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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날들

  • 작성일 2020-01-01

[단편소설]



너무 많은 날들



임선우




너는 지금 죽은 거야. 끽하고 죽은 거지. 집에서, 거실 한가운데서.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 옆집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려. 그래도 넌 꼼짝 않는 거야, 죽었으니까. 그때 여자가 들어와.
휘청거리는 여자. 악귀 같은 여자. 너를 죽인 여자. 죽은 네 배를 깔고 앉아 진이라도 한 모금 넘길 수 있는 여자가. 그리고 남자가 들어오지.
부드러운 남자. 여자를 달래고 네 배 위에서 일으켜 침대에 눕혀 주는 남자. 그런 다음 문득 서러워져 부엌에 서서 눈물 흘리는 남자. 다음날이 되면 아무렇지 않은 듯 여자를 부드럽게 깨우는 남자가. 둘은 아침을 먹고 춤을 추고 쓰리 샷이 들어간 커피를 마셔.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살인, 방화, 강도, 끔찍한 일들을.
그러면 제가 일어나서 복수를 하는 건가요? 과자를 먹으며 설명을 듣고 있던 내가 물었다.
아니지. 너는 죽었다니까.
그러면 저는 왜 그 여자와 그 남자의 집에 누워 있나요?
네 역할은, 하고 감독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분위기지, 분위기.


스물여섯 번의 연극을 하는 동안 나는 무대 바닥에 누워 있었다. 눈을 감았는데도 조명이 너무 환했다. 나는 똑바로 누워서 악귀 같은 여자와 부드러운 남자가 오가는 소리를 들었다. 저 여자는 구두 앞굽에 힘을 실어 걷는구나, 저 남자는 왼쪽 다리를 살짝 저는구나, 속으로 생각하면서.
공연 중 어깨를 밟힌 적도 있었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 순간 작게 비명을 지른 것 외에, 나는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염없이 누워서 나는 감독과 했던 약속만을 되새겼다. 감독은 시체 역할을 잘 해내고 나면 다음번에 주연을 시켜 주겠다고 했다.


*


두 달이 지나고 나는 주연은 무슨······ 그냥 사기꾼이 되었다. 지난번 공연이 완전히 망하는 바람에 극단은 파산 위기에 처했다. 어떻게든 극단을 살리고 싶었던 감독은,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사이트를 하나 만들었다. 사이트의 메인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고급 역할 대행. 숙련된 전문가들이 당신 앞에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감독은 우리에게 역할 대행 사업을 제안했다. 역할 대행으로 자금을 모으는 즉시 연극을 하겠다고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주연 배우들은 전부 떠났고, 조명 감독과 스태프 한 명, 조연 남자 배우 한 명, 그리고 내가 남았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다들 같은 생각이었다.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 전, 딱 그때까지만 하자고.


감독이 우리에게 준 첫 번째 미션은 김치찌개 먹기였다. 감독 어머니가 운영하는 김치찌개 집에 가서 손님인 척 먹고 오라는 것이었다. 요즘 장사가 안 되어 힘들어 하신다고 했다.
감독님 어머니께서 식당을 하셨어요? 그런데 왜 여태 우리를 안 데려가셨어요? 내가 물었다. 그게, 하고 감독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내가 감독 되는 걸 반대하시거든. 내가 감독이 되었는데도 감독 되는 걸 반대하셔.
며칠 뒤 혼자서 가본 식당에는 감독 어머니만 앉아 계셨다. 그는 나를 보더니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주문을 받고, 주방에 들어가서 김치찌개를 내왔다. 그렇게 맛본 김치찌개는 놀랍게도 맛이 없었다. 말 그대로 찌개에서는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밥 한 공기를 비웠다.
나가기 전, 카운터 앞에 놓인 박하사탕을 집게로 꺼내려는데 통에 있던 사탕들이 전부 딸려 나왔다. 어떻게든 떼어내려고 애쓰는 나를 감독 어머니는 가만히 쳐다보았다. 곧 겨울인데 사탕들은 언제부터 녹아 있었던 걸까. 나는 결국 빈손으로 가게를 나왔다.


집에 들어가자 정수가 있었다. 피자 남았는데 먹을래? 정수가 물었다. 나는 밥을 먹었다고 대답하며 남은 피자를 냉동실에 넣었다. 그러다 피자 박스에 그려진 연예인 얼굴이 찢어진 것을 발견했다. 연예인은 보나마나 태준일 것이다.
이 집은 원래 배우 태준이 무명 시절 살던 원룸이었다. 계약 당시 중개인은 이 집이 배우 지망생들에게는 행운의 집이라고 강조했고, 우리는 행운이라는 말에 넘어가 그날 바로 계약했다. 이 년이 지난 지금, 정수는 십 년간 해온 연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태준을 볼 때마다 욕을 했다.
실의에 빠진 정수를 위로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음식이었다. 반년 사이 정수의 몸은 무섭게 불어났다. 셔츠나 청바지를 입은 정수의 모습이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살을 빼겠다고 했지만, 박스에 남아 있던 피자는 두 조각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수와 나는 반년 전에 헤어졌으니까.
사랑이 끝났어도 보증금은 남아 있었다. 한집에 살면서 우리는 이제 사랑하지도 싸우지도 않았다. "불 끌까?" "그래." 이 말이 하루 중 유일하게 나누는 대화일 때도 많았다. 심지어 헤어지던 날에도 나는 잠들기 전 물었다. 불 끌까? 정수는 대답 대신에 불을 껐고, 우리는 그날 깜깜한 방 안에서, 여전히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말없이 누워 있다가 잠들었다.


