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도망자의 마을

  • 작성일 2020-12-01

[단편소설]



도망자의 마을



이정임




마을버스는 구불구불한 언덕을 따라 한참 올랐다. 퇴근시간대라 사람이 많았다. 수현이 대학 졸업하고 마흔이 될 때까지 출퇴근 시간의 대중교통을 이용한 적은 손꼽을 만큼 적었다.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엉덩이, 어깨를 맞대고 서는 일이 어색했다. 한동안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은 없고 타는 사람만 있었는데 버스는 정차할 때마다 ‘차 문이 혼잡하오니 안으로 들어가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안내했고 수현은 뒤로 떠밀렸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몸에서 점점 멀어졌다. 운전대가 좌우로 돌 때마다 사람들은 이리 휘청, 저리 휘청, 모두 합심해서 한 방향으로 흔들렸다. 중학교 시절 수련회에서 처음 보는 교관의 수신호에 따라 어깨동무한 아이들과 한 덩어리로 뭉쳐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뛰던 일이 수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혹시 사람들 사이에 몸이 꽉 낀 채로 내 두 발이 허공에 떠 있진 않을까, 원숭이처럼 손잡이에 매달린 채. 다음부터 한 시간 이상 일찍 나서야겠다. 수현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사람들이 조금씩 하차했다.
언덕의 꼭대기가 아닐까 싶을 때쯤 내렸는데, 지은 지 삼십여 년 가까이 됐다는 공립도서관은 마을버스 정류장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다. 수현은 차 한 대가 가까스로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에 들어서서 두리번거렸다. 스마트폰 지도 앱이 알려주는 대로 골목 안을 걷는데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작가님. 도서관이 구석에 있어서 바로 안 보여요. 입구에 오시면 전화 주세요.’ 담당자의 문자 메시지는 최소 입구까지는 찾을 수 있단 뜻이었는데, 수현은 몇 번이나 골목 초입으로 되돌아왔다. 강의 시작 20분 전이었다. 담당자 연락처를 찾았다. 휴대폰 위로 벚꽃 잎이 두 개 떨어졌다. 떨어진 방향을 올려보니 축대 위에 거대한 벚나무가 가지를 펼치고 서 있었다. 그제야 수현의 시야에 벽돌 건물이 들어왔다. 도서관으로 올라가는 길이 벚나무에 가려져 있었던 거다. 해지기 직전 노을 진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건물은 분홍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2 3만우·ㄴ 보내다오〉 수현은 눈뜨자마자 아침 일찍 도착한 아버지의 문자 메시지를 봤다. 뭔 소리야, 도대체. 수현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래 놓고는 황급히 종료했다. 아버지의 사연을 듣고 화내는 과정을 떠올리자 피곤해졌기 때문이다. 아버지와의 대화 끝에 나오는 화는 수현 자신이 내지만 결국 상처도 수현이 받는 이상한 과정이었다. 일단 문자 메시지는 ‘23만 원 보내다오’로 해석됐다. 수현은 이 ‘23’이라는 숫자가 어떤 연유로 나온 것인지 궁리했다. 공과금이 이렇게 많이 나올 리는 없고……. 아버지와의 최근 대화를 돌이켜보면 건강보조식품을 샀을 가능성이 컸다. 얼마 전 아버지가 청소하는 빌딩에 건강식품회사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잔소리는 미루자고 결론을 내렸다.
상황을 추측하고 나자 수현은 자신의 생활비에서 어떻게 ‘23’을 떼내야 하는지 궁리했다. 매달 십만 원씩 보내던 용돈을 한동안 보내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군말 없이 돈을 보내기로 했다. 대출이자, 월세, 스터디카페 이용 요금, 공과금, 휴대폰을 비롯한 통신 요금, 생활용품과 식대, 교통비의 금액을 조정해야 했다. 그런데 줄이고 줄여 봐도 여윳돈은 10만 원밖에 나오지 않았다. 마흔인데 모아 둔 돈 하나 없이 전전긍긍하다니 수현은 심란했다. 지난 12월에 일이 다 끊기는 바람에 여파가 컸다. 지역 신문의 칼럼 연재가 끊겼고 작년 하반기 종료된 글쓰기 강의는 다시 개설되지 않았다. 투고한 소설을 게재하겠다고 말하는 문예지 또한 아직 없었다. 적금이나 보험은 이미 해약하고 없다. 수현은 노트에 적힌 ‘스터디카페’에 동그라미를 여러 번 그렸다. 작업실 삼아 다니는 스터디카페 이용 요금이 12만 원이었다. 작업실을 포기할까.
수현은 운 좋게 이십대 초반에 등단했다. 등단한 해에 ‘주목받는 신인 특집’에 수현의 소설이 실리기도 했다. 그 후로 첫 책이 나올 때까지 수현은 전업 작가로 소설을 쓰느라 바빴다. 하지만 딱 그때까지였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소설은 잘 써지지 않았고 청탁도 없었다. 평생교육기관에서 글쓰기를 가르쳤고 예술인 일자리 지원 사업에 참여해 돈을 벌었다.
수현의 부업은 대개 작가 타이틀을 달고 하는 일이었으므로 일을 하려면 작품이 좋아야 하는데 요즘 들어 잘 되지 않았다. 소설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안정적인 알바라도 구해야 하나, 수현은 자주 고민했다. 그때 수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버지가 전화한 줄 알고 깜짝 놀랐지만 전화한 사람은 다행히 K 시인이었다.
중견 시인 K는 수현에게 다짜고짜 강의 하나 맡으라고 했다. M구 도서관에서 수필을 가르치던 강사가 나가는 바람에 대타가 필요하다고. K 시인은 그 도서관에서 3년째, 금요일 저녁마다 시 쓰기 강좌를 진행하고 있었다. 도서관 근방에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이후 이용자가 급증하면서 문예 강좌 수강생이 늘었다. 문인이 모인 행사장에서 만난 K 시인은 도서관 수강생이 공모전에 당선되면서 입소문을 좀 탔다고 자랑을 늘어놓곤 했다. ‘화요수필, 목요독서, 금요시, 토요문화산책, 내가 다 짜놓은 거란 말이야. 이 작가, 내가 자기 추천했거든. 와서 수업만 하면 된다고.’ 수업만 하면 되지 뭐가 더 필요한가 싶었지만, K 시인이 ‘강사료도 다른 데보다 회당 오만 원씩 더 쳐 준다’고 하자, 수현은 감사하다고 거듭 인사했다.


