세 개를 펼쳐야 한다.
그것은 일명 물리 댄스였다. 반 친구들이 그 문제에 다다를 때쯤 되면 모두가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진지한 장면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화면 안에 있는 모두가 춤을 추기 시작하는 인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시험지를 바라보며 머리를 쥐어뜯던 반 친구들 모두가 어느 순간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는 광경. 춤은 꽤 그로테스크했다. 전류가 흘러가는 방향에 따라 손을 이상하게 꼬아야 했기 때문이다. 시험지를 돌리면 해결되는 문제였지만 아이들은 보통 손을 움직였다. 도통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물리 시험지 속, 잘만 하면 알 수도 있을 것 같은 문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펼쳐든 손. 그리고 신나는 춤.
은수는 맨 뒷자리에 앉아 움찔움찔 춤을 추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저 앞쪽에서 안타까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왼쪽 어깨를 들썩이는 춤판에서 홀로 오른쪽 어깨를 들썩이는 친구가 있었던 것이다.
'아니야! 플레밍의 오른손 법칙은 발전기 이야기고, 지금 문제에 나온 건 모터잖아!'
마음속으로 애타게 외쳐 봤지만 끝내 남들과는 다른 춤을 추던 아이, 그게 우매희였다. 삶에 대한 태도나 인생관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에피소드였지만.
우매희가 물었다. 모자에 눌린 자국이 이마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있잖아. 외계인이랑 대화하는 건 우리보다 더 고위직이 해야 되는 거 아닌가? 대통령이 하거나, 그것도 더 큰 나라 대통령이 기회 뺏으려고 암투 벌이고 그래야 될 것 같은데. 왜 우리 같은 중간 말단한테 시키는 거래? 다들 쉬쉬하고 말을 안 해서."
"아, 그게."
은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눈짓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전망대 엘리베이터 매표소로 쓰이던 공간에, 경찰 아니면 정보기관 사람들로 보이는 수상한 사람들이 눈을 부라리고 서 있었다. 우매희가 그쪽을 돌아보더니 말을 멈추고 은수 쪽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매희의 제복에는 정보특기 배지가 붙어 있었다.
우산과 모자를 안내데스크에 맡기고 각자 검색대에 가방을 통과시킨 후 차례로 인간용 검색대를 지나갔다. 가방을 챙겨 한참을 걸어가자 임시대기소로 만들어진 공간이 나타났다. 벽에 붙어 있는 푹신한 의자에 나란히 앉자 우매희가 작은 목소리로 하던 말을 이어 갔다.
"이렇게 폼 나는 일을 왜 우리한테 시키는 거래? 너는 알아?"
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느릿느릿 뜸을 들이며 대답했다.
"저게 좀 이상하게 날아왔거든."
"이상하게? 근처에 있는 유리창 다 깨면서 내려온 거?"
"그것도 그렇고. 그보다는 좀 더 근본적으로 이상하게 내려왔는데, 뭐라고 해야 되나. 〈스타워즈〉에서 우주선 날아오듯이 날아와서."
우매희가 의아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필 오른쪽 어깨여서 은수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뭐가 웃겨?"
"아니, 딴생각 하느라. 〈스타워즈〉처럼 날아다닌다는 게 무슨 말이냐면, 거기 보면 초광속으로 비행하던 우주선이 곧바로 행성 대기권 안으로 진입해서 공중전을 하잖아. 그런 거 말하는 거야."
"그럼 뭐 어떻게 하는데?"
"층위가 있잖아. 초광속이랑 대기권진입이랑 공중전은 다 다른 방식의 비행인데 한 대가 같은 엔진을 써서 하니까 이상하지. 무슨 말이냐면 너 비행기 타고 어디 가려고 공항 갈 때 어떻게 가? 마을버스 타고 공항 가는 버스 서는 데까지 가서 거기에서 버스 타고 공항으로 가고 그런 식이잖아. 그런 다음에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거고. 돌아올 때도 마찬가진데, 저 우주선이 날아온 방식이 어땠냐면 공항버스가 마을버스 정류장까지 바로 와서 서버린 식이거든."
"응? 알 듯 말 듯하네. 그러면 안 되나? 공항버스도 버스잖아."
"그럴 수는 있지. 그래서 층위 이야기를 하는 거야. 세상의 층위나 우주의 층위. 마을버스도 바로 공항까지 가도 되는데 안 그러지? 그냥 다음 층위까지만 넘기는 거야. 그렇게 한 칸 한 칸 올라가고 한 칸 한 칸 내려오게 돼 있거든. 공군 전투기 타고 곧바로 우주까지 안 날아가는 것처럼. 그런데 저 우주선은, 공항버스가 마을버스 정류장까지 온 정도가 아니고, 그냥 헬싱키에서 날아온 비행기가 우리 집 앞 사거리에 착륙한 거라서. 그러니 어땠겠어?"
우매희의 눈동자가 위를 향했다. 그러더니 자신 없는 목소리로 우매희가 대답했다.
"뭔지는 몰라도 엄청 위험하게 들리는데?"
"그렇지. 층위가 있는데 무시하고 날아오는 건 보통 그거니까."
"공격?"