*


요즘 나는 매일같이 김치찌개를 먹는다. 여전히 김치찌개는 아무 맛도 나지 않고, 박하사탕도 떨어지지 않지만, 딱히 다른 할 일이 없었다. 그동안 내게 들어온 일은 전부 전화 대행이었다. 나는 대신해서 이별을 통보하거나, 가짜 애인이 되어 남자 부모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의외로 가장 바쁜 사람은 조명 감독이었다. 아버지 역할 대행이 가장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매일같이 상견례와 결혼식, 돌잔치까지 다니느라 그는 양복도 새로 맞췄다. 그래서 내게도 제대로 된 첫 번째 의뢰가 들어왔을 때, 나도 옷부터 사야 하는 건지 고민했다.
의뢰인은 삼십대 후반 남성으로, 결혼 문제 때문에 부모님에게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그는 부모님에게 소개할 여자 대역을 찾고 있었다. 감독이 정한 매뉴얼대로, 나는 의뢰인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지금 당장 만나 볼 수 있는지 물었다. 직접 상담은 추가 비용이 발생합니다. 내가 말했다. 의뢰인은 상관없다고 했다.


두 시간 뒤 의뢰인과 나는 혜화역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남자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당황했는데, 그는 삼십대 후반은커녕 얼핏 봐도 오십이 넘어 보였다. 자리에 앉은 그가 꺼낸 첫마디는 부모님과의 만남은 애초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진짜 의뢰 내용을 전화로 말하면 들어줄 것 같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거짓말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재빨리 도망칠 궁리를 했다. 유흥 목적의 만남은 갖지 않는다고 공지를 띄워 놨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수를 쓰는 남자들이 있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그는 다급하게 동면 준비를 도와달라고 했다. 동면? 겨울잠? 뜻밖의 단어에 나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시작된 얘기는 다음과 같았다.
남자는 젊은 시절 냉동 창고에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했다. 십 킬로 단위로 시래기를 포장해서 냉동 창고로 옮기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사건이 벌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구석에 있던 그를 발견하지 못한 관리자가 그대로 창고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금방 문이 열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손끝과 발끝의 감각이 빠르게 사라졌고, 어느 시점이라고 할 것도 없이 그는 잠들어 버렸다. 쓰러져 있던 그를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보름이나 지나서였다.
그런데 제가 깨어난 겁니다. 잠든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쉽게 말하자면 제가 변온동물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표정은 진지했고, 양복 차림은 단정했다. 내가 대답이 없자 그는 말을 이어 갔다.
그 뒤로는 체온이 시시각각 변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남자는 체온계를 꺼내 들었다. 그는 귓속에 체온계를 넣고 기다리다가, 측정된 온도를 내게 보여주었다. 28.1도였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체온계 정도야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었다. 남자는 내가 못 믿는 눈치인 걸 알아차렸는지, 체온계를 가방에 넣고 꼿꼿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삼십 년 넘게 회사 생활도 했어요.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그냥 저를 잘 묻어 달라는 겁니다. 그러면 수표로 천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경칩에 다시 찾아와 저를 꺼내 주시면 사례금도 지급하겠습니다.
천만 원이라는 말에 나는 멈칫했다. 묻어 달라는 게 어떤 건데요? 내가 물었다. 남자는 말 그대로 자신을 땅속에 묻어 달라고 했다. 얼굴만 빼고 나머지를 땅속에 묻어 달라고. 나는 기겁했다. 그건 생매장이잖아요.
남들이 하면 생매장이겠지만 저는 아닙니다. 개구리나 뱀도 흙속에서 겨울잠을 자지 않습니까? 흙속이 가장 온도 변화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봄에 꺼내 드리는 걸 제가 까먹으면요? 내가 물었다. 그럴까 봐 119에 예약 문자를 걸어 놓았습니다. 남자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내가 들어주지 않는다면, 다른 대행업체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 바람에 나는 하겠다고 대답해 버렸다. 천만 원이라니. 내게는 거부하기 힘든 금액이었다.


