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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

  • 작성일 2020-10-01

[2020년 아르코청년예술가지원/단편소설]



한여름 밤의 꿈



김동하




구는 담배 냄새에 찌든 옷을 벗고 온수를 받아 둔 욕조에 들어갔다. 길고 육중한 몸을 담아내기에는 좁은 욕조였다. 무릎을 펴면 상반신이 튀어나왔고 상반신을 집어넣으면 무릎이 튀어나왔다. 번갈아가며 담가야 했다. 구는 이 꼴사나운 행동을 반복하며 두서없이 떠오르는 기억을 즐겼다. 세미나장에 걸렸던 ‘고통을 해석하는 방식’이라는 문구부터 뒤풀이에서 들었던 피아노 연주, 그리고 모가 떠올랐다.
모는 거부감 없이 자신의 연락처를 알려줬다. 구는 모가 한 달 안에 자신에게 넘어오리라 확신했다. 근거는 없었다. 다만 구는 자신의 생각을 쉽게 확신하는 버릇이 있었다. 어쩌면 이 몹쓸 버릇은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 발전된 것일지도 몰랐다. 이성을 유혹하기 위한 최상의 덕목은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한다. 그리고 저 사람도 그렇게 될 것이다’는 확신이기 때문이다. 확신에 대한 근거는 이후에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구는 생각하고 있었다.
구의 관심은 모의 꿈 따위가 아니었다. 그러한 이야기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자잘한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모는 손과 발목이 예뻤다. 그거라면 구가 모를 좋아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됐다. 구의 이성관은 탁월했다. 어떤 이성이든 어느 한 부분만 눈에 들면 충분했다. 때문에 그가 사랑에 빠진 상대들에게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유일한 공통점은 완벽하게 매력적인 상대는 아니었다, 일지도 모른다. 그의 예상대로 모와의 약속은 손쉽게 잡을 수 있었다.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한다’는 명제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완성되었고 이제 ‘저 사람도 그렇게 될 것이다’란 명제가 확실해질 차례였다.


구는 몸에 남은 물기를 닦다 배꼽에 남아 있는 물을 발견했다. 그의 배꼽 아래에는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가벼운 화상을 입은 듯한 흉터가 있었다. 원래는 점이 있던 자리였다. 그 점은 배꼽에서 흘러나온 초코우유가 번개 모양으로 얼룩진 것 같은 형태였었다. 원래 손톱만 했던 그 점은 그가 자라면서 함께 커졌다. 구는 그 점이 남들에게는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나이부터 자신도 모르게 배꼽 주변을 어루만지고는 했다. 아니 문지르고는 했다. 그러면 사라질 것 같은 옅은 점이었다. 구는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번개 모양의 점이 저주처럼 느껴졌고 결국 올해 초, 그러니까 서른을 맞이한 겨울에 지웠다.
배꼽 위에 고여 있는 물이 백열 조명에 주홍빛으로 빛났다. 구는 배꼽의 물을 닦아내다 등골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배꼽에 닿은 감각은 성기 뿌리의 신경으로 이어진 뒤 전신을 경직시켰다. 원래도 가끔씩 느껴지던 감각이었는데 이번에는 그 강도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세게 느껴졌다. 구는 다시 한 번 배꼽을 검지로 긁어 보았다. 순간 무릎이 꺾이며 휘청거릴 정도로 강한 전류가 괄약근과 성기 사이에서 흘렀다.
‘뭐지. 이 빌어먹을 감각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것은 전기 자극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배꼽에서 시작된 불안이 구의 전신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 불안에는 묘한 쾌감도 섞여 있었다는 사실을 구는 자신의 빳빳해진 성기를 내려다보며 인정해야만 했다. 그는 마음을 추스르고 이번에는 더 강하고 빠르게 배꼽을 간질였다.
“윽!”
냉탕인 줄 모르고 발을 담갔다 화들짝 거두는 순간처럼 짧은 시간이 흘렀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욕실 천장의 전등이었다. 적색을 띤 불길한 보름달 빛과 같은 백열등이었다. 그는 무릎이 완전히 꺾여 주저앉게 되면서 그 반동으로 고개가 젖혀졌고 그로 인해 천장을 보았던 것이다. 구의 허벅지에는 믿을 수 없게도 그의 것일 수밖에 정액이 묻어 있었다.


그날 오후 구는 한 여자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여자는 수십 명의 청강자들 틈바구니에서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만 빛나 보인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한 곳을 집중하여 바라보면 주변이 흐려지는 것과 비슷했다. 구의 눈에 선명하게 관찰되고 있는 여자는 다소 통통한 체형에 단발머리였다. 민소매와 스커트 밖으로 드러난 피부는 하얗고 매끈했다. 구는 몇 차례나 속으로 ‘그만’ 하고 암시를 걸었으나 그의 시선은 여전히 여자를 향하고 있었다. 보름도 안 되어 또다시 병이 도진 것이다. 구는 스태프 한 명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옆구리를 찌를 때서야 간신히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세미나는 성황리에 끝났다. 강사가 강당에서 내려와 문 너머로 사라지도록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한 달 전부터 세미나를 준비해 왔던 구도 사회자 자리에서 박수를 쳤다. 지역노조가 주최하고 여성센터가 주관한 세미나였다. 강의에 도취된 강사가 잠깐이지만 종교적인 부분을 거론한 것만 제외한다면, ― 권사 신분인 중년여성 청강자 한 명이 거칠게 반발했지만 강사는 예를 들었을 뿐 범종교적인 맥락이었다며 능숙하게 빠져나갔다 ― 그리고 강의가 끝난 줄도 모르고 여자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구만 제외하면 세미나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본 행사가 끝나자 사회자인 구는 참여자들에게 뒤풀이 장소를 공지한 뒤 스태프들과 함께 강당의 뒷정리를 했다. 그사이 구가 주시하던 여자는 사람들 무리에 섞여 강당을 빠져나갔다. 여자를 놓칠까 하는 조바심에 구의 몸놀림이 빨라졌다. 구의 손에 뜯긴 강의 주제가 박힌 현수막이 거칠게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한 번에 수십 명의 인파가 들이닥친 식당은 고기 굽는 소리와 수다 떠는 소리로 떠들썩했다. 구는 자신과 같은 테이블에 앉은 강사의 이야기를 듣는 척하고 있었으나 실은 옆 테이블의 젊은 여자에게로 정신이 쏠려 있었다. 알고 보니 여자는 단순한 청강자가 아니라 여성센터의 관계자로 보였다. 덕분에 바로 떠나지 않고 재회할 수 있었으니 구로서는 운이 따랐다 할 수 있었다. 구는 여자가 2차에 따라나선다면 말을 섞을 기회가 올 거라 기대했다.
“사모님은 정말 좋으시겠어요. 이렇게 여자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남편을 뒀으니 말이에요.”
행사 관계자와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중년여성 청강자가 강의를 진행했던 최 교수에게 눈웃음을 쳤다. 그녀의 말은 강의 내용 중에 여성과 관련된 내용이 있던 것을 염두에 둔 것이었지만 강의에 집중하지 못했던 구로서는 다소 생뚱맞게 들렸다. 여자는 교수의 저서를 읽고 팬이 됐다고 했다. 교수는 별다른 대꾸 없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
“늙다리 남자 사는 이야기 말고 젊은이들 이야기 좀 듣죠.”
교수를 강사로 초빙한 여성센터의 센터장이 여성 팬의 말을 잘랐다. 그러면서 그녀는 흘깃 구를 봤다. 구는 단발머리 여자가 언제 자리에서 일어날지 모른다는 초조함에 강박적으로 손가락에 일어난 각질을 뜯고 있는 중이었다. 깡마른 센터장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흥, 각자 갈 길 갑시다. 히스테리 아줌마.’ 사실 구의 눈에는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어깨가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다들 어딘가 몸의 중심축이 무너진 사람들 같았다.
구는 현재 지역노조원인 데다 한때 레크리에이션 강사로 일한 경력 때문에 종종 행사의 진행을 맡고는 했지만 특별한 소속감은 없었다. 다만 그는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발을 넓힐 기회가 있다면 주저 없이 뛰어들고는 했는데 그 이유는 심하게 여자를 밝히는 습관 때문이었다. 여자들을 향한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일단 많은 조직에 몸을 담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자연스레 여자들과 접촉할 기회를 늘릴 수 있으니까.
일행 중 누군가의 농에 센터장이 깔깔대며 건배를 제의했다. 그사이 최 교수의 팬이 여성으로서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진지한 톤으로 시작했고 관계자 일행은 예정에 없던 청강자가 되어야 했다. 구는 여전히 주변상황과 관계없이 단발머리 여자만 훔쳐보았다. 다른 이들의 대화는 구의 돌출된 행동을 감추는 데 있어 좋은 연막이 됐다.


