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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여자

  • 작성일 2019-09-01
  • 조회수 2,805

[단편소설]



남자여자



김효나




그는 셀카를 찍었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드립용 전기포트를 검색했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배를 깎았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떨어진 머리카락을 주웠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노트북의 디스크 공간을 확보했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웃었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오래된 장롱을 노려보았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전구를 갈았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작은 드로잉북에 움푹 들어간 모양을 그렸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아랫집이 이사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아랫집에 이사 오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등을 긁었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뉴스를 보았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어떤 기사를 보다 얼굴이 붉어졌고, 온몸이 붉어졌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콜린 증후군을 검색했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사라진 삼촌의 이마를 떠올렸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땅콩을 오물거렸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창가에 귤껍질을 말렸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지진을 느꼈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국어사전에서 '연루되다'라는 단어를 찾아보았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잠'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모든 노래를 찾아 들었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이사를 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미처 줍지 못한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사라진 삼촌의 조카들을 생각했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동물들은 떠났어'라는 가사를 흥얼거렸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금연을 검색하다 금연하는 사람의 블로그 일기를 오랫동안 읽었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1분 동안 숨 쉬지 않았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스팸을 오물거리며 "네가 없는 동안에도 내게 자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우물거렸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눈썹을 그리지 않았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침대의 끄트머리에 놓인 책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창밖으로 백파킹하는 은색 소나타를 끝까지 바라보았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주운 머리카락을 크리넥스에 모아 버렸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로션을 발랐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삼촌이 주었던 외투를 입고 셀카를 찍었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외투 주머니 속에서 레고 인형의 오른 귀 한 짝을 발견했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이사하지 않았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꿈을 꾸었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그는 그녀가 눈썹을 그리는 꿈을 꾸었다.
나는 눈썹을 그렸다.





















파란 눈썹이었다. 파란 눈썹을 그렸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회전의자에만 앉으면 끝없이 회전하고 싶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묘지와 감옥 사이에 살던 중국인 남자를 알고 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정체된 강변북로를 지날 때면 타르코프스키가 생각난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늘어진 구두끈만 보면 글을 쓰고 싶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영화 〈장거리 주자의 고독〉을 보지 않았지만 장거리 주자의 고독에 대해 한 시간 말할 수 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스라소니, 스라소니만 생각하면 연해주의 험한 바위지대와 침엽수림을 떠돌다 사라지고 싶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스라소니의 귀 끝을 제발 주목하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등이 가려우면 꽃이 피는 거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한국종이접기협회의 회원이 되고 싶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저는 슬픔과 고통, 가난이 전부입니다.'라고 쓰인 손 팻말을 기억한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고조 인내해, 인내해, 삼 년 만······"이라고 속삭이는 전화 통화를 엿듣고 삼 년 만 인내하기로 결심한 적이 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그곳은 연신내였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떼 지어 모여 있는 모습을 보면 눈물이 난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2002 월드컵 생중계가 가장 슬펐고, 그다음으로 슬픈 것은 마라톤 생중계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화초의 복잡한 그림자를 볼 때마다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저것에 대해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그러나 결코 쓰지 않는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나는 사진을 찍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오랫동안 암실에 머물렀는데 여전히 암실에 머무르는 기분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암실에서 현상하는 것은 기억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기억은 파괴파편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감정의 구름이동과 고통의 기압변화를 유심히 관찰하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다섯 시간 동안 무궁화호를 타고 정동진에 가서 오 분 머문 뒤 곧장 다섯 시간 무궁화호를 타고 돌아왔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달리는 열차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문어를 보았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눈을 감았다 다시 떠보니 문어는 열차 천장에 달린 모니터 속에 있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있고 없고는 없고 모든 것은 그대로 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동물들은 떠나지 않았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차창의 표면에는 수억 개의 빗방울 자국이 남아 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차창의 빗방울 자국 사이에 헤아릴 수 없는 빗방울 틈이 있다고 그에게 말했다.1) 그는 왜냐고 물었다. 길고 긴 길만 보면 끝없이 들어가고 싶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잠시 여행을 떠날 거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내가 없는 동안 우리가 자주 해먹던 음식을 해먹으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뭐라고 우물거렸다.

