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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 작성일 2019-03-01

[단편소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장류진




입국 심사를 마치고 국제선 터미널로 나오자마자 버스 매표소가 보였다. 지유 씨가 설명해 준 대로였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지유 씨가 메신저로 보내준 일본어 문장을 창구에 앉아 있는 판매원에게 내밀었고, 유후인으로 가는 버스 티켓을 받을 수 있었다. 티켓을 받아들자 판매원이 손가락으로 출구 방향과 자신의 손목시계를 번갈아 가리키며 뭐라고 말했다. 출발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버스 승강장으로 가라는 말일 터였다. 승강장을 향해 급하게 뛰다가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아 갑자기 헛웃음이 터졌다. 전날 오전까지만 해도 다음날 오후에 내가 이곳 후쿠오카 국제공항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지유 씨와 다시 연락이 닿은 건, 내가 먼저 안부 메시지를 보낸 지 정확히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다시 연락해 볼까, 하고 늘 생각만 하다가 거의 일 년 만에 보낸 메시지였다. 답장이 없는 일주일 동안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혼자 '너무 하네'라고 중얼거렸다가, '메신저를 안 볼 수도 있지'라고 생각했다가, '누구하고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상황인가 보다' 했다가 결국은 다시 '너무 하네'로 돌아왔다. 그렇게 생각이 서너 바퀴쯤 돌았을 때 지유 씨가 답장을 보내왔다. 지훈 씨 오랜만. 그 평범한 한 문장에 '너무 하네' 같은 건 바로 잊을 수 있었다.
회사 경조사 게시판에 '법무팀 송지유 배우자상'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온 게 작년 봄이었다. 같은 게시판에 지유 씨의 결혼 소식이 올라온 지 세 달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사람들은 회사 식당에서, 로비에서, 흡연구역에서 누구나 그 이야기를 했고 마치 떫은맛에 중독된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그 일을 자주 입에 올렸다. 교통사고였다더라, 한창 신혼에 그렇게 되어 불쌍하다며 혀를 찼다. 그 와중에 어떤 사람들은 "유부녀였어?"라는 말을 했고 "혼인신고를 했을까 안 했을까"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조의를 가야 하나 고민하다 팀 대표로 장례식장에 가는 사람 편에 조의금을 좀 많이, 그러니까 평소 내는 금액의 두 배 정도를 보내기로 했다. 그때는 지유 씨가 경조 휴가를 마치고 나서 그렇게 바로 회사를 그만둘 줄은 몰랐었다.
지유 씨는 퇴사 후 일본에서 지내고 있다는 근황을 전했다. 이미 회사 사람들에게서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나는 지유 씨가 민망할까 봐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처럼 반응했다.
전 요즘 후쿠오카에서 지내요.
거기 지진 난 곳 아닌가요?
그건 후쿠시마죠.
후쿠오카는커녕 일본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내 말에 지유 씨는 진심으로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서른셋 먹도록 일본도 안 와보고 뭐 했어요, 라더니 생각보다 촌놈이라며 놀렸다. 예전처럼 가까워진 것 같아서 놀림 받는 게 좋았다.
언제 한번 후쿠오카 놀러 와요. 맛집 가이드는 확실하게 해줄게요.
사주는 건가요?
그럼요.
저 이런 말 들으면 안 잊어요.
어색할까 봐 걱정했는데 어제 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하기는, 일 년 전만 해도 거의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사이였으니까. 우리는 같이 일했던 어리바리한 신입사원에 대해, 부장의 다이어트에 대해, 대표의 얼마 전 신문 인터뷰에 대해 이야기하며 웃었다. 우리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웃을 수 있는 맥락과 그로부터 비롯된 웃음 코드를 공유하고 있었다. 지유 씨는 내게 요즘 회사 분위기가 어떤지를 물었다. 나는 오늘부터 창립기념일, 어린이날, 석가탄신일, 주말이 연달아 붙은 황금연휴라 다들 놀러 가는 시기라고 일부러 한탄하듯 말했다.
지훈 씨는 왜 어디 안 가요.
나는 그러게 말이에요, 라고 입력했다가 백스페이스를 재빨리 눌러 그 말을 지우고 이렇게 다시 썼다.
후쿠오카 티켓이나 알아볼까 생각 중이에요. 거기 가면 가이드도 해주고 밥도 사준다는 사람이 있긴 한데.
지유 씨는 메신저로 한참을 크크크, 하고 웃었다. 실제 웃음소리와도 비슷했다. 나는 그녀의 옆얼굴을 떠올렸다. 동그란 이마에서 이어지는 콧등. 웃을 때 그곳에 주름을 만드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연이어 시답지 않은 농담으로 지유 씨를 웃게 만들었다. 동시에 노트북으로는 후쿠오카행 티켓을 검색했다. 마침 다음날 오후 두 시 출발인 비행기가 있었고, 어쩐지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결제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이었다. 결제 완료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잠깐 주저하긴 했는데, 전 여자 친구 중 한 명이 그 항공사의 국제선 승무원이어서 그랬다. 망설임은 사소했고 정말이지 찰나에 불과했다. 어차피 일본까지는 한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으니 혹시 만나더라도 껄끄러운 건 금방 지나갈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런 기준으로 항공사를 하나씩 제외하고 나면 탈 수 있는 비행기의 종류가 얼마 남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출발시각과 도착시각이 찍힌 항공권 결제 완료 화면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 지유 씨에게 바로 전송했다. 지유 씨는 그걸 보고 한참을 또 크크크,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 이렇게 추진력 있는 사람 처음 봤어요.
그 말이 싫지 않았다. 나는 그 기간에 혹시 다른 계획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더할 나위 없이 빛나고 완벽했다.
아뇨, 일본도 황금연휴예요. 고르덴위크.
됐다, 됐어. 그때부터 나는 마음 놓고 속도를 냈다.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라며 비싼 밥을 얻어먹겠다고 장난쳤다. 지유 씨는 불과 오 분 전에 한 약속이긴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지키겠다며 웃었다. 심지어 그녀가 먼저 일정을 제안했다.
그럼, 유후인으로 먼저 오는 게 어때요? 내가 지금 여기서 쉬고 있거든요.
지유 씨가 머무는 곳 근처로 내 숙소를 잡아 주겠다는 것이었다. 같이 유후인 관광을 하고 그다음에 후쿠오카로 넘어가자고 했다. 유후인이든 후쿠오카든 후쿠시마든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게 중요했으므로 나는 무조건 좋아요, 아 좋죠, 라는 말만 반복했다.
사실 지유 씨와 특별한 관계였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우리 사이에 특별한 기운이 흘렀던 것만은 확실했다. 서른셋 먹도록 여행은 많이 못 해봤어도 여자는 많이 만나 본 편이었다. 연애의 가능성이란, 얼굴을 마주하고 한두 마디만 나누어 보면 금방 도드라져서 감지하기 쉬운 종류의 것이었다. 다만 나는 이십 대가 아닌 삼십 대였으므로, 적절한 시기를 기다릴 줄 알았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에겐 남자 친구가 있었고 나 역시 만나는 여자가 있는 상황이었다. 큰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의 연애를 터놓고 이야기하면서 둘 사이에 은근한 성적 긴장을 만들 수 있었고, 그쪽 남자 친구의 흠결을 자주 상기시킬 수도 있었다. 자주 사용하기도 하고, 또 곧잘 통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유 씨는 자기 연애사를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대화를 은근슬쩍 그쪽으로 유도해 봐도 잘 먹히지 않았고, 대놓고 애인의 근황을 물어도 물은 것에만 간단하게 대답할 뿐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그래도 급할 건 없었다. 호감을 잃기 싫어서 그렇게 반응하는 여자도 드물지만 간혹 있었다. 나는 노련하게 기다렸다. 내 쪽이든 상대 쪽이든 절대 양다리 상황은 만들지 않는다는 게 나의 윤리였다. 여유 있게 친분을 쌓아 가면서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어필할까 은근히 벼르고 있었는데, 예기치 못하게 그녀가 청첩장을 내밀었다. 목에 리본을 맨 청둥오리 두 마리가 그려진 카드였다.
"예쁘죠? 제가 그린 거예요."
나는 뜻밖의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짝사랑이란 걸 했다는 사실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지유 씨의 결혼식이 있던 날, 축의금만 보내 놓고 집에 틀어박혀 있자니 어쩐지 청승맞게 느껴져서 혼자 드라이브를 나갔다. 강변북로를 따라 무작정 달리다가 한강대교로 진입해 강을 건너는데, 반대쪽 차선에서 보닛에 커다란 리본을 달고 달리는 웨딩 카를 마주쳤다. 그럴 리 없겠지만 그 안에 지유 씨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와의 관계에 지나치게 여유를 부려서 타이밍을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흘려보냈던 몇 번의 결정적 순간들도 떠올랐다. 그래도 괜한 미련은 갖지 않기로 했다. 만나던 여자는 어차피 헤어질 타이밍이라고 생각해서 정리했고, 그 후로도 금세 또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지유 씨가 다시 싱글이 되는 상황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결혼했다고 해서 영원한 세상은 아니니까. 하지만 사별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맹세컨대 바란 적도 없었다. 어차피 나의 애도는 그녀에게든 나에게든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짧게 하고 끝내버렸다. 나는 그냥 내 상황만 생각하기로 했다. 원래 사람은 다 이기적이니까. 나에게 다시 주어진 기회라고만 여겼다. 배우자가 죽고 나면 언제쯤 괜찮아지는 걸까요? 이런 건 검색창에 쳐봐도 정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혼 기간의 두 배? 두 달 살았으니 그럼 사 개월? 아니면 일 년이면 괜찮아지는 걸까? 조급했다. 어쨌든 이제는 그녀의 황금연휴를 잡았다. 남은 건 명백했다. 후쿠오카에 간다. 지유 씨를 만난다. 그다음부터는, 내가 자신 있는 것들뿐이었다.