2차 장소가 환갑을 맞이한 교수의 자택이 될 줄은 누구도 예상 못 했을 거다. 유럽사 교수답게 그의 집 안 곳곳은 유럽 각 지역의 토속품들과 사진, 관련 서적들로 꾸며져 있었다. 동행한 인원은 다섯 명이었다. 그중에는 구와 그가 눈독을 들였던 단발머리 여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발머리 여자가 동행한 건 당연했다. 2차 장소가 교수의 자택이 된 것은 단발머리 여자의 피아노 솜씨가 상당하다는 것과 교수가 바이올린을 켤 줄 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콜라보레이션을 듣기 위해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있는 장소를 물색하던 중 센터장이 교수의 집을 거론했다. 가족과 홀로 떨어져 지낸다는 교수는 자택을 급습당한 상황이 싫지만은 않아 보였다.
단발머리 여자는 악보가 없었음에도 능숙하게 비발디의 곡을 연주했다. 잘 사용하지 않은 듯 피아노의 페달에서 끽끽 소리가 났다. 교수는 이따금 음을 놓치긴 했지만 여자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끝까지 바이올린을 켰다. 구는 시간이 흘러도 여자와 대화를 나눌 기회를 잡지 못하자 슬슬 조바심이 들었다. 그러나 아직 실망할 단계는 아니었다. 구의 생각에 여자는 막상 멍석을 깔아 주면 저돌적인 스타일인 게 분명했다. 낯선 사람들과의 자리에서 낯선 사람들의 청을 뿌리치지 않고 응하는 게 그 증거였다.
첫 연주가 끝나자 누군가 대중가요의 연주를 요청했다. 단발머리는 그건 악보가 필요하다며 난색을 표했다. 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악보를 찾아 피아노의 악보대에 올려 주었다. 그러면서 구는 노골적으로 여자를 바라봤는데 여자는 스마트폰에 뜬 악보만 응시했다. 입술을 앙다문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 여자의 옆모습을 지켜보던 구는 여자의 손가락이 건반을 지그시 누르기 시작하자 술자리로 돌아갔다.
구는 와인을 마시며 여자의 뒷모습을 찬찬히 보았다. 통통한 체형과는 달리 발목이 가늘었다. 다리도 날씬한 편이었다. 건반 위를 오가는 손가락이 그녀의 몸에 가려졌다 보였다 했다. 프릴이 달린 흰색 블라우스에 역시 프릴이 달린 네이비 스커트 차림은 한편으로는 단정해 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해 보였다. 그러나 그 옷차림은 마치 피아노 앞에 앉게 될 것을 알고 차려입은 것처럼 피아노와 절묘하게 어울렸다.
연주를 끝낸 여자가 박수와 앙코르 요청에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싫지는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센터장이 술 한 잔 하라 잡아끌지 않았다면 정말로 앙코르를 했을지도 몰랐다. 띠 동갑이 넘는 나이 차이였지만 센터장은 단발머리 여자에게 은근 질투를 느끼는 듯했다.
일행들은 본격적으로 술을 마셨고 수다를 떨었다. 얼큰히 취기가 올라올 쯤 되서는 저마다 종류가 다른 담배들을 교환하며 피워댔다. 그러다 교수가 시가를 꺼내면서는 시가를 돌려가며 나눠피웠다. 단발머리 여자는 자신의 차례가 오자 멈칫했다. 구가 보기에 여자는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멈칫하는 습관이 있는 듯했다.
“입안에 머금었다 뱉어요.”
교수의 말에 여자는 시가를 입에 댔고 구는 그런 교수와 여자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봤다. 구의 눈에 여자는 자기 행동에 좀처럼 확신을 갖지 못하는 스타일처럼 보였다. 구는 여자와 눈이 마주치면 오 초 정도 응시한 뒤 웃으며 슬쩍 피했다. 말도 먼저 부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일행들의 대화에는 응하다가도 여자가 말을 꺼내면 입을 닫고 듣기만 했다. 단발머리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모라고 밝혔다. 그 순간부터 모는 구의 구체적인 표적이 됐다.