다음날 남자와 나는 정말로 야산 중턱에 서 있었다. 지방으로 가야 할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그는 홍제역 근처에 있는 야산으로 나를 안내했다.
걱정 말아요, 하고 남자가 산을 오르며 말했다. 여긴 아무도 안 옵니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니까요. 그는 나에게 길을 잘 외워 두라고 했다. 가는 길에 우리는 몇몇 나무에 색깔 끈을 묶어 두었다. 붉은 끈 다음 파란 끈. 파란 끈 다음 노란 끈. 마지막 노란 끈을 묶은 나무에서 스무 걸음만 더 왼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그가 말한 장소가 나왔다.
이곳은 헬기가 떠도 나무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아요. 남자가 말했다. 그는 며칠 전 혼자 이곳에 와서 꼬박 다섯 시간을 땅만 팠다고 했다. 그럴 바에는 냉동 창고에 들어가는 게 훨씬 편하지 않겠어요? 내 물음에 그는 모터 소리가 시끄러워서 안 된다고 했다.
왜 하필이면 동면을 하신다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동면하려는 이유를 처음 물었다. 남자는 의외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저에게는 하룻밤보다 많은 밤들이 필요합니다.
말을 마친 남자는 구덩이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위로 흙을 덮어 주었다. 삽질은 생각보다 쉬웠는데, 아무래도 생매장을 하는 것 같아 기분은 영 찜찜했다. 다 묻고 나자, 땅 위로 남자의 머리만 올라와 있는 모습이 보기 끔찍했다.
나는 남자 머리 주변에 텐트까지 쳐주었다. 일인용 텐트 안에서, 남자와 나는 마지막으로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텐트 안주머니를 열어 보라고 했다. 주머니를 열자 천만 원 권 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그럼 내년 경칩에 봅시다. 남자가 인사했다. 흙의 무게 때문인지 말하는 것이 힘겨워 보였다. 수고하세요. 나는 인사하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
혼자 산길을 내려가는데 한 사람도 마주치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와 지하철역을 향하는 내내, 나는 지금이 환한 대낮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


남자는 지금쯤 얼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잠에서 깬 내가 처음으로 한 생각이었다. 변온동물이니 28도니 하는 얘기는 애초부터 믿지 않았다. 남자는 새로운 방식의 자살을 시도했고, 나는 그것을 도와주는 대가로 천만 원을 받았다.
잠든 정수 옆에서 한 시간을 더 누워 있다가, 나는 조용히 이를 닦고, 마찬가지로 조용히 옷을 갈아입은 다음 밖으로 나갔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붉은 끈, 파란 끈, 노란 끈, 왼쪽으로 스무 걸음. 그러고는 텐트 지퍼를 열었다.
누구요. 남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접니다. 어제 아저씨를 묻은 사람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서요. 내가 텐트 안으로 몸을 구겨 넣으며 말했다. 아저씨가 이러다 죽으면 제가 살인자가 되는 거잖아요.
나는 동면중이었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동면은 무슨 동면이에요. 제가 바보도 아니고 그걸 믿겠어요?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안 믿는다면서 어제는 왜 잠자코 저를 묻은 겁니까? 천만 원에 눈이 뒤집혔어요.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정신이 돌아왔고요. 이렇게 아저씨를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다시 땅을 파야겠어요. 나는 구석에 있던 삽을 손에 쥐었다.
제발 그만둬요. 제가 이 순간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온 줄 아십니까? 나는 무시하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남자는 안 됩니다, 안 돼, 따위의 비명을 내질렀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파묻혀 있던 어깨가 드러나는 순간,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씨발년아 말 좀 들어.
다시 덮어. 그가 말했다. 다시 덮으라고. 나는 동작을 멈췄다. 다시 흙을 덮으려는데, 손이 떨리는 바람에 자꾸만 삽이 엇나갔다. 잠시 뒤에 원래 상태로 돌아가자, 남자는 비로소 표정을 풀고 눈을 감았다.
이제 그만 돌아가요. 남자는 다시 존댓말을 썼다. 나는 빠르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삽을 내려놓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헬기가 떠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서울 한복판이지만,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곳. 그런 곳에 남자와 둘뿐이었다.
야산에서 내려오자 상점들이 눈에 들어왔고, 공포심도 점차 가라앉았다. 그러자 수치심이 밀려왔고, 마지막에는 분노가 남았다. 그러나 이것은 전에도 몇 번 경험해 본 감정의 변화였다. 겪을 때마다 약간의 무력감이 동반했지만 결국에는 잘 극복해 왔다. 나는 분노가 사그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당황했는데,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자꾸만 그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씨발년아, 하던 남자의 입 모양과 자꾸만 엇나가던 삽질이 며칠이 지나도 생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내가 흙을 덮으며 울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오른 순간, 나는 참지 못하고 잠들어 있던 정수를 흔들어 깨웠다.
나랑 산에 좀 가자. 내가 말했다. 산? 정수가 꿈속을 헤매며 대답했다. 나는 정수 귀에 대고 말했다. 거기에 사람이 묻혀 있어. 어떤 사람. 나한테 욕한 사람. 정수가 눈을 떴다. 너 사람을 죽였어? 아니, 지금 산에서 자고 있어. 나는 정수에게 그동안의 일을 설명했다. 내가 역할 대행을 하게 된 것, 남자를 묻은 것, 그리고 지금 남자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것까지 전부 다.
주경아, 내가 지금 헷갈리는데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니. 정수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랬지. 내가 대답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게 다 무슨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는 정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177센티에 백 킬로가 넘어가기 시작한 정수를. 십만 원 줄게. 같이 가줘. 내가 말했다. 그 정도면 시세에 맞는 금액이었다.