"맞아. 결과적으로 오해였지만, 그렇게 보였지. 우주 건너에서 날아온 우주선이 태양 주위를 돌지도 않고 곧바로 지구 쪽으로 날아오면서 감속. 또 지구 주위를 돌지도 않고 곧바로 대기권 안으로 진입하면서 감속. 마치 추락할 것처럼 서울로 향하더니 공중을 한 바퀴 선회하지도 않고 곧바로 주차할 곳으로 내려오다가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감속. 그 바람에 유리창이 와장창."
"〈스타워즈〉처럼 비행하면 엄청 무섭구나."
"무섭지. 그래서 인류가 무슨 짓을 했냐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인류'가 정확히 누구를 말하는 건지는 안 밝혀지고 있지만, 아무튼 인류가 그토록 기다려 온 외계지적생명체에게 맨 처음 한 행동이 뭐였냐면 말이야."
"설마 미사일부터 쐈냐?"
"어. 우발적이라고도 못 해."
"왜?"
"두 발을 쐈거든."
"저런. 두 발이면, 아이쿠 저런. 근데 뉴스에는 그런 말 안 나오던데."
"안 나오지. 다 비밀이야. 그래서 높은 사람들이 아무도 안 나타나는 거야."
"여론 때문에?"
"아니, 외계인들 때문에. 외계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공격받은 거에 대해서는 기분이 안 좋을 거 아니야. 우주선 안에 무기 같은 게 안 들었다는 보장도 없고. 뭐 이것도 다 추정이야. 우주군 공식 입장 아니고. 그런데 쉽게 알 수는 있지. 아직은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그때 누군가가 대기실로 걸어왔다. 검색대 있는 곳에서 본 보안요원 한 사람과, 짙은 남색 양복을 입은 40대 중반쯤 돼 보이는 남자 하나였다. 그날 마지막 출근자인 모양이었다. 남자가 우매희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했다. 보안요원이 말했다.
"이제 올라가시면 됩니다."
두 사람은 옆에 내려놓은 가방을 집어 들었다.
엘리베이터가 전망대에 도착하는 데는 1분 정도 걸렸다. 천장을 포함한 엘리베이터의 모든 면은 디스플레이를 위한 화면이었다. 꼭대기로 향하는 1분 동안 화면은 바깥 풍경으로 가득 찼다. 파란 하늘, 깨끗한 시야, 때 묻지 않은 하얀 구름 같은 것들이었다. 그래서 거짓말인 게 금방 티가 났다.
보안요원을 제외한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머리 위 화면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자 우매희가 맨 먼저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
"아침 브리핑은 9시 반 시작이야. 커피 한 잔 할 시간 있을 거야."
은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매희를 뒤따랐다. 같은 전망대라고는 해도 거기까지는 아직 안전지역이었다. 지나가다가 외계인과 마주칠 일은 없다는 의미였다. 깨지거나 금이 간 유리창도 없었다. 유리창이 아니라 사실상 투명한 벽 같은 것이어서 생각보다 쉽게 깨지지는 않았다. 외계인이 정박한 곳은 계단으로 두 층 더 올라가야 했다. 탕비실로 쓰이는 공간은 원래 매점이 있던 자리였다. 아이스크림은 팔지 않고 캡슐커피머신을 갖다놨는데 디카페인 캡슐이 맨 먼저 동 나 있었다.
"본 적 있어?"
은수가 물었다. 우매희는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 반문하지도 않고 곧장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것 말고는 물어볼 게 없다는 태도였다.
"아직. 이틀 동안 브리핑하고 대기하기만 했어. 우선순위가 밀린다나."
"그건 누가 정해?"
"교수들 아니면 박사들. 네가 말한 것처럼 젊은 축들이 많거든. 아까 엘리베이터 같이 타고 온 이동진 교수가 제일 나이가 많을 거야. 언어학과 교수라는데, 그 사람들이 시간은 제일 많이 잡아먹어. 이 교수 말로는 주로 외국 학자들이 주도한대. 그 사람들이 통역도 하는데, 분위기 봐서는 시원찮고, 자기들도 아직 연구 단계인가 봐. 그래도 나 어제 오후에 접견실 들어갈 뻔했는데 저쪽에서 빨리 철수해 버리는 바람에 오늘로 미뤄진 거야."
"박사들이 뭐 기분 상하게 했나?"
"무례하게 실험하는 티를 냈다거나."
"아, 그건 최악이었겠다. 그래도 오늘은 접견하겠네."
"응. 떨리네."
비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구름이 가득한 날은 맑게 갠 날보다 하늘이 커 보였다. 무한한 공간의 광활함은 찾아볼 수 없지만 구체적으로 꽉 채워진 공간의 양감은 다른 의미에서 압도적이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눈높이에서 보는 하늘은 더 그랬다. 우주선 반대편에 있는 휴게실 창문에는 시야를 가릴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외계인이 그 건물을 접안시설로 이용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은수는 큰 배가 닿는 부두를 떠올리곤 했다. 해안선과 수직 방향으로 쭉 뻗어 나온 접안시설. 그 옆에 멈춰 서서 손님을 내리고 가는 커다란 유람선. 그 접안시설을 3차원으로 옮기면 딱 지금 우주선이 정박해 있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었다. 500미터가 넘는 건물 꼭대기에 외부로 통하는 통로가 만들어져 있을 리는 만무했지만 그거야 건물을 아주 조금만 뜯어내면 될 일이었다.