1) 이인성,『한없이 낮은 숨결』, 문학과지성사, 1989에서 변형.


파란 눈썹이었다. 나는 눈썹을 그렸는데 파란색이었고 그것은 파란 눈썹이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타르코프스키만 생각하면 타르코프스키처럼 긴 이름을 갖고 싶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타르와 코프와 스키의 긴 대화를 언젠가 쓸 거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스라와 소니의 대화도 피할 수 없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위스와 망스의 대화는 말할 것도 없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그들은 카페에서 술을 마시며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다시 하고, 수없이 반복할 거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반복만이 유일한 살 길인 것 같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지루하고 지쳐서 최소한 한 사람은 언제나 잠이 들어 있는 이야기를 쓸 거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잠에 대해서만이라도 제대로 쓸 수 있기를 바란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어떤 책은 중얼거린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어떤 책은 비명 지른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비명 지르는 어떤 책은 테이블의 끄트머리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읽고 싶지만 읽을 수 없고, 읽을 수 없지만 읽어야 하는 책들은 모든 가구의 끄트머리를 위태롭게 점유하고 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사건은 없고 곳곳에 시선이 출몰해야 한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갈등은 없고 곳곳에 음성이 출몰해야 한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제 목소리 들으시죠? 음성이 빗나가게 말을 합니다. 분명히 지적합니다만 저 자신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습니다.'2)라고 출몰한 음성이 자꾸 내 입에서 출몰한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한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나는 사건이 싫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방 밖으로 한 걸음만 나가도 사건들이 뺨을 후려친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기억파편에 어깨를 찔리는 편이 낫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나는 도청의 기억이 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가죽 허리띠처럼 질기고 두꺼운 목소리에 종종 목이 졸린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나는 자살을 권유한 적이 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나는 자살을 권유당한 적이 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권유자가 사시사철 걸치고 있던 에메랄드 녹색의 얇은 점퍼만 떠올리면 이가 시리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매대에 진열된 순백의 속옷 더미를 보면 들고 있던 아메리카노를 쏟고 싶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모조리 무너지고 부서지고 망하는 상상을 한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모조리 무너지고 부서지고 망할 때 가장 웃음이 터진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터진 웃음을 수습할 수 없을 때 가장 고독하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달리는 다리를 멈출 수 없을 때의 고독과 비슷하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긴 고독의 시간은 내게 긴 터널의 이미지로 다가온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소실점이 완전한 암흑인 길고 긴 터널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린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잠시 혼자 있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방금 구운 스팸을 앞에 두고 혼자 있는 동안 스팸을 구워먹으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뭐라고 우물거렸다.

2) 마르그리트 뒤라스, 『부영사』, 이용숙 옮김, 정우사, 1985.