그 남자는 자연인이야? 정수가 야산에 오르기 전 물었다. 나는 그런 건 아니라고 했다. 산에서 겨울잠을 자고 싶대. 그래서 지금 몸이 땅에 묻혀 있어. 정수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김장독을 생각하면 쉬워. 내가 말했다. 그리고 더는 묻지 말라고 했다.
붉은 끈이 묶인 나무를 발견했을 때, 나는 정수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다. 우리는 낙엽 밟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걸었다. 텐트 지퍼를 열었을 때도 남자는 깨지 않았다. 정수는 머리만 내놓고 땅에 묻힌 남자를 보고는 기겁했다. 이미 죽은 거 아니야? 정수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정수를 끌고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텐트가 비좁아서 우리는 남자의 머리를 가운데에 두고 마주 앉았다. 정수와 나는 고개 숙여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고, 동시에 말이 없어졌다. 남자는 완벽하게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떠한 슬픔도 들어차지 않은, 갓 태어난 아이 같은 얼굴을.
나는 조심스레 남자 코밑에 손가락을 갖다 대보았다. 삼십 초 정도 지났을까, 따뜻한 숨이 천천히 손에 닿았다. 이 남자 진짜로 동면중인가 봐. 숨을 엄청 느리게 쉬어. 내가 말하자 정수도 손을 갖다 대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제 어쩌지? 정수가 물었다. 우선 깨우자. 내가 대답했다. 정수는 남자의 귀에 대고는 왁,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나와 정수를 보고는 크게 당황했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은 경칩이 아니잖습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아저씨가 주경이한테 잘못하셨잖아요. 정수가 말했다. 주경이가 누굽니까? 접니다. 내가 말했다. 지난번 일 기억 안 나세요?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난번 일은 모르겠고, 저는 지금 잠을 자야 합니다. 중간에 자꾸 깨면 정말로 위험할 수가 있다고요.
사과한 다음에 주무시면 될 거 아니에요. 내가 말하자 남자는 깊게 한숨을 쉬었고, 그와 동시에 엄청난 악취가 풍겼다. 잠시 뒤 남자는 내가 아니라 정수를 보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이제 그만 나가 줘요.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남자 얼굴에 침을 뱉었다.


대체 넌 왜 뱉은 거야? 그날 밤 잠들기 전, 나는 정수에게 물었다. 네가 뱉었으니까. 정수가 대답했다. 네가 뱉을 때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 말은 내가 정수와 헤어질 때 했던 말과 비슷했다.
정수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게 다야? 정수가 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네가 헤어지자고 할 때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나는 지금까지 정수가 그 말을 기억할 줄은 몰랐다.
오늘 있었던 일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마. 나는 말을 돌렸다. 알겠어. 그런 다음 우리는 나란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먼저 잠든 것은 정수였다.


*


감독이 무슨 홍보라도 한 건지, 나는 생각보다 바빠졌다. 전화 대행도 꾸준히 들어왔고, 일주일에 서너 번은 직접 나가야 하는 의뢰가 들어왔다. 친구, 애인, 나중에는 진상 역할까지 맡았다. 나는 커피에 머리카락이 들어갔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거나, 억지로 트집을 잡아 동사무소 공무원의 불친절을 신고했다.
카페를 차린 선배, 9급 공무원에 합격한 친구를 대신 괴롭혀 달라는 의뢰 때문이었다. 나는 국민신문고에 글을 올리고, 동사무소에 꾸준히 전화를 걸었다. 그 공무원이 징계를 받던 날, 나는 사례금을 받았다.
의뢰인들은 공통점이 있어요. 내가 감독에게 말했다. 감독은 아까 전부터 사이트 의뢰 게시판을 새로 고침 중이었다. 나를 지키려고 남을 해치는 사람들이요.
주경아, 그건 모두가 그래. 감독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감독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러자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아졌다. 왜 거짓말은 하면 할수록 진실에 가까워지는지. 감독도 악몽을 꾸기 시작했는지. 아니 그보다 감독은 정말로 연극을 다시 할 생각이 있는지.
감독님, 하고 내가 부르자 감독이 드디어 고개 돌려 나를 봤다. 불러 놓고 왜 말을 안 해. 나는 가만있다가 물었다. 어머님 식당에 박하사탕은 먹으라고 둔 거 맞아요? 감독은 멋쩍게 웃더니 걔네 먹지 마라, 식당 창업 멤버들이야, 하고 대답했다.