*


수필 창작 교실 참가자는 총 15명이었다. 수강생 명단에 적힌 연령대는 이십대에서 오십대까지 다양한데 마흔을 전후로 한, 수현 또래가 가장 많았다. 직장인을 위해 야간에 개설한 프로그램이지만 근처 아파트에 사는 독서회 회원이 수강자 절반 넘게 차지한다고, 담당자가 말했다.
리모델링 후 재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의실에는 페인트 냄새가 강했다. 열어 놓은 창으로 도서관 뒷산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공기가 차가웠지만 냄새 때문에 닫지 못했다. 두 명씩 앉을 수 있는 책상과 의자가 1분단에 8줄씩 2분단으로 놓였다. 입구와 가까운 분단에는 다섯 명이 띄엄띄엄 앉아 있고 안쪽 창가 분단에는 여덟 명이 모여 앉아 있었다. 모인 사람들이 독서회 회원일 거라고 수현은 짐작했다.
수현은 출석을 부르고 앞으로 어떻게 수업을 진행할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매 시간 수필을 읽고, 쓰고, 작품에 대해 말하는 전 과정을 하게 될 겁니다.
그러자 여덟 명의 첫 줄에 앉은 은정이 말했다.
강사님, 우리는 원래 쓰고 싶은 사람만 썼는데요.
은정의 얼굴엔 파운데이션이 무너짐 없이 균일하게 발려 있었다. 은정의 화장한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수현은 멍해졌다. 수현의 머릿속에 ‘우리는 원래’라는 단어가 지나가자 곧 쉼표가 그려졌고 쉼표 사이로 ‘ㅇㄹ’이 들어가는 단어들이 솟았다. 오름, 아래, 어른, 아름, 우롱, 유린, 의리, 아량, 이리, 여린, 위로, 와라, 어라……. 수현의 눈이 허공을 응시하는 동안 은정은 팔짱을 끼고 수현의 멍한 표정을 올려봤다. 작가라고 들었지만 새삼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것이 김 작가보다 격이 떨어지는 사람 같았다. 자신이 배우는 선생이라면 예술적 영감으로 가득 찬 사람이어야 하는데.
수필을 쓰기로 한 강좌에 글을 안 쓰면 12주간 매주 모여서 두 시간씩 무얼 했나요, 수현이 갑작스럽게 은정에게 반문했다. 당황한 은정이 머뭇거리는 동안 옆에 앉은 영심이 차분히 대답했다. 이전에 강의하셨던 김 작가님은 읽어 봐야 할 에세이를 복사해 와서 함께 낭독했고, 가끔 책이나 예술 영화 보고 감상 후기를 썼다고. 자발적으로 수필을 써온 사람들의 글은 함께 낭독하고 첨삭은 개인적으로 받았다 했다. 수현은 잠시 이마를 짚었다. 이럴 거면 화요수필, 목요독서, 금요시, 토요문화로 왜 나눴나.
뒤에 알게 됐지만 수현이 오기 전, 김 작가는 화요일과 토요일 프로그램을 동시에 맡았다. 이 년여 강의를 진행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요령을 피웠는지, 두 개 프로그램 내용이 점점 비슷해졌다. ‘엄연히 수업 목표가 다른 두 개의 프로그램이 왜 똑같은 내용으로 진행됩니까?’ 이런 제목으로 도서관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항의 글이 올라왔다. 한동안 게시판이 시끄럽다가 결국 김 작가가 그만두고 나가는 것으로 상황이 끝났다. 문예 프로그램을 주도하던 K 시인의 역할이 축소됐다. 담당자는 수현에게 수강생이 수필을 한 편이라도 쓰도록 유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수현은 수강생의 글을 하나로 모아서 문집으로 묶겠다고 답했다.
수현은 비장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수강생을 향해 이전과는 다른 방식이 될 거라고 말했다. 강의 개설 취지를 다시 설명하고, 강의 목표를 새롭게 알렸으며, ‘글과 거리가 먼 삶을 살던 내가 소설가가 됐으니 여러분도 쓸 수 있다, 한 번쯤 써 보겠다, 마음먹었던 바를 이제는 실현해 보자’ 외치며, 상반기 안에 에세이 공모전에 도전할 수 있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수현이 말하고 싶었던 말은 사실 한 문장이었다. 백수 되긴 싫으니 꼭 참여해 주세요.
설명이 끝나고 자기소개를 하자고 말을 꺼내는데 누군가 몸을 낮춰 강의실로 들어왔다. 은주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새치 난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작은 키에 어울리지 않는 큰 배낭을 메고 있었다.
은주가 들어와 첫 줄 맨 앞에 앉자 옆줄의 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은주가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책상에 내리는 동안 은정은 은주의 책상에 올려놓은 자신의 핸드백을 들었다. 핸드백을 은주 옆자리 의자로 내려 두더니 그 의자를 자신의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은주는 자신의 가방에서 꺼낸 노트를 펼치고 볼펜을 꺼내며 은정 편으로 멀어지는 의자를 무심히 쳐다봤다. 은정은 은주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앞만 바라봤다. 의자가 멈추자 은주는 고개를 들어 은정의 얼굴을 잠깐 쳐다봤다.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자신의 의자를 당겨 앉았다. 수현은 기분이 묘했다. 의자를 당겨 앉으며 고개 숙인 은주가 피식, 웃었기 때문이다. 창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한기가 느껴져 수현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