DAY 1.


역에서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뉘엿이 지고 있을 즈음이었다. 아무런 정보 없이 급하게 온 터라, 도착하고 나서야 숙소가 호텔이 아니라 료칸이라는 것을 알았다. 먹색 기와가 얹어진 대문을 지나자 대나무가 몇 그루 서 있는 정갈하고 아담한 정원이 나왔다. 둥근 자갈 위에 놓인 돌다리를 하나씩 밟고 걸어 들어가자 료칸 건물 앞에 서 있는 지유 씨가 보였다. 자잘한 꽃무늬 패턴의 기모노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그게 기모노가 아닌 유카타라는 옷이고, 여기에서는 나도 그 옷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지유 씨는 단발머리를 어깨 너머까지 기른 것 말고는 일 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이렇게 또 보네요." 지유 씨가 말했다. 내가 좋아하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지유 씨 그대로예요."
진심이었다. 괜히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지유 씨에 대한 내 감정이, 어쩌면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컸을지도 모른다. 그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유 씨는 료칸 직원에게 받은 열쇠를 내게 내밀었다.
"짐만 올려다 놓고 내 방으로 와요."
나는 귀를 의심했다.
"지유 씨 방에요?"
"저녁 먹어야 하니까. 옷만 나처럼 이걸로 갈아입고 건너와요. 오른쪽 옆방이에요."
성수기라 숙소를 구하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마침 지유 씨 옆방이 취소되어서 그걸 잡을 수 있었다는 거였다. 그녀가 이 점에 대해서는 특별히 고마워하라며 웃었다. 그런데 왜 자기 방에 오라고 하는 거지? 모든 게 믿기지 않았다. 그간의 불운을 이제야 보상받는 건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우선 료칸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이층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일본 영화에서나 보던 다다미방이었고, 작지만 아늑한 분위기였다. 방 한편에 있는 옷장 안에는 지유 씨가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무늬의 유카타 한 벌이 가지런히 접혀 있었다. 나름대로 신경 써서 입고 왔는데 갑자기 꽃무늬로 갈아입어야 해서 당황스러웠지만, 시키는 대로 갈아입고 옆방으로 갔다. 반쯤 열려 있는 문에서 음식 냄새가 풍겨 왔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커다란 좌식 테이블에 두 사람분의 밥상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각자의 나베가 작은 화로 위에서 끓고 있었고 대충 둘러봐도 스무 가지가 넘는 음식들이 빼곡했다.
"조금만 더 늦게 왔어도 못 먹을 뻔했어요. 지금이 마지막 타임이라." 그녀가 서리가 하얗게 낀 잔에 맥주를 따르며 말했다.
"방에서 이렇게 먹는 줄은 몰랐어요." 내가 말했다.
"지훈 씨, 진짜 일본 처음 와봤구나." 그녀가 웃었다.
지유 씨와 밥상을 두고 마주 앉았다. 모든 게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머리가 얼얼할 정도로 시원한 맥주 한 모금. 눈앞에 유카타를 입은 그녀. 그리고 그녀와 나누는 대화. 맞아, 나는 이 대화를 늘 그리워했었다. 예뻐서 지유 씨를 좋아한 게 아니었지만 지유 씨는 결과적으로 예뻤다. 사실 예쁜 여자는 많다. 어디에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만날 수 있었다. 여태껏 만났던 여자들을 생각하면 지유 씨는 사실 눈에 띄는 축도 아니었다. 경험적으로 예쁜 여자는 지루했다. 하지만 지유 씨와는 그렇게 오래 알아 왔는데도 단 한 순간도 무료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녀와는 말이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태껏 그 어떤 관계에서도 감각하지 못했던 경험이었다. 지유 씨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그녀가 내뱉는 말의 호흡과 나의 호흡이 잘 어우러져 특유의 리듬감 같은 게 생겼다. 우리는 존대와 반말, 유쾌와 재치, 다정함과 짓궂음을 카드 패처럼 번갈아 내놓으며 놀았다. 그녀는 잘 웃었고 또 잘 놀렸다. 공수에 모두 강했다. 정말이지 지루할 틈이 없었다.


