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차방책방(1회)
- 작성일 2020-07-01
- 댓글수 0
[책방곡곡]
대구 차방책방(1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사회/원고정리 : 이재은
참여자 : 이재진, 홍지훈, 신해리, 김수운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정확히 말하면 문학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말한다. 넷플릭스, 유튜브 같은 매체를 통해 즐겁고 흥미로운 콘텐츠들이 쏟아지고, 서사는 드라마와 영화로, 단어의 리듬은 노래로, 굳이 문학이 아니어도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문학을 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낯선 세계를 떠돌다 마주한 익숙한 장면들, 외면하고 싶었지만 끝끝내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낮고 작은 목소리를 따라 우리는 문학의 쓸모를 발견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글을 쓰는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함께 읽기로 했다.
사회자 : 우리가 함께 읽은 첫 책,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SF소설입니다. 평소에 장르소설을 자주 접하는 편인지요.
홍지훈 : SF의 범위가 굉장히 넓다고 생각해요. 현실에서 다뤄지지 않는 과학기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SF가 되는 것 같아요.
신해리 : 인터스텔라, 그런 이미지들이 먼저 생각나요.
이재진 : 평소에 SF영화나 우주에 관련된 영화를 찾아볼 정도로 좋아하는 편인데 첫 이미지는 ‘미래과학 그리기’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예상했던 것보다 소재나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 조금 가볍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사회자 : 단편을 엮은 소설집이라 그렇게 느꼈을 것 같기도 해요. 전체적으로 어떻게 읽었는지 얘기해 볼까요?
홍지훈 : 문장 자체가 따뜻하고 유려했어요. 과학적인 소재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쓰인 느낌이었고 단편의 내용들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아서 좋았어요.
김수운 : 저는 공대생이기 때문에 익숙한 소재들이 많았는데 너무 난해하지 않은 소재들을 잘 엮은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순간에 떠오른 아이디어들을 현실과 멀지 않게 그려낸 것 같아요. 문법이나 서사에 대한 부분들보다는 소재에 집중하면서 읽었고 그래서 가까운 미래든 먼 미래든 소설에서 말하는 시대가 오면 우리가 겪게 될 문제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어요. 현실이었다면 외면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이야기에 감정이입하며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사회자 : 저는 SF소설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전문지식을 필요로 해서 장벽이 높은 느낌? 그런 것들을 몰라도 이해하고 읽는 데 어려움이 없어서 다른 장르소설과 달리 많은 대중에게 사랑받은 게 아닐까 생각해요.
신해리 :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긴데, 저는 책을 다 읽을 때까지 SF소설인지 몰랐어요. 참신한 소재, 아이디어를 인간의 결을 다루는 데 활용했다는 게 신선했어요. SF소설인 걸 알고 더 놀랐어요. 또 등장하는 세계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회색빛의 미래도시가 아닌 현실과 같은 색채를 가진 이미지로 다가왔어요.
김수운 : 그래서 저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가 힘들었어요. 익숙한 내용들이 나오니까 틀에 갇혀서 읽었던 것 같아요. 이런 기술들이 상용화됐을 때 사람들이 현실세계보다 다른 세계에 빠지게 된다거나 하는 것들이요. 그러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아요.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생기는 것 같아요.
사회자 : 과학이 발전한 시대에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요?
홍지훈 : 글쎄, 상상할 수는 없지만 짜여진 틀과 프로그래밍 된 삶을 살게 된다면 즐겁지 않을 것 같아요.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잖아요. 프로그래밍 되어 결핍 없이 살아가게 되면 재미도 발전도 없을 것 같아요.
이재진 : 우리는 결핍이 있기 때문에 행복이나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결핍 자체가 없다면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될 것 같아요.
신해리 : 결핍이 있고 불편한 것이 있어서 생각을 하고 발전하고 아이디어가 생기겠죠? 과학기술이 어떻게 발전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결핍을 통해서 감정을 느끼고 교류가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인간 본질의 특성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생각해요.
사회자 : 과학의 발달의 이면인 것 같네요. 미래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현실의 문제나 구조에 대해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따뜻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느꼈나요?
신해리 : 저는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가 그런 의미에서 좋았어요. “정말로 지구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곳이라면, 우리가 그곳에서 배우게 되는 것이 오직 삶의 불행한 이면이라면, 왜 떠난 순례자들은 돌아오지 않을까.”라는 문장은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에요. 우리는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을 하게 되잖아요.
사회자 : 완벽한 세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괴롭고 고통스러운 세계에 머무르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이었죠. 사랑하는 사람의 세계에서 함께 맞서는 것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걸 안다는 말이 참 다정하고 사랑스러웠어요.