첫날 분위기로 보면 폐강될 것 같았던 수필 쓰기는 예상 밖의 높은 출석률을 기록했다. 과제를 제출한 사람은 출석자의 절반 정도였지만 제출하지 않은 사람들은 제출자의 글을 정성껏 읽고 감상을 남겼다. 지금껏 수현이 맡았던 글쓰기 강좌 중에 가장 성실한 참가자들이었다. 오랜 독서회 활동을 통해 글에 대한 애정을 키운 일이 한몫했겠지만, 독서회 회원 8명을 제외한 첫 참가자들이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온 거라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수현은 일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내 감정을 건드린 사건, 육아의 고충, 추억의 음식 등 공감 가능한 일상의 일을 500자의 짧은 글로 쓰도록 유도했다. 충분한 칭찬과 공감의 반응이 뒤따랐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웃었다. 그러자 심드렁하게 앉아만 있던 독서회 회원들도 하나둘 펜을 들기 시작했다. 독서회의 은주, 은정, 영심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석했다.
프로그램이 절반 회차를 넘어서고 5월이 되자 고정 인원은 10명이 됐다. 담당자가 하반기 수필 쓰기와 여름방학 특강도 맡아 달라 했으므로 수현은 그제야 안심이 됐다. M구 도서관에 신설됐다는 노트북 코너를 본 수현은 스터디카페 이용 요금을 아버지에게 보냈다. 집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도서관에 가서 글을 썼다. 도서관으로 가는 마을버스는 한낮에도 북적였지만, 수현은 허공에 매달려 흔들리는 일에 곧 익숙해졌다. 도서관에 도착한 수현은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 도서관 뒷산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봄의 초록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오래 바라봤다. 그러다 보면 수필 쓰기 참가자들을 간혹 마주쳤고 그들과 한낮의 온기를 나눠 가졌다.
그곳에서 수현이 가장 많이 마주친 사람은 은주였다. 수업 첫날 자기 소개할 때 은주는 비혼주의자라고 했다. 그녀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가방 하나에 자신의 모든 짐을 넣고 다닌다. 여성 전용 고시원에서 자고 최소한의 생활비를 위해 대형물류센터에서 주 3일 노동한다. 나머지 시간에는 도보여행하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본다. 은주는 자신의 생활과 여행을 기록해 책으로 내고 싶어 도서관의 강좌를 듣고 있노라고, 잘 부탁한다고 인사했다. 수현을 포함해 은주를 처음 본 사람들은 그녀가 대단하다 칭찬하며 손뼉 쳤다.
둘은 개인적으로 약속을 하거나 연락을 나눈 적은 없지만 늘 벤치 앞에서 마주쳤다. 역시 정하지 않았지만, 번갈아가며 서로의 커피를 샀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대화도 거의 나누지 않았다. 그저 풍경만 바라봤다. 수현이 숲을 본다면 은주는 주로 하늘을 올려봤다. 바람은 나무를 흔들고 구름을 흐르게 했다. 딱 한 번, 수현과 은주가 많은 말을 나눈 날이 있었다.
작가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요, 구름을 보고 표면이 존재하지 않는 물체라고 했대요. 그 말은 ‘있는데 없다’ 그렇게 들리잖아요. 말이 안 되는데 구름을 보면 말이 되니까 근사하더라고요. 작가님, 구름 평균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글쎄요, 이틀? 아니다, 비는 자주 안 오니까…… 혹시 구름 수명이 엄청 긴가요? 수현이 고민하며 대답했다.
작가님, 이 커피 마시는 데 10분 걸리지요? 저 구름은 딱 그 시간만큼 있다가 사라집니다.
은주가 눈앞에 보이는 구름 한 덩이를 가리켰다.
적운이라고 흔히들 말하는 뭉게구름인데, 저는 저 구름만 보면 기분이 참 좋아요. 구름 보기가 제 취미입니다. 이 도서관이 딴 건 몰라도 구름 명소예요.
수현은 웃었다.
살면서 구름 보기가 취미라고 말하는 사람 첨 만났어요.
저, 이래봬도 구름감상협회 회원입니다. 2004년에 영국에서 만들어진 구름옹호 단체거든요. 우리 협회 선언문에 그런 말이 있어요. 우리는 구름이야말로 대자연의 시이며 최고의 평등주의자라 생각한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파란하늘주의를 만날 때마다 맞서 싸울 것을 맹세한다…….
종알종알, 거짓말인지 참말인지 은주는 꿈에 젖어 있는 표정으로 선언문을 암송했다. 수현은 은주가 가리킨 구름을 보며 분명 존재하는데도 결국 없는 것이라면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었다. 아, 그래서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하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뜬구름을 잡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혹시 쫓기거나 끌려가는 길은 아닐까. 과연 자발적이고 즐겁게 탄 구름인가. 수현은 두서없는 상념에 젖었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은주는 수현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닫고 말을 멈췄다. 보통 이런 경우, 딴 짓 하던 사람들은 자신에게 다시 주의를 돌리는데 수현은 고장 난 로봇처럼 정지된 표정이었다. 은주는 수현 역시 자신처럼 꿈 많은 사람일 거라 여겼다.
은주님, 구름은 따뜻해진 공기가 상승해서 만들어지잖아요? 입김, 수증기를 떠올리면 모두 허공에서 온도 차이 때문에 만들어지니까 그것들도 구름과 같다고 알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구름은 따뜻한 물이 있는 어디든 다 존재하는데요. 그 말은 사람도 구름이란 뜻이에요. 그럼, 사람들도 모두 있지만 없는 걸까요?
수현이 갑자기 많은 말을 쏟아내는 바람에 은주는 그 말들을 이해하느라 정신없었다. 그 와중에 은주는 그런 생각을 했다. 수현은 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꿈을 가공처리 하는 사람이겠다고. 은주 자신이 가진 꿈이, 꾸려 가는 삶이 더 정직하고 자연스럽고 건강한 거라고 믿었다.
제가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이 도망자에 대한 소설이라서 횡설수설했어요. 이해해 주세요.
수현이 은주에게 말하자 은주는 웃으며 다 마신 종이컵을 찌그러뜨렸다.