지유 씨는 삼 년 전 우리 회사 법무팀에 새로 온 변호사였다. 내가 맡은 신제품 라인의 법무 검토 담당자가 이직하고 그 자리에 입사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인수인계차 첫 회의를 하고 나서 혼자 사내 카페에 들러 커피를 주문하고 있는데, 방금 회의실에서 헤어진 그녀가 대뜸 말을 걸어왔다.
"사보에 영화 리뷰 실은 거, 봤어요."
아, 그거. 누군가에게 읽히리라는 걸 알고 쓴 글이면서도 처음 만난 사람이 내 글을 읽었다고 말을 걸어오자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신입사원 시절, 사보의 표지 모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알게 된 사보 담당자가 고정 코너를 하나 맡아 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격월로 발행되는 사보에 영화 리뷰를 한 편씩 쓰고 있었다. "그럼 제 마음대로 써도 돼요?" "그럼요, 쪽수만 채우면 돼요." "예술영화로 써도 되나요?" "당연하죠, 어차피 아무도 안 봐요." 그런 대화들을 나눴고, 그래서 정말 내키는 대로 쓰고 있었다. 지난달에 내가 뭘 썼더라?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걸 읽는 사람이 존재했어?
"그 영화를 정말 그렇게 보신 거예요? 따지고 싶은 게 있어서 벼르고 있었거든요."
"혹시 어떤 부분이······?"
"마지막 문단이요. '그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는 보편적인 인간과 인간의 사랑'이라고 쓰신 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지유 씨는 백분 토론에 출연한 시민 대표처럼 말했다.
"하하, 그러셨구나. 제 해석도 존중해 주세요."
지유 씨의 요청으로 우리는 커피를 마시면서 사내 카페에서 잠시 토론했다. 사실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오가는 대화 속에 놓인 공기의 흐름이랄지, 기운이랄지, 그런 것들만큼은 언제든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우리는 지적 흥분으로 살짝 들떠 있었고 그건 분명 화학적 교감과 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긴 대화 끝에 내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라고 했다. 나는 어깨 위로 가볍게 양손을 들었다. "알았어요, 인정." 그리고 대화중에 캐치해 낸 정보를 활용해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동갑인 것 같은데, 친구 할까요? 회사 친구."


요리를 먹는 내내 기모노를 입은 료칸 직원들이 종종거리며 다다미방을 들락날락했다. 쉬지 않고 빈 접시를 가져가고 새로운 음식을 들였다. 후식까지 나오고 나자 매니저로 보이는 직원이 들어와 온천 이용법을 설명해 줬고 지유 씨가 매니저의 말을 바로 통역했다.
"옥상에 있는 노천 온천이 메인 온천이고, 일층에 작은 실내 온천이 있어요. 일층 온천은 아침 시간에는 남탕, 오후 시간은 여탕. 옥상 온천은 그 반대고, 밤 9시부터는 혼탕."
"혼탕이요?"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다.
"왜, 해보고 싶어요?" 지유 씨가 물었다.
"꼭 그런 건 아니고······."
"온 김에 다 해봐요. 어차피 깜깜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에이, 아니에요." 나는 손을 내저었다.
"생각해 보니까, 지훈 씨는 지금 안 하면 옥상 온천은 못 가겠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옥상 온천이 메인인데. 남자 시간은 이미 끝났고, 일층에 있는 건 내일 아침에 갈 수야 있겠지만 실내고, 작고, 되게 별로거든요. 여기까지 와서 노천욕 안 해봐도 괜찮겠어요?"
"그러네요."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저는 어제 가봤는데 정말 좋았어요. 별이 쏟아지는 거야, 막 이렇게." 지유 씨가 머리 위로 뻗은 양 손바닥을 얼굴 쪽으로 가져다 대는 시늉을 했다. "안 해보고 가면 후회할 텐데." 그리고 안타깝다는 투로 덧붙였다. "나는 오늘 한 번 더 가려고요."
사진 한 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지유 씨 노트북의 바탕화면을 들여다본 일이 있었다. 야자수가 서있는 해변의 석양이었고 오른쪽 귀퉁이에 한 여자가 서프보드를 짚고 서 있는 실루엣이 손톱만 하게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여자는 비키니 수영복 차림이었고, 더 주의 깊게 봤더니 아주 흐릿하긴 했지만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우와, 이거 지유 씨야?"
다른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그녀가 후다닥 달려오더니 노트북을 잽싸게 접었다.
"남의 컴퓨터를 왜 그렇게 유심히 보고 그래요." 그녀가 노트북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보라고 해놓은 거면서 뭘 그래요."
"그런 거 아닌데요?" 그녀가 입을 삐죽거렸다.
다음 회의 때 곁눈질로 그녀의 노트북을 다시 들여다봤다. 바탕화면은 그대로인데 지유 씨의 몸 위에 엑셀 파일 하나가, 마치 이불을 덮은 듯 놓여 있었다.