구는 모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으나 스스로 질문할 필요가 없었다. 연주를 할 때부터 주인공이 된 모였기에 일행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구는 잠자코 기다리면 됐다. 사람들은 알아서 모의 많은 것들을 캐내어 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모와 가장 나이대가 가까운 구를 연결시켜 주려 노력할지도 몰랐다. 구로서는 그때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거다.
모의 나이는 28살이었다. 여성센터 내의 직책은 기획팀장이었고 현재 교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좋아했고 음대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실제로 전공한 과목은 경영학이었다. 그녀는 피아니스트를 향한 꿈은 포기했다고 말했다. 다만 그 포기한 꿈은 야마하 피아노를 갖고 싶다는 욕망으로 남아 있었다. 모가 말하는 야마하 피아노는 적어도 오천만 원은 하는 비싼 악기였다.
구가 모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을 때 센터장과 여성노조단체의 주임은 교수와 대화중이었다. 주임이 교수와 아내가 따로 사는 이유에 대해 물었을 때였다. 교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교수가 통화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주임이 센터장에게 물었다.
“최 교수님 사모님과 별거 중인 거 맞나요? 듣기론 사모님이 의부증이 있다던데.”
센터장이 커피 가루가 담긴 재떨이에 담뱃불을 끄고 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요. 최 교수님이 카사노바거든요. 뭐 지금은 모르겠지만요.”
이후 주임과 센터장은 카사노바를 정욕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의 여자들과의 관계는 사랑이 맞다 아니다를 놓고 옥신각신했다. 카사노바. 스스로를 조반니 카사노바의 화신이라고 생각하는 구 앞에서 말이다.
구는 여자들에게 쉽게 빠져들었다. 남자는 누구나 그렇다고? 안타깝게도 구는 미인 앞에서라면 본래의 영혼은 이데아에 던져두고 끈적거리는 멘트를 던지는 오빠들과는 달랐다. 그렇다고 과하게 진도가 빠른 상상력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저기요” 따위의 말을 건네는 머저리들과도 달랐다. 구는 미인에게만 영혼을 팔지도 않을뿐더러 감탄사 같지 않은 감탄사 “저기요” 따위는 목울대를 지나기 전에 삼켜버리는 타입이었다. 다만 구에게 있어 일부 여자들은 불시에, 순간적으로, 빠르게 빠져드는 싱크홀 같았다. 그 싱크홀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었다. 어떤 예고도 없이 빠지기에 정신을 차리고 보면 캄캄한 구멍 안이었다. 놀랍게도 구가 그와 같은 여자들을 만났을 때 조만간 한 침대에서 눈을 비비며 일어날 확률은 메이저리그 탑 테이블세터의 출루율에 육박했다.
구가 자신을 카사노바의 화신이라 생각한 데는 나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는 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여자와 잠을 잔 이후 여자가 곁에 없으면 금단현상을 겪는 것처럼 극도의 불안에 시달렸다. 그러니 사실 그에게 있어 여자란 괴로운 존재였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한 여자랑 단 몇 개월도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부분이 구를 상당히 피곤하게 괴롭혔는데 ― 구는 여자들이 알아서 꼬일 정도로 잘생기지도 말주변이 좋은 편도 아니었다 ― 어느 날 대학동기 중 한 녀석이 막 여자친구를 갈아치운 구에게 “어이, 미스터 카사노바 구.” 하고 툭 던진 말이 지금에 와서는 그 자신을 규정하는 말이 됐던 거다.


구의 엄마는 자신이 임신중절 수술을 받을 산부인과에 일곱 살이었던 구를 데리고 갔었다. 구의 아빠를 포함해 다른 식구들은 동행하지 않았다. 한 시간쯤 걸리는 인근 대도시의 산부인과를 찾아가는 동안 구는 엄마와 단둘이 소풍을 가는 거라 믿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구는 차창에 흐르는 물줄기를 손가락 끝으로 따라 긋던 중 “비가 지랄 맞게도 오네.”라는 엄마의 말을 들었다. 그때서야 어쩌면 소풍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구가 엄마의 손을 놓은 곳은 병원의 대기실이었다. 그때부터 구가 의지할 수 있는 건 곧 돌아오겠다던 엄마의 말뿐이었다. 대기실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엄마(산모)들의 비명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구는 그 모든 비명소리가 자신의 엄마가 내는 소리 같았다. 비명소리를 듣는 건 상당한 공포였다. 그러나 그 비명이 자기 엄마의 목울대를 지나 내질러진 것이라면, 그 비명을 들어야만 엄마가 돌아오는 거라면 참아야 했다.
구는 속으로 동네 할머니들에게서 배운 욕을 중얼거렸다.
‘염병할, 염병할.’
그러면서 우는 대신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생각해 보면 시장에서 길을 잃었을 때도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무릎이 깨졌을 때도 울지 않았다. 구는 엄마가 있을 때만, 자신의 울음을 받아 줄 사람이 있을 때만 울었고 그런 이는 엄마뿐이었다. 그렇게 구는 눈물을 참으며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렸다. 다른 엄마들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내 엄마도 다른 엄마들처럼 어딘가 많이 아픈 거라고 생각했다. 어린 구의 눈에 엄마는 아픈 게 당연한 사람이었다.
곧 돌아오겠다는 말대로 엄마는 돌아왔다. 절룩거리며 돌아온 엄마는 구와 다시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고 보름 후 집을 나갔다. 이번에는 돌아오겠다와 비슷한 의미의 그 어떤 말도 남기지 않았다. 엄마는 대신 구에게서 한 가지 대답을 듣기를 원했다. 엄마를 너무 미워하지 말라 했고 엄마가 없어도 잘 자라야 한다는 신파적인 말을 남겼다. 그런 뒤 대답하지 않는 구에게서 끝내 ‘네’라는 대답을 끌어낸 뒤에야 떠났다.