집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자리에 앉아서 휴대폰을 확인하자 정수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 늦게 들어와? 나는 지금 가는 중이라고 답장했다. 이상한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산에 다녀온 이후로 정수와 나는 전보다 서로에게 다정해졌다.
우리는 서로 언제 집에 들어오는지 물었고, 먼저 눕는 사람이 상대방 이부자리를 펴주기도 했다. 헤어진 뒤로는 처음 있는 일들이었다. 그날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그저 산에 올라가서 남자에게 침을 뱉고 온 것이 전부였는데, 이상하게 전보다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정수도 나에게 천만 원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나는 세수하다가도 나와서 통장에 찍힌 숫자 0 일곱 개를 들여다보았다. 천만 원으로는 내일이라도 당장 감독과 정수를 떠날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나를 머무르게 했다.
집에 가보니 정수가 오므라이스를 해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얇은 계란부침을 숟가락으로 가르면 케첩 볶음밥이 들어 있는 오므라이스. 정수와 사귀던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던 음식이었다. 왜 갑자기 음식을 한 거야? 내가 물었다. 그냥. 정수가 대답했다.
우리는 말없이 오므라이스를 떠먹었다. 반쯤 먹어 갈 때 정수가 입을 열었다. 동면하는 남자 말이야, 또 보러 갈 생각 있어? 아니. 그렇지만 입에 있던 오므라이스를 삼키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아니다, 갈 수도 있겠다. 내가 다시 말했다.
가서 뭐 하게? 정수가 물었다. 경칩에 깨워 주면 사례금을 준다고 했거든. 내가 대답했다. 네가 안 깨워 주면 거기 계속 있는 거야? 아니. 경칩 다음날로 119에 예약 문자를 걸어 놨대. 그나저나 오므라이스 정말 맛있다. 나는 정수가 남긴 오므라이스까지 다 먹었다.
정수는 설거지까지 자기가 하겠다고 했다.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에 정수가 좋아하는 아이유 콘서트 영상을 유튜브로 틀어 주었다. 그런데 첫 번째 곡이 끝나기도 전에 태준의 음료수 광고가 나왔다. 오 초 동안 분위기가 가라앉았지만, 정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수는 설거지를 마치자마자 내게 다시 물었다. 진짜 그 남자를 보러 갈 거야? 나는 생각 중이라고 했다. 왜 자꾸 물어. 같이 가주려고? 농담 삼아 한 말이었는데 정수는 진지하게 같이 가겠다고 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같이 갈게. 알겠어.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위험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욕하던 남자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서 씻고 자리에 누웠을 때, 나는 이불을 몸에 둘둘 말고는 정수에게 물었다. 이게 뭐게. 원래 이건 극단 사람들과 자주 하던 놀이였다. 한 사람이 자기가 떠올린 것을 몸으로 표현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정답을 맞히는 식이었다. 김밥? 땡. 순대? 땡. 긴 똥? 정수 죽고 싶니. 정답이 뭐야. 동면하는 남자. 정수는 조금 웃었고, 그제야 나는 긴장이 풀렸다.