옥상 온천에 올라가기 전, 방 안에서 푸시업을 했다. 오십 개쯤 했을까, 귀밑에서 땀방울이 뚝 떨어졌다. 손바닥에는 다다미 자국이 깊게 남았다. 백 개를 채우고 화장실 거울에 상반신을 비춰봤다. 가슴과 배, 삼두에 차례로 힘을 줬다. 그리고 신속하고 깔끔하게 자위했다. 정신이 맑아졌고, 이제야 비로소 혼탕을 문제없이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나무로 된 오두막집 같은 건물이 가장 먼저 보였다. 탈의실인 모양이었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 이 건물 너머에 온천탕이 있는 듯했다. 탈의실에는 한자로 남·여, 라고 적힌 두 개의 문이 있었다. 어차피 나가면 탕은 하나일 텐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가 보니 탈의실이랄 것도 없이 플라스틱 바구니 서너 개가 선반 위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나는 유카타를 벗어 바구니 안에 넣고, 방에서 가져온 수건을 허리에 둘렀다.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출구로 보이는 문을 열고 나갔다. 옥상은 꽤 넓었다. 낮은 담 너머로 검은 산 그림자에 둘러싸인 유후인 마을의 전경이 보였다.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왔어요?"
탈의실 앞쪽에 그것과 비슷한 크기의 온천탕이 있었다. 탕에는 지유 씨뿐이었고, 그녀는 온천탕의 왼쪽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머리에 하얀 수건을 두르고 고개만 내민 채였다. 나는 가슴께에서 배 아래쪽으로 무언가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더니. 전혀 아니었다. 달빛이 생각보다 환했다. 온천물이 계속 흐르긴 했지만 물살이 그리 세지 않았다. 물에 잠긴 그녀의 오른쪽 옆 가슴 실루엣이 얼핏 드러났다. 나는 재빨리 시선을 그녀의 얼굴 쪽으로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천연덕스럽게도 탕 밖으로 손까지 내밀어 흔들었다. 역시, 하고 나온 건 잘한 선택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지금 온천에 왔을 뿐이다. 침착하자. 지유 씨가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나는 허리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재빨리 빼고 물속으로 들어가 탕의 오른쪽 끝에 자리를 잡았다. 같은 물에 그녀와 내가 알몸을 담그고 있다. 침착하자.
"어때요? 둘만 있으니까 그렇게 좁진 않죠?"
"그러네요. 별도 잘 보이고."
"지금 이 료칸에 일본 사람보다 한국 사람들이 더 많이 묵고 있어서 여유로울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한국 사람들은 혼탕 잘 안 오더라고요. 덕분에 어제도 나 혼자 전세 냈잖아."
"하긴, 혼탕이라는 말만 들어도 놀랄걸요." 마치 나는 아니라는 듯 말했다.
"왜 그럴까요? 그냥 목욕탕인데 뭐. 다 벗고 있으면 막 큰일 나는 줄 알고."
"그러니까." 나는 맞장구를 치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지유 씨는 왜 하필 일본에 온 거예요?"
"원래 동생이 일본에 살아요. 가깝기도 하고, 언어도 되니까 일자리도 금방 잡을 수 있고." 그리고 조금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그냥, 한국에는 계속 있기 싫더라고요. 누구랑 사냐, 남자는 있냐, 결혼은 했냐, 그런 거 일본 사람들은 꼬치꼬치 물어보지 않아서 편해요. 속으로 무슨 생각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릴 때 도쿄에 살아 본 경험이 있어서 생활방식이 익숙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주재원인 아버지를 따라 독일과 일본에서 학교를 다닌 경험이 있다고 했다.
"독일에서도 혼욕하는 거 알아요? 난 그래서 혼욕하는 게 자연스럽거든요. 친구들 초대하면 온천은 꼭 데려오는데, 혼탕은 다들 어색해하더라고요. 독일에서는 사우나도 다 같이 들어갔는데. 어릴 때는 다른 나라에서도 다 그렇게 하는 줄 알았어요."
지유 씨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이, 한 중년 부부가 옥상에 나타났다. 딱 봐도 한국 사람이었다. 만삭 수준으로 배가 나온 아저씨는 온천의 양끝에 앉은 나와 지유 씨의 얼굴을 한 번씩 보더니 내가 있는 쪽 맞은편에 슬그머니 자리 잡고 앉았다. 후줄근한 사각 트렁크 팬티를 입은 채였다. 나와 지유 씨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둘 다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아저씨의 부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온천탕 가까이에 다가오지도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이상한데 이거, 수영복 입고 들어가는 거 맞아?" 아주머니가 몸에 두른 수건을 꼭 붙잡은 채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지유 씨가 갑자기 물 밖으로 일어섰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나를 포함해서 옥상에 있던 모두가 반사적으로 지유 씨를 쳐다봤다. 아주머니가 갑자기 "꺅"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물속에 잠겨 있는 내 몸을 뚫어져라 보더니 외쳤다.
"여보, 내 말 맞잖아. 이 사람들 다 빨가벗고 있잖아!"
마치 우리가 그걸 못 듣는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가 일본 사람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지유 씨의 알몸이 달빛에 그대로 드러났다. 예전에 바탕화면에서 봤던 그 몸이었다. 아니, 그때 흐릿하게 봤던 것보다 훨씬 극적으로 굴곡진 몸이었다. 지유 씨는 커다란 수건을 둘러매고 탈의실로 가서 지갑을 챙기더니 자판기 쪽으로 걸어갔다. 아저씨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봤다. '너도 알몸이니? 팬티를 입지 않고 있는 거니?' 하는 눈빛이었고 당황한 듯 물에 젖은 무거운 팬티를 추켜올리며 물 밖으로 나왔다. 부부가 황급히 옥상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지유 씨가 자판기를 쳐다보고 있는 동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수건을 두르고 있었지만 나는 그 안에 어떤 모양의 엉덩이가 있는지 조금 전 보아서 알고 있었다. 엉덩이, 법무팀 송변의 엉덩이, 송지유의 엉덩이였다. 어지러워서 물 밖으로 잠시 일어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온천물 온도가 더 높아지는 것 같았다. 몸이 너무 뜨겁게 달아올라서 얼굴이 터져버리기 직전이었다. 잠깐이었지만 물 밖으로 나와 온몸에 찬 공기를 맞으니 좀 살 것 같았다. 그때 자판기에서 캔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다시 몸을 재빨리 물에 담갔다. 지유 씨가 양손에 캔 맥주 두 개를 들고 씩 웃으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유 씨는 또 아무렇지도 않게 몸에 둘렀던 수건을 아주 느린 속도로 풀고 물속으로 들어왔다. 왜 굳이, 그렇게까지 천천히 하는 건지.
"안 더워요?" 그녀가 아사히 캔을 건네며 말했다.
덥지, 왜 안 덥겠어. 나는 태연하게 반대로 말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요."
"팬티 아저씨, 뭐야 정말." 그녀가 야유하며 말했다.
"그러게, 어떻게 팬티를 입고 들어올 생각을 했지?"
갑자기 아저씨의 허름하고 푹 젖은 팬티가 생각나서 둘 다 웃음이 터져버렸다. 잠잠하다가도 다시 누군가 "풋" 하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고 그걸 듣고 다시 웃음이 터져서 한참을 꺽꺽댔다. 별것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재밌지. 여행을 와서 그런가. 기대 이상으로 완벽한 첫날이었다. 나는 나의 방, 그러니까 지유 씨의 바로 옆방에서 모로 누워 지유 씨를 생각했다. 나는 스물셋이 아닌 서른셋이었으므로, 가장 적절한 시기를 기다릴 줄 알았고, 그래야만 했다. 황금연휴의 첫날일 뿐이었다.


DAY 2.