파란 눈썹이었다. 나는 눈썹을 그렸는데 초록색도 보라색도 아니고 왜 파란색일까 알지 못했지만 파란 눈썹이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입술을 칠했는데 파란색이었고 그것은 파란 입술이었던 프랑스인 남자를 기억한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파란 입술의 남자는 새벽에는 호텔 로비에서 일하고 낮에는 전자음악을 만들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파란 입술의 남자의 딸의 엄마는 전자파 공포증이 있어서 딸을 데리고 숲으로 들어갔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나는 전자파 공포증이 있는 여자들을 눈여겨본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전자파 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찾아보았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집 앞의 전봇대가 점점 기울어져 가고 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어느 날 전봇대는 완전히 기울어져 방의 창문을 깨고 들어올 거라고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니 백발이 되어 있더라는 삼십대 여자의 이야기가 불쑥불쑥 떠오른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마흔일곱, 얼른 마흔일곱이 되고 싶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마흔일곱이 되면 마음의 안정을 찾을 것 같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마흔일곱에는 귀여운 아들 한 명이 있을 거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여덟 살 아들과 여행을 다니는 것이 꿈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숲으로 들어간 어떤 모녀에 대한 질투심에서 비롯된 꿈일지도 모르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여덟 살 아들은 언어를 잘 모르고, 아마 외국인일 거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그 아들의 이름은 니콜라 또는 티엔느일 텐데, 결코 제롬이나 장은 아닐 거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여덟 살 니콜라는 검은 머리의 키 큰 여자와 여행을 다니는데, 그것이 니콜라가 원하는 바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나는 아직은 없는 아들이 원하는 바에 대해 진심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아들이 원하는 바에 대해 진심으로 생각하는 여자들을 보면 열등감을 느낀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바에 대해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열등감을 느낀다고 반복하여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바를 찾으려 노력하면 할수록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바에서 멀어질 것이기 때문에 끝끝내 노력하지 않겠노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내가 노력할 수 있는 것은 노력하지 않는 것뿐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잠시 바다에 다녀오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내가 없는 동안 우리가 자주 해먹던 음식을 해먹으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그러자 우물거리던 너의 말이 스팸을 오물거릴 때마다 들린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스팸, 스팸을 구워먹으라고 했을 뿐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너의 자아의 존재 여부에는 눈곱만치도 관심이 없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네 자아의 존재 여부는커녕 내 자아의 존재 여부조차 알 수가 없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내 자아의 존재 여부는커녕 나의 존재 여부조차 불투명하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나는 대부분 없고, 눈썹을 그릴 때나 간혹 존재하는 것 같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뜸해져 거울 속엔 오로지 눈썹만이 존재하는데 파란 눈썹이라고, 오로지 파란색만 있고 그것은 다름 아닌 눈썹이며 짙어지고 휘어지는 파란 눈썹만이 동그란 거울 속에 갈매기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당신이 왜냐고 묻는 당신의 움푹 들어간 그림 속에 빠진 것처럼 나는 파란 눈썹 속에 갇혔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내가 눈썹 속에 갇혔으니 내가 하는 이 모든 말은 눈썹 속에 묻혔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짙어지며 휘어지는 파란 눈썹 속에 묻혀 단 한 마디도 새어 나오지 못한 말들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잠에서 깬 남자는 마흔일곱 번째 발언에 대하여 몹시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집요하고 조급하게 묻는 자 앞에서 여자는 오히려 마음이 느긋해지고 여유로워졌으므로 조금 돌아가기로 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곱 시 정각에 전화가 왔어요.
"이모가 죽었다."
엄마였어요. 나는 보리스 비앙의 탈영병을 듣고 있었어요.
일어나 싱크대에 가 손을 닦았어요. 물고기 냄새가 확 풍겨 왔어요.
그녀는 어제 새벽 한 시에 이미 떠났다고 했어요. '고통은 그의 비행기 표를 연장해 준 다음날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부재하던 지난 두 달간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나는 분명히 고통스럽다.'라고 일기장에 끄적인 나의 고통은 아마도 이모의 죽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뜬눈으로 아침 일곱 시까지 누워 있었거든요. 그 때문에 이렇게까지 괴로워한다는 건 좀 믿기지 않았어요. 내 고통은 분명 과장되어 있었어요.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었어요. 이모의 고통을 나누었다는 느낌이었어요. 병상에서 나를 향했던 그녀의 시선, 침묵, 노랗게 뜬 얼굴과 부풀어 오른 배. 그녀는 진단 이 주 만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녀가 급격히 위독해졌던 시각, 그는 한 달을 더 머물고 오겠다며 여행사에 전화해 귀국 날짜를 연장해 줄 것을 요청했어요. 평소 연락하던 인터넷 전화가 아닌 국제전화로. 다소 상기된 말투.
딸을 찾았다고 했어요. 딸의 엄마와 연락이 닿았다고.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나는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