옛날 중동에 있었다는 오벨리스크도 그런 용도로 지어졌을지도 모른다. 이집트 문명이 외계인이 세운 문명이라고 믿었을 때 이야기다. 하지만 그 정도 오벨리스크가 실용적일 리는 없었다. 50미터도 안 되는 오벨리스크라니. 하긴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이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옛날 서울 어딘가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6층짜리 건물이 서 있었던 적도 있었다.
아무튼 외계인들은 정복하러 온 게 아니라 정박하러 온 셈이었다. 한 달 동안 알아낸 건 거의 없지만, 만나자마자 미사일 두 발을 쏘아버린 누군가도 바로 그 점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지금 와 있는 손님이 우리보다는 지적인 생명체이기를.
"그쪽 민원은 뭐야? 곧 브리핑하겠지만."
은수가 물었다. 우매희가 시선을 피하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좀 있으면 알겠지만, 우선순위를 앞당겨 달라고 조를 수 있는 민원은 아니야."
브리핑 장소는 우주선이 올려다 보이는 유리벽 아래였다. 스무 명 정도가 브리핑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그중 일곱은 외국인이었다. 한국어 회의였고 통역이 셋, 그중 전문 통역자는 두 명이었다. 순서가 되자 사람들이 돌아가며 접견 때 이야기할 내용을 브리핑했다. 한국어든 영어든 접견실에서는 결국 언어학자들이 모두 번역을 맡게 돼 있었는데 우매희가 말한 것처럼 결과가 신통치 않았던지 브리핑하는 사람들도 그 말을 외계인에게 전할 사람들도 서로를 보는 눈이 탐탁치가 않았다.
공군이 우매희를 시켜 외계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우호의 메시지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이틀이나 순서가 뒤로 밀렸던 것도 다른 사람들이 가져온 민원보다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눈치와 타이밍 문제인 듯했다.
"한국 공군이 전달할 메시지는 전날과 같습니다. 제목은 공군기지 정상화를 위한 정박위치이전 요청이고요, 내용도 전날과 동일합니다. 현재 우주선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타워 동쪽 300미터이고 안전거리를 최소 500미터로 잡았을 때 0.8킬로미터에서 1킬로미터인데 이게 서울 남쪽에 위치한 서울공항 활주로 비행안전구역과 거의 겹칠 듯이 인접합니다."
대다수는 시큰둥했지만 처음 들은 누군가는 전날, 전전날 누군가가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했다. 매일 새 멤버가 드나드는 브리핑의 단점이었지만, 그걸 하라고 매일 브리핑을 다시 하는 것이기도 했다.
접견실 외계어 통역을 맡은 외국 언어학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매희에게 물었다.
"옮기라고요? 주차장에서 차 빼듯이?"
"그렇죠. 타워 서쪽으로 옮겨 주면 서로 제일 편할 것 같네요."
"다른 사람들은 언제 날아가 버릴지 몰라서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그런 말을 해도 괜찮겠어요?"
우매희가 대답했다.
"모르죠. 높은 분들끼리 알아서 정했겠죠. 우리가 여기 올라와 있다고 그걸 우리가 직접 정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쪽이 정할 일은 더더욱 아니고. 통역할 방안이 떠오르시나요?"
다른 스무 명의 참석자가 잠깐 눈을 들어 우매희를 바라보더니 짐짓 딴청을 부리듯 시선을 책상 위로 향했다. 우매희가 말을 이었다.
"이동주차가 1안이고요, 날아가 버릴 거면 언제 날아갈지라도 알려달라는 게 2안인데 거기까지 묻고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를 안 합니다. 1안이 쉽죠? 3안도 있는데 이게 제일 어려워요. 활주로 이용을 재개하겠다는 건데, 이러면 전투기가 날아다니기 시작할 거예요. 우주선 바로 옆으로. 특히 착륙 과정에서 파손된 부분이 드러난 쪽이라 우주선 쪽에서는 다소 민감할 것 같은데, 해칠 의도는 없으니 조심해 달라고 전해 주세요. 우리도 비행장 하나를 언제까지나 폐쇄해 둘 수는 없으니까요.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라. 어때요? 어느 안까지 가능하시겠어요?"
처음 브리핑에 들어온 기념으로 의욕적인 질문을 던졌던 외국 학자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1안으로 하시죠."
그리고 지기 싫었는지 질문 하나를 덧붙였다.
"그런데 그 활주로는 왜 하필 거기에 놓여 있는 거죠? 우주선 착륙 전에도 신경이 쓰였을 텐데요. 이런 빌딩이 있으면 다른 데 짓거나 다른 방향으로 활주로를 놓았어야······."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브리핑실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한국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외국인들도 한 달 내내 들어서 다 아는 내용이니 혼자 똑똑한 척하지 말고 자료나 읽고 오라는 눈치였다. 그가 드디어 말문을 닫았다.