유후인에서 후쿠오카로 넘어와 처음 관광한 곳은 오호리 공원이었다. 공원의 중심에 큰 호수가 있었고, 공원 입구에서 바라보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호수를 따라 걷다 보니 정확히 중간쯤 되는 지점에 스타벅스가 있었다. 건물 한 채가 호수의 한쪽 면을 따라 길쭉하게 지어진 모양새였다. 나와 지유 씨는 터널을 통과하듯 기다란 스타벅스를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주문 대기 줄이 건물 바깥으로 나 있었고 우리도 그곳에 합류했다.
대기 줄이 반쯤 줄었을 때, 한 백발의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끌며 다가왔다. 깔끔한 콤비 재킷에 체크무늬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자전거 앞 바구니 안에는 밝은 갈색의 강아지가 한 마리 타고 있었는데, 아마도 시바견인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지유 씨에게 말을 걸었다. 화장실에 다녀올 동안 강아지를 맡아 달라고 부탁한 모양이었다. 지유 씨는 자기가 커피를 주문하고 올 테니 내가 강아지를 보고 있는 게 좋겠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세워 둔 자전거 앞바퀴에 강아지의 목줄을 묶었다.
잔디밭에 앉아 자전거에 묶여 있는 강아지를 멀뚱히 보고 있는데 웬 일본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는 강아지 앞에 쭈그리고 앉아 "가와이이"라고 말했다. 슬쩍 보니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커다란 눈과 볼터치를 강조한 메이크업. 전형적인 일본 미녀의 얼굴. 하지만 또 이상하게 어딘가 안 예뻐 보이는 그런 얼굴. 그녀는 내 옆에 털썩 앉더니 나를 보며 갑자기 "한국 사람이죠?"라고 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 어떻게 알았냐고 되물었고 그녀는 "한국 사람같이 생겼어요."라고 답했다. 그녀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해서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라고 했다. 아직 서툰 편이었는데, 어떻게든 한국어를 써먹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녀를 위해 최대한 느린 속도로 말했다. 일본 여자는 수동적인 편이라고 들었는데, 예상 밖의 행동에 꽤나 놀랐다. 낯선 남자한테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것도 그렇고.
"혹시, 연예나 영화 쪽에서 일한 적이 있어요?" 그녀가 물었다.
"왜요?"
"그럴 것 같아서요. 얼굴이, 모데루나 배우 같은 느낌이가 있어서."
"영화 한 적 있죠. 연출했었어요."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대학교 때 영화 동아리에서 단편영화를 찍은 적이 있었다. 감독이 아니라 배우였고, 교내 극장에서 상영한 정도였다.
"감독님이시구나."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영화는 어떤 내용이에요?"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데, 유부녀예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와 버렸다.
"에에, 대단해요." 일본 여자가 과장된 감탄사를 내뱉으며 두 손을 합장하듯 모아 입가에 가져갔다. 그리고 자신이 본 한국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특히 사극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통이'라는 도라마를 가장 좋아해요."
통? 내가 알기로는 통이라는 드라마는 없었다. 그녀가 잘못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의 한국어가 유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별로 길게 대화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저는 일본 드라마는 본 적 없지만, 일본 감독의 영화는 좋아하는 편이에요."
"어떤?"
"고레에다 히로카즈나 시오타 아키히코."
"아아." 그녀가 탄성을 내뱉더니 말했다. "처음 들어요."
말도 안 돼. 한국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감독이었다.
"마츠오카 조지는요?"
"전혀."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일본 미녀와의 대화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일본에는 얼마나 머무를 예정이에요?" 그녀가 물었다.
"2박 3일 왔어요. 와이프랑."
"에에? 결혼하셨구나."
필요 이상으로 당황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오네요. 제 와이프."
그녀가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양손에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들고 걸어오는 지유 씨를 보더니 황급히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아아,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그녀는 연신 '미앙'에 가까운 '미안합니다'를 외치며 스타벅스 반대 방향으로 열심히 뛰어갔다. 귀여운 일본 아가씨에게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해버렸다. 조금 미안했지만 어차피 평생 다시 만날 사람도 아니었다. 지유 씨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못살아. 그 새를 못 참고 여자한테 집적거린 거예요?"
"무슨 소리예요. 저 여자가 저한테 집적거렸다구요."
"우리 지훈 씨, 참 글로벌하네."
웃는 입술 사이로 드러난 지유 씨의 가지런한 치아를 보자 조금 전 일본 여자가 묘하게 예뻐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고르지 못한 치열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유 씨는 양손에 커피를 들고 있느라 가져온 모자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있었다. 손뜨개로 뜬 벙거지 같은 모자였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그걸 쓰지는 않고 손에 들고 다니거나 겨드랑이에 끼우고 있거나 했다. 모자가 납작해졌다.
"줘 봐요, 그거. 내 가방에 넣어 줄게요."
내가 커피를 받아들면서 말했다. 지유 씨는 괜찮다고 했다. 자기 가방에 넣으면 된다는 거였다. 그녀의 가방은 손바닥만 한 크로스백이었다.
"거기에 어떻게 넣어요. 안 쓸 거면 그냥 이리 줘요."
나는 지유 씨 손에서 모자를 뺏어 들고 내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내가 이렇게 신세 진 게 많은데, 이거 하나 못 해주겠어요."
내가 백팩 앞주머니에 모자를 넣고 있는 사이 시바견을 맡겼던 할아버지가 다시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지유 씨에게 일본어로 말을 걸었고 몇 마디를 더 나눴다. 지유 씨는 노인과 대화하며 미소 짓기도 했다가 미간을 찡그리기도 했다가 고개를 젖히고 웃기도 하더니 시바견의 목줄을 그에게 건넸다. 할아버지가 떠나고 난 뒤, 지유 씨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었다. 그녀가 약간 난처해하더니 대답했다.
"우리보고, 아이가 있냐고 묻더라고요."
"하하." 나는 일본 여자에게 했던 거짓말이 떠올랐고,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아이는 없고, 무엇보다 부부가 아니라고 했죠."
"그랬더니요?" 나는 내가 무언가 기대하면서 질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하면 아이는 절대 낳지 말고 시바견을 키우래요."
"어쨌든 일단 결혼을 하라는 거네."
"가만 보면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 같아요."
"맞아요." 내가 말을 덧붙였다. "어제 그 팬티 아저씨도 그렇고."
"그러니까요. 늘 자기가 하던 대로만 하고."
우리는 각자의 카푸치노를 들고 벤치에 앉았다. 지유 씨는 따뜻한 카푸치노였고 나는 아이스였다. 우리 앞으로 조깅하는 사람들이 이따금 지나갔다. 그 뒤로 양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고 오리배를 탄 사람들이 그 위를 천천히 지나다녔다. 오리의 목에 색색의 리본이 달려 있었다.
"예전에 지유 씨가 그렸던 오리랑 똑같이 생겼네요."
"무슨 오리요?"
"왜, 예전에 그······ 청첩장에 그린 그림이요. 지유 씨가 그렸다고 했잖아요."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아, 그거. 사실 남편이 그렸던 거예요."
"그런데 왜 지유 씨가 그렸다고 했어요?"
"남편이 그렸다고 하면 그냥······ 왠지 미안해서?"
뜻밖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그때 내가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어요?"
"안다기보다는 그냥 조금. 어느 정도는요."
그 말을 하면서 그녀는 신고 있던 하얀색 스니커즈로 돌부리를 툭, 찼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눈으로 오리배만 좇았다. 따뜻한 카푸치노가 미지근하게 식고 아이스 카푸치노의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오리배를 탄 사람들은 전부 연인 같았고 페달을 밟느라 발을 쉴 새 없이 놀리고 있었다.