당시 구의 엄마는 임신중절 수술이란 용어를 알아들을 리 없는 어린 아들에게 자기가 받은 수술을 배꼽수술이라 설명했다. 구는 배꼽이란 낱말이 재밌어서 반복적으로 중얼거렸다. 배꼽은 사람의 몸에 남는 최초의 흉터였다. 그리고 제 쓸모가 사라졌음에도 기어코 남는 흔적이었다. 구는 자신이 태아일 적 탯줄에 감겨 위험했던 순간이 있었다는 엄마의 말을 기억했다. 구는 태아일 적부터 활동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토록 건강한 태아였던 구는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이유를 알 수 없이 명치 부근에 통증을 느끼며 자랐다. 그 통증은 사춘기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지만 그로 인해 구에게는 내성적인 경향이 생겼다.
구의 사춘기는 꽤 늦은 시기인 고등학생 때 찾아왔다. 그는 그 사춘기가 채 끝나기 전에 동정을 깨게 됐는데 상대는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던 누나였다. 그녀는 긴 생머리에 가슴이 발달한, 구보다 세 살 많은 대학생이었다. 3박 4일간의 수련회, 작은 방에 수십 명을 몰아넣고 통성기도를 하는 시간이었다. 구는 작은 방 안에 끝없이 울려 퍼지는 자기고백과 울부짖음에 질려 가고 있었다. 마치 맹수에게 목을 물린 고라니의 울음들이 첩첩산중에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용서하소서 구원하소서…….”
끊임없는 동어반복과 통곡소리들로 인해 구의 팔등 위로는 소름이 돋았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는 속으로는 ‘염병할’과 추가로 알게 된 욕들을 중얼거리면서 입으로는 가장 만만한 구절인 “용서하소서 구원하소서”를 따라했다. 그러면서 알 수 없는 무력감과 죄책감을 느꼈다.
구가 입가에 고이는 침 거품을 혀로 핥아 가며 슬슬 립싱크를 하기 시작할 무렵 그의 머리에 따뜻한 무게가 실렸다. 구는 본능적으로 그 손이 여자의 것임을 알았다. 귀로는 속사포 같은 기도와 함께 간질거리는 입김이 닿았다. 그리고 따뜻하고 뭉클한 무언가가 등에 닿았다. 그러니까 구의 등과 반주 누나의 품이 스친 정도가 아니라 밀착했던 것이다. 구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교회에 다니게 된 이유를 찾았다. 이 상황이야말로 ‘염병할’과 “구원하소서”의 완벽한 결합이었다. 그 염병할 구원은 여자의 품이었다.


구는 모와 만나기로 한 카페에 약속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착했으나 차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미 몇 차례 만나 본 모는 약속시간에서 번번이 오 분가량 늦었다. 그렇게 늦고 나면 미안하단 말을 반복했는데 그로 인해 기껏 얼마간 가까워진 둘의 사이가 서먹해지고는 했다. 구는 이번에 자신이 조금 늦음으로써 그녀의 미안함을 탕감할 생각이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둘이서 밤낚시를 가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구로서는 디데이로 잡은 날이기도 했다. 구는 모가 카페에 들어서는 모습을 기다리며 모에 대해 파악한 것들을 정리해 보았다.
구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모는 엄마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었다. 모의 통화 톤은 다소 신경질적이었다. 모는 외동딸이었다. 아버지는 그녀가 어릴 적에 돌아가셨고 현재 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그녀의 엄마는 그녀의 귀가가 늦는 게 싫은 게 아니라 술 마시는 걸 싫어한다고 했다. 다행히 모의 엄마는 사람은 좋아했다.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가 엄마의 귀가 모습을 보고 자는 경우는 한 달에 두 번도 많았다. 반면 그녀의 아버지는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라기보다는 어렴풋하게 남아 있는 아버지의 이미지 같았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했다. 그녀의 아버지 방에는 줄이 끊어진 바이올린이 있다고 했다. 한때 그녀의 아버지가 취미삼아 연주하던 것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사업이 실패한 이후 종일 방에 모로 누워 TV만 보았다고 했다. 그녀는 아버지를 노인으로 기억했으나 그녀의 아버지가 죽은 나이는 쉰셋에 불과했다. 그녀는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온전한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 자신이 만든 이미지로 덮어 뒀다.
한순간 몰락한 집에서 자란 이들은 현실을 냉철하게 보려고 애쓰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자기 것이라 여겼던 것들이 한순간 전소하는 경험을 한 터라 이후로는 애초에 자기 것을 갖는 데 두려움을 갖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애초에 갖고 있던 욕망의 크기는 줄어들지 않는다. 때문에 낭비벽이 심하다. 이런 태도는 인간관계에서도 비슷하다. 일단 관계를 맺으면 과도한 집착을 보이지만 동시에 그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 한다. 그래서 둘 사이의 선택권을 쥐고 있으려 한다. 이처럼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사실 상대가 떠날까 두렵기 때문이다.


구는 모가 카페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가족사에 대한 생각을 끝냈다. 그녀는 구의 예상대로 원피스 차림이었다. 모는 구와 네 번의 만남에서 두 번은 원피스를 두 번은 투피스를 입고 왔었다. 그녀는 강박적으로 다리를 노출했다. 구는 차가 막혀서 좀 늦는다는 내용의 문자를 모에게 보냈다.
모의 어머니는 딸의 허벅지가 두껍다고 하면서도 줄곧 원피스를 사다준다고 했다. 모가 어머니가 사다준 원피스를 입을 때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는 악착같이 원피스류를 고집했다. 그 이야기를 하던 모는 구에게 자신의 허벅지가 정말 두껍냐며 묻기도 했다. 구는 그 질문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그녀의 몸매는 통통했지만 다리의 경우 그녀의 어머니 말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녀의 신체 중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 다리였고 그중에서도 발목이었다. 그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녀는 자신의 신체 중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을 가장 결함인 부위처럼 말하는 것으로 상대적으로 자신 없는 부위의 결핍을 덮었다. 가령 내 신체 중 가장 못난 부분이 다리다. 다른 부분은 이 다리보다 낫다, 라는 인식을 주고 싶은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생각은 어디까지나 구의 가정에 불과했지만.
약속시간에서 십여 분이 지났을 때에야 구는 카페에 들어갔다. 그리고 주문한 아메리카노가 나올 때까지 모와 대화를 나눴다. 구는 모의 패션 센스와 귓불에 대해 칭찬을 했고 다리에 대해서는 낚시 중 모기에 물릴 것을 염려하는 정도로만 입에 올렸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구는 곧장 모의 손목을 잡아끌고 차에 올랐다.