이재진 : 저는 ‘델피의 올리브’라는 문장이요. 한 편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면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이 소설집의 다른 단편들을 읽을 때 힌트가 되었던 것 같아요. 세계관의 일부라고 생각했어요.
김수운 : 「스펙트럼」이라는 단편 속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했어요. 다른 행성에서 보낸 시간이 외롭고 힘들었지만 그들을 지켜주기 위해서 스스로 거짓말쟁이가 됐잖아요. 사람들은 낯설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마구잡이로 연구하고 분석하니까. 한편으로 인간은 정말 소름끼치는 존재라는 생각도 했어요.
홍지훈 : 그런데 이 단편은 왜 다른 단편에 비해 짧을까요?
이재진 : 중간에 ‘할머니의 이야기는 늘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라는 문장 때문인 것 같아요. 할머니가 전해 준 이야기가 짧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끝이 나버렸기 때문에 화자의 이야기도 갑작스럽게 끝이 난. 할머니가 10년이라고 말했지만 구조된 건 40년 만이었다는 것이 할머니가 루이에게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는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신해리 : 그러고 보니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경우 작가가 과학을 장치로 두고 있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현재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게 안나가 남북이산가족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갑작스러운 이유로 가족과 영영 볼 수 없게 되었고 다시 만날 시간을 기다린다는 것을 과학적인 접근으로 이렇게 풀어냈다고 생각해요. 떠나간 사람들을 기다리는 남겨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요.
이재진 : 사실 저는 그 이야기에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170살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는 게 많았어요. 나이를 알게 되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잠들고 깨어나길 반복했는지, 우주정거장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렸는지 실감하게 했고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탁 막히는 기분이었어요. 정거장을 폐쇄하러 온 남자 직원은 아마 안나를 통해 연민과 다양한 감정을 배웠을 거예요. 그렇게 감정은 계속해서 이어져 간다고 생각했어요.
사회자 : 저는 관내분실에서 그 감정의 연결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주인공이 임신을 하지 않았다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면 엄마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 보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재진 : 엄마를 찾는 과정이지만 엄마가 아닌 개인의 이름을 찾아 주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으로 존재하고 싶은 주인공이 엄마가 되어 개인을 잃을까 봐 두려운 마음으로 엄마를 쫓아가며 이름을 찾아 주는 과정이요. 저는 마지막에 주인공이 엄마를 이해한다고 말할 때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됐거든요. 출산을 하고 나니 엄마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신해리 : 저는 출산이 두려운 이유 중 하나가 엄마가 되면 이름이 지워지잖아요. 누군가 세상에 나보다 더 사랑할 존재가 생긴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있겠지만 이름이 지워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요.
사회자 :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작가가 단편마다 가려지고 소외된 이름과 존재들에 대해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혹시 단편 중에 독특하다고 생각했던 지점들이 있나요?
이재진 : 공생가설을 읽으면서 재밌었던 건 ‘감염’이었어요. 유아기 아기들이 생각을 가질 때 로봇이 키우는 아기들과 인간이 키우는 아기들이 있고, 인간이 키우는 아기들에게만 감염이 되어 우리 뇌 속에 윤리라든지 덕목이 심겨진다는 부분은 참신했어요.
김수운 : 인간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간의 덕목들이 사실은 인간으로부터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적인 신호와 의식에 의해 심겨진다는 건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런 덕목들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하고 우월하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신해리 : 생각해 보지 못한 범위의 사고성을 줬어요. 그래서 가장 SF 같다고 생각했어요. 인간이 중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고성.
홍지훈 : 저는 「감정의 물성」에서 인간이 긍정적인 감정뿐 아니라 부정적 감정도 소유하려고 하는 게 잘 이해가 안 됐어요. 굳이 부정적인 감정을 사려는 마음이 궁금했어요.
이재진 : 심리학에서 인간의 심장은 뇌라고 생각해요. 감정도 뇌파의 일부라고. 스스로를 통제하고 싶다는 감정 때문에 부정적인 감정도 사게 되는 게 아닐까요?
신해리 : 저는 인간의 감정 중에 한 부분을 부정적이라고 생각하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인간이라는 게 본질적으로 몰입이나 집중된 상태에 빠지려고 하고 그때의 감정은 다양하다고 봐요. 긍정이든 부정이든 몰입된 상태가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감정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 같고요. 감정은 어떻든 상관없고 몰입의 상태가 되기 위해 구매한다고 생각해요.
이재진 : 맞아요. 사실 감정은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김수운 : 같이 읽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다양한 생각과 시선들을 알 수 있게 되어 좋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읽었는데 지금은 어떤 이야기인지 뚜렷해졌어요.