오호리공원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기온역으로 이동했다. 도초지라는 절에 가기 위해서였다. 지하철역에서 빠져나오자 빨간 석탑의 꼭대기가 멀리서부터 보였다. 바로 저곳이 우리가 갈 도초지라며, 일본에서 가장 큰 목조 불상이 있다고 지유 씨가 설명해 줬다. 나란히 걷고 있으니 벌써 연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절 입구에서는 불상의 다리만 보였는데, 다리의 크기만 봐도 전체 불상이 얼마나 거대할지 짐작이 갔다. 우리는 절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신발을 벗었다. 나는 신발을 벗는 지유 씨가 균형을 잃고 휘청거릴 때 그녀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아 줬다. 지유 씨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나는 손바닥이 위를 향하게 지유 씨에게 내밀었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고 다른 한쪽 신발을 마저 벗었다. 나는 내 손 위에 얹힌 지유 씨의 희고 매끄러운 손가락들 위에, 나의 다른 한쪽 손을 포개고 싶었다. 하지만 당연히, 아직은 아니었다.
목불상은 예상보다 더 거대했다. 짙은 고동색 나무가 투박한 모양새로 깎여 있었다.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워낙 크기가 압도적이라 그렇게 만들어진 편이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부처의 다문 입, 커다란 귀, 곧게 뻗은 코와 가늘게 뜬 눈. 그리고 동글동글한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불상이 높아서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좀 이상한 면이 있었다. 그렇게 단순한 불상인데도 눈만큼은 기묘한 생동감이 느껴졌다. 눈이 유달리 섬세하게 깎여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어디서부터가 눈꺼풀이고 어디서부터가 눈동자인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고개를 들어 불상의 눈을 쳐다보고 있으면 마치 먼 곳에서 누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둠 속에 검고 축축한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는 불상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고 사찰 안을 둘러봤다. 절에는 나와 지유 씨뿐이었다. 그녀는 사찰 한구석에 마련된 제단에서 초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두 손을 맞잡아 내리더니 눈을 감았다. 남편 생각을 하는 건가. 그녀의 남편이 누구였고,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사이였는지.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지유 씨가 결혼하기 전, 사내 카페나 로비에서 그녀와 잠깐이라도 노닥거리고 나면 동료들이 꼭 한 번씩 물어오곤 했다. "저 여자랑 무슨 사이야?" 그 말을 듣고 나면 괜히 뿌듯했다. 둘이 사귀는 사이인 줄 알고 있다는 소리도 꽤 들었다. 나는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냥 좀 친할 뿐이야."라고만 했다. "잘 어울리는데. 한번 대시해 봐요."라는 말을 들으면 아무렇지 않은 듯 이렇게 말했다. "송지유 씨 남자 친구 있어요." 그게 나만 아는 비밀이라는 듯, 그녀와 나는 사생활을 나누는 사이라는 과시. 지유 씨의 남자 친구 혹은 남편은 나에게 그런 용도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딱히 질투가 나지도 않았다. 내가 지유 씨에게 더 잘 맞는 짝일 것 같다는 이상한 자신감이 늘 있었다.


절에서 나와서는 도심으로 이동했다. 저녁으로는 모츠나베를 먹었고, 생맥주도 한 잔씩 했다. 두 번째 날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하카타역 근처에 내가 예약해 둔 호텔이 있었다. 나는 지유 씨에게 일본 지리를 모르니 호텔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고 그녀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사실 핑계였다. 여기가 오지도 아니고, 내가 호텔 하나 못 찾아갈 리 없었다. 지유 씨가 동생과 함께 살고 있지만 않았어도 어떻게든 그녀를 바래다주었을 것이었다. 여자에게 배웅을 받고 있다니. 자존심이 약간 상했지만 플랜B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여기는 일본이고 그녀에게 더 익숙한 공간이니 어느 정도는 이해해 주지 않을까 싶었다. 호텔에 도착해서는 지유 씨의 도움을 받아 체크인 했고 로비에서 지유 씨와 정중하게 작별인사를 나눴다. 다음에 서울에 들어오면 또 보자는 말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방은 7층, 빨리 올라가야 한다. 황금연휴의 마지막 밤을 위해 준비해 둔 계획이 남아 있었다.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검증된 방법이었다.


여자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나온다. 오늘 하루를 당신과 함께해서 즐거웠다는 말과 함께 깍듯하게 인사한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정중한 미소를 보낸다. 당신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마음이 없다는 듯 지체하지 않고 돌아선다. 여자는 집에 들어가서 생각한다. 꼭 집에 들이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원하는 눈치를 보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긴 했는데. 내가 오버했나. 나는 그 타이밍에 다시 초인종을 누른다. 그녀는 깜짝 놀라 문을 연다. 무슨 일이에요? 이거, 주는 걸 잊어버려서. 나는 짐을 덜어 준다는 핑계로 내 가방에 넣어 두었던 여자의 물건 ― 중요한 서류, 머플러, 선글라스, 혹은 모자! ― 을 꺼내며 조금 전과는 정반대의 표정을 하고 여자의 눈을 바라본다. 하나, 둘, 셋을 세기 전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춘다.


호텔 방에 도착하자마자 백팩을 뒤졌다. 이상하다. 모자가 없었다. 어떡하지. 뭐가 있어야 가져가라면서 부를 텐데. 한참을 더 뒤졌지만 모자는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점점 두려워졌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모자는 없지만 일단 급하게 지유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호텔 창문을 열고 그녀가 어디까지 갔는지 내다보았다. 다행히 그녀가 엄지손가락만 하게 보이는 거리에 있었다. 나는 눈으로는 창밖의 그녀를 쫓으면서,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지유 씨, 모자."
그러자 놀랍게도 지유 씨의 가방에서 돌돌 만 모자가 나왔다. 그녀는 모자를 손에 쥐고 팔을 머리 위로 뻗어 크게 흔들었다. 모자가 커다란 손수건처럼 펄럭였다. 참 해맑기도 하시지. 내 속이 타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아니, 정말 모르나? 이젠 그것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가져간 거예요?"
"아까 지훈 씨 화장실 갔을 때, 내가 지훈 씨 가방에서 꺼내 갔어요."
나는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엉뚱하게 화를 냈다.
"아니, 남의 가방을 그렇게 막 열어 보는 법이 어딨어요."
"지훈 씨, 나랑 자고 싶었어요?"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여자는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 봐요. 나랑 자고 싶었죠?"
"지유 씨는 아니었나 봐요?"
"전, 반반?"
뭐 이런 게 다 있지.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
뭐 이런 게 다 있지.
"아무래도, 자려는 마음이 중요한 거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대체."
"그러니까, 꼭 잘 필요가 있나. 그런 거죠."
"네?"
"자면 뭐 해요. 어차피 자고 나면 다 똑같잖아요. 지훈 씨도 그걸 모르지 않잖아요."
내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 자기가 어떻게 알아. 이 여자는 왜 이렇게까지 확신을 하는 거지.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잤는지 안 잤는지보다는, 자고 싶다는 마음, 그 마음 자체가 중요한 거잖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지유 씨는 또다시 백분 토론 패널처럼 말했다. "그 마음이, 저도 반 정도는 있었던 거니까. 그리고 그게 우리 모두에게 동시에 있는 상태로 잠시 스쳤던 순간이 있었던 거니까. 그걸로 된 거라고 생각해요. 지훈 씨가 자존심 상해할 일도 아니고."
이상한 논리였다. 나도 긴급히 반론을 준비했다.
"제가 지유 씨하고 한번 자보려고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와, 너무 서운하네."
나는 내 안의 모든 진정성을 끌어 모아 말했다.
"그냥 한번 자는 거? 저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에요.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된다고요. 그래서 온 게 아니라고. 나 오늘 지유 씨하고 안 자도 상관없어요. 오늘이든 내일이든 내년이든. 지유 씨랑 자고 싶은 게 아니라 만나고 싶은 거예요. 믿어 봐요.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어요. 지금까지 몇 년을 기다렸는데, 더는 못 기다리겠어요?"
말하다 보니 억울하고 답답해서 숨이 막혀버릴 것만 같았다.
"진짜 모르겠어요? 내가 지유 씨 좋아하는 거잖아요. 저 여자 만날 만큼 만나 봤어요. 그런데 여태까지 이렇게, 진짜, 뭔가, 통한다는 느낌이 드는 여자는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다고요.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그것 때문에 지유 씨 좋아하는 거라고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숨을 몰아쉬었다. 누군가에게 내가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창피하긴 했지만 진심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굳이, 한 번 결혼했던 여자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눈을 떴다. 두 발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발가락들을 꽉 움츠리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그녀가 물었다.
"우리,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어요?"
"네."
"음······ 제가 말을 잘하는 게 아닐까요?"
뭐야. 고개를 들었다. 창밖의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만 수화기에 남아 울렸다.
"저 지금 택시 탔어요." 그녀가 다정하게 말했다. "지훈 씨. 지훈 씨는 능력 있고 인기도 많잖아. 내가 다 알아요. 일 잘하지, 직장 번듯해, 응? 또 잘생겼고, 또 몸짱이시고." 이 말을 하면서 지유 씨는 살짝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비웃는 건가. 기분이 확 잡쳤다. "얼마든지 또 좋은 여자 만날 수 있잖아요."
마치 어린애 대하듯 구슬리는 말투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상하게, 나는 마치 아이가 되어버린 것처럼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하면서 매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날 어르고 달래서 재우려 했다. "내일 아침 일찍 비행기 타야 하잖아요. 이제 얼른 씻고 자야죠. 응?" 그런 기이한 작별인사가 끊어질 듯 이어졌고, 그렇게 끊으려는 자와 끊지 못하는 자의 실랑이가 한참을 더 이어진 끝에 통화가 끝났다. 세상 질척거리는 통화였다. 심지어 나는 울고 있었다. 최악이었다. 휴대폰을 침대 위에 던져버리고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자 뚜껑을 닫지 않은 채로 올려놨던 작은 생수병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고 바닥에 두었던 백팩 위로 물이 쏟아졌다. 나는 황급히 백팩을 집어 들었다. 백팩의 앞주머니 지퍼가 활짝 열려 있었다. 이 씨발년이. 열었으면 닫아 놔야 할 거 아냐. 소중한 황금연휴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나는 내가 지유 씨 앞에서 울었다는 사실이 억울해서 또 눈물이 났고 그렇게 눈물의 악순환 속에 잠이 들었다.