달빛이 좋은 밤이었다. 구는 부러 낚시를 할 포인트와 다소 거리가 있는 곳에 차를 세웠다. 낚시채비를 등에 멘 구는 모에게도 작은 배낭 하나를 메게 했다. 둘은 손을 잡고 달밤의 방죽을 걸었다. 걷던 중 구는 돌 하나를 집어 방죽가의 풀숲에 던졌다. 그러자 수십 마리의 반딧불이가 날아올랐다. 아니 부유했다. 희미한 달빛 속에서 산개되는 점점이 희미한 빛들. 반딧불이가 명멸하다 하나둘 꺼져 갔다. 반딧불이의 빛은 제 몸뚱이를 가리기 위한 빛이었다. 성충보다는 애벌레의 모습에 가까운 주름투성이의 몸뚱이를 감추는 빛. 그러나 너무 희미해서 그림자조차 만들지 못하는 빛이었다.
평범한 여름밤이었고 밤낚시를 하기에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날이었다. 극성스럽던 바람은 밤이 깊어 가면서 잦아들었다. 달은 구름에 가려 있는 시간이 그렇지 않은 시간보다 길었다. 사위가 어두웠지만 평소 야간 산책을 즐기는 구는 어둠의 층위를 구별하는 일에 익숙했다. 개울은 밤하늘보다 어두웠고 개울가에 비탈을 세운 산은 개울보다 어두웠다. 구가 걷고 있는 방죽은 풀이 이어진 가운뎃길이 어두웠고 풀 옆으로 드문드문 흙이 보이는 부분이 덜 어두웠다. 구와 모는 그 덜 어두운 부분을 밟아 가며 나란히 걸었다.
구는 걸으며 염려가 되는 자신의 배꼽 주변을 슬쩍 문질러 보았다. 역시 힘이 쫙 빠지면서 아랫도리가 찌릿했다. 최초로 이 이상한 신체적 변화를 감지한 이후 구는 속으로 고심을 거듭했다. 병원을 가볼까도 싶었지만 일단 보류를 한 것은 이 현상이 자신이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황홀한 쾌감을 동반하기 때문이었다. 엄청나게 짧은 시간에 사정이 이뤄졌지만 한동안 그 전희가 얼얼하게 남았는데 구로서는 처음 느껴 보는 오르가즘이었다