늘 해오던 연구목적 교섭내용 몇 가지가 소개되고, 마침내 은수의 차례가 왔다. 은수는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준비해 온 자료를 꺼내들었다. 그런데 첫 줄을 읽기도 전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사방에서 낄낄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은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리번거리자 브리핑에 참석한 사람들이 진심어린 응원의 표정을 보내왔다. 모두 마찬가지니 신경 쓰지 말라는 얼굴. 공감과 응원을 넘어, 얼마나 웃긴 안건일지 기대라도 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한국 우주군이 가져온 메시지는, 비행금지 협조요청입니다."
비행금지라는 말을 듣자마자 여기저기에서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은수는 간신히 그 웃음소리를 외면하고 말을 이었다.
"바로 앞에 공군이 브리핑한 내용과 상충되죠. 제목은 한시적 비행금지구역설정 공지 및 협조요청. 웃지 마시고요. 기간은 11월 15일 목요일 1255시부터 1350시까지. 대상은 비상항공기와 긴급항공기를 제외한 전국 모든 항공기."
한국 사람 몇 명이 그 말을 듣고 재빨리 수첩을 넘기기 시작했다. 군에서 온 사람도 있고 민간 학자도 있었다. 모두 마흔은 넘지 않은 외모였다. 머리숱이 적어 보이는 군인도 있었지만 모자만 쓰면 금방 제 나이를 찾을 것 같은 청년들이었다.
수첩을 넘기던 사람들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는 게 보였다. 은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음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긴장은 하나도 안 됐는데 이상하게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 시간 동안 대한민국 영토 전역에서 비상, 긴급항공기 외 모든 항공기의 운항이 중단되고 모든 공항의 이착륙이 통제될 계획입니다."
그 말을 마치는 순간 은수는 목소리가 떨리는 원인을 알 것 같았다. 민망함이었다.
영국에서 온 언어학자가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 은수에게 물었다.
"외계인들한테 협조요청을 한다고요? 그런데 대낮에 갑자기 비행금지라니 무슨 일이에요? 11월 15일이면 바로 다음 주 아니에요?"
"아, 우주선을 착륙시키라는 건 아니고요, 그냥 지금처럼 가만히 있으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다만 혹시 위치를 이동하거나 떠나버리거나 할 경우 이 시간은 피하라는 거죠."
"왜죠?"
은수가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한국 사람이 끼어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본 이동진 박사였다.
"설마 그건 아니죠?"
은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지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자 설마 하는 얼굴로 은수의 표정을 살피던 한국 사람들이 종이며 가방으로 얼굴을 가렸다. 외국인들이 서로 눈짓을 교환했지만 답을 찾지 못하고 은수에게 물었다.
"북한인가요? 아니면 군사훈련?"
은수가 외국인 몇 명이 모여 앉아 있는 곳을 돌아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북한이 공격하는 날 아니고요, 한미연합훈련도 아니고, 시험 날이에요."
"시험 날?"
"대입수학능력평가라고, 하아, 국가에서 관리하는 대학입시 기본 시험입니다. 네 과목으로 나눠서 보는데 3교시가 영어예요. 시작하자마자 듣기평가가 있는데 전국적으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조건으로 녹음된 문제를 틀어야 돼요. 아시다시피 이 근방에는 학교도 많고, 우주선이 착륙할 때를 돌이켜보면 작동원리는 아직 규명이 안 됐어도 아무튼 소음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수습이 힘들어요. 비행금지구역 설정 이야기를 왜 공군한테 안 들려 보내고 우주군한테 들려 보냈는지 모르겠는데, 공군은 다른 민원이 있어서 그랬겠죠. 한 명이 하나씩만 하게 하려고. 아무튼 제가 전할 이야기는 그겁니다. 그 시간에는 소음을 내서는 안 됩니다. 외계인도 외국인도 예외는 없습니다. 바로 다음 주라 전달이 시급한 문제고, 위에서는 양해가 다 됐을 거예요. 통보받으셨을 텐데. 그렇죠? 바로 처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통역 문제는 설명이 곤란하면 한국 언어학자들이 전담하는 방법도 있을 거고요. 전문가는 아니지만, 일단 가지 말라는 말만 분명하게 전한 다음, 정확한 시간이나 이유는 열심히 설명하는 시늉만 해도 성의를 보일 수 있지 않을까요? 뭔가 이유가 있나 보다 하고 생각하게 만들기만 하면 되니까. 저로서는 그거면 충분합니다만."
외계인들에게는 아직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다. 서양인들이 자꾸 서양식 이름을 붙이려고 했지만 유행하지는 못하게 만든 게 성과라면 성과였다. 기념품 가게와, 기념품을 왜 파는지 알 수 없지만 기념품을 팔게 된 가게들에는 일반인들은 본 적이 없는 외계인의 모습이 마스코트처럼 정착되어 갔다. 한 손에 망치를 들고 유리창을 깨러 다니는 연체동물 형상이었다. 우주를 건너온 방문자는 연체동물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형태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조금이라도 새나갔다면 그길로 별명이 생겼을 것이다. 모든 나라 사람들이 자기네 말로 별명을 붙이려고 시도하겠지만 유력한 후보는 한국어일 게 분명했다. 어쨌거나 서울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외계에서 온 손님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생명체가 아니었다. 이미 소멸됐을 게 분명한 문명의 유물에 불과했다. 얼마나 먼 곳에서부터 날아왔든 우주를 건너서 날아왔다는 것은 문명 따위는 버텨낼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을 지나왔다는 의미였다. 정말로 지적인 생명체는 그렇게 먼 길을 직접 떠나지 않는다. 그냥 뭔가를 만들어서 날려 보낸다. 그러면 왕복할 일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몇 만 년이 걸리든 몇 백만 년이 걸리든 돌아온 탐사선을 맞이해 줄 존재는 남아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서울에 정박해 있는 우주선에는 온전한 생명체의 정신이 여러 개나 들어 있다고 했다. 처음부터 영혼을 지니고 태어나지는 못하고 온전한 영혼을 잘 복사해 낸 것에 불과하겠지만. 원본들은 그리 오래 살지 못했을 것이다. 기술 수준을 생각하면 우리보다야 훨씬 오래 살았겠지만 영생을 말할 수준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사본들은 원본의 기억과 자아동일성을 유지한 채 오래 살아남아 우주를 건너왔다.