사회자 : 맞아요. 그래서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다양한 타자들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방식을 책을 통해서 알게 됐고요. SF소설에 초점을 맞춰서 읽었지만 결국은 나와 타자에 대한 이해, 나와 우리에 대한 관계를 좀 더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럼 마지막으로 한 줄 평을 해볼까요.
이재진 : 사랑, 결핍, 이해, 공존!
신해리 : 타자와의 공생?
김수운 : 과학기술의 두 얼굴.
홍지훈 : 미래와 현재가 맞닿은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
사회자 : 마지막으로 작가의 말 중 한 부분을 옮기며 마무리하고 싶어요. 우리 모두 빛의 속도로 갈 수는 없어도 각자의 시간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탐구하고 천착하는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을 이해해 보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언젠가 우리는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게 되겠지만, 그렇게 먼 미래에도 누군가는 외롭고 고독하며 닿기를 갈망할 것이다. 어디서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 서로를 이해하려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싶다.”
|
|
|
|
|
《문장웹진 2020년 7월호》
추천 콘텐츠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응원의 방식 -염승숙, 「지도에 없는」 (《문장웹진》2007년 4월호) 조경란(소설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좋은 소설에 대한 사적인 기준 단편소설 「지도에 없는」을 지금까지 세 번 읽었다. 처음엔 2007년 4월에 《문장웹진》에 수록되었을 때, 두 번째는 이듬해 염승숙이라는 젊은 작가의 첫 소설집 『채플린, 채플린』에서, 그리고 세 번째는 이 글을 쓰려고 준비하면서. 앞에 두 번을 읽었을 때는 나도 아직 중견작가라고는 불리지 않을 시기였고, ‘소설’에 대해서 지금보다는 잘 알지 못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시절이 주변을 둘러볼 새 없이 바삐 뛰면서 소설을 쓰던 시기라면 지금은 느리게 걸으며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 소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고 표현하면 되려나. 어느 면으로 소설에 대한 나의 견해나 취향, 좋은 소설에 대한 기준이 약간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눈으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거의 처음 읽는 소설처럼 읽었다. 솔직히 말해서 어쩌면 나는 예전에는 이 단편을 나의 취향이 아니라고 쉽게 여겨 버렸을지 모른다. 이야기나 인물보다는 여러 가지 소설적 요소의 완결성과 미학적인 면에 더 집착하기도 했던 시기였으므로. 소설이 어떤 메스(mess), 즉 그것이 크기와 상관없이 ‘엉망인’ ‘헝클어진’ 상황에 인물이 놓이고 거기서 출발한다고는 여전히 여긴다. 그 메스가 작으면 작은 대로 조용히 파동하는 미니멀리즘 이야기에 가까우며 메스의 크기가 크면 큰 소동, 리얼리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되었다. 말했지만, 지금의 나는 작가로서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는 소설이란 무엇일까? 소설이란 어때야 할까? 좋은 소설이란 무엇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몰두하면서 더 긴 시간을 보내는 편이라 떠오르는 대로 이런저런 단상을 메모해 두곤 한다. 그래서 소설에 대한 나의 이러한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사실 알지 못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소설이 갖춰야 할 조건들은 요즘은 이렇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인물이 있어야 하며, 그 인물을 둘러싼 공간을 시각적으로 보일 만큼 세심하게 구축해야 하고, 인물이 맞닥뜨리게 된 ‘상황’을 작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어 결말에 그 과정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의미(meaning)가 작게라도 내포된 소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가지. 시대를 담고 있을 것. 그런 개인적 기준을 가진 상태에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읽게 된 셈이다. 그래서 놀랐다고 할까, 그리하여 놀랐다고 할까. 당시 첫 책도 내지 않았던 젊은 작가 염승숙은 혹시 십팔 년 후에도,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이십 대 청년들의 삶이 미래에도 변하지
- 관리자
- 2025-07-01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안 가느니만 못했던 여행’의 가치 - 한창훈, 「삼도노인회 제주여행기」(《문장웹진》2007년 5월호) 서경석(문학평론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2025년 3월에 2007년을 읽는다. 그 해 에 수록된 소설들. 작품을 마주하니 새삼스러웠다. 김재영, 명지현, 한창훈이 눈에 띈다. 김재영의 소설은 중년 남성의 퇴직 후 삶을 그린 이야기였다. 「달을 향하여」는 『폭식』의 작가가 달나라 땅도 팔고 사는 세태를 작품의 마무리로 삼았던 작품이다. 모든 것이 ‘쓸쓸하게’ 돈에 포섭되는 폭식의 세상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 읽으니 소설 속 주인공이 퇴직하고 갈 곳을 찾지 못해 회현동 골목길을 이리저리 살피며 걷는 모습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고향처럼 아늑하고 친밀한 장소가 주는 위로가 느껴진다. 