구는 갈대들과 소시지 모양의 열매 이삭이 달린 부들 무리를 양옆에 끼고 자리를 살폈다. 플래시로 비춰 본 물가 쪽 수면에 마름과 붕어말, 개구리밥 등이 퍼져 있었다. 예상대로 유독 붕어말이 많았다. 그 같은 이유로 구가 붕어말 포인트라 부르는 곳이었다. 그리고 구가 그곳에 붙인 또 다른 이름은 작업 포인트였다.
수면 위에 떠 있는 물풀 무리의 지름은 2.5미터 남짓, 다섯 칸짜리 낚싯대면 따로 걷어내지 않고도 낚시가 가능할 반경이었다. 구는 어깨를 짓누르던 낚시 가방을 내려놓고 물가로 다가갔다. 수온을 재기 위해 손을 물에 담갔다. 미지근한 온도였다. 떡밥이 잘 풀어질 온도였지만 불쾌한 온도이기도 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수온은 생물이 살 수 없는 온도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모기가 많네요.”
모가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배낭 열어 봐요.”
구는 무심하게 말했다. 모가 배낭의 지퍼를 열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고어텍스 야상이었다.
“아, 그전에 잠시만요.”
구는 낚시 가방에서 몸에 뿌리는 모기 기피제를 꺼내 모의 팔과 다리, 그리고 목덜미에 뿌려 주었다. 그러고는 야상을 꺼내 모의 다리에 씌워 주었다.
“강모기는 많이 따가워요.”
이후 구는 부러 낚시에 집중하는 척했다. 그의 낚시 가방에는 열 대가 넘는 낚싯대가 있었으나 그는 대낚시 두 대만 펼쳤다. 수면 위로 형광색 케미컬라이트와 주홍색 케미컬라이트가 나란히 섰다. 떡밥 냄새를 맡고 본격적으로 고기들이 몰려드는 건 일러도 한 시간은 지나야 할 것이다. 바늘에 다는 미끼용 떡밥 외에도 고기들을 모으기 위한 투척용 밑밥이 있었지만 구는 이곳에서만큼은 밑밥을 사용하지 않았다. 구가 기대하는 건 물고기의 입질이 아니었다.
“꽤 지루할 거예요. 호기심만으로 견딜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한 시간이나 되려나.”
“괜찮아요. 이미 재밌어요.”
구의 생각에 낚시가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는 말은 절반만 맞는 말이었다. 낚시가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낚시는 사람을 긴장시킨다. 초보운전자들이 어깨를 곧추세우고 운전하듯 언제일지 모를 입질을 기다리며 찌를 바라보는 낚시도 그렇다. 낚시는 긴장에 중독된 사람들이 빠지기 쉬웠다. 긴장 속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형태의 긴장으로만 이전의 긴장을 견딘다. 놀랍게도 이런 긴장은 연애를 막 시작하려 하는 이들 사이에 흐르는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낚시가 최악의 데이트가 되는 건 연인과 낚시를 와서 낚시에만 집중하는 얼빠진 인간들이 초래한 불상사다. 초반에는 낚시를 무척 좋아하는 것처럼 집중하다 곧 동행한 여자에게 집중해야 한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위해 중요한 하나를 포기하는 모습에 감동하고는 하니까.
“저 주홍빛이 모 씨 거예요. 저 빛이 물속으로 사라지거나 반대로 솟구칠 때 들어 올리면 돼요. 생각보다 간단하죠?”
“알아요.”
“아, 혹시 낚시 해본 거예요?”
“네. 아빠랑. 아, 잘은 기억 안 나요. 그냥 어릴 때 가족이 캠핑을 갔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 아빠는 낚시를 했어요.”
구는 잠깐 망설였다. 모의 아빠 이야기를 좀 더 할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는 뜻밖에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말았다.
“이곳은 제가 건져진 곳이에요. 다섯 살 땐가 동네 도랑가에서 놀다 빠진 적이 있는데 다행히 물 위에 누운 자세였거든요. 그렇게 물에 둥둥 떠가며 하늘을 봤어요. 꽤 평온했던 것 같아요. 도랑물 흐르는 소리도 정겹고 살갗에 닿은 물은 따뜻했어요. 물론 수로를 통과할 때의 어둠과 거미줄은 끔찍했지만요.”
“신기한 이야기네요. 조금 무섭기도 하고.”
“그런가요? 그런데 어쩌죠. 사실 전 물에 빠지자마자 기절했었거든요. 그러니까 도랑물에 떠가던 기억은 순전히 날조인 셈이죠. 그런데도 그걸 최근까지도 믿고 살았다니까요.”
“아, 그런데 어떻게 구조됐어요?”
“저기 보이는 물풀들 있죠. 저게 붕어말이란 건데 저기에 걸렸었나 봐요. 요 바로 옆에 도랑물이 흘러 들어오는 곳이 있거든요.”
“앗! 그럼 여기가 구 씨 고향이에요?”
“뭐, 그런 셈이죠.”
그때 모가 구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모의 손이 자기 몫의 낚싯대를 쥐었다. 주홍빛 케미컬라이트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약한 바람이 한 차례 불었고 갈대와 부들, 케미컬라이트 들이 흔들렸다. 수면이 죽어가는 잠자리의 날갯짓처럼 파르르 떨렸다. 구름 사이로 잠시 얼굴을 보인 달빛이 수면에서 부서졌다. 케미컬라이트가 흔들린 게 물고기 때문인지 바람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모는 미련이 남는 듯 낚싯대에서 손을 뗐음에도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찌를 노려보았다. 덕분에 구와 모는 어깨를 맞대고 앉게 됐다. 구는 모의 몸에서 나는 엷은 향수 냄새를 맡았다. 모가 구를 만나러 오면서 향수를 뿌린 건 처음이었다.
“저 불빛 계속 보니까 조금 어지러워요.”
모가 말했다.
“물살이 있어서 그래요. 전 계속 보고 있으면 제 몸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던데요. 그냥 의식만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요. 오르가즘 이후의 기분 같다고나 할까.”
구는 말미에 굳이 오르가즘이란 말을 붙였다. 구는 이전에도 모와 야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그녀의 일행들이 있던 자리였다. 그녀는 정색을 했고 동시에 말이 빨라졌다. 구의 예상이 맞는다면 둘이 있을 때의 모는 다를 것이었다. 모의 숙맥 같은 태도는 쉽게 타오를 본능을 감추기 위한 것일 테니까.
“오르가즘이란 게 진짜 있는 걸까요?”
“있으니까 생긴 말이겠죠.”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그건 설사 있다 하더라도 느껴 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거잖아요. 너무 주관적이고 추상적이에요. 마치 종교나 권력처럼요.”
“권력이요?”
“네. 눈에 보이지 않고 확인이 불가능한 것에 의존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게 있다고 믿는 이들이 추종하는 거고.”
“그럼 모 씬 사랑도 안 믿겠네요?”
“믿고 싶지만 잘 안 돼요.”
구는 어느새 대화의 주도권이 모에게 넘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자 오래된 버릇이 나오기 시작했다. 할 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정적이 분위기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때문에 구는 모에게서 나는 향수 냄새를 조금 더 확실하게 맡을 수 있었다. 간간이 닿는 모의 어깨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사실 붕어말 포인트는 수량이 많지 않은 데다 물살 또한 있어 대물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있다 하더라도 잔챙이들이 많아 대물이 걸릴 틈이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붕어말 포인트를 즐겨 찾는 건 은밀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확인해 볼래요?”
“네?”
구는 모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모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모는 피하지 않았다. 구는 모와 잠시 입술을 떼는 척하다 모의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고 더 긴 키스를 했다. 모의 입술과 닫혀 있던 치아가 서서히 열렸다. 구는 모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순간 모가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사람처럼 흠칫 놀라며 입술을 뗐다.
“미안해요. 하지만 꼭 전기에 감전된 것 같아서…….”
모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만지며 말했다.
“전기요?”
“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전기요.”
“그럴 리가요. 제가 무슨 전기뱀장어도 아니고.”
구는 다시 확인해 볼래요 하고 물으려던 중 최근 자신에게 생긴 신체적 변화가 떠올라 멈칫했다. 구가 다른 대체할 말을 고르는 중에 모가 상체를 바짝 낚싯대 쪽으로 기울였다. 주홍빛 케미컬라이트가 물속으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챌 타이밍을 놓쳤지만 고기 스스로 확실히 무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채요!”
모는 채라는 구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천천히, 시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흰 가운을 들어 올리듯 조심스럽게 낚싯대를 들어 올렸다. 낚싯대가 휘면서 뭔가가 어두운 수면 위로 작은 소란을 일으켰다. 일명 빠가사리라고 불리는 동자개였다. 녀석은 민물에서는 포식자 축에 드는 어류였다. 육식 어류들은 대부분 밤에 활동했다. 자신을 숨기고 표적에 접근하기에는 어둠만 한 게 없기 때문이다. 녀석들은 미끼에 대한 의심도 없이 일단 삼키고 봤다.
“무슨 소리죠.”
낚싯바늘을 삼킨 동자개에게서 바늘을 빼내고자 용쓰는데 동자개가 제 특유의 빠가빠가 하는 소리를 냈다.
“빠가사리가 내는 소리예요.”
“고통스러운 걸까요?”
빠가사리는 납작한 배를 지면에 대고 등지느러미를 세운 채 계속해서 빠가빠가 하는 소리를 냈다. 구는 어류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이 사실인지 활어를 마음 편히 먹기 위해 지어낸 말인지 모르지만 구의 생각에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고통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생각해요? 헤어지자는 연인을 살해한 남자의 심리에 대해서요?”
“갑자기 왜 그런 끔찍한 질문을…….”
구는 갑작스런 모의 질문에 대답을 얼버무렸다.
“사랑에 따르는 고통을 부당하다 생각해서래요.”
“누가요?”
“최 교수님이요.”
문득 구의 머릿속에 최 교수의 강의안 내용이 떠올랐다.
― 고통의 종류는 셀 수 없이 다양하다. 그리고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은 개인마다, 시대마다, 사회마다 다르다. 따라서 역사와 문화는 그 시대의 고통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구분된다. 한편 개인적 차원에서의 인간은 자신의 고통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으로 존재한다.
최 교수는 세상을 방대한 신경 조직으로 바라보는 듯했다. 정말로 고통의 이해 방식이 세상의 구조를 설명한다면 나는 어디쯤에 존재하는 걸까. 구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 몰랐다. 아니 이해할 수 없었다. 제 환부를 말하며 구의 환부를 묻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구는 당혹스러웠다. ‘그렇다면 버려지는 고통을 아는 사람이 또다시 누군가를 버리는 행위는 뭔데? 비겁한 놈들.’ 그때마다 구가 속으로 삼킨 말이었다.
동자개가 삼킨 낚싯바늘은 좀처럼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등지느러미와 가슴지느러미에 길고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 동자개는 지느러미들을 잘라내면 모를까 다루기 쉽지 않다. 구는 가위로 지느러미가 아닌 다른 부분을 절개했다. 구는 모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도 잊은 채 가위질에 몰두했다. 입부터 배까지 잘린 동자개는 그사이에도 빠가빠가 하는 소리를 냈다. 낚싯바늘이 내장을 단 채 빠져나왔다. 구는 동자개와 내장 모두 물에 집어던졌다. 동자개의 노란 줄무늬가 컴컴한 물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갔다. 구는 낚시 가방에 담아온 위스키 병을 꺼냈다.