매뉴얼에 나와 있는 대로 브리핑실을 나와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갔다. 그날따라 에스컬레이터가 고장이 나서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접견대기실이라는 이름이 붙은 층에서는 우주선의 아랫면이 가까이에서 보였다. 은수는 우매희와 나란히 창가에 붙어 섰다.
원본들은 남아 있는 사본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일성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아 있는 사본들은 기억 이식 직전까지 원본이 지니고 있던 자아에 대한 통일된 감각을 그대로 지닌 채 잠이 들고 깨어났을 것이다.
"깨어나는 순간 황당했을까?"
은수가 우주선을 바라보며 물었다. 우매희도 눈을 떼지 못한 채 대답했다.
"예상했던 대로 아닐까? 자고 일어났더니 잠들기 전에 생각했던 곳에 계획했던 모습 그대로 놓여 있었겠지. 당황하지는 않았을 거야. 후회하지도 않고. 원래 그런 걸 좋아하는 녀석들을 골라서 실었을 테니까."
"뻔뻔할 거야."
"사명감에 차 있고."
"이런 당황스러운 요구를 듣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겠지? 뭔가 좀 경건한 안건을 가지고 오고 싶었는데."
"야, 말 나왔으니까 말인데 수능 듣기평가 협조는 좀 그렇다."
"그걸 뭐 내가 주장해서 갖고 왔니? 엄연히 따지면 너네 소관이지. 이상하기로 따지면, 활주로 작전반경 앞인 거 뻔히 알면서 거기에 우주선 접안시설로도 쓸 만한 구조물을 만들게 허가해 준 쪽이 더 심하다. 무슨 200미터짜리도 아니고 500미터짜리를.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위치 좀 신경 써달라고 하면 그게 설명이 돼?"
"그러게. 우주의 평화나 지구의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역할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 누군가 우매희를 부르러 왔다.
"마치고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우매희는 그런 말을 남기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은수는 붙어 있던 창문으로 돌아와 비를 맞고 서 있는 우주선을 올려다보았다. 곧 추락하고 말 거라는 인간의 직관을 매 순간 배반하며 허공에 달려 있는 육중한 몸체.
외계인들은, 외계인의 영혼을 담은 기계장치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지적인 상태로 우주를 건너왔다고 했다. 공간을 최대한 덜 차지하기 위해 잠이 든 채로, 그것도 차곡차곡 접혀서 잠이 든 채로 지구 대기권 안까지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누워 있는 공간과 동면장치가 들어갈 공간까지 절약하기 위해 새로 태어날 몸체를 완제품 상태로 우주선에 싣지 않고 반조립품처럼 화물칸에 실은 셈이다. 우주선이 완전히 정지한 후, 우주선에서 뻗어 나온 통로가 롯데타워 꼭대기를 때려 부숴서 지구에 접안을 완료했을 때, 우주선에서 맨 처음 튀어나온 것은 복잡한 무늬가 그려져 있는 금속판 한 장이었다. 얇고 거대한 금속판 한 장.
지구인들은 자연스럽게도 그 금속판이 글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지구인이란 물론 전원이 한국인이었다. 최초 발견자가 한국인일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으니까. 수색팀이 바닥에 놓여 있는 금속판에 다가가 사진을 찍고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찰나, 텍스트라고 생각했던 금속판에 작은 주름들이 생겨났다. 아마도 주위를 지나는 전기장에 반응하는 듯 수천 개나 되는 미세한 주름들이 같은 리듬으로 조금씩 움찔거렸다. 그때마다 금속판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빨래 줄어들듯'이 공식 기록에 남아 있는 표현이었다. 움찔움찔 몇 차례 작은 수축을 반복하던 금속판은 잠깐 휴식기를 가진 후 좀 더 본격적으로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쑥쑥 줄어드는 금속판. 그때마다 평면 위에 그려져 있던 자국이 점점 선명해졌다. 아무렇게나 구겨지는 게 아니라 미리 설계된 대로 접히고 있었던 셈이다.