어린 시절의 안식처에 대한 추억이 작품의 주된 정조를 이루어, 마치 새로운 작품을 읽는 듯하다. 명지현의 작품 「입안의 송곳」은 지금 다시 읽어도 ‘변함이 없다.’ 앓던 이‘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누구나 끊임없이 앓고 있고 세상 속 우리의 삶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편안하고 충만한 삶의 안식처가 어디 있겠는가. 삶의 근원적인 딜레마 속에서 마음의 고향을 찾아 헤매는 부조리한 몸짓만이 있을 뿐이다. 야생의 인간처럼 뭔가를 계속 씹으며 서먹한 힘으로 다가오는 세상에 저항할 따름이다. 한창훈의 소설 「삼도 노인회 제주 여행기」는 진정한 고향 이야기이다.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섬사람이 전하니 더욱 그러하다. 작가 한창훈은 거문도가 그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그는 ‘세상은 몇 이랑의 밭과 그와 비슷한 수의 어선, 그리고 넓고 푸른 바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일곱 살부터 낚시를 했으며, 외할머니에게 잠수를 배웠다고도 한다. 그는 먼 곳, 먼바다를 떠돌다 거문도로 돌아와 글을 쓰고 이웃들과 어울려 살아간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의 말처럼 그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변방의 삶을 주로 탐구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세계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제 내용을 살펴 그 의미를 깊이 새겨 보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삼도는 남쪽 바다의 한 섬이다.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오직 ‘늙은이들’만이 남아 섬을 지키고 있다. 지킨다기보다는 떠날 수 없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 노인들에게 섬은 삶의 터전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초적인 삶의 뿌리이다. 벗어날 수도 없고, 설령 벗어난다 해도 그 몸에 새겨진 섬 생활의 그리움 때문에 곧 되돌아오고 마는 곳이다. ‘고단할지라도 섬을 버리고 자식들에게 가는 것은 멀쩡한 배에 구멍을
- 관리자
- 2025-06-01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 조연호, 「저녁의 기원」, 《문장웹진》 2005년 08월호 신용목(시인,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1.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도달할 수 없는 시작의 불가능한 기억으로 구성된 곳이라면 응당 과거의 한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힘의 발원을 일컫는 것이라면, 기원이 꼭 과거로 달려가 맞이하는 마지막 도착점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곳의 삶을 담보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지탱해 주는 것. 끝없이 현재를 보채는 것. 우리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바깥을 어둠으로 채워 놓은 것. 달려가면 달려가는 만큼 따라오는 해와 달 같은 것. 말하자면 기원은 내 몸의 외피에 꼭 맞는 공기이거나 내 기억을 감싼 테두리, 낭떠러지 허공이거나 캄캄한 망각일지도 모르는, 그러나 그 경계의 여리고 연한 막으로 떨리며 우리를 있게 하는 것. 어쩌면 미래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불안과 불편과 불쾌가 불시에 우리를 깨우며 우리에 대해 묻는 것.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달아나도 멀어질 수 없으므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놓여날 수 없으므로. 아무리 깊은 슬픔과 절망 뒤에 숨어도 뚜벅뚜벅 적막한 밤길을 걸어와 끝내 우리를 찾아내므로. 그러나 한 번도 우리의 시간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영원히 기원으로부터 추방된 채 과거의 바깥이자 미래의 바깥에, 나를 존재하게 한 부모의 바깥에, 나를 키워 준 고향과 친구들과 학교의 바깥에 있다.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나는 나의 바깥에 있다는 감각. 떠돈다는 감각. 그것으로 우리의 현전을 지탱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진실에 속해 있지 않고 진리에 속해 있지 않으며 더더욱 사실과 제도와 규칙에 속해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존재 자체로서 진실의 낙원으로부터 멀어지고 진리의 움직임으로부터 벗어나며 사실과 제도와 법률의 울타리 바깥에서 하루하루 말라 가는 굶주린 들짐승일지도 모른다. 머물지 못한다는 것. 나의 바깥에서 나를 찾아서 나의 주변을 서성이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 모든 것의 기원이자 그 모든 것으로서의 기원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머물지 않는, 일어난 일이 일어나지 않은, 다시 시작하는 일이 결코 시작되지 않는, 아무도 자신이지 못하고 누구도 타자이지 못하며 사랑과 미움이 혼동되고 삶과 죽음이 엇갈리며 너와 내가 갈리지 않는, 가장 어둡고 깊고 위험하며 오로지 상실만이 무성한 곳. 상실로서만 확인되고 결정되며 상실을 통해서만 접근되는 곳. 우리를 영원히 상실한 자로 만드는 것. 우리를 매 순간 상실된 자로 만드는 것. 그래서 기원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상실의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모든 질문을 안고 침몰한 곳에 기원
- 관리자
- 2025-05-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