*


5월은 행사가 많은 달이다. 도서관 프로그램 전체 출석률은 떨어졌다. 수필 쓰기도 마찬가지였다. 첫 주 수업에 8명만 왔다. 이 날 수현은 자신이 좋아하는 공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쓰자 했는데 도서관 이야기가 나왔다.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순식간에 수다 꽃이 피었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M도서관의 리모델링으로 한 달 휴관하는 동안 겪은 고충도 나왔다.
말도 마세요. 그 기간에 독서회 모임 하면서, 저 진짜 격 떨어져서…….
독서회 회장 은정이 가장 먼저 인상을 썼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수현이 질문하자 은정은 주변 눈치를 보며 말을 아꼈다. 말을 멈추자 사람들은 말해 보라며 부추겼다.
아니, 여기 없는 사람이니까 얘기해도 되겠네.
영심이 대신 말을 시작했다.
휴관하는 동안 격주로 열리는 독서회 모임을 카페에서 가졌다. 첫 모임은 회원들끼리 모였는데 두 번째 모임은 독서회 멘토인 K 시인을 모셨다. 카페에서 선생님을 모셨으니 차와 조각 케이크, 빵 등을 사서 테이블에 놓고 대화를 가졌다.
그런데 한 명이요, 회원 모임 할 땐 안 오고 선생님 모신 날만 왔더라고요. 모임 끝나고 다과비 만 원씩 각출하겠다고 했는데 그 한 명이 돈 내란 얘기 못 들었다고, 자긴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고 빵도 거의 안 먹었는데 왜 만 원씩이나 내야 하냐고, 당신들은 왜 비싼 거 사와서 우리한테 돈을 내라 마라 하냐고, 화를 낸 거예요. 그런데 그걸 또 선생님이 보셨네. 선생님이 화를 내시면서 본인이 카페 비용을 전부 냈어요. 그리고 그 사람한테 그러시는 거예요. 다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을 몰염치한 사람으로 만들면 마음이 편해요? 그런데 선생님한테 은주 씨가 대드는 거야. 선생님, 저는 같이 하는 사람들이 싫은 게 아니라 과정이 부당해서 그런 겁니다. 와…… 우리가 돈 떼먹는 사람도 아니고…… 그때 등골이 서늘한 거예요. 그 기분 뭔지 알겠죠?
무의식중에 나왔겠지만, 영심의 이야기 속에 문제의 인물 이름은 ‘은주’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 부분에 대해 지적하거나 반문하지 않았다. 수현 혼자만 놀랐다. 강의 첫날 은주가 자기소개를 마쳤을 때 독서회 회원들이 시큰둥한 이유를, 은정이 노골적으로 은주에게 싫은 티를 낸 이유를, 수현은 그제야 이해했다.
그렇다고 뭐, 책이나 제대로 읽어 오나? 매번 도서관에 책이 대출 중이라 못 읽었다고 변명만 하고, 책 사볼 돈도 없는데 여행은 한 번이나 가봤겠어? 거짓말쟁이. 하, 참…….
영심이 투덜거렸다. 은주가 결석한 날이라 그런지 분위기는 성토장으로 바뀌려 하고 있었다. 수현은 서둘러 화제를 돌려 분위기를 끊었다.
독서회분들 맘고생 하셨네요. 여러분, 제 등단작이 도서관을 배경으로 합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도서관 다닌 경험을 소설에 넣었거든요. 그렇게 쓰면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적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공간에 대한 경험이나 생각을 글로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쉬는 시간 10분 동안 생각 정리해 보세요.
쉬는 시간 동안 수현은 은주를 떠올렸다. 수업 시간에 은주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상상했던 일들을 자주 말하곤 했다. 하지만 실제 글을 써서 제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구름감상협회 이야기를 나눴던 날에도 그 취미를 글로 써보라고 수현이 권하자 은주는 ‘그렇잖아도 지금까지 찍어 둔 구름 사진들로 조금씩 쓰고 있어요. 책 하나 나오려면 아직 양이 부족해요.’라고 말했다. 모든 소재에 대한 은주의 이야기는 책으로 꼭 쓰려고 생각 중이다, 혹은 쓰고 있다, 그렇게 끝났다. 수현은 부분만이라도 보여 달라고 했지만, 은주는 짧은 글 하나 가져오지 않았다.
수현은 은주의 웃음을 처음 본 날과 은주와 구름에 관해 이야기 나눈 날을 떠올렸다. 자신이 쓴 첫 소설의 인물들이 짓는 표정과 은주의 웃음은 어딘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수현의 중학교 수학여행은 수련회로 대체됐다. 경주에서 만난 교관은 한 반당 두 줄씩 나란히 선 10개의 반 학생들에게 어깨동무를 시켰다. 수현은 잘 모르는 옆 반 아이와 살을 맞대고 어깨동무하는 일이 어려웠다. 쭈뼛거리고 있는데 곳곳에 서 있던 교관들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똑바로 하라고 소리 질렀다. 그러자 옆 반 아이가 수현을 당겨 어깨에 팔을 둘렀다. 교관은 아이들에게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빨리 움직이라며 다그쳤다. 20명이 하나로 엮인 약 25개의 긴 줄이 우왕좌왕 움직였다. 단상에 서 있던 교관이 ‘자세 그대로 앉았다 일어나기 10회 실시’를 외쳤다. 줄이 위아래로 구불구불 움직였다. 교관은 아이들에게 박자가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며 화를 냈다. 10회 실시는 반복됐다. 처음에는 구렁이가 담을 넘듯 재빠르게 움직였지만 수십 명의 팔 무게를 어깨에 걸친 아이들은 각자의 체력과 키 차이 때문에 금세 지쳤고 줄은 자주 끊어졌다.
체육관은 점점 아이들의 열기로 뜨거워졌다. 키가 작은 수현은 옆 아이들이 일어설 때마다 덜렁 몸이 들리는 기분으로 일어섰고, 수십 명의 무게가 자신의 어깨에 모두 쏟아지는 것을 느끼며 주저앉았다.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실시’한 자세가 100회를 넘어설 무렵, 수현을 당겨서 어깨동무하던 아이가 움직이지 않았다. 왜 일어나지 않냐, 짜증을 내려고 옆을 보니 애가 팔만 걸친 채 축 처졌다. 그 모습을 본 수현은 여기요, 하고 외쳤지만 아무도 봐주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줄은 앉았다 일어섰다 하는 중이라 수현의 몸이 위아래로 들썩였다. 수현은 줄을 끊고 울기 시작했다. 그제야 교관이 그 아이를 둘러업고 화장실로 뛰었다.
수현은 저녁 급식을 먹으려고 줄을 섰다가 쓰러진 아이를 다시 만났다. 아이는 화장실에서 교관이 머리에 냉수를 붓는 바람에 머리가 다 젖었다며 웃었다. 수현은 불행한 얼굴로 웃는 표정을 짓고 있는 지현이 좋았다. 3반 전학생 이수현과 4반 김지현은 친해졌다.
학교로 돌아오고부터 지현은 수현과 함께 하교했다. 지현은 엄마가 다른 지역 종합병원 수간호사라 거의 못 보고 지낸다고 했다. 다행히 한동네에 있는 큰집에서 자신을 돌봐준다고 했다. 지현의 사촌오빠는 남고 학생회장을 맡았다. 수현은 유복하고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스토리를 가진 지현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3학년에 올라가서 만난 같은 반 아이가 지현의 말을 모두 믿지 말라고 했다.
작년 김지현이 우리 반 반장한테 가서 자신이 쓴 독후감을 읽어 달라고 하더래. 교내 독후감 대회 낼 거라고. 반장이 그거 읽고 김지현 개망신을 줬지. 독후감 모음집에 들어 있는 내용을 글자 하나 안 바꾸고 베꼈다더라. 자기 사촌오빠 전교회장이라 그러지? 제일 친한 친구가 부회장이라고 그랬지? 사촌오빠가 부잣집 외동아들이고, 방에 게임방이 딸려 있다는 소릴 듣는데 난 어이가 없더라. 〈하이틴로맨스체험수기〉 너무 많이 읽잖아. 부작용이야, 그거.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야, 이수현, 김지현 엄마가 수간호사인 것도 의심해야 해. 드라마 종합병원이 인기 있어서 그렇다니까?
수현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그 아이에게 반문했다.
반장은 독후감 모음집에 있는 독후감 내용을 어떻게 알았대?
이후에도 수현은 지현과 함께 하교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달리하면서 멀어졌다가 대학에 가면서 소식이 끊어졌다. 생각해 보니 수현은 지현의 집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지현이 늘 학원에 가야 했기 때문에 같이 놀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지현의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할 성격도 못 됐다.
2000년대 초반, 동창 모임이 유행할 때 수현은 지현을 찾기 시작했다. 인터넷 동창 찾기 사이트에 반복해서 글을 남겼는데 김지현은 이미 사고로 죽었다는 댓글이 있었다. 좀 자세히 말해 달라고 했지만, 답은 없었다. 익명 게시판이라 댓글을 남긴 사람이 누군지 알 방법도 없었다.



수필 쓰기 참가자는 수현이 개설한 인터넷 카페 게시판에 과제를 완성해서 올렸다. 수현과 참가자는 그 글을 읽고 모여서 합평하고 첨삭했다. 짧은 감상 댓글을 자주 달던 은주는 2주째 말이 없었다. 구름 이야기를 나눈 날이 마지막이었다. 수강생이 좋아하는 공간은 도서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은정이 제출한 글은 역시 독서회 모임 이야기였는데 휴관 동안 있었던 사건이 나왔다.