금속판은 텍스트가 아니라 스스로 접히는 종이접기 도면이었다. 어쩌면 변신이라고 해도 무방했을 것이다. 자동차가 로봇으로 변하듯 표면이 갑자기 갈라지면서 튀어나올 곳은 튀어나오고 들어갈 곳은 푹 꺼져버리는 과정. 차이가 있다면 자동차나 비행기 같은 입체가 아니라 얇은 평면이 로봇으로 변신했다는 점이다.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최초 수색팀은 저마다의 총을 겨누고 그 변신 과정을 지켜보았다. 형태가 웬만큼 갖춰지고 난 다음에는 다소 민망하고 힘겨워 보이는 단계도 있었다. 아마도 무중력 환경이나 중력이 훨씬 작은 행성 표면에서 접히는 것을 전제로 설계된 도면이라 지구중력이 힘겨웠던 탓일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잠들어 있던 존재가 새 몸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하는 물리 댄스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자기장과 전기장, 그리고 힘의 방향. 그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그로테스크한 춤.
어쨌거나 우리의 지적인 외계사절은 3분여 만에 변신을 완료했다. 다리가 셋, 머리가 하나, 눈이 세 개에 팔이 여섯. 나체는 아니고, 외골격 아니면 의복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껍데기의 형태도 함께였다. 보통 한국 여자 키보다 조금 큰 키였다.
말로만 들으면 괴물처럼 생겼을 것 같지만, 직접 본 사람들의 말로는 우아하고 정교하며 균형 잡힌 형태라고 했다. 무엇보다 그 몸 안에는 우리보다 먼저 우주를 살다 간 생명체들의 정신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 물론 그 모습이 외계인의 형태를 그대로 옮긴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인간이 화성 표면에 보내 놓은 탐사선을 보고 인간의 모습을 유추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생기고 싶은 사람도 있을까.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수수께끼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외계인들이 처음부터 지니고 온 메시지 몇 개는 비교적 분명하게 해독이 가능했다. 애초에 지구가 아닌 화성을 찾아 날아온 외계인들이 폐허가 된 화성을 보고 당황하던 찰나 자연스럽게 지구를 발견하고 착륙지를 변경했다는 것. 탐사에 나선 항성계가 이곳 한 군데는 아니며 이미 두 군데 이상을 확인하고 왔으나 현재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더라는 것. 또한 얼마나 머무를지는 알 수 없지만 지구 역시 마지막 목표는 아니므로 언젠가는 이들도 지구를 떠나게 되리라는 것.
은수는 외계인들의 처지를 상상하곤 했다. 변신이 완료된 순간 외계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사본이 되어 우주를 건너온 외계인들은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낭패감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아, 괜히 왔네. 이게 뭐야' 하는 낭패감.
인류 또한 이 날 사건 이후로는 외계문명과의 만남을 보다 현실적인 방식으로 그리게 되었다. 인류에게, 구체적으로 과학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어린이들에게, 외계지적생명체란 이런 이미지였다. "우리는 모두 우주의 순환이 만들어낸 별의 아이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는 결국 구성물질을 서로 공유하는 우주의 자매", "물론 수학을 못 하는 넌 지적인 생명체가 아니란다, 얘야." 그런데 이제는 이런 숭고한 표현 대신, "기껏 찾았더니 해병대 고참"이라거나 "수소문해서 만났더니 피라미드 영업사원" 같은 구질구질한 비유가 먼저 떠오르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그것은 직시였다. 만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 비록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보며 갑갑해하는 것 또한 엄연히 근접조우(close encounter)의 한 형태였다. 그리고 이것은 세속으로의 타락이 아니라 특권이나 구원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쨌거나 그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는 했으니까.
고향을 떠나온 것을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외계인들이 얼른 지구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주는 상상할 수 없이 큰 공간이고, 그 속에서 깨어난 지적인 존재들에게는 너무나 압도적으로 외로운 방이다. 좀 어이없는 친구들밖에 안 남기는 했지만.
위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발소리였다. 우매희가 일을 마치고 무사히 접견실을 나가는 모양이었다. 은수는 친구의 표정이 궁금했다. 잠시 후 나는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대기실 안내직원이 은수를 부르러 왔다. 그러면서 간단한 주의사항을 이야기했다.
"다른 건 숙지하고 계실 거고, 다들 어려워하시는 게 어디를 보고 있어야 하나 하는 거더라고요. 눈을 보고 있으면 된다고는 하는데 눈 사이가 꽤 멀거든요. 막상 접견실 들어가면 어느 눈을 보고 있어야 될지 몰라서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린다고."
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럼 겁먹은 것처럼 보이겠죠? 어떻게 하면 되나요?"
"아무 눈이나 보시고 시선만 안 흔들리시면 됩니다. 그게 안 되면 차라리 발을 보세요."
"네. 그런데 어느 발이요?"
마지막으로 혼자서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갔다. 망설임이 허락되지 않는 자동계단이었다. 통역을 맡은 언어학자들은 접견실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 끝에서 모퉁이를 돌자 정박해 있는 우주선의 밑바닥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보였다. 촉수 모양으로 뻗어 나온 접안시설이 기괴한 형태로 건물을 움켜쥐고 있었다. 접합 부분은 견고하지만 몸통은 보기보다 유연해서 태풍이 분다고 건물이 더 뜯겨 나갈 위험은 없다고 들은 기억이 났다.
은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접견실이었다. 원래 있던 문은 아니었다. 원래 있던 접견실이 아니었으니 문도 새로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우주군이 정복을 입는 날은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 은수는 이름표를 매만졌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다.