남자는 예상대로 초조해져서 오직 그 부분에 대한 대답만을 원했으므로 여자는 조금 더 멀리 돌아가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사흘 전 s대 병원 신경정신과 미술치료 수업에 그를 닮은 아이가 나타났어요. 삭발한 머리에 양볼 드문드문 여드름 자국이 남은 아이.
그 애는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물었어요.
"앉아도 돼요?"
그리고 앉자마자 물었어요.
"그려도 돼요?"
사절 도화지를 주자 파란색 파스텔을 집더니 곧바로 칠하기 시작했어요. 육각 파스텔의 넓은 면으로 사절지를 빈틈없이 채운 다음 손바닥 전체로 거침없이 문질렀어요. 종이는 순식간에 파래졌어요.
그런 다음 흰색 파스텔을 집었어요. 단 1초의 지체도 없이 슥, 슥, 나란히 유영하는 미끈한 돌고래 두 마리가 파란 화면 위에 떠올랐어요.
곧이어 바다 속으로 스며드는 빛줄기까지. 딱 세 줄. 지우개로 말끔히 처리.
빠른 속도로 그림을 끝낸 아이는 책상에 구비되어 있던 색종이를 들었어요. 양면이 파란 사각 종이 한 장.
"접어도 돼요?"
남은 시간 동안 아이는 그 한 장을 무수히 접고 폈어요. 순서가 헷갈리는지 원하는 모양이 아닌지 애써 접은 걸 폈다가 다시 접고, 폈다가 다시 접기를 삼십 분 내내 반복했어요. 그러다 결국엔 편 채로, 너덜너덜해진 사각 종이만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의자에서 일어났어요. 나는 뭘 접으려 했는지 물었어요.
"장미요."
장미?
"파란 장미."
수업이 끝나고 간호사에게 물었어요. 처음 보는 저 애는 누구냐고.
'도자 전공. 환청에 시달려 입원한 지 닷새. 공예 도구로 자해. k대 1학년.'
역시 그를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삭발한 머리와 여드름 자국뿐 아니라······ 광기가. 파란색으로 드러나는 광기.
그는 언젠가 말했어요. 바스티유 호텔에서 근무하던 시절, 입술을 파랗게 칠하고 다녔다고. 호텔의 검은 슈트를 입고 새벽의 로비에서 어서 오십시오, 좋은 밤 되십시오, 중얼거리던 파란 입술의 남자는 자신이었다고. 왜 그랬냐고 묻자 잘 모르겠다고 했어요. 이제 와 곰곰이 생각해 봐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고, 파란 입술의 호텔보이에게 아무렇지 않게 열쇠를 받던 새벽의 투숙객들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다고 했어요.


그게 무슨 소리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남자의 입술은 바짝 메말라 곧 바스라질 것 같은 바랜 꽃잎 같았으므로 여자는 한없이 부드러워진 말투로 한없이 돌아가는 방향을 택했다.