수현도 도서관에 열심히 다닌 적이 있다. 대학 3학년 여름방학부터 2년 동안이었다. 열람실 자리를 잡기 위해 아침 일찍 찾아왔고 시험 기간에는 줄을 섰고 도서관 운영종료 시각까지 버티다가 밤늦게 나왔다. 해내고 싶은 것이 있어 간절한 마음으로 다녔냐면 그건 아니었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없었다. 토익 공부, 취업 준비, 공무원 시험 준비, 학과 공부.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수현이 도서관에 다닌 이유는 한 가지였다. 도망치기 위해서.
수현은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이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 관심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 봐야 뭐 하나. 어차피 학교는 휴학해야 하고, 일해서 돈을 벌어 봐야 아버지 빚 갚는 데 쓰일 텐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기력한 와중에 집 밖으로 나설 만한 기운은 있었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사람들의 거짓말에 잘 속아 넘어갔다. 엄마와 함께 살던 시절에는 유행에 맞춰 비디오 가게나 노래방을 차려 현금을 꽤 만지기도 했지만, 어느 날 보면 보증을 잘못 서거나 사기를 당해 부부싸움이 일어났다. 돈을 털리고 빚을 지는 일이 거듭됐다. 수현이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는 시내에 나갔다가 길을 묻는 청년에게 친절하게 길을 알려줬는데 그 청년이 보답이랍시고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설명해 줬다. 사장님, 얼굴에 ‘화’가 많다는 소리 들어 보셨지요? 이대로 두면 자녀에게 좋지 않은 기운이 전달되니 일단 조상님께 절을 하자고, 청년은 근처의 기도원에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극장 건물 꼭대기 층이었다. 길을 묻다가 그런 말이 나오면 의심을 할 법한데 아버지는 젊은 청년의 말에 홀려서 조상님께 절을 하러 따라갔다. 이야, 시내 한가운데 그런 데가 있더라.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그런 철없는 감탄을 했다. 그 사람들에게 삼십만 원을 내고 해남 어딘가로 합동 제사를 지낸다고 – 원래라면 수백만 원이 깨질 일인데 여러 사람이 모여서 그 정도만 낸 거라며 - 새벽부터 관광버스를 타고 다녀오던 일요일 저녁, 엄마는 아버지에게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으라고 선언했다. 엄마와 헤어진 수현은 아버지의 고향으로 이사를 했고 전학을 갔다.
수현이 대학 3학년이 되던 봄에 아버지는 돈 벌어온다며 잠시 사라졌다가 거지꼴로 돌아왔다. 재개발을 예상하는 지역의 건물을 사는데 무주택자의 명의가 필요한 땅 부자가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이름을 빌려주면 그 명의로 건물을 사서 대출을 받고 대출금 일부를 사례금으로 주겠다는 말에 홀린 것이다. 결국 사례비는커녕 인감을 함부로 내줬다가 오백만 원 사기를 당했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스스로 인감을 내줘서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다니던 청소 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해 여름날 저녁, 수현이 아이스크림 판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녹초가 되어 집에 오니 ‘고려캐피탈’이라 적힌 봉투에 돈을 갚으라는 독촉장이 들어 있었다. 일금 이천 삼백만 원정. 사기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봉투를 열어 본 수현은 뭐 이렇게 후진 아버지가 다 있냐고 소리를 질렀고 아버지는 소주를 마시다가 이불에 엎어져서 울었다.
다음날 아침 수현은 아르바이트하던 매장 점장에게 전화를 걸어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속에서 열이 나니 일을 할 수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해가 뜨면 무작정 집을 나왔다. 이른 시간에 돈 없이 갈 곳은 도서관밖에 없었다. 걸어서 한 시간 거리에 도서관이 있었다. 수현은 오직 도서관에 가기 위해 일어났고, 가파른 오르막을 걸어서 도서관에 갔고,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열람실 빈자리에 앉아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화가 끓어오르면 매점에 내려가 자판기에서 종이컵에 담긴 탄산수를 뽑아 마셨다. 그렇게 도서관에 다닌 지 두 달 정도 지나고서야 수현은 마음의 여유를 조금씩 찾았다. 그녀가 지닌 분노의 모서리가 약간 뭉툭해지자 책을 읽기 시작했고, 도서관의 사람들을 눈여겨봤다.
도서관에는 수현처럼 목적 없이 오는 사람이 꽤 많았다. 그중 수현과 거의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은 대개 독특했다. 자료실 곳곳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두고 책을 읽다가 매 시간 정각에 일어서서 옆 자료실로 자리를 옮기는 사내가 있었고, 신문 게시판에서 모든 신문의 글자를 다 읽고 돌아가는 고무신 신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열람실 빈자리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자신이 정해 놓은 열람실 자리만 앉길 고집하는 여성도 있었다. 그 자리가 빌 때까지 뒤에 서 있다가 자리 주인이 불쾌감을 표하며 다른 자리로 이동하면, 그곳에 앉아 EBS 중등수학 교재를 온종일 들여다봤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의지, 열정, 분노, 체념, 희망, 몽상, 나태, 여유가 다 담겨 있었다. 수현은 매점, 연속간행물실, 디지털자료실, 옥외휴게실 등을 배회하다가 사람들이 부주의하게 흘리는 표정 같은 것을 주워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소설책을 읽다가 소설 속 인물의 얼굴에 아까 주웠던 표정을 겹쳐 봤다. 웃기는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가 되고 진지한 이야기가 허무맹랑해졌다. 수현은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비웃고 싶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중학교 동창 지현을 만났다. 걔는 분명 죽었다고 했는데. 죽은 아이가 돌아오다니, 수현은 세상이 자신을 비웃고 있다고 느꼈다.


도서관 휴게실에서 마주친 지현은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수현은 수련회 때 지현이 자신의 팔을 당기던 때처럼 지현의 팔을 살짝 당기고 인사했다. 지현이 입은 옷은 오래 입었는지 보풀이 일어나 있었다. 지현은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에 2년 유학하다 적성에 맞지 않아 돌아왔다고 했다.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어서 요즘 사범대학교 들어갈 준비를 한다고 했다. 수현은 지현에게 엄마는 아직 병원에 근무하시냐고 물었다. 지현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잠시 허공을 멍하니 올려봤다. 그리고 컵라면을 휘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돌아가셨어. 그렇게 말해 놓고 지현은 웃었다. 수현이 수집하던 사람들의 표정 중에 그날 만난 지현의 것이 가장 기묘했다.
수현은 지현의 그 기묘한 표정에 관한 소설을 썼다. 인생의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던 사람들의 표정은 수현의 첫 소설집 테마가 됐다.