'더 멋진 의제를 갖고 들어갔더라면 폼 나고 좋았을 거야. 더 지적이고 세련된 인류를 대변할 수 있었다면 말이야. 하지만 그랬으면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지는 못했겠지. 나보다 훨씬 높은 사람들이 왔거나 아니면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이 이 문 앞에 섰을 거야. 그런데 그런 건 만남이 아니잖아. 누구나 상상하는 이상적인 근접조우 같은 건 매뉴얼에나 나오는 거니까. 만남이 매뉴얼대로 되나? 만남은 원래 이상한 거잖아. 누가 됐든 이상적으로 이상적인 사람 말고 구체적으로 이상한 사람을 만나기는 해야 될 거 아니야. 그게 나여도 상관없고. 그러니까 내가 가도 되는 거야. 아, 정말이지 다행이지 뭐야. 인류가 충분히 어리석어서. 그래야 내가 마음 편히 대변할 수 있으니까.'
마음이 편해졌다. 피식 웃음이 났다. 은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문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저 뒤에 외계인이 있어.'
콩닥거리던 가슴이 또 한 번 두근거렸다. 손잡이를 살짝 밀자 문이 활짝 뒤로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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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19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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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오 서장원 히데오에겐 몇 가지 비밀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그의 친부가 일본인이며 그가 어린 시절을 일본 교토에서 보냈다는 것이다. 어느 저녁나절, 한적한 거리를 걷던 중에 히데오는 이 사실을 내게 말해 줬다. 이후 히데오는 어린 시절에 대해 조금씩 더 들려주었고, 나중에 나는 히데오의 생애 초반에 일어난 일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꿸 수 있게 됐다. 히데오가 태어난 곳은 교토 외곽으로, 한국 사람들이 떠올리는 여행지 교토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주택가였다. 히데오는 그곳을 자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했다. 습한 여름 날씨나 우듬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나무들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것이 정말 자기 기억인지 교토에 대해 보고 들은 뒤 상상해 낸 이미지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덧붙이곤 했다. 교토에서 있었던 일 중 히데오가 확실하게 기억하는 건 모두 나쁜 경험이었다. 이를테면 초등학생 시절 책상 가득 자이니치나 조센진, 총 같은 단어가 적혀 있던 풍경이나 동급생 남자애들이 그의 가방을 걷어차며 드리블 시합을 했던 일, 그를 조롱하려고 반 아이들이 케이팝 노래를 개사해 불렀던 일, 그런 사건들. 한번은 같은 반 아이들에게 얻어맞아 코뼈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그날 저녁에 히데오의 부모는 아들을 위해 나고야로 이주하는 일을 의논했다. 히데오의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앉히고 나고야에서는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란 사실을 숨겨야 한다고 경고했다. 히데오는 그 말에 깜짝 놀라서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말에 동의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히데오가 아는 한, 히데오의 어머니는 자신이 한국인임을 숨기려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어머니는 눈을 내리깔고 남편도 아들도 바라보지 않았다.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계속 살 거니까, 그렇게 하기로 하자.” 그날 밤, 히데오는 코의 통증과 식도로 넘어오는 피, 어머니의 고요한 얼굴과 나고야에서 보낼 새로운 나날의 환영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만 히데오의 부모는 나고야행을 두고 갈팡질팡했고, 히데오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을 거쳐 이혼을 결정했다. 이혼 후 히데오의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경기도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후 히데오는 일본인 아버지와 일본에서의 삶을 철저히 숨겼다. 나에게 고백하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자신의 첫 번째 이름 히데오를 말해 주지 않았다. 내가 히데오를 처음 본 건 연극원 강의실에서였다. 아직 벚꽃도 피지 않은 3월, 나와 히데오를 포함해 여덟 명의 학생이 강의실에 책상을 둥글게 붙여 앉았다. 그해 연극원에서는 입학이 예정된 학생들을 모아 15분 내외의 단막극, 일명 “짤막극”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신설했다. 입학 전에 그룹별로 모여 공연을 준비하고, 3월 개강과 동시에 연극원 소극장에서 공연을 올리는, 이색적인 신입생 환영회라 할 수 있었다. 학보사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신입생 그룹 중 하나를 인터뷰하기로 결정했는데, 그해 들어 나에게 처음
- 관리자
- 2025-06-01