*


저는 요즘 세상에서 조명 감독님이 제일 부러워요. 조명 감독에게서 텀블러를 선물 받으며 내가 말했다. 눈송이가 그려진 텀블러는 조명 감독이 어제 돌잔치에서 답례품으로 받아온 것이었다. 역할 대행을 시작한 뒤로 조명 감독은 매일같이 뷔페를 먹고, 비싼 답례품들을 받아왔다. 아버지라는 게 저렇게 좋은 자리였다니.
오늘 아침에도 나는 조명 감독이 결혼식에 다녀와서 준 비누와 수건으로 세수했다. 생각하다 보니 열이 받았다. 그래서 의자에 앉아 졸고 있던 감독에게 따져 물었다. 감독님, 저한테는 왜 이렇게 나쁜 역할만 주세요? 지난주에도 나는 면접 보러 가는 사람에게 커피를 쏟아야 했다.
조명 감독님이 뷔페 드실 때 저는 욕만 먹잖아요. 알았어, 다음 주에 하객 대행 잡아 줄게. 감독이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박수하는 것이 아니라 박수 받는 역할을 맡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더 말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인사한 다음 극장 밖으로 나왔다.
오늘 가는 곳은 카페였다. 카페 주인이 청소하느라 문을 열어 놓은 사이, 손님의 강아지가 없어졌다고 했다. 강아지 주인이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는 빈 목줄만 남아있었다고.
당신이 문을 열고 나간 거라고 해주세요. 카페 주인은 전화로 그렇게 말했다. 커피를 마시고 나가는데, 문을 연 채로 둬버렸다고요. 제가 실수했다는 게 알려지면 카페 문 닫아야 해요.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동안 해온 일에 비하면 간단한 일이었다.
카페에 도착하자 의뢰인과 강아지 주인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강아지 주인은 삼십대 후반의 여자였는데, 나를 보고도 인사하지 않았다. 나는 앉자마자 죄송하다고 했다. 카페 주인은 여자에게 침착하게 설명했다. 우리 카페 단골손님이 실수한 게 맞았습니다. 직접 사과드리러 여기까지 오셨으니 부디 용서해 주시면 안 될까요.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여자를 살폈다. 여자는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카페 주인을 쳐다보았다. 그도 여자의 눈치를 살피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내가 다시 말했다. 여자는 이번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 상태로 십 분이 넘게 흘렀다.
읍, 읍. 갑자기 여자가 입을 다문 채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읍, 읍, 읍. 신음 같기도 하고, 목이 졸린 채 나오는 소리 같기도 한 이상한 소리를 여자는 계속, 계속해서 냈다. 의뢰인과 나는 당황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한참을 그러다 말했다. 감자는 데려왔을 때부터 성대 수술이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아주 무서울 때도 낼 수 있는 소리가 이것뿐이에요. 다시 정적이 흘렀고, 멀리서 자동차 경적, 누가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순간 여자가 말했다. 가세요.
집에 들어가기 전 나는 편의점에 들러 정수가 좋아하는 칭다오 네 캔을 샀다. 정수는 마침 맥주가 마시고 싶었다며 좋아했다. 우리는 새우깡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전기장판이 너무 따뜻해서 나는 마시던 중간에 장판 위로 누웠다. 그러자 정수도 누웠다.
그 남자 말이야, 봄에 깨우러 가려고. 내가 말했다. 동면하는 남자? 응. 침 뱉었는데 사례금을 주겠어? 사례금 때문이 아니야. 안 가면 계속 신경 쓰일 것 같아서. 나는 몸을 일으켜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다음에 다시 누웠다. 그래, 그럼 같이 가자. 정수가 대답했다.
따뜻한 바닥에 누워 있자 얼었던 몸이 녹았다. 정수야. 왜. 이게 뭐게. 나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읍, 읍, 하고 소리를 냈다. 개? 땡. 쥐? 땡. 인질? 땡. 정답이 뭐야? 나는 알려주지 않았다.


*


나는 감독에게 이번 주는 일을 쉬겠다고 했다. 감독은 내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다. 아무 일도 없어요. 내가 대답했다. 주경아, 내가 일부러 너한테 나쁜 역할만 준 건 아니야. 전화를 끊기 전에 감독이 말했다. 알아요. 내가 대답했다.
일 그만뒀어? 방학 셋째 날 정수가 물었다. 아니. 그런데 왜 집에만 있어? 겨울방학이야. 내가 대답했다. 정수는 대답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농담이 아니었는데. 나는 어렸을 때도 어른이 되면 방학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늘 무서웠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방학을 주기로 했다.
나는 누워서 가사 없는 음악을 듣다가, 배가 고파져서 카레를 만들었다. 카레는 먹는 것보다 만드는 과정이 더 좋았다. 딱딱한 채소들을 오래도록 끓여 뭉그러지게 만드는 것이 좋았고, 그러다 보면 추웠던 방 안도 따뜻해졌다. 나는 조용한 방에서 카레를 떠먹었다.
오래전에 정수의 일기장을 훔쳐 읽은 적이 있었다. 함께 산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주경이는 가끔 자면서 말을 한다. 그 말을 듣고 있으면. 일기는 거기서 멈춰 있었다. 나는 그 뒷말이 오랫동안 궁금했다. 때로는 좋은 문장들이 떠올랐다. 더 사랑하게 된다, 이불을 덮어 주게 된다, 좋은 꿈을 꿀 것 같다. 때로는 나쁜 문장들이 떠올랐다. 미워하게 된다, 숨이 막힌다, 죽고 싶어진다. 한때는 그 생각만으로도 밤을 새울 수 있었다. 나는 카레를 한 숟갈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방학 여섯째 날에는 설거지하고 바닥을 닦고 휘파람을 불었다. 예전에 정수가 해준 말 때문이었다. 나쁜 생각이 떠오르면 세상에서 제일 긴 휘파람을 불어 보라고. 그러면 전부 다 잊힌다고 했다.
휘파람을 불다가 나는 밖에 나가기로 했다. 육일 만에 신발을 신었다. 그런데 막상 밖에 나오자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는 김치찌개 집으로 갔다.
기다렸어요. 감독 어머니가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전에 내가 두고 간 물건이 있다고 했다. 그는 카운터 안쪽에서 반짝이는 빨간색 리본 머리핀을 꺼내어 내게 쥐여 주었다. 나는 감사하다고 말한 다음 머리핀을 꽂았다. 학생한테 정말 잘 어울려요. 감독 어머니가 말했다.
김치찌개는 변함없이 맛없었다. 감독 어머니의 김치찌개만큼은 내년에도, 십 년 뒤에도 맛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졌다. 밥 한 공기를 비우자 감독 어머니는 후식으로 귤을 주었다. 나는 별 모양으로 깐 귤껍질을 식탁 위에 두고 나왔다.
집에 돌아왔을 때 정수는 머리에 뭘 꽂은 거냐고 물었다. 머리핀이잖아. 내가 말했다. 그런 거 싫어했잖아. 정수가 말했다. 나는 오늘부터 좋아하기로 했다고 대답했다. 나는 정수가 깔아 둔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곳이 가장 따뜻했다.
화장실 거울을 보자 머리핀밖에 눈에 안 들어왔다. 머리핀을 빼서 쓰레기통에 버리려는데 쓰레기통이 이미 꽉 차 있었다. 휘파람 내기해서 진 사람이 쓰레기 버리고 오자. 밖으로 나가서 정수에게 말했다. 휘파람 내기가 뭔데? 누가 더 휘파람을 길게 부는지 내기하는 거. 이번 주는 주경이 네가 당번 아니었어? 아니었어.
그런데 내가 졌다. 정수가 이렇게 휘파람을 길게 불 줄은 몰랐다. 나는 쓰레기를 두 봉지나 들고 밖으로 나갔다. 빌려 입은 정수의 패딩은 크고 따뜻했다.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손이 시려서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러자 구겨진 영수증들이 잔뜩 손에 잡혔다. 정수는 옷 주머니 속에 쓰레기들을 쑤셔 넣고는 꺼내는 법이 없었다. 빨래하기 전에 주머니를 확인하는 것은 항상 내 몫이었다.
나는 영수증들을 꺼내 보았다. 순댓국 6500원. 박카스 800원. 삼각김밥 1200원. 삼각김밥은 무려 보름 전 영수증이었다. 그런데 영수증들 사이로 쿠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다정'이라는 이름의 카페 쿠폰에는 도장이 여덟 개나 찍혀 있었다. 정수에게 여자가 생겼나.
원룸 빌라 입구에서 나는 쿠폰을 들여다보았다. 스마일 모양의 도장이 여덟 개. 두 잔만 더 마시면 정수는 어떤 음료든 상관없이 한 잔을 무료로 마실 수 있었다. 쿠폰 하단에는 카페 주소와 전화번호가 작게 쓰여 있었는데, 주소가 어딘지 모르게 낯익었다. 어디였더라, 생각하던 중 빌라 입구 센서 등이 꺼졌다.