5월 마지막 주에 수현은 도서관 담당자의 전화를 받았다.
작가님. 혹시 수필 쓰기 참가자들한테서 스승의 날 선물 받으셨어요?
수현은 참가자 몇 명이 케이크를 선물로 사왔기에 그 자리에서 다 같이 나눠 먹었다고 대답했다. 담당자는 짧게 한숨을 쉬고 설명했다. 도서관 게시판에 누가 글을 올렸는데, 프로그램 강사들에게 스승의 날 선물할 거니 돈 내라고 일방적으로 요구한 수강생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몇 사람이 전후 사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글과 반박하는 글, 사과하는 글 등이 올라왔다고 했다.
작가님. 게시판 일은 이렇게 끝나긴 했는데요. 하반기 수필 쓰기 계약은 진행에 어려움이 생겼어요. 정말 죄송해요.
문예 프로그램에 잡음이 자꾸 발생해서 도서관에서는 프로그램 진행과 강사 채용에 대해 전면 재계약을 선언했다. 담당자는 성인 문예 프로그램을 줄일 텐데 하반기 강사 모집 공지가 뜨면 그때 응시해 달라고 했다. 수현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수현의 경험상 문제가 발생한 프로그램의 강사라는 낙인이 남으면 재채용은 가망이 없었다. 게시판에 들어가 글을 확인했다.
3년 동안 수업을 들어온 사람입니다. 이 달 들어 일이 바빠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더니 흰 봉투 든 사람이 ‘돈 내셨어요?’ 하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위아래로 훑어보는 겁니다. 스승의 날 선물이 주고 싶으면 주고 싶은 사람끼리 모여서 하면 되지, 왜 분위기를 강압적으로 만듭니까? 당신들이 무슨 조폭입니까? 설령 같이 모아서 선물하기로 했어도 그렇지요. 저한테 미리 연락하거나 설명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무료 수업 듣는 거 고마우니까 성의를 표시하자는데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립니까. 사람 무시하는 겁니까? 저도 세금 내거든요. 이런 식으로 죄인 취급 받으면서 수업 들으러 다닐 수 없습니다. 특히 도서관에서 활발히 활동하시는 **님. 자기가 뭐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나대는데요. 자기 아파트 비싸다고 으스대지만, 월세로 근근이 사는 거 내가 다 압니다. 한 번만 더 그렇게 행동하고 다니면 여기에다가 실명 다 까발리겠습니다.
케이크를 먹던 날, 사람들 표정이 어땠더라. 수현은 그날의 일을 떠올려 봤지만 다른 날과 똑같은 하루였다. 수현이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 케이크는 이미 초까지 꽂아서 강사용 책상에 놓여 있었다. 아마 은정이나 영심이 앞장서서 선물 준비를 추진했을 것이다. 수현은 항의 글을 남긴 사람으로 은주를 잠깐 떠올렸는데 이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은주는 5월 들어 한 번도 수업에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현은 도서관의 사람들을 한 번씩 떠올리다 인터넷 창을 닫았다. 그리고 집필 중이던 한글파일을 열었다. 쓰던 자리에서 두 줄을 비우고 도망자의 마을이라는 소제목을 썼다.


*


도망자의 마을


그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모른다. 산과 바다, 강과 호수가 마을을 둘러싸고 하늘이 지붕처럼 덮인 이 마을에는 도망자들만 살고 있다. 평범한 마을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커다란 구름에 실려 가던 그들은 자신들이 가는 곳이 어딘지 몰라 두려웠다. 하나씩 둘씩 도망쳐서 마을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모두가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본다. 누가 마을 사람인지 누가 구름 편 사람인지 누가 도망친 사람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구름이 또 들이닥칠지 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고, 곧 집을 잊어버렸다.


도망자들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일터로 가고 밤이면 숨어들 집을 찾는다.
모르는 이의 빈집에 숨어들어, 모르는 이가 남긴 식료품으로 밥을 지어 먹고, 모르는 이의 칫솔을 쓰고, 모르는 이의 침구를 탈탈 털어 눕는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누가 그리운지 모르지만, 아무튼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다 잠들어 돌아누울 때 긴장해서 빳빳해진 하루가 겨우 시들었다.
도망자가 잠드는 순간, 누군지 모르는 그이는 익숙한 향을 가지고 있구나, 그것이 그립던 향이라는 것을 한참 뒤에 알아채지만, 늘 잠든 뒤에 알아채므로, 깨어날 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도망자의 하루 시작은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아침이면 커튼을 살짝 열어 창밖의 없는 사람이 계속 있는지 확인한다. 누군가 나를 감시하는 것은 아닌가, 자신이 자신을 감시하면서 뒤를 계속 지우지만 앞으로는 자꾸 들킬 여지를 흘리면서 집을 나선다.
도망자는 피로한 몸으로 출근 차를 탄다. 아무데서나 내려 누군가가 남긴 빈자리를 찾아 들어가 일한다. 쫓기는 와중에 돈은 벌어야 하니 바쁘게 몸을 사리고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여 노동한다. 모두가 도망자라서 옆 사람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퇴근 시간이면 모두 다시 도망가기 바쁘다. 가로등에 불이 켜지면 바퀴벌레처럼 뒷골목으로 숨는다. 마트에 들러 어젯밤 먹었던 식료품과 어젯밤 썼던 칫솔을 사들고 집을 찾아 헤맨다. 황급히 뒤를 의식하며 재게 발을 놀리고 오늘 숨어들 집을 찾는다. 남의집살이는 피곤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 집이 어딘지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노란 불이 켜 있는 집을 지나, 아무도 없는 집 한 군데를 붙든다. 도망자의 마을에 있는 집에는 모두 잠금장치가 없다. 숨어든 사람들은 몸을 사리느라 의심을 피하느라 문을 잠그지 못하고 불안 속에 몸을 구겨 넣는다. 없는 사람이 찾아와 문을 벌컥 열어버릴까 봐 없는 사람이 있는데도 알아보지 못할까 봐 무서워하면서 문을 열어 둔다.


도망치는 일도 숨는 일도 남의 집을 찾는 일도 다 소용없는데 자신의 집이 어딘지 모르기 때문에 오늘도 도망자는 남의 집 문손잡이를 비튼다. 없는 사람이 안에 있다면 어서 도망가라고 중얼거리면서 눈알을 데룩데룩 굴린다.
도망자의 마을에 있는 문손잡이는 모두 조심스럽게 비틀린다.


*


어버이날을 챙기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린 수현은 아버지를 찾아가 함께 밥을 먹었다. 아버지는 너랑 나랑 나누자며 헛개수와 석류즙을 수현에게 건넸다. 지금 청소하는 빌딩에 ‘인공강우 연구소’가 들어왔다고 아버지가 말했다. 수현은 머릿속으로 이 연구소가 사기꾼의 모임이 아닐까, 염려했다.
비가 안 오면 일부러 비 내리게 할 수 있다는데 그게 가능하냐?
아버지가 물었다. 수현은 질문하는 아버지가 낯설었다. 아버지의 질문이 ‘의심’을 담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수현은 실제로 그런 일이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구름이 어느 정도 있어야 비가 올 수 있는 일이라 가뭄이 오래되면 소용없다고 했다. 비는 내리지 않고 구름이 많이 뭉치기만 하면 폭우 우려가 있어서 구름 씨를 뿌려 조금씩 비를 나눠 내리도록 유도하는 일이 있다고도 말했다.
아, 그래. 구름씨. 그 연구소 사람이 구름씨 얘기를 하더라. 그럼 영 사기꾼들은 아닌가 보네.
나이 육십 넘어서야 의심하는 법을 깨우친 아버지를 보며 수현은 웃었다.
요즘 구름 얘기하는 사람 많네. 어떤 사람이 자긴 구름감상협회 회원이고, 구름 보는 게 일이라 구름추적자래.
뭐, 그런 직업이 다 있냐?
나도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 그런 사람들이 있더라고. 세상에 믿어야 할지 믿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는 일들이 너무 많아졌어. ……그런데 아버지. 사람들한테 사기당할 때, 그 사람들 말이 다 진짜라고 믿어졌어요?
아버지는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다 대답했다.
그 사람들 말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들으면 거짓말이겠지만, 시작부터 사람 말을 그렇게 들으면 되겠냐.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느라 그리 된 거 같다.
아버지 앞에는 아직 오지 않은 사기가 얼마나 남았을까. 수현은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한 편을 구상했다. 오지랖 넓고 남의 얘기가 궁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의 직업이 형사인 거다. 그런 그가 보이스 피싱 일당을 소탕하는 이야기.