그리고 밤과 가을이 김연수 1 지난여름, 정기에게는 세 가지 고민이 있었다. 하나는 눈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길을 걸어갈 때면 날벌레들이 달려드는 것 같아 혼자 손사래를 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기사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머리 뒤쪽에서 번개 같은 게 번쩍이기도 했다. 노안이 찾아온 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안경도 새로 맞췄다. 나이가 들면 서서히 시력이 나빠지리라고만 생각했지, 거기에 더해 전에 없던 것들이 보이는 증상까지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 처지가 되고 보니 책 읽는 일이 힘들어졌다. 평생의 즐거움이었던 독서가 성가신 일이 되면서 생활은 성기어지고 마음은 허술해졌다. 더 오래전, 나이가 들면 활자 같은 건 멀리하고 자연을 벗 삼아 소일하며 세속적 가치관에 물든 마음을 고치리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은근히 노년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런 시절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두 번째는 포항에서 에너지공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딸 민지와의 관계가 점점 멀어진다는 점이었다. 그건 서울과 포항이라는 지리적 거리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년에 집을 새로 구하면서 민지는 아빠인 정기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이사의 이유가 언제부터인가 짝꿍처럼 붙어 다니던 여자 선배 희선과 같이 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됐다. 그는 민지와 희선이 단순한 선후배 사이가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몇 번 딸에게 희선에 대해 물었지만, 민지의 반응은 모호했다. 그러다가 정기는 그 일에 대해 더 묻지 않게 됐다. 한 번은 민지가 “나는 아빠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앞뒤 대화의 맥락으로는 그 일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음에도 정기는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의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지막 고민은, 자신이 담당한 부고란에 누구의 죽음을 다룰 것이냐는 점이었다. 최종 후보는 미국의 SF 소설가와 전 여당 대표, 둘 중 하나였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신문 부고란에 누구를 쓰든 무슨 상관이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기에게는 앞의 두 고민만큼이나 심각한 고민이었다. 앞의 두 고민은 과거의 일에서 비롯된 결과를 수습하는 것이었지만, 세 번째 고민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정기는 생각했다. 과연 소설가냐, 정치인이냐. 정기의 고민은 여름만큼이나 깊어졌다. 2 노트북 화면 너머로 신문사 후배인 은영이 지나가고 있었다. “휴가는 즐거웠어?” 정기가 알은체를 했다. “줄곧 비만 내렸잖아요. 태풍이 온다는데 어떻게 해요?” 잔뜩 낯을 찌푸리며 은영이 말했다. “태풍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으면 가지 말았어야지.” “그런 거 따지고 들면 아무 데도 못 가죠. 태풍 지나갈 때 제주 안 있어 봤죠? 그게 진짜 여름이더라구요. 바람이 몰아치는데, 어휴, 엄청났어요. 그러더니만 휴가 마지막 날이 되
- 관리자
- 2025-06-01
바람 부는 날 정기현 단지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펜스와 인접한 아파트 건물들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었으나, 단지 안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어둠의 수심이 깊어져 모든 것이 감추어졌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긴긴 태양 볕 아래 그 흉물스러움을 남김없이 드러내던 여름과는 달리, 겨울의 단지는 어딘가 의뭉스러워 보였다. 이야기를 가득 품은 고성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주택 앞,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재건축 단지라는 별칭이 붙은 아파트 단지는 조합원과 건설사 간 충돌로 공사가 중단되어 짓다 만 아파트 건물들이 2년 동안 그대로였다. 1만 5천 가구를 수용할 수 있다며 대대적으로 착공에 들어갔던 대규모 단지는 2차선 통행로를 중심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문득 그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번 겨울부터였다. 출근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까지 가려면 펜스가 세워지기 전보다 30분씩은 더 둘러 걸어야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아직 잠에서 온전히 깨어나지 못한 상태로 정류장까지 걸을 때면 아파트 중앙 통행로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솔바람, 산들바람 아니고 토네이도에 가까운 세기였다. 물론 토네이도를 직접 겪어 본 적은 없지만···. 사람 하나는 거뜬히 날려 버릴 듯 기세 좋은 바람이었다. 단지 바깥은 바람 한 점 없이 잠잠했으므로, 이는 분명 바람길을 잘못 낸 시공 탓에 불어 대는 건물풍일 터였다. 거센 바람에 펜스가 흔들리며 콰챵- 하는 소리를 낼 때면 살을 에는 새벽녘 추위도 어쩐지 더욱 견디기 어려워져 굳게 잠긴 펜스를 원망하게 되었다. 자물쇠를 열고 단지 가운데 통행로로 다닐 수 있다면 그 끝의 버스 정류장에 금세 도달할 텐데. 아침마다 30분씩은 더 자고 나올 수도 있을 텐데. 내게는 바람쯤이야 잠을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 문제였다. 한파 특보 경보 문자가 알람보다도 일찍 울려 잠을 깨웠던 날, 나는 빌라 현관을 벗어나 오른쪽 인도로 걷는 대신 길 건너 펜스 쪽으로 향했다. 펜스 출입구에는 주먹만 한 자물쇠가 굳게 걸려 있었다. 화풀이라도 하듯 자물쇠를 세게 두 번 당겨 보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자물쇠가 훌렁 풀려 버렸다. 펜스 안쪽으로 손을 쏙 넣어 자물쇠가 걸려 있던 걸쇠를 풀고 출입문을 열자 눈앞에 펼쳐진, 소리로만 접하던 바람의 길. 이용자가 나 혼자뿐이라 길은 실제 너비보다도 광활해 보였다. 건축 자재들, 내부 설비들이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었고 고목처럼 주차되어 있는 승합차도 몇 보였다. 길 가장자리에도 단지로의 진입을 막는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 잠시 길과 나뿐인 세계에 진입한 것만 같았다. 통행로는 야트막한 고갯길이었다. 바람은 듣던 대로 거세었다. 나는 두 손으로 외투를 꼭 여민 채 거센 바람에 맞서 걸었다. 두 발이 동시에 떨어지는 순간 바람에 휘말려 공중으로 붕 떠오를 것 같아 한 발이 떨어지면 다른 한 발은 땅에 꼭 붙어 있도록 의식하며 걸어야 했다. 고갯길의 고
- 관리자
- 202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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