왜 남자를 보러 간 거야? 현관문을 열자마자 내가 물었다. 정수가 누워서 휴대폰을 보고 있다가 나를 올려다봤다. 불 꺼진 빌라 입구에서 생각이 났다. 정수가 간 카페 위치는 동면하는 남자를 묻어 준 야산 근처였다.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그러고 나서도 한참을 가야 나오는 곳.
정말 이해가 안 가서 그래. 거길 왜 갔어? 혼자 갔어? 정수가 대답하지 않아서 다시 물었다. 정수는 혼자 갔다고 대답했다. 가서 뭘 했는데? 그냥 깨웠어. 깨웠다고? 응. 그게 다야? 응.
그 먼 곳까지 그냥 깨우러 갔다고? 정수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다가 말했다. 불공평하잖아. 그러더니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우리는 겨울 내내 춥고 감기 걸리고 월세 내고 난방비 내고 겨울옷 사고 일해야 하는데, 그 남자는 자고 있잖아. 일하다 보면 그 남자 얼굴이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는데 어떡해.
태준의 연기를 지적할 때와 똑같은 말투로 정수는 그렇게 말했다. 주경이 너도 그래서 침 뱉었던 거 아니야? 나는 한참 만에 입을 열고 말했다. 잠도 못 자고 그렇게 깨어 있으면 죽잖아. 아니야, 깨울 때마다 음료를 줬어. 정수가 대답했다.
카페 쿠폰에 찍혀 있던 여덟 개의 도장이 떠올랐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산에 올라가서 남자를 깨우는 정수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머리만 내놓은 남자에게 음료를 먹이는 정수, 그 짓을 여덟 번이나 반복한 정수를.
나는 신발을 신은 채 방 안으로 들어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정수가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세면도구와 여벌 옷을 챙긴 채 나는 밖으로 나왔다. 정수는 나를 붙잡거나 따라 나오지 않았다.