고등학교 이학년 때 아빠가 수감되었어요. 중학교 일학년 때부터 그는 도주하였는데 오 년을 버티다 결국 붙잡힌 것이었어요.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집이 있는 a시로부터 사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b시에 있었어요. a시에 사는 친구들끼리 구인승 봉고차를 타고 통학했었는데 그가 수감된 순간부터 더 이상 편하게 봉고차를 타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엄마는 그대로 타도 괜찮다고 봉고차 비용이 든 봉투를 쥐어 주었지만 받지 않았어요. 그리고 어느 날부터 좌석버스를 타고 혼자 등하교하기 시작했어요. 봉고차를 탈 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 버스를 타러 가는 길. 아파트 단지를 지나, 도서관과 공원을 지나, 사거리를 지나, 뉴코아 뒤편을 지나, 먹자골목을 지날 때 텅 빈 거리에 울리던 발걸음 소리가 생각나요. 늘 사람들로 붐비고 따스한 빛과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오던 그곳은 내가 알던 그 골목이 아니었어요. 그 사람들은 모조리 죽고 상점들은 파괴되어 버린 폐허 같았어요. 아직 동트지 않은 새벽의 짙푸른 하늘 아래 굴러다니는 맥주 캔, 산산조각난 소주병, 흩어진 전단지, 쓰러진 입간판들과 쏟아진 구토물들. 배낭끈 쥔 양손에 바짝 힘을 주고 그 골목을 지나면 표지판만 달랑 하나 꽂혀 있는 정류장이 나오고 거기서 버스를 탔어요. 시외로 가는 그 초록색 좌석버스는 언제나 텅 비어 있었고 나는 늘 뒤에서 두 번째 줄 우측 창가 자리에 앉았는데 지금도 버스를 타면 그 자리에 앉아요. 그리고 지금도, 그 자리에서, 흔들리는 손으로 수첩에 뭔가를 쓰는데 아마도 그때부터 그런 식으로 뭔가를 썼을 거예요.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흔들리는 손으로, 곧 망각해 버릴 어떤 말들을. 쓴다는 것은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죠.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양옆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의 암막커튼 사이에 머문다는 걸까요. 어둠 속에 가만히 머물다 문득 고개를 들면 알 수 없는 풍경들이 지나가고, 버스가 잠시 터널을 지날 때나 옆 차선으로 다른 버스가 스칠 때 창문이 어두워지면 알 수 없는 얼굴이 떠올라요. 언젠간 아이들이 탄 봉고차가 옆 차선을 지나기도 했는데 봉고차 창문은 선탠이 되어 있어 깜깜했지만 난 그 안이 다 보였어요. 따스한 히터 바람이 사방에서 새어 나오는, 안전하고 청결한 밀폐된 공간 속에서 아이들은 좌석에 푹 파묻힌 채 고요히 잠들어 있었어요. 혹은 눈만 감은 채 간밤에 꾸었던 꿈에 대해 생각하는데, 운전사 언니가 듣는 라디오 디제이의 음성은 꿈, 혹은 꿈에 대한 생각 속으로 조용히 침투하고. 거의 말이 없고 웃을 때도 소리가 없으며 운전을 아주 잘하는 운전사 언니에 대한 미스터리를 누군가는 소곤거려요. 잠자지 않는 아이들이 있어요. 잠든 아이들 중에는 잠을 거부하는 아이들이 언제나 한둘은 있으니까요. 거부하는 기질의 두 아이는 무거운 붐뱁 비트의 힙합을 이어폰으로 나누어 들으며 심장을 타격하는 검은 음성의 세계에 감동하다 불현듯 봉고차 문에 드리워진 어떤 그림자를 보고 키득거려요. 턱이 긴 아이의 그림자. 한쪽에 엄청나게 높은 방음벽이 늘어진 도로를 지날 때마다 가가멜을 연상케 하는 그 그림자가 예외 없이 드리워지는데 그걸 보고 웃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웃음을 멈출 수가 없어 두 아이는 이제 꺽꺽대며 웃어요. 그 소리에 잠든 아이들 하나둘 눈을 떠 덩달아 웃기 시작하고, 웃음은 전염병과 같아, 턱이 긴 아이도 영문을 모르고 웃어요. 웃는 턱이 긴 그림자를 목격한 두 아이는 거의 자지러지고, 자지러지는 모습에 봉고차 아이들 모두 배꼽이 빠질 듯이 웃는데 도대체 뭐가 그리 웃긴 건지 아무도 분명히 이유를 모르지만 뱃속에 터져 나오는 거대한 웃음이 있어, 웃음 태양, 웃음의 뜨거운 덩어리 같은 것, 모든 것을 거부해도 그것만은 거부할 수가 없어, 심장을 타격하는 붐뱁 비트도 그것만은 뭉갤 수가 없어 웃는, 다름 아닌 웃음에 타격당하는,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웃음에 얻어맞는 모습이 눈알이 기진맥진해질 만큼 정확히 보였어요. 믿기지 않았어요. 그곳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 정확한 장면 속으로, 그것이 정확하기 때문에 오히려, 멀어졌어요. 갑자기 그곳이 너무 멀어졌어요. 바로 옆 차선을 스치는 저 회색 봉고차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양처럼 웃던 그 얼굴이, 목에서 터져 나왔던 뜨거운 덩어리가, 온몸을 간질이던 울렁거림이, 이젠 내게 불가능이란 걸 알았어요. 고개를 숙였어요. 내게 가능한 건 그거였으니까. 가능한 암막 된 공간. 암막 된 가능한 표정. 그래요. 이런 말들을 끄적였겠죠. 흔들리는 손으로. 곧 망각해 버릴 어떤 말들을 다름 아닌 망각해 버리기 위해.