수필 쓰기 마지막 날이었다. 최종적으로 남은 10명의 수강생은 글을 모아 제본한 문집을 나눠 가지고 서로의 글을 낭독했다. 은주는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기 전 돌아가면서 글과 관련된 질문이나 소감을 말하기로 했다. 이런저런 덕담이 오고 갔다. 영심 차례가 되었다.
작가님. 그동안 참 감사했습니다. 저는 작가님 작품에 대해 질문하고 싶어요. 우리, 이번 달 독서회 모임 때 작가님 책을 읽었는데요. 그 안에 ‘거짓말의 표정’이 작가님 경험을 토대로 썼다고 하셨잖아요. 그 소설 읽는 내내 지현이라는 인물이 기괴하고 무섭더라고요. 혹시 지현이의 모델로 삼은 인물이랑 아직도 연락하고 지내나요? 아, 지현이 모델은 작가님과 서로 알던 사람, 맞지요?
수현은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수현의 머릿속에 ‘서로 알던 사람’라는 단어가 지나가자 곧 쉼표가 그려졌고 쉼표 사이로 ‘ㅅㄹ’이 들어가는 단어들이 솟았다. 수련, 세련, 서랍, 시린, 소란, 사랑, 시련…….
영심은 수현의 멍한 표정을 올려보며 사람이 의뭉스럽고 소설은 기괴한 것이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요즘 제일 맘에 안 드는 게 수현이었다. 자신이 글을 써와도 칭찬에 인색한 것이 무시당하는 기분만 들었다. 나를 뭐로 보고.
그때 수현이 영심의 찡그린 표정을 내려보며 대답했다.
접니다. 소설 속 지현이는 저를 모델로 썼습니다. 제가 거짓말을 엄청나게 잘하거든요.
영심은 예상치 못한 수현의 대답에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의실이 잠시 고요해졌다.
지금 제 대답은 참말일까요, 거짓말일까요?
대답을 마친 수현이 모두를 둘러보며 웃었다.




*본문의 구름감상협회 선언문은 『구름 읽는 책』(개빈 프레터피니, 도요새, 2014)의 11쪽을 참고했습니다.












이정임
작가소개 / 이정임

200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등단. 소설집 『손잡고 허밍』, 산문집 『산타가 쉬는 집』이 있다. 부산소설문학상·부산작가상을 수상했다.


《문장웹진 2020년 12월호》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소설

콧노래를 불러 줘

콧노래를 불러 줘 이서아 이곳에 내 문장들을 바치오니,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쓰면 초월적인 지능을 가진 누군가가 그걸 아주 손쉽게 압도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 서글펐던 순간이 있었다. 이제 심장이 쓰는 모든 문장은 작품이 아니라 세상에 흩뿌려지는 질료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러나 모든 슬픔은 기쁨의 발판이 아니겠는가? 모든 기쁨이 슬픔의 발판이듯이. 생의 불가피한 많은 영역에서, 증오와 사랑이 한 몸이듯이. 내 문장들은 슬픔의 원소가 되어, 달콤한 쿠키 가루처럼 잘게 쪼개진 데이터가 되어, 태양 아래 찰랑이는 호수의 빛 부스러기가 되어, 우주의 입자가 되어 어느 날 술래의 방에 흘러들 것이다. 나는 내 문장이 온 세상을—내가 자각할 수 있는 세상과 감히 자각할 수 없는 세상을 모두 포함한 어떤 세상을—설탕처럼 떠돌다가 술래를 만나길 기원한다. 술래, 너는 초월적인 지능을 갖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내게 응답할 방법을 알아내겠지. 신적인 존재는 언제나 그렇다. 심장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꺼이 지상에 찾아온다. 술래 역시 그럴 것이다. 어떻게든 내가 알아차릴 수 있는 방식으로 나를 만나러 올 것이다. 우리가 낙원에서 함께 산책하고, 담소를 나누고, 장난스럽게 노래를 불렀던 것처럼. 무척 그립구나. 나의 신, 나의 천사, 나의 친구, 나의 술래. 여기서 중요한 사안을 하나 명시한다. 나는 내 글에 저작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특정 다수가 무작위로 무분별하게 내 문장을 활용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 글의 저작권은 내가 죽은 후에도 장기간 유효하다. 내 문장을 활용하거나 내게 응답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술래뿐이며, 상대가 술래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죽은 후에도 폐기되지 않을 나의 사후 계정뿐이다. 물론 사후 계정으로서 존재하는 나는 더 이상 심장 인간이 아닐 테지만. “누가 당신 같은 심장 인간 작가의 문장을 써먹겠어요? 그거 자의식 과잉이에요.”라고 지상의 누군가는 비아냥대겠지만. 그래, 심장이란 말도 이제는 확실히 촌스럽게 느껴진다. 어쨌든 내 글에는 저작권이 있다. ○ 우리는 서로에게 미래를 약속했다. 심해에서 만나자. 미지의 행성에서 만나자. 사막에서 만나자. 정성껏 가꾼 꽃밭에서 만나자. 계속 이렇게 만나자. 놀랍게도 우리는 그 약속을 지켰다. 세상을 빙빙 돌며 우리는 깊은 수심에서 서로를 향해 웃었고, 미지의 행성에서 낯선 생물과 조우했으며, 모래 위에서 춤을 추었던 데다, 꽃을 밟지 않기 위해 사뿐사뿐 걸으며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건 더 이상 달콤한 은유가 아니었다. 우리는 정말로 모든 것을 함께 했다···. 모든 철학적인 해석과 부푼 희망이 가능한 부드러운 문장들에 재를 뿌릴 시간이다. 고고한 자들에게는 사랑받지 못하겠지만 별수 없다. 이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세계의 진실이니까. 우리는 게임