나는 택시를 타고 극장으로 갔다. 가방 안에는 감독이 전에 준 여분의 극장 열쇠가 있었다. 택시 안에서 나는 119에 신고 문자를 보낸 다음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눈도 내리지 않는 겨울 새벽이었다. 창밖을 내다보자 거리에는 앙상한 나무들과 창백한 가로등, 앙상한 나무들과 창백한 가로등, 앙상한 나무들과 창백한 가로등.
택시 기사는 불법 주차된 차들 때문에 골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힘들다고 했다. 나는 내려서 골목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가 여덟 살 때 앞집 여자는 차에서 히터를 틀고 자다가 죽었다. 나는 자라는 내내 밤중에 주차된 차들을 볼 때마다 시체가 들어 있을까 봐 무서웠다.
문을 열고 지하에 있는 극장으로 내려갔다. 불 꺼진 극장은 눈앞에 있는 손바닥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다. 감독은 그것을 이용해 불이 꺼졌다가 들어오는 순간 악귀 같은 여자를 관객석에 나타나게 했다. 관객들은 비명을 질렀고, 나는 그런 장면인 걸 알면서도 매번 깜짝 놀랐다.
극장 불을 켜둔 채, 무대 구석에 목도리를 베개 삼아 누웠다. 주머니에 뭔가가 거치적거려서 꺼내 보니 머리핀이었다. 나는 머리핀을 다시 꽂은 다음 생각했다. 머리핀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내 또래였을까. 그 여자는 머리 길이가 어디쯤 올까. 생각하다 보니 갑자기 무서워졌고, 나는 악귀 같은 여자라도 들어와 내 배 위에 앉아 주길 바랐다. 진이나 한 잔 마시면서.


















임선우

작가소개 / 임선우

2019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문장웹진 202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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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祭) 김정우 한밤에 아버지의 부고를 전한 이는 여동생이었다. 연락이 끊긴 지 십여 년이 훌쩍 넘었으나 안부는 서로 건네지 않았다. 아버지가 위암 4기로 투병했다는 사실과 날이 밝으면 발인한다는 것. 내 연락처를 수소문하느라 삼일장 중 이틀이 지났다는 것. 그래도 장남이니 이제라도 내려와 보는 편이 좋지 않겠냐는 것. 그녀는 그런 말을 장례식장의 소음 속에서 이어갔다. 나는 주소를 제대로 듣지 못했음에도 전화를 끊었다. 어느 도시로 가야 할는지는 아무래도 알 수 있었다. 장례식장이 있을 만한 곳은 남쪽 끄트머리의 신도시였다. 광역시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쯤 이동한 뒤 기나긴 터널을 통과해야 나타나는 그곳은 도시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면서 언덕 지형이었다. 소각장과 원자력발전소와 농공단지가 신도시의 입구에 모여 탄내나 분진 냄새를 게워냈다. 몇 되지 않는 아파트 단지는 농공단지와 공동묘지 사이에 세워져 있었다. 곧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고 명문 대학교의 분교가 이전해올 것이라는 말은 노인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믿지 않았다. 경전철이 들어선다는 소문만 십수 년째 무성할 뿐. 실상은 버스 배차 간격마저 멀어서 젊은이들은 취업과 동시에 그 고인 도시를 떠나게 되었다. 나는 십오 년 전에 그곳을 떠나왔고 젊은 사기꾼 소리를 듣다 전과가 몇 개 생겼으며 카지노에서 일하고 도박판에서 구르다가 부동산 투기로 운 좋게 돈을 많이 벌었는데 그러는 동안 한 번도 그 도시에 돌아간 적 없었다. 그 도시는 뭐라 말하기 어려운 냄새가 배어 있는 곳.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로 자주 하늘이 때 타고 콧구멍에 까만 먼지가 끼는 곳. 원자력발전소가 언제 터져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을 법하며 송전선로가 사방을 꺼멓게 두르고 있어서 투기꾼들도 들어가지 않는 곳. 공장을 닫고 파산한 뒤 대리운전 혹은 일용직 노동이나 전전하며 살았을 아버지에게나 어울릴 만한 곳이었다.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간략히 짐을 꾸렸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그 도시가 장례를 치르기에 꽤나 편리한 곳이라고 여겼다. 병원과 장례식장은 물론이고 화장장과 공동묘지 심지어 절간까지도 차를 타고 움직이면 십여 분 안에 닿을 수 있었다. 도시의 슬로건은 기억이 가물거리긴 해도 미사여구가 잔뜩 붙은 희망적인 문장이었다. 차라리 ‘죽음이 쉬운 곳.’ 정도가 도시의 입구에 걸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관 뚜껑을 덮듯 트렁크를 닫았다. 날이 밝기 전에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네 시간 넘게 차를 몰아야 했다. 그렇게까지 장거리 운전을 해본 적은 없었다. 차 안이 에어컨 바람으로 시원해질 때까지 기다린 뒤 회전 진입로를 통해 올라갔다. ‘환영합니다.’라고 벽에 프린팅된 글자들이 거꾸로 감기고 새벽빛이 주차장 입구로 틈입해왔다. 눈에 빛이 닿으니 시야는 잠시 암전되고 미시감이 들었다. 이 순간 나는 스무 살 같기도 하고 서른다섯 살 같기도 하며 불혹을 넘어선 것 같기도 했다. 앞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아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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