모가 먼저 씻었고 이어 구도 씻었다. 둘은 남은 위스키를 나눠 마신 뒤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구가 모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모의 혀에서 달달한 위스키 맛이 느껴졌다. 구는 모의 몸 구석구석을 혀로 핥았다. 모가 몸을 뒤틀며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발끝까지 내려갔던 구의 머리가 다시 모의 젖가슴으로 올라왔을 때 모는 몸을 뒤집어 구의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모가 구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모의 혀는 구의 귓불에서 목을 타고 내려가 유두를 깨물었고 더 아래로 내려갔다.
“거긴 안 돼요.”
모의 혀가 구의 배꼽을 스칠 때쯤 구가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네? 왜요?”
“그게 너무 간지러워서요.”
구는 모를 눕히고 서서히 모의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모가 내지르는 비명을 들어야 했다. 그 비명은 진짜 아파야 낼 수 있는 것이었다. 구는 그 짧은 순간 두 가지 의미에서 놀라고 있었다. 하나는 모의 섹스가 처음인 건가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전에는 느끼지 못한 쾌감이 자신의 성기에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쾌감은 배꼽을 자극했을 때와 비슷했는데 그보다는 다소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구는 다시 모에게 들어가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모가 구의 아랫배를 밀쳐내며 거절했다.
“너무 아파요. 뭐죠? 꼭 전기가 통한 것 같았어요.”
“하하. 그럴 리가요. 혹시 처음인가요?”
“정말이에요. 낚시하면서 키스했을 때처럼 아팠다니까요.”
“전 아무렇지 않았는데. 오히려 엄청 좋았어요. 괜찮을 거예요. 천천히 다시 해보죠?”
그러나 모는 구를 전기충격기라도 들고 있는 사람처럼 경계하며 고개를 저었다. 구는 여전히 모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정말로 전기가 통했다면 자신도 함께 느꼈어야 하지 않은가. 구는 처음 겪는 생소한 방식의 거절에 모멸감을 느꼈다.
“혹시 최 교수 좋아해요?”
“네?”
“맞죠? 최 교수 그 새끼 고뇌에 찬 표정이며 바이올린 연주며 거기서 당신 아버지를 본 거잖아.”
구는 제 주장이 억지스러운 것임을 알면서도 말을 통제할 수 없었다. 말한 직후 후회가 들었지만 주워 담기에는 늦은 상황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모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 멍한 표정으로 구를 응시했다. 곧 자신이 헛것을 들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 모는 침대 밖으로 빠져나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다시 볼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정말로 아팠어요.”


모는 그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구는 자신이 여자에게 차였다는 사실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가 교제 중에 버림받는 쪽이 된 것은 처음이었다. 구가 여자를 유혹하는 데 성공할 확률은 절반에 그쳤지만 여자에게서 먼저 차일 확률은 제로였다. 오늘 밤에 이 제로라는 완전무결한 이력이 깨질 거라는 상상은 해본 적 없는 그였다. 그런 자신감은 상대의 마음이 식기 시작하는 타이밍을 소금쟁이 다리털처럼 예민하게 감지해 내는 능력에 있었다. 하지만 돌려 생각하면 이 말은 다소 서글픈 여지를 남기는데 왜냐면 구가 단 한 번도 자신의 마음이 식어서 여자를 찬 적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믿지 못할 일이 마침내 자신에게 생기고 말았다. 구는 욕실로 향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였다. 배꼽에서 쾌감과 고통이 동시에 느껴질 때부터 그의 일상은 미묘하지만 이전과는 달라졌다. 그러나 구는 어쩌면 이러한 변화가 자신의 계산보다 훨씬 이른 시기부터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지 못했다.
그는 꿈인지 생시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처럼 욕실에서 자신의 배꼽을 문질렀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쾌감에 그의 무릎이 꺾였다. 무릎을 꿇고 천장을 올려다보는 자세의 그는 언뜻 구원 기도를 하는 신자의 모습 같기도 했다. 무릎을 꿇은 그의 입에서 쾌감에 의한 것인지 고통에 의한 것인지 모를 신음이 빠져나왔다. 한여름 밤에 느끼는 혼자만의 고통이었고 쾌락이었다.
















김동하

작가소개 / 김동하

2012년 《광주일보》 신문문예에 단편소설 「녹」이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펴낸 소설집으로는 장편소설 『운석사냥꾼』, 『피아노가 울리면』이 있다.


《문장웹진 2020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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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오

히데오 서장원 히데오에겐 몇 가지 비밀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그의 친부가 일본인이며 그가 어린 시절을 일본 교토에서 보냈다는 것이다. 어느 저녁나절, 한적한 거리를 걷던 중에 히데오는 이 사실을 내게 말해 줬다. 이후 히데오는 어린 시절에 대해 조금씩 더 들려주었고, 나중에 나는 히데오의 생애 초반에 일어난 일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꿸 수 있게 됐다. 히데오가 태어난 곳은 교토 외곽으로, 한국 사람들이 떠올리는 여행지 교토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주택가였다. 히데오는 그곳을 자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했다. 습한 여름 날씨나 우듬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나무들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것이 정말 자기 기억인지 교토에 대해 보고 들은 뒤 상상해 낸 이미지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덧붙이곤 했다. 교토에서 있었던 일 중 히데오가 확실하게 기억하는 건 모두 나쁜 경험이었다. 이를테면 초등학생 시절 책상 가득 자이니치나 조센진, 총 같은 단어가 적혀 있던 풍경이나 동급생 남자애들이 그의 가방을 걷어차며 드리블 시합을 했던 일, 그를 조롱하려고 반 아이들이 케이팝 노래를 개사해 불렀던 일, 그런 사건들. 한번은 같은 반 아이들에게 얻어맞아 코뼈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그날 저녁에 히데오의 부모는 아들을 위해 나고야로 이주하는 일을 의논했다. 히데오의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앉히고 나고야에서는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란 사실을 숨겨야 한다고 경고했다. 히데오는 그 말에 깜짝 놀라서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말에 동의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히데오가 아는 한, 히데오의 어머니는 자신이 한국인임을 숨기려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어머니는 눈을 내리깔고 남편도 아들도 바라보지 않았다.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계속 살 거니까, 그렇게 하기로 하자.” 그날 밤, 히데오는 코의 통증과 식도로 넘어오는 피, 어머니의 고요한 얼굴과 나고야에서 보낼 새로운 나날의 환영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만 히데오의 부모는 나고야행을 두고 갈팡질팡했고, 히데오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을 거쳐 이혼을 결정했다. 이혼 후 히데오의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경기도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후 히데오는 일본인 아버지와 일본에서의 삶을 철저히 숨겼다. 나에게 고백하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자신의 첫 번째 이름 히데오를 말해 주지 않았다. 내가 히데오를 처음 본 건 연극원 강의실에서였다. 아직 벚꽃도 피지 않은 3월, 나와 히데오를 포함해 여덟 명의 학생이 강의실에 책상을 둥글게 붙여 앉았다. 그해 연극원에서는 입학이 예정된 학생들을 모아 15분 내외의 단막극, 일명 “짤막극”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신설했다. 입학 전에 그룹별로 모여 공연을 준비하고, 3월 개강과 동시에 연극원 소극장에서 공연을 올리는, 이색적인 신입생 환영회라 할 수 있었다. 학보사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신입생 그룹 중 하나를 인터뷰하기로 결정했는데, 그해 들어 나에게 처음