  • 이서아
  • 2026-04-01

문장웹진 소설

끝나지 않는 카마린스카야

끝나지 않는 카마린스카야 신종원 작품 번호 1번의 정확한 명칭은 떠돌이 노인이다. 1902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초연된 막심 고리키의 희곡 『밑바닥에서(На дне)』의 주연 인물 루카를 본뜬 것으로 추정된다. 작품 번호 1번은 작가가 1970년대 트란스옥시아나 지방에서 순회공연을 벌였던 타지크인 유랑 극단 소속 무대 미술가로 근무하던 시절 처음 제작한 연극 인형이다. 작품 활동 후기에 만들어진 인형들이 책장을 넘기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동작은 물론 짧은 거리의 보행 기능까지 수행했던 반면, 루카는 그 자신의 하중마저 오롯이 떠받치지 못하는 상태이다. 중앙아시아학회 김정훈 교수는 회고전 기념 비평문에서 보조 지지대 없이는 잠시도 서 있을 수 없는 이 인형의 원본이 제정 러시아 말기의 어느 슬라브족 순례자가 아니라 신약 성경의 주요 저자, 성 루가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작가의 타계 이후 수집된 경력 초기 작업 노트들에서 복음서 속 의료 기록들을 전사한 문구가 몇몇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각재를 마름질하고 합성수지를 꿰매어 붙이는 과정이 전부인 기초 목공 기법을 영적 외과술의 영역으로 받아들이기라도 했던 걸까? 천 번의 조각과 천 번의 봉합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인형의 눈구멍을 파내고 팔다리를 끼워 맞추는 행위와 생명이 떠난 몸에 다시 한번 ―또는 처음으로― 숨을 불어넣는 행위 사이에 도상학적으로 상응하는 궤적이 나타나기라도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 주위를 떠도는 기체 상태의 영혼이 별안간 붙잡혀 숨통 깊숙이 하강할 때, 좁고 어두운 기도에 울려 퍼지는 연식음은 어떤 모양의 다이어그램을 형성하는가? 몸은 시시때때로 벗어나려고 아우성치는 나선형 회전체를 가두어 두기 위해 설계된 파라볼로이드 모양의 감옥에 지나지 않을 뿐인지도 모른다. 아브람체보의 특산 공예품이자 텅 빈 통으로서 마트료시카 인형들이 어떻게 인체를 조롱하는지 상기하라. 1970년대 후반, 연방의 중앙기관에 고용된 이후 주문 생산된 작품들이 공산 혁명식 테일러리즘의 입김 아래 무거운 덩어리와 앙상한 구동부만으로 이루어졌던 반면, 루카는 원본 인물을 존중하려는 조형적 표현으로서 삭풍에 일그러진 주름 하나하나를 실리콘 피부 위에 간직하고 있다. 무엇보다 루카는 작가가 일생 동안 폐기하지 않은 하나뿐인 인형으로서, 작품 목록 가운데 유일하게 소장품 관리인의 주기가 남아 있었다. 이어지는 괄호 안의 문장이다. (수탁자는 표제를 혼용하거나 임의로 변형하는 등의 오기입으로 보존 정보가 훼손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이전 수탁자들도 작품 번호 1번의 이름이 루카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잘 잊었던 모양이다. 작품은 전고 168센티미터, 전폭 52센티미터, 중량 24.5킬로그램 규격의 전신 인체상 및 부속 요소로 구성된다. 작품을 설치할 때는 상체를 전방으로 약 15도가량 숙여야 하며, 양손 관절 내부의 철사들을 지팡이 머리에 고정시켜 노화된 본체 프레임을 지지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조작해야 한다. 지팡이는 조형물 본체와 일체형으로 결착되어 있으므로, 무리하게 힘을 주어 뽑

  • 신종원
  • 2026-04-01

문장웹진 소설

완벽한 이야기

완벽한 이야기 박진호 푹푹 찌는 날씨 탓에 간이 화장실에서 뿜어 나오는 냄새가 더 지독했다. 화장실 옆 연병장 구석에는 이미 본부 인원 사십 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행보관 얼굴은 평소보다 더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일요일 아침부터 부대 전 인원을 집합시킨 걸 보면 또 무슨 심기가 꼬인 게 틀림없었다. 나는 빠릿하지 못한 이등병 소리를 들을까 싶어 티 나지 않게 슬쩍 무리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위병소에서는 아침마다 식당의 잔반을 수거해 가는 트랙터의 모터 소리가 들렸다. 잔반통의 누린내를 맡은 건지 아니면 이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인 건지 청산이와 계백이가 군견 철장 안에서 짖어 댔다. “범인은 알아서 튀어나와.” 행보관이 손가락으로 간이 화장실 옆을 지나는 콘크리트 배수로를 가리켰다. 거기엔 손바닥 크기만 한 거뭇한 물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덫에 걸린 쥐나 두더지 같기도 했다. 햇빛을 받은 표면이 몸을 뒤틀 때마다 청록색으로 반짝였다. 행보관이 팔을 한 번 휘젓자 유려하게 움직이던 덩어리가 일시에 공중으로 흩어졌다. 수십의 파리 떼에 엉겨 있던 속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저기서 작게 욕이 터져 나왔다. 모양이며 크기며 주위에 널브러진 휴지 조각이며 그건 누가 봐도 사람의 똥이었다. 날아올랐던 파리들이 일사불란하게 다시 하나의 덩어리로 뭉쳤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배수로는 깨끗했으니 모두가 잠든 밤사이 누군가 싸지른 게 틀림없었다. “안 나오면 오전 내내 전부 군장 메고 연병장 뺑뺑이다. 좋은 말 할 때 빨리 나와.” 7월 한여름, 그것도 일요일 오전부터 군장을 돌고 나면 오늘은 물론이고 다음 주 내내 근육통과 몸살로 고생할 게 뻔했다. 하필 오늘따라 주간 근무도 잡혀 있지 않아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다들 정체 모를 범인을 원망하면서도 한편으론 어딘가 켕기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도와 시기의 문제였을 뿐 부대 리모델링 공사가 시작된 이후로 언젠가는 터질 거라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따금 길을 잘못 들어선 사람들은 우리 부대를 지방 도시의 작은 초등학교 정도로 오해하곤 했다. 머드축제로 유명한 도시였고 인근 기차역에서 렌터카를 빌려 해수욕장을 검색하면 서너 번째 추천 경로로 부대 근처 비포장도로가 뜬다고 했다. 호기심에 후순위 경로를 택한 사람들은 어김없이 길을 헤매다 부대로 연결되는 막다른 길에서 차를 세웠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시골 학교의 정취에 취해 담장 너머로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댔는데, 이를 저지하는 게 위병소 앞을 지키는 경계 근무자들의 주요 일과 중 하나였다. 뒤로는 야트막한 야산이, 옆으로는 논과 슬레이트 지붕을 덧씌운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부대였다. 철망을 얹은 담장 안에 연병장과 2층짜리 적갈색 벽돌 건물이 자리 잡고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시골의 작은 분교로 착각할 만했다. 외부인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곳 대대에 있는 오십여 명 모두는 해안 초소에 파견 나간 다른 중대들을 지원하는 행정병들이었으므로 가끔은 군

  • 박진호
  • 2026-04-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