그런 까마득한 기억은 어쩌자고 꺼내는 거요. 대체 어딜 향해 가고 있는 거야. 당신이야말로 너무 멀어지고 있잖아······


남자의 입술은 바스러졌다. 여자는 립밤을 건네기 위해 팔을 뻗는 순간 왠지 닿지 않을 것 같은 아득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해서, 빙그레 웃어 보았다. 한없이 돌아가는 길의 한복판에서 그녀는 한번쯤 그렇게 했다.


그는 지금 남부에 위치한 p시의 어느 바다에서 그의 딸과 딸의 엄마와 캠핑을 하고 있어요. 그녀가 두 달 만에 인터넷에 접속하여 그의 메일을 읽었고, 전화를 하였고, 딸을 만나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그의 바람과 의지를 받아들여 그들은 일주일 동안 캠핑을 하기로 했다고 했어요. 그녀가 전자파 공포증이 있기 때문에 핸드폰, 노트북은 물론이고 전구도 켤 수 없는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어요. 그녀는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그런 장소만 찾아 돌아다니기 때문에 그런 장소를 잘 아는 것 같다고 했어요. 전파탐지기를 들고 그런 장소만 찾아다니는 사람들과 연대가 있는 것 같다고 했어요. 당분간 연락을 못 할 거라고 했어요. 전화를 해도 핸드폰은 꺼져 있을 테니 하지 말라고 했어요.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어요.
그곳. p시의 바다. 역을 지나 도시를 지나 공장지대를 지나 숲을 지나 산을 지나 지도상에 표기되지 않는 작은 마을을 지나면 닿을 수 있는 원시의 바다. 이곳으로부터 팔천 킬로미터 떨어진 그 바다 옆에서 나는 글을 써요. 두 차가 스쳐요. 어두워진 차창 위로 내 얼굴이 보여요. 놀라우리만치 무심해요.


놀라우리만치 무심한 얼굴로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군. 참 사물 같은 얼굴로 당신은······


페이지 154.


책까지 펼치는군.


'어린 르 클레지오는 아버지를 볼 기회가 없었다. 여덟 살이 될 때까지 그는 엄마와 할머니의 손에 의해 키워졌다. 그에게 있어 여성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중략) 르 클레지오는 여덟 살 때 처음으로 아버지를 보았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이지리아 삼림지대에서 영국군 소속 외과의로 근무하고 있었던 아버지를 처음으로 보러 가기 위한 배 여행에서 그의 글쓰기가 시작된다.3)'

3) 한경미, "핍박받는 아웃사이더에 따듯한 시선", 『오마이뉴스』, 2008.10.13


······


'나는 너의 딸을 생각한다. 그녀가 보고 있을 너의 얼굴을 떠올린다. 여덟 살에 처음 보는 아버지. 삭발했다가 거뭇거뭇 자라기 시작했을 머리칼, 한 달 전 베를린을 여행하면서부터 기른다던 턱수염,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기묘하게 반짝이는 눈동자, 오이 같은 너의 얼굴.'


······


'그리고 성인이 된 그녀가 기억할, 너와의 캠핑을 떠올린다.
그녀의 글쓰기가 시작될 일주일간의 캠핑.
나는 갖지 못할 캠핑.
외부와의 접속이 완전히 차단된 어느 바다에서, 지금 이 순간 진행되고 있는 너희의 캠핑.'


······


'고통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다. 마치 기계처럼, 나와는 별개로 진행되는 이 고통은 너무나 구체적이다: 너는 너의 여덟 살 딸과 캠핑 중에 있다. 기간은 무려 일주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 갈 수 없다.'