  • 관리자
  • 2025-06-01
그리고 밤과 가을이

그리고 밤과 가을이 김연수 1 지난여름, 정기에게는 세 가지 고민이 있었다. 하나는 눈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길을 걸어갈 때면 날벌레들이 달려드는 것 같아 혼자 손사래를 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기사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머리 뒤쪽에서 번개 같은 게 번쩍이기도 했다. 노안이 찾아온 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안경도 새로 맞췄다. 나이가 들면 서서히 시력이 나빠지리라고만 생각했지, 거기에 더해 전에 없던 것들이 보이는 증상까지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 처지가 되고 보니 책 읽는 일이 힘들어졌다. 평생의 즐거움이었던 독서가 성가신 일이 되면서 생활은 성기어지고 마음은 허술해졌다. 더 오래전, 나이가 들면 활자 같은 건 멀리하고 자연을 벗 삼아 소일하며 세속적 가치관에 물든 마음을 고치리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은근히 노년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런 시절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두 번째는 포항에서 에너지공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딸 민지와의 관계가 점점 멀어진다는 점이었다. 그건 서울과 포항이라는 지리적 거리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년에 집을 새로 구하면서 민지는 아빠인 정기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이사의 이유가 언제부터인가 짝꿍처럼 붙어 다니던 여자 선배 희선과 같이 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됐다. 그는 민지와 희선이 단순한 선후배 사이가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몇 번 딸에게 희선에 대해 물었지만, 민지의 반응은 모호했다. 그러다가 정기는 그 일에 대해 더 묻지 않게 됐다. 한 번은 민지가 “나는 아빠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앞뒤 대화의 맥락으로는 그 일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음에도 정기는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의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지막 고민은, 자신이 담당한 부고란에 누구의 죽음을 다룰 것이냐는 점이었다. 최종 후보는 미국의 SF 소설가와 전 여당 대표, 둘 중 하나였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신문 부고란에 누구를 쓰든 무슨 상관이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기에게는 앞의 두 고민만큼이나 심각한 고민이었다. 앞의 두 고민은 과거의 일에서 비롯된 결과를 수습하는 것이었지만, 세 번째 고민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정기는 생각했다. 과연 소설가냐, 정치인이냐. 정기의 고민은 여름만큼이나 깊어졌다. 2 노트북 화면 너머로 신문사 후배인 은영이 지나가고 있었다. “휴가는 즐거웠어?” 정기가 알은체를 했다. “줄곧 비만 내렸잖아요. 태풍이 온다는데 어떻게 해요?” 잔뜩 낯을 찌푸리며 은영이 말했다. “태풍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으면 가지 말았어야지.” “그런 거 따지고 들면 아무 데도 못 가죠. 태풍 지나갈 때 제주 안 있어 봤죠? 그게 진짜 여름이더라구요. 바람이 몰아치는데, 어휴, 엄청났어요. 그러더니만 휴가 마지막 날이 되

  • 관리자
  • 2025-06-01
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 정기현 단지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펜스와 인접한 아파트 건물들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었으나, 단지 안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어둠의 수심이 깊어져 모든 것이 감추어졌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긴긴 태양 볕 아래 그 흉물스러움을 남김없이 드러내던 여름과는 달리, 겨울의 단지는 어딘가 의뭉스러워 보였다. 이야기를 가득 품은 고성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주택 앞,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재건축 단지라는 별칭이 붙은 아파트 단지는 조합원과 건설사 간 충돌로 공사가 중단되어 짓다 만 아파트 건물들이 2년 동안 그대로였다. 1만 5천 가구를 수용할 수 있다며 대대적으로 착공에 들어갔던 대규모 단지는 2차선 통행로를 중심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문득 그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번 겨울부터였다. 출근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까지 가려면 펜스가 세워지기 전보다 30분씩은 더 둘러 걸어야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아직 잠에서 온전히 깨어나지 못한 상태로 정류장까지 걸을 때면 아파트 중앙 통행로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솔바람, 산들바람 아니고 토네이도에 가까운 세기였다. 물론 토네이도를 직접 겪어 본 적은 없지만···. 사람 하나는 거뜬히 날려 버릴 듯 기세 좋은 바람이었다. 단지 바깥은 바람 한 점 없이 잠잠했으므로, 이는 분명 바람길을 잘못 낸 시공 탓에 불어 대는 건물풍일 터였다. 거센 바람에 펜스가 흔들리며 콰챵- 하는 소리를 낼 때면 살을 에는 새벽녘 추위도 어쩐지 더욱 견디기 어려워져 굳게 잠긴 펜스를 원망하게 되었다. 자물쇠를 열고 단지 가운데 통행로로 다닐 수 있다면 그 끝의 버스 정류장에 금세 도달할 텐데. 아침마다 30분씩은 더 자고 나올 수도 있을 텐데. 내게는 바람쯤이야 잠을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 문제였다. 한파 특보 경보 문자가 알람보다도 일찍 울려 잠을 깨웠던 날, 나는 빌라 현관을 벗어나 오른쪽 인도로 걷는 대신 길 건너 펜스 쪽으로 향했다. 펜스 출입구에는 주먹만 한 자물쇠가 굳게 걸려 있었다. 화풀이라도 하듯 자물쇠를 세게 두 번 당겨 보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자물쇠가 훌렁 풀려 버렸다. 펜스 안쪽으로 손을 쏙 넣어 자물쇠가 걸려 있던 걸쇠를 풀고 출입문을 열자 눈앞에 펼쳐진, 소리로만 접하던 바람의 길. 이용자가 나 혼자뿐이라 길은 실제 너비보다도 광활해 보였다. 건축 자재들, 내부 설비들이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었고 고목처럼 주차되어 있는 승합차도 몇 보였다. 길 가장자리에도 단지로의 진입을 막는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 잠시 길과 나뿐인 세계에 진입한 것만 같았다. 통행로는 야트막한 고갯길이었다. 바람은 듣던 대로 거세었다. 나는 두 손으로 외투를 꼭 여민 채 거센 바람에 맞서 걸었다. 두 발이 동시에 떨어지는 순간 바람에 휘말려 공중으로 붕 떠오를 것 같아 한 발이 떨어지면 다른 한 발은 땅에 꼭 붙어 있도록 의식하며 걸어야 했다. 고갯길의 고

  • 관리자
  • 202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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