DAY 3.


눈을 뜬 시각은 출국 세 시간 전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어젯밤의 수치가 빚쟁이들처럼 우르르 몰려왔다. 숨이 막혔다. 너무 하네, 정말 너무 하네. 난 여기 왜 온 거지?
짐들을 대충 백팩에 쑤셔 넣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하카타역에서 공항선을 타고 가야 했다. 어제와는 달리 쌀쌀한 날씨였다. 나는 역까지 걸어가면서 양손을 청재킷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동전 몇 개가 손에 잡혔다. 더 이상 필요 없는 돈이었다. 항공권도 이미 결제해 두었고 어차피 엔화는 이제 쓸 일이 없었다. 당분간 일본에 다시 올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영원히 오고 싶지 않았다.
걷다 보니 어느새 하카타역 근처에 도착했다. 역사 입구에 꾀죄죄한 보자기를 둘러쓴 할머니가 종이컵을 들고 구걸하고 있었다. 아주 작은, 쪼그라들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작은 할머니였다. 마침 잘 됐다. 나는 주머니에 들어 있던 엔화를 한 움큼 집어 거지 할머니의 종이컵에 쏟아 부었다. 뒤이어 참방, 하는 소리가 났다. 동전을 던져 넣었던 손이 갑자기 축축해졌다.
"에에?"
할머니는 비명을 지르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말도 안 돼. 종이컵 안에는 커피가 들어 있었다. 거지가 아니라 그저 커피를 마시고 있는 할머니였을 뿐이라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커피에 젖은 손이 기분 나쁘게 끈적거렸다. 당황해서 끈적이는 손가락만 접었다 펴며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길 건너편에서 한 거구의 남성이 알 수 없는 일본어로 소리를 지르며 다가왔다. 반짝이는 대머리에 턱수염과 콧수염만 잔뜩 기른, 한마디로 야쿠자같이 생긴 남자였다. 얼마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지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이마에 튀어나온 힘줄이 다 보였다. 저 남자는 대체 누구지. 이 할머니 아들인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으니까 더 무서웠다. 나는 백팩을 추켜올리고 지하철 역사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작가소개 / 장류진

1986년생.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동국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수료. 2018 창비신인문학상 「일의 기쁨과 슬픔」으로 등단.


《문장웹진 2019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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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을 타자 윤성희 1 나는 혼자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없었다. 겁이 많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버스나 기차를 타고 먼 곳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토요일이면 걸어서 삼십 분 거리에 있는 호숫가의 트럭 카페에 가서 삼천 원짜리 커피를 사 먹거나, 퇴근길에 내가 좋아하는 정자에 가서 가끔 맥주 한잔을 마셨다. 그게 나에겐 여행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최근에 그 장소들을 잃어버렸다. 먼저 정자에 불이 났다. 정자는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교문 옆에 있었다. 학교는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야 해서 늘 숨을 헐떡이며 등교를 해야 했다. 여름에는 교복 겨드랑이가 땀에 젖곤 했다. 교문 옆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고 거기에는 운동기구와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자가 있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는 거기서 매일 철봉을 하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늘 철봉을 했다. 그리고 지각을 하는 학생들에게 잔소리를 했다. 지금은 조금 늦는 거지만 나중에는 아주 많이 늦게 된다고. 이제 운동기구는 없어졌고, 아마 할아버지도 돌아가셨겠지만, 정자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혼자 술을 마시고 싶은 날이면 나는 그곳에 갔다. 가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 닭 다리 모양의 과자와 맥주 한 캔을 샀다. 맥주는 텀블러에 옮겨 담았다. 너네는 공부해라. 나는 맥주나 마시지. 하교하는 아이들을 보며 몰래 맥주를 마시면 기분이 좋아졌다. 텀블러 안에 술이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통쾌했다. 바람까지 불어 주면 근심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정자에 불을 낸 사람은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시험을 망쳐 기분이 우울한데 정자에서 사람들이 웃고 있는 걸 보니 화가 나서 그랬다고 뉴스에서 아이는 말했다. 나는 불에 탄 정자 사진을 찍어 민정에게 보냈다. ‘헉, 낙서도 사라졌어?’ 민정이 물어서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정자 기둥에는 연경의 낙서가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는 거기서 치킨을 시켜 먹은 적이 있었다. 그 시절에 우리 학교는 점심시간에 몰래 나가 치킨이나 떡볶이를 배달시켜 먹는 게 유행이었다. 그날 연경은 닭 다리를 우리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정자 기둥에 이런 낙서를 남겼다. ‘닭 다리 양보한 사람은 평생 복 받을 것!’ 연경은 프라이드치킨을 좋아했다. 나는 편의점에서 닭 다리 과자를 살 때 꼭 프라이드맛만 샀다. 핫숯불바베큐맛은 절대 먹지 않았다. 민정에게 새로 정자가 지어지면 같은 자리에 같은 낙서를 하자고 말했다. 민정이 꼭 그러자고 답을 보냈다. 그날 밤에 나는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훌라후프를 하는 꿈을 꾸었다. 땀에 젖은 겨드랑이를 보며 서로 웃었다. 삼 년 전, 나는 엄마의 병간호를 핑계로 고향에 왔다. 그 전에 나는 서울의 한 무역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상사인 경리실장이 횡령을 하고 잠적하는 일이 생겼다. 동료 직원과 함께. 퇴근 후 우리 셋은 자주 어울렸다. 우리는 같은 먹방 유튜버를 좋아했다. 그래서 새 영상이 올라오면