순간 일그러지는 것은 남자의 얼굴이었다. 고통을 말하는 여자의 얼굴은 무심했다. 전 생애를 통틀어 무심했던 무심함이었다. 교도소로 면회를 가던 그 수두룩한 일요일 아침, 조수석 사이드미러를 통해 그 무심한 얼굴을 확인할 때마다 얼마나 치를 떨었던가. 치를 떠는 얼굴도 무심하여 어느 순간부터는 치를 떨지도 않았고 영원히 치를 떨지도 못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때마다 얼굴 근육을 심하게 당겨 보았다. 빙그레 웃어 보는 것이었다. 여지없이 입술은 바스러졌다. 옆 좌석의 엄마는 앞만 보고 있었다. 잔 꽃무늬 원피스 차림에 곱게 화장을 하고 쉼 없는 급커브의 도로를 따라 조용히 운전을 하는 여자에 대한 미스터리를 누군가와 강렬히 소곤거리고 싶었다. 갑자기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의 거리가 끝 간 데 없이 늘어나면서 현기증이 밀려왔다. 몹시 아득한 곳으로부터,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당신은 당신의 고통과 캠핑 중에 있군······ 기간은 무려 무제한이군······ 그리고 나는 절대로 그곳에 갈 수 없군.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먼 어딘가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이었다. 여자는 다시 한 번 빙그레 웃었다. 이번에는 웃을 수 있나, 시험해 보는 웃음이 아닌 진심에서 새어 나온 웃음이었다. 한없이 돌아가다 보면 도저히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핵심에 바짝 다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로부터 팔천 킬로미터 떨어진 남자의 창백한 입술은 기묘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라벤더와 베르가모트 성분이 함유되어 마음을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하는 립밤이었다. 유기농 인증 제품으로 어린아이들에게는 잠을 재우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여자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Il ne reviendra plus de la mer.


그는 들었다.


Je n'irai jamais à la mer.


그는 들었다.


La mer là-bas ne serait pas bleu.


그는 들었다.


Elle serait plutôt noire.


그는······


ou grise.


······


그는 딸을 만날 생각에 설렌다고 했어요. 동시에 두렵다고 했어요. 오랫동안 생각만 했던 아이를 곧 만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고 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이 너무 무섭다고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문득 오래전 혼자 버스를 타러 가는 길, 거대한 입간판들이 시체처럼 쓰러져 있던 새벽의 폐허가 떠올랐어요. 그 싸늘하고 황량한 폐허 속에 그 혼자 서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만의 오랜 고통을 마주하기 위해······ 그와 별개로 돌아가며 그를 조종했던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 부들부들 떨리는 두 다리로 간신히 땅을 딛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어요. 그 고통으로 인해 그가 흘려야 했던 피와 눈물이 주변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고, 잡지 못했던 기회와 순간들이 갈기갈기 찢긴 채 무참히 내버려져 있었어요. 그리고 그 모든 건 파랗게 물들어 있었어요. 아직 동트지 않은 짙은 남색 하늘의 파란 빛 속에······ 곧 동이 트면 놀라우리만치 빠르게 사라져 버릴 파랑······ 그가 무수히 칠했던 그 입술의······


······


그것은 차가운 새벽······ 잠결에 문득 눈을 떴는데 옆에 놓인 베개를 보았을 때······ 텅 비어 있는 베개에 시선이 닿는 순간 파고드는······


······


내 고통의 빛깔과 같았어요······


······


나는 파란색은 고통의 색이란 걸 알았어요.


······


그는 잠들어 있었다. 그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그가 또 문득 깨어나 이번에는 그녀의 마흔여덟 번째 발언에 대하여 집요하게 파고들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 그녀는 또다시 같은 방향을 택하리라. 그 사실 혹은 기억, 혹은 파란 고통의 글쓰기로부터 한없이 돌아가는 방향을 다름 아닌 한없이 돌아가기 위해. 그러나 한없이 돌아갈 때마다 한없이 돌아가는 길의 한복판에서 실은 그녀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 이대로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언제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것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김효나

작가소개 / 김효나

1982년 서울 출생. 2016년 『쓺—문학의 이름으로』를 통해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연작소설집 『2인용 독백』을 냈다.


《문장웹진 2019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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