  • 관리자
  • 2025-09-01
법의 아름다움

법의 아름다움 길란 출근 시간이 되기 20분 전에 부속실에 도착했다. 우선 판사님들의 책상을 청소했다. 강 판사님의 책상 위에 올려진 커피잔도 치우고, 정 판사님 책상 위에 있는 사도신경이 새겨진 크리스털도 지문 자국 하나 남지 않게 조심히 닦았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교회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지만 사도신경의 내용만큼은 다 외워 버렸다. 크리스털을 닦고는 재판에 필요한 자료를 정리해 정 판사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판사님께서 읽으시기 편하게 글씨 크기를 키워서 출력한 자료도 옆에 두었다. 남들은 나보고 오버한다고들 하지만, 엄마는 이런 게 다 업무 능력이라고 했다. 판사님들께서 안 보는 척하면서 다 보고 있을 거라고. 책상 청소를 마치고 책장과 벽에 걸린 십자가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을 때 정 판사님께서 부속실에 들어오셨다. “권 기사, 좋은 아침이에요.” “안녕하세요 판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그럼 좋지.” 그렇게 말하며 판사님은 책상에 앉으셨다. “매번 고마워요. 따로 뽑기 힘들 텐데.” 판사님이 큰 글씨로 뽑은 자료를 들어 보이셨다. “아니에요. 제가 판사님 업무 도와드리는 거로 돈 받는 거잖아요.” 최대한 사교성을 끌어올려 너스레를 떨었다. “내년에 부서 바뀌면 어떡하나. 권 기사가 아주 내 버릇을 나쁘게 들여놨어.” 판사님이 웃으며 말하셨다. 머신으로 커피를 내리고 있으니 강 판사님과 이 판사님께서도 부속실에 들어오셨다. 강 판사님과 이 판사님께도 인사를 하고 커피를 드렸다. 판사님들께서는 고맙다고 하시고는 안에서 편하게 일하고 있으라고 말해 주셨다. 나는 판사님들께 인사를 하고 부속실 안에 있는 속기실에 들어왔다. 판사님들과 분리된 나만의 공간이었다. 법원에서 일하기 전에는 판사들이 권위적인 사람들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실제로 겪어 본 판사님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점심을 먹고 나니 어느덧 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속기용 키보드와 공판 자료들을 챙겨 법정에 들어왔다. 대기석에는 사람이 스무 명 정도 앉아 있었다. 속기사석에 앉아 그들을 둘러보았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부터 60대 남성까지 성별과 나이가 다양했다. 눈에 띄는 것은 단연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었다. 곧 검사분들이 재판장에 들어와 검사석에 자리를 잡았다. 정 판사님께서도 공판 시간에 맞춰 입정하셨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판사님께서 첫 번째 사건의 번호를 부르고, 피고인의 이름을 부르고, 인적 사항을 확인했다. 검사가 기소의 이유를 밝혔다. 횡령죄였다. 나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법정 안에서 발화되는 모든

  • 관리자
  • 2025-09-01
모든 공원에는 이름이 있다

모든 공원에는 이름이 있다 조재윤 그녀는 공원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그녀의 퇴근길이 비탈이 될 즈음, 공원은 나타난다. 사 차선 도로와 맞닿아 있는 공원은 아스팔트의 바깥이 아닌 일부처럼 보인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너비의 내부엔 몇 개의 운동기구와 나무 벤치밖에 없다. 옅은 주황색 가로등 불빛 아래 놓여 있는 나무 벤치에 앉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느 공원에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흐느적거리며 산책하는 사람 또한 없다. 그녀는 자정에 가까운 퇴근길의 경로를 공원 입구로 바꾼 적이 없다. 공원 뒤편 아파트 단지가 있지만 단지 내에 이미 공원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주민 또한 없다. 과자 부스러기를 뿌려 주는 주민이 없기 때문에 비둘기 또한 없다. 공원엔 나무도 없다. 나무가 없기 때문에 참새 또한 없다. 그녀는 공원 앞에 놓여 있는 낡은 표지판을 들여다본다. 공원의 이름은, 무슨무슨 혹은 땡땡 공원이다. 무슨무슨 혹은 땡땡에 적혀 있던 글자는 칠이 벗겨져 알아볼 수 없다. 없는 게 너무 많은 공원은 이름 또한 없다. 그녀의 원룸 창문을 열면 또, 공원이 나타난다. 언덕 위 원룸에서 보는 공원은 더 작고 조악해서 뭉쳐 놓은 모래 더미 같다. 그녀는 공원의 이름을 유추해 본다. 본래의 이름. 무슨무슨에 들어갔던 글자들. 하지만 머릿속엔 텅 빈 공원이나 길옆 공원 같은 공원의 민낯을 드러내는 이름만 떠오른다. 그녀는 공원의 이름을 아무것도 없는 공원으로 지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그런 이름을 지어 주기엔 공원이 가엾게 느껴져 머릿속에서 지운다. 시간은 밤 열두 시를 향하고 있다. 그녀는 힘겹게 나무 벤치를 비추고 있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락을 떠올린다. 락에게 공원의 이름짓기를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락이 오는 시간은 아직 멀고 멀었다. 오후 한 시. 한낮의 해가 지구의 정수리에 오도카니 설 때, 락은 온다. 따르릉 따르릉 소리를 내며. 따르릉 따르릉. 그녀는 방 안을 울리는 소리를 따라 해본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 소리보다는 자전거의 경적 같다고 생각하지만 따르릉만큼 자신의 벨 소리를 정확하게 표현할 단어는 없다고 수긍하며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흥얼거린다. 전화를 받자 락이 인사한다. 안녕. 오늘은 그늘이 많은 날이야. 그녀도 인사한다. 안녕. 오늘은 햇볕이 따뜻한 날이야. 근데 따뜻하다는 말은 여름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 같아. 락이 웃으며 말한다. 그늘이 필요한 날이었는데 딱 좋네. 서늘해. 그녀가 답한다. 바깥에 까마귀가 많아. 까마귀가 전깃줄에 줄지어 앉아 있으면 글씨 위를 까맣게 그은 밑줄 같아. 락이 잠시 뜸 들이다 말한다. 오늘 점심은 소고기뭇국이었어. 나는 무보다 소고기가 더 많이 들어 있길 바라지만 언제나 무가 더 많아. 그래서 소고기뭇국의 이름은 소고깃국이 아니라 뭇국이지. 락의 말이 끝나자 그녀가 이어 말한다. 해가 따뜻할 땐 이불을 널어야 하는데. 그러고 보면 여름은 언제나 이불을 널어놓기가 좋은

  • 관리자
  • 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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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서쪽변두리

    겁나 재밌게 봤씀다~!!

    • 2019-03-21 15:50:35
    